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킴 올라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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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킴 올라주원의 수상 이력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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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킴 올라주원
헌액 연도
2008년



휴스턴 로키츠 No. 34
아킴 압둘 올라주원
Hakeem Abdul Olajuwon
[1]
출생
1963년 1월 21일 (61세)
나이지리아 라고스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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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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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휴스턴 대학교
신장
213cm (7' 0")[2]
체중
116kg (255 lbs)[3]
윙스팬
229cm (7' 6")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84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휴스턴 로키츠 지명

소속 팀
휴스턴 로키츠 (1984~2001)
토론토 랩터스 (2001~2002)
등번호
34번 - 휴스턴 / 토론토
종교
이슬람

1. 개요
2. 커리어
2.1. NBA 입성 이전
2.2. NBA 커리어
2.2.1. 트윈타워의[4] 결성, 그리고 홀로서기
2.2.2. 귀인 루디-T와의 만남, 2개의 반지, 내리막
3. 말말말
4. 플레이 스타일
5. 수상 내역
6. 하킴 스쿨
7. 여담
8. 이름과 관련된 비화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NBA에서 뛰었던 나이지리아 출신의 전직 농구 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센터. 역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한 시즌동안 정규 시즌 MVP - 파이널 MVP - 올해의 수비수상을 모두 휩쓴 유일한 선수다.[5] 또한 94, 95시즌 리핏 과정에서 같은 센터 포지션으로 이름을 떨친 샤킬 오닐,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들과의 맞대결에서 전부 승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커리어[편집]



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 (1995)

2.1. NBA 입성 이전[편집]


올라주원은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올라주원이라는 이름은 요루바어로 "늘 정상에 서라."라는 뜻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해서 15살까지 골키퍼를 했다. 즉 15살까지는 농구공도 잡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휴스턴 대학교의 감독인 가이 루이스라는 사람이 큰 키에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춘 아프리카 청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미국으로 데려왔다.[6]

대학 입학 후 체육학을 전공했고, 농구부에서는 동문인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함께 휴스턴대를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힘들었다. 농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성장이 더딘 것. 그러자 학교에서는 당시 휴스턴 로키츠에서 뛰던 모제스 말론을 그에게 붙여주어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게 했다.

그 덕분에 올라주원은 2학년 때부터 폭풍성장을 하면서 드렉슬러와 함께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신나게 득점을 했다. 이 두 콤비에게 휴스턴 포스트지의 토마스 본크라는 사람이 'PHI SLAMA JAMA'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휴스턴대 농구부는 1982-83 시즌 사우스웨스턴 컨퍼런스(SWC)[7]에서 31승 3패라는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NCAA 전국대회 파이널에 올랐지만, 시드니 로, 썰 베일리, 로렌조 찰스 등 '카디악 키즈'들이 포진한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에 패해 우승에 실패했다. 폐막 후 드렉슬러가 NBA로 떠났지만 올라주원의 활약으로 1983-84 시즌에 다시금 파이널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조지타운 대학교에 패해 또 우승에 실패했다. 올라주원이 나중에 유잉에게 복수하는 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2.2. NBA 커리어[편집]



2.2.1. 트윈타워의[8] 결성, 그리고 홀로서기[편집]


올라주원은 1984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됐다.[9] 당시는 센터가 우대받던 시대였고, 올라주원의 당시 주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센터는 발만 뺄줄 알면 연봉 1억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 때 휴스턴에는 한 해 먼저 대학에서 최고의 센터로 명성을 날려대던 랄프 샘슨이 버티고 있었는데, 둘 다 센터로서 뛰어난 스킬을 보유했고 또한 기동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휴스턴이 이 둘에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올라주원은 루키 시즌에 평균 20.6득점 11.9리바운드 2.7블록을 기록했다. 하지만 신인상은 마이클 조던의 몫이었다.

2년차 시즌이 되어서는 랄프 샘슨과의 콤비 플레이가 완성되어갔고, 51승31패를 기록, 당시에 팀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당시에 서부의 강자였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물리치고 NBA 파이널에 올랐다.[10] 하지만 상대는 동부 컨퍼런스의 끝판대장인 보스턴 셀틱스. 이 당시 래리 버드가 이끌던 보스턴은 휴스턴이 맞서기엔 너무 강한 상대였다. 올라주원은 이 파이널을 두고 "어른과 아이의 대결"이라고 회고했다.

1986-87 시즌. 랄프 샘슨이 휴스턴 구단과 사이가 안좋아지면서 트레이드를 통해 팀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주원이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팀은 그냥 중상위권 위치에만 머물렀다. 올라주원 개인은 1989-90 시즌에 쿼드러플 더블을 기록하기도 하고[11] 또한 NBA에서 그동안 단 3명만 기록한 경기당 평균 2.0스틸 이상 2.0블록 이상을 다섯 번이나 하기도 했다.[12] 하지만 올라주원의 성공이 팀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3] 한동안 계속해서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만 계속되었고, 1992년에는 아예 플레이오프에 올라가지 못하자 올라주원도 팀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팀과 불화가 생기면서 위기가 찾아오는 듯 했다.


2.2.2. 귀인 루디-T와의 만남, 2개의 반지, 내리막[편집]


1992년에 감독 대행을 맡았던 루디 톰자노비치가 정식으로 휴스턴 로키츠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루디는 올라주원의 활용도를 더 끌어올리는 방법을 구상했다. 올라주원의 넓은 시야와 패싱능력을 더욱 극대화시켜서 외곽슈터들을 활용하는 것. 올라주원이 1992-93 시즌에 공을 팀원에게 돌리며 3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기 시작하니 본인의 득점도 더 쉬워져서 평균득점도 상승했다. 팀 역시 55승으로 새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2라운드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만나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100-103으로 석패.

1993-94 시즌에는 드디어 노력의 결과로 MVP를 차지했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피닉스 선즈, 유타 재즈를 차례로 꺾으며 NBA 파이널에 올라가게 된다. 상대는 과거 대학시절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뉴욕 닉스였다. 뉴욕은 평균 91.5실점밖에 하지 않았던 당대 최고의 수비팀이었고, 유잉뿐만 아니라 찰스 오클리, 앤서니 메이슨, 찰스 스미스 등 터프가이들이 모두 올라주원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이 공격에서 죽을 쓰고 있는동안 올라주원은 매 경기 20득점 이상을 쌓아주었고, 6차전에서 이날 27득점을 퍼부으며 휴스턴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존 스탁스의 마지막 슛을 막아내며 휴스턴의 승리를 지켰으며 7차전에서도 25득점에 성공하면서 첫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히 파이널 MVP는 올라주원에게 돌아갔다.

