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정치사/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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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대략적인 상황
2. 동로마 제국 지배하의 발칸 반도와 에게 해 일대
3. 구 서로마 제국[1]와 그외 지역들
5. 러시아 평원
6. 몰타
7. 기타



1. 대략적인 상황[편집]



5~10세기 사이인 중세 전기의 정치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왕권의 경우 중세 초기 상당히 불안정했다.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의 공화주의 사상, 황위 계승 시스템이 완전하지 않은 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황실이 빈번하게 교체되었고, 북쪽으로 아바르, 슬라브, 불가르, 마자르의 침공을 막아야 했으며, 남서쪽으로 페르시아 제국이슬람 제국, 해상으로 바이킹의 침략을 막아야 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내부적으로 지방 세력들이 할거를 할 움직임 같은 것은 없었다. 이탈리아 북·중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영토를 잃은 것에 불과했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진압되었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중 동로마 황제 자리를 찬탈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반면 구 서로마 제국령은 사정이 달랐다. 서로마 제국령에 점차 들어서기 시작한 게르만족 국가들은 기존의 라틴인 및 그에 동화된 민족들이 피지배층으로 전락되었고, 무엇보다 게르만족들이 지배층인 왕국의 경우 로마 제국의 효율적인 행정 체계가 붕괴된 후였기에 DUXCOMES만으로 행정을 꾸려야 했고, 대부분 문자조차 없어 문맹의 비율이 높았기에 유일하게 식자층을 갖고 있던 교회와 협력해야 했기에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다만 안정적이지 않은 분할 상속으로 나라가 분열되거나 왕위 계승으로 인해 오랫동안 내전이 발생하는 등 혼란기가 많았고, 이러한 혼란을 틈탄 외세에 의해 병합되곤 했다. 그나마 6세기 중반에 들어서 서고트 왕국프랑크 왕국이 제대로 된 나라꼴을 갖추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면이 있었다.


2. 동로마 제국 지배하의 발칸 반도와 에게 해 일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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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 서로마 제국[2]와 그외 지역들[편집]


서로마 제국 옛 영토는 브리튼 섬 남부와 알프스 이북과 이남인 이탈리아 반도,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나눠져 각기 차지 하고 있던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눠져 부족 단위의 왕국을 세웠고, 다시 내부로 여러 씨족으로 나눠져 있었기에 부족장이 왕이 되고, 그 아래의 씨족장들이 귀족 계층이 되었다. 다만 귀족 계층은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때까지 게르만족이 진출하지 않은 옛 서로마 제국 영역 안에 파견되었던 총독이나 로마인이나 로마인으로 동화된 켈트족 유력자들이 잔존하고 있었다[3]. 프랑크 왕국처럼 잔존한 서로마 제국의 잔당 세력을 공격해 흡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 서고트 왕국의 경우 영토 안에 있던 모든 로마인들을 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쨋든 영토의 크기가 당연하게도 작은 소국인 것은 기본이었고, 게르만족 사회의 정치적 관념이 그대로 유지되어, 구체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왕권이 약했고, 무엇보다 게르만족의 오랜 전통이었던 분할 상속법에 따라 왕이 죽은 후 여러 왕자들에 의해 왕국이 여러 갈레로 분할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갈리아 지방을 석권한 프랑크 왕국으로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실질적으로 개국한 이래로 팽창주의 정책을 펄쳐 서고트 왕국을 남프랑스 일대에서 축출하는 등 강력한 모습과는 별개로 왕권이 지방 유력자들의 협력 없이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고, 이때문에 지방분권화로 지방 유력자들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지다가 나라가 분열되다가 몇 년 안가 다시 통합되기는 했으나 다시 분열되어 반백년 동안 단일 프랑크 국왕 자리를 두고 내전이 이어졌다. 다만 프랑크와 동일하게 한 지역 전체를 석권한 서고트동고트, 그리고 브리튼 제도 남부에서 재각기 들어서 칠왕국의 경우 이러한 왕위를 둔 내전은 거의 없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지역들의 경우 현재의 독일의 니더 작센와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는 각각 서로마 제국 붕괴시 이미 자리잡고 있던 작센족들과 프리지아족들이 왕국을 세우다가 각각 8세기 중엽과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유틀란드 반도 및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경우 게르만족의 기원지엿으나 450년대를 전후로 노르드인들만 남아 잇던 상태였다. 이들은 수많은 게르만계 친척들이 몰락해가는 로마 제국을 침략해 막대한 금은을 약탈해오는 것을 보고 혹해 친척들을 따라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로마 제국 북부 국경을 넘나들며 엄청난 부를 뜯어왔고, 결과적으로 상당량의 금이 북유럽으로 유입됐다.

이후 8세기를 전후로 농업 기술의 발달과 온난한 시기를 맞이하면서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겁잡을 수 없이 증가한 인구수로 인해 한정된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식량 공급원을 찾고자 하는 이들과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해 많은 유럽인들로 부터 바이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9세기를 전후로 노르드 내의 군소 집단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현재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왕국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라인 강 서부 일대는 한때 게르만족의 영역이었으나 5세기까지 이어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해 거진 비어진 땅으로 이후 6세기경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인해 서슬라브인들이 정착해 터전을 일구어 가기 시작했고, 6세기 중엽 튀르크계 유목 민족 집단인 아바르인들이 아바르 칸국을 건국했고, 이후에 현제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폴란드에 정착한 서슬라브인들에 의해 모라비아 왕국, 보헤미아 공국, 폴란드 영지 등이 건국되었다.

이후 9세기 중반 아바르 칸국이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끝에 몰락하면서 그 자리에 하자르 족에서 독립한 새로운 유목 집단인 마자르족들이 차지해 바이킹과 함께 한 동안 유럽 각지를 공포로 몰아넣지만 레히펠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더 이상 유럽 각지를 약탈하는 것을 포기, 판노니아에 정착해 헝가리 대공국을 세우게 되다.

또한 8~9세기 작센과 프리슬란트를 시작으로 10세기경에 유틀란드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폴란드와 보헤미아 및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해 어느 정도 기독교화되기 시작했다.


3.1.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알프스 이북 지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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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탈리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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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브리튼 제도[편집]



3.3.1. 잉글랜드[편집]

잉글랜드의 경우 5세기경 초인 410년 로마군이 철수한 후 북쪽의 픽트족의 침공이 두려워 나머지 트족 용병 대장 헹기스트, 호르사 형제를 고용해 함께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으나 곧 주트인들이 비옥한 땅 브리튼 섬을 탐내게 되어 본토 북해 연안 일대에서 대군을 호출해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펼쳤다.

주트린들은 겐트 지방에 켄트 왕국을 세웠고, 이후 같은 게르만계 민족인 색슨족, 프리지아족, 앵글족도 이 정복 활동에 동참해 나가, 섹슨족들은 엘레를 왕으로 하는 서식스를 건국했고,뒤이어 체르디치를 국왕으로 하는 웨식스, 애셀와인을 국왕으로 하는 에식스 등을 건국한다. 앵글로족은 뒤늦게 이겔을 왕으로 하는 머시아의 건국을 시작으로 6세기 중반 위하 왕이 동앵글리아를 마지막으로 노섬브리아가 건국이 되면서 칠왕국이 성립되었고, 한편으로 제일 강력한 세력들이 앵글족과 색슨족이었기에 앵글로색슨 시대로도 불리고 있다.

7왕국 초기는 당대 기록이 없어서 형성 과정이 명확하지 않으며 이들의 경계도 서서히 생겨났다. 잉글랜드인들은 대체로 서로를 정복하기보다는 가장 강력한 왕에게 복종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가장 강력한 종주국 왕을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처럼 브리튼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브레트왈다'(brytenwalda)로 불렸다. 브레트왈다와 종주국은 나머지 왕국들을 명목상 종속국으로 삼았고, 각 왕국들에게 봉토를 수여하는 형태로 각 소왕(小王)들의 봉지를 인정해주는 대신 주종 관계를 유지했지만 브레트왕다의 자리는 대략 100년 단위로 번갈아가며 차지하는 국가가 바꿔져 갔다.

초창기인 5세기에는 남부 서식스로 초대왕인 서식스의 엘라가 최초의 브레트왈다로 언제 브레트왈다로 불렸는지는 불명이나 477년에 세 아들인 퀴멘(Cymen), 울렌킹(Wlenking), 치사(Cissa)와 함께 세 척의 배를 이끌고 퀴멘소라(Cymensora), 즉 지금의 웨스트 서식스의 셀시(Selsey) 해안에 상륙했다. 부자가 켈트 브리튼 인들을 죽이자 원주민들은 Andred's leag이라 불리는 숲으로 달아났다.485년에 엘레는 Mercredesburne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490년에 엘레와 그 아들 치사가 고대 로마 제국의 요새 안데리툼(Anderitum)으로 추정되는 안드레드(Andred) 시를 공격해서 그곳의 모든 자를 죽여 그곳에는 그 뒤로 브리튼인이 남지 않았고, 그의 기록은 여기서 끊겼다. 두번째 브레트왈다로 불린 왕은 웨식스의 3대 왕이었던 체울린으로 그 역시 언제 브레트왈다로 불렸는지 불명이나 556년 브리튼인들과의 싸움인 베란 뷔르그(Beran byrg) 전투에서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 후 568년 위반둔(Wibbandun)에서 체울린과 그의 형제 쿠다(Cutha)가 애델베르흐트와 싸워 그를 켄트로 몰아내고, 두 앨도르만[4]]인 오슬라프(Oslaf)와 크네바(Cnebba)를 죽였다.

577년 데오르함(Deorham, Dyrham)에서 체울린과 아들 쿠드위네(Cuthwine)가 브리튼인들과 싸워 콘마일(Conmail), 콘디단(Condidan), 그리고 파린마일(Farinmail) 세 왕을 죽이고, 글로스터(글레붐), 사이런세스터(코리니움), 바스(아쿠아 술리스)의 세 도시를 빼았았다. 이 전투는 그 이전까지는 육지로 이어져 있었던 둠노니아와 웨일스의 지역적인 분리를 불러왔다.

584년 페단 레아그(Fethan leag)에서 체울린과 쿠다가 브리튼인들과 싸웠고, 쿠다가 전사했다. 체울린은 여러 마을들과 수많은 전리품을 빼앗았고, 화가 나 자신의 영토로 돌아갔다. 592년(기록에 따라 591년) 워드네스베오르게(Wodnesbeorge)[5]에서 브리튼인에게 대패했다. 그 후 체울린은 쫓겨나고 그 해에 죽었다. 그 후 (체울린에게는 조카가 되는) 쿠다의 아들인 체올이 6년을 다스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에는 7세기 초 켄트 왕국이 에델베르흐트의 즉위 기간 동안 기독교로 개종한 후 험버 강 남쪽의 잉글랜드 전역을 지배했고, 이후에는 현재의 서리(Surrey)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그의 사후 펜다 왕 아래 최전성기를 누리는 머시아의 침공에 속국으로 전락했고, 그 사이에.번영한 동부의 패자 동앵글리아의 레드월드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616년 데이라에서 에아드위네가 동앵글리아로 망명해 왔다. 당시 버니시아 왕이었던 애델프리드(Æthelfrith)가 버니시아-데이라 통합왕국에서 데이라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래드왈드는 에아드위네에게 국빈 대접을 하며 매우 환영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애델프리드가 동앵글리아에 상당한 금액을 주며, 에아드위네를 암살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래드왈드는 거절했고, 이후에도 애델프리드가 여러 번 엄청난 선물을 전해줬지만 래드왈드는 전부 거절했다. 오히려 에아드위네와 함께 애델프리드를 정벌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결국 애델프리드는 전장에서 전사했고, 에아드위네가 그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래드왈드는 동앵글리아뿐만이 아니라 노섬브리아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패왕이 되었다.

한편 왕위에 오른 에아드위네는 에델베르흐트 왕 사후 약해진 켄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서부를 향해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의 울러드(Ulaid) 왕국과 전쟁을 벌였고,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맨 섬을 점령했다. 그리고 래드왈드가 616년 사망하고, 동앵글리아가 내전 상태에 빠지자 에아드위네가 브리튼 섬의 패자가 되었다. 627년 노섬브리아는 데이라와 버니시아 양국을 통합하고, 남쪽의 귀네드 왕국을 격파해 브리튼 최강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귀네드의 카드왈론(Cadwallon ap Cadfan) 왕과 연합한 머시아의 펜다(Penda) 왕이 633년 에아드위네를 전사시켜 그의 전성기를 끝냈다.

에아드위네를 폐사시킨 펜다 왕은 노섬브리아를 굴복시켰지만 에아드위네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오수왈데(Osuualde, 오즈왈드)는 머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에아드위네 사후 분열된 노섬브리아를 통일한 후 다시 군사를 일으켜 머시아의 북쪽을 침공했다. 하지만 펜다는 642년 메이서필드 전투에서 승리하고, 오수왈데를 죽이며 노섬브리아를 종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음 왕인 오스위그(Ōswīg, 오스위우)가 재차 침공을 감행했고, 전투 도중 펜다가 전사함에 따라 머시아의 패전으로 끝났다. 하지만 펜다 이후 쾬올프까지 머시아의 국왕들이 브레트왈다를 독점했다.

펜다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페아다(Peada)가 655년 머시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한때 노섬브리아를 압도했던 머시아는 많은 국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656년 페아다가 병으로 사망해,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그가 머시아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하지만 머시아인들은 울프헤레(Wulfhere)를 지도자로 세우고 658년 반란을 일으켜 노섬브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울프헤레가 머시아의 왕위에 올랐다.

한편 이시기는 브리튼 섬에 다시 기독교가 들아온 시기로 앵글로색슨인에게는 뚜렷한 우주관이 없었고 자신들의 종교보다 권위에 복종하고 상속권을 규정하는 등 여러 기독교의 교리가 국가 운영에 더 잘 부합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은 로마 교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켈트족의 교회라는 두 경로로 기독교를 접하여 서로 대립하기도 했기에 663년 결국 노섬브리아 왕 오스위는 회의를 소집해서 로마 교회의 손을 들어주어 로마 교회가 잉글랜드를 종교적으로 통일해야 했다. 무엇보다 앵글로색슨족 항목 내의 기독교로의 개종만 보더라도 왕 외의 다른 게르만족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기에 사회 전반으로의 개종은 한세기는 더 늦은 747년 클로베쇼 종교회의까지 기다려야 했다.

오스위그가 죽자 노섬브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했고, 자연스레 머시아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울프헤레는 노섬브리아를 상대로 복수하기 위해 674년 오스위그의 아들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울프헤레의 뒤를 이은 애델레드(Æthelred)는 679년 트렌트 전투에서 노섬브리아를 격파했다. 이후의 왕들은 대외원정보단 머시아의 정치적, 종교적 기반을 다졌다. 716년에 즉위한 애델발드(Æthelbald)는 남쪽에 있는 두 명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웨식스의 이네(Ine)와 켄트의 위트레드(Wihtred)를 견제했는데 위트레드는 725년 세상을 떠났고, 이네는 왕위를 내려놓은 후 726년 로마의 수도승이 되어서 애델발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경쟁자를 제거한 셈이 되었다. 결국 그는 손쉽게 두 왕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웨식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완전한 지배는 이어가지 못했다.

757년 애델발드는 자신의 호위병들에게 암살당했다. 왕이 사라진 머시아에서는 내전이 발발했고, 오파(Offa)가 모든 경쟁자들을 무찌르고 왕이 되었다. 오파의 치하에서 크게 번영한 머시아는 켄트와 서식스 왕국을 점령했고, 웨식스와 동앵글리아를 거의 속국으로 둘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한 왕국이 되었다. 이후 머시아는 잉글랜드 남부 전역을 지배했고, 절정기에는 험버강에서 영국 해협에 이르러 동앵글리아, 웨식스, 에식스, 켄트 등을 속국으로 삼아 하나의 국가로 만들 정도였다. 오파는 머시아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전체를 발전시켜 처음으로 자체적인 금화를 양산했고, 가톨릭도 크게 발전했으며 카롤루스 대제와의 협상을 통해 브리튼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796년 7월에 그가 죽고 아들도 재위 5개월 만에 죽자 왕국에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이 종식되자 쾬울프(Coenwulf)가 머시아의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무리한 귀네드 왕국 원정으로 국력이 크게 쇠진했고 베오른울프(Beornwulf) 왕 치세에 엘렌둔(Ellendun)전투에서 웨식스의 에즈베르흐트 왕에게 패하면서 전쟁의 결과로 머시아는 잉글랜드 남동부 지역을 모조리 상실하면서 머시아는 웨식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겐트와 서식스 또한 웨식스의 속국이 되었다. 에즈베르흐트는 브레트왈다가 되었다.

839년 에즈베르흐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애셀울프가 웨식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851년 최초로 바이킹의 연합한 대군세가 웨식스 서쪽 해안가로 침략하자 이들을 물리쳤다.855년에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는데, 그동안 웨식스를 차남인 애설볼드가 대리 통치했다.그동안 애셀울프는 여행 중에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왕 샤를 2세의 딸과 결혼했기에 대리 통치를 하고 있던 애셀볼드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졌기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애설울프는 반란을 접했으나 아들과 싸우지 않는 쪽을 택했고, 애설볼드가 웨식스를 계속 통치하도록 놔두며, 자신은 켄트와 다른 동부 지역을 다스렸다. 858년 부왕 애설울프가 사망하자 애설볼드는 웨식스의 왕, 그의 동생 애설버트는 켄트의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그의 왕비가 가진 서프랑크 왕국 공주로서의 지위가 너무 탐이 났기에 애설볼드는 엄청난 일을 감행한다. 왕비, 즉 그의 새 어머니와 결혼한 것이다. 당연히 이에 대한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대주교는 애설볼드가 죽었을 때 그와 그의 통치에 대해 악평을 했을 정도였다. 860년 12월 20일 애설볼드는 도셋에서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애설버트가 이었다.

그의 치세는 내치적으로 평화로워 보였으나 외치로 볼 때는 전혀 아니었다. 바이킹들이 다시 브리튼 섬을 침략했고, 켄트 지역 동부를 개발살내고, 당시 수도격이었던 윈체스터까지 넘볼 정도였다. 그외의 치적으로는 웨식스에 켄트+영국 동남부 지역이 통합된 것 정도였고, 에설버트는 이전 왕들과는 달리 켄트 지역에 따로 제후를 두지 않고 직접 통치했으며, 켄트 지역의 정치 세력도 자신의 세력에 포함시켰다.

865년에 에설버트는 죽었고 그의 왕위는 동생인 애설레드가 이어받았다. 문제는 즉위 첫해부터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바이킹들이 이전과 다른 규모로 연합군을 결성하여 브리튼 섬으로 대대적으로 침략해 온 것이다. 이 사건은 역사상 이교도 대군세(Great Heathen Army)로 알려져 있다. 대외적 원인으로 가장 강력한 바이킹 군벌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브리튼 섬을 털다가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앵글로색슨족의 왕국 중 하나인 노섬브리아의 해안에 좌초했다. 여기서 라그나르는 노섬브리아의 왕인 앨라 2세(Ælla II)와 생애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라그나르는 생애 처음으로 패배하면서 결국 붙잡혔다.

당시 엘라 2세는 라그나르를 죽이면 그의 아들들이 복수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그나르를 구금할 생각이었으나 잡은 포로가 라그나르인지 모르고 있있기에 생포당한 라그나르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이에 앨라 2세는 심문을 위해 그를 뱀굴에 쳐넣었다.

이에 라그나르는 유언으로 "새끼 멧돼지들이 늙은 아비의 죽음을 안다면 어떻게 꿀꿀거릴까?"를 남기며 죽었고, 이사실이 스칸디나비아에 있던 그의 아들을 알게 되면서 이들이 다른 바이킹들에게 라그나르의 복수를 하자고 선동하면서 시작되었고, 무엇보다 이때 스칸디나비아의 척박한 땅에서 하는 농사와 무역으로 급속하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 벅찼기에 차선책인 약탈 또한 약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아예 그동안 약탈하던 지역들을 점령하기로 한 것이었다.

바이킹 군세는 65년 후반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켄트 지방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란 것은 동앵글리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바이킹들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조건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장소와 식량 및 말들을 제공하기로 협의했다.

1년 동안 동앵글리아에 머물다가 866년이 끝나갈 즈음에 라그나르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인 앨라 2세의 노섬브리아로 진군했다. 노섬브리아 군대는 연전연패했고 이에 앨라 2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수도 요크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항전에도 불구하고 867년 노섬브리아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앨라 2세는 산 채로 붙잡혀 라그나르의 아들들에 의해 복수의 피의 독수리형으로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 북부에 더럼을 수도로 에크베르흐트 1세를 괴뢰왕으로 세운 뒤 자신들이 점령한 지방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대리 통치'를 하는 형식을 빌려 통치했다.

노섬브리아 정복이 끝나자 바이킹 침략군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전성기가 끝나고, 계속되는 내전으로 약화된 머시아를 급습했다. 국경을 넘어 남하하여 손쉽게 머시아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머시아의 수도 노팅엄을 점령했다. 웨식스-머시아 연합군은 머시아의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실패했다. 결국 수도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머시아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는데, 바이킹은 이를 받아들여 노팅엄을 돌려주고 노섬브리아로 철수했다.

또한 바이킹 대군은 당시 머시아의 군주였던 버그레드를 정치적으로 압박함과 동시에 머시아 국토를 유린했고, 왕의 무능함에 분노한 이들을 지원하면서 그의 퇴위를 종용했다. 그러면서 바이킹들은 머시아의 왕위를 원하는 세력을 지원했고, 압박을 견디지 못한 버그레드는 로마로 떠났으며, 바이킹들은 체올울프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고 머시아의 동부를 약탈했다. 성공적으로 약탈을 마무리한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로 철수했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괴뢰국 노섬브리아에 일부 정착민들을 남겨 놓은 채 870년 동앵글리아로 돌아가 그해 겨울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동앵글리아의 왕 에드문드는 바이킹들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이들과 체결한 평화협정을 깨고, 이들을 기습했다. 하지만 바이킹에게 역습당해 동앵글리아 군대는 전열이 무너진 채 전멸했고, 심지어 왕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며 왕국이 멸망했다.

이듬해 871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일명 '여름의 대군세'라 불리는 지원군이 얼 바그세크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이들은 동앵글리아 지역을 거쳐서 이번에는 곧장 웨식스 왕국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당시 웨식스는 머시아나 노섬브리아와 달리 강력한 기반을 다져 둔 상태였으며 애설레드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애쉬다운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하고, 군세를 이끌던 얼 바그세크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여름의 대군세는 얼 바그세크의 전사와 함께 애쉬다운 평원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분열되어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을 격퇴한 웨식스군도 상당히 많은 사상자를 냈기에 피로스의 승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킹 지원군이 전멸하자 각지에 정착한 바이킹들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엔 당분간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그리고 동부 머시아 일대에 바이킹들이 정착했는데 이들은 데인(Dane)인, 즉 '덴마크 사람'이라 불렸다. 그 시기 웨식스의 왕이었던 애설레드 1세가 승하했고, 나중에 앨프레드 대왕이라 불리는 그의 동생이 즉위하면서 이교도 대군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애쉬다운 평원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바이킹들은 871년과 872년 동안 런데위치(현 런던)를 점거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이들은 식량이 떨어졌고, 머시아와 웨식스의 포위망을 뜷고 노섬브리아로 철군했다.노섬브리아의 데인족 군대는 2개로 나뉘어져는데 오스켈트, 그리고 언웬드가 이끄는 두 번째 부대는 남하해 웨식스로 향했다. 이들은 캠브리지에 기지를 건설해 그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 876년 월햄을 점령하여 무차별 약탈을 저질렀다. 앨프레드는 이들과 협상하여 웨식스를 떠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불안한 평화가 지속되는 와중 데인족들은 877년 동시에 약화된 머시아를 급습해 스스로의 세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그들은 머시아의 마지막 왕 체올울프 2세를 퇴위시키고, 머시아의 동부를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안으로 병합했다.

또한 기세를 몰아 878년 1월 데인족 군대가 웨식스 북부에 위치한 치픈헴을 기습공격했다. 이곳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877년 12월 앨프레드가 방문한 이래 아직 머물던 참이었는데, 데인족들은 이 지역을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하지만 다행히 앨프레드는 간신히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구트룸이 국경을 이렇게 쉽게 돌파한 이유는 과거 머시아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머시아의 버그레드 왕이 데인족들과 손을 잡은 정적들의 정치적 압박에 퇴외한 사례가 있듯이 데인족들의 강력한 군사적 원조는 왕위 요구자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결국 일부 웨식스의 지방장관들이 권력을 얻고자 묵인 및 협조한 탓에 구트룸은 국경지대로부터 관문들을 재빠르고 손쉽게 돌파했고, 순식간에 앨프레드를 기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트룸은 자신이 지원한 인물들을 웨식스의 주요 인사에 배치시키면서 사실상 웨식스를 괴뢰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구트룸이 간과한 것은 웨식스 왕국의 대다수 지역은 데인인과의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분노한 지역 주민들은 데인족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한 꼭두각시 정부에 충성하기를 거부했다.

한편 앨프레드는 간신히 탈출한 뒤 오지를 전전하며 데인족들에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주변의 지지자들을 소집하고 구트룸과 적대하는 파벌을 불러들이며 새로이 군대를 꾸렸다.인근 지역의 수비군들과 지역 주민들이 협조했고 소수 정예로 구성된 부대가 데인족들과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섬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들어와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은 바이킹들이 무엇보다 애용하는 방식이었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반란 세력들은 수도 인근 지역을 제외하곤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지방도시들과 마을을 다시 휘하에 복속시킴과 동시에 왕위를 재탈환할 군대를 지방에서 끌어모았다. 그는 바이킹과 꼭두각시 왕, 그리고 반역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격했고, 에딩턴 평원에서 구트룸의 데인족 군대와 마주쳤다.

에딩턴 전투라고 불리는 이 격렬한 전투에서 앨프레드의 웨식스군은 바이킹의 방패벽을 격파하면서 대군세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 우바 라그나르손의 군대가 사이누프 전투에서 무너짐으로서 이교도 대군세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878년 구트룸과 우바가 패배함으로써 바이킹이 감행한 대대적인 웨식스 침공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는 정복당했고, 머시아는 동부가 강제로 분할당했다. 878년 이후의 시대를 후대 사람들은 바이킹의 잉글랜드 지배, 즉 데인로(Danelaw)라고 부르게 되었다.

웨식스는 약화된 머시아를 완전히 산하의 종속국으로 두어 대외적으로 머시아-웨식스 vs 바이킹(데인족)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잡혔다. 하지만 분열된 데인족의 세력들과 달리 하나로 뭉친 웨식스 왕국 간의 대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웨식스의 우세로 이어졌다. 동앵글리아의 군주로 구트룸을 삼으며 법과 규율로 그를 통제하는데 성공한 앨프레드는 약화된 데인족들을 하나둘 씩 몰아냈기 시작했다.

이후 앨프레드 대왕은 왕권 확립 + 중앙집권 스타일의 통치체제에 가까운 통치 시스템을 완비하기 시작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이 계속 침략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왕권을 계속 강화시켜 나갔으며, 바이킹과 휴전한 후에는 자신의 지배 영역을 10개 정도의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각각 세속 권력인 장관과 종교 권력인 주교를 파견하였다. 통상적인 봉건주의 국가에서는 각 지역을 토착 세력에게 맡겨 두고, 국왕은 이들로부터 형식적인 충성맹세만 받았는데, 앨프레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세금을 걷으며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심지어 정치권력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임명권과 파견권까지 국왕이 장악하여 종교 권력도 국왕의 손에 넣었다. 후계에게 물려줬다.

또한 지방 행정 조직을 방어 거점인 "부르흐"를 중심으로 재편하였고, 앨프레드 당시 웨식스에는 서른 셋의 부르흐가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르흐 건설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곳은 웨식스의 수도였던 윈체스터로 성벽 안쪽의 로마시대 도로를 무시하고 새롭게 격자로 구획된 도로를 닦았다. 당시 도로 건설에서 측량을 위해 66피트 길이의 자를 이용했는데, 이는 웨식스의 표준 도량형이 되었다.

다만 그의 치세에 봉건제가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는지 데인족들이 지배하는 데인랜드로 불린 동부 머시아와 동앵글리아는 자영농들이 대세였으나 웨식스에서는 영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이 큰 농장(장원)을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소작을 시키는 장원제도가 대세가 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제도 정비와 더불어 문화와 종교의 부흥에도 힘썼는데, 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손잡고, 각지에 주교를 파견하는 등 가톨릭 신앙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큰 산 하나만 넘어가도 말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지역별 이질성이 강했던 고대 영어의 표준화를 시도했고, 기록을 위한 영문법을 정비하였다. 앨프레드 이후 웨식스 왕국에서는 기록문화가 정착되어 많은 문헌을 남겼다. 그의 시기에 라틴어로 쓰인 책 다수가 영어(고대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보에티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 등 라틴 저술가들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영국에 소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본인 스스로도 라틴어를 배웠으며, 자서전을 포함한 몇몇 저술을 남겼고, 그가 직접 쓴 문헌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앨프레드는 데인족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머시아를 되찾고자 했던 머시아의 애설레드를 자신의 딸인 애설플레드와 결혼시켜 혼인 동맹을 맺고 머시아를 웨식스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했으며, 890년대 이후로도 데인로에 정착한 데인족 부대와 바다를 건너온 소규모 데인족 부대들이 침공하는 등 웨식스와 머시아는 끊임없이 데인족의 공격에 시달렸다. 앨프레드 대왕 또한 4년 동안 잉글랜드 전역을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쫓겨다니기도 했다. 이때 후계자인 대 에드워드가 데뷔하면서 군재를 쌓으면서 바이킹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유입되는 대규모 침공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웨식스는 거의 대부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고 점차 힘의 균형추는 웨식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899년 앨프래드 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대 에드워드가 즉위하였지만 애설레드 1세의 아들들이자 그의 사촌들인 애설월드(Æthelwold)와 애설헬름(Æthelhelm)이 반발했다. 이중 애설월드는 왕위를 뺏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도셋의 윔본을 점령했다. 뭐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던 대 에드워드는 당연히 군대를 이끌고 애설월드를 정벌하려 나섰다. 그가 윔본 근처에 도착하여 공격을 준비하자, 애설월드는 한밤중에 윔본을 탈출하여 노섬브리아로 갔다. 그는 그곳의 데인족에 합류했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애설월드의 반란을 제압한 대 에드워드는 900년 6월 8일 대관식을 올려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다.

901년, 도망갔던 사촌 애설월드가 함대를 이끌고 에식스로 돌아와 동앵글리아의 데인족들에게 봉기하라고 꼬드겼다. 이듬해(902)에는 그가 직접 머시아와 북부 웨식스를 침략했다. 대 에드워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동앵글리아를 싹 쓸어버렸다. 그 직후, 대 에드워드의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독자 행동하던 대 에드워드의 켄트족 병력과 적군인 데인족 군대가 한판 붙었다. 데인족이 이 싸움에서 이겼지만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와중에 반역자인 애설월드와 동앵글리아 왕 구트룸 2세도 죽었다.

그 후로도 몇 년간은 잉글랜드 북부와 웨식스는 계속해서 사이가 나빴다. 909년에는 대 에드워드쪽에서 노섬브리아를 집적대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노섬브리아 데인족은 이듬해 머시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머시아와 웨식스 연합군에 걸려들어 참패를 당했다. 그 후로 데인족은 험버 강 이남으로는 침략하지 않았다. 대 에드워드는 곳곳에 요새를 쌓았는데, 이들은 모두 동일한 규격을 따른다는 특징이 있었다.[1]

대 에드워드는 머시아, 동앵글리아, 에식스에 대한 웨식스의 지배력을 넓혀나갔다. 런던과 옥스포드 및 이들을 둘러 싼 옥스포드셔와 미들식스 지역도 합병했다. 데인족이 점령한 땅을 정복했고, 머시아의 지배자였던 그의 누나 애설플래드가 죽고 난 후 그녀의 후계자였던 질녀 앨프윈을 웨식스로 데려와 권력을 빼앗고, 머시아를 직접 통치했다. 918년 말에는 애설플래드가 죽어서 못 다했던 '데인로의 다섯 도시' 정복을 이어서 끝마쳤으며, 그에 따라 머시아 전체가 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대 에드워드의 재위 말기에는 스코틀랜드인, 웨일즈인, 데인족 모두가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군사/정치적인 면에서 상당한 활약을 한 대 에드워드였지만, 다른 분야에서의 그의 업적은 뚜렷한 것이 별로 없다. 그가 교회를 재조직하고 새로운 교구들을 만들긴 했지만 신앙심이 그다지 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 활동이 미흡하다고 교황이 정식으로 비난할 정도였다. 924년 7월 17일, 대 에드워드는 웨일스와 머시아가 연합한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던 중 사망했고, 앨프워드가 즉위했으나 불과 16일만에 죽으면서 애설스탠이 즉위했다. 즉위 직후인 925년 노섬브리아의 요크 왕국은 예외로서 아직도 바이킹이 점령하고 있었다. 926년, 애설스탠은 그의 누이와 요크 왕국의 왕인 시흐트릭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를 기회로 애설스탠과 시흐트릭은 서로 침략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을 돕지도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927년에 시흐트릭이 죽자 애설스탠은 이를 기회로 삼아 요크 왕국을 침략했다. 그는 요크 쪽 저항군을 가볍게 발라버린 후 요크를 점령했고, 내친 김에 노섬브리아의 왕위까지 가져가 버렸다. 이로써 애설스탠은 잉글랜드 통일에 가까우면서도 전체에 지배력을 가지게 되자 국호를 웨식스에서 잉글랜드로 변경해 첫 번째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그는 서쪽 웨일즈 지역에 대해서도 강한 지배력을 가진 왕이었다. 웨일즈에 대한 지배력은 이미 아버지와 고모가 확립해 놓았고, 애설스탠이 이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웨일즈의 왕은 애설스탠의 지배를 받았고, 무거운 조공까지 웨일즈에 부과되었지만 웨일즈는 애설스탠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따라서 애설스탠 재위 기간 동안 웨일즈와 잉글랜드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애설스탠은 그가 새로 지배하게 된 잉글랜드 북부, 즉 노섬브리아에서 귀족 세력과 공존하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던 그답게 점령지의 성직자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나누어 주었고, 요크 왕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심복이었던 요크 대주교에게는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여 넘겨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부인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고, 북부 왕국들은 차라리 아일랜드 더블린 왕국의 바이킹들과 연합하고 싶어했다. 애설스탠이 잉글랜드 남부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에 비해 잉글랜드 북부에서 그의 지배력은 매우 약했다.

