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멘앙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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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건설된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에게 바쳐진 거대한 지구라트. 창세기에 묘사된 바벨탑의 원형이라는 설이 있다. 이름을 풀어쓰면 E-TEMEN-AN-KI가 되는데, 한국어로 해석하면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이다. 기초라는 것은 건물은 중앙에 위치하기에 바빌로니아인들은 이 건물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 역사[편집]
에테멘앙키가 정확히 언제 처음으로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바빌로니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 때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통해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도 에테멘앙키 자체는 존재했다. 신바빌로니아가 들어서기 이전, 가혹한 피지배정책을 펼친 신아시리아의 센나케립이 바빌론을 파괴할 당시 에테멘앙키도 함께 무너뜨렸고, 바빌론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무려 8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즉 신바빌로니아 이전에도 에테멘앙키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뜻. 에테멘앙키는 센나케립이 한번 때려부순 이후로 에사르하돈, 나보폴라사르,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대를 거치며 몇 십년 동안 꾸준히 개축과 확장을 반복해온 건축물이었다.
고바빌로니아 시대 함무라비의 치세 때 존재했던 바빌로니아 신화인 <에누마 엘리시>에서 언급된 마르둑의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 "꼭대기가 높은 사원 temple whose top is lofty"이라는 뜻)의 건축에 대한 부분(여섯번째(VI) 토판의 57-77행)은 에테멘앙키의 존재를 암시하기도 한다. 함무라비의 치세 이전까지만 해도 바빌론은 약소국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매우 작은 마을이었기에 에테멘앙키는 바빌론이 도시가 되고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게 된 함무라비의 치세 동안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3] 특히, 함무라비가 왕이 되어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한 이후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바빌론에 지구라트가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이는 함무라비의 치세 동안 급부상한 바빌론보다 못한 도시들인 우루크[4] , 키쉬[5] , 우르[6] , 니푸르[7] , 아수르[8] , 시파르[9] , 에리두[10] 에 모두 지구라트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당시 다른 도시들에 지구라트가 있었다는 것은 함무라비의 치세 동안 전성기를 맞은 바빌론에도 마찬가지로 지구라트가 건축되어 존재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에누마 엘리시 토판은 신아시리아 제국 시절의 기록이며, 에테멘앙키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아시리아 제국 시절(1363 BC–912 BC)의 기록(시)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원전 18세기 보다는 기원전 14세기에서 기원전 9세기 사이에 처음으로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11] .
1880년대에는 나보폴라사르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문이 2개 발견되었는데 개중 하나의 내용이 아래와 같다.
이렇게 어마어마했던 에테멘앙키는 당시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건물이었다. 그 높이가 91m에 달해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으며[13] 최소한 300년 정도는 그 타이틀을 유지했다.[14] 이슈타르의 문, 행진의 거리, 공중정원과 함께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대단했던지 당시 기준으로는 촌동네에 살던 유대인들이 바빌론 유수 도중 에테멘앙키를 보고 문화충격을 받은 나머지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는 바벨탑의 전설을 생각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나의 날들이 이미 약해지고 심하게 휘었을 적에, 그때에 나의 주 마르두크가 에-테멘-앙-키, 곧 바빌론의 지구라트에 대하여 말씀하시었노라, 그 기반은 사후세계의 가슴에 닿고 그 끝은 하늘과 겨룰 정도의 탑에 관해서. 나는 상아, 흑단, 무수-칸누 나무를 깎아 곡괭이와 삽, 벽돌 틀을 만들어 내 땅에서 끌어온 수많은 인부들의 손에 맡기었노라. 무수한 진흙 벽돌들을 빚어 그 형상을 만들었고 이를 빗방울처럼 많은 벽돌들을 구워 빚었노라. 나는 아라투 강에 거대한 홍수처럼 많은 아스팔트와 역청을 지게 하였노라.