1994-95 시즌은 위기였다. 올라주원을 필두로 많은 휴스턴 선수들이 부상을 당했기 때문. 선수수급이 안되어서 CBA선수까지 데려다 쓸 정도였다. 결국 휴스턴은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데려오는 강수를 뒀다. PHI SLAMA JAMA 콤비가 다시 재건된 것. 그러나 드렉슬러를 영입한 후에도 팀 성적에는 그다지 나아짐이 없었고, 직전시즌 우승에 공헌했던 준수한 주전 슈팅가드 버논 맥스웰[14] 자신을 두고도 드렉슬러를 새로 영입한 구단에게 불만을 내보이는 등 팀은 계속해서 휘청거렸다. 그렇게 휴스턴은 서부전체 6위라는 다소 낮은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삐걱대던 와중에 상기한 맥스웰이 플옵에서 사실상 이탈해버린 것. 1라운드에서 유타에게 3-2로 힘겹게 승리한 휴스턴은 세미파이널에서 찰스 바클리와 케빈 존슨의 피닉스 선즈와 재회, 4차전까지 1-3으로 털리며 끝장나는 듯 했으나 기적적으로 내리 3경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MVP였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만났다. 서부 결승에서 휴스턴은 접전 끝에 샌안토니오를 4-2로 눌렀는데, 올라주원은 데이비드 로빈슨을 상대로 우위를 보이며 맹활약을 펼쳤다.[15]

결승전 상대는 젊은 패기의 올랜도 매직. 샤킬 오닐앤퍼니 하더웨이 콤비가 버티고 있는 동부의 신흥 강호였다. 특히 이들은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복귀한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꺾는등 상승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전문가들도 휴스턴 보다는 젊은 올랜도 매직의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휴스턴은 그런 전망을 철저히 비웃으며 4전전승으로 올랜도를 스윕하고 2번째 우승을 차지한다. 올라주원은 4경기 평균 32.8득점 11.5리바운드라는 미친 기록을 찍고 다시 파이널 MVP를 먹었다.[16]

이 시점에서 올라주원은 두말할 것 없이 마이클 조던이 없는 NBA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드렉슬러도 예전만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사실상 단신으로 유잉, 로빈슨, 바클리, 칼 말론, 샤킬 오닐을 털어버리며 리핏을 차지했다. 심지어 바클리와 말론은 두 번 이겼다. 저 다섯이 보통 1990년대 최고의 빅맨 2~6위를 차지함을 생각하면 올라주원이 얼마나 위대한 2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1995-96 시즌에 시카고 불스가 조던-피펜-로드먼을 앞세운 빅3로 정규 시즌 최다승과 NBA 우승을 거머쥐자 휴스턴도 전력보강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찰스 바클리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휴스턴은 기존의 올라주원과 드렉슬러에 바클리로 이어지는 빅3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바클리를 영입하면서 팀의 주죽선수를 너무 많이 내어주었다. 특히나 로버트 오리샘 카셀, 케니 스미스의 이탈은 팀의 로스터를 얇게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1996-97 시즌에 바클리와의 포스트업을 이용한 표준적인 '세트 오펜스'와 단신 수비진들의 교란전술 '트랩 앤 로테이션' 등을 선보이며 57승 25패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천적이었던 시애틀도 물리쳤지만[17]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유타에게 패해 파이널 진출에 실패한다. 이후 올라주원은 헤르니아 탈장을 비롯한 각종부상에 시달리면서 기량이 많이 하락하게 된다. 출전시간도 줄어들었다. 팀도 서서히 팀의 중심을 스티브 프랜시스와 커티노 모블리에게로 가져가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주원의 입지도 줄어들었다.

2000-01 시즌이 끝난 후, 휴스턴은 올라주원에게 3년간 1,300만달러의 계약을 제시했다. 이미 예전의 기량은 기대도 하지 않고, 곧 마흔을 바라보는 노장선수에게는 상당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휴스턴 로키츠를 두번이나 우승시키고 강팀으로 만들어준 프렌차이즈 스타에 대한 그들의 최대한 예우였다.

하지만 올라주원의 에이전트 댄 패건[18]이 "저런 계약조건은 우리 고객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휴스턴과의 협상을 중단해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올라주원은 토론토 랩터스와 3년간 1650만달러에 계약했다. 이를 두고 댄 패건은 올라주원이 자신에게 직접 휴스턴과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했지만 팬들 대부분은 이 인간의 말을 안 믿었다. 지금도 몇몇 팬들은 댄 패건을 "돈에 미쳐서 역사상 위대한 센터의 말년을 초라하게 만든 놈"이라고 까대고 있다.

파일:external/media.tumblr.com/tumblr_m0kw5vBawq1qeaqak.jpg
당시 벌어졌던 라이벌리 한 컷.[19]

결국 올라주원은 토론토 랩터스에서 계약기간도 다 못채우고 1년 뛰고 바로 은퇴했다.

은퇴후에는 요르단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슬람 공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틈나는대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후배 빅맨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자신의 모국팀인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개인교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트릭 유잉과는 달리 지도자가 되기위해서 표면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 듯.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NBA 모든 팀 선수들이 앞다투어 그를 찾아오는데 이는 아래 서술.

2008년 9월 6일에는 유잉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3. 말말말[편집]


"역대 최고의 팀(all-time best team) 센터를 고르라면, 나는 하킴 올라주원을 선택하겠다."

마이클 조던, Cigar Aficionado 잡지의 인터뷰에서[20]



4. 플레이 스타일[편집]


NBA 역사에서 손꼽히는 공수겸장[21]. 케빈 맥헤일과 더불어 NBA 역사상 최고의 풋워크를 가진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발을 주로 쓰는 축구 선수 출신이라 풋워크가 상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하며, 특유의 발놀림은 올라주원에게 공수 양면에서 항상 뛰어난 무기가 되어 주었다. 더불어 느린 선수들이 많은 센터 포지션에서 최상급의 운동 능력을 지녀 가드/포워드 소리를 듣기도 했다.[22] 특히 벌크업이 덜 된 가볍고 매끈한 몸으로 플레이했던 프로 초창기 시절, 일명 ‘흑표범’이라 불리던 시절의 운동능력은 도저히 센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정도.