934년 애셀스턴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네 명의 웨일즈의 소왕 네 명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공격은 육지와 해상 양면에서 이루어졌으며 둘 다 성공적이었고, 애설스탠은 스코틀랜드 깊숙히까지 털어먹었다. 전쟁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 결과 또한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같은 해 9월에 버킹엄에 돌아와 있었고, 거기서 스코틀랜드 왕인 콘스탄틴은 신하 왕으로서 법령 공표에 입회했다.

934년 올라프 구트프리트손이 바이킹족의 왕국인 더블린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스코틀랜드 왕인 콘스탄틴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스코틀랜드와 바이킹의 연합을 강화했다. 937년, 올라프는 아일랜드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고, 곧 옛 바이킹 영토인 요크 왕국의 재건에 나섰다. 올라프 혼자 대적하기에는 애설스탠이 너무 강했으므로 동병상련하던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과 연합하여 웨식스와 대적했다. 그해 가을에는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목적으로 다른 스코틀랜드 왕국까지 끌어들였다.

이들 연합군을 가을에 기습해 왔고, 애설스탠은 그렇게 큰 규모의 공격이 다 늦은 가을에 이뤄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애설스탠의 초기 대응은 느렸다. 애설스탠이 웨식스와 머시아의 병력을 소집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는 동안, 연합군은 잉글랜드 북서쪽을 털어먹었다.

하지만 양측이 맞장 뜬 브루넌버 전투에서 애설스탠이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연합군은 붕괴되었다. 올라프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도망쳤고,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은 아들을 잃었다. 승자인 잉글랜드군도 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애설스탠의 두 조카와 대 에드워드 왕의 동생인 애설위어드의 아들들도 죽었다.

한편 애셀스탠은 내치에도 주력했는데, 그는 할아버지 앨프레드 대왕과 아버지 에드워드의 정책을 고스란히 승계해 대 에드워드 시절의 작고 비공식적이었던 신하들의 모임은 애설스탠의 재위기간 동안 크고 정식화된 회의로 확장되었다. 애설스탠은 각 지방의 주교와 지방의 파견 관리, 지방의 권력자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했는데, 이는 잉글랜드 통일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애설스탠은 명확히 자신의 근거지를 정하지는 않았으나, 주로 웨식스에 머무르며, 지방의 유력 인사들을 내각으로 불러 모으는 방식으로 지방을 통치했다. 고정된 근거지가 없었던 것은 원래 동로마 제국을 제외한 유럽 본토의 군주국들도 마찬가지로 앵글로색슨족 또한 수도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의 궁정은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열렸고, 내각 모임 또한 이곳 저곳에서 열리곤 했었다.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에서 최초로 자국어로 된 법률을 공표한 민족일 정도로 법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는데, 애설스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법 제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10세기 왕들이 만든 법들 중 가장 많은 내용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법은 애설스탠이 만든 법이다.

요크를 정복하고, 브리튼의 다른 왕들을 복속시킨 후에는 새로운 주화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는 등 화폐 보급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화폐 제조가 중앙에서 관리되지 못하고,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앵글로색슨에게는 교회와 정부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교회의 유력자들은 왕정 회의나 왕실 행사에 참석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 동안 이러한 관계는 더욱 더 긴밀해졌다. 애설스탠 자신 또한 교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애설스탠은 기독교 유물을 수집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선물과 봉헌도 자주 했고, 아예 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바다 건너 유럽 대륙의 교회와 관계를 맺는 데도 힘을 쏟았다.

애설스탠은 교회의 학문을 부활시키려던 그의 할아버지 앨프레드 대왕의 노력을 계승했다. 당시 교회 및 교회에서 주도되던 학문은 침체기에 빠져 있었는데, 애설스탠은 이의 부흥을 추진하여 책을 인쇄하고 유통시켰다. 애설스탠은 그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기독교 관련 학문의 증진으로 유명했다.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 종교 유물의 수집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듣고 각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궁정을 방문했다. 그의 학문 증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그것에 대해 칭송하는 많은 시가 지어져서 후대로 전해졌다.

또한 유럽 본토의 왕국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는데, 웨식스 왕조 후기의 웨식스 왕들은 유럽 왕들에게 성공의 상징이었다. 920년경의 유럽 대륙의 왕가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내분을 겪고 있었다. 각종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애설스탠은 잉글랜드에서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더 나아가 전쟁만 잘하는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카롤링거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웨식스 왕정은 카롤링거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관계는 애설스탠의 증조할아버지인 애설울프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의 왕의 딸과 결혼하고, 그들이 낳은 아들이 다시 앨프레드 대왕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인 에아드기푸도 서프랑크 왕국의 왕인 단순왕 샤를 3세와 결혼했다. 애설스탠의 재위 기간 중에는 유럽 쪽과 결혼을 통한 동맹이 강화되었다. 애설스탠은 여자 친족들이 자신의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을 꺼렸고, 따라서 그들은 주로 유럽 쪽으로 시집갔기 때문이다. 그의 누이들은 모두 유럽의 귀족들과 결혼했거나 아니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애설스탠의 가장 중요한 유럽 동맹은 새로 떠오른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왕조였다.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10세기 초반에 몰락했고, 새로 등장한 오토 왕조의 왕 하인리히 1세는 세력 기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하인리히 1세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들을 카롤링거 왕가의 여자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꿩 대신 닭 삼아 웨식스 왕가가 혼처로 물망에 올랐고, 하인리히 1세는 아들인 오토, 즉 훗날의 대제 오토 1세를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와 결혼시켰다.

애설스탠은 당시 관습에 따라 유럽의 왕자들과 양아버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이 권력에서 쫓겨나면 유럽 대륙으로 병력을 보내 잃었던 영토나 왕위를 되찾게 도와주었다. 예를 들어, '미발왕' 하랄 1세의 뒤를 이어 '피도끼왕' 에이리크가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궁정에 머무르고 있던 미발왕 하랄 1세의 막내아들인 하콘 1세가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물론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고 실패한 원정도 있었다.

939년 애설스탠은 마지막 브래트왈다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에드먼드 1세가 왕위에 오른다. 왕위를 계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프 3세 구트프리트손이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중부의 미드랜즈를 침략했다. 그러나 942년에 올라프가 죽자 에드먼드 1세는 미드랜즈를 되찾았고, 944년에는 노섬브리아까지 되찾았다. 945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스트라스클라이드 지역을 정복했으나 말컴 1세와 군사 지원에 대한 협약을 맺고 그 지역을 넘겼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왕위에 개입하기도 했다. 프랑크 공작에게 사신을 보내 프랑스의 루이 4세의 복위를 주장하여 복위에 도움을 주었다. 946년 5월 26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외유 중이던 에드먼드 1세는 도적의 칼에 찔려 죽었고, 두 아들인 이드위거와 에드거는 어렸기에 그의 왕위는 동생 이드리드가 계승했다. 이드리드가 즉위할 당시 노섬브리아는 처음에 이드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1년 후인 947년 노르웨이 국왕이었으나 추방된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를 왕으로 삼아 독립해버렸다. 이에 948년 이드리드는 군대를 이끌고 노섬브리아를 침략하여 전투에서 승리했고, 노섬브리아를 잉글랜드에 복속시켰다. 950년 혹은 951년에 노섬브리아는 올라프 시그트뤼그손을 왕으로 삼으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954년에 노섬브리아 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다시 복속되어 이드리드를 그들의 왕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노섬브리아는 7왕국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죽기 전에 소화기쪽으로 심각한 병을 앓다가 955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형 에드먼드 1세의 아들인 이드위그가 왕위를 이었다.

왕위에 오른 이드위그는 전형적인 범군으로 주목받을 만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토지를 너그럽게 잘 나눠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956년 한 해에 나눠 준 토지만 해도 앵글로색슨의 토지 중 5%를 차지할 정도였다.

통치기간 내내 가족과 귀족들, 그리고 특히 교회 세력과 대립했다. 교회 세력은 오도 주교와 성 던스턴이 주축이 되어 갈등을 빚어 왔는데, 점차 던스턴의 추종자를 중심으로 세력이 커져갔다. 이들은 이드위그의 이복동생인 에드거 1세를 지지했다. 그리고 평소 세금 징수에 불만이었던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의 귀족들도 957년을 기점으로 에드거 1세 쪽으로 붙었다. 그러나 내전은 피하고 싶었던 귀족들은 템즈 강을 경계로 북쪽은 에드거 1세가 가져가고, 남쪽의 웨식스와 켄트는 이드위그가 계속 통치하는 선에서 합의하였다.

959년, 이드위그는 만 18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왕위는 에드거 1세가 이어 받는데 바스에서 거행된 그의 대관식은 이후 영국 왕실의 대관식에 본이 되었다. 에드거 1세는 별칭은 평화왕(the Peaceful). 그가 통치한 시대가 별다른 외침없이 평화가 지속된 시대였기 때문으로 그의 성격은 평화적인 것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강력한 통치력을 보이곤 했고, 이는 평화적인 상태로 이어졌기 때문으로 즉위 후 966년에서 970년 바이킹들이 각각 웨스트모어랜드와 앵글시를 습격했고, 960년에 웨일스 귀네드에 왕위 계승을 두고 분쟁이 벌어지자 귀네드 왕국을 공격했고, 970년 스코틀랜드 국왕 케네스가 노섬브리아를 공격했다.

에드거 1세는 데인족의 거주 지역인 데인로를 다시 정복하고 데인로의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법적, 사회적 관습을 허용했다. 그는 이를 통해 데인족과 앵글로색슨과의 융합을 시도했고 데인인과 색슨인 모두에게 왕으로서 인정받았다.다만 이때까지 데인로의 바이킹들은 개종이 안된 상태였기에 성직자들에게 비판을 받앗다.

상술한대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앵글로색슨 문화와 예술이 뒤늦게 꽃을 피웠다. 지방정부 또한 에드가 왕의 통치 이래로 발전했다. 샤이어리브들이 엘더맨(Ealdorman)[6]의 수행했던 임무를 위임받았을 수 있게 하는 등의 행정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는 오랫 동안 엘더맨들의 권력이 왕을 압도했고, 에드거 1세때가 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인 던스탄은 그의 주요한 자문관이었다. 던스탄의 지지 아래 수도원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수도원 개혁운동은 그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긴밀한 역할을 했다.

베네틱트 수도원의 진정한 정신은 10세기 초기 잉글랜드에서는 거의 소멸되었다. 비드가 오래전에 통탄한 것처럼 수도원은 절제가 사라지고 세속적인 생활양식으로 기울어졌다. 영국 교회의 재건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수도원 개혁운동을 진행시킬 수 있는 모델과 수도원 건축 자금이었다. 그는 유럽의 대개혁운동을 본받아 수도원 개혁운동을 추진했고, 건축 자금은 에드가 왕과 그의 귀족들이 마련했다. 개혁운동의 추진 세력은 세 명의 위대한 성직자들인 던스탄, 에델월드, 오스왈드였다.

그러나 수도원 개혁운동의 특징은 영국의 수도원 개혁이 유럽의 개혁운동을 모델로 했을지라도 이 개혁은 명백히 영국적이라는 것이다. 유력한 성직자들은 후기 앵글로색슨 왕들이 가장 존경하던 조언자들이었고, 교회 개혁은 에드가 왕에게 신성한 평판을 더해주었다.

973년, 그가 서른 살이 돼서야 치른 대관식은 왕에게 사제와 같은 신분을 부여하며, 왕을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지위에 오르게 했다. 서른 살은 교회법상 사제직 서임을 위한 최연소 나이였다. 예식의 절정은 대관식이 아닌 성유를 부어 성별시키는 의식이었다. 의식을 통해 그는 사제의 권위를 부여받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이는 상술한대로 후대 영국 왕실의 대관식의 본이 되었다.

또한 화폐 개혁을 진행했는데, 973년경 에드가 왕은 새로운 주화인 페니를 도안했는데, 이 주화는 노르만 정복 이후까지도 오랫동안 영국 통화의 기초로 남아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필적할 수 없는 에드가 왕의 통제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975년 7월 8일, 에드거 1세가 죽었다. 후계로는 두 아들이 있엇는데 전부 나이가 어렸고, 이중 장남인 에드워드는 나이가 12세인데다가 무엇보다 공인하기는 했으나 사생아였다. 순교왕 에드워드가 즉위했지만 왕위 계승에 대한 다툼이 있었다. 에드워드가 비록 맏아들이었으나 평소 아버지가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정통성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일부 귀족들은 그의 이복동생인 에설레드를 후계자로 밀었다. 게다가 당시의 세 번째 아내이자 정실부인이었던 앨프스리스가 애설레드 2세의 친모였고, 그녀는 당연히 애설레드를 왕으로 밀었다. 하여간 에드워드는 대주교들 및 그들의 추종자들의 힘을 빌어 975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권력 기반이 약했고, 게다가 나이까지 어렸던 에드워드는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었다.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은 선왕인 에드거 1세가 베네딕토회에 하사했던 토지도 도로 빼앗는 등, 왕의 이름을 빌어 권력을 휘둘렀다.

결국 978년 3월 18일, 계모 앨프스리스를 방문하던 중 암살되었고, 에설레드가 애설레드 2세로 즉위한다. 그리고 2년뒤 바이킹들이 다시 잉글랜드 해안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원래 노르만족은 노르드계 바이킹이 프랑스의 북부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하여 프랑스화한 사람들이었는데, 당시까지도 노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덴마크인들과 동질감을 갖고 있었고, 덴마크인과 색슨족의 전투가 잦아지다 보니 색슨족에 적대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덴마크인들의 침략은 점점 거세졌고, 991년8월에 대규모의 데인족 군단이 잉글랜드의 남동쪽에서 전투를 개시했다. 이때 데인족은 잉글랜드 에섹스의 블랙워터 강 옆에 있는 몰든 지역에서 그 지역의 군대장관 비르트노쓰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앵글로색슨족의 대패로 끝났지만 이들의 용맹은 고대 영시 몰던 전투(The Battle of Maldon)로 불멸화되었다.

이 전투 후 캔터베리 대주교 시게릭과 남서 지역의 군주들은 에델레드 왕에게 전쟁하는 대신 데인족 바이킹들에게 돈을 주고 달래라고 조언했다. 에델레드는 데인족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평화를 사기 위해 매년 그들에게 10,000파운드의 은을 지불했다. 그러나 이 돈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비르트노쓰를 무찌른 데인족 군대는 991년에게 993년까지 계속해서 다시 영국의 해안을 약탈했다. 심지어 994년에 데인족의 함대는 템스 강 어귀로 방향을 틀어 런던을 향했다. 이 전투에서 에델레드 왕은 그 함대의 지도자인 올라프 트리그바슨과 만나 협상에 돌입했다.

에델레드 왕과 올라프는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족의 회사와 영국 정부 사이에 협정을 맺었지만 그 관계 또한 갑자기 단절되었다. 에델레드 왕은 또다시 돈으로 그들을 달랬다. 이 과정에서 올라프는 세례를 받고 다시는 잉글랜드로 쳐들어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노르웨이로 떠났다.

실제 올라프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바이킹 군대의 잔존 세력은 에델레드 왕의 용병으로 계속 잉글랜드에 남았다. 997년 데인족의 약탈은 다시 시작되었고 데인족에게 지불하는 돈, 이른바 데인겔드는 간간이 지불이 거절되기도 했지만 계속 평화와 교화를 조건으로 잉글랜드인들의 혈세로 지불되었다.


3.3.2. 그외의 지역들[편집]


3.3.2.1. 스코틀랜드아일랜드[편집]

이밖에도 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서도 각각 부족 국가가 세워졌고, 이중 스코트랜드 지역에서 9세기 중엽까지 고산지역을 픽트족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남부의 평지는 노섬브리아 왕국이 차지 하고 있었다. 서부에는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게일인 이주자들의 연맹 왕국 달 리아타(Dal riata)가 존재했는데, 스코틀랜드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왕 코이나흐 언 퍼르버서흐 막 알핀(키나드 1세)이 이곳의 왕이었다. 과거에는 픽트인들이 키나드 1세의 아버지 알핀 2세를 죽였고 키나드는 이에 대한 복수로 픽트랜드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정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트랜드 두 곳의 왕위를 얻은 것은 단순히 부모에 의한 상속일 뿐이었을 거라고 여겨진다.[7] 달 리아타는 키나드의 치세 이후로 픽트랜드에 흡수되었고, 이후의 군주들은 한동안 모두 픽트인의 왕을 칭했다. 현재는 게일인의 달 리아타와 픽트인의 픽틀랜드가 게일인 위주로 점차 통합되었다고 보며,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틀랜드 두 곳의 왕이 된 것이 그 시작으로 여겨진다.

키나드 1세의 치세는 중세 초의 여러 왕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얼룩지었다. 삭소니아에 6번 침공했다고 하는데, 이 삭소니아가 독일 북부의 작센 지방을 일컫는지 잉글랜드의 색슨족을 일컫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스코틀랜드 최남단에 있는 멜로스를 침공하고 던바를 불태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때 잉글랜드 북부까지 침공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바이킹들의 공세에 시달렸고, 심지어 내륙까지 바이킹이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이당시 스코틀랜드 또한 바이킹의 약탈에 시달렸다.

858년 키나드 1세가 죽고 동생인 돔날 1세가 즉위했다. 돔날 1세는 스콘-퍼스의 근교에 있는 포테비엇에서 게일인들이 처음으로 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이 법의 이름은 '아드 파인드의 법'으로, 돔날 1세의 증조부 아드 막 오하드의 이름을 땄다. 아드 파인드는 아드 막 오하드의 별명으로, 게일어로 하얀 아드라는 뜻이다. 이 법은 현재 실전됐지만, 기리크나 카우산틴 2세 치세의 법률을 참고해 주로 교회의 특권에 관한 법으로 추정하고 있다.

862년 돔날 1세가 죽자 키나드 1세의 아들인 카우산틴 2세가 왕으로 즉위했다.불행히도 그의 치세는 즉위 3년에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군세에 휘말려야 했다. 866년, 고드프레드의 아들 아믈리브와 외슬이 하이랜드 포트리우에 상륙해 많은 조공과 포로를 획득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카우산틴에겐 천만다행히도, 이듬해에 악재가 터져 아믈리브는 아일랜드로 물러갔다. 우선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이자 키나드 1세의 사위이기도 한 아드 핀들리어흐가 군사를 내어 바이킹 점령지를 습격해 여러 마을과 항구를 파괴하는 등 처남을 도왔는데, 이는 외슬이 자신의 아내를 탐했던 이유도 있었다.덕분에 아믈리브는 870년까지 브리튼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아일랜드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870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일랜드를 진정시킨 아믈리브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이번엔 브리튼인들의 국가인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을 공격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군사 요충지 덤바튼을 4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점령했다. 여기서 카우산틴은 어부지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패배로 권위를 상실한 어스트라드클라이드 국왕 아르트갈은 키나드의 아들 카우산틴의 사주로 살해당했다. 아르트갈에 사후에 왕위에 오른 이는 카우산틴의 매부 룬이었다. 이를 통해 픽트 왕국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까지 영향권에 넣는데 성공한다.

이후 871년 혹은 872년에 아믈리브가 다시 한 번 픽트 왕국을 침공하자 카우산틴은 맞서싸워 874년에 아믈리브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아믈리브의 원정을 돕곤 하던 아믈리브의 형제 이마르도 873년에 죽으면서 일단 대규모의 바이킹 침공은 진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875년 노섬브리아동앵글리아, 머시아의 동부를 점거하던 바이킹들이 군대는 2개로 나눴는데 이중 할프단이 이끄는 군대는 북상해 북쪽의 픽트족과 스코틀랜드를 공격해 왔다. 할프단의 군대의 진격로에 픽트 왕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카우산틴 치세 최대의 위기였는데, 수도 스콘 근교의 달러에서 픽트 왕국군은 할프단의 군대에게 거대한 학살로 기록될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기까지 한다. 이는 픽트 왕국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결국 877년 카우산틴 1세는 이 군대와 맞서 싸우던 중 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왕위는 동생인 아드 막 키나다가 이었으나 돔날 1세의 아들을 자칭한 기리크 막 둥갈이 일으킨 반란에 1년만에 내전에서 패해 죽었다.기리크 막 둥날에 대해 쇼러스 보허넌과 같은 역사가들은 그를 대왕이라고 부르며 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절반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이유는 기리크에 대한 기록이 잉글랜드 쪽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치세기가 동시대 잉글랜드에선 이교도 대군세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것은 스코트인이 아니라 데인족 바이킹이었다.

기리크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의 국왕인 오하드 막 룬과 공동으로 통치했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둘의 관계를 친족 관계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885년 성 키리쿠스의 축일에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던 관습 상 왕권의 약화에 일조했으리라 추측되며 889년 카우산틴 1세의 아들인 돔날 2세에게 왕위를 빼았긴다.

돔날 2세의 치세는 그의 아버지 카우산틴 1세처럼 바이킹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되는데, 이는 유명한 하랄 1세 하르파그리, 즉 노르웨이의 왕 미발왕 하랄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랄 1세가 노르웨이를 정복한 직후 그의 과세 정책 등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대규모로 노르웨이를 탈출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오크니 제도, 옛 달 리아타 땅 등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에 하랄 1세는 이들을 잡아족치기 위해 이 지역들로 원정을 나간다. 즉, 픽트 왕국은 가뜩이나 기존에 넘어와있던 이교도 대군세의 후예인 데인인들도 버거운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나 다름없는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픽트 왕국은 서쪽으로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왕국, 남쪽은 잉글랜드의 데인로 왕국, 북쪽으로는 반하랄 노르웨이인, 동쪽으로는 하랄 1세에게 시달리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픽트 왕국은 약탈당했으나, 돔날 2세는 분투해 이니시브솔리안에서 바이킹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900년에 살해당하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그가 900년에 오피둠 포더, 현대의 둠노타르 성에서 데인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버찬의 예언'은 그가 게일인[8]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자는 아드 막 키나다의 아들인 카우산틴 2세였다. 그의 치세에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은 904년 픽트 왕국군이 아일랜드 더블린 왕국에서 출병한 더블린 국왕 이마르와 그가 이끄는 데인인 군대를 스트래턴에서 맞닥뜨려 크게 이기고 국왕 이마르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906년엔, 수도 스콘에 있는 '믿음의 언덕'이라는 곳에서 주교 첼라흐와 만나 신앙, 법, 규율, 그리고 라틴어로 pariter cum Scottis라고 하는 것 네 가지를 수호할 것을 결의했다. 이 partier cum Scottis가 무엇인지는 여러 추측이 있으나 공통적으로 게일인의 법 또는 게일인의 관습을 의미하며 스코틀랜드의 기독교화와 게일화를 위해 왕과 교회가 손잡은 것이다.

이 만남의 또 다른 의미는 시기상 첼라흐 주교 및 대다수의 스코틀랜드 성직자는 기리크의 치세 당시에 임명되었거나 당시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과 카우산틴 2세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카우산틴 2세는 동시기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왕국의 종교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 내정에 도움을 받게 됐다.

그는 바이킹들과도 전쟁을 치뤘는데 그가 즉위한 시기인 10세기 초반은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는 옛 바이킹들의 후예 데인인들이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우고 쇠락기로 접어들 때였다.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와 그 뒤를 이은 시트릭 케흐[9]는 노섬브리아와 맨 섬, 아일랜드의 바이킹들을 다시 통합해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을 위협했는데,911년 즈음에 머시아 영주 애설플래드가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북벌을 감행할 때 아일랜드인들과 북쪽 군주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데, 데인인이나 아일랜드인이 아닌 북쪽 군주가 카우산틴 2세 밖에 없으므로 동맹에 가담해 바이킹에 대항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918년, 노섬브리아의 잉글랜드인 왕 엘드레드 1세가 왕국 남쪽의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가 이끄는 군대에게 쫒겨 스코틀랜드로 도망쳐오자 카우산틴 2세는 그를 도와 남하해 현대의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지대 동쪽인 코브릿지에서 라그나르와 크게 싸웠다.

이전투에서 라그나르는 군대를 네 부대로 분산해 배치했는데, 스코틀랜드군은 세 부대를 격파했으나 라그나르가 친히 이끄는 네 번째 부대에게 매복당해 승리를 놓쳤다고 한다. 왕이나 모마어[10]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전투의 흐름은 완전히 스코틀랜드가 다 이긴 전투로 카우산틴 2세의 근소한 승리로 기록하나, 결국 엘드레드의 복위를 이루지 못한 카우산틴 2세가 패배한 전투라 볼 수 있고 실제로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는 이 전투를 통해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918년에 반 데인인 동맹을 주창한 머시아의 영주 애설플래드가 죽고 그녀의 남동생 웨식스 왕 대 에드워드가 조카딸로 부터 머시아를 빼앗았는데, 그는 918-919년 즈음에 누나가 진행하던 데인인의 주요 다섯 도시, 더비,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포드의 정복을 위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920년에 라그나르 및 주변 국가들의 국왕들을 만나 조약을 맺고 이 왕들에게 명목상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노섬브리아-더블린의 왕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카우산틴 2세가 이 조약에 참여했다.

이후 카우산틴은 대 에드워드의 아들인 애셀스탠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는데, 이 둘의 관계로 인해 근세까지 악연으로 점철되었다.

대 에드워드의 사후 웨식스-머시아의 왕위를 물려받은 애설스탠은 더 큰 야망을 품는데, 그는 시트릭 케흐와 그의 누이를 혼인시켜 노섬브리아의 데인인들과 기독교화를 조건으로 동맹을 맺어주는 척 했다가, 시트릭 케흐가 죽자마자 927년에 대대적으로 노섬브리아를 공격해 노섬브리아에서 데인인들을 모두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모든 브리타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때 카우산틴 2세는 망명 온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를 받아들이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반 잉글랜드 동맹을 체결해 군사적 대항에 나섰고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과 웨일스의 소 왕국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패배였다.

927년 7월 12일 애설스탠은 주변 국가 국왕들을 컴브리아의 에몬트 다리로 소집하여 조약을 맺는데, 조약의 내용은 '우상숭배를 절대 금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북유럽 신화를 따르는 데인인들과의 동맹을 의미한다. 여기 참여한 왕들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웨일스 데허이바르스의 국왕 하이웰 닷, 그리고 카우산틴 2세였다. 또한 이때 애설스탠이 카우산틴 2세의 아들 일둘브의 대부를 서주었다고 한다.

웨일스의 하이웰 닷 등이 아예 애설스탠의 궁정에 입조해 있는데 비해 카우산틴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명목상의 지배권은 인정만 하는 스텐스를 취했고, 결국 934년, 애설스탠은 다시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서게 된다. 웨일스의 네 개 소 왕국들의 왕을 모조리 대동했으며, 934년 5월 28일에 윈체스터로 군을 집결시켜 6월 7일에 북진을 시작했고, 잉글랜드의 육군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오웨인이 이끄는 군대를 제압한 후 하이랜드까지 북진해 포트리우까지 다다랐고, 해군은 브리튼 섬 최북단의 케이트니스까지 공략하면서 카우산틴 2세는 또 패배해 조약을 채결했는데, 조약은 스코틀랜드에게 불리하게 체결되었고, 카우산틴 2세는 그의 아들을 애설스탠에게 인질로 보내고 잉글랜드 궁정에 입조하고 애설스탠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약들에 참가해야 했다.

935년부터 다시 잉글랜드 궁정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934년 한 해 동안 잉글랜드에 머무른 뒤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번번히 무릎을 꿇었지만 카우산틴 2세는 포기하지 않고 와신상담을 꿈꿨다. 당시 아일랜드의 더블린 왕국은 노섬브리아의 데인인 왕이었던 시트릭 케흐가 노섬브리아로 갈 때 왕위를 넘겨줬던 그의 동생 고드프레드의 아들로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와는 사촌지간인 올라프 구드프리트손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카우산틴 2세는 올라프와 동맹을 맺었다.

어스트리드클라이드 역시 이 동맹에 다시 가담했고, 이 새로운 반 잉글랜드 동맹은 937년, 잉글랜드에 대대적 공격을 가했다. 아예 각을 잡은건지, 주로 여름에 전쟁을 진행하던 관습까지 깨고 가을에 잉글랜드를 기습한 것이다. 허를 찔린 애설스탠은 빠른 초기대응에 실패했고, 스코틀랜드-더블린 연합군은 신나게 잉글랜드 북서부를 털었다. 애설스탠은 군대 소집에 한 달 가량을 소모한 뒤 10월 경에 브루난버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전투의 결과는 잉글랜드의 피로스의 승리로, 이 전투에서 카우산틴 2세는 아들 첼라흐를 잃었고, 애설스탠은 두 조카와 사촌들을 잃었다. 양군 모두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잉글랜드도 워낙 큰 피해를 입어 또 애설스탠에게 가서 조아리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 동안 카우산틴 2세의 이를 바득바득 갈리게 한 애설스탠은 결국 939년, 세상을 떠난다.

이후 943년 내정, 종교 양쪽의 개혁으로 강한 권위를 얻었지만 패배가 반복되고 본인도 늙으면서, 카우산틴 2세는 더 이상 예전같은 권위를 누리기 힘들다고 판단해 퇴위하기로 했다. 그의 아들인 일둘브가 아직 어렸기에 조카 말 콜룸에게 양위하고 파이프에 있는 성 앤드류 컬디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래 후술한 대로 죽기 전까지 조카인 말 콜룸 1세의 정책에 대해 간섭하는 등 권력을 내려 놓지 않았다.

말 콜룸의 통치는 스코틀랜드 남쪽에 있는 포스 강까지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말 콜룸 1세의 포스 강 지배는 945년에 945년에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먼드 1세는 노섬브리아 정벌에 나섰는데 애셀스탠 사후 노섬브리아가 다시 독립했기 때문으로 943년에 올라프 구드프리트손이 죽은 후 스코틀랜드로 망명했었던 그의 사촌 올라프 시그트리드손이 노섬브리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이 945년의 정벌에서 올라프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디프날 압 오웨인과 동맹을 맺고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에드먼드 1세는 북진해서 어스트라드클라이드까지 털어버리고 디프날의 두 아들을 잡아다 눈을 뽑았다. 그러면서 잉글랜드 왕 에드먼드 1세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에 대한 스코틀랜드 왕국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잉글랜드는 컴브리아까지만 점령하며, 서로 간의 군사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을 통해 확정되었다.

948년에 노르웨이에서 에릭 블러드엑스가 노섬브리아를 침략해 데인로를 재건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노려 말 콜룸 1세는 950년에 카우산틴 2세의 주장에 동의해 노섬브리아로 출병해 알비도소룸의 약탈, 또는 나인디쉬의 약탈로 불리는 대규모 약탈을 벌여 많은 사람과 소를 노획했다. 이후 시기 미상이지만 하이랜드의 중심지인 모레이의 모마어 첼라흐를 공격해서 잡아 죽였다. 말 콜룸은 954년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 뒤를 일돌브가 계승했다.

일둘브의 치세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며 연대기마다 제각기 다르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일둘브가 대규모 남정을 통해 현재의 에든버러를 확보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정벌은 일둘브 대에만 있었던 대규모 원정이 아닌 이전 왕들이 꾸준히 전개했던 남진 정책 중 일부로 보고 있으며, 에든버러 역시 이르면 카우산틴 2세 치세, 늦으면 일둘브의 치세에 이미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962년에 일둘브가 사망했는데 역시 연대기마다 차이가 있어 '버찬의 예언'은 962년에 아버지가 퇴위한 뒤 들어갔던 성 앤드류 컬디 수도원에서 평온하게 죽었다고 기록한 반면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선 지도자가 알려지지 않은 바이킹 약탈대와 하이랜드의 모레이 근교 컬렌에서 맞붙은바우드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나오며 실재로 그의 사후 말 콜룸 1세의 아들인 두브 막 밀 콜룸과 일둘브의 아들인 킬렌 막 일둘브 간의 왕위를 두고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자는 두브였으나 그의 치세는 일둘브의 아들인 킬렌의 반란과 싸우며 장작 5년 동안을 왕위를 지키는데 허비해야 했다. 결국 967년 폐위당해 하이랜드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던 포레스에서 살해되었다. 킬렌의 치세는 두브의 치세 또한 짧았으며 그 끝 또한 연대기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971년 그가 살해된 것에 대해 고통점을 갖고 있다.

그 뒤를 이은 자는 말 콜룸 1세의 아들이자 두브의 동생인 키나드 2세로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주며 충성심을 견고하게 했으며, 이를 위해서 잉글랜드를 지속적 침략하기까지 했다. 또한 스트래스클라이드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잉글랜드를 침입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케네스 2세의 야망은 컸다.

973년 체스터에서 열린 영국 왕들의 정상회의에서 그는 당시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거를 상대로 외교력을 발휘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영토 경계선에 대한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대신,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컴벌랜드까지 스코틀랜드 영향력 아래 놓이게 한 것이다. 키나드 2세의 성공적인 대외 업적은 그의 권위와 함께 왕권 안정화를 가져왔다.

키나드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잠재적인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특히 친형 두브의 아들인 시내드 막 두프의 왕위 계승권을 없애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지만, 이는 도리어 시내드를 지지하는 세력의 결속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시네드의 세력들은 키나드 2세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이 둘은 지속적으로 왕권을 놓고 경쟁을 하였다.

