창덕궁 봉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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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창덕궁 봉모당
昌德宮 奉謨堂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777년 (창건)
1857년 (이전 건립)
2004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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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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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



1. 개요[편집]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건물이다.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역대 임금들의 글씨, 어진, 도장, 족보, 고명, 유고, 장지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2. 이름[편집]


'봉모(奉謨)' 뜻은 '모훈(謨訓) 자료를 봉안(奉)한다'이다.# 모훈은 ‘후대 임금들에게 귀감을 줄만한 교훈’이다.


3. 역사[편집]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 후원에다 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규장각을 두었다. 그리고 부용정 서북쪽에 있는 옛 열무정의 이름을 봉모당으로 바꾸고 선대왕들의 유품을 보관했다. 규장각의 규모가 커져서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을 옮겼을 때도 봉모당은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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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의 봉모당. 열무정 시절의 모습이다.
그러나 공간이 좁아 많은 유품을 보관하기 힘들어지자, 1857년(철종 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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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에 나온 현재 봉모당 일대. 붉은색 원 안이다.
1908년(융희 2년) 규장각 기구를 분과별로 나누면서 봉모당 관련 일은 전모과(典謨課)에서 담당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옛 소유재 터에 일본식 건물을 새로 지어 족보 종류를 뺀 왕실 자료를 보관했다.[1] 8.15 광복 이후 1969년 7월에 일본풍 전각을 철거하고 자료를 분산 배치했는데 그 중 일부는 창경궁 장서각에 두었다. 그리고 198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2]으로 옮겼다.#

문화재청에서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부터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편집]


  • 1층[3] 목조 건물로 남향(南向)이다.

  • 장대석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 상부에는 전돌을 깔고 기단 앞에는 댓돌을 3개 두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4]이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두는 용마루 위에 2개, 추녀마루 위에 2개 올렸다.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다. 전체 실내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 정면 외면에는 띠살을 달았다. 교창과 머름은 없다. 나머지 칸 외면은 전부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를 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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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모당 북쪽 책고[5]
봉모당 서쪽과 북쪽에 각각 을 보관하던 책고가 있다. 책고는 맞배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양식이며 출입문과 교창을 제외하고 전부 붉은 나무판으로 벽을 마감했다. 고막이벽 가장자리에는 구멍을 뚫어 환풍 기능을 하게 했다. 《동궐도형》을 보면, 두 책고 다 6칸이었으나, 지금은 아래의 향나무로 인해 복원할때 서쪽 책고가 5칸으로 한 칸 줄었다.


5.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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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모당 향나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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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의 봉모당 향나무. 초록색 원 안이다.
봉모당 마당에 향나무가 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봉모당 마당으로 들어갈 수 없는 관계로, 창덕궁 후원 관람의 마지막 코스로써 볼 수 있다.

수령을 700년 ~ 75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추정이 맞다면 무려 조선 건국 이전부터 살아있는 나무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8년 3월 4일에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한 후 보호하고 있다.

나무의 모양이 일반 나무들처럼 곧게 뻗지 않고, 구부러져있다. 높이는 6m, 뿌리부분 둘레는 5.9m, 가슴높이 둘레는 4.3m이다.[7] 가지 역시 위가 아닌 수평으로 뻗어있다. 동서남북으로 1개 씩 뻗었는데, 동서길이 11.5m, 남북길이 5.5m이다. 단, 북쪽 가지는 현재 죽었고 남쪽 가지는 잘렸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하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손상을 입었다.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 정도 꺾이고 가지 일부도 부러졌지만, 다행히 나무 자체는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부러진 가지는 왕실 제사 때 향피우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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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족보는 새 건물 보각(譜閣)을 지은 후 그곳에 보관했다.[2]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3]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으로 표현한다.[4]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5] 사진 출처.[6] 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문화유산칼럼 〈조선왕조 500년을 함께 한 창덕궁 향나무〉.[7] 원래는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는 6.8m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