기본적으로 포스트업, 페이스업에 모두 능한 뛰어난 아이솔레이션 득점원이었다. 페이스업 자세에서 좌우 가리지 않고 부드럽게 턴을 한 후 많은 가짓수의 연계 동작으로 상대 센터를 요리하는 플레이를 즐겼으며, 또한 크로스오버로 상대 센터를 스피드로 벗겨낸 후 돌파하는 스타일의 공격에 매우 뛰어났다. 당시 센터로는 공격 사거리도 넓어 미드 레인지도 즐겨 던졌기 때문에 상대 수비수에게 림 어택 or 풀업 샷의 이지선다를 강요할 수도 있는 기술파였다. 턴 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를 던지는 마이클 조던스러운 플레이도 가끔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공격에서 올라주원의 상징은 포스트에서의 존재감. 백다운 상태에서 볼을 공급받아 좌우 가리지 않고 부드럽게 턴을 한 후 많은 가짓수의 연계 동작으로 상대 센터를 요리하는 플레이를 즐겼다. 당시로도 올라주원은 센터치고 체격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였는데,[23] 따라서 전성기 샤킬 오닐처럼 순수 몸빵을 통해 밀고 들어가는 포스트업보다는 잔기술을 섞어서 득점을 쌓았다.


이런 그에게 필살기는 그 유명한 드림 셰이크. 골밑에 있던 올라주원이 드림 셰이크 한방으로 상대 수비수를 벗겨내고, 프리드로우 라인 근방에서 페이드어웨이 샷에 들어가는 무브먼트는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그만의 독문절기이다. 이런 면모 덕분에 은퇴 후 코치 활동을 특별히 하고 있지 않음에도 코비 브라이언트르브론 제임스같은 역대급 NBA 선수들도 그의 백다운 스킬을 전수받기 위해 이른바 "하킴 스쿨"에 알아서 몰려온다. 즉, 포스트업에서 마이스터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

또한 전성기 샤킬 오닐처럼 파울 작전으로도 딱히 막을 수 없는 것이, 자유투는 커리어 평균 71.2%로 빅맨 치고는 좋은 수준이었다. 이것도 말년 때 마지막 3시즌 동안 61.6% - 62.1% - 56%를 기록하며 꽤 깎아먹은 수치고, 전성기라 평가받는 91~95시즌에는 76.9%-76.6%-77.9%-71.6%-75.6%로 꽤 뛰어난 자유투를 자랑했다.[24]

이런 올라주원의 그래비티 덕분에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 아래의 휴스턴 로키츠는 현대의 농구 스타일에 굉장히 유사한 전략을 무려 20년도 더 전에 세울 수 있었는데, 리핏 시절 로키츠는 올라주원을 포스트에 두고 3명의 외곽 슈터, 그리고 1명이 위크 사이드로 컷인하는 하프코트 오펜스를 상당히 즐겨 썼다. 더블팀이 붙으면 상황이 되는 대로 올라주원이 패스를 뿌려 다른 선수들이 공격하고, 1대1 상황에서는 올라주원의 득점력을 믿는 것. 즉 NBA에 스페이싱 개념을 사용한 최초의 팀 중 하나였으며, 특히 1995 시즌에는 3점 라인이 일시적으로 앞당겨졌었기 때문에 이런 로키츠의 전략은 크게 먹혀들었고, 우승까지 거머쥘 수 있었다. 2009년 올랜도 매직드와이트 하워드를 중심으로 유사한 양궁농구 전략을 세워 파이널까지 진출한 사례도 존재할 정도로 뛰어난 센터를 바탕으로 하는 팀빌딩에 기본적인 전략을 설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젊었을 시절에도, 베테랑이 되어 경험이 쌓였던 시절에도 공간과 시간을 많이 요구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커리어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효율적인 공격수는 아니었다. 오펜스에서 올라주원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이 아이솔레이션 득점에 과하게 치중한다는 점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해결하려는' 올라주원의 마인드셋에 기인한다. NBA 드래프트 동기인 마이클 조던의 초창기처럼 동료들을 크기 믿지 못해 더블팀이 그에게 붙어도 패스로 볼을 돌리기보다 터프샷을 시도하는 경향이 짙게 드러난다. [25] 시간이 흘러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을 만났을 때쯤에는 이런 생각을 어느 정도 버렸지만, 여전히 패싱 센스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팀의 오펜스 잠재력을 조금 깎아먹은 면이 있다. 정확히는 센터 포지션에선 수위급의 패서였던 건 맞고 자신의 그래비티를 기반으로 포지션 대비 높은 어시스트를 기록할 수 있었으나, 공격에서의 코트 비전 자체는 생각보다 좁아서 더블팀이 붙어도 컷인하는 선수나 비어있는 외곽 슈터를 놓치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에 이어지는 문제가 본인에게 필요한 팀 동료 조합이 꽤 까다롭다는 것. 예컨대 로버트 오리같은 스트레치 빅맨이나 케니 스미스처럼 외곽에서 간결하게 볼을 투입하고 슛을 해줄 가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뛰어난 2옵션이랑 뛰어본 적이 많지 않아 보다 수준이 높은 팀의 고점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26] 물론, 그의 시대는 오래 올라주원의 보조를 맞췄던 오티스 소프처럼 블루컬러 파워 포워드가 주전 센터의 뒷처리를 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고 충분히 반론할 수 있다. 올라주원과 소프만 인사이드에 있고 스미스, 맥스웰, 오리가 3점 라인 밖까지 나와 3점 슛을 던지는 스타일이 굉장히 현대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결국 리핏을 해내며 이 스타일의 팀빌딩이 옳았음을 스스로 증명했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수비력은 더 대단해서, 수비 괴물들이 즐비한 시대에 총 9번의 올 디펜시브팀[27], 2번의 수비왕을 수상했다. 현대 농구의 시작점이라 여겨지는 80년대 이후 디켐베 무톰보, 벤 월러스, 드와이트 하워드와 함께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으며, 20년대에는 저들을 제치고 DPOY 트로피의 이름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었을 정도. 물론 이건 위 셋의 위상 자체가 나름 리그 최주요 수상 중 하나인 DPOY 트로피의 이름을 차지하기엔 많이 쳐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28], 그렇다고 해서 올라주원의 수비력을 섣불리 저들 아래에 두는 의견은 찾기 어려울만큼 그의 수비력은 압도적이었다. 농구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라면 1960년대의 챔피언십 10회 중 9회를 우승한 전설적인 선수인 빌 러셀 정도만이 올라주원 확실하게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29]