키나드 2세는 자신의 아들인 말 콜룸에게 에게 왕권을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왕권 승계에 관한 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법 개정 내용은 죽은 왕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자신의 왕권을 노리고 있는 시네드와 카우산틴의 왕권 승계를 배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 법을 마련하기 전에 키나드 2세는 995년 이둘의 음모에 살해된다.

키나드 2세를 암살한 후 카우산틴이 카우산틴 3세로 즉위했지만 시내드와 말 콜룸은 여전히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결국 997년 스코틀랜드 동해안 쪽 아몬드 강 인근 성곽에서 시네드에 의해 살해되었고, 시네드는 키나드 3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아직 컴브리아 주에 말 콜룸이 남아 있는 등 여전히 불안정한 정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경우 스코틀랜의 북부와 함께 로마 제국에 점령되지 않은 곳인데다가 이미 고대로부터 여러 군소 왕국들이 세워진 상태였다.이들 왕국은 5~9개 정도로 대에 따라 멸망하기도 하고, 분열되기도 했는데 이 왕국들을 쿠어거(Cuaighe)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다섯 지방으로 알려진 울라(얼스터), 무운(먼스터), 라긴(렌스터), 코나흐타(코노트), 미데(미스)들이 이런 쿠어거들이었다. 아일랜드 신화에 따르면 대다수의 쿠어거들은 기원서 4~5세기 경에 건국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로마 제국이 현재의 잉글랜드 지역을 정복할 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각 쿠어거들은 투어허(Tuatha)[11]라는 수많은 소왕국들로 나뉘었다.

쿠어거의 왕을 리(Rí)라고 했다. 또한 아일랜드 섬 전체에 대한 군주로서 쿠어거의 '리'들 위에 아르드리(Ard Rí, High king)가 있었다.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아르드리가 기원전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고 적게 잡으면 846년, 최대한 높여도 459년에야 아르드리가 출현했다.

아르드리의 왕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쿠어거의 '리'들 중 힘센 자가 아르드리를 겸했다. 그래서 쿠어거들은 국력이 좀 강해졌다 싶으면 군사를 일으켜 아르드리에게 도전했다. 아르드리의 권한은 강하지 않았고, 지극히 형식적인 왕위였다. 미데의 플란 너 시나너, 무운의 브리안 보루마 등의 아르드리가 통일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중세 내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 붕괴 당시의 아일랜드의 쿠어거들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북쪽의 올라는 5세기 당시 일부 부족민들이 현재의 스코틀랜드 서부로 이주해 달 리아타를 건국했고, 이후 6세기 중반부터 픽트족으로 부터 달 리아타를 위협받게 되었다. 이후 7세기경인 626년에 달 나라이디의 소왕인 콩갈 카에흐가 올라의 리를 자처했고, 628년에 쿠어거로 독립하여 아르드리를 자처하고 있던 이 넬의 수이브네 멘을 죽이고 아르드리 자리를 찬탈했다. 하지만 637년 북 이 넬의 돔날 막 아에도에게 패배하고 죽게 된다. 이후 8세기 동안 북 이넬에게 밀려 영토가 동쪽으로 축소되었고, 732년 또는 735년에 북 이 넬에게 패하면서 종속되었다.

북 이 넬의 경우 상술한대로 본래 올라에 속한 투어허였다가 425년에 올라 북서부를 공격하면서 별도의 쿠어거로 독립한다. 이후 대체로 강력한 쿠어거들의 눈치를 보며 세력을 확장해 6세기 초 미데를 공격해 킬데어를 빼았으며, 이 넬의 왕들 중 상당수가 아르드리를 자처할 정도로 성장했다. 비록 상술한대로 628년 올라의 리인 콩갈 카에르의 공격으로 당시 아르드리였던 수이브네 멘이 죽었지만 637년 둠날 막 아에도가 복수를 함과 동시에 아르드리 자리를 탈환했고, 이후 8세기까지 올라의 서쪽 영토들을 잠식했다.

미데의 경우 4~5세기경, 코나흐타와 라긴으로 부터 상당한 영토를 빼앗으나 6세기 초 이 넬의 공격을 받고 킬데어의 근거지를 상실, 위클로우 산맥까지 밀려나서 오늘날의 아클로 지역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이때 이 넬의 왕가 일부가 킬데어에서 따로 투어허를 성립해 남 이 넬로 분가하게 된다. 참고로 성 패트릭 이전 421년 로마 총대주교가 파견한 팔라디우스라는 인물이 미데와 라긴을 중점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이후 8세기 중엽인 743년부터 왕들의 계보가 기록되었는데, 이때 이 넬 왕가 출신으로 촐마인 씨족의 돔날 미디 막 무르차도가 미데의 왕이 되어 그의 씨족이 12세기 중엽까지 미데를 통치했다.

라긴은 4세경 말인 383년 로마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명령으로 브리튼 섬에서 로마 군단이 철수하자 바다 건너 웨일스에 식민지를 건설하지만 이후 이 넬의 공격받고 일부 영토를 상실하고 이넬과 오랫 동안 적대적 관계가 된다. 상술한대로 성 패트릭 이전인 421년 로마 총대주교가 파견한팔라디우스라는 인물의 선교지 지역 중 하나였다.. 8세기 무렵에는 라긴 왕가가 북쪽을 근거지로 하는 이 둔라이(Uí Dúnlainge)와 남쪽을 근거지로 하는 이 켄슬라로 분화된다.

코나흐타는 아일랜드의 쿠어거들 중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곳으로 438년 사망한 두아흐는 칸노트 최초의 기독교인 왕이다. 8세기경 북이넬과의 접경지역이였던 브레프네가 쿠어거로 독립하였거 브레프네를 다시 병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전쟁을 했다. 칸노트의 통치 왕가는 973년 사망한 왕 콘코바르의 이름을 따 오 브리언에서 오 콘코바르로 이름을 바꾸었다.

무운은 쿠어거들 중 2개의 강력한 투어허들의 연합체와 같은 곳으로 오가나흐타와 달 가쉬가 자신들보다 더 작은 투어허들을 통제했다. 오가나흐타는 5세기 경에 건국되었으며, 투어허 중 431년 성 패트릭에 의해 개종되었다. 무운의 패권을 장악하는 6세기부터 10세기 후반인 977년까지 아르드리를 배출하지는 못했으나 비교적 오래 안정적으로 무운을 지배했다.

아일랜드 전역을 통틀어 기독교를 독실하게 신봉했던 왕국이며 몇몇 왕들은 실제로 성직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820년 왕위에 올라 847년까지 먼스터 지역을 통치했던 펠리미 막 크림산은 성직자로서도 큰 명성과 권위를 떨쳤으며 사람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아일랜드인’으로 칭했다.

5백 년 이상 먼스터 지역의 주도권을 가졌던 어거나흐타 왕국의 통치 방식은 다른 아일랜드 왕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들은 무력에 기반을 둔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에 주로 의존했던 것이다. 어거나흐타의 왕들은 대체로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했으며 그들이 정복한 다른 왕국의 왕족이나 백성들을 매우 공평하게 대우해 주었다.

브레프네의 경우 상술한대로 700년대 코나흐타에서 독립한 쿠어거로 다시 투어허로 복속시키려는 코나흐타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야 했고, 영토와 인구수 등에 밀린 브레프네가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8세기경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오로크 일족이 브레프니의 왕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렐리 일족에게 반기를 들고 권력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양측의 힘이 팽팽히 맞서 장기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오스라거는 1세기에 옹구스 오스리허가 건국했으며 라긴의 투어허었다. 5세기 무운의 코르쿠 리그더가 달 비른 왕조를 폐하고 오스라거를 합병했다. 7세기에 달 비른 왕조가 다시 힘을 되찾았지만 859년까지 명목상 무운의 일부였다가 커르발 막 둔렁거 왕 때 독립을 되찾았다. 이후 오스라거 왕들은 향후 3세기 동안 아일랜드 섬의 정치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섬 전체를 다스리는 아르드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아르길라의 경우 331년 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되며 본래 올라에 속한 투어허였으나 카르브러 리페하르의 손자들인 콜라 3형제가 울라 왕국으로부터 오늘날의 얼스터 중부를 빼앗아 건국했다고 한다.원래 동쪽의 이웃나라 울라의 영향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6세기부터 북쪽의 북 이 넬 왕조와 남쪽의 남 이 넬 왕조에게 동시에 영토를 잠식당하면서 쪼그라들었다. 735년 아르길라는 북 이 넬 왕조의 케넬 노간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827년 북 이 넬 왕조의 제후로 신종했다.

바이킹들에게 묻히긴 했어도 이기간의 아일랜드 또한 해적질을 했었다. 주된 활동지는 브리튼 섬의 서쪽 해안으로 위의 상술한 웨이스와 스코틀랜드의 개척된 정착지 또한 이러한 해적질로 인해 만들어진 전진 기지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며 그 밖에도 살리아 북부 해안 등도 아일랜드 해적들의 활동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라진 남부의 아타코티 족들의 경우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선교 활동을 하게된 계기가 바로 이들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오랫 동안 노예 생활을 한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8세기 후 아일랜드 또한 바이킹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795년 아일랜드에 최초로 바이킹이 이오나 섬, 라흘란 섬, 미라가크 섬에 도래했고, 대략 200년에 걸친 기간 동안 그들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아일랜드 섬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고, 이후 여러 지역에 걸쳐서 그들이 점령한 거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52년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도 그들이 이 땅의 원주민인 켈트족들을 쫓아내고 건설한 거점으로 이바르와 울라프 형제가 요새를 축조한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나마 각각의 군소 왕국들이 힘을 합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모든 역량을 동원하면서 잉글랜드처럼 바이킹들에게 짖밣히는 꼴은 면했디. 이후 902년 브레가의 말 피니아 막 폴라나카인과 라긴의 체르발 막 무이레카인이 연합해 더블린을 공격했고, 980년 더블린의 왕을 자처하던 바이킹 군벌인 올라프 시그트뤼그손이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였던 말 세크날 막 돔날에게 패배해 시키는 등 선전했고, 이후 2세기 넘게 노르만 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정착지에서 살면서 점차 원주민들인 아일랜드계 켈트족들과 섞여지게 되었고, 점차 아일랜드화되어 갔다.

이들 바이킹들이 세운 아일랜드의 정착지들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노예 거래 등이 행해졌으며 최초로 화폐를 주조해 은본위제를 도입시켰다. 다만 아일랜드의 정착지를 기반으로 한 아일랜드의 바이킹들이 잉글랜드에 정착지를 둔 바이킹들과 협공을 해 당시 알바 왕국으로 불린 스코틀랜드와 웨식스를 공격하기까지 하는 등 아직 그기세가 꺽이지는 않았다.


3.3.2.2. 웨일스[편집]

앵글로·색슨의 침공때 유일하게 침공을 면한 웨일스 지방은 로마 제국이 잉글랜드 일대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인 400년대를 기점으로 귀네드, 구엔트, 포위스 등의 잘잘한 소국들이 건국된 상태였다. 이후 로마 군대가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이후 십여개 이상의 소국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중세 중기가 되기까지 귀네드, 룽 구이 아 하브렌, 포위스, 구엔트, 데허이바쓰의 다섯 국가로 통합되지만 남은 소왕국의 왕들 간 서로가 브리튼인의 왕을 자칭해 대립하면서 끝내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지진부진해졌다. 또헌 웨일스 사와 관련된 문헌이 많은 나라 중 고작해바야 귀네드, 포위스, 구엔트, 데허이바쓰 네 곳 밖에 없다.

포위스는 400년대에 구르세른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구르세른은 5세기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린 보티건의 웨일스식 이름이다. 구르세른은 픽트족과 스코트족에게 쫓겨 웨일스 북부로 도피했고 그 곳에서 포위스를 건국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제대로 된 왕국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포위스는 여러 지역들이 느슨히 결합된 형태의 왕국이었고 완전한 왕국의 외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였다. 포위스 관련 초기 기록은 대부분 잉글랜드와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 포위스는 웨일스의 동부로 잉글랜드와 국경을 맞댄 탓에 잉글랜드와 잦은 충돌을 겪었다. 616년 무렵 포위스의 왕 셀리브는 체스터 전투에서 잉글랜드 세력과 격돌한다.

8세기 중·후반에는 잉글랜드 왕국 중 하나인 머시아와 갈등을 빚는다. 잉글랜드를 호령한 머시아의 왕 오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국경에 ‘오파의 방벽’을 건설하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또한 오파는 포위스에 몇 차례 공격도 가했다. 오파가 죽은 후에도 머시아는 포위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822년 포위스는 잠시 머시아인에게 장악된다. 잉글랜드와의 충돌로 생긴 국력 소모는 포위스가 이웃 왕국인 귀네드와의 경쟁에서 열세에 놓이는 요인 중 하나로 사료된다.

9세기 초·중반 포위스는 귀네드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귀네드는 메르빈 브리흐의 즉위를 기점으로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진다. 메르빈은 포위스의 공주 네스타를 아내로 맞는데 이것을 이용해 포위스를 거의 장악하기에 이른다. 포위스와 귀네드의 예속 관계는 로드리 마우르의 즉위와 함께 더욱 심화된다. 메르빈과 네스타의 아들 로드리는 모계 혈통을 통해 포위스의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마침내 855년 무렵 귀네드의 왕관을 쓴 채 포위스의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로드리 마우르의 공식 즉위 이후, 포위스의 왕위는 당연히 귀네드의 왕이 차지하는 처지로 전락해 중세 중기인 1063년까지 귀네드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구엔트는 로마인이 사라진 5세기 무렵에 건국되었다.. 410년 무렵 로마인들은 브리튼 섬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5세기 무렵 웨일스 남동쪽 끝에 에위아스(Ewias 또는 Ewyas)라는 왕국이 생겼다. 그러나 곧 에위아스와 에위아스 동쪽 땅을 모두 포함한 구엔트 왕국이 새로 탄생했다. 구엔트는 이스크와 와이에 흐르는 강 사이의 지역이 영토였다.

구엔트의 건국자는 카라도그이다. 카라도그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구엔트를 건국했는지 존재하는 기록은 없다. 카라도그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윤색된 중세 로맨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구엔트는 오랫동안 웨일스의 패권 다툼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인식되었다. 구엔트의 지리적 위치가 웨일스의 외곽으로 구엔트의 왕위를 여러 귀족 가문들이 번갈아 차지한 탓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엔트가 잉글랜드와 국경을 맞댄 것도 구엔트의 성장에 많은 방해가 되었다. 구엔트는 전 웨일스를 호령할 강력한 왕이 배출된 적이 거의 없었다. 구엔트 관련 기록도 상당 부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웨일스의 강대국인 귀네드나 데헤이바쓰와 관련 있을 때만 등장했다.

다만 9세기 중엽의 왕이었던 모르간 압 오와인만큼은 기록이 많은 편으로 즉위 당시 그는 본래 구엔트의 남서쪽에 면한 글러위신그 출신으로 자신의 형제들인 그리피드와 카두간과 함께 왕국을 분할 상속받아 통치하다가 그리피드는 933년경 케레디기온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카두간은 950년 앵글로색슨과의 전투 중 전사하면서 형제들의 영톨를 흡수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데 중시했는데 이는 선대로부터 이어진 외교 노선이었다. 다만 다른 웨일스의 소왕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잉글랜드에 대한 우위를 인정해야 했지만 그대신 잉글랜드가 국경을 맞대고 있던 구엔트를 침략하는 것을 방지하는데는 성공했다. 다만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다시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귀네드는 웨일스의 브리튼인 국가 중 가장 강성한 편에 속했으며, 종종 귀네드 왕이 브리튼인들의 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귀네드는 브리튼인의 국가이나 왕가의 시조는 브리튼인이 아닌 스코틀랜드 고도딘 출신의 키네다 아프 에데른이다.

다만 귀네드는 부족 사회의 모습을 재빨리 벗고 국가의 틀을 갖춘 덕분에 일찍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귀네드는 6세기 초 이미 왕국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무렵 귀네드의 왕으로 즉위한 키네다의 증손자 말군 귀네드는 용맹하고 냉혹한 성격으로 주변 왕국들을 굴복시켜 웨일스의 패권을 움켜쥐었다. 귀네드는 해외 교류도 활발했다.

결국 635년 무렵 카드와슬론은 노섬브리아 왕가 출신인 오스왈드에게 살해당했다. 머시아와의 동맹은 카드와슬론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는데, 이를 통해 귀네드는 노섬브리아와 대적하고 포위스로 세력을 확장할 힘을 갖추게 되었다. 건국 이후 큰 부침 없이 빠르게 성장한 귀네드는 9세기 들어 눈부신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9세기 초 귀네드에 새로운 왕가가 탄생했다. 825년 귀네드의 왕으로 등극한 메르빈 브리흐는 귀네드 왕들 중 최초로 건국자 키네다의 남자 후손이 아니었다. 메르빈의 아버지는 귀네드 왕국과 상관없는 구리아드로, 그가 귀네드의 공주인 에실트를 아내로 맞으면서 그들의 아들 메르빈은 귀네드 왕좌에 대한 권리가 생겼다. 메르빈의 즉위는 귀네드 왕국에 새로운 왕가의 시작을 알렸다.

귀네드의 새 왕가 ‘아베르프라우 왕가’는 대대로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귀네드는 유례없는 번영기를 맞았다. 이후 귀네드는 다소 부침을 겪지만 웨일스가 잉글랜드에 정복되는 1283년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웨일스 최강 자리를 지켰다. 한편, 메르빈의 증손자 허웰 다가 웨일스 남부에 데헤이바쓰를 세우면서 메르빈의 후손은 귀네드를 넘어 웨일스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메르빈의 아들 로드리 마우르의 통치 아래 귀네드는 명실상부한 웨일스 최강국으로 거듭났다. 로드리 마우르라는 이름은 ‘로드리 대왕’이라는 뜻으로, 9세기 전 유럽을 통틀어 ‘대왕’ 칭호를 받은 왕은 샤를 대제, 알프레드 대왕, 로드리 마우르 단 세 명뿐이다. 로드리 마우르는 포위스 공주인 어머니 혈통을 이용해 귀네드의 이웃이자 경쟁국인 포위스를 장악했다.

이후 귀네드는 약 2세기 동안 포위스를 지배하며 웨일스 북부의 패권을 독식했다. 로드리 마우르는 웨일스 중부 세이시슬르그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귀네드는 웨일스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거대 왕국이 되었다. 856년 로드리 마우르는 앵글시 섬을 침공한 바이킹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이 사건으로 귀네드의 이름은 전 유럽에 퍼졌다.

하지만 로드리 대왕이 바이킹에게 거둔 승리가 바이킹 세력을 웨일스 땅에서 영원히 축출한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땅을 차지하겠다는 바이킹의 야욕은 860년대를 기점으로 강해졌고 이와 맞물려 바이킹은 871년부터 웨일스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877년의 바이킹 침공은 성공적이어서 로드리는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추방되어 아일랜드로 건너가게 되었다. 같은 해 바이킹은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의 다른 왕국들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점령해 영국 땅에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 했다. 이듬해인 878년 로드리는 귀네드 왕국으로 돌아와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그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났다. 왕좌를 탈환한 지 얼마 안 되어 878년 웨식스 영향하에 놓여 있던 머시아 서부와의 전투에서 아들 구리아드와 함께 전사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아나라우드 아프로드리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881년 콘위에서 머시아 왕국의 에델레드를 패배시켰고, 웨일스 북부로의 팽창을 저지하면서 머시아의 침략에 대한 우려 없이 왕국의 내부 강화를 꾀하고 남부 웨일스로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바이킹에 대한 침략을 막기 위해 893년 웨식스와 공조를 시작했는데, 이때 앨프레드 대왕의 측근이었던 애서 주교가 남긴 전기인 『알프레드의 삶(Life of Alfred)』에 따르면 아나라우드는 웨섹스 왕국과의 동맹을 위해 앨프레드 대왕을 직접 찾아갔고 그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아나라우드와 앨프레드 대왕의 동맹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아나라우드가 앨프레드 대왕보다 낮은 왕의 위치에서 후원을 요청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앨프레드 대왕과 손잡은 후인 894년 바이킹이 웨일스를 공격했다. 귀네드 왕국이 있는 웨일스 북부를 먼저 공격한 그들은 아나라우드 군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진로를 남쪽으로 선회했으나, 그곳에는 앵글로색슨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앨프레드 대왕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바이킹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한 아나라우드는 동맹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의 형제들과 웨일스 내부에서 영토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형제들과 함께 성장한 아나라우드는 로드리가 죽은 후, 형제들과 각각 로드리의 왕국을 나눠 물려받았다. 이후에 아나라우드는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대신, 그들과의 협력과 연합을 통해 ‘로드리의 아들들’의 위력을 온 웨일스에 떨쳤다. 또한 요크의 바이킹 군벌이나 앨프레드 대왕의 웨섹스 왕국과의 협력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한편, 왕국의 영토를 남부 웨일스까지 확장하는 것을 도모했다.

바이킹을 무찌른 이듬해인 895년 아나라우드는 웨일스 남부로의 영토 확장을 본격화했다. 아나라우드는 앵글로색슨 군대의 지원 아래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를 침공했다.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는 모두 앨프레드 대왕의 동맹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앵글로색슨 군대는 큰 어려움 없이 아나라우드의 공격을 도울 수 있었다.

한편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는 귀네드 왕국과 더베드 왕국이 아래 위에서 호시탐탐 노리던 영토로, 더베드도 앨프레드 대왕의 웨섹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로 인해 아나라우드는 남부 영토 확장을 위해 앨프레드 대왕의 지원을 받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베드의 왕이던 더베드의 허피아드가 893년 사망하자 더베드와 웨섹스 왕국의 동맹은 지속되지 못했다. 아나라우드의 귀네드 군대가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를 침공한 895년 웨섹스와 더베드는 더 이상 동맹 관계가 아니었고, 웨섹스 군대는 걸림돌 없이 귀네드 군대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앨프레드 대왕이 아나라우드를 지원한 배경에는 앨프레드 대왕 본인의 정치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웨일스 최고의 세력은 누가 뭐래도 귀네드와 포위스, 세이시슬르그를 위시한 로드리의 아들들이 이끄는 왕국들이었고, 아나라우드는 이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앨프레드 대왕에게 웨일스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과 손잡는 것은 어떤 동맹보다 유용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가 기꺼이 아나라우드의 웨일스 남부 침공에 힘을 보탰을 것으로 여겨진다.

웨일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병력을 형성하고 있던 귀네드 군대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앨프레드 대왕의 원조를 받아 마치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듯 거침없이 웨일스 남부를 침공했고, 얼마 안 되어 케레디기온은 아나라우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아써에 의하면, 이후에도 아나라우드는 영토 확장 욕심을 숨기지 않고 케레디기온보다 더 남동쪽인 브러하이니오그까지 손을 뻗쳤다.

916년 아나라우드가 사망한 후 귀네드 왕국은 이미 웨일스 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로드리와 아나라우드의 후손들은 이후 북쪽으로는 귀네드 왕국, 남쪽으로는 데헤이바쓰 왕국을 중심으로 전 웨일스를 장악했다. 아나라우드의 아들인 이드왈 보엘은 귀네드 왕국을 물려받아 웨일스 북부에서 입지를 더 공고히 다졌으나 아나라우드의 조카이자 카델의 아들인 허웰 다는 웨일스 남부에 데헤이바쓰 왕국을 세워 귀네드 왕국의 입지를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916년에는 머시아의 여왕 에델플레드가 브러하이니오그를 공격하여 위협하였고, 917년경에는 바이킹에게 서쪽 해안가를 공격당하며 수세에 몰렸다. 결국 921년 웨일스의 가장 강력한 두 왕, 이드왈과 허웰은 모두 에드워드에게 신종하였다.

921년의 항복 이후 이드왈은 웨일스 최강자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기존의 항복을 철회하고 점점 잉글랜드에 저항하는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반면, 허웰은 에드워드를 믿을 만한 동맹으로 인식하고 협력관계를 점차 강화했다.924년 대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이드왈은 혼란한 상황을 틈타 체스터 지역을 공격하였다. 잉글랜드와의 관계가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늘 편치 않았던 이드왈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에서 겪은 굴욕을 되돌려주고자 했다.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에드워드의 아들 애설스탠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웨일스 왕들과의 군신관계를 다시 확인받고자 했다. 927년 애설스탠은 허웰을 비롯한 웨일스의 왕들과 회동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드왈은 허웰과 함께 927년, 928년, 937년 총 세 번에 걸쳐 애설스탠의 궁정에 방문하였다. 당시 방문자를 기록한 명부에 의하면 허웰의 이름은 웨일스 군주들 가운데 언제나 맨 처음에 등장하였고 이드왈의 이름은 허웰의 이름 다음에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가 이드왈보다 허웰에 호의적이었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이드왈이 여전히 잉글랜드와 애설스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27년의 항복은 이드왈에게 에델스탄에 대한 표면상의 충성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표면상의 충성은 이드왈을 실질적 행동으로 이끌었는데, 이드왈은 허웰과 함께 애설스탠을 도와 브리튼 섬 북부에 위치한 스트라스클라이드 원정길에 참가한 바 있다.

939년 애설스탠의 사망과 함께 잉글랜드에 대한 이드왈의 태도도 바뀌었다. 이드왈은 잉글랜드의 궁정에 출입하는 대신 잉글랜드에 대항할 힘을 키웠다. 결국 942년 이드왈은 동생 엘리세드와 힘을 합쳐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쟁은 결국 이드왈은 패사했다. 그의 슬하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드왈의 후계자로 점쳐지던 아들은 이아고 아프 이드왈과 이아이아프 아프 이드왈이었다. 하지만 귀네드의 왕위를 차지한 자는 다름 아닌 허웰이었다. 허웰은 순식간에 귀네드를 침공하여 이드왈의 아들들을 추방하고 귀네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웨일스 최강국으로 군림해오던 귀네드는 신생국 데헤이바쓰에게 정복되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949년 허웰이 사망하자 이드왈의 아들들은 귀네드를 되찾는다. 이드왈의 아들들은 데헤이바쓰와 949년, 952년 두 차례 격돌하여 승리하였고, 그 결과 왕국을 완전히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드왈의 다섯 아들 중 이아고와 이아이아프가 이드왈의 뒤를 이어 귀네드의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사후 발생한 왕위 계승을 둔 내분으로 986년 마레디드에 의해 데헤이바쓰에 다시 장악되었다.이후에도 중세 중기인 1016년까지 왕위를 두고 내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데헤이바쓰는 상술한대로 920년 귀네드 왕 아나라우드의 조카 허웰 다에 위해 건국된 국가로 웨일스 중·남부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조부인 귀네드 왕이었던 로드리 대왕은 장남인 아나라우드 아프 로드리에게 귀네드 왕가의 본거지인 귀네드 왕국을, 차남인 카델에게는 웨일스 남부의 세이시슬르그를 물려주었다. 카델은 872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909년까지 세이시슬르그의 왕으로 군림한 후, 장남 허웰 다와 차남 클러도그 아프 카델에게 그의 왕국을 나눠줬다. 다시 말해 카델이 죽은 후, 세이시슬르그는 약 10년 동안 두 명의 형제에 의해 다스려졌다.

허웰 다는 920년 동생 클러도그가 사망하면서 세이시슬르그의 전권을 손에 넣지만 허웰 다는 이에 앞서 세이시슬르그 동서쪽의 더베드 왕국의 군주로 등극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베드는 약 893년부터 904년까지 약 10년 동안 클러와르흐 아프 허바이드라는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클러와르흐는 허웰 다의 장인으로, 허웰 다는 그의 외동딸인 엘렌 베르흐 클러와르흐와 결혼했다. 클러와르흐는 아들이 없어 904년 그가 서거한 후, 더베드의 왕좌는 공석으로 남았고, 허웰 다는 그 틈을 타 선왕의 사위라는 위치에 자신의 권력과 정치력을 더해 더베드의 왕관을 손에 넣었다.

904년 더베드의 왕이던 클러와르흐의 사망과 함께 허웰은 더베드의 왕위에 오름으로써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920년, 허웰과 세이시슬르그를 분할 통치하던 클러도그가 사망함으로써 허웰은 더베드와 세이시슬르그의 유일한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웨일스 남부를 이루는 더베드와 세이시슬르그가 허웰이라는 통치자 아래에 합쳐지면서 ‘남부’를 뜻하는 데헤이바쓰라는 이름이 새로운 왕국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데헤이바쓰는 이후 4세기가량 웨일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동안 귀네드의 독무대와 같았던 웨일스의 세력 분포는 데헤이바쓰의 등장으로 북부의 귀네드, 남부의 데헤이바쓰 양강 체제로 재편되었다. 또한 소부족 집단들이 주축이 된 군소 왕국들의 모임과 같던 웨일스는 데헤이바쓰라는 초강대국의 등장과 함께 통일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더베드와 세이시슬르그를 장악한 허웰의 상승세는 멈출 줄 모르고 930년 마침내 세이시슬르그 동쪽의 브러하이니오그까지 차지했다. 브러하이니오그를 손에 넣음으로써 허웰은 웨일스 통일을 위해 웨일스 남동부의 두 왕국 글러위신그와 구엔트 그리고 북부의 강자 귀네드만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드왈이 942년 머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전사하면서 웨일스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허웰이 이드왈의 사망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귀네드 왕국을 침공해 이드왈의 아들인 이아고 아프 이드왈과 이아이아프 아프 이드왈을 축출하고 귀네드의 왕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귀네드 동쪽의 포위스는 귀네드의 통치 아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허웰은 귀네드의 왕좌를 차지하면서 자동적으로 포위스까지 지배하게 되면서 거의 웨일스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와의 외교 관계에서 허웰 다 또한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이미 로만켈트족들을 서쪽 웨일스와 북쪽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몰아내 그나마 브리튼 섬의 옥토라 부르만한 지역들을 차지한 앵글로-색슨족들을 칠왕국과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공세 시기를 해쳐나가면서 앨프레드 대왕 시기와 대 에드워드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브리튼 섬에서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한 상태였기에 그 역시 다른 웨일스의 소왕으로 있던 시기 다른 소왕들과 마찬가지로 웨식스에 신종했고, 이후 대 에드워드가 죽고 애설스탠이 웨식스의 왕이자 통일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 본인이 브리든인의 왕을 칭한 후에도 저자세로 있었다.

허웰은 애셀스탠의 궁정에 자주 드나든 것으로 유명하다. 애셀스탠은 자신의 통치구역 밖에 있는 군주들을 주기적으로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고 특히 허웰은 이 모임에 자주 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허웰이 애셀스탠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친교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모임 참가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자료를 보면 웨일스 왕들의 이름은 애셀스탠과 대주교의 이름보다 뒤에, 주교와 귀족의 이름보다 앞에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웨일스의 왕은 굉장히 높은 지위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웨일스 왕들 중 항상 첫 번째로 기록된 이름이 바로 허웰이라는 점은 그가 웨일스 왕들 중 가장 높은 위치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와 허웰의 동맹이 그만큼 공고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동맹은 감정적이고 개인적이라기보다 철저히 실리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애셀스탠은 937년 브루난버 전투에서 바이킹과 스코틀랜드인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 승리 이후, 애셀스탠은 웨일스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풀었다. 그리고 애셀스탠의 후계자인 에드문드는 세력이 더 약했기 때문에 웨일스의 군주들을 강하게 압박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애셀스탠이 웨일스의 왕들을 덜 압박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허웰은 더 이상 모임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허웰의 모임 참가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강력한 군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의무적으로 행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 밖에도 내치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을 세웠는데 웨일스 역사상 최초로 성문법으로 만들었다. 웨일스 법은 940년 무렵부터 945년 사이에 허웰의 근거지인 카마던셔 근교의 ‘터 그윈 아르 다프’에 각 지역대표들이 참가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웰의 웨일스 법 편찬은 단순히 한 국가의 법을 제정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허웰 이전까지 웨일스에는 성문화된 법이 없었다. 성문법이 없다는 것이 웨일스에 법 자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허웰이 수행한 과업은 법을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웨일스의 여러 지역에 퍼져 있는 법의 역할을 하는 ‘관습’이나 ‘풍습’을 성문법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웰이 제정한 ‘웨일스 법’은 중앙집권적 성격을 띤 국가법이라기보다 여러 지역의 실상과 삶의 지혜가 묻어난 국민법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웨일스 법은 처벌을 통해 사회질서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친족 집단 간의 문제를 중재하고 탈 없이 화해할 수 있도록 권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처벌보다 관용과 자비를 권하고 민중의 눈높이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여타 법령에서는 최근까지도 결여되어 있던 여성과 아이들을 존중하는 면이 두드러져 있으며, 이런 특성은 허웰의 법이 왕과 귀족들의 의사만 반영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시행되던 관습적인 법령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허웰의 법이 시대를 앞서간 성격을 갖는 또 다른 이유는 허웰 자신이 시대에 앞선 교육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잦은 영국 궁정 출입과 심지어 웨일스 왕으로는 최초로 경험한 로마 순례는 그를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지 않고, 식견과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허웰의 시대는 유럽과 이슬람의 많은 국가들이 법 자체와 그것의 성문화에 큰 관심을 갖던 시기로 로마를 방문해 당시 유럽 전반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를 직접 체감한 허웰은 웨일스 법을 제정함으로써 선진문물을 적극 도입했다.