에아의 총명함으로, 마르두크의 지혜로, 나부와 니사바의 지성으로, 나를 창조하신 신께서 주신 광대한 마음으로, 나는 나의 위대한 이성으로 숙고하였노라, 나는 가장 현명한 전문가들과 토론했고 측량사는 12규빗을 기준으로 치수를 정하였노라. 장인들은 줄을 팽팽히 당기고 그 한계를 정하였노라. 나는 사마스, 아다드, 그리고 마르두크와 상의해 그 동의를 구하였고 내 마음이 의심을 숙고할 때마다 위대한 신들께서 신탁을 통하여 진실을 나에게 알려주셨노라. 에아와 마르두크의 지혜로 나는 이 곳을 정화하고 고대의 기반 위에 새로운 기반을 견고히 하였노라. 그 기초에는 금과 은과 산과 바다의 보석을 두었노라. 벽돌들 아래에 나는 반짝이는 사프수, 달콤한 향이 나는 기름, 향수와 붉은 흙을 쌓았노라.
나는 흙바구니를 진 나의 형상을 빚어 기단 아래 여럿을 두었노라. 내가 곧 나의 주 마르두크 앞에 고개를 숙이니, 내가 곧 나의 옷 왕의 예복을 말아 머리에 벽돌과 흙을 짊어졌노라. 나는 금과 은으로 만든 흙바구니를 날랐고 내 마음이 사랑하는 장자 네부카드네자르[12]
에게 포도주, 기름, 수지 조각이 섞인 흙을 인부들과 함께 나르도록 시켰노라. 나는 그의 형제이자 나의 혈통인 나부시밀리시르, 나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곡괭이와 삽을 집어들게 하였노라. 나는 그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흙바구니를 짊어지게 하였고 그를 나의 주 마르두크에게 선물로 바쳤노라.나는 건물을 지었노라, 즐거움과 환희에 가득찬 에-사라의 형상을 그대로 닮은, 그 끝을 산처럼 높이 올린 건물을. 나는 내가 이전에 그래왔던 것과 같이 나의 주 마르두크를 위하여 그 경이에 걸맞은 건물을 지었노라.
1800년대까지만 해도 에테멘앙키의 전성기 시절 모습에 대해 자세히 써놓은 유일한 기록은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5세기에 남긴 것이었다. 다만 헤로도토스가 바빌론을 직접 방문했다는 언급이 없고 일부 오류가 포함된 걸 보아 아마 헤로도토스도 직접 본걸 쓴게 아니라 타인에게 전해들은 걸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에테멘앙키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했다는 점에서 사료학적으로도 굉장히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도시의 각 구역 중앙에는 요새가 서있다. 하나에는 거대한 힘과 크기의 벽으로 둘러싸인 왕들의 궁전이 서있었고 하나는 주피터 벨루스[15]
의 성역이었다. 단단한 놋쇠로 된 문이 있는 각 방향으로 2펄롱(약 402m)의 정사각형 벽들이;(이 벽은 나의 시대에도 남아있었다) 둘러치고 있었으며 경내 한가운데에는 길이와 너비가 1펄롱(약 201m)인 견고한 석조 탑이 있었다. 그 위에 두 번째 탑이 세워졌고 그 위에 또 세 번째 탑이 세워져 그 수가 여덟 개에 이르렀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바깥쪽에 나있는데, 이 길이 모든 탑들을 나선형으로 빙빙 감싸올라간다.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반쯤 오르면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휴식처와 좌석이 있다. 맨 꼭대기에는 넓은 사원이 있다. 사원 안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특이한 크기의 침상이 있고 그 양 옆에 황금으로 만든 금상이 있다. 그 곳에는 어떠한 종류의 조각상도 세워져 있지 않다. 칼데아인 여사제 단 한 명을 빼면 그 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었는데, 이 여사제는 그 땅의 여인들 중에서도 오직 신만을 위하여 간택된 자였다. 또한 칼데아인들은 (나는 그들을 믿지 않지만) 신이 직접 사원에 들어가 그 침상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믿는다.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의 기록.
에테멘앙키의 1층은 91m x 91m의 정사각형 모양이었다. 가로와 세로 30 cm, 높이 8 cm의 구운 흙 벽돌 최대 7,500만 개를 사용했다고 추정하는데,[16] 하중을 줄이고 접착력을 올리기 위해 벽돌 사이에 몰타르를 깔고 갈대와 밀짚을 올렸다. 또한 석회를 벽돌 외부에 발라 흙 벽돌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역청을 발라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았다. 특히 꼭대기에 위치한 신전은 당대 최고의 보석인 라피스 라줄리로 둘렀고, 곳곳에 푸른 자기 벽돌을 활용해 울트라마린을 입혀 이슈타르의 문과 같은 푸른색을 띄었다고 전해진다.