센터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림 프로텍팅 능력에서 두말할 것 없이 최고였으며, 젊은 시절 배구를 하면서 배웠을 듯한 뛰어난 점프 타이밍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블록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술한 풋워크가 기인하는 면이기도 하다. 심지어 타이밍을 뺏길 때도 괴물같은 복원 능력과 점프력으로 정말 어거지로 블락을 해내기도 했으며, 덕준에 센터 포지션에서 특출나지 않은 사이즈로도 블록왕 3회를 기록했다. 수비수 올라주원의 위엄을 보여준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1994 NBA 파이널, 엘리미네이션 게임이었던 6차전에서 존 스탁스를 상대로 나온 블락. 이런 올라주원의 수비 존재감은 워낙에 커서 당시 선수들이 대놓고 림으로 돌파하면서 정면으로 올라주원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이상한 샷 셀렉션을 가져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30] 통산 블록 개수는 3830개로 2위인 디켐베 무톰보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대인 수비, 팀 수비 모두 대단히 뛰어났으며 픽앤롤에서 스위치를 당해 가드와 미스 매치가 발생해도 상대 가드를 무섭게 압박하면서 절대로 쉬운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다. 설령 돌파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 뛰어난 솜씨의 블록으로 끝까지 상대 선수의 득점을 방해하였고, 빅맨 수비는 포스트 무브가 굉장히 뛰어난 탓인지 상대 빅맨의 무브를 예측하여 공을 쳐내는 능력도 일품이었으며 뛰어난 힘으로 쉬이 밀리지도 않았다.

스틸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상대의 패스 길을 한 수 앞을 보고 차단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상대 선수의 드리블 모션을 미리 예측하여 볼을 스틸해 내는 능력도 대단히 뛰어났다. 상술했듯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통산 10위권[31] 안에 들어 있는 스틸 개수를 자랑할 만큼[32] 세로 수비, 가로 수비 모두 완벽했으며 수비할 때의 스텝과 손놀림도 탈빅맨급으로 훌륭했다. 즉 이래저래 봐도 완벽한 수비수에 가깝고, 당시의 후한 수비 룰을 감안하더라도 원톱급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

종합하면 탁월한 민첩성, 풋워크와 운동 능력을 앞세운 득점력으로 대권에 도전하는 팀의 오펜스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뛰어난 수준의 공격수인 동시에 역대 최고라 평가받는 수비력을 갖춘 선수였다. 때문에 하킴의 전성기 기량으로만 따지면 올타임 탑라인의 선수였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실제로 그 몇 년간 보여준 임팩트가 어마어마했기에 일반적으로 90년대에서 마이클 조던 다음가는 선수로 자주 호명된다. 특히 93-94 시즌의 올라주원은 원맨우승에 가까운 성과를 내며 정규시즌 MVP, 파이널 MVP, DPOY를 모두 석권한 덕에 단일시즌 GOAT 라는 평까지 심심찮게 따라붙을 정도.


5.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png NBA 챔피언 2회 (1994-1995)
파일:NBA-Champion.png NBA 파이널 MVP 2회 (1994-1995)
파일:NBA 로고.svg NBA 정규시즌 MVP (1994)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6회 (1987-1989, 1993-1994, 1997)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수비수상 2회 (1993-1994)
파일:NBA-Allstar2021.png NBA 올스타 12회 (1985-1990, 1992-1997)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3회 (1986, 1990, 1996)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서드 팀 3회 (1991, 1995, 1999)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5회 (1987-1988, 1990, 1993-1994)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4회 (1985, 1991, 1996-1997)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5)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리바운드왕 2회 (1989-1990)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블록왕 3회 (1990-1991, 1993)
파일:NCAA 로고.svg NCAA 파이널 포 MOP (1983)[33]
파일:HOF-Logo.png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8)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


6. 하킴 스쿨[편집]


일명 드림스쿨이라 불리는 올라주원의 개인 교습은 특히 상대를 등지고 플레이하는 포스트업때 활용하는 기술과 풋워크 스킬을 늘리고자 하는 선수들이 앞다투어 참가하고 있다. 커리어 중후반부터 베이스라인에서 포스트업으로 상대 슈팅 가드를 사이즈로 누른 뒤 변태 점퍼로 쏠쏠한 재미를 본 코비 브라이언트나, 지역방어의 부활과 대학농구의 원앤던 일상화로 1980~90년대와는 다르게 일부 개인기로 체득하는 선수를 빼면 대학경기를 뛰는 센터들이 팀 시스템에 필요가 없던 포스트업 스킬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채 NBA에 입성했다가는 이를 쉽게 공략 당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포스트업 스킬을 장착하려는 선수들이 줄서서 대기중이다. 현시대 최고의 센터라고 평가받는 드와이트 하워드부터 2012년 1라운드 9순위로 당시 신인 센터 유망주였던 안드레 드러먼드까지 포스트업 배우려고 올라주원을 찾는 통에 오프시즌의 올라주원은 쉴 틈이 없다. 2주에 10만달러라는 비싼 수강료임에도 전미에서 몰려드니 사실상 NBA 모든 빅맨들이 그의 제자인 셈. 덕분에 우스개소리로 올라주원은 죽을때까지 가족들 굶길 일은 절대 없을꺼라는 말도 나온다.

특히 드와이트 하워드는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하면서 아예 재수강을 받을 예정이었다. 올라주원이 휴스턴 로키츠 레전드로서 하워드의 영입전에 참여했기 때문.


르브론 제임스가 올라주원에게 트레이닝을 받는 영상. 2011년의 영상으로 이때 올라주원은 48세. 은퇴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48살의 올라주원이 27살로 팔팔했던 현역 르브론보다 몸놀림이 더 부드러울 정도로 당시 르브론의 풋워크는 끔찍했다. 르브론이 저때 하킴 스쿨을 등록한 이유도 2011 NBA 파이널에서 큰 한계를 보였기 때문. 그래도 저 하킴 스쿨에서 배운 덕에 포스트업을 장착하는데 성공했다.