허웰의 법이 탄생한 또 다른 배경에는 웨일스 내 여러 왕국이 그의 통치 아래에 놓였기 때문이다. 허웰은 당시 각기 다른 왕국으로 오래 지내온 세이시슬르그, 더베드, 귀네드와 같은 다수의 영토를 동시에 통치하였기 때문에 행정 조치를 통해 이질적인 국가들에게 통일성과 일체감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공식적인 법 제정은 이 역할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수단이었다. ‘웨일스 법’이라는 공식적인 법의 등장은 지역에 따라 다른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백성들에게 동일한 가치관, 행동규범, 생활방식 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허웰은 웨일스 역사상 가장 많은 왕국과 넓은 영토를 통치했음에도, 그의 집권기의 웨일스는 큰 불화나 충돌 없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허웰의 통치기 동안 외세의 침입은 물론 내부 분열도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것은 허웰의 법에 웨일스의 여러 왕국 간의 분열과 갈등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허웰의 법은 모든 법전이 왕과 그의 관리들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할 만큼, 왕권 강화와 신성화라는 목적으로도 만들어져 이런 법의 배포를 통해 어떤 세력도 감히 허웰에게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들어 왕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다.

선진적이고 자비롭기로 유명한 허웰의 법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신분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기초적 기준은 자유민과 비자유민의 경계이다. 왕이나 귀족은 당연히 자유민으로 구분되는 반면, 농민이나 노예는 비자유민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웨일스의 법이 선진적인 것은 다수가 비자유민의 신분에 묶여 있던 유럽 전반의 풍토와 비교해 웨일스에서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자유민의 권리를 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웨일스 법은 여성의 권익보호에서도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물론 웨일스 법에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은 뚜렷하다.

허웰의 법은 오늘날까지 총 42부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 36부는 웨일스어, 나머지 6부는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웨일스 법은 처음에 웨일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라틴어판은 원전의 번역본이다. 웨일스 법이 처음에 웨일스어로 기록된 것은 그것만이 웨일스 백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반영하고, 내용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950년 허웰이 죽은 후 그의 자리를 아들인 오와인 압 허웰이 계승했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각각 왕국을 분할했다. 그리고 953년 무렵, 귀네드 왕국은 이드왈 보엘의 아들들인 이아고와 이아이아프가 왕좌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오와인은 귀네드를 무력으로 수복하려 했으나 수복하기는커녕 오히려 952년 이아고에게 데헤이바쓰 침공을 허용했다. 954년 귀네드와 데헤이바쓰의 운명을 가르는 최후의 일전이 귀네드의 흘란루스트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의 자세한 정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승리의 여신은 또 한 번 오와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결국 오와인은 허웰 다가 사망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귀네드 왕국과 귀네드에 복속되어 있던 포위스를 잃고 허웰 다가 이룬 거대한 데헤이바쓰 제국은 조각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오와인은 남웨일스에서 데헤이바쓰의 패권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했고, 이를 통해 데헤이바쓰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다만 오와인은 귀네드의 왕좌를 여전히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고, 훗날 웨일스 연대기』에 이드왈, 아이고, 아아이아프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배제하는 등 귀네드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상술한대로 오와인은 다른 두 형제와 함께 950년 데헤이바쓰를 분할해 물려받았으나 다른 두 형제인 로드리와 에드윈이 각각 952년, 954년에 사망하자 오와인은 왕이 된 지 4년 만에 데헤이바쓰의 유일한 통치자로 등극했다. 귀네드의 패권을 완전히 빼앗긴 오와인에게 오랜 통치 기간은 여러 과제를 남겼다. 왕국 확장의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오와인은 허웰 다가 시도하지 않았던 웨일스 남동부로의 세력 팽창에 힘을 쏟는 한편, 대내적으로 비교적 신생국인 데헤이바쓰 왕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통치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웨일스 연대기』이다.영토 확장과 왕국 강화 측면에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오와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연대기』의 집필과 편찬으로 신생국인 데헤이바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상술한대로 선친의 유산인 귀네드 왕국을 빼앗아간 이아고와 이아이아프,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이드왈에 대한 언급은 철저히 피하하면서 메르빈의 진정한 혈통이자 데헤이바쓰와 귀네드를 포함한 웨일스 전체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세우고 싶었던 오와인의 강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상술한대로 954년 흘란루스트에서 있었던 귀네드와 데헤이바쓰의 전투에서 귀네드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귀네드는 웨일스 북부에서 데헤이바쓰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데헤이바쓰를 세운 허웰 다가 귀네드의 통치권을 빼앗은 것이 942년이므로 12년 만에 귀네드는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은 것이다. 귀네드에게 당한 패배로 오와인은 북웨일스로 영토 확장을 도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와인과 데헤이바쓰의 왕국 팽창 야욕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북웨일스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남웨일스에서 데헤이바쓰의 영향력은 여전히 공고했다.

북웨일스 경로가 차단된 오와인은 남웨일스의 왕국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웨일스 남동부의 글러위신그와 구엔트는 웨일스의 변방으로 전략적 요충지와는 거리가 멀어 그동안 많은 왕들에게 침략할 필요가 없는 땅으로 외면받아왔다. 오와인은 북웨일스 진출 경로가 완전히 막혀 다른 왕들과 달리 글러위신그와 구엔트 침략에 관심을 가졌다. 960년 오와인은 글러위신그 옆의 작은 왕국인 고웨르를 공격했다. 당시 고웨르를 비롯한 웨일스 남부의 소왕국들은 강력한 왕이 없는 대신 여러 가문 출신의 귀족들이 왕위를 번갈아 차지했기 때문에 이 국가들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불안정했다. 오와인은 이 국가들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남부를 목표로 왕국 확장을 도모했다.

960년 오와인의 고웨르 공격은 데헤이바쓰가 웨일스 남동부로 진출해 남부의 패권자로 올라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970년대부터는 오와인의 아들 이니온 아브 오와인이 데헤이바쓰 군의 수장이 되어 고웨르를 비롯한 웨일스 남동부에 공격을 이어갔다. 이니온은 아버지 오와인보다 탁월한 전사였으며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겠다는 욕심도 더 큰 인물이었다. 이니온은 970년과 977년 두 차례 고웨르를 침공했고 계속되는 공격에 조금씩 데헤이바쓰의 손아귀로 들어오던 고웨르는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니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980년대 들어 고웨르 동쪽의 브러하이니오그와 구엔트로 세력을 넓혀갔다. 오와인이 처음 확립한 웨일스 남동부로의 영토 확장 기조가 불과 20~30년 만에 큰 성과를 낳은 것이다. 탁월한 전사이자 야심가인 이니온의 통솔 아래 데헤이바쓰는 점점 더 빠르고 무자비하게 영토 확장을 진행했다. 하지만 데헤이바쓰의 세력 확장은 다른 소왕국들에게는 그들의 세력 약화를 뜻했고, 데헤이바쓰가 침략을 통한 전리품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동안, 피해국들의 생활은 피폐해져갔다. 결국 984년 이니온은 그가 침략한 구엔트 왕국의 귀족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끝을 모르던 침략 야욕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니온의 사망은 오와인에게 왕위계승이라는 큰 과제를 안겨주었다. 오와인은 970년대부터 점차 왕국 통치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960년대 오와인이 시작한 웨일스 남동부로의 왕국 팽창을 970년대에 이니온이 계승하게 된 것도 오와인이 전면에서 물러나 자식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일어난 당연한 수순이었다.

데헤이바쓰의 군 통수권자이자 실질적 통치자인 이니온의 죽음은 자칫 데헤이바쓰 왕권의 공백을 초래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왕권의 공백은 왕국의 세력 약화로 직결될 수 있었다. 오와인이 귀네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한 954년, 흘란루스트 패배 이후 30년 가까이 소강상태이던 귀네드와 데헤이바쓰 간의 충돌은 이니온의 빠르고 무자비한 왕국 팽창에 귀네드가 위기를 느끼면서 불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니온이 살해되기 불과 1년 전인 983년 이니온이 이끄는 데헤이바쓰 군대는 귀네드 군대와 한 차례 맞붙었다. 이때 이니온은 귀네드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시 귀네드는 앵글로색슨과의 동맹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 탓에 승리의 출혈이 상당했다. 결국 이 전투로 촉발된 군사력 약화가 화근이 되어 데헤이바쓰는 구엔트의 침공을 허용했고 이니온까지 살해되었다. 귀네드가 호시탐탐 웨일스 남부로의 왕국 확장을 꾀하던 상황에서 오와인이 왕위계승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데헤이바쓰의 존속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와인은 이니온의 빈자리를 마레디드 아브 오와인이라는 아들로 대신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마레디드는 형 이니온 이상으로 훌륭한 전사이자 포부가 큰 야심가로 이니온이 사망한 984년부터 데헤이바쓰의 실질적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이니온의 사망과 마레디드의 왕위 등극은 데헤이바쓰의 영토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986년 마레디드는 데헤이바쓰의 왕들 중 허웰 다 이후 처음으로 귀네드를 침공했고, 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당시 귀네드의 왕이던 카드와슬론 아브 이아이아프를 죽이고 귀네드를 장악하였다

987년 오와인이 죽고 마레디드가 데헤이바쓰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즉위 직후 바이킹들의 끝없는 침략을 대처해야 했다.즉위 이후 바이킹의 수장 고드프리가 귀네드의 거점이자 웨일스 북쪽 섬인 앵글시를 공격해 수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포로로 잡힌 사람 수가 무려 2천 명에 달했으며 이듬해인 988년 바이킹의 칼끝은 앵글시 남쪽 레디기온의 슬란바다른과 모르가누그의 슬란카르반으로 향해 해안가에 위치해 접근성이 높고 방어가 취약한 교회와 수도원 등을 약탈했다.

바이킹의 쉴 새 없는 전방위 공세에 견디다 못한 마레디드는 군사력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격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고 그들에게 돈이나 재물을 주는 대신, 웨일스 땅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고 했다. 바이킹에게 웨일스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989년 마레디드는 인두세를 인상했고, 해당 인두세 수입으로 2년 전 붙잡혀간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해 자국민들을 돌려받는다.

마레디드의 협상으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바이킹의 웨일스 침략은 잠시 소강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 왕국 내부의 반란이 문제가 되었다. 992년, 마레디드의 요절한 형 이니온의 아들인 에두인 아브 이니온이 잉글랜드 군대와 손잡고 마레디드의 영토를 공격했다. 이니온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가장 유력한 차기 왕 후보였기 때문에 에두인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삼촌 마레디드에게 도전한 것이다. 에두인은 마레디드의 영토인 더베드, 고웨르, 케레디기온을 공격했지만 아직 젊고 경험이 일천한 탓에 귀네드를 정복하고 바이킹의 공격을 막으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마레디드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했다. 오히려 이듬해인 993년 마레디드는 왕권에 대항하는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바이킹과 연합해 에두인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정복지인 귀네드에서도 마레디드에 대항해 왕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은 메이리그 아브 이드왈의 아들들이었다. 결국 994년 마레디드는 귀네드의 반란군과 대면한 전투에서 패해 자신의 거점인 웨일스 남부로 패주하였다. 이 패배로 마레디드는 귀네드를 포함한 웨일스 북부 상당 부분의 영향력을 잃었다.

999년 마레디드가 사망했는데 후계자인 아들 카드와슬론은 이미 그보다 7년 일찍 죽으면서 그의 왕위는 이니온의 증손자인 테우두르의 손에 넘어갔다.

3.4. 이베리아 반도[편집]


이베리아 반도의 경우 수에비족알란족, 반달족들이 먼저 들어와 서로 연합된 상태였고, 이중 알란족이 연합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프랑스 서남부 일대에 정착한 서고트족들이 서로마 제국과 손을 잡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하하면서 418년 수에비는 이베리아 서북부로 밀려나고 알란족은 크게 패하면서 반달족에게 흡수되었고, 반달족들은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축출되었다.

이후 438년 레칠라가 수에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영토 확장을 시도해 448년까지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레칠라 사망 후 다시 서로마 제국과 서고트 왕국의 공격을 받고 영토가 다시 줄어들었고, 잔존 세력들은 재각기 여러 왕들을 웅립하였고, 이렇게 웅립된 왕들은 누가 진정한 왕인인지를 두고 456년부터 469년 동안 혼란기를 맞이하다가 레미스문트 이후 90여년 동안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서고트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3.4.1. 수에비 왕국[편집]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수에비 왕국은 90년간의 공백기 중이었고, 이기간 왕들이 어떠한 행적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쯤에 아리우스 파에서 가톨릭으로 전환하면서 당대 역사가들을 겸하고 있던 가톨릭 성직자들이 수에비 왕국에 대해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수에비 왕국이 언제 가톨릭으로 전환되었는지에 대해서 제각기 연대기들마다 차이가 있으나 현재 다수의 학자들은 수에비 왕국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는 558년 5월이나 559년 4월 사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는 아리아미르의 치세부터였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561년 5월 제1차 브라가 공의회를 개최해 가톨릭을 왕국 각지에 전파하는 방한을 논의했다.

반면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다음 왕인 테오데미르 아래에서 가톨릭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아리아미르와 테오데미르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두 사람은 다른 인물이며, 아리아미르 왕이 가톨릭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뒤 테오데미르 대에 이르러 국교로 확정되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테오데미르 다음 즉위한 미로부터 치적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 572년, 미로는 칸타브리아에 거주하는 바스크 부족인 루스콘 족과 전쟁을 벌였다. 이는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행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서고트 왕국을 자극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삼겠다는 야망에 불탔던 리우비길드는 서고트 왕국에게 매년 공물을 바쳤던 루스콘 족을 공격한 점을 빌미삼아 수에비 왕국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리우비길드는 573년 사바리아에 진군하여 사프 부족의 영역을 황폐화시켰는데, 사바리아는 자모라와 살라망카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곳을 점령한 의도는 수에비 왕국을 공략할 전초기지 마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리우비길드는 아들 헤르메네길드레카레드에게 점령지를 임의로 다스리게 했다. 574년, 리우비길드는 칸타브리아로 진군하여 저항하는 이들을 모조리 분쇄하고 수에비 왕국을 더욱 압박했다. 576년, 리우비길드는 수에비 왕국의 본토인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미로 왕이 사절을 보내 서고트 왕국을 주군으로 섬기며 매년 공물을 바칠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청하자, 리우비길드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이렇듯 서고트 왕국의 공세가 갈수록 강성해지자, 미로는 이에 대응하고자 내부 단결을 꾀했다. 572년 제2차 브라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조직 체계를 재정비했으며, 브라가 대주교이자 갈리시아의 대주교인 두미오의 마르틴과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마르틴은 미로의 조언자들에게 왕에게 더욱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저서를 읽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580년 부르군트의 왕 군트람에게 사절을 보내 서고트 왕국을 견제해달라고 요청하려 했으나, 도중에 리우비길드의 동맹인 프랑크-네우스트리아의 왕 힐데베르트 2세의 군대에 사로잡혀 파리에 억류되었다가 1년 후에야 풀려났다. 한편 리우비길드는 579년경 아들 헤르메네길드와 프랑크-아우스트라시아의 왕 시게베르 1세의 딸 인군타의 결혼을 주선해, 프랑크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하고자 했다.

580년, 헤르메네길드가 아내 인군타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단인 아리우스파로부터 가톨릭을 수호하겠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미로는 583년 헤르메네길드의 반란을 지원하고자 세비야로 진군했다. 그러나 도중에 리우비길드의 군대에 포위되었고, 자신의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서고트 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고, 조국으로 귀환했다가 며칠 만에 세비야 인근의 나쁜 물과 건강에 해로운 기후의 여파로 심각한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그 뒤를 아들 에보리크가 즉위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군주 리우비길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권위에 의존해 왕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584년 안데카가 이끄는 반 고트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왕위에서 축출하고 수도원으로 보냈고, 이소식을 들은 리우비길드는 충실한 가신을 해친 반역자를 무찌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에비 왕국을 공격했다. 비클라의 요한에 따르면, 리우비길드는 갈리시아를 황폐화시키고 안데카의 통치하에 있던 국고와 땅을 확보하고 고트족의 영역으로 삼는다.이소식을 들은 말라리크라는 자가 갈리시아에서 거병하며 수에비의 왕을 칭했다. 그러나 얼마 후 리우비길드의 부관에게 패배하여 체포된 뒤 리우비길드에게 끌려가면서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3.4.2. 서고트 왕국[편집]


3.4.2.1. 가톨릭 개종 전[편집]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에게 패해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자 서고트의 귀족들은 아직 어렸던 아말라리크 대신 알라리크 2세의 사생아인 게살레크를 추대하지만 4년 만에 수도인 툴루즈마저 함락당하자 나르본으로 파천하지만 얼마안가 나르본까지 공격당하면서 결국 피레네 산맥 넘어 바르셀로나로 수도를 옮긴다. 하지만 부르군트 군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르셀로나까지 공격하자 결국 히스파니아 내륙 깊숙한 곳으로 옮긴다.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은 처음에는 그가 서고트 왕이 되는 걸 용인했지만, 연이은 패전을 당하는 걸 보고 등을 돌렸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프랑크 왕국클로비스 1세와 협상해 프랑크 왕국이 아키텐을 획득하는 대신 서고트 왕국을 유지하는 걸 동의하게 한 후 군대를 파견해 바르셀로나까지 침입했던 부르군트족을 격파하여 본토로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그 후 510년 게살레크가 자신에게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서고트 귀족 고야리크를 처형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테오도리크 대왕에게 아말라리크를 새 왕으로 추대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511년 군대를 바르셀로나로 파견했다. 동고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르셀로나에 입성했고, 아말라리크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어렸기에 테오도리크 대왕이 '섭정왕'으로서 서고트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테오도리크 대왕은 이탈리아에 남아 통치를 행사했고, 리우비리투스와 암펠리우스를 민사 감독관에, 테우디스를 군사 담당관에 선임하여 히스파니아를 대신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히스파니아 신민들은 자신이 정한 로마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으며,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두 종족간의 혼인을 후원했다. 한편, 게살레크는 아프리카로 도주한 뒤 반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반달 왕 트라사문드는 동고트 왕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에 군사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그는 갈리아 남부로 이동한 뒤 프랑크 왕국이 장악하고 있는 아키텐으로 이동하여 프랑크 왕국의 후원을 받아 복위를 꾀했다.

당시엔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이 네 아들에게 분할되어 있었다. 이 네 명의 왕들은 권력을 확장해 상대방으로부터 복종을 얻어내길 갈망했지만, 강대한 위세를 떨치고 있는 테오도리크 대왕과 대적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후원을 받으려는 게살레크의 계획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몇년 간 세월을 보내다가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몇몇 서고트 귀족들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후 히스파니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513년 바르셀로나 외곽에서 테오도리크의 부관 이바스에게 참패했다. 그는 전장에서 탈출했지만 뒤랑스 강을 건너려다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었다.

526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한 뒤, 아말라리크는 비로소 실권을 잡았다. 그는 히스파니아 신민들이 동고트 왕국의 수도인 라벤나로 세금을 보내는 것을 중단했지만, 히스파니아로 이주한 동고트 관료들이 계속 머무르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했다. 한편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헀다. 527년 톨레도에서 정교 사제들이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529년 현치인 출신의 스테판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세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의 군주이며 지난날 부이예 전투에서 아버지를 죽여버렸던 클로비스 1세의 딸 클로틸데를 아내로 삼는 등 프랑크 왕국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클로틸데는 서고트 궁정 내에서 배척당했다. 왕국에 큰 손실을 입힌 클로비스 1세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은 데다, 아리우스파를 고수하는 귀족들 입장에서 정교를 믿는 왕비를 곱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교회에 갔을 때 거름 등 여러 가지 불순물을 그녀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내를 너무 심하게 때려서 코피가 났고, 그녀는 피묻은 손수건을 오빠 킬데베르 1세에게 보냈다고 한다.

킬데베르 1세는 여동생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31년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던 나르본을 침공해 서고트군을 격파했다. 아말라리크는 바르셀로나로 도피했으나 그곳에서 곧 피살당했다. 킬데베르는 여동생과 지참금을 챙긴 뒤 귀환했지만, 클로틸데는 도중에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아말라리크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친척 역시 알려진 바 없었기에, 알라리크부터 100여 년간 이어지던 발티 왕조는 단절되었다.

아말라리크 사후, 서고트 귀족들은 몇달 동안 새 왕으로 누구를 세울 지를 놓고 고심한 끝에 테오도리크 대왕에 의해 아말라리크의 군사 방면 후견인으로 선임되었던 테우디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동고트 계열이던 그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건 오랜 기간 군사 업무를 맡았고 2,000명의 사병을 갖추고 히스파니아의 로마 귀족가와 결혼 동맹을 맺어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한 데다 동고트 왕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왕위에 오른 테우디스는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해 국경지대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프랑크군이 점령한 셉티마니아 일부 지역을 탈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고, 나르본을 완전히 떠나 바르셀로나로 천도했다. 다만 수도를 정식으로 정하지는 않았고, 툴레도와 세비야도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다. 그리하여 남부 갈리아를 사실상 포기한 그는 그 대신 이베리아 반도 남부 해안 지역 공략에 초점을 맞췄다.

당시 이베리아 남부 해안 지역은 한때 수에비 왕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5세기 중반 수에비 왕국이 서고트족에게 참패한 뒤 서고트 왕국 역시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베티카의 여러 도시는 동로마 제국에 명목상 충성을 바쳤지만, 실제로는 무제한의 자치를 누렸다. 그는 이 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지만, 기록이 미비해서 공세의 진행 과정은 알 수 없다. 다만 곡창지인 과달키비르 계곡 일부 지역을 공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지브롤터에 이르렀을 때 반달 왕국의 군주 겔리메르로부터 동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이를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카르타고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달 왕국은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거절했다.

그 후 서고트군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세우타 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곧 공세에 착수해 세우타를 공략하고 그곳의 고트 수비대를 섬멸했다. 동로마군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세우타에 강력한 요새를 세우고 함대를 배치해 고트군의 상륙을 저지했다. 뒤이어 반달 왕국이 소유했던 발레아레스 제도도 동로마 해군에 의해 공략되었다. 540년, 동고트 왕국의 군주 헬데바두스는 고트족끼리 힘을 합쳐 동로마 제국에 맞서자고 제안했다. 그 역시 동로마 제국의 연이은 공세에 위협을 느꼈기에 지원군을 곧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541년 헬데바두스가 피살당하면서 연합 계획은 중단되었다.

541년 또는 542년, 클로타르 1세와 킬데베르 1세가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왔다. 여기에 테우데베르 1세가 두 삼촌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보냈다. 그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스크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팜플로니아를 점령한 뒤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랑크인들은 성 빈센트에게 바치는 마을 사람들의 기도에 겁을 먹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라고사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크군이 49일간의 포위전 끝에 사라고사를 함락했다고 하며, 사라고사의 교회 유물인 성 빈센트의 튜닉이 프랑크군에 약탈당했고, 칠데베르트 1세는 파리의 성문에 튜닉을 갖다대고 못을 박았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그는 보복을 결심하고 테우디기셀 휘하 고트군을 피레네 산맥에 매복시켰다. 프랑크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짊어진 채 귀환하다가 산길에 매복하고 있던 고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에 돌아갈 길이 끊기자, 프랑크군은 테우디기셀에게 뇌물을 줘서 하루 동안 길을 열게 했다. 테우디기셀은 그들이 산길을 지나가는 걸 허용했다가 후위대만 추격해 섬멸했다. 그렇게 프랑크군을 물리친 테우디스는 베르베르 부족들의 습격으로 아프리카 속주가 혼란한 틈을 타 세우타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547년에 감행된 세우타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고트군은 처음에는 요새를 맹렬히 공격했지만 주일이 되었을 때 무기를 벗어두고 예배에 전념했다. 동로마군은 이 때를 틈타 적진을 공격했고, 적 함대가 바다를 가로막는 바람에 빠져나가지 못한 고트군은 전원 피살되었다고 한다.

한편, 테우디스는 고트인과 로마인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려 노력했다. 그는 고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였지만, 로마인들이 신봉하는 가톨릭에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다. 바르셀로나, 예이다, 발렌시아에 대성당을 세우는 걸 허용했으며,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 역시 허락했다. 또한 그는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채택하면서 자신의 혈통이 플라비우스 왕조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모든 히스파니아 지방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이래 히스파니아에서 플라비우스 왕조에 대한 선망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등 당대 로마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는 군주들이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체택한 것도 고려했을 것이다.

546년 11월 24일, 테우디스는 로마인과 고트족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률을 반포했다. 이 법은 로마인과 관련된 알라리크 2세의 법전에 추가될 예정이었지만, "모든 신민"에게 적용된다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고트족에게도 유효했다. 그는 모든 지방 당국과 법원에 이 법전을 보내면서 앞으로 판결을 내릴 때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고트족과 로마인들의 법적 통합을 향한 첫 단계였다. 하지만 2년 후 테우디스는 세비야의 궁전에서 암살되었다.

테디우스가 암살을 당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같은 동고트 계의 사령관이었던 테우디기셀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설에 따르면 방탕하고 난폭했으며, 많은 고트 귀족들을 처형할 계획을 수립하고 축제 중에 한꺼번에 죽이려 했다고 하는 등 서고트 귀족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549년 12월, 그는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고 죽었다.

이후 테우디키셀 사후 음모를 주동한 이들 중 한 사람인 아길라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550년 군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철저하게 약탈했는데, 시민들의 존경을 받던 아시스클리우스 주교의 묘지마저 파헤쳐지자 시민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켜 아길라 1세의 군대를 쫓아냈다. 이때 그의 아들이 여러 병사와 함께 죽었고, 그는 메리다로 도망쳤다. 이 일로 아길라 1세의 지지도는 급락했고, 세비야에서 아타나길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길라 1세가 이를 진압하려 하자, 아타나길드는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동고트 왕국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황제는 이베리아 반도에 개입하기로 했다. 황제는 아타나길드와 모종의 조약을 맺었으나,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552년, 80세의 노장 티베리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동로마군이 스페인 남부 해안가에 상륙한 뒤 아길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지중해 연안과 내륙을 따라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베티가 일대를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귀속시켰다. 554년, 아길라 1세는 메리다에서 반란군에게 피살되었고 그를 따르던 무리는 아타나길드에게 귀순했다.

동로마 제국 덕분에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아타나길드는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후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코르도바 등 안달루시아 일대를 굳건히 지켰고, 아타나길드의 코르도바 탈환 작전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고이빈타 왕비와의 사이에서 두 딸 브룬힐트와 갈스빈트를 낳았다. 브룬힐트는 프랑크 왕국의 시게베르 1세와 결혼하여 아들 킬데베르 2세, 딸 인군트 2세와 클로도신드 2세를 낳았다. 갈스빈트 역시 프랑크 왕국의 킬페리크 1세와 결혼하여 메로베우스 2세를 낳았다. 브룬힐트는 613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크 왕국의 정계를 지배하면서 서고트 왕국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으며, 서고트 왕국은 이 덕분에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567년 12월, 아타나길드는 자연사했다. 생전에 아들을 두지 못했기에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서고트 왕국는 그의 사후 5개월간 왕을 정하지 못하다가 피레네 산맥 북쪽의 유일한 서고트 왕국령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의 공작 리우바 1세를 왕으로 옹립했으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지 않고 셉티마니아에 남아 있었고, 568년 말 또는 569년 초에 동생 리우비길드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이베리아 반도로 가서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570년~572년 사이에 리우바 1세가 죽자 리우바길드가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그는 그동안 왕위 분쟁으로 어지러운 왕국 내의 내치를 바로 잡으려고 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지방 영주들은 중앙 정부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소국을 세웠으며, 프랑크 왕국, 수에비 왕국, 동로마 제국의 위협은 거셌다. 이중 프랑크 왕국은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이는 터라 이베리아 반도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수에비 왕국은 일전에 서고트 왕국으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들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석권하길 희망하며 서고트 왕국 내 정교 신자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는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왕위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켈라리 등 왕실 근위대와 고트족 자유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동원했다. 그는 반기를 든 영주를 굴복시키고 그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근위대와 민병대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이에 근위대와 민병대는 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각지에서 할거하던 영주들은 토지를 대거 빼앗겨 몰락했다. 그렇게 내부 문제를 해결한 뒤, 그는 570년부터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과 하자르의 발칸 반도 침략, 사산 왕조의 동방 속주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기에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전쟁을 시작해 베티스 강을 건너 바스테티니아와 말라키타나를 황폐화시켰다. 571년 다시 원정을 감행해 요새화된 도시 아시도나를 공격해 내부 인사의 배신 덕분에 손쉽게 함락시키고 도시에 보관되어 있던 재원을 확보하고 동로마 군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572년에는 전임 국왕 아타나길드가 여러 차례 탈환을 시도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던 코르도바를 공략했으며, 고트군은 동로마령 이베리아 반도 영토의 수도인 카르타헤나 인근까지 진출했다. 결국 현지 동로마 당국은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고, 해군이 부족했기에 완전 제압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받아들였다. 협상 결과 베티스 계곡 전체가 그의 통치 아래 귀속되었고, 해안 도시들만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았다.

그 후 북서쪽 국경을 위협하는 수에비 왕국 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573년 사바리아로 진입하여 단숨에 평정한 뒤 두 아들 헤르메네길드레카레드에게 그 땅의 경영을 맡기고 공동 통치자로 삼았다. 574년 칸타브리아로 진입하여 수에비군을 격파한 뒤 칸타브리아를 왕국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575년 아레게니 산맥[12]에서 할거하던 아스피디우스를 복속시키고 그의 가족과 보물을 툴레도로 가져왔다. 576년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수에비군을 또다시 격파했고, 수에비 왕 미로가 평화를 간청하자 친히 그와 협상한 뒤 서고트 왕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577년 다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서로마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영역 사이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오로스페다에 진입해 현지 주민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한편, 그는 그동안 수도가 정해지지 않았던 서고트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툴레도를 수도로 확정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모델로 삼고 툴레도에 궁전을 세우고 정부 기관들을 잇따라 건설해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578년 차남 레카레드 1세의 이름을 따서 레코폴리스를 건설하고, 신도시 주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레코폴리스는 30헥타르에 달하는 큰 도시로 성장했고, 도시 내 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에 동로마 제국 양식의 대성당이 있는 궁전이 세워졌다.

그는 화폐에도 손을 댔다.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의 주화를 모방하여 유스티누스 2세의 이름으로 된 동전을 발행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확보하게 된 뒤에는 자신만의 주화를 주조했다. 그는 중요한 사건을 화폐에 문구로 담게 했다. 메리타를 공략했을 때는 "메리타의 승리(EMERITA VICTORIA)"를 새겼으며, 세비야를 공략한 후에는 "신과 함께 세비야를 정복했다(CVM DEO SPALI ADQVISITA)"라는 문구가 새겨진 주화를 발행했다.

리우비길드는 법전 편찬에도 힘을 기울였다. 578~580년에 에우리크의 법전과 알라리크의 서약서를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편한 '개정 법전(Codex revisus)'이 신설되었다. 그는 이 법전에서 딸과 아들 모두 평등한 상속권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로마인과 고트인 사이의 결혼 금지를 철폐했다. 여기에 고트족의 특별한 지위도 상당부분 폐지되었다. 이는 그가 두 종족이 동등한 관계가 되어서 왕국에 충성하는 신실한 신민이 되기를 희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왕실 내에 분란의 씨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579년 프랑크 왕국이 자국에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장남 헤르메네길드를 프랑크 왕국의 군주 시게베르 1세의 딸 인군타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이 결혼은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왔다. 인군타는 어린 나이에도 아리우스파 개종을 단호히 거부하고 남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그의 아내이자 헤르메네길드의 계모이고 독실한 아리우스파 신자인 고이빈타 왕비는 이에 분개해 며느리와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그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고심했다. 아리우스파를 확고히 믿는 고이빈타 왕비와 고트 귀족들의 분노를 사서는 안 됐고, 그렇다고 며느리를 해꼬지했다가는 강력한 국력을 갖춘 프랑크 왕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베티카 속주 일부와 세비야 시를 장남에게 떼주고 그곳에서 통치를 행사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조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세비야의 주교 레안데르의 설득을 받아들인 장남이 579년 또는 580년에 가톨릭 세례를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은 뒤 'REX'를 칭한 것이다.

또한 동전에 자신의 초상을 새기고 'A DEO VITA(신의 구원)'이란 문구를 덧붙이며,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관철시키겠다고 선포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동로마 제국, 수에비 왕국과 손을 잡았고, 프랑크 왕국 내 인군타의 친척들과도 연계했다. 리우비길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과의 정면 대결을 회피했다. 그 대신 581년 아들과 동맹을 맺었을 지도 모르는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해 일부 영역을 공략하고 빅토리아쿰(현재 빅토리아)를 건설했다. 이후 피레네 산맥에 강력한 분견대를 배치해 프랑크 왕국이 헤르메네길드를 지원하려고 달려드는 걸 사전에 차단한 뒤, 582년 아들을 향해 진군하여 메리다를 공략하고 수에비 왕국과 세비야 사이의 연락로를 차단했다. 헤르메네길드는 레안데르 주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해 구원을 간청했지만,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던 동로마 제국은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다.

그 후 리우비길드의 토벌군은 세비야를 포위해 1년 이상 공성전을 벌였다. 583년, 수에비 왕 미로가 병력을 동원하여 세비야 구원에 나섰으나 도중에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헤르메네길드는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코르도바로 도망쳤다. 그 후 세비야를 함락시킨 리우비길드는 584년 코르도바를 노렸다. 그는 코르도바의 동로마 총독에게 뇌물을 줬고, 총독은 헤르메네길드에게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인군타와 어린 아들 아타나길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고, 헤르메네길드는 교회로 숨었다가 584년 초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한 명의 하인과 함께 아버지 앞에 찾아갔다. 리우비길드는 아들을 처음에 발렌시아로 유배했고, 나중에는 타라고나로 보냈다. 585년 3월 24일, 시세베르트라는 인물이 헤르메네길드를 살해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리우비길드 왕은 이 일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고트족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고 로마인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제든지 반란이 터져나올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로마인을 아리우스파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툴레도에서 아리우스파 공의회를 소집해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성물과 순교자 공경을 받아들이도록 권고했고, 가톨릭식 세례 성사도 용인하게 했다. 여기에 가톨릭 사제들과 순교자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로마인들이 감화되어 아리우스파로 기꺼이 개종하기를 희망했다. 그의 이같은 전술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사라고사의 빈센티우스 등 몇몇 저명한 주교들이 아리우스파로 개종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로마인들이 좀처럼 아리우스파로 개종할 기미가 없자, 그는 박해를 감행했다.

