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주합루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1769호
창덕궁 주합루
昌德宮 宙合樓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2012년 8월 16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776년 창건

파일:창덕궁_주합루_전경(가을).jpg}}}
주합루[1]
파일:창덕궁_주합루_부용지_전경.jpg}}}
주합루와 부용정[2]
파일:창덕궁_주합루_야경.jpg}}}
주합루 야경[3]
}}}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부용정과 같이 소개한다.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부속 건물
5.1. 어수문
5.2. 서향각
5.3. 희우정
5.4. 천석정
6. 여담



1. 개요[편집]


창덕궁 후원에 있는 2층 누각이다. 남쪽에 부용지부용정, 동남쪽에 영화당, 서남쪽에 사정기비각이 있다. 창덕궁 후원을 관람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건물이다.


2. 이름[편집]


'주합(宙合)' 뜻은 《관자(管子)》에서 유래한 말로, ‘우주(宙)와 합일(合)된다’이다. '시간(宙: 왕고래금(往古來今))과 공간(合: 상하사방(上下四方: 육합六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건물 말고도 주합루 이름을 가진 건물들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대부분 독서, 학문 등과 연관 있는 장소였다. 창덕궁 동궁에 딸린 도서관 승화루의 원래 이름이 소주합루(小宙合樓)였으며 경희궁 동궁에 있는 도서 보관용 누각 이름 역시 주합루였다.


3. 역사[편집]


1776년(정조 1년) 9월에 정조규장각 건물로 처음 지었다.# 규장각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들의 그림, 유교(遺敎), 선보[4] 등을 보관하던 일종의 왕실 도서관인데, 세조 때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숙종 시기에 규장각을 세워 선대왕들의 어제 등을 모셨으나 그 규모가 작았고 오랫동안 존재감도 별로 없었다.[5]

이후 정조가 즉위한 뒤에 들을 견제하고 학문연구하며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한 핵심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폭 개편 및 사실상 부활시키면서 건립한 건물이 바로 주합루이다. 규장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파일:규장각 현판.png}}}
파일:주합루 현판.png}}}
숙종이 쓴 규장각 현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중.
정조가 쓴 주합루 현판
2층으로 지었는데 각 층마다 이름을 다르게 했다. 을 보관하고 사무실로 쓰는 1층은 어제각(御製閣)으로 했다가 숙종의 예를 따라 규장각(奎章閣)으로 고쳤으며, 정책을 논하고 독서하는 2층을 주합루(宙合樓)라 했다. 규장각 현판숙종이 직접 쓴 기존 것을, 주합루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다.

규장각을 지으면서 기능을 나눌 부속건물들이 필요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북쪽에 천석정, 서남쪽에 봉모당과 열고관, 개유와를 지었다. 현재는 이 중 서향각과 천석정만 남아있다.[6]

규장각 제도가 정비되고 관청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1781년(정조 5년) 규장각을 인정전 서쪽의 궐내각사로 옮겼다. 이후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 불렀다. 그래도 주합루를 아주 방치한 것은 아니라서 , 그림, 물품 등을 보관하는 기능은 유지시켰다.

이후 고종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차츰 사용이 뜸해지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군러시아 군대를 격파한 뒤 자축하는 파티(...)와 경부선 철도 부설 기념 잔치를 이 곳에서 열었으며# 대한제국 순종창덕궁으로 이어[7]한 뒤에는 순종이 여기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 일본 화가 사쿠마 데츠소노(佐久間銕園)를 접견하고 관료들과 연회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큰 훼손 없이 오늘에 이른다. 2012년 8월 보물 제1770호로 지정받았다.


4. 구조[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동궐도 부용지 영역.png}}} ||
《동궐도》의 주합루 영역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영역에 있다. 부용지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4방에 건물(부속 건물 제외) 4채가 조성되어있는데 그 중 부용지 북쪽의 높은 지대에 넓은 터를 만들고 세운 것이 주합루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어수문 취병.png}}} ||
취병
동, 서, 북쪽의 담장은 일반적인 벽돌과 사고석으로 쌓았으나, 남쪽 담장은 취병으로 세웠고[8], 취병 가운데에 주합루로 올라가는 인 어수문과 어수문 양 옆에 작은 문 2개를 놓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_주합루_주합루_위에서_본_부용지_전경.jpg}}} ||<width=486>
파일:창덕궁_주합루_주합루_위에서_본_부용지_설경.jpg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왕실 족보.[5] 영조 시절에도 존재했다는 실록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폐지된 건 아닌 듯하다.#[6] 서북쪽의 희우정은 인조 연간에 세웠다.[7] 移御. 임금이사하는 것.[8] 나무로 뼈대를 세운 뒤 뼈대 사이마다 작은 나무나 덩굴 식물을 심어 자라게 하는 형태의 을 말한다.
주합루에서 바라본 부용지 봄(왼쪽)과 겨울(오른쪽) 풍경[9]
2층이란 거대한 규모나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일대에 지은 것을 볼 때, 정조가 이 기관에 어떠한 기대와 어떠한 무게를 두었는지 알 수 있다. 2층에 올라 부용지 일대의 멋있는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업무연구에 지친 관원들을 위해 이 곳에 짓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정부 관청 중 하나일 것이다.


5. 부속 건물[편집]



5.1. 어수문[편집]


파일:창덕궁 어수문.png}}}
파일:창덕궁_주합루_어수문_야경.jpg}}}
어수문[10]
昌德宮 魚水門

주합루 남쪽에 있는 주합루 정문이다. 이름은 (水)과 물고기(魚)란 뜻으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임금신하의 관계도 그만큼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파일:어수문 협문.png}}}
어수문 양 옆의 협문
어수문은 만이 다니는 이며 양 옆에 설치된 작은 문 2개로 신하들이 다녔다. 근데 이 문들이... 어수문과 달리 작아도 너무 작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갈까 말까한 높이인데 이는 ‘저런 자세로 들어가며 겸손함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닐까’라고 후원 가이드가 설명하곤 한다.[11] 당시 조선인 남성 평균키가 161cm라서 그런거 아닐까요?

1칸 너비로 2개의 사각기둥 위에 다포를 얹고 지붕돈화문, 숭례문과 같은 우진각 형태로 꾸몄으며 현판은 세로 형태이다. 자세한 건물의 구조는 이 곳을 참조.


5.2. 서향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서향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3. 희우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희우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4. 천석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천석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봉모운한(奉謨雲漢) : 봉모당의 높은 하늘
서향하월(書香荷月) : 서향각의 연꽃과 달
규장시사(奎章試士) : 규장각에서의 시험보는 선비들
불운관덕(拂雲觀德) : 불운정의 활쏘기
개유매설(皆有梅雪) : 개유와의 매화의 눈
농훈풍국(弄薰楓菊) : 농훈각의 단풍과 국화
희우소광(喜雨韶光) : 희우정의 봄빛
관풍추사(觀豊秋事) : 관풍각의 가을걷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