여담으로 올라주원 본인은 하킴 스쿨 최고 수강생이 누구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코비 브라이언트라고 밝혔다.


7. 여담[편집]


  • 정규 시즌에도 대단한 센터였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더 파워업해서 괴수가 되는 남자였으며, 4대 센터 중에서 가장 먼저 우승반지를 끼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유잉, 로빈슨, 오닐과의 맞대결에서 모두 완승하면서 얻은 반지이다[34]. 따라서 4대 센터 중 샤킬 오닐이 우승 횟수와 누적 스탯이 가장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맞대결에서 모두 승리한 임팩트 때문에 4대 센터 중 올라주원이 가장 뛰어나다고 여기는 팬들도 있다.

  • 1995 파이널, 휴스턴이 올랜도를 4대0으로 셧아웃시키고 우승할 당시에는 4차전 경기 후반부에는 아예 하이포스트까지 나와 3점슛까지 때려박고 오닐을 데꿀멍시키기도 할 정도로 기량 차이가 있었다.[35][36]



피해자는 패트릭 유잉.


피해자는 샤킬 오닐.

  • 하킴은 비교적 늦게 농구를 시작했지만 더 뛰어난 선수가 되기 위한 본인의 노력과 의지 덕분에 탑의 위치로 오를 수 있었다. 본인이 농구를 늦게 시작해서 동시대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농구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보유할 수 있었고 거기에 역대급 기술과 실력을 보유했다는 자부심이 합쳐져 2010년대 중반 이후 리그를 강타하고 있는 '스몰볼' 트렌드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37]

  • 슈퍼스타였지만, 의외로 농구화는 저가형을 신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그걸 신으면 아이들도 그걸 따라 신으려고 할텐데) 가난한 워킹맘이 120달러나 되는 나이키나 리복 농구화를 자식 셋에게 어떻게 사주나? 그래서 애들이 신발을 훔치기도 하고, 때로는 살인까지 나는 것.[38] 이라는 본인의 생각. 정말이지 훈훈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거기에 35달러짜리 저가형 농구화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도 허락했다고 한다. 그가 착용했던 브랜드는 LA기어라는 에어로빅용 신발을 주력으로 하는 중저가 브랜드였다. 허나 유명한 이들이 써주면 브랜드밸류가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당시 미국 국내에서는 전용매장도 없어 구하기도 힘들고 비싼 제품으로 인식되면서 그의 의도와는 완벽하게 역효과가 났다.

  • 미국 국적 취득 후 드림팀 멤버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했다. 나이지리아 팀을 떠난 셈이지만 나이지리아 여론은 올라주원의 국적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되려 나이지리아의 이름을 알렸다고 환영하는 분위기. 자원부국임에도 어려운 경제상황과 종교적 갈등으로 내전이 자주 벌어지는 나이지리아는 비슷한 문제를 가진 앙골라와 같이 아프리카의 농구강국이긴 하지만 올림픽이나 세계대회에 나와봐야 1라운드 통과만 해도 잘하는 수준이니 올라주원이 나이지리아에 남아있다고 해봐야 드림팀 이상의 성적은 내기 어렵다는 점도 한몫 했을듯 하다. 참고로 대회 결과는 우승. 특히 결승전에서는 당시 세계적인 농구강호로 평가받던 유고슬라비아를 30점차로 깨버리고 우승했는데, 유고 주전이던 디박은 30점차로 진 것도 기적이라며 완패를 인정했다.[39]

  • 현역, 은퇴선수들 간에 센터로서의 능력도 자주 회자되지만 개그 소재로 쓰이곤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샤킬 오닐의 경험담처럼 어눌했던 그의 발음은 선수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던 듯. 은퇴한 NBA 선수들이 패널로 나오는 'Open Court'라는 프로그램에서는 휴스턴 시절 팀 동료였던 고정패널 케니 스미스 덕에 자주 회자되며 개그성 일화에 단골로 언급된다. 공통적으로는 정말 코트 위에서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 역시 같은 팀동료 로버트 오리의 경우에는 올라주원의 승부욕이 그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특히 두고두고 회자될 1995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데이비드 로빈슨을 무력화시킨 그의 모습은 사실 데이비드 로빈슨의 MVP 시상식을 경기에 앞서 한 것에 화가 나서 그랬다고 한다.[40] 포스트무브와 풋워크가 원체 좋은 선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해당 시리즈에서는 동료들도 보지 못했던 플레이들을 쏟아냈다고 한다. *Grantland 인터뷰 중 여담으로 로버트 오리는 자신과 함께한 선수중에서 샤킬 오닐이나 팀 던컨보다도 올라주원을 가장 위대한 선수로 여기고 있다.

  • 여담으로 데이비드 스턴 총재가 NBA 총재로 취임하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지명한 선수이다. 스턴 총재가 그의 마지막 지명이었던 2013년도 1라운드 30순위 선수를 호명한 이후, 스턴 총재와 만나서 포옹을 나누었다. *1분55초부터

  • 독실한 무슬림이다 보니 그와 관련된 해프닝이 몇 개 있었는데, 테러와의 전쟁 이후로 이슬람 테러조직을 후원했다는 의혹을 받아 해명에 진땀을 빼야 했고 #, 라마단을 철저하게 지켜온 것으로도 유명하며, 도널드 트럼프 재임 당시 반이민 행정명령에 분노를 표출한 바 있다. #

  • 2022-23 시즌부터 올해의 수비수에게 주어지는 트로피 이름이 하킴 올라주원 트로피로 확정되었다. NBA에서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공인한 것이다.

  • TNT에서 활약하는 전 팀 동료인 케니 스미스 덕분에 의도치 않게(?) 미디어에 꾸준히 노출되는 한 명이다. 그덕에 우승반지를 두개를 얻은지라 아무래도 케니는 틈만나면 하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찬양한다. 또한 하킴 본인의 조용한 성격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킴은 머리도 굉장히 비상해서 비니지스면으로도 꽤나 성공을 거두어 휴스턴에 그의 빌딩이 여러채가 되며 부동산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인품 역시 훌륭해 팀 동료로써만이 아닌 개인으로서도 상당히 존경한다고.

