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단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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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창덕궁 단봉문
昌德宮 丹鳳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
건축시기
창건연대 미상 (1405년 추정)
중건연대 미상 (1608년 추정)


파일:창덕궁 단봉문.png

단봉문[A]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용도
4.1. 조선시대
4.2. 현대
5. 구조
6. 여담


1. 개요[편집]


창덕궁의 궁문이다. 돈화문의 동남쪽에 있다. 창덕궁 남쪽 담의 유일한 이다.


2. 이름[편집]


이름은 당나라 장안성 대명궁의 남문인 단봉문에서 따왔다.

'단봉(丹鳳)' 뜻은 글자 그대로 풀면 '붉은(丹) 봉황(鳳)'이다. 붉은 색은 전통적으로 남쪽을 나타내는 색이다. '봉(鳳)'는 봉황으로, 역시 남쪽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즉, 남쪽 문이라는 뜻이다.

'단봉(丹鳳)'의 다른 뜻으로 '조서를 전달하는 사자(使者)'도 있다.#


3. 역사[편집]


파일:동궐도 단봉문.png}}}
〈동궐도〉 단봉문
언제 처음 지었는지 모른다. 다만, 태종창덕궁을 창건하면서 건립한 듯 하다. 원래는 단순히 남쪽 담장에 있다해서 '남장문(南墻門)'이라고만 불렀다. 그러다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단봉문(丹鳳門)'이란 이름을 지었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4. 용도[편집]



4.1. 조선시대[편집]


단봉문은 정문돈화문을 사사롭게 드나들 수 없는 왕족 및 그 친인척, 그리고 궁인들이 주로 출입한 이었다. 관원들 중에서는 내시부 소속의 중관들이 이용했다.

임금이 일반 선비처럼 변장하고 잠행에 나설 때에도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궁궐에서 사망한 여성들의 시신도 대부분 이 문을 통해 나갔다.[1] 또한, 정조 때 왕비 효의왕후가 아이를 못 낳자 후궁을 간택했는데 그 때 후궁 후보들이 이 문으로 입궐했다. 임오군란명성황후궁녀으로 변장하고 창덕궁을 빠져나갈 때도 단봉문으로 나갔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친국이 열릴 때 죄인이 이 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왔다. 이처럼 단봉문은 궁 안에서 여러 사적인 일이나 그닥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주로 활용하던 문이었다.

그런 만큼 문단속 또한 굉장히 엄격했다. 1476년(성종 7년)에 병조 사령 정연부가 문이 잠긴 후에 제멋대로 단봉문을 열었다가 교수형을 당할 뻔했고#, 정조 시절 숙위대장 홍국영이 한 밤 중에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최측근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조차 단봉문 출입으로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단봉문을 쉽게 이용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4.2. 현대[편집]


20세기 후반까지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던 순정효황후, 이방자, 덕혜옹주 등을 만나러 오는 종친들과 낙선재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출입했기 때문이다.

의민태자(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빈청과 혼청을 낙선재에 각각 2005년 7월과 2007년 7월에 설치했을 때, 단봉문에 현수막을 걸었다.

파일:창덕궁 단봉문 현수막.png

이구의 장례 때 설치한 현수막[A] 양쪽 가장자리의 글자는 각각 '애(哀)', '도(悼)'이고
가운데에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 저하 빈청(大韓帝國 皇世孫 李玖 邸下 殯廳)'이라 적혀있다.
[2]

현재는 창덕궁자동차가 들어갈 일이 있을 때 이 문을 사용한다. 일례로, 화재 진압 훈련을 할 때 소방차가 여기로 드나든다.


5. 구조[편집]


  • 정면 1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고 용마루 위에 용두를 올렸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공포는 초익공으로 익공의 끝을 둥글게 처리한 몰익공 형식이다. 창방과 도리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 문짝은 붉은색 나무으로 중앙 열에 달았다.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위위아래를 초록색 나무 으로 마감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위에는 홍살을 두었다. 단청은 긋기단청[3]으로 입혔다.

  •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이다.


6. 여담[편집]


  •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당시 창덕궁의 모든 문들이 닫혔다. 그 때 제일 먼저 김류가 단봉문을 열고 들어왔으며, 이후 능양군(인조)이 심명세, 구굉, 홍진도 등과 함께 단봉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왔다.##

  • 1882년(고종 19년) 6월에 갑자기 고삐 풀린 이 단봉문으로 들어와 내사복시[4]까지 달렸다고 한다. 다행히 금방 잡아 끌고나가긴 했지만 단봉문을 지키는 군사들은 문을 제대로 못 지켰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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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사진 출처 - 서울스토리.[1] 왕비대비는 제외.[2] 좀 더 큰 글씨의 "(애) 대한제국 황세손 이구 저하 혼청(魂廳) (도)" 현수막이 걸린 사진도 있다. #[3] 가칠단청 위에 만 그어 마무리한 단청이다. 가칠단청은 무늬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이다.[4] 內司僕寺. 조선시대 왕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던 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