585년, 리우비길드는 미로 왕의 전사 후 왕위를 놓고 분란이 벌어진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침략하여 안데카 왕을 사로잡고 수에비 왕실의 보물을 탈취했다. 안데카 왕은 툴레도로 끌려간 뒤 수도자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수에비 왕국을 돕기 위해 상선을 보냈지만, 이 상선은 도중에 갈리시아에서 라우비길드의 명령으로 사로잡힌 뒤 모든 물건을 빼앗기고 선원 대다수가 생포되었다. 말라리크 왕이 수에비 왕국의 잔여 세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라우비길드 휘하 부관에게 진압되었고, 수에비 왕국은 서고트 왕국의 속주로 병합되었다.

한편, 프랑크 왕국은 상선을 탈취한 것에 보복하고자 셉티마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프랑크군은 진군 도중에 자기 나라 주민들을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심지어 교회를 강탈하고 성직자들을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다. 그러다 고트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어려워지자 자기들이 황폐화시킨 영토를 통과하여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물자 부족과 전염병 창궐, 자국 주민들의 보복 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라우비길드는 차남 레카레드를 시켜 반격을 개시하게 했고, 레카레드는 카바레 요새를 점령하고 툴루즈 일대 대부분을 황폐화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뒤이어 론 강 유역의 잘 요새화된 도시인 우게른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된 재산 및 포로들은 님 시로 이송되었다. 586년 레카레드는 재차 공세를 개시해 나르본에 도착하여 여러 전리품을 획득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귀환하지만 도중에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레카레드 1세로 즉위한다.


3.4.2.2. 가톨릭 개종 후[편집]

레카레드 1세는 아버지와 달리 다수의 신민이 신봉하는 가톨릭을 박해하고 소수의 고트 귀족만이 믿는 아리우스파를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며, 로마 교황과 프랑크 왕국 등 주변 가톨릭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587년 2월 또는 3월에 정식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고 아리우스파 사제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했으며, 그해 4월 툴레도에서 가톨릭을 따르는 성 마리아 교회를 축성했다. 이후 아버지가 몰수한 교회 재산을 전부 돌려주고 파괴된 교회와 수도원을 복원했으며, 형의 명예를 신원하고 형을 죽인 시세베르트를 체포해 처형했다.

589년 툴레도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비세우, 투야, 루고, 포르투, 팔렌시아, 토르토사 등 각 도시의 주교들을 불러들었다. 여기엔 48명의 아리우스파 주교와 8명의 전 아리우스파 주교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왕의 권고에 따라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가톨릭 주교와 전 아리우스파 주교가 각각 한 명씩 별도의 교구를 임시로 다스리게 했다. 이외에도 유대인들은 기독교인 노예를 두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인 여성 사이에서 첩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첩실에게서 낳은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도록 규정하는 등 전례와 교회법에 관한 일련의 법률이 반포되었다.그리고 2년이 지난 후 지속적으로 열린 세비야 공회의에서 전 아리우스파 사제들이 사제로서 직위를 유지하고 옛 아리우스파 교회를 가톨릭 교회로 개조하는 것, 나르본 공의회에서는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주교로 세워질 수 없다는 법령을 체택했다. 아리우스식 예배는 고트식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제 아리우스파가 공식적으로 사멸되면서 고트인들은 그들의 언어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히스파니아-로마인의 언어로 전환했다.

늘 그렇듯 이러한 흐름에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파를 국가 신앙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했으며 이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여러 귀족은 가톨릭이 국교로 확정되면 자신들의 지위가 상실될 것을 두려워했다. 587년 셉티마니아에서 나르본 주교 아탈루크와 셉티마니아 백작 그라니스타와 빌디게른이 반란을 일으키며 프랑크 왕 군트람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아탈루크는 곧 죽었고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588년, 메리다 백작 세가와 아리우스파 주교 수나가 음모자들을 모아 루시타니아 봉기를 꾀했다. 그들은 리우비길드 치세 때 망명했다가 리우비길드가 사망한 뒤 메리다 주교로 복귀한 가톨릭 주교를 살해하고 세가를 왕으로 세워 중앙 정부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수나는 망명했으며 세가는 두 손을 잃고 갈리시아로 추방되었다.

더 큰 위협은 리우비길드의 전 왕비이자 독실한 아리우스파인 고이빈타가 지원한 음모였다. 고이빈타는 툴레도에서 반 가톨릭 음모의 주동자 역할을 맡아 아리우스 주교 울디다와 함께 레카레드 1세를 축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사망했고, 또한 울디다는 추방되었고, 음모에 가담한 무리들은 모조리 처벌받았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프랑크 왕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다. 킬데베르트 2세는 그의 형수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인군타 공주의 죽음에 대해 10,000솔디를 배상금으로 받는 조건으로 서고트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또다른 프랑크 왕 군트람은 동맹 제의를 묵살하고 레카레드에게 반기를 들려는 자들을 지원했다. 그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군트람을 따르는 모든 상인이 셉티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국 587년 레카레드 1세와 군트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군트람의 부하인 데시데리우스의 지휘하에 셉티마니아의 도시 카르카손을 침공했다. 이 공격을 미리 파악한 도시 주민들과 서고트군은 도시 외곽에서 데시데리우스와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트군은 미리 계획한 대로 후퇴했고, 데시데리우스는 즉시 추격했지만 적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열의가 지나친 나머지 주력부대에서 떨어졌다. 고트군은 즉시 그를 에워쌌고, 데시데리우스는 자신과 함께 오던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살해되었다. 지휘관이 피살당하자, 프랑크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2년 후, 군트람은 다른 부하였던 부손이 6만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카르카손을 공격했다. 도시 주민들은 대군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못 내고 군트람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프랑크군이 승리에 취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사이, 레카레드가 파견한 루시타니아의 클라우디우스 공작이 갑작스럽게 습격했다. 프랑크군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수적으로 열세한 적을 밀어붙였다. 클라우디우스는 후퇴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미리 준비한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프랑크군은 적을 추격하던 중 메복에 걸려 프랑크군은 약 5,000명을 잃고 2,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모든 보급물자를 상실했고, 나머지 병력은 고트군의 추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크 왕국으로 도주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일찍이 리우비길드에게 빼앗긴 이베리아 영토를 탈환하기로 마음먹고 코멘티올로스 장군에게 공세를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코멘티올로스는 먼저 동로마 제국의 이베리아 영토 중심지인 카르타헤나 성벽을 복원하고 새로운 성문을 건설했다. 뒤이어 이베리아 남부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략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상당 부분 탈환했다. 레카레드는 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동로마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리우비길드에게 패배한 뒤 서고트 왕국에 굴복했던 바스크인들이 반기를 들어 독립을 회복한 후 이웃 지역에 대한 침략을 시작했다. 레카레드는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평원으로 내려온 적을 격퇴했을 뿐 고산 지대로 숨은 적을 결정적으로 물리치지 못했다. 그는 바스크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빅토리아를 기점으로 장벽을 세우게 했다.

레카레드는 클라우디우스 등 이베리아-로마 귀족들을 중용했고, 고트인과 로마인에 대해 통일된 법적 절차가 확립된 법률을 발표했다. 이후 고트족과 이베리아-로마인은 동일한 법원에서 동일한 법규로 재판을 받았다. 또한 그는 로마식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채택했는데, 이후 역대 서고트 국왕들은 플라비우스를 항상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특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고트족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590년, 아르기문드 공작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 반란을 꾀헀지만 결국 발각되었다. 아르기문드는 체포된 후 오른손이 잘린 뒤 툴레도 광장에서 당나귀에 실린 채 조리돌림당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601년 12월 21일 레카레드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바 2세가 1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603년 고트족 귀족 위테리크가 반란을 일으켜 툴레도로 진격, 세습 왕조를 거부하고 게르만 관습에 따른 선출 원칙을 선호하는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리우바 2세는 생포된 뒤 폐위된 군주를 다루는 고트족 관습에 따라 오른손이 잘렸다. 그러나 위테리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603년 여름 감옥에 갇혀 있던 그를 끌어내 처형했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고히 한 위테리크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면전을 단행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우리키우스가 폐위된 후 포카스의 폭정과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 별다른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고, 이 점을 이용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동로마 영토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베티카 남부 일대를 석권하고 지브롤터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원정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사군툼에서 일부 동로마군을 사로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승전이 없었다. 반면 이 시기에 비스크인들의 북방 영토에 대한 약탈전이 수그러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군주 테우데리크 2세가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우데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테우데리크 2세의 할머니 브룬힐트가 결혼을 막았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오도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다.

610년 4월, 위테리크는 왕궁에서 연회를 베풀던 중 암살당했다. 유해는 별다른 장례식 없이 곧바로 매장되었고, 공모자 중 한 사람이었던 군데마르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려 했고, 에브로 및 도루 강 계곡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전을 벌이던 바스크인들을 토벌했다.

군데마르는 동로마 제국 및 바스크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네우스트리아-아우스트라시아-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을 잡아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을 견제하는 위테리크 왕의 정책을 물려받는 한편, 종교 정책에서는 레카레드 1세의 가톨릭 진흥 정책을 이었다. 610년 10월 톨레도에 공의회를 소집해 일련의 법령을 포고했다. 이 법령에서는 톨레도를 모든 이베리아의 중심 도시로 선언했으며, 카톨릭이 비단 로마인만의 신앙이 아니라 모든 이베리아인의 종교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 그는 위테리크와 갈등을 벌이다가 자신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불가르를 셉티마니아 공작으로 세우고 프랑크 왕국과의 모든 외교 업무를 일임했고,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 관계를 굳건히 유지하고 보조금을 동맹국에 대거 보내서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다.그러나 그의 계획은 생전에 실행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610년경에 사망한 아내 힐도아라가 있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612년 2월 또는 3월에 툴레도에서 자연사한 뒤 유력 귀족인 시세부트가 왕위에 올랐다. 시세부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아스투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리퀼라 또는 티우파디 백작이 즉시 이를 진압하러 출정했는데,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는 했지만 아스투리아스 산맥이 워낙 험준했기 때문에 완전 제압엔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수인틸라 장군은 칸타브리아 부족 로콘 또는 룬콘 부족을 복속시켰다.

612년 바스크인들이 왕국의 북쪽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시세부트는 613년 최근 창설된 서고트 함대를 친히 이끌고 칸타브리아와 오트리고니아, 바스크, 바르둘리아, 카리스티아 등지의 해안에 상륙하여 칸타브리아-바스크인과 전투를 벌였지만, 바스크인들이 지배하는 산악지대를 평정하지 못했다.

그는 공연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의 아들 아달랄트에게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했다.

612년 8월 2일 부분일식이 이베리아 반도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자 각지의 시골에서 이교 관습과 미신이 부활했다. 이에 그는 613년 칸타브리아-바스크 원정 중에 일식에 관한 시를 짓고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에게 보내면서 백성들의 무지와 폭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614년 1월 13일, 타라코나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598년 우에스카 공의회에서 성직자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교리를 확정지었다.

614년과 615년에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 여러 번 승리했으며, 이 무렵에 말라가를 정복했다. 동로마 총독 카르사리우스가 기독교인끼리 피를 더 이상 흘리지 말자고 호소하자, 그는 이에 마음이 움직여 서로 포로를 교환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한편, 시세부트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펼쳤다. 레카레드 1세 때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다"는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 법령을 관철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 노예와 재산을 기독교인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에 팔아야 하며, 아프리카나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에게 그들을 팔 수 없고, 거주지 근처에서만 판매가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유대인은 기독교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지만, 해방된 노예는 국가에 귀속되며 이전 유대인 주인의 후원은 금지되었다. 거짓으로 판매한 유대인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이 법령은 612년 7월 1일에 발효되었으며, 이 날짜 이후에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한 유대인이 발견되면 절반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는 석방되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기독교인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엄히 금지했다.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이 가톨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엔 공개 장소에서 채찍질을 하고, 끝까지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거나 왕이나 왕이 임명한 사람의 노예로 넘겨졌다. 또한 가톨릭인과 결혼한 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평생 추방되지만, 개종한다면 노예를 포함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아야 했다. 615년경에는 일부 유대인들을 상대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이 피살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시세부트는 문학과 헌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61편의 라틴어 시를 집필했는데, 주요 주제는 천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과학에 대한 관심을 품고 천문학과 지리학에 관한 백과사전을 집필했다.

621년 시세부트 왕이 사망한 뒤, 아들 레카레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3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시세부트의 부관이었던 수인틸라가 왕위에 올랐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수인틸라가 레카레드 2세를 암살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수인틸라는 즉위 직후 동로마 제국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감행했다. 2명의 동로마 총독을 사로잡는 등 맹렬한 공세를 벌인 끝에, 625년경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동로마 요새인 카르타헤나가 함락되었고, 발렌시아에서 카디스까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지대가 서고트 왕국의 영역에 귀속되었다.

한편, 그의 통치 초기에 바스크인들이 서고트 왕국 북쪽 지대를 습격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뒤 이들을 상대로 공세를 벌인 끝에 바스크인들이 자신의 권력에 복종하고 인질을 바치게 했다. 이후 바스크인들의 재침을 막기 위해 올리타 요새를 건설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속 귀족과 고위 성직자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 그는 후계를 미리 정하기로 하고, 어린 아들 레키메르를 공동 왕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레키메르가 요절해버리면서, 후계 구도를 굳히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귀족의 권리를 축소하려는 그의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한편, 그는 시세부트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지속했지만 강도를 어느정도 누그러뜨렸기 때문에 해외로 망명한 유대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631년, 시세난드가 이끄는 귀족들이 수인틸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500파운드에 달하는 황금 접시를 바치겠다고 제안했는데, 접시 자체가 수백년전 훈족과의 전쟁 때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아버지 테오도리크 1세를 잃은 토리스문드에게 위로하는 차원에서 선물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었기에 프랑크 왕 다고베르 1세는 이 제안에 혹하여 시세난드롤 돕기로 했다.

프랑크 왕국이 시세난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이 이베리아 반도 각지에 알려지자, 민심은 급격히 동요했다. 프랑크군이 사라고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라고사 시민들이 시세난드에게 귀순했고, 모든 군대는 시세난드를 왕으로 선포했다. 631년 3월 26일 시세난드가 툴레도에 입성한 후 그는 폐위되었고, 프랑크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싣고 조국으로 돌아간 뒤, 다고베르 1세는 약속한 접시를 받기 위해 시세난드에게 사절을 보냈다. 시세난드는 약속대로 접시를 건넸지만, 사절들이 귀환 중에 강도떼의 습격을 받으면서 접시를 잃어버렸다.

이후 양자간의 긴 협상 끝에, 다고베르 1세는 200,000솔리디에 달하는 금액을 보상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 그라나다, 메리다 일대에서 유딜라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톨레도 교회에서도 새 정권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오간 끝에 갈라디 대주교가 인근 수도원으로 은퇴한 사건이 벌어졌다. 뒤이어 대주교를 밑은 유스투스는 왕의 지원을 받은 장로 게론티우스와 정쟁을 벌였다. 이렇듯 안팎으로 갈등이 벌어졌지만,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시세난드를 지지하자, 명망높은 그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이 순응하면서 교회의 분란은 잦아들었다.

633년 12월 5일,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가 의장을 맡고 나르본과 이베리아 전역에서 온 66명의 주교가 참여한 제4차 톨레도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전 왕 수인틸라의 '악행'을 폭로하고 시세난드의 왕위 계승을 확정했으며, 수인틸라를 먼 곳으로 유배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또한 공의회는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노리거나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한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기로 결의했으며, 그에게 대적한 사제들은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수도원으로 물러가야 했으며, 외국 교회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은 것 역시 금지되었다. 시세난드는 온건한 군주로서 정당하고 경건하게 통치할 것을 약속했으며, 세습을 포기하고 왕위 계승을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맡기겠다고 밝혔다. 시세난드는 교회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성직자들의 모든 세금을 폐지했다.

공의회는 시세부트 왕으로부터 개시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재확인하고, 유대인이 기독교인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세례를 받은 유대인 자녀는 부모와 분리되어야 하며, 세례받은 유대인들이 유대교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려갔고, 기독교인이었다가 유대교로 개종한 자는 공개 채찍질을 당했다. 유대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법령을 집행하지 않는 자는 세속인이든 성직자이든 상관없이 파문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인받은 시세난드는 636년 3월 12일에 사망했고, 친틸라가 귀족과 주교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636년 6월 30일에 소집된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왕이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은 차기 왕이 상속자들로부터 몰수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또한 왕의 측근과 지지자, 고문 및 측근들은 왕이 죽은 뒤에도 왕이 하사한 선물을 그대로 가질 수 있었으며, 왕의 가족과 친구들의 재산을 침해한 죄를 지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출된 왕은 반드시 귀족 출신이어야 하며, 성직가, 노동자, 외국인 중에서 선택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제5차 톨레도 공의회엔 갈리아 나르본에서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참석하지 않은 주교가 많았기에 권위가 떨어졌다. 이에 638년 1월 9일, 제6차 톨레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나르본에서 3명의 주교가 참석했으며, 이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이베리아 주교들도 대거 참여했다. 공의회는 교회 조직에 손을 대는 한편, 살해된 왕의 후계자는 왕을 죽인 자를 처벌하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포고했다. 여기에 외국으로 망명한 뒤 서고트 왕국에 해를 끼치거나 특정 범죄의 피고인이나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은 파문되었다. 아울러 가톨릭을 따르지 않는 비기독교인의 국내 거주를 금지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유대인을 추방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민중 앞에서 회심을 밝히는 것을 의무화했다.

공의회를 통해 왕위를 보장받은 덕분인지 3년 6개월 만인 639년 12월 20일에 자연사했고, 아들 툴가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642년, 고트족 귀족들은 79세의 친다수윈트를 새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반란은 바스크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어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친다수윈트는 톨레도로 진군해 툴가를 붙잡아 삭발시킨 후 수도원으로 보내버리고 정식으로 서고트의 왕이 되었다.

친다수윈트를 옹립한 귀족들은 그의 나이가 79세에 달하니 자기들 입맛에 따라 부려먹을 수 있다고 여겼을 테지만, 이것은 오판이었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뒤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먼저 이베리아 남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곧바로 진압하고 'VICTOR'라고 새겨진 기념 주화를 메리다에서 주조했다. 뒤이어 귀족들을 꺾어버리기 위해 정력을 쏟아부었다.

친다수윈트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한편, 지참금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르면, 지참금은 1,000 솔리디, 노예 10명, 여노예 10명, 말 10마리를 초과해서는 안 되며, 이를 초과하는 지참금은 전원 국가에 귀속되었다. 이는 귀족들이 결혼 동맹을 굳건히 다져서 자신에게 맞설 세력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배층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왕실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은 '법복 귀족'이 기존의 귀족들을 대체했는데, 이들은 모든 일을 할 때 왕에게 항상 감사해야 하고, 특별한 충성 서약으로 구속되었으며, 왕의 사람과 항상 동행해야 했다. 그들은 왕에게 봉사하는 대가로 반역자들의 노예와 재산을 챙길 수 있었다. 이에 기존의 귀족들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많은 이는 성직자가 되었다. 643년에는 귀족 억압 정책을 합법화하기 위해 나라와 신민에 반대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특별법을 공포했는데, 이에 해당하는 자들 중에는 외국으로 도피한 자들도 포함되었다. 이 법은 공포 이전에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소급 적용되었다.

이렇듯 철저한 귀족 탄압으로 왕권을 강화한 친다수윈트는 교회의 권위를 사용하여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교회가 왕권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교회 망명에 대한 권리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르면, 살인자는 교회에 숨어 있어도 처벌받아야 했다. 그는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톨레도 대주교 에우제니오 1세가 646년 사망하자, 그는 세비야 주교 브라올리온에게 편지를 보내 브라올리온의 심복인 에우제니오를 수도로 올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브라올리온은 자신에게 충실한 사제를 톨레도에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가 자신의 소원은 곧 왕명임을 분명히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다.

646년 11월 18일, 제7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처음으로 세속 계급 인사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통치 5주년을 축하하는 문서를 읽고 기록을 보관하는 공증인도 있었다. 공의회는 왕의 칙령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강화했다. 643년의 특별법을 재차 공인하고, 세속적 형벌에 교회 형벌을 추가했다. 이리하여 왕을 적대시한 자는 잡히면 사형당할 뿐만 아니라 파문되었다. 이 조치는 주교를 포함한 모든 성직자에게 적용되었다. 여기에 왕에 대한 모든 비판은 범죄로 간주하고 재산의 절반을 몰수하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공의회는 수도원 사제들은 교육을 잘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당국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연설을 금지했으며, 톨레도와 가까운 곳의 주교들은 톨레도에서 적어도 일년 에 한 달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공의회에는 41명의 주교만이 참석했고, 타라코나 대표는 2명뿐이었으며, 셉티마니아 대표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회 계층 내에 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왕권을 다진 그는 법률체계의 완전한 재편을 목표로 삼고 사라고사 주교 브라올리온의 도움을 얻어 신 법전을 만들게 했다. 이 법안은 이베리아-로마인이 사용하는 알라리크 2세의 서약서와 고트족이 사용하는 리우비길드 왕의 법전을 완전하게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왕국의 모든 주민을 민족의 구별 없이 하나의 신민 집단으로 만들려 했다. 이제 하나의 법률 체계가 이베리아 반도와 셉티마니아 전역에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생전에 완료되지 않았고, 654년 아들 레케스윈트 치세 때 비로소 공포되었다.

그의 법은 국가의 경제 및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루었으며, 왕의 행동 방식과 목표를 특정지었다. 사형과 재산 몰수는 반국가 음모에 적용되었으며, 반역 계획은 행위 그 자체로 분류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는 비록 사면을 받더라도 의무적으로 실명형을 받아야 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왕이 죽은 후에도 이 법을 준수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국가의 적은 절대로 사면받을 수 없었다. 왕의 친구와 가족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 왕이 제공한 선물은 향후 몰수될 수 없었다. 거짓 고발을 고의로 한 제보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그는 주인이 노예를 임의로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등 하층 계급에도 신경썼다.

친다수윈트는 교육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사라고사 주교 타이온에게 로마에서 도덕과 철학에 관한 책을 가져오게 한 뒤, 이를 토대로 신민을 가르치게 했다. 백성들에게 자선 행위를 베풀었으며, 성 로마노스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 아니 레키베르가를 안장한 후 나중에 그곳에 함께 묻히기를 희망했다.

친다수윈트는 제4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귀족과 주교로 구성된 평의회가 왕을 선출한다'라는 조항을 폐기하고 649년 1월 20일 아들 레케스윈트를 공동 왕으로 세워서 후계자임을 모두에게 공개했다. 653년 9월 30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개인 재산을 빈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레케스윈트는 아버지의 탄압 정책에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프로이아는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사라고사를 포위하면서 바스크인과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수비대와 주민들이 완강한 저항을 해서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레케스윈트는 진압군을 편성해 사라고사 성벽 아래에서 프로이아와 바스크 동맹군을 상대로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격파했다.

그리하여 프로이아의 반란을 진압했지만, 아버지의 강경 정책으로 인해 불온해진 분위기를 수습할 필요성을 느낀 레케스윈트는 653년 12월 16일 제8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공의회에서 반란군에게 불관용으로 일관하는 이전 공의회의 결정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왕의 의무에 위배된다고 밝히며, 광범위한 사면령을 발표하고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다만 몰수된 재산의 반환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 재산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왕국의 재산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과 후손들은 친두스윈트가 즉위하기 전에 가졌던 재산만은 상속받을 수 있고, 왕이 된 후에 얻은 모든 재산은 국고에 헌하며, 왕위에 오른 자는 출신과 상관없이 이를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왕이 사망한 뒤 주교와 최고위 관료들의 동의하에 최대한 빨리 새 왕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는 아버지가 시작합 법전 편찬 작업을 지속해 654년 <Liber Iudiciorum(심판의 책)>을 반포했다. 여기에는 역대 국왕들이 제정한 법 324조항, 친두스윈트의 법 99조항, 그리고 자신이 제정한 법 87조항이 포함되었다. 로마인과 고트인의 구분 없이 동등한 조건하에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노예에 대한 신체적 상해를 금지하고, 주인이나 후원자의 명령으로 범죄를 저지른 자유인 및 노예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조항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분쟁을 일으켰고, 18년간 혼란이 이어졌다. 653년 제8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했지만, 그는 교회에 더 이상 양보할 의사는 없었다. 655년 제9차 톨레도 공의회와 656년 제10차 톨레도 공의회가 개최되었지만, 오직 교회 문제만 다뤘을 뿐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후 그가 사망할 때까지 16년간 공의회는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672년 9월 1일, 레케스윈트 왕이 살라망카 인근의 게르티코스 휴양지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에겐 후계자가 없었기에, 귀족과 주교들은 왕이 사망한 날 긴급 회의를 연 뒤 왐바를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왐바는 즉시 톨레도로 이동한 뒤 9월 19일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에 반발한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셉티마니아의 님 백작 힐데리크가 현지 주교들의 지지를 받고 왕을 참칭한 뒤 왐바 왕에게 충실한 님의 주교 아레지우스를 체포해 족쇄로 묶어 프랑크 왕국에 보내버린 후 자신을 지지하는 사제 라니미르를 새 주교로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왐바는 이베리아-로마 출신의 사령관 플라비우스 파울루스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나르본에 입성한 뒤 현지 주교 아르데발트를 몰아내고 왕을 참칭하고 레카레드 1세가 지노라의 성 펠릭스 교회에 기증한 금관을 머리에 썼다. 힐데리크 역시 파울루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후 당시 궁정 관료를 맡고 있던 스페인 타라코나 공작 라노신드의 지지를 받았고, 프랑크 왕국 및 바스크인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는 왐바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서쪽의 왕으로 칭하고 왐바를 동쪽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는 파울루스가 왕국을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걸 의미했다.

왐바는 바스크인과의 전쟁을 수행하던 중 칸타브리아에서 파울루스의 반란 소식을 접했다. 그는 7일 안에 바스크인들의 영역을 파괴하고 인질과 조공을 받아낸 채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칼라호라와 우에스카를 거쳐 나르본으로 진격했다. 바르셀로나, 지로나가 잇따라 항복한 뒤, 그는 피레네 산맥에 접근하면서 군대를 3개의 분견대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카리타니아 지역의 주요 도시인 카스트룸으로 향했고, 두 번째는 아브손 시를 통해 피레네 산맥의 중앙 능선으로 이동했으며, 세 번째는 해안가를 지나가는 로마 가도를 따라 이동했다. 코콜리베라(현재 콜리우르), 불투라리아, 카스트룸을 공략한 뒤, 토벌대는 칼루수라 요새를 공격해 수비대의 저항을 물리치고 함락했고, 뒤이어 사르도니아 요새로 진군하여 비티미르 백작을 물리치고 요새를 장악했다. 이후 평야 지대로 내려가 전군을 규합한 뒤 나르본으로 이동하면서, 별도의 분견대에게 해상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파울루스는 왐바의 군대가 나르본에 접근해오자 님으로 후퇴하면서 비티미르에게 나르본을 지키게 했다. 이어진 공성 끝에 토벌대가 성문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를 장악하고 반군을 제압했다. 비티미르는 교회로 피신한 뒤 얼마 동안 농성했다가 곧 체포되었다. 비테라(현재 베지에)와 아갈프 시가 뒤이어 항복했으며, 마갈로나 시를 사수하던 후밀트 주교는 왕의 군대가 포위 공격을 준비하는 데다 바다에서 함대가 접근해오는 걸 보고 파울루스에게 달아났다. 지도자 없이 남겨진 마갈로나 시는 곧바로 왐바에게 항복했다.

673년 8월 31일, 왐바의 군대는 파울루스 일당이 숨은 님을 포위했다. 반란군은 프랑크군이 곧 도와주러 올 거라고 믿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다음날, 왐바는 프랑크군이 후방에서 공격할 것을 우려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도시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예비대를 공방대에 투입했다. 토벌대는 곧 성벽을 점령했고, 파울루스와 추종자들은 원형 극장으로 피신했다. 도시를 공략한 토벌대는 약탈을 자행하다가 주민들과의 충돌로 큰 손실을 입었다. 한편 원형 극장으로 피신한 반군 사이에서 내분이 벌어졌다. 지역 귀족들은 파울루스와 함께 온 자들이 자신들을 덫으로 유인했다고 비난하면서, 왕의 사면을 받기 위해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파울루스는 나르본 주교 아르게바드는 보내 왐바에게 자비를 구했다.

왐바는 약탈을 중단하고 군대를 도시 밖으로 이동하여 전투 대형을 구축했고, 원형 극장에 있던 파울루스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끌어냈다. 이후 파울루스 편에서 싸운 프랑크족과 색슨족을 조국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이베리아 반도로 끌고 갔다. 한편, 왐바는 파괴된 나르본의 복원을 수행하고 성벽의 틈을 수리하고 불타버린 성문을 대신할 새로운 성문을 세웠으며, 방치되었던 시신을 묻고 약탈한 재산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게 했다.

얼마 후, 루파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크군이 비테레 일대를 침공하자, 왐바는 즉시 그들을 향해 진군하면서 적의 매복 공격을 격퇴한 뒤 프랑크군 앞에 나타났다. 루파는 그제야 파울루스가 패배했다는 걸 깨닫고 즉시 퇴각했다. 톨레도로 돌아온 왐바는 재판을 거행했다. 단순 가담자는 사면되었고, 파울루스와 52명의 추종자들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았다. 왐바는 그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실명형에 처하기로 했다. 파울루스의 반란을 도왔던 유대인들은 나르본에서 추방되어 해외로 망명했다.

파울루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왐바는 673년 11월 1일 군 복무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군대는 온갖 범죄와 강도, 방화, 폭력을 일삼았고 많은 이들은 군 복무를 피했다. 나르본 공략 때 병사들의 무분별한 약탈을 목격했던 그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혁할 필요를 느꼈다. 그가 발표한 법에 따르면, 군 복무는 왕국의 모든 주민에게 확대되었으며 적의 침공이 처음으로 알려졌거나 내부에서 소란이 발생할 경우 모든 주교, 공작, 백작, 교구 또는 위임받은 자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며 현지의 고위 관리와 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또한 모든 주민은 자신이 속한 '당'에 관계없이 국가, 군주, 또는 상속인을 보호해야 했다. 이 조항은 반대 그룹에 속한다는 명목으로 외국과의 전쟁 또는 내전에 참여를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교와 다른 사제들도 군 복무를 수행해야 했고, 노예 주인들은 노예들과 함께 군대에 가야 했다. 왐바의 법은 적의 침략이나 내란에 맞서 군사 임무를 수행하지 않은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심할 경우 노예로 삼았다.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 경우는 오직 심한 질병에 걸렸을 때만 가능하지만, 이 경우에도 환자는 자기 비용으로 부하들을 군대에 보내야 했다.

많은 귀족들은 노에를 군 복무에 참여시키라는 것에 반감을 품었고, 성직자들도 군 복무에 참여하라고 강요받는 걸 불쾌하게 여겼다. 이에 왐바는 반발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탄압했다. 왐바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에르위그는 왐바 시대에 이베리아 전역에 폭동이 발발했고 거의 절반의 귀족이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하층민의 수가 너무 줄어들어 법정에서 충분한 수의 증인을 유지한느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왐바의 '악행'을 강조하게 위한 수사적 표현이겠지만, 귀족들이 왐바 시대에 큰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왐바는 귀족과 교회의 반발로부터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자유민과 해방노예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렸다.

왐바는 674년 수도인 톨레도를 개조하여 웅장하고 정교한 건물과 구조물로 장식했고, 이때 세워진 탑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졌으며, 이에 상응한는 비문들도 나란히 세워졌다. 또한 그는 화폐 발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반란의 온상지였던 나르본의 주조소를 폐쇄하는 등 화폐 주조소를 대폭 줄이고, 오직 톨레도를 포함한 각 지방의 수도에서만 화폐를 주조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주화에 십자가를 새기고 자신의 초상화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체제 개편에 열을 올리던 왐바는 675년 제11차 톨레도 공의회와 제12차 브라가 공의회를 잇따라 소집해 왕국의 질서 유지를 위한 법령을 제정하고 주교직을 사고파는 관행을 금지하고 주교의 재산 청구권을 제한했으며, 타락했다고 간주된 주교들을 파문하기로 했다. 공의회가 끝난 직후인 675년 12월, 왐바는 자유민과 교회에 소속된 사제 또느 수녀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했고, 주교와 관련된 자들이 시골 교회와 수도원을 점유하는 것을 금지했다.

680년 가을, 왐바의 일련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에르위그 등 귀족들이 왕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음모자들이 탄 독이 든 술을 마신 왐바는 의식을 잃었고, 주변인들은 왕이 곧 죽을 거라고 여기고 관습에 따라 수도자의 옷을 입혔다. 왐바는 몇 시간 후 의식을 되찾았지만, 이미 수도자의 의복을 입었기에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박탈당했다는 걸 깨닫고 왕위 포기서에 서명한 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에르위그는 왕위에 오른 직후인 681년 1월 9일 제 12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셉티마니아와 스페인 타라코나 주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왐바 왕이 그 지역 교회를 박해한 여파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의회에서는 왐바의 퇴위 문서와 에르위그의 왕위 계승 문서를 공인하고 그의 즉위가 정당함을 확인했다. 또한 전 군주가 권력을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다. 에르위그와 위원회의 결의서에는 왐바의 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왐바가 창설한 새 주교직을 없애기로 했다. 다만 실제로 왐바에게 임명된 주교들은 직위를 박탈하지 않고 공석인 곳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왕위를 공인받은 그는 법률 제정 정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왐바의 병역법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보고 681년 10월 21일 병역법을 포함한 84개의 법률을 수정한 법전을 반포했다. 병역 기피에 대한 처벌이 완화되었으며, 주교 역시 병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은 삭제되었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28개 조항이 신설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에게 명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대인에게 그런 자리를 맡긴 귀족은 720 솔리디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려 하면서, 개종을 거절하는 자는 노역 및 고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서고트 왕국의 유일한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더욱 부드러웠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피신했다.