8. 이름과 관련된 비화[편집]


대다수 NBA팬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한때는 팀 동료였던 찰스 바클리조차도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Akeem에서 Hakeem으로 "개명"했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와전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올라주원의 이름은 원래부터 "Hakeem"이으나 발음 상 H가 들리지 않아 이를 "아킴" 으로 듣고 바로 스펠로 옮긴 미국 관계자가 Akeem으로 쓰는 바람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올라주원은 NBA에서 뛰기 전에도 무슬림이었으며, 실제로 나이지리아에 있을 당시 Muslim Teachers College란 이름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41] 그러나 젊은 시절 그는 그다지 독실하지 않았고 심판이나 동료들과 다툼도 잦았다.[42] 그러나 커리어가 진행되면서 점점 성숙해져 가면서 더욱 독실한 무슬림이 된 것이다. 1990년 이후에 올라주원을 만난 팀 동료들이나 상대선수들(동료 케니 스미스나 적이었던 샤킬 오닐 등.)은 올라주원의 점잖은 성품을 여러번 칭찬했는데, 성숙한 이후에 만났기 때문인 것.

여하튼 올라주원은 원래부터 무슬림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이슬람식으로 "지혜로운 자, 박사"를 뜻하는 Hakeem이었고 "아킴"으로 발음되었다. 그러나 그가 1981년에 미국에 왔을 때 당시 대학 관계자들은 그의 말만 귀로 듣고 Akeem으로 써버렸고, 이게 굳어져버린 것. 사실 나이지리아에서도 영어를 쓰는 선생들은 그의 이름을 Akeem이라고 잘못 쓰곤 했다고 한다.

올라주원은 잘못 쓰건 말건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데다가, 이름을 바꾸는 행정절차가 굉장히 복잡할 것이라고 생각해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지리아로 귀국할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왜 이름을 (Akeem으로) 바꿨니?"하고 물어봤고, 이게 마음에 걸려서 결국 1991년에 Hakeem으로 표기를 수정했다. 참고로 Akeem은 이슬람 식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이다.

이름과 사연에 대한 올라주원의 인터뷰가 담긴 1991년 당시 기사: 참조.

문제는 이렇게 되니 그의 이름을 "잘못 쓰고 제대로 발음 하던" 상황에서 "제대로 쓰고 잘못 발음하는" 상황이 굳혀져,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완전히 그의 이름이 "하킴"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슬람 종교까지 더해져,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꿨다"는 설이 굳어져버린 상황. 게다가 올라주원이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스타일도 아닌지라[43] 같은 1984 드래프트 출신에 1기와 3기 드림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휴스턴 로키츠에서 같이 뛴 적 있었던 찰스 바클리도 잘못 알고 있을 정도다. 사실상 이미 오해를 되돌릴 수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44]

올라주원은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하킴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별 신경도 안 쓴다고 밝힌 바 있으며, 심지어 인터뷰에서 일부러 본인을 "하킴!"이라고 과장되게 부른 적도 있다. 올라주원의 성격이 워낙 대인배스럽기에 가능한 일.


9. 관련 문서[편집]