'루브르 서판'을 바탕으로 재현한 에테멘앙키 꼭대기의 신전 내부도.
루브르 서판에는 에테멘앙키의 1층이 91m x 91m라는 내용이 나와있고 총 7단이었다고 한다. 맨 꼭대기의 신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지만 '루브르 서판'에 써있는 내용을 통해 추정한 내용은 있다. 신전에는 방이 총 7개 있었다. 일단 첫 번째 방에는 주신 마르두크가 그의 아내 사르파니툼이 함께 안치되어 있었고, 두 번째 방에는 서기 신 나부와 그의 아내 타슈메트가 봉안됐다. 그 다음으로 물의 신 에아, 빛의 신 누스쿠, 천상의 신 아누, 그리고 최고신 엔릴이 하나씩 방을 배정받았다. 일곱 번째 방은 '침상의 방'이라고 불렀는데, 이 곳은 신이 들어가 누워쉴 용도로 만들어진 곳으로 침대와 옥좌가 한 개씩 있었다. 에테멘앙키의 성전 안뜰에는 두 번째 침대가 놓여있었는데 이 침대의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아마 이 옥상에서 칼데아인들이 천문을 관측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바빌로니아가 망하고 새로운 패자인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에테멘앙키는 여전했다.[17] 일단 바빌론 자체가 별다른 공성전 없이 키루스 2세에게 항복했고, 메소포타미아의 화려한 문화를 동경하던 키루스 2세가 관용을 베풀면서 에테멘앙키도 손상을 거의 입지 않았다. 다만 키루스 2세 사후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빌론을 중심으로 수없이 반란이 일어나며 에테멘앙키도 조금씩 손상을 입기 시작한다. 키루스 2세만한 인내심이 없었던 크세르크세스 1세 등 여러 황제들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에테멘앙키를 약탈하고 심지어 중앙의 마르두크 황금상도 떼어내 녹여버렸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가 조금씩 무너지는 신전을 복구하라고 명령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페르시아 시대에 에테멘앙키는 그 영광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은 저 멀리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에테멘앙키에도 관심이 많았다. 기원전 331년 바빌론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에테멘앙키를 수리하도록 명령했고, 상당한 거금을 들여서 무너진 경내를 정리하도록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에테멘앙키 재건 명령을 내린 직후 동쪽에 남아있던 페르시아 잔존 세력을 끝장내기 위해 다시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기원전 323년 그가 원정에서 돌아와 바빌론에 재입성했을 적에도 에테멘앙키는 제대로 복원된 상태가 아니었다. 에테멘앙키를 복원하고 싶었던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싹 밀어버리고 새로 신전을 지을 것을 명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렸고,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에테멘앙키의 복원은 완전히 흐지부지되어버린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에테멘앙키는 성할 날이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 사이에서 계승 전쟁과 내분이 일어나 수차례 바빌론이 점령당하고 약탈되는 과정에서 에테멘앙키도 무너졌고, 결국 바빌론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에테멘앙키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집이나 건물을 짓겠다고 에테멘앙키 유적에서 대규모로 벽돌들을 공수해갔고 에테멘앙키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황폐해졌다. 에테멘앙키에 관해 마지막으로 남은 기록은 안티오코스 1세의 이야기. 그가 에테멘앙키 수리 현장을 찾았을 당시 잔해에 걸려 넘어졌는데, 이 때문에 화가 난 바람에 코끼리를 모는 인부들을 시켜 아예 에테멘앙키를 모두 철거해버리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 이후 에테멘앙키에 대한 기록은 없다.[18]
3. 바벨탑과의 관계 및 실존 여부[편집]
당시 신바빌로니아는 정말로 큰 나라였고 위치가 위치(메소포타미아)이니 만큼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길목이었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제각기 달라 온갖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구라트와 관련해서 학계 일각에서는 신바빌로니아 시대가 아닌 수메르 시기 때의 지구라트일 것이라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