683년 11월 4일, 에르위그는 제13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번에는 각 지방의 주교와 재판소의 고위 관리 26명이 소집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 왕 왐바의 탄압 문제를 제기하면서,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등 왐바에게 맞서다 처벌받은 정치범들을 완전히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게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재산을 돌려주는 것은 반대하고, 왐바에게 맞선 자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친다수윈트 왕때까지 왕권에 의해 박해받은 모든 이들을 사면하기로 결의했다. 에르위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법원과 교회의 최고 관리들을 재판 없이 존엄, 생명,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는 법령 역시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기 1년 전부터 체납된 모든 세금을 면제했다. 공의회는 이에 더해 친다수윈트 왕이 도입한 자유민과 해방노예들을 궁정의 주요 직책에 임명하는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에르위그는 앞으로 왕의 모든 후손의 생명과 재산을 건드릴 수 없으며, 왕실의 과부에게 새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684년 11월, 톨레도 대주교 율리안이 자발적으로 제14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공식적으로는 왕의 명령없이 열린 공의회였지만, 왕국의 모든 대도시 대표가 참석했다. 공의회 소집 이유는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한 결정을 따라달라는 교황 레오 2세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은 교황의 요청에 따라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했다. 왕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교회의 권력이 왕권에 버금갈 정도로 강대해졌다.

한편, 서고트 왕국의 사정은 점점 악화되었다. 에르위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이 끔찍한 기근으로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유민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자, 그는 자유민을 지키기 위해 자유민이 노예가 되는 것을 제한했으며, 자유 여성이 노예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노예로 간주되지만 그들이 간섭없이 자유민으로 30년을 살았다면 자유민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한편 에르위그는 군대를 어떻게든 강화하려 했다. 그는 귀족들이 노예의 20분의 1도 병사로 보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적어도 10분의 1은 군대에 보내고 장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선포했다.

에르위그 왕은 생전에 리우비고토와 결혼하여 딸 시실로를 낳았다. 시실로는 왐바의 친척인 에기카와 결혼했다. 687년 11월 15일 중병에 걸려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사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왕권을 불법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 가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시킨 뒤 눈을 감았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에기카는 688년 5월 11일 제1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에르위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에르위그가 몰수한 재산이 왕과 가족에게 들어간 것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에르위그의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의무를 풀어주기로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아무도 황태후에게 결혼을 강요하거나 간음을 범할 수 없다는 특별법을 마련했다. 겉보기에는 왕비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 왕의 미망인과의 교제를 통해 왕위에 오르려는 경쟁자들의 희망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691년, 사라고사에서 지방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왕의 미망인은 수도원에 즉시 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로 인해 에르위그의 왕비 리우비고토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잃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한편, 사라고사 공의회에서는 특정 지역 주교의 결정에 따라 해방된 이들을 다시 노예로 삼는다는 법안을 채택했다. 이는 주교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막아서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에르위그의 지지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이 커졌다.

693년 봄, 톨레도에서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일어났다. 툴레도의 대주교 시시베르트는 수니프레드를 왕으로 내세우고 에기카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에기카는 시시베르트를 해임하고 세비야의 주교 펠릭스를 톨레도 대주교에 선임했으며, 시시베르트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교체하고 새 주교를 세웠다. 그는 교회에 대한 이같은 간섭이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693년 5월 제16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게 했다. 공의회는 왕에 대한 음모를 꾸미거나 스페인 내에서 반란을 일읔킨 사람은 존엄과 지위에 관계없이 재산을 박탈당하고 그 자신과 모든 후손이 결코 궁정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결의서를 반포했다. 여기에 귀족과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했던 친다수윈트와 왐바의 반역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유효하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주교들의 잠식으로부터 지방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을 채택함으로써 하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694년 11월, 에르위그는 제17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는 왕실의 자손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시실로 왕비가 자손을 낳은 채 미망인이 될 경우, 아무도 그녀의 자녀가 수도자가 되도록 강요할 수 없으며, 그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일련의 법률을 반포했다. 유대인이 시장을 방문하고 기독교인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세례받기를 원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 세금은 유대인 공동체가 분담해야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유대인들이 아랍 세력과 내통해 왕국을 팔아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며, 내통한 것이 드러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고, 유대인들이 공직에 참가할 권리 자체를 박탈했으며, 유대인들의 자녀들은 7세 때까지 부모와 헤어진 채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게 했다. 한편, 제17차 공의회는 에기카의 왕비이자 에르위그의 딸 시실로를 "영광스러운 여인"이라 칭했다. 그러나 에기카는 공의회가 끝난 직후 그녀와 이혼해버렸다. 이는 전 왕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림으로써 자신만의 왕조를 창건하겠다는 의중이 담긴 결정이었다.

698년과 701년 사이, 동로마 함대가 스페인 동부 해안가에 상륙했다가 알리산테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서고트 귀족에 의해 격퇴되었다. 비슷한 시기, 에기카는 셉티마니아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을 진압하고 프랑크군과 3차례 싸웠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 반란을 구실로 삼아 벌금, 몰수 및 해임 법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금화에 은이 갈수록 많이 첨가되었으며, 몇년 동안 기근이 들어서 많은 이가 굶어죽거나 나라를 등지면서 일꾼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693~694년 페스트가 침투하여 각지에 전염병이 횡행하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특히 셉티마니아의 인구 감소가 심했기에, 셉티마니아 공작은 어떻게든 인력을 모으기 위해 에기카의 반유대주의 법안을 시행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이렇듯 인력이 줄어들면서 노예의 도피를 막으려는 귀족들의 욕망이 커지자, 에기카는 귀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도주한 노예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에기카는 친다수윈트 왕의 아들 테오도프레드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하여 눈을 멀게 한 후 왕실에서 추방된 테오도프레드는 코르도바에서 살다가 리킬로와 결혼하여 아들 로데리크를 낳았다. 에기카는 세습을 이뤄내기 위해 아들 위티자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옛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다스리게 했다. 701년 11월 15일 아들을 톨레도로 불러들여 왕으로 즉위하게 한 뒤, 702년 말에 자연사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위티자는 불신자들과 유배된 이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여 하급 관료의 지위를 회복했고, 아버지가 부과한 세금을 줄여 백성들을 기쁘게 했으며, 아버지가 부정직한 신하들에게 부과한 모든 벌금을 공개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강한 속박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의 소유물을 돌려주고 재무부가 몰수한 것을 보상했다고 한다.

다만 반대 시선에서 본 위티자는 자유분방하고 불경건한 인물로 조언을 좀처럼 듣지 않았으며, 많은 아내와 첩이 있는 것에 대한 추문을 방지하기 위해 주교, 장로, 집사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707년에서 709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염병이 강타하여 많은 이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희생되면서, 서고트 왕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그가 망명자들을 불러들이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들여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어떻게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망명자들은 에르위그의 지지자들일 수도 있고, 에기카의 친척인 왐바 왕의 반대자들일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들인 아길라 2세에게 왕권을 넘기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는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도 있었는데, 파빌라의 아들인 펠라요는 아버지가 처형된 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다. 위티자는 710년경에 사망하면서 서고트 왕국은 왕위 계승으로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3.4.2.3. 멸망[편집]

로데리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을 칭하자, 위티자의 아들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수도를 탈출해 스페인 북동부로 이동했다. 이후 레퀴잔드, 바야진드를 포함한 일부 고트 귀족들이 위티자의 장남 아길라 2세를 서고트 왕국의 유일한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 역시 아길라 2세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은 로데리크를 지지하는 남부 세력과 아길라 2세를 지지하는 북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로데리크는 위티자 2세와 손을 잡고 왕국의 북쪽 경계를 침범한 바스크인들을 토벌하고자 진군하여 팜플로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야 했다. 아랍군이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아랍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평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우타를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의 총독 율리아누스가 돌연 아랍 세력에 귀순했다. 율리아누스는 바다를 건널 선박을 제공하고, 서고트 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여기에 로데리크에게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들이 북아프리카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에게 밀사를 보내 로데리크를 타도하려 하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사는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타리크 이븐 자야드에게 7,000명을 맡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율리아누스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넌 타리크는 병사들이 탈영하는 걸 막기 위해 상륙하자 마자 배를 불태웠다. 이후 지브롤터에서 출발하여 카르타헤나 해안 일대를 돌며 약탈을 자행했다. 뒤이어 무사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카디스 해협을 건너 15개월 동안 히스파니아에 머무르며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고, 로데리크는 이에 맞서 남하하면서 왕국 전역의 귀족들에게 자신에게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리크는 카르타헤나에서 코르도바로 진군하던 중 과달레테 강 인근에서 로데리크의 군대와 마주쳤다.

과달레테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서고트군은 완패했고 로데리크는 전사했다. 그 후 타리크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해 711년 톨레도를 공략하고 각지로 분견대를 보내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이때 율리아누스는 성주들을 회유해서 항복시키거나 타리크가 도저히 점령하지 못하는 철벽 요새에 기독교 지원군으로 위장해서 잠입 후 차지했다. 714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항하던 아길라 2세도 무슬림군에게 잡혀 죽었다. 테오도미르 같은 몇몇 귀족은 아예 이슬람군과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누리는 대가로 침략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리하여 무슬림군은 10년도 안 되어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석권했고, 그나마 레네 산맥 북족의 카탈로니아와 남부 갈리아의 셉티마니아에서는 아르도라는 인물이 서고트 왕을 자처했다. 그는 나르본을 근거지로 삼아 716년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셉티마니아까지 쳐들어오는 아랍군에 맞섰으나, 721년에 아랍군이 나르보넨시스를 초토화시키면서 망국을 막지 못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3.4.3. 레콩키스타의 시작[편집]

한편 718년 일단의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 산맥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 펠라요라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는 서고트 전 국왕 에기카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의 아들로, 아스투리아스 칸가스 데 오니스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본거지를 세우고 봉기를 선동했다.

이에 720년 대규모의 이슬람군이 투입되어 아스투리아스 산맥을 장악하였고, 펠라요는 여러 차례 패배한 뒤 산 속 깊숙이 숨었다.펠라요는 300 정도로 추정되는 병력만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침략군이 세운 숙영지를 종종 습격하고, 보급물자를 싣고 가던 마차를 탈취하고, 고급 장교를 암살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때마침 이슬람 지배자들이 지즈야를 2배 인상하는 조치를 취한 것에 반감을 품은 기독교 신자들이 호응하였고, 아스투리아스 일대를 다스리던 무슬림 관리는 안전을 위해 피신해야 했다.

이슬람 세력은 처음엔 산악 지대에서 일어난 소규모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721년 7월 9일 피레네 강을 건너 프랑크 왕국을 침공한 이슬람군이 툴루즈에서 아키텐 영주 오도에게 패배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정군을 파견한 왈리(wali: 아랍인 주(州) 장관) 움바사 이븐 수하임 알 카르비는 패배로 인해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차원에서 아스투리아스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722년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코바동가 마을 근처에서 펠라요가 이끄는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마야드 왕조군 지휘관 알 카마와 무누자가 지휘하는 이슬람군을 기습 섬멸한 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우고, 약 800년 가까이 진행되는 레콩키스타의 문을 열게 되었다.

고바동가에서의 승리후 아스투리아스 산맥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빠르게 알려졌다. 그들은 즉시 호응하여 펠라요의 군대에 가담하였고, 펠라요는 증가한 병력을 이끌고 또다른 병력을 조직하여 진군하고 있던 무누자의 부대를 습격해 무누자를 전사시켰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변변치 않는 세력임에도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탈출한 기독교 신자들의 은신처 역할을 맡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했는데 펠라요는 이웃하고 있던 같은 반 무어인 세력이자 칸타브리아(Cantabria)를 통치하고 있던 페드로(Pedro)와 동맹을 맺으며 세력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그는 딸인 에르메신다(Ermesinda)를 페드로의 아들인 알폰수와 결혼시켰다. 737년 펠라요가 죽고 그의 외아들인 파빌라가 왕위를 이었다. 허나 즉위 2년만에 곰사냥을 하다가 곰에게 죽게 되었고[13],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매부였던 알폰수가 알폰수 1세로 즉위한다.

알폰수 1세는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무어인들과 평생 전쟁을 치뤘다. 740년 갈리시아를 수복했고, 754년에는 레온 지방을 수복하는 등 이슬람 세력을 남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또한 라리오하(La Rioja) 지방까지 세력을 넓혔는데 이슬람 세력과의 접경지역에 살던 주민들을 대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 이주정책으로 두에로강(El Duero)과 칸타브리아산맥 사이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해 그 지역은 ‘두에로의 사막(Desierto del Duero)’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757년 알폰수 1세가 죽고 장남인 프루엘라 1세가 왕위를 승계했다. 이미 750년에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아바스 왕조에게 멸망된 뒤에 아브드 알 라흐만 1세(Abd ar-Rahman I)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와 756년에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아 우마이야 왕조를 다시 일으켰다. 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아들인 오마르(Omar)를 보내 갈리시아 지방을 공격해왔으나 프루엘라 1세는 이를 물리치고 오마르를 포로로 붙잡은 뒤에 죽였다. 그리고 남서쪽의 미뉴강(Río Miño) 유역까지 왕국의 영토를 넓혔다. 그 뒤 프루엘라 1세는 알라바(Álava) 지방의 바스크인들이 칸타브리아(Cantabria) 지방을 공격해오자 원정에 나서 그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가스코뉴(Gascogne)를 다스리던 바스크인 귀족의 딸인 무니아와 결혼해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766년에는 갈리시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재위기간에 오늘날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주도인 오비에도(Oviedo)를 건설했으며, 그곳에 산 살바도르 성당(Cathedral of San Salvador)을 세웠다. 프루엘라 1세는 아버지 알폰수 1세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건립을 지원했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얻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 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프루엘라 1세는 동생인 비모라노(Vimorano)가 귀족들에게 신망을 얻자 그를 살해했다. 그리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비모라노의 아들인 베르무두(Bermudo)를 맡아서 자신의 아들처럼 키웠다. 하지만 이 일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768년에 프루엘라 1세를 암살하고, 그의 사촌인 아우렐리우를 왕으로 세웠다.

아우렐리우의 치세는 외적으로는 온건해 후우마이야 왕조와 화평 조약을 맺었으나 내적으로는 정소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농노의 반란이 일어나 아우렐리우가 이를 진압하는 등 그리 좋지 않았고, 774년에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왕위는 알폰수 1세의 딸인 아도신다(Adosinda)의 남편 실로(Silo)가 왕위를 이었다.

왕위에 오른 실로는 수도를 캉가스데오니스(Cangas de Onís)에서 나론 강(Río Nalón) 유역에 위치한 프라비아(Pravia)로 옮겼다. 그곳이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Asturica Augusta, 지금의 아스토르가)로 가는 로마 가도와 연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여서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재위기간에 갈리시아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로는 몬테쿠베이로(Montecubeiro) 전투에서 승리하며 반란을 진압했다.

실로의 재위기에 아스투리아스왕국은 이슬람 세력과의 화평을 유지했다. 연대기는 이를 실로의 생모가 무슬림이었던 것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재위기에 후우마이야왕조와 카롤루스 대제가 통치하는 프랑크왕국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778년 카롤루스의 통치기의 프랑크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부상으로 자치권을 누리고 있던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우에스카, 지로나 등 동북부 지역의 친아바스계 지사들은 알-안달루스조의 세력팽창을 저지할 수단으로 한참 기세등등하던 프랑크 왕국을 끌어들였는데, 이에 응한 프랑크 왕국으로 오히려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병합할 기회로 보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하했지만 먼저 선제 공격한 후우마이야 왕조의 대응과 예상 밖의 프랑크 대군을 본 친 아바스계 자치 도시들이 협력을 취소하면서 결국 병합에 실패되었다.

783년 실루가 프라비아에서 사망하자 그의 후계를 정해야 했는데 실루는 프루엘라 1세의 아들인 알폰수 2세(Alfonso II)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실로가 죽은 뒤 귀족들의 반발로 알폰수 2세는 알라바(Álava) 지방으로 피신했고, 알폰수 1세와 무슬림 노예인 시살다(Sisalda) 사이에서 태어난 마우레가투(Mauregato)가 왕위에 올랐다.

마우레가투의 재위기에 관해서는 그다지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재위기에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었으나 세례를 받은 뒤에 성령에 의해 신의 아들이 되었다는 양자설(養子説, Adoptionism)이 확산되어, 카롤루스 대제와 톨레도(Toledo)의 주교인 엘리판두스(Elipandus), 칸타브리아(Cantabria)의 대공인 리에바나의 베아투스(Beatus de Liébana) 등이 논쟁에 개입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리고 이슬람 후우마이야왕조의 군주인 아브드 알라흐만 1세(Abd ar-Rahman I)와 화의를 맺으면서 ‘처녀 100인의 조공(Tributo de las cien doncellas)’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789년 마우레가투가 죽은 뒤에는 제5대 왕인 아우렐리우의 동생으로 사제로 살고 있던 베르무두 1세(Bermudo I)가 왕위를 이었다. 그리고 그의 즉위를 기점으로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평화도 끝이 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의 뒤를 이어 새로 이슬람 군주로 즉위한 히샴 1세(Hisham I)는 장군 유수프 이븐 부흐트(Yusuf ibn Bujt)을 보내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라바(Álava)와 갈리시아(Galicia) 지방을 공격해왔다.

791년 부르비아 강의 전투(Battle of Río Burbia)에서 이슬람 세력에 패하자 베르무두 1세는 왕위에서 물러났고, 제4대 왕인 프루엘라 1세의 아들로 알비아에 피신 중이었던 알폰수 2세(Alfonso II)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알폰수 2세는 수도를 프라비아(Pravia)에서 오비에도로 옮겨졌다. 그는 오비에도에 궁전과 교회 등을 세웠다. 794년 아브드 알카림(Abd al-Karim)과 아브드 알말릭(Abd al-Malik)이 이끄는 이슬람 군이 아스투리아스왕국의 동쪽 변경을 공격해왔다. 이에 알폰수 2세는 796년, 797년, 798년 세 차례에 걸쳐 카롤루스 대제에게 사신을 보내 프랑크왕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리고 프랑크왕국의 지원을 받아 798년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리스본을 공격했으며, 825년에는 나론(Narón)과 안세오(Anceo)에서 이슬람 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알폰수 2세는 801년부터 808년까지 귀족들의 강요로 아블라냐 수도원(monasterio de Ablaña)에 유폐되는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테우다노(Teudano)라는 귀족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은 뒤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고트 시대의 유산들을 폭넓게 수용했다.

842년 알폰수 2세가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일족인 네포시아누가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얼마 안가 베르무두 1세의 아들인 라미루 1세가 갈리시아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수도인 오비에도로 진격해왔다. 네포시아누는 아스투리아스인과 바스크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코르넬라나(Cornellana)에서 라미루 1세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나르세아 강(Río Narcea) 유역에서 벌어진 코르넬라나 다리의 전투(Battle of the Bridge of Cornellana)에서 패해 라미루 1세에게 붙잡혀 폐위된다.

왕위에 오른 라미루 1세는 서고트 왕국에서부터 시행되어왔던, 귀족들의 선거로 왕가의 일족 중에서 왕을 선출하던 제도를 폐지했다. 그의 재위기간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바이킹과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받았다. 844년 바이킹이 칸타브리아의 해안지역으로 침공해왔으나 라미루 1세는 이를 물리쳤다.

그리고 834년에는 아브드 알라흐만 2세(Abd ar-Rahman II)가 보낸 이슬람 군대를 클라비호 전투(Battle of Clavijo)에서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무어인 학살자’라고 불리는 대 야고보가 흰 말을 타고 나타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 스페인어로는 ‘산티아고(Santiago)’라고 불리는 대 야고보의 숭배 문화가 폭넓게 자리 잡기도 했다. 846년에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받은 레온의 기독교도 주민들이 대거 아스투리아스왕국으로 피신해 왔다.

850년 라미루 1세가 죽자 장남인 오르도뉴 1세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선왕이 귀족들의 선거로 왕을 선출하던 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에, 오르도뉴 1세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선거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위를 계승한 최초의 왕이었으나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 네포시아누를 지지했던 바스크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르도뉴 1세는 직접 원정에 나서 반란을 진압했으며, 귀환하던 도중에 에브로(Ebro) 강 유역에서 바르둘리아 공격에 나선 이슬람 군을 기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오르도뉴 1세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에 맞서 영토를 되찾기 위해 벌인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도들이 톨레도(Toledo)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했다. 하지만 854년 과달라세테(Guadalacete)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 세력에 패했다.

그 뒤 오르도뉴 1세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어 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과거 알폰수 1세때 버려지면서 생긴‘두에로의 사막에 정착촌을 건설해 주민들을 이주시켜 레온(León)과 탈라망카(Talamanka)·아스토르가(Astorga)·투이(Tui)·아마야(Amaya) 등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성벽을 정비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다.

더불어 오르도뉴 1세는 859년에는 알벨다(Albelda)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벨다(지금의 Albelda de Iregua)를 점령했다. 그리고 나바라(Navarre)와 바스크 지방 교통의 요지인 투델라(Tudela)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자 이슬람 세력은 마란다(Miranda)와 알라바(Álava)를 공격해왔고, 부레바(Bureba) 인근에서 벌어진 모르쿠에라(Morcuera) 전투에서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군대는 크게 패했다. 이 패배로 여러 해 동안 레콘키스타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866년 오르도뉴 1세가 죽고, 그의 맏아들인 알폰수 3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듬해인 867년에는 바스크인이 일으키자 알폰수 3세는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오르도뉴 1세와 마찬가지로 ‘두에로의 사막'에 지속적으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특히 알폰수 3세는 이 지역에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도들이 정착해서 살 수 있게 했다.

알폰수 3세는 878년 레온(León)과 아스토르가(Astorga) 일대를 공격해온 이슬람 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발데모라(Valdemora)에서도 반격을 가해온 이슬람 군의 공격을 다시 물리쳤다. 이 전투 이후 알폰수 3세는 이슬람 세력과 3년 동안의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 뒤 알폰수 3세는 879년 포르투갈 북쪽으로 군대를 보내 포르투(Portu)와 코임브라(Coimbra) 등을 점령했다. 때문에 알폰수 3세의 재위기간에 아스투리아스왕국의 영토는 몬데고 강(río Mondego)과 두에로 강을 경계로 한 지역까지 크게 넓어졌다. 이에 알폰수 3세는 한때 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폰수 3세는 죽음을 앞두고 아들들이 아버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맏아들인 가르시아 1세는 레온을 가지게 되었고, 둘째인 오르도뉴 2세는 갈리시아(Galicia)를 가져갔고, 그리고 프루엘라 2세가 아스투리아스의 왕위를 이었다.

레온의 왕으로 즉위한 가르시아 1세는 부왕 알폰수 3세가 두에로 강과 칸타브리아 산맥 사이의 ‘두에로의 사막'에 기독교도들을 이주시켜 국방을 강화한 것처럼, 그 지역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로아(Roa), 오스마(Osma), 클루니아(Clunia), 산에스테반데고르마스(San Esteban de Gormaz) 등의 도시를 세웠다.

가르시아 1세는 914년에 자식이 없이 사모라에서 죽었다. 때문에 레온의 왕위는 그의 동생인 오르도뉴 2세가 병합했다. 오르도뉴 2세는 형제들 가운데 세력이 가장 강했으므로 그의 재위기에 레온왕국의 수도인 레온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인 오비에도(Oviedo)를 대신해 정치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또한 후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통치하던 코르도바(Córdoba)의 이슬람 세력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알폰수 3세 때부터 영향력이 커졌던 카스티야의 귀족들과 대립했다.

오르도뉴 2세는 이슬람 세력이 통치하던 메리다(Mérida)와 에보라(Évora)를 공격했으며, 나바라 왕국의 산초 1세(Sancho I)와 동맹을 맺고 두에로 강 유역을 공격해온 이슬람 세력에 맞섰다. 917년 산에스테반데고르마스(San Esteban de Gormaz)를 공격해온 아브드 알라흐만 3세를 물리쳤으며, 918년에는 바누 카시 왕가로부터 아르네도(Arnedo)와 칼라오라(Calahorra)를 빼앗았다. 아브드 알라흐만 3세가 920년 군대를 보내 두에로 강 유역의 오스마(Osma)와 산에스테반데고르마스를 공격해오자, 오르도뉴 2세는 나바라 왕국과 연합해 이에 맞섰다. 하지만 발데훙쿠에라(Valdejunquera) 전투에서 패해 투이(Tui)와 살라망카(Salamanca)의 주교가 이슬람 군에 포로로 붙잡히기도 했다. 카스티야의 귀족들이 호응하지 않아 패했다고 생각한 오르도뉴 2세는 타하레스(Tejares)로 카스티야의 백작들을 소집한 뒤에 그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에 반격을 시작해 라리오하(La Rioja)를 점령했으며, 나헤라(Nájera)와 비구에라(Viguera)를 빼앗았다.

오르도뉴 2세는 924년에 레온에서 죽었으며, 그의 아들들을 대신해 동생인 프루엘라 2세가 갈리시아-레온 왕국을 병합했다. 프루엘라 2세는 오르도뉴 2세와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924년 오르도뉴 2세가 죽자 뒤를 이어 레온 왕국의 왕위에도 올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아스투리아 왕국이란 국명 대신 레온 왕국이란 국명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서고트 왕국 위티자 왕의 후손임을 자처하던 올문도(Olmundo)의 아들 게불도(Gebuldo)와 아레신도(Aresindo)를 살해하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던 레온의 주교 프루니미오(Frunimio)를 추방해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레온 왕국의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인 925년에 죽고, 아들인 알폰수 프루엘라스가 즉위한다.

하지만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인 산추 오르도녜스(Sancho Ordóñez), 알폰수 4세(Alfonso IV), 라미루 2세(Ramiro II) 등은 팜플로나(Pamplona)의 왕인 세메로 가르세이츠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926년 알폰소 프루엘라스는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에게 패해 아스투리아스왕국의 동쪽 변경으로 쫓겨났다. 그 뒤 오르도뉴 2세의 아들들이 왕국을 나누어 통치했는데, 산추 오르도녜스는 갈리시아 왕국을, 알폰수4세는 레온 왕국을, 라미루 2세는 포르투를 통치했다.

산추 오르도녜스는 926년부터 929년 사망할 때까지 수도원 복구 외에는 별다른 치적없이 갈리시아를 통치하다가 죽고 그 영토는 알폰수 4세가 합병했다. 알폰수 4세는 레온을 통치하다가 929년 형 산추 오르도녜스가 후계 없이 죽으면서 갈리시아를 합병했지만 931년 왕비인 오네카가 죽자 동생인 라미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아군(Sahagún)의 수도원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하지만 알폰수 4세는 권력욕을 쉽게 놓지 못하여 동생에게 나라를 넘기고 수도원에 은거한 것을 후회해 932년 봄에 수도원에서 나와 라미로 2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변경 밖으로 추방되었던 알폰수 프루엘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알폰수 4세와 연합했다. 그리고 이복동생들인 라미루 프루엘라스(Ramiro Froilaz), 오르도뉴 프루엘라스(Ordoño Froilaz) 등과 함께 레온을 공격했다. 당시 라미루 2세의 군대는 이슬람 세력에게 포위된 톨레도를 구원하려고 사모라(Zamora)에 집결해 있었다. 라미로 2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톨레도 구원을 위해 파병했던 군대를 서둘러 철수시켰고, 결국 알폰수 프루엘라스 등은 라미로 2세에게 패해 사로잡혔다.

알폰수 프루엘라스와 알폰수 4세 등 4인은 실명형을 선고받고 루이포르코(Ruiforco)의 산훌리안이산타바실리사(San Julián y Santa Basilisa) 수도원에 갇혔다. 알폰수 4세의 반란을 진압한 라미루 2세는 곧바로 지금의 마드리드인 마게리트(Magerit) 공격에 나서고, 톨레도를 이슬람 세력에서 벗어나게 했다. 939년에는 나바라 왕국의 군대와 연합해 시망카스 전투(the Battle of Simancas)에서 아브드 알라흐만 3세의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었고, 왕국의 영토를 두에로(Duero) 강과 토르메스(Tormes) 강 유역까지 넓혔다.

하지만 재위기간 말기에는 카스티야 백작인 페르난 곤살레스와 대립하면서 점차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카스티야는 레온 왕국과 연합해 이슬람 세력에 맞섰으나, 변경 지역에 레온 왕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라미루 2세는 944년에 페르난 곤살레스를 붙잡아 투옥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산초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봉했다. 3년 동안 구금되어 있던 페르난 곤살레스는 결국 레온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라미로 2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풀려난 뒤에도 그는 레온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꾀했다.

라미루 2세는 950년에 다시 원정에 나서 탈라베라(Talavera)에서 이슬람 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 병이 들어 죽었다. 라미루 2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산추 1세가 왕위를 놓고 대립했으나, 결국 오르도뉴 3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즉위할 당시 이미 카스티야 등이 레온왕국에 반기를 들고 있었으므로 통치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나바라와 카스티야는 그의 이복동생인 산추 1세를 지지하며 그와 대립했다. 카스티야 백작인 페르난 곤살레스가 산추 1세와 동맹을 맺자 오르도뉴 3세는 페르난 곤살레스의 딸인 우라카 페르난데스와 이혼했다.

오르도뉴 3세는 안팎의 반대 세력과 맞서야 했다. 갈리시아(Galicia)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으며, 알안달루스(Al-Ándalus)의 이슬람 세력의 공격도 잇달았다. 오르도뉴 3세는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955년 리스본까지 원정군을 보냈으며, 그 뒤 후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3세(Abd ar-Rahman III)와 화의조약을 맺었다.

오르도뉴 3세는 956년 사모라(Zamora)에서 죽었으며, 이혼한 우라카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만 있었기에 동생인 산추 1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산추 1세는 958년 카스티야 백작인 페르난 곤살레스 등에 의해 지나치게 뚱뚱하다는 이유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페르난 곤살레스를 비롯한 귀족들은 알폰소 4세(Alfonso IV)의 아들인 오르도뉴 4세(Ordoño IV)를 새로 왕으로 추대했고, 산추 1세는 팜플로나로 피신했다.

오르도뉴 4세는 페르난 곤살레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왕위에서 쫓겨난 산추 1세는 나바라와 이슬람 세력인 후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3세(Abd ar-Rahman III)의 지원을 받아 959년에 사모라(Zamora)를 공격해 왔다. 페르난 곤살레스의 군대도 연합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오르도뉴 4세는 산추 1세의 군대가 레온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스투리아스(Asturias)로 도망쳤고, 산추 1세가 다시 복위했다.

산추 1세는 도주한 오르도뉴 4세를 끝까지 추격했다. 오르도뉴 4세는 961년에는 다시 부르고스(Burgos)로 피신했다. 오르도뉴 4세는 페르난 곤살레스의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자 메디나셀리(Medinaceli)에 주둔하던 이슬람 군의 장군인 갈리브 알나시리(Ghalib al-Nasiri)에 투항했다.

레온 왕국의 왕위을 되찾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왕권은 쇠약해진 상태였으므로 카스티야와 갈리시아(Galicia) 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는 966년에 포르투갈의 백작인 곤살로 메넨데스(Gonzalo Menéndez)에게 독살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라미루 3세가 왕위를 이었는데, 당시 5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왕비인 테레사 안수레스와 산추 1세의 누이인 엘비라 라미레스(Elvira Ramírez)가 섭정으로 대신 왕국을 통치했다.

라미루 3세 즉위 초 당시였던 레온 왕국은 내부적으로 왕위 분쟁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어 카스티야(Castilla)와 갈리시아(Galicia) 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라미루 3세의 재위기간 초기에 레온왕국은 알안달루스(Al-Ándalus)를 통치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인 후우마이야왕조의 알하캄 2세(Al-Hakam II)와 평화교섭을 진행했다. 그리고 968년에는 갈리시아를 침공해온 바이킹을 물리쳤다.

976년 알 하캄 2세가 죽고 히샴 2세가 즉위한 뒤 새로 재상이 된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970년대 후반부터 980년대 초까지 레온 왕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해왔고, 연이은 패배로 라미루 3세는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981년 루에다 전투(Battle of Rueda)에서 레온왕국과 나라바왕국·카스티야 등이 연합한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 세력에 크게 패했고, 사모라(Zamora)·루에다(Rueda)·아티엔사(Atienza)·세풀베다(Sepúlveda) 등을 빼앗겼다.

그러자 곤살로 메넨데스를 비롯한 갈리시아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오르도뉴 3세의 아들인 베르무두 2세(Bermudo II)를 왕으로 세웠다. 베르무두 2세는 982년 봄에서 여름까지 갈리시아를 장악한 뒤에 그해 가을에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리하여 왕국은 둘로 갈라졌다. 갈리시아와 포르투갈의 귀족들은 베르무두 2세를 지지했고, 레온과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라미루 3세를 지지했다. 두 세력은 983년 안타스데울라(Antas de Ulla)에서 격돌했지만, 어느 세력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 뒤 베르무두 2세는 갈리시아를 통치하고, 라미루 3세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는 것에 주력했다.

라미루 3세는 985년에 데스트리아나(Destriana)에서 죽었다. 그러자 베르무두 2세가 레온 왕국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카스티야 등지의 귀족들은 계속해서 베르무두 2세의 지배에 저항했으므로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다. 991년부터 992년까지 베르무두 2세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베르무두 2세는 이슬람 세력에 점령되어 있던 사모라(Zamora)를 탈환했으나, 이슬람 세력의 반격을 받아 코임브라(Coimbra)와 레온이 파괴되었다. 이슬람군은 996년에는 아스토르가(Astorga)를 침공했고, 997년에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공격해왔다. 당시 베르무두 2세는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말을 탈 수 없어 들것에 올라타고 이곳저곳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통풍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르무두 2세는 999년에 빌라누에바델비에르소(Villanueva del Bierzo)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인 알폰소 5세가 왕위를 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5세도 되지 않았으므로 베르무두 2세의 왕비인 엘비라 가르시아가 섭정을 하였다.