[1] 아랍식으로는 원래 Hakeem이라고 적고 "아킴"이라고 읽는 것이 맞으므로 본 항목도 아킴 올라주원이 되어야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 전 세계 사람들이 대부분 하킴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킴으로 표기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에서 후술.[2] 파일:하킴키.png 공식 신장이 생각보다 작다는 의견이 많았다.착화 211cm의 하워드와 키가 똑같다. 파일:하킴과유잉.jpg착화 7풋인 유잉보다는 확실하게 작다. 착화 기준 213cm (7' 0"), 맨발 기준 209~210cm [3] 커리어 초반 흑표범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비교적 마르고 매끈한 체형이었다. 당시에는 NBA 선수들이 입성 전부터 웨이트를 완성하고 들어오는 트렌드가 아니었기 때문.[4] 랄프 샘슨과의 트윈타워[5] 역사상 단일 시즌에 저 3개의 타이틀 가운데 2개를 수상한 선수는 많이 있었지만 트리플 크라운은 올라주원이 유일하다. 심지어 그 마이클 조던조차 이루지 못한 엄청난 기록이다.[6] 천부적인 신체능력을 가진 아프리카 청년을 미국 대학 농구팀 코치가 직접 가서 스카웃 해왔단 이야기는 훗날 케빈 베이컨 주연의 농구 영화 에어의 소재로 쓰일 정도로 흔한 이야기였다.[7] 텍사스, 아칸소 주 등 미국 서남부 지역이 텃밭이었으며, 1995-96 시즌을 끝으로 폐지. 이에 따라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외 4개교는 Big-12(구 Big-8), 라이스 대학교, 텍사스 크리스찬 대학교,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는 웨스턴 애슬레틱 컨퍼런스(WAC) 등으로 각각 흩어졌다.[8] 랄프 샘슨과의 트윈타워[9] 여담으로 데이비드 스턴 당시 총재가 부임 후 처음으로 호명한 드래프티이기도 하다.[10] 이 때 휴스턴은 4대1로 레이커스를 꺾었는데 최종 5차전에서 기막힌 플레이가 나왔다. 당시 종료 1초를 남겨두고 레이커스가 앞선 상황에서 인바운드된 공을 센터 랄프 샘슨이 골대를 등진 상태에서 점프해 공을 잡았고, 공중에서 뒤로 냅다 공을 던졌는데, 이게 결승점이 된 것. https://www.youtube.com/watch?v=yXOts9kaiLQ 그러나 "뽀록으로 올라갔다"고 폄훼할 수도 없는 게, 당시 휴스턴은 레이커스를 대부분의 항목에서 앞서고 있었으며 설령 이 경기를 져도 3대2로 앞선 상황에서 6차전을 홈에서 치르는 유리한 상황이었다.[11] 1990년 3월 29일 밀워키 벅스와의 경기에서 18득점 16리바운드 10어시스트 11블록을 기록했다. 쿼드러플 더블은 NBA 역사를 통틀어 단 네 명만 기록했는데 올라주원은 그중 한 명[12] 나머지 두 명은 데이비드 로빈슨, 제럴드 월러스. 그 이전에도 있을것으로 추정은 되나 NBA가 블록과 스틸 개수를 집계한 시기가 오래되지 않아서 현재는 저 세명만 저렇게 인정된다.[13] 이때까지 올라주원은 "내 필드골 성공률이 50%가 넘는데, 왜 40%인 팀원에게 공을 내줘야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입문을 늦게 하고도 뛰어난 능력덕분에 개인플레이는 월등했지만,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졌던 탓. 이후 루디-T가 부임하면서 여기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한 후에야 비로소 팀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마이클 조던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 보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선 명장을 만나야 하는 듯 싶다.[14] 준수한 외곽 슈팅과 엄청난 폭발력 및 기복을 가진 슈팅가드였다. 수비도 잘하고 팀 내 어시스트 리더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패싱능력도 있었다.[15] 특히, 로빈슨을 상대로 선보인 드림 쉐이크는 올라주원을 상징하는 하이라이트가 되었고, 요새도 틈만나면 해당 장면을 틀어줘 스퍼스팬들을 두 번 죽인다. 한편, 당시 스퍼스와 불화를 일으키고 있던 데니스 로드먼은 플옵 탈락 후 로빈슨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며 맹비난을 했고, 결국 다음 시즌 때 시카고로 이적한다.[16] 당시 휴스턴과 올랜도는 팀 구성이 썩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각각 하킴-샤크라는 최고의 센터와 이를 받쳐주는 드렉슬러-페니라는 All-NBA Team 급 가드를 보유했고, 센터의 그래비티를 활용하기 위해 케니와 호리, 앤더슨과 스콧 등 준수한 3점 슈터들이 잘 배치된 것도 비슷했다.[17] 올라주원 데뷔 이후 1997년 전까지 플레이오프에서 시애틀과 4번 만났는데 모두 졌다.[18] 길버트 아레나스와 제이슨 리차드슨, 숀 매리언, 트로이 머피, 드와이트 하워드, 존 월, 드마커스 커즌스 등이 그의 손을 거쳤으며, 2016년 《포브스》로부터 탑 에이전트 리스트에 선정된 관록의 에이전트다. 반면 NBA 팬들 사이에서는 계약 종결자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에이전트로, 협상 질질 끌고 꼬장부리기가 특기이며 201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9] 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패트릭 유잉뉴욕 닉스의 GM 스캇 레이든에게 팽당하는 바람에 십수년을 뛰어온 뉴욕을 등지고 시애틀과 올랜도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올라주원이야 그나마 휴스턴이 계약 제시라도 했지, 유잉은 유잉이 트레이드된 건 유잉 본인의 선택이었다. 당시 유잉은 "유잉무용론"에 지쳐서 "나 필요없으면 간다"는 심정으로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뉴욕 닉스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했어야 했다고 이 선택을 후회했다고 한다. (당시 자료) 또한 계약이 끝나고 적절한 액수로 재계약할 수 있었던 올라주원과 달리 유잉은 트레이드될 당시 1년/1천400만불이란, 당시 기준으론 어마어마한 액수가 남아있었다는 점도 다르다.[20] 이때 역대 최고의 팀에 올라주원, 제임스 워디, 스카티 피펜, 매직 존슨 그리고 (당연히) 본인을 꼽았다. 재미있는 것은 현역 시절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최고의 센터에 패트릭 유잉을 꼽았다. 올라주원은 사실상 스몰 포워드지 무슨 센터냐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다만 이건 절친인 유잉과 역대급 무브스킬을 선보이는 올라주원을 동시에 띄워주려는 차원의 조크.[21] 클러치 능력도 우수한 편이다.[22] 가장 유명한 일화가 마이클 조던을 인터뷰하던 어느 기자가 조던에게 올 시즌 최고의 센터가 누구일까라고 물어봤는데 조던은 패트릭 유잉이라 답했다. 이에 기자가 올라주원은요? 하고 되묻자 조던 왈 '그 친구는 포워드고'[23] 공식신장은 7풋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 7풋 빅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작기 때문에 6'10" 정도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24] 보통 자유투는 75%를 넘어가면 단점으로 보는 것도, 파울 작전을 실행하기에도 상당히 어려워진다. 참고로 Hack-a-Shaq를 허구한 날 당하던 샤킬 오닐의 자유투는 50% 초반이었다.[25] 동시대의 또다른 위대한 센터 데이비드 로빈슨과의 비교에 있어서, 퍼포먼스는 올라주원이 근소 우위에 있는데도 2차 스탯이 크게 차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해석도 있다. 기본적으로 로빈슨은 이타적인 마인드의 플레이어였고 팀을 신뢰했기 때문. 이 마음 가짐은 그대로 후계자 팀 던컨에게 이어지기도 했다.[26] 커리어 초반을 함께란 랄프 샘슨, 1995년에 함께 우승을 일궈낸 클라이드 드렉슬러 정도가 뛰어난 2옵션이라 할 만 했는데, 그나마도 샘슨은 부상으로 얼마 버티지 못했고 드렉슬러는 이미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27] 퍼스트 5회,세컨드 4회[28] 디켐베 무톰보벤 월러스는 수비 관련 실적은 대단하지만 종합 기량면에선 퍼스트팀이나 정규시즌 MVP 후보에 들 정도는 아니었고, 하워드 역시 토탈 기량이나 업적 면에서 올라주원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29] 1960년대라는 워낙 오래전의 시대인 만큼 빌 러셀을 현대 농구의 기준에 맞게 평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다만 부정할 순 없는 것은, 그는 커리어 평균 22.5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블록스틸과 같은 수치가 기록되지 않고 올해의 수비수는 커녕 올 디펜시브 팀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뛰었음에도 디펜시브 윈셰어에서 다른 이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고점과 누적을 둘 다 겸비했다는 것. 원시적인 시대에 플레이했음에 감점 요소를 받는 것이지 러셀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역대 수비수 1위는 빌 러셀, 2위는 하킴 올라주원일 것이다. 판단은 알아서.[30] 흔히 'Rim Deterrance'라고 불리는, 센터가 제공하는 수비 존재감이 극에 달한 선수 중 하나였다. 샤킬 오닐의 경우 원체 거대한 몸때문에 역대급 수비수까진 아니었지만, 상대 선수들이 림으로 돌파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기도 했다.[31] 정확하게는 통산 10위로, 2,162개의 스틸을 기록하였는데, 스틸 TOP 10에 있는 인물 중 유일하게 센터이다!![32] 마이클 조던이 1986-87 시즌에 사상 최초로 동시에 200스틸, 100블록을 돌파한 선수가 됐는데, 두 시즌 뒤에 올라주원은 사상 최초로 200스틸, 200블록을 돌파해버리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33] 무려 패배 팀에서 나온 MOP 수상자이다. 비록 1983 NCAA 파이널에서 짐 빌바노 감독이 이끄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에게 54-52 로 아쉽게 패하여 우승엔 실패하였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친 올라주원의 공로를 인정해주어 파이널 포 MOP 상을 받았다.[34] 1994 파이널에서 유잉을, 1995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로빈슨을, 1995 파이널에서 오닐을 상대로 전부 승리했다. 특히 로빈슨과의 맞대결에선 평균 35.3득점 12.5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말도 안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올라주원 하면 생각나는 로빈슨을 상대로 한 드림 셰이크 명장면도 이 시리즈에서 나온 것이다.[35] 물론 1994-95 시즌 당시 올라주원은 최전성기였고 오닐은 아직 최전성기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36] 95 파이널에서 하킴은 3점슛을 한번 시도해 한번 성공했는데, 하킴은 이처럼 상대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의도로 기습적인 3점슛을 종종 넣곤 했다. 당시에는 3점을 공격옵션으로 활용하는 빅맨이 거의 없었던데다가 하킴 역시 로우포스트 공격 위주로 득점했기 때문에 기습 3점을 쏘면 와이드오픈 상태로 쏠 수 있었고, 본인의 클러치 능력과 슛능력 역시 뛰어난지라 매우 높은 확률로 성공시키곤 했다. 실제로 94년 파이널에서도 한번 시도해 한번 성공했는데, 패트릭 유잉이 하킴보다 명확히 잘한 유일한 경기인 5차전 당시 유잉이 샷클락에 쫓겨 던진 3점 터프샷이 극적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하킴은 얼마 후 응수하듯 3점슛을 노려서 성공시켰다. 94년 올스타 전 당시에도 오닐이 3점을 장난으로 던져 에어볼이 나자 3점슛을 정확히 꽂아넣는 방식으로 응수했다.[37] 요약하자면 본인이 현역일 때는 빅맨은 당연히 포스트에 머무르는게 당연했지만 자신은 가드처럼 플레이하기를 원했는데, 지금은 많은 빅맨들이 포스트에서 벗어나 플레이 하고 있다며 이것은 빅맨의 역할이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빅맨에게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자신은 라마커스 알드리지드레이먼드 그린같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이 즐겁고, 그들과 상대하는 상상을 하면서 앞으로도 지켜보겠다고 한다.[38] 영어 위키에 실려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How can a poor working mother with three boys buy Nikes or Reeboks that cost $120?...She can't. So kids steal these shoes from stores and from other kids. Sometimes they kill for them."[39] 기적이 맞다. 당시 유고팀의 최고 선수였던 블라디 디박도 올스타급 바로 아래의 좋은 선수였지만 당시 드림팀은 전원 올스타급~MVP급이었으며 (실제로 1994-95 시즌 MVP 데이비드 로빈슨과 1996-97 시즌 MVP 칼 말론이 있었다.) 특히 1993-94, 1994-95 시즌 2년 연속으로 MVP 투표 5위권에 전원 이름을 올린 전설의 4대 센터중 3명이 있었다(게다가 유일하게 빠진 유잉은 가장 나이가 많고 기량도 많이 떨어진 상황). 유고 입장에선 로빈슨, 오닐, 올라주원은 디박이 절대 1대1로 막을 상대가 아니고 집중마크해야 하는 상대인데, 코트 위의 전원이 절대열세라 그럴 수도 없는 환장할 상황.[40] 사실 데이비드 로빈슨은 1990년대 최고의 센터 중 하나로 꼽히는 대선수이며 올라주원 상대로도 절대 약하지 않았다. 올라주원을 털어먹은 경기도 제법 있을 정도. 하지만 이 시리즈를 비롯해 몇 번 임팩트 있게 털리는 바람에 올라주원의 하이라이트 동영상이 나올 때마다 올라주원 본인 외에는 최다출연자 자리를 도맡는 신세가 되었다. 선수 평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중요 무대에서의 활약인데 여기서 판정패를 당했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평범한 센터 상대로는 올라주원이 딱히 힘들일 필요도 없었겠지만 역대급 수비수인 로빈슨을 뚫기 위해서 작정하고 온갖 화려한 기술을 동원한 것이니 이건 올라주원이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로빈슨의 위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데이비드 로빈슨이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당시 리그 최고 승률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고, 정규 시즌에서 휴스턴과의 대결 역시 시리즈 스윕을 거두었기 때문에 로빈슨이 MVP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하필 올라주원 앞에서 시상식을 해버리는 바람에 자존심 강한 그의 승부욕을 제대로 자극해버린 셈.[41] 올라주원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무슬림 NBA 선수인 카림 압둘자바는 UCLA 재학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물론 카림 압둘자바로 개명한 건 좀더 나중이었지만. 사실 두 사람의 성장배경을 생각하면 이는 자연스러운데, 카림은 미국인이고 미국에서 무슬림 비율은 0.9%에 불과하다. 그러나 올라주원이 태어나서 자란 나이지리아에서는 인구의 40% 이상이 무슬림이다.[42]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어쨌든 무슬림 전체로 따진다면 극단주의자보다는 적당히 세속화해서 타 종교과 별다른 마찰을 빚지 않는 무슬림들이 다수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교리적으로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종교다."한 손에는 칼, 한손에는 꾸란을"이란 문구 때문에 오해를 사는데 이는 이슬람 경전에도 없는 표현이며 출처도 불분명하다. 이를 이슬람에서 가르치는 건 더더욱 아니다.[43] 당장 잘못된 이름 표기를 10년이나 내버려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44] 위에 나왔듯이 분명히 두 선수가 현역이던 1990-91 시즌에 메이저 언론사인 시카고 트리뷴에 기사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NBA 토크쇼인 Open Court에 등장해 "하킴이 원래 아킴이었는데, 나중에 하킴으로 이름을 바꿨죠"라는 잘못된 설을 언급했으며 올라주원 칭찬을 많이 하는 전 동료 케니 스미스를 포함해 모든 NBA 관계자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하킴으로 지칭하고 있다. 사실 이는 저 기사가 나왔던 1991년에는 지금같은 인터넷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찾아보거나 정말 대서특필되지 않는 이상 메이저 신문사에 나온 기사라도 지역이 다르면 널리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예전 기사들은 각 신문사가 인터넷 사이트가 구축된 이후에 이전 기사를 업로드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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