동부의 경우 앞서 상술한 대로 7세기 말, 현재의 바스크 지방으로 진출한 서고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이 번갈아 가며 바스크 공작령을 세우나 719년 이슬람 세력에게 수도인 팜플로나를 점령당했다. 이후 778년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사라센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진출했다. 하지만 철군 과정에서 팜플로나가 카롤루스의 군대가 진입하는 것을 막자 분노한 카롤루스는 바스크족이 이슬람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여겼으며 팜플로나를 함락시키고 파괴해 버린 후 철수하였다. 이에 바스크족은 철수하는 프랑크 군대의 후미를 론세스바예스(롱스보) 고개에서 공격하였고, 브르타뉴 변경백 흐로들란드가 지휘하던 프랑크 후위부대를 전멸시키면서 프랑크 왕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가스코뉴 백작이 투항한 이래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있다고 간주된 지역이었으나 카롤루스가 팜플로나를 공격, 함락시킨 시점에서 더는 그렇지 않았다. 바스크족은 프랑크 왕국과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 양쪽 모두에 대해 투쟁하기 시작했고 작센족과 피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던 카롤루스 입장에선 무척 난감한 상대가 되었다.

카롤루스는 이에 대응해 아키텐 왕국을 세운다. 이 왕국은 아키텐 지역에 세워진 것으로, 어디까지나 프랑크 왕국에 종속된 왕국이었으나, 이찌되었든 자체적으로 군사 활동이 가능한 종속 국가였다. 최초의 왕으로 세워진 것은 루이 1세로 . 카롤루스는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인구를 보유한 아키텐 지역은 오로지 바스크족과 피레네 산맥 너머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하는 데에 전담시켰다.

바스크족과의 분쟁은 788년, 툴루즈 백작이 알라릭이라 불리는 지역 지도자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확대된다. 이는 카롤루스에게는 자신의 봉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고,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였던 젤노르의 윌리엄을 새로운 툴루즈 백작으로 내려보내 대응하게 한다. 그는 790년 알라릭을 제거했고, 뒤이어 바스크족을 압박해 들어갔다.

거기다 피레네 산맥 너머 현재의 카탈루냐 지방을 합병한 후 설치된 에스파냐 변경백령과 아라곤 백작령이 서쪽으로 확대되면서 바스크족은 이쪽 방향으로도 압박을 받았다. 이 지역의 프랑크 왕국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북진 당시에도 고집스럽게 기독교를 고수한 바스크족이야말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는 것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발판이 되리라 생각했고 바스크족을 다시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 안으로 넣고자 압박하였다.

결국 812년, 카롤루스 왕조는 피레네 산맥을 온전히 점유했고, 바스크족은 굴복하고 말았다. 바스크 공작령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814년 카롤루스가 사망한 후 바스크인들은 다시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고, 이때 바스코 공작령은 친프랑크계였던 벨라스코가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816년 이슬람 군에 패해 전사했고, 그 뒤 에네코 아리차가 벨라스코를 대신해 팜플로나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어서 820년 아라곤 백작령을 종속시켰다.

824년 프랑크 왕국의 가스코뉴 공작 아스나르 산체스(Aznar Sánchez)가 팜플로나를 공격해왔으나 이니고 아리스타는 오레아가(Orreaga)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독립한 바스코 공작령은 에네코 아리차를 초대 국왕으로 하는 팜플로나 왕국으로 독립 국가가 되었다.

840년 에네코 아리차의 사위 무사 이븐 무사(Musa ibn Musa)가 팜플로나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이슬람 후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 2세(Abd ar-Rahman II)는 사라고사 태수 아브드 알라 이븐 쿨라이브(Abd Allah ibn Kulayb)을 보내 공격해왔다. 에네코는 아들인 가르체아를 보내 무사 이븐 무사, 포르툰 이니게스(Fortún Íñiguez) 등과 연합해 이슬람 세력에 맞섰다. 하지만 843년 전투에서 크게 패해 아들 갈린도를 코르도바로 보내 화의를 맺었다.

842년 에네코는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거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인 가르체아 에네코이츠가 섭정으로서 국정을 대신했다. 그는 850년에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나바라 공작으로 봉해져 팜플로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나, 851년 말에서 852년 초에 사망했고, 왕위는 장남인 가르체아가 물려받는다.

하지만 매부였던 무사 이븐 무사는 가르시아 이니게스에게 등을 돌리고 후 우마이야 왕조의 무함마드 1세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859년 팜플로나를 공격해왔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가르시아 이니게스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오르도뉴 1세와 동맹을 맺었다. 가르시아 이니게스의 군대는 알벨다(Albelda) 전투에서 바누 카시의 군대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무함마드 1세는 가르시아 이니게스의 맏아들인 오르티 가르세이츠를 코르도바에 구금하였다. 870년 가르시아 이니게스는 우에스카에서 무사 이븐 갈린도(Mūsā ibn Galindo)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암루스 이븐 유수프(Amrus ibn Yusuf)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다시 후 우마이야 왕조와 적대관계로 돌아선 무사 이븐 무사의 아들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사라고사의 태수인 무함마드 이븐 로프(Muhammad ibn Lop)의 공격으로 아이바르(Aibar) 성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가르시아 이니게스가 죽었으며, 그 뒤 코르도바에 구금되어 있던 그의 아들 포르툰 가르세스가 팜플로나로 돌아와 882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오르티는 바누 카시 왕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해 팜플로나의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 때문에 레이레 수도원으로 칩거하기도 했다. 결국 905년 팜플로나의 귀족들은 포르툰 가르세스를 대신해 안초 1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켜 몰아냈다.

안초 1는 위한 뒤에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의 오르도뉴 2세와 동맹을 맺고 이슬람 세력과 빈번히 전투를 벌여 영토를 나헤라(Nájera)와 프랑스의 바스나바르(Basse-Navarre)까지 크게 넓혔다. 그래서 나헤라를 수도로 삼은 나바라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때까지 팜플로나 왕국은 유럽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유럽 제어였기에 같은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에게 고작해야 바스크 농사꾼들이 세운 나라라고 멸시당했으나

안초 1세는 925년 12월 10일 레사(Resa)에서 죽었고, 자식들이 모두 어렸으므로 아라곤 백작이었던 동생인 세메로 가르세이츠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후 우마이야 왕조와는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세메로는 931년 5월 29일에 죽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안초 1세의 맏아들인 가르체아 1세 사노이츠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가 어렸으므로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에네코 가르체아와 생모인 토다 아스나레스가 섭정을 하였다.

토다 아스나레스가 섭정을 하는 동안 팜플로나 왕국은 이슬람의 후 우마이야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섭정을 끝내고 직접 통치에 나선 가르체아 1세는 누이인 우라카 산체스(Urraca Sánchez)의 남편 레온 왕국의 라미로 2세, 또 다른 누이인 산차 산체스(Sancha Sánchez)의 남편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 곤살레스, 사라고사의 통치자인 무함마드 이븐 하심(Muhammad ibn Hashim) 등과 동맹을 맺고 후 우마이야 왕조와 대립했다. 그는 939년 라미로 2세 등과 함께 시망카스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951년 레온 왕국의 라미로 2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들인 오르도뉴 3세와 산초 1세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는데, 가르시아 산체스 1세는 누이인 우라카 산체스의 아들 산초 1세를 지원했다. 산초 1세는 956년 오르도뉴 3세가 죽은 뒤에 레온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958년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 곤살레스 등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산초 1세가 팜플로나로 피신해오자 가르시아 산체스 1세는 이슬람 세력과 연합해 960년 레온 왕국을 점령하고 산초 1세를 다시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리고 카스티야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누이인 산차 산체스와 사별한 페르난 곤살레스에게 자신의 딸인 우라카 가르세스를 시집보냈다.

970년 가르체아 1세가 죽자 왕위는 아들인 안초 2세가 물려받았다. 즉위 당시 알 만수르가 이끈 후 우마이야 왕조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어린 나이에 칼리프로 즉위한 히샴 2세를 보좌했던 알 만수르는 970년대 후반부터 980년대 초까지 기독교 세력이 차지했던 지역들을 공격해왔고, 잇달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안초 2세는 975년 이복동생인 라미로 가르체스가 왕으로 있던 비게라 왕국(Reino de Viguera) 지원에 나섰다가 이슬람 군에게 패했으며, 포로로 붙잡히기도 했다. 981년에는 레온 왕국의 라미로 3세 등과 연합해 알 만수르의 공격에 맞섰으나 루에다(Rued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뒤 안초 2세는 코르도바로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했고, 982년에는 딸 우라카를 알 만수르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슬람군은 989년과 991년, 992년에도 공격해왔고, 산초 가르세스 2세는 아들인 곤살로를 코르도바로 보내 다시 화의를 청했다.

994년 안초 2세가 죽자 맏아들인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가 왕위를 이었다. 그의 재위기간에 팜플로나 왕국은 이슬람 후 우마이야 왕조의 재상이던 알 만수르(al-Hajib al-Mansur)의 공격을 받아 잇달아 패했으며, 그에게 화의를 요청하며 굴복했다. 그러나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는 왕위에 오른 뒤에 카스티야 백작인 산초 가르시아, 살다냐 백작인 가르시아 고메스 등과 연합해 후우마이야 왕조에 맞서려 했다.

997년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는 이슬람 세력이 통치하고 있던 사라고사의 칼라타유드(Calatayud)를 침공해 그곳 태수의 동생을 죽였다. 알 만수르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도 50명을 참수했다.

카스티야의 경우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역대 국왕들은 무슬림 세력과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 지역에 많은 성채를 짓고 군대를 집중 배치했다. 그러다가 850년 로드리고라는 인물이 카스티야 최초의 백작으로 등장하면서 카스티야 백작령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로드리고는 에브로 강의 서쪽과 남쪽에 있는 고대 칸타브리아의 언덕 마을인 아마야를 거점으로 삼고 요새화했다. 이후 이 지역은 세분화되어 알라바, 부르고스, 세레소, 란타론, 축소된 카스티야로 명명되었으며, 각각 별도의 백작들이 신설되었다.

930년경,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카스티야 전역을 통합했다. 그는 주군으로 섬기는 레온 왕국의 국왕에 대해 한편으로는 무슬림과의 전쟁에 협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기를 드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레온 국왕 라미루 2세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944년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무슬림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한 뒤 레오내의 지하감옥에 투옥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산초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봉했다. 3년 동안 구금되었던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결국 레온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라미로 2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석방 후에도 라미루 2세에게 대한 반감을 간직한 그는 카스티야 동부로 피신한 뒤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무슬림들은 그런 그를 지원했고, 947년 사모라를 공격했다가 패퇴했으며 948년 갈리시아의 큰 도시인 오르티게이라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들이 갈리시아 등 레온 왕국의 서부 지역을 잇따라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느라 카스티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고,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이 때를 틈타 잃어버린 카스티야 영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결국 라미루 2세는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화해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카스티야 백작으로 복위했고, 산초 1세는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과 레온 왕국을 상대로 충성 대상을 바꿔가면서 자치권을 확고히 다지고자 노력하면서,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영토를 차츰 늘렸다.

포르투갈의 경우 아스투리아스와 레온 왕국의 봉신국으로 868년에 늦게 성립되었다. 868년, 갈리시아 귀족 비마라 페레스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 알폰수 3세의 지시에 따라 도우로 강 하구의 포르투를 공략하고 초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아랍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871년 몬데구 강변의 코임브라를 공략했다. 약 5천의 인구를 지녔던 코임브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재정복'한 첫 대도시였다.

873년 비마라 페레스가 사망한 후, 비마라의 아들로 추정되는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알폰수 3세에 의해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878년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오포르토와 코임브라를 공격해오자, 갈리시아 귀족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와 함께 물리쳤다.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는 갈리시아인들을 브라가, 비세우, 라멩고 등지에 이주시켰다. 이후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의 후손들은 대대로 코임브라 백작을 칭했다. 루시디오 비마라네스는 910년 루고 일부를 영지로 삼았고, 이듬해에는 두메의 감독관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왕실 의회의 일원으로서 887년에서 917년 사이에 아스투리아스 헌장에 여러 번 이름을 실었다.

922년경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사망한 뒤, 레온 왕국의 귀족 데자 백작 곤살로 베토테스의 아들인 헤르메네길도 곤살베스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943년까지 포르투갈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에 여러 차례 기부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루시디오는 생전에 카스티야 백작령에서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이주한 귀족 디오고 페르난데스의 딸 무마도나 디아스와 결혼했는데, 무마도나가 남편 사후 여백작으로 취임하여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하다가 950년 후반에 여섯 자식에게 영지를 골고루 양도하면서 장남 곤살루 멘데스를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했다.

곤살루 멘데스는 964년 아내 일두아나 파이스와 함께 모레이라 데 코네고스 와 카스타 네이라 마을을 어머니 무마도나가 세운 기마랑이스 수도원에 기부했다. 한편 레온 왕국에서 오르도뉴 4세산추 1세의 내전이 한창 벌어졌을 때 오르도뉴 4세를 지원했다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지원에 힘입어 내전에서 승리한 산추 1세에게 미움을 사고 말았다. 966년, 산추 1세는 그의 영지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19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레온 왕국의 성직자이자 학자였던 삼피로의 연대기에 따르면, 신추 1세는 곤살루가 바친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독살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뜬 소문을 그대로 믿고 적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968년 갈리시아의 귀족 로드리고 벨라스케스의 친척이자 산 마르티뇨 데 파소의 수녀원장인 군트로다가 산타 콤바 수도원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 수녀원의 본 주인이던 오도리노가 도움을 요청하자, 무마도나는 아들 곤살루와 라미루를 통해 군트로다에게 "volens nolens(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도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군트로다가 이에 불응하고 로드리고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두 가문의 전쟁이 벌어졌고, 곤살루가 로드리고를 아귀온차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종결되었다. 982년 레온 왕위에 오른 베르무두 2세는 로드리고의 아들이자 이리아 프라비아 교구의 주교인 펠라요 로드리게스를 해임했는데, 그가 이 일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81년, 라미루 3세가 루에다 전투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사령관 알 하지브 알 만수르에게 참패했다. 만수르는 여세를 이어가 레온 왕국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982년에 수도인 레온에 입성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알 만수르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왕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곤살루는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귀족들을 규합해 982년경 오르도뉴 3세사생아 베르무두 2세를 갈리시아 왕으로 옹립하며 반기를 들었다. 베르무두 2세는 982년 봄과 여름에 갈리시아 전역을 공략하며 위세를 떨쳤다. 라미루 3세는 이를 진압하고자 출진했고, 983년 초 양자는 갈리시아의 안타스 데 울라 근처 포르텔라 데 아레나스에서 격돌했지만 양측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었을 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베르무두 2세는 이후에도 갈리시아 왕을 자처하다가 985년 라미루 3세가 사망하자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레온 국왕에 선임되었다.

997년,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이끄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레온 왕국의 서부 영토를 관통하여 포르투갈과 갈리시아를 파괴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진입한 뒤 그곳의 대성당을 비롯한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성당 대문을 가지고 가서 코르도바 모스크에 내걸었다. 곤살루는 이때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만수르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는지 병에 걸려 사망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포르투갈 백작에 서임된 멘도 곤살베스는 999년부터 레온 왕실 헌장에 포르투갈 백작으로 언급되며, 그 해에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폰수 5세의 가정교사를 맡는 동시에 알폰수 5세의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와 함께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4. 스칸디나비아 지역[편집]


스캍디나비아 지역은 789년을 기점으로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노르드, 데인족들로 구성된 바이킹들이 브리튼 제도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해안과 하천 일대의 지역들을 습격해 약탈 및 해당 지역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빙하기로 인해 살고 있던 유틀란드 반도와 스캍디나비아 반도의 평균 기온이 다시 내려가면서 일시적인 간빙기 동안 늘어난 인구수를 급락한 농업 생산량이 받춰주지 못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지역 내에서 군소 왕국들이 서로의 영토를 병합하면서 정복자에 의한 징세를 거부한 자들이나 아예 후계 구도에 밀려난 이들 위주로 구성되었고,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해 바이킹이 되었다.

872년 하랄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노르웨이가 명분상 통일이 되지만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실제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해안가에 국한되어 있었다. 상술한 대로 그의 통치, 특히 토지세 징수를 거부하는 일파가 바이킹이 되어 잉글랜드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인근의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헤브라디스 제도, 페로 제도 등지로 떠났고, 처음으로 발견된 아이슬란드도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하랄 1세의 사망 후 노르웨이의 왕위를 두고 자식들 간의 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는 아버지가 살아있던 당시에 다른 형제 2명을 살해하였고 이후 왕위에 오르자 지나친 강권 정치 때문에 '피의 도끼(Blodøks)'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기 때문에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해졌고, 결국 반대 귀족세력들이 에리크 1세를 몰아내고 그의 막내 동생으로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던 호콘 1세를 귀국시켜 왕이 되도록 했다.[14]

이후 왕위에 오른 호콘 1세는 잉글랜드에서 자란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이후 노르웨이에도 잉글랜드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교 전파를 후원했지만 다른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각 노르웨이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함대를 모두 회수하여 국왕 직할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지방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노르웨이가 본격적인 통합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이 때문에 호콘 1세는 '선량왕(den gode)'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덴마크에 피신해 있던 에리리크 1세의 아들인 하랄 2세가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아 그의 형제들과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AD 961년 노르웨이의 남서쪽에 있는 피티아르 섬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후 하랄 1세 블로탄은 에리크 1세의 아들 중 장남인 하랄 에리크손을 노르웨이 왕 하랄 2세로 즉위시키고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이 된 하랄 2세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 일대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에 하랄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오슬로의 지방 영주인 트뤼그비 울라프손과 구드라드 비아른손, 그리고 라데 백작(Jarl of Lade)인 시구르드 호콘손을 살해하였고 전통 신앙 숭배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에서 하랄 2세에 대한 반감이 퍼져 나갔고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 역시 하랄 2세가 덴마크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랄 2세에게 살해당한 시구르드 호콘손의 아들인 새로운 라데 백작 호콘 시구르드손이 AD 970년 하랄 1세 블로탄의 묵인을 얻어 하랄 2세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과 하랄 2세의 형제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리고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남동부를 덴마크의 영토로 합병하며 직접 통치하였으나 노르웨이 서부 지역은 라데 백작 호콘을 봉신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다.이후 후술하겠지만 통치권을 장악한 라데 백작 호콘이 점차 오만하게 굴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고 결국 AD 995년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노르웨이가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트뤼그비 울라프손의 아들인 울라프 트뤼그비손이 노르웨이로 돌아와 왕위 올라 잠시나마 덴마크로 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후 열렬히 그리스도교 포교에 나서 노르웨이 서부 해안 지방과 인근 섬인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및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으나 앞선 노르웨이 왕들과 마찬가지로 울라프 1세도 노르웨이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도 전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올라프 1세의 가장 큰 위협은 덴마크의 스벤 1세였다. 스벤 1세는 부왕인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의 노르웨이 통치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스웨덴 왕 올로프 3세 쇠트코눙 및 호콘의 아들인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동맹을 맺었다

덴마크의 경우 오랫동안 여러 개의 부족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노르웨이 같은 험준한 산맥과 스웨덴 같은 빽빽한 산림도 없었기 때문에 통일 국가의 형성을 방해할 만한 지리적인 요인은 적은 편이었다. 936년 옐링 지역의 군주가 된 고름이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벌이며 덴마크의 통일 사업을 시작하여 덴마크 서부를 지배하던 울라프 가문의 시그트리그 그누파손을 물리치고 유틀란트 반도를 통일하였다. 고름은 인근 노르웨이 통일 왕국의 초대 왕 하랄 1세의 아들 에리크 1세와 자신의 딸인 건힐다를 결혼시키며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고름의 아내인 티레가 덴마크와 독일의 국경인 다네비르케 방어벽을 세우며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947년 독일의 작센 북부 지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이교도 슬라브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들인 하랄 고름손 블로탄을 보내 이들을 지원하였다. 이 반란은 3년이나 이어졌으나 950년 신성로마황제 오토 1세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으면서 진압당하고 말았다. 덴마크 군도 유틀란트 반도로 쫓겨갔고 오토 1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덴마크에서는 958년 고름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하랄 고름손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하랄 고름손은 '푸른 이빨'이라는 뜻의 '블로탄(blatǫnn)'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 부러진 이빨 대신 파란색 의치를 넣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블루베리를 너무 좋아하여 항상 이빨이 파랗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랄 고름손 블로탄은 아버지가 완료하지 못한 덴마크 통일 사업이 완수하여 최초의 통일 덴마크의 왕인 하랄 1세로 즉위하였다. 또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아버지와 달리 그의 어머니인 티레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960년경 직접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를 덴마크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또한 상술한 대로 노르웨이 또한 이때 합병시켰다.이후 오토 1세가 사망한 후 오토 2세가 황제가 되자 자신의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고, 몇차례의 고비 끝에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것과 함께 통일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장자 상속제를 체택해 차남인 스벤 트베스케그을 제거하려 했지만 되려 반격을 받아 독일의 벤틀란트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나 곧 사망했다.

스웨덴 또한 10세기 말 우플란드 지방을 통치하던 에이리크 6세가 피리스벨리르 전투에서 조카인 스티르비르욘을 물리치고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여 '승리왕(Segersäll)'이라는 별칭을 얻고 멜라렌 지방을 중심으로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에이리크 6세라는 칭호를 쓴 이유는 그 이전의 전설 상의 스웨덴 국왕을 모두를 계승한다는 의미인데, 다만 에이리크 6세가 윙글링 왕가의 후예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직접 윙글링이라는 가문명을 사용했는 지는 확실치 않으며 역사적으로는 에이리크 6세가 창건한 왕조를 문쇠(Munsö) 왕조라고 부르지만 문제는 이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스웨덴의 역사에 대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이것이 진실인지 조차 알 수 없다.

심지어 AD 995년 에이리크 6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초기 북유럽 역사를 기록한 브레멘 주교의 아담에 의하면 에리크 6세가 AD 994년 덴마크 국왕 스벤 1세를 잉글랜드 왕국으로 내쫓고 AD 995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를 지배했지만 에리크 6세가 사망하자 스벤 1세에게 덴마크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이 덴마크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지만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의 어머니이자 에리크 6세의 미망인인 시그리드가 스벤 1세와 재혼하면서 화해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에리크 6세가 덴마크를 지배했다고 한 시기에 스벤 1세는 잉글랜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은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다만 울라프 3세 쇠트코눙와 덴마크의 스벤 1세의 동맹은 사실로 보이는데 실제로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울라프 1세 트뤼그비손을 몰락시키는 데 동참했다.


5. 러시아 평원[편집]


한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전신인 키예프 루스 또한 이때 중세 초인 9세기 말에 등장한다. 상술한 대로 키예프 루스 역시 류리크를 지도자로 하는 바이킹 군벌 세력들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이때는 군주 칭호로 을 혼용했기에 루스 카간국이라고 불렸고, 타지역에 정착해 현지 문화와 융화된 다른 바이킹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슬라브인들과 주변 있던 유목민 세력들과 융화되기 시작했다. 노브고로드를 수도로 했기에 노브고로드 대공국으로 불렸다. 860년 류리크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흑해를 넘어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도 했다.

879년 류리크가 죽자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크냐지겸 칸이 되었다.류리크에게 이고리 류리코비치가 있었으나 나이가 어린 탓인지 출신이 불명확한 올레그가 즉위한 것으로 보이며 후술하지만 올레그는 이고리가 장설할 때까지 섭정에 가까운 위치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즉위한 후 최초로 보이는 행적이 바로 키예프 장악이다. 882년, 올레그는 군사를 이끌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 남하하며 스몰렌스크와 류베치를 장악했다. 그 곳에서 그는 일찍이 류리크가 파견했던 부하들의 소식을 들었다. 류리크는 860년 제7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일으켰는데, 이 때 참전했던 부하들 중 일부를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대에 파견했다. 이들을 이끄는 장수는 '이방인 뒤레'로 자신의 무력과 동로마에서 세운 전공으로 현지 슬라브인들을 감동시켜 키예프 일대의 군주가 되었다.

이후 지리적으로 멀다 보니 키예프는 노브고로드의 류리크 조정과 교류를 줄이고 반독립적으로 통치되었는데, 올레그는 키예프의 통제권을 잡고자 했다. 올레그는 뒤레에게 사절을 보내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했고, 뒤레는 이를 허락했다. 배를 타고 와서 키예프 앞 강변에서, 올레그는 뒤레에게 사절을 보냈다. 금은보화를 선물로 들고 왔으며, 국가의 일로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몸이 아파서 자신이 갈 수가 없으니 뒤레가 배로 좀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뒤레는 별 의심 없이 올레그의 배로 갔다. 뒤레가 배에 타자 올레그는 돌변해, 그 자리에서 뒤레를 살해했다. 그리고 바로 키예프에 입성했다. 그는 류리크의 어린 아들 이고리를 데리고 왔는데, 키예프 사람들 앞에서 이고리를 보여주면서

내가 바로 여러분의 군주 올레그이며, 이 아이가 류리크 님의 아들인 이고리요.

라며 자신과 이고리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이 선언은 키예프 사람들을 납득시켰고, 올레그는 희생 없이 키예프를 장악했다. 올레그는 이 도시가 루스인들의 도시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자신의 궁정을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겼고, 이때부터 키예프 루스가 시작되었으며 스몰렌스크 등의 정착촌과 연결되어, 드네프르 강안 일대 전부가 루스인들의 영토가 되었다. 키예프로 천도함으로써 슬라브인들에 대한 통제력이 훨씬 높아졌고, 사방으로 상업과 약탈을 나가기도 쉬워졌다.

올레그는 키예프에서 멈추지 않고 주변 슬라브계 부족들의 복속을 시작했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 일대의 슬라브인들이 주로 하자르 칸국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올레그는 이들에게 자신과 연대해 하자르에 대항하자고 부추겼다. 이 결과 드레블랴인, 세베르냐인, 라디미치인과 하자르계 유목민 일부가 키예프 루스에 종속되었다. 이렇게 주변에 영향력을 확대한 후에는, 류리크의 뒤를 이어 907년 레온 6세 치세 하의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루스인들의 남하 소식을 들은 동로마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쇠사슬을 쳤는데, 이 것을 본 올레그는 배에서 내린 후 바퀴를 꺼내 배를 싣고 육지로 배를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함대 손실 없이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올레그는 성을 포위하고 직접 앞서 싸웠다고 하는데, 다른 전쟁으로 여력이 없던 동로마는 배에 달린 노 하나 당 12 흐리브냐의 금을 주고 루스인들이 동로마에서 용병업을 하는 내용도 포함된 평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공격은 루스 쪽 연대기에만 기록되어 있고 동로마 쪽 기록에 없어 전임 류리크의 공격과 후임 이고리의 공격을 짜집기해서 창조한 전설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912년 올레그가 죽은 후 이고리가 크냐지로 즉위한다. 이고리의 즉위 초반의 기록들은 거의 전해진 것이 별로 없으나 그 역시 920년 동로마제국을 공격하고 있던 페체네그족의 후방을 공격했으며, 이후 941년 페체네그족과 연합해 100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는 군함의 수는 고작해봐야 15척이었다.

문제는 당시 동로마 황제는 노련한 군인 출신이었던 로마노스 1세였다. 로마노스 1세는 군인 출신 답게 침착하게 남은 15척의 낡은 배에 그리스의 불을 장착해 이고리 대공의 함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남은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일대인 비티니아에 상륙했다. 이고리는 비티니아에서 약탈과 학살을 벌였다. 민간인에겐 묶어놓고 활을 쏘고 사제들에게는 머리에 쇠못을 박는 등 잔혹 행위를 하며 군기가 잠시 해이해졌고, 딱 이 때 도착한 동로마 중앙군의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대 바르다스 포카스에게 공격당해 크게 패했다. 살아남은 인원들은 잔존한 함대를 합쳐 탈출하려다 제독 테오파네스에게 걸려 다시 한 번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941년 전쟁은 재물 약간 말고는 피해만 엄청 입은 채 끝났다. 이후에도 이고리는 944년 페체네그 기병을 이끌고 다시 무력시위를 하다가 945년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조약문에 서명한 루스인이 총 76명인데, 왕족이 12명, 왕족 1인당 1명씩을 대표하는 외교관 11명, 수행원 27명, 따라온 상인 26명으로 . 왕족과 귀족층인 외교관들은 거의 전원이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갖고 있다. 오히려 왕족 중엔 현지인들과의 동화를 위해서인지, 슬라브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셋 있다. 귀족층 중 핀란드식 이름이 셋 있으나, 슬라브식 이름은 전혀 없었고, 반면 평민 계층일 상인들에는 핀란드식 이름이 셋, 슬라브식 이름이 둘 있었다. 내용으로 동로마와의 무역통상 권리와 드네프르 강 하구 항구의 이용권을 얻었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 측도 크림 반도 남부에 대한 불가침조약과 정착촌 건설 금지를 약속해주는 등 경제적 권리를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전비를 그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고리는 피지배층 슬라브인들에게 세금을 많이 뜯어서 벌충하려 했다. 이고리는 군대를 이끌고 드레블랴인들의 수도 이스코로스텐으로 진군해 특별 공물을 요구했다. 원래 이 당시 루스 일대에는 폴리우디아라 불리는 정기 공물 수취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고리가 폴리우디아 공물 자체를 올린 것도 모자라 드레블랴인들에게 특별 공물까지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어쨌든 루스의 위세가 높았으니 드레블랴인들은 순순히 공물을 바쳤다. 공물을 챙겨 돌아가던 이고리는 왠지 좀 더 털면 더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약간의 병력을 데리고 다시 드레블랴인들에게 돌아가 더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등 드레블랴인들에게 갑질을 하다가 드레블랴인들은 이고리를 습격해 체포한 후 그를 구부러진 자작나무 가지 사이에 사지를 묶어놓고 자작나무를 튕겨 사지를 찢어 죽여버렸다.

이고리가 살해되자 3살짜리였던 스뱌토슬라프 1세가 즉위했고, 어머니인 올가가 섭정으로 키예프 루스를 통치한다. 그녀는 우선적으로 남편을 죽인 드레블랴인들에게 4차례의 방식으로 복수를 했다. 첫번째는 이고리를 죽이면서 기고만장해져 레블랴 연합의 공작 몰과 재혼하라는 드레블랴인 사절 20명을 산매장시켰다. 이후 두번째 복수로 드레블랴인들에게 전령을 보내, 저번 사절들을 잘 맞아들였으니 더 저명하고 지위 높은 인사들을 새로운 사절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드레블랴인들은 아무 의심 없이 최고위층 인사들을 보냈다. 올가는 이들에게 자신을 만나기 전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올 것을 권했다. 드레블랴인 귀족 사절들은 의심 없이 목욕탕에 갔는데, 올가는 목욕탕 입구를 걸어잠근 뒤 목욕탕에 불을 질려 산체로 태워 죽였다. 이후 세번째 복수로 다시 드레블랴인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새 결혼을 하기 전에 전 남편 이고리의 무덤에서 장례식을 하고 싶으니 벌꿀술을 잔뜩 준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드레블랴인들은 조금 긴장했지만 이를 수락했다. 얼마 후 이고리의 무덤이 있는 곳에 나타난 올가는 정말로 수행원 몇명을 대동하고 왔다. 올가는 장례식을 연 후 남편의 무덤 앞에 앉아 엉엉 울기만 했고, 수행원들은 먹고 마시는 분위기였다. 이에 많은 양의 벌꿀술에 눈독을 들이던 드레블랴인들은 루스인들의 태도가 수상하지 않자 곧 장례식에 모여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다들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루스인들이 그저 술잔을 기울이던 것도, 올가가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것도 모두 연기였다. 계획대로 드레블랴인들이 전부 곯아떨어지자 올가는 수행원들에게 전부 처단할 것을 명했다. 수행원들은 드레블랴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 후 올가와 함께 키예프로 탈출했다. 이 날 밤 드레블랴인 전사 5천 명이 살해당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복수로 46년, 올가는 드레블랴인들을 침공했다. 전쟁 명분은 당연히 남편 이고리의 복수였다. 드레블랴인들은 전쟁을 지휘할 귀족 수십 명과 전사 5천 명을 손실한 상태였기에 전쟁은 순조로웠다. 순식간에 드레블랴인 도시 대다수가 장악당하고, 드레블랴인들의 수도 이스코로스텐만이 남았다. 올가는 1년 간 이스코로스텐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 했다. 그러다 올가는 기막힌 꾀를 내었다. 그녀는 이스코로스텐에 전령을 보내어, 지금 성 밖의 마을들은 일찌감치 항복하여 농사도 짓고 생업을 하는데 어째서 이스코로스텐 사람들은 항복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스코로스텐 수비대는 일찍이 우리가 당신들의 대공을 죽였으므로 보복당할까봐 항복하지 못 한다고 답장했다.

이에 올가는 이미 귀족 수십 명과 전사 5천 명을 죽인 것으로 화가 풀렸다며, 우리가 승리했다는 증거로 대단한 것은 필요없고 다만 드레블랴인들 한 사람 당 비둘기 세 마리와 참새 세 마리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드레블랴인들은 안심하며 비둘기와 참새들을 마련해 올가에게 전했다. 하지만 올가의 복수는 당연히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올가는 포위를 푸는 척 하는 한 편, 나뭇가지, 천쪼가리와 석탄을 잔뜩 가져왔다. 그리고 이 나뭇가지, 천쪼가리, 석탄에 불을 붙인 후 이것들을 드레블랴인들에게 받은 비둘기들의 다리에 묶고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귀소본능이 있던 비둘기들은 원래 살던 집인 이스코로스텐으로 날아갔고, 비둘기들이 다리에 불 붙은 상태로 주인 집을 찾아가는 바람에 이스코로스텐에 어마어마한 화재가 났다. 이 시기 동유럽 성채들은 거의 대부분이 건물은 물론 성벽마저도 목재였기 때문에, 이스코로스텐은 불타며 내려앉았다. 그리고 올가와 루스 군대는 진격해 불타는 이스코로스텐을 마구 휩쓸었다. 드레블랴인 대다수가 타죽거나 루스 군대에 학살당했고, 생존자들은 모두 사로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이로써 드레블랴인 연합 국가는 멸망하고 민족은 거의 절멸당했다. 가히 역사에 남을 만한 대복수극의 마무리였다.

복수를 마친 올가는 키예프 루스의 내정을 정비해 이고리가 살해된 이유가 무리한 공물 수취에서 비롯된 것을알고 있었기에 속국들의 공물 수취를 줄이고, 초토화된 이스코로스텐 대신 브루치에 관청을 세워 옛 드레블랴인들의 땅을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주먹구구식으로 통치되던 키예프 루스 전역에 행정구역을 설치해 관리들을 파견하거나 강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루스식 무역 체계를 개량해 강변 곳곳에 무역기지를 설치해 상업 효율을 높이고, 수출할 모피를 구할 국립 사냥터도 곳곳에 설치했다. 또한 새로운 마을과 도시의 설립과 군사 요충지에 목조 요새를 설치하는 등 적극 후원해 훗날 키예프 루스가 '도시의 나라'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957년 올가는 돌연 수행원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당시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7세였다. 올가는 957년 9월 9일 수요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했다. 이후 10월 18일 일요일에도 황제를 알현했다. 이때 원초 연대기에선 콘스탄티노스 7세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했다고 하지만 콘스탄티노스 7세는 결혼한 상태였기에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어째든 올가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김과 동시에 놀랍게도 기독교로 개종한 후 키예프 루스로 돌아갔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며 그녀는 아들인 스뱌토슬라프를 비롯한 다른 루스인들을 개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하는 등 기독교로 전파시키는데 애를 먹었다.

이후 964년 올가는 섭정 자리에서 물려나 전권을 아들 스뱌토슬라프에게 넘겻고, 스뱌토슬라프는 아버지 이고리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국을 침공했다. 그의 치세는 오직 전쟁뿐으로 친정을 하기 전부터인 950년부터 군권을 행사했다. 즉위 후 하자르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키예프 루스의 주요한 자금 수입원은 볼가 강 무역로의 관세였는데, 볼가 강 하류를 하자르 칸국이 장악해서 무역로가 통제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하자르 칸국의 수도 이틸이 볼가 강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있었을 정도. 그래서 그는 즉위 직후에 볼가 강으로 가서 그 곳의 슬라브 부족인 브야티치인들을 정벌했다.

브야티치인들이 하자르 칸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브야티치인들의 땅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후 965년, 하자르 칸국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아랍 쪽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먼저 볼가 강 중류에서 상인들을 위협하던 볼가 불가르부터 박살냈다고 한다. 볼가 불가르를 혼쭐낸 그대로 볼가 강을 타고 남하하며 하자르 칸국의 도시들을 휩쓸어 버렸다. 트무타라칸, 사만다르와 사르켈이 무너지고 969년에 하자란이 뚫린 뒤 수도 이틸이 무너졌다. 하자르 칸국은 이 전쟁 이후 더 이상 카간국을 칭하지 못 하고 소국으로 전락해 명맥만 간신히 잇게 되었다. 수많은 하자르인들이 죽거나 루스인들에게 사로잡혀 동로마나 아랍에 팔려갔다. 볼가 강 무역로와 강변은 완전한 키예프 루스의 것이 되었다. 사르켈이 있던 터에 신도시 벨라야 베자를 건설한 후 돌아가는 길에 브야티치인들을 다시 공격해 완전히 복종시켰다.

967년 동로마 황제였던 니케포루스 2세는 귀족 칼로키로스를 스뱌토슬라프에게 사절로 보냈다. 금 1만 5천 파운드를 줄 테니 불가리아를 공격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968년 페체네그족을 불러모은 뒤 도합 6만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로 남하했다. 불가리아군은 두드려 맞다가 도로스톨론에서 루스에게 완패하고 완전히 국력을 상실했다. 노년에 루스군에게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은 불가리아 차르 페터르 1세는 뇌졸중으로 죽어버리고 보리스 2세가 즉위했으나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970년에 수도 프레슬라프가 함락당했다. 차르 보리스 2세는 붙잡혔고, 전리품마냥 보리스 2세를 자신 곁에 데리고 다녔다. 불가리아 전역이 루스에게 점령당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은 껍데기만 남아 키예프 루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키예프 루스가 승기를 잡자 동로마 제국의 니키포로스 2세는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불가리아 땅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단숨에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는 동로마가 약속한 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불가리아 땅에 반해서 이 곳에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니키포로스 2세는 페체네그족에게 금을 보내 루스 본토와 키이우를 공격해 줄 것을 부탁했다. 968년, 키예프 전투가 일어나 페체네그족은 단숨에 키이우를 포위했다. 늙은 키예프의 올가가 직접 키이우 방어군의 지휘관으로 나섰다. 이때 운좋게 이사실을 알게 된 스뱌토슬라프는 군대를 키예프로 회군시켜 페체네그족을 격퇴해 키예프를 구원한다.

이후 스뱌토슬라프는 불가리아 땅의 페레야슬라베츠로 천도할 것을 발표했다. 천도 이유는 페레야슬라베츠와 불가리아 땅이 키이우보다 훨씬 풍요로우며 약탈할 대상들도 가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키예프의 올가는 자신이 쇠약한데 가기는 어딜 가냐며 자신이 죽은 뒤에나 천도할 것을 부탁했다. 이에 스뱌토슬라프가 천도를 미뤘는데 이 말을 한 3일 후 올가가 사망했다. 스뱌토슬라프는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본인은 기독교를 싫어했지만 어머니는 기독교식 장례를 치루어 드렸다. 어머니가 죽은 후 스뱌토슬라프는 루스 땅을 그의 아들들에게 분봉해주고 자신은 페레야슬라베츠로 천도했다.

아예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불가리아에 수도까지 세워 버리자 동로마 제국은 전쟁을 벌일 결심을 굳혔다. 이후 키이우를 구원하러 돌아갔을 즈음에 니키포로스 2세가 살해당하고 요안니스 1세가 즉위했다. 970년 봄에 불가리아 잔존 세력을 정리하고 일전에 사절로 왔었던 칼로키로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라고 선포한 후 불가리아인들과 마자르인들까지 동원해 동로마 제국 수도권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트라케가 삽시간에 박살나고 필리포폴리스가 공격당했다. 요안니스 1세는 아나톨리아에서 죽은 아내 마리아의 오빠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와 환관 페트루스 포카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바르다스가 이끄는 제국군의 규모는 1만 2천 명 가량이었다.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한 후 적이 다가오자 천천히 퇴각하면서 마치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그는 요안니스 알라카스 파트리키우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삼았다. 루스군이 기세를 올려 추격에 나서자, 기병대는 퇴각 속도를 높혔다. 루스군은그들을 추격하다가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후 치열한 혈전을 벌이면서 전장에서 탈출한 스뱌토슬라프는 불가리아로 귀환한 후에도 쟁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동로마를 위협했다.

이 때 동로마에서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이 일어나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포카스를 상대하러 아나톨리아로 넘어갔고, 그 대신 요안니스 1세가 친정을 준비했다. 971년, 요안니스 1세는 환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와 함께 5,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엄청난 속도로 산악 지대를 돌파해 4월 13일에 페레야슬라베츠를 기습했다. 루스 수비대 8천 명이 있었으나 깜짝 놀라 성문을 닫지도 못 했다. 바람처럼 페레야슬라베츠 성벽을 돌파한 제국군은 루스인들이 도망친 궁전에다 불을 질러 루스인들을 몰살했다. 보리스 2세도 여기서 제국군에게 잡혔다. 요안니스 1세는 자신을 불가리아의 해방자로 선전했다. 이에 깜짝 놀란 스뱌토슬라프는 페레야슬라베츠로 진군하려 했으나 요안니스 1세가 먼저 움직여 루스군을 몰았다. 이에 인근 도시 도로스톨론으로 들어갔으나 그 곳에서 포위당했다. 4월 23일에 시작된 도로스톨론 포위전은 몇 번의 포위망 돌파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결국 항복하였고 끝이 났다. 양국은 971년 7월 23일, 평화 협상을 맺었다. 조약은 아래 다음과 같았다.

1. 키예프 루스동로마 제국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다.

2. 키예프 루스는 다시는 동로마 제국을 침범하지 않는다.[15]

3. 키예프 루스는 불가리아 지역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4. 키예프 루스는 사로잡은 모든 로마인과 불가리아인 포로들을 송환한다.

5. 키예프 루스는 다시 동로마와의 무역통상을 허가받는다.

사실상 스뱌토슬라프 1세의 패배였다. 스뱌토슬라프와 루스 군대는 불가리아와 루스 국경 즈음에 있는 베레쟌 섬으로 안전하게 퇴각하도록 약속받았다. 스뱌토슬라프의 꿈이었던 불가리아 땅을 잃은 채, 스뱌토슬라프와 루스 군대는 회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안니스 1세는 스뱌토슬라프가 보통 걸물이 아니라고 느꼈고, 스뱌토슬라프가 언젠가 다시 동로마를 위협할 것이라 판단한 요안니스 1세는 계략을 꾸몄다. 페체네그족에게 다시 뇌물을 먹여 루스 군대를 기습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페체네그족 카간 쿠랴는 이를 수락했고, 키예프로 가는 길목중 하나인 드네프로 강 주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이를 모르던 스뱌토슬라프는 드네프로 강을 통해 키예프로 귀환하지만 오랜 시간을 스뱌토슬라프와 함께 해 온 스베날드르 공작은 대공의 안전을 위해 미리 첩보를 보냈고, 그 결과 수상한 페체네그족들이 드네프르 강 주변에 엄청나게 모여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스베날드르는 이를 대공에게 보고하며 육로로 가자고 제안했으나, 스뱌토슬라프는 드네프르 강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참을 설득해도 대공이 듣지를 않자, 스베날드르는 스뱌토슬라프에게 허락을 받고 군대를 나누어 육로로 먼저 출발했다.

그 후 스뱌토슬라프는 함대를 꾸려 972년 봄에 드네프르 강에 들어섰다. 하지만 정말로 스베날드르가 말한 것처럼 함대의 양옆 강변에서 페체네그족이 출몰했다. 대공과 루스 군대는 분투했으나 숫자로 보나 지형으로 보나 이길 수가 없는 전투였고, 결국 스뱌토슬라프 1세는 드네프르 강에서 활을 맞아 전사했다. 그를 따르던 루스 군대도 거의 몰살당했다. 쿠랴 카간은 전투 후에 스뱌토슬라프의 시신을 찾아 목을 베고 두개골을 발라내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키예프 대공에 오른 장남 야로폴크 1세는 조모인 올가 밑에서 양육되었기에 기독교에 친화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스뱌토슬라프가 불가리아를 차지한 후 아들들에게 루스 땅을 분할했는데, 야로폴크는 장남답게 키이우와 루스 남부의 주요 영토를 받았고, 차남인 올레그 스뱌토슬라비치는 키예프의 올가가 개척한 브루치와 옛 드레블랴인들의 땅, 삼남인 블라디미르 1세는 본래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나 노브고로드 사람들이 자신듫에게도 크냐지를 보내달라면서 블라디미르를 지목했기에 노브고로드와 루스 북부 일대를 받았다.

초기에는 분제가 없었으나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형제는 사로간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발단은 그 발단은 놀랍게도 스베날드르 장군이었다. 스베날드르는 이 시점에 루스 최고의 권신으로 발돋움했으나, 정작 그의 원래 영지였던 드레블랴인 지역은 올레그 공작에게 빼앗겨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973년에 스베날드르의 아들 루트 스베넬디히가 올레그의 영토에 들어가 멋대로 사냥을 벌였다. 정치적 상황을 보았을 때 이는 분명한 루트 또는 스베날드르의 도발이었다. 올레그는 즉각 대응해, 루트를 잡아다 죽여버렸다. 이에 스베날드르는 야로폴크 1세에게 가서 올레그를 모함하고 전쟁을 선동했다. 야로폴크 1세는 막상 동생과 일전을 벌여 그를 죽이는 것이 부담되었는지 처음에는 전쟁을 거부했으나 스베날드르의 2년간에 걸친 설득 끝에 결국 975년, 브루치로 출병을 결단했다. 올레그는 야전을 결단했고 브루치 성 앞으로 나아가 싸웠다. 전투에서 올레그의 군대는 참패했고 병사들은 다급히 브루치 성 안으로 도망치려 시도했다. 올레그는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막고 군대를 수습하려 했으나 인파에 떠밀려 다리에서 떨어져, 해자로 추락해 사망했다. 브루치는 즉각 야로폴크 1세에게 항복했다. 야로폴크 1세는 우선 동생부터 확보하려고 수색대를 꾸렸는데 며칠 간 찾아내지 못 했다. 수색은 어느 현지인이 전투 때 올레그 공작께서 다리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멈췄다. 해자에서 동생의 시체를 찾아낸 야로폴크 1세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고는 스베날드르를 돌아보며

자, 이것이 당신이 원했던 거요!

이라고 일갈했다. 올레그를 브루치 성에 장사지낸 후 야로폴크 1세는 키이우로 돌아갔다.

이 때, 큰형이 둘째 형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셋째 블라디미르 1세는 즉각 노브고로드에서 도망쳐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때문에 야로폴크 1세는 얼떨결에 북부 지역 통제권까지 얻었고, 3년간 평화로운 통치를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스베날드르가 죽었고, 스베날드르의 자리는 다른 귀족 블루드가 차지했다. 하지만 978년, 블라디미르 1세는 엄청난 수의 바랑인 군대를 이끌고 노브고로드로 귀환했다. 그가 돌아오자 노브고로드와 일대의 통치권은 즉각 블라디미르에게 돌아왔다. 블라디미르 1세는 이제 대놓고 야로폴크 1세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야로폴크 1세의 지지자 폴로츠크 공작 바이킹계 바랑인 귀족 라그볼로드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딸인 라그네다에게 청혼했다. 이에 야로폴크 1세도 전략적 이유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라그볼로드 공작은 그녀의 딸에게 누구와 결혼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라그네다는

종년의 자식의 신발을 벗겨줄 순 없으니[16]

야로폴크 대공과 결혼해야지요.

라고 대답했다. 내심 야로폴크 1세를 지지하던 라그볼로드는 이를 수긍한 후 블라디미르에게 전령을 보내 딸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러한 모욕적인 언서를 들은 블라디미르는 플로츠크를 쳐 무너뜨리고 키이우로 진군했다.

야로폴크 1세는 블루드를 믿고 싸우려 했으나, 사실 블루드는 일찌감치 블라디미르 1세와 밀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블루드는 최근 키이우의 민심이 블라디미르 1세에게 기울어 여기서 싸웠다간 백성들이 성문을 열 수 있다며, 인근에 있는 작지만 튼튼한 요새 로덴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는 이에 따랐다. 곧 블라디미르 1세가 당도해 키이우에 무혈입성하고 로덴을 포위했다. 작은 요새 로덴은 물자 비축량이 많지 않아 금새 기근 상태에 빠져버렸다. 상황이 악화되고 야로폴크 1세가 근심에 빠지자 블루드는 블라디미르 1세와 협상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야로폴크 1세의 친구이자 충신인 바랴즈코는 분명히 계략이고 협상장에 갔다가는 죽을 거라며 대공을 말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키이우로 갔다. 6월 8일에 야로폴크 1세가 키이우 궁전에 들어서자, 블라디미르 1세는 우선 궁전을 봉쇄한 후 3일 간 형에게 큰 연회를 베풀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6월 11일, 블라디미르 1세는 전사 둘을 보냈다. 두 전사는 야로폴크 1세를 기습해 가슴을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

승자가 된 것은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 되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 대공에 오른 초기만 하더라도 슬라브 신앙을 믿었고, 실재로 즉위 직후 키예프에 슬라브 신들판테온을 지었고, 또한 인신공양 제사도 주관했으며 이 시기엔 첩도 수백명을 두었다고 한다.하지만 987년 돌연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언했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는 개종을 선언하면서 어떤 종교가 자신과 루스에게 가장 좋을지 회의를 열었다. 블라디미르 1세가 후보군에 올린 종교는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 유대교였다. 여기서 가톨릭은 중심지가 너무 먼 데다 교황의 간섭이 강제된다는 것이 별로였고, 유대교는 믿는 민족이 멸망한 걸 보니 효험이 의심되는데다가 루스인과 대판 싸웠던 튀르크계 하자르인들의 국교였다는 것이 별로였으며, 이슬람은 루스인의 필수품이었던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교리가 너무 치명적이라 탈락했다고 한다. 반면 정교회는 블라디미르 1세가 만난 신학자들이 인상깊었던 데다가 동로마 제국하기아 소피아에 다녀온 사절들이 정교회 사원은 여기가 천국인지 지상인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다고 증언하자 정교회를 채택했다고 한다. 이 중 유대교는 정말로 검토했는지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정교회와 이슬람에 대해선 실질적으로 관심을 보인 흔적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의사 겸 작가 알 마르와지는 10세기 후반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북쪽 야만인 왕이 호라즘 지역에 사절 넷을 보내 이슬람에 관심이 있으니 이맘을 보내달라고 청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는 종교 선택 회의가 있었다고는 해도 루스인들의 전적상[17] 정교회를 내정해놓고, 보여주기식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개종 타이밍은 동로마 제국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 황제는 로봇마냥 국정만 돌본 황제로 유명한 명군 바실리오스 2세였다. 986년에 로마 귀족 바르다스 포카스가 황제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바르다스는 동로마 제국의 군사 중심지이던 아나톨리아 반도를 모조리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곤경에 빠진 바실리오스 2세는 황급히 병력을 데려올 만한 곳을 찾았는데, 눈에 띈 곳이 바로 키예프 루스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루스에게 동맹을 맺고 자신을 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1세는 바실리오스 2세에게 제국 황녀와의 결혼을 대가로 요구했다. 바실리오스 2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당시 황녀는 바실리오스 2세의 여동생 안나[18]포르피로게니타[19]였다.

일전에 바실리오스 2세의 할아버지 콘스탄티노스 7세포르피로게니투스는 어떤 외국인에게도 결혼시키면 안 된다고 규정했는데[20], 실리주의자 바실리오스 2세에게 그런 건 없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989년, 바실리오스 2세는 블라디미르 1세에게 받은 군사 6천 명으로 아비도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바르다스 포카스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병력은 후일 바랑인 친위대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하지만 막상 황녀를 루스에 보내려니 찝찝해진건지 바실리오스 2세는 결혼 문제를 미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에 분노한 블라디미르 1세는 크림 반도의 동로마 도시인 케르손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러자 바실리오스 2세는 결혼을 진행시키기로 했고, 안나는 그 대신 남편이 될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을 요구했다 이에 마침 개종하려고 했던 블라디미르 1세는 단박에 정교회로 개종했다. 세례명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서 따와 '바실리오스'로 했다.

안나와 결혼한 블라디미르 1세는 자신이 세운 슬라브 신화 만신전을 파괴하고, 슬라브 신화의 신상들을 모조리 부수거나 강에 던질 것을 명령한 후[21] 나라 곳곳에 성당을 세웠다. 그 후 989년에 전 루스의 개종을 선언했다. 그리고 모든 루스인들에게 성당으로 가서 세례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키예프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게 따랐으나 블라디미르 1세의 외삼촌 도브리냐가 다스리던 노브고로드에선 개종 거부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바랑인 기독교도 페오도르와 요안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는데 이들은 훗날 최초의 루스인 순교자로 인정되었다. 키예프에 대교구가 설치되었고 노브고로드, 체르니히우, 페레야슬라블 등에도 교구가 설치되었다.

아울러 외치 또한 방관하지 않았는데 981년폴란드미에슈코 1세와 전쟁을 벌여 프르셰미슬 일대를 장악했고, 볼가 강 일대의 슬라브계 브야티치족들을 다시 공격해[22] 공물을 받아냈으며 983년에는 발트족의 일파인 야트빙거족들을 정복하고 발트 연안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984년에는 드네프르 강 상류의 슬라브계 라디미치족들[23]를 쳐서 복속시켰다. 985년에는 볼가 불가르와 전쟁을 개시해 그들을 제압하고 루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리고 그대로 볼가 강을 타고 남진하여 일전에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공격당한 후 남아있던 하자르 칸국의 잔당들을 공격해 루스의 속국으로 삼았다. 992년에는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공격해 백크로아티아인들을 복속시키고, 최초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루스의 영토로 만들었다.

반면 페체네그족을 상대로는 끊임없이 방어해야 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에 의하면 페체네그족드네프르 강의 지류 근처로 움직이며, 키예프로 말을 달리면 하루 만에 가는 거리 즈음에서 배회하면서 루스를 위협했다고 한다. 또 암살당한 맏형 야로폴크 1세의 친구이자 충신이었던 바랴즈코도 페체네그족으로 망명해 끊임없이 페체네그족을 선동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페체네그족을 상대로 여러 번 패배했고, 지긋지긋한 페체네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드네프르 강변에 장성을 건설하고 그 사이사이에 많은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이후 997년에는 페체네그족 족장 쿠추그를 복속시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평화적으로 외교 역시 많이 했는데, 정교회의 본산이었던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이어가기는 했지만 서방 교회의 본산인 로마 교황청헝가리 왕국의 성 이슈트반 1세, 보헤미아 공국의 경건공 볼레스와프 2세, 폴란드 왕국의 용감공 볼레스와프 1세와도 교류를 했다.

내치 역시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문물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키예프 루스의 내치를 발전시켰는데 988년 수많은 아들들을 키예프 루스 전역에 분할 분봉시켜 이후 중기에 발생하는 내전의 씨앗을 뿌리고 만다.

기독교 개종 후 990년대 초반에, 블라디미르 1세는 보야르[24]들과 포사드니크[25]들을 모아서 평의회를 열었다. 여기서 10진법에 기반한 새로운 행정 및 군사 체계를 조직했고, 《교회 헌장》을 제정해 교회의 권한도 정했다. 법도 다듬었는데, 고대 슬라브인의 관습법인 '비라'를 명문화한 후 동로마 제국의 로마법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그 후 로마법을 기반으로 비라 법을 섞어[26] 키예프 루스 국법을 완성했다. 따라서 키예프 루스도 이제부터 로마법을 따르는 국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역을 크게 진흥시켰으며, 원래 동로마의 솔리두스화나 이슬람의 디르함화를 받아 쓰던 키예프 루스에서 최초로 화폐를 발행했다. 금화와 은화 두 종류를 발행했으며 금화는 '즐라트크', 은화는 '스레브레니크'로 불렀다. 동로마 제국의 화폐와 거의 비슷한 디자인이었으나 그리스식 복식을 입은 블라디미르 1세의 모습과 블라디미르 1세의 이름을 넣어 발행했다. 아쉽게도 당대의 국제 화폐였던 솔리두스와 디르함에 밀려 블라디미르 1세 사후엔 추가로 발행되지 못하고 금세 사라졌다.

기독교의 도입과 함께 블라디미르 1세는 문맹 퇴치 정책을 추진했다. 사람들이 성경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신앙 생활을 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아토스 산 출신의 불가리아인 수도자들을 불러들여 귀족 아이들을 교육하게 했다. 이 정책의 결과는 블라디미르 1세 사후부터 러시아 문학이 꽃피는 것으로 드러난다. 또 다른 기독교와 관련된 정책은 복지 정책이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자선 활동을 통해 기초적인 복지를 실현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대공 자신의 돈으로 축제를 베풀었고, 빈민들에게도 빵, 고기, 야채, 꿀, 술 등을 수레에 실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성당을 세우면서 조모 키예프의 올가가 시작한 석조 건물 건축을 계속 진행한 것은 덤으로 화려한 성당을 위시로 한 여러 석조 건물이 루스 곳곳에 세워졌다.


6. 몰타[편집]


몰타 역시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 6세기 동로마 제국이 다시 섬을 점령했으나 이후 사라센 해적들의 공격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러다가 870년에는 이슬람 세력 중 하나인 아글라브 왕조에 점령당했다. 이후 많은 아랍인들이 해적 기지 삼아 섬에 정착했다. 마요르카 섬을 비롯한 발레아레스 제도의 경우에도 서러모 령이었으나 461~468년 사이에 반달족들에게 점령되어 533~534년 동안 지배를 받다가 이후 동로마의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동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말기에 닥친 전염병과 7세기 중반 사산 왕조와의 전쟁. 9세기 전후로 남쪽으로 이슬람의 발호와 함께 카르타고와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이 넘어가면서 통제권이 약해지다가 707년 우마이야 왕조에 점령되지만 자치권만큼은 인정받게 되었다. 그너나 9세기 중엽 지중해 방면으로 세를 확장하는 바이킹들의 약탈을 피하지 못했으며 902년에는 해적들의 본거지가 되자 이를 빌미로 코르도바 토후국에 점령된다.


7. 기타[편집]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의회와 같은 의결 및 심의 기구의 기초가 생기기도 했다. 이는 당시 원로원이 있던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게르만/노르만, 슬라브 모두가 팅그(thing), 두마 혹은 베체라 불리는 평의회가 있었다. 두 평의회 모두 기본적으로 싸울 능력을 갖춘 자유민 남성들만 참석이 가능했다. 우선 게르만족의 팅그 혹은 알싱크의 경우 게르만족들이 서로마 제국 곳곳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후에 크게 변천을 겪게 된다.

잉글랜드의 경우 7세기 경에 기존의 팅그가 위테나예모트로 바꿔졌으며, 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주교 또한 위테나예모트의 일원을 참석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선 754년 제국의회의 전신이었던 제국회합이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했고, 카롤루스의 프랑크 제국이 그의 손자들 대에서 셋으로 분할되면서 궁극적으로 독일의 전신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이 제국회합의 정통성을 거머쥐게 된다.

슬라브족의 경우 루스계 바이킹이었던 류리크가 세운 키예프 공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바이킹을 구성하던 노르드족들 또한 평의회인 팅그가 있었기에 슬라브족들의 평의회인 베체와 섞이게 된다. 이밖에도 930년 건국된 아이슬란드 연방은 알팅그를 정치주체로 하는 여러 부족들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였다.

한편 자치 도시의 경우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백년 전 먼저 공화제로 건국되었던 산 마리노처럼 도시 국가로 독립할 여건이 되었으나 도시의 유력자들이 도시 밖에 있단 자신들의 소유인 대농장과 그곳에 딸려 있던 요새로 피신하는 것을 택하는 등 큰 공백이 생겼다. 본래 서로마 재국이 붕괴되기 이전까지만 공화정부터 시작한 이래로 고위 관리들을 명예로운 경력이라 무임금에 기초한 선출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자치 도시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자치 도시 내의 자산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시의 고위 관리로 선출되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러한 메리트가 사라지면서 유력자들은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포기한체 도시 밖으로 피신하게 되자 그빈자리를 교회가 대신 매꾸기 시작했다.교회는 십일조 등의 다양한 경로로 얻은 교회 자금을 바탕으로 도시 내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도시의 통치권은 주교들이 갖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 또한 로마 총대주교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교회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르만족 군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게 되나 도시의 경우 라벤나 총독부의 함락 이후 우연치 않게 독립한 베네치아를 제외하면 주교의 통치를 받게 되며, 주교좌가 도시에 설치되었기에 12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도시는 주교가 통치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외교적으로 중세 초기인 5~11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게르만족계 국가들도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성립된 오도아케르의 왕국 또한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콘스탄티노풀로 보낸 후 동로마 제국에게 왕국으로 인정받았으며, 동로마 제국과 인접한 나라들도 동로마 황제에게 자세를 낮추는 대신 동로마 황제는 이들에게 바실레우스 칭호를 허락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동로마 황제의 권위에 의구심을 갖는 국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8세기를 기준으로 카롤루스 왕조 하의 프랑크 왕]의 서유럽 제패와 함께 피핀 3세의 기증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교황령이 성립이 되면서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긴다.

우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콘스탄티노풀 천도 이후 5세기를 전후로 삼위일체를 정통 교리로 삼은 기독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로 교리 문제 등으로 분열해가고 있었다. 더욱이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로마를 장악한 로마 총대주교를 비롯한 서방 교회의 성직자들이 무정부상태가 된 자치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동방 교회뿐만 아니라 동로마 황제하고도 점차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그러다 8·9세기에 걸쳐 두 차레의 성상 파괴 운동과 그리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는 등[27] 로마가 위치한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한 야욕을 보이자 로마 총대주교였던 자카리아는 당시 메로비로스 왕조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새로운 프랑크의 국왕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하게 해 랑고바르드 왕국이 점령하고 있던 라벤나 총독부까지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부터 빼았아 라벤나 총독부를 로마 총대주교에게 넘기면서 754년 자카리아의 후인 총대주교였던 스테파노 2세가 피핀 3세를 정식으로 프랑크의 국왕으로 인정해줬고, 이에 대한 답례로 피핀 또한 두번째 기증을 하면서 교황령이 성립된다.

교황령을 바탕으로 9세기 중반에 걸쳐 동방 교회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800년 카롤루스 1세를 로마로 초청해 서로마 황제의 제관받아들이면서 811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칭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정도였다.이후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동로마 제국 또한 샤를마뉴에게 그냥 바실레우스 칭호를 인정할 수준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며 이슬람 세력과도 대립과 공존이라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하는 등 국제정세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카롤루스 사후 손자대에 프랑크 왕국은 세개로 분열한 후 북쪽으로 바이킹과 동쪽으로 마자르족들의 침략을 받게 되며 남쪽으로 이슬람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상황이 더 심화되며 동로마 제국 또한 발칸반도로 진출한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고, 특히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자신을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자칭하는 등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위협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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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리튼 남부·이베리아 반도·이탈리아 반도 및 알프스 이북과 라인강 동부 너머와 남독일 및 오스트리아·판노니아 평원 일대[2] 브리튼 남부·이베리아 반도·이탈리아 반도 및 알프스 이북과 라인강 동부 너머와 남독일 및 오스트리아·판노니아 평원 일대[3] 대표적인 예가 수아송 왕국이다.[4] 영주를 의미한다.[5] 원래 '워덴의 무덤', 즉 '오딘의 무덤'이라는 뜻이나 지금은 Adam's grave로 불린다.[6] 지방장관으로 번역된다. 보통의 봉건 영주와 비슷한 직위지만, 가문에 상속되는 타국의 봉건제와 달리 샤이어무트에서 선거제로 선출 후 왕에 의해 형식적인 승인을 받거나(머시아의 경우) 왕에 의해 테인들 중에 임명되는(웨섹스의 경우) 직위라는 차이점이 있다.[7] 달 리어타는 부계로, 픽트랜드는 모계로.[8] 알핀 가문은 게일계고 돔날 2세도 아일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추측이 있는 만큼 왕가 사람 혹은 최측근 귀족 세력으로 추측할 수 있다.[9] 데인인 또는 데인-게일 혼혈인 왕들로 아일랜드 식으로 이름이 기록되었다.[10] 스코틀랜드 고유의 귀족 작위로 보통 백작위로 번역되나 아일랜드의 소 왕과 같은 급이라 볼 수 있다. 중앙 집권이 약했던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마어들은 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참고로 모마어라는 귀족 작위는 바로 이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11] 원래 민족, 족속이라는 뜻이었다가 이 시기에 소왕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시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12] 스페인 북서부의 산맥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13] 중세 초기에 귀족 청년들에게는 곰과의 결투가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의 하나로 여겨졌다.[14] 추방된 에이리크 1세는 데인족이 장악한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잉글랜드 왕 에드래드의 공격을 받아 도망쳐야 했다. AD 952년 다시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의 요청에 따라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AD 954년 잉글랜드의 에드래드에게 다시 축출당한 후 스테인모어에서 살해당한다.[15] 여기엔 동로마 본토 뿐만 아니라 루스가 일상적으로 약탈하던 크림 반도의 케르손 일대도 포함되었다.[16] 당시 루스의 결혼식 풍습으로 첫날밤에 아내는 엎드려 남편의 왼쪽 신발을 벗겨준 후 신발에 이마를 문질렀다. 남편은 아내를 가볍게 때린 후 오른쪽 신발을 벗고 자신의 겉옷을 아내에게 덮어주었다.[17] 이미 키예프의 올가, 야로폴크 1세 두 정교도 군주를 배출한 상태였던데다 정교도도 많았다.[18] 이 때 이미 독일 국왕 오토 2세와 서프랑크 국왕 로베르 2세의 청혼을 거부한 상태였다.[19] 포르피로게니투스의 여성형.[20] 동로마 제국은 제위의 여계 계승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피로게니투스를 외국에 넘기는 건 외국에 동로마 제위 요구자를 만드는 짓이었다.[21] 이때의 정황을 두고 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절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서술이 엇갈린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모든 백성들이 기독교로의 개종을 기뻐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서술한 반면, 소련 시절에는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온 신들의 신상이 파괴된 것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표현되어 있다.[22] 이미 스뱌토슬라프 1세가 두 번 공격한 적이 있는 부족이었다.[23]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공격한 적이 있는 부족이었다.[24] 키예프 루스의 공작, 백작과 같은 봉건 귀족.[25] 키예프 루스의 시장 직.[26] 비라법의 핵심은 살인을 사형이 아닌 벌금으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1세는 로마법에서 사형과 눈 뽑기, 거세 등 고문 종류를 들어낸 뒤 그 자리에 비라법의 벌금제도를 집어넣었다.[27] 이때 베네치아는 석호 한가운데 있었기에 랑고바르드의 침공에서 벗어났으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과 단절되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지도자를 선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