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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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景仁
(1057~1121)
1. 개요[편집]
고려의 문신. 당대의 뛰어난 문인 박인량의 아들로 초명은 박경작(朴景綽)이고 자는 영유(令裕),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2. 생애[편집]
문종 11년인 1057년에 태어난다.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고 경서, 전적에 통달해 쉽게 과거에 급제한다. 관직에 나간 뒤에는 승진을 거듭해 좌습유(左拾遺)에 이르렀으며 품성과 언행이 강직해 세간에서 좋은 평을 듣는다.
숙종 8년인 1103년 이계응(李繼膺)과 함께 요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예종 2년인 1107년 과거에서 임의가 지공거(知貢擧), 박경인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돼 한즉유(韓卽由) 등을 선발한다. 이 때 임관한 한즉유는 후일 자신을 뽑아준 박경인의 묘지명을 짓는다.
예종 3년인 1108년 윤관을 따라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여진 정벌에 나가는데 도중 낙마해 다리를 다친다. 박경인은 전선에 나가지는 못하고 정주에 머물렀는데, 윤관으로부터 동북에 9성을 쌓을 것이라는 서신을 받는다. 박경인은 동북면에 성을 쌓아도 지켜내기 힘들 것을 예견하고 만류하는 서신을 보내지만 윤관은 박경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박경인의 말대로 결국 윤관은 여진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9성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무공은 이미 이뤘고 나라의 위엄을 이미 떨쳤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두고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다시 적지에 깊이 들어가 성과 연못을 늘여세우면, 지금은 비록 할 수 있을지라도 후일에 지키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1]
이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직문하성(直門下省), 전중감 한림학사(殿中監 翰林學士),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등으로 승진한다. 예종 8년인 1108년 전중감으로 있을 때에 북송으로 사신을 보내려는 왕에게 글을 올려 만류한다. 박경인의 글이 아주 합당했기 때문에 예종은 박경인의 말을 따랐지만, 왕의 뜻을 거스른 것이기 때문에 전중감에서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옮겨진다. 예종 10년인 1115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돼 서북면으로 떠나게 된다. 박경인은 임지로 떠나면서 예종에게 하직인사를 올리자 경인(景仁)이라는 이름과 함께 차와 약을 하사한다.
병마사(兵馬使)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예종 11년인 1116년 형부상서 한림학사승지(刑部尙書 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된다. 박경인은 한림학사승지로서 『상서(尙書)』를 강론하고 다른 학사들과 함께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주석을 단다. 이어서 이부상서(吏部尙書), 호부상서(戶部尙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고 예종 13년인 1118년 서북면병마사 겸 지중군병마사(西北面兵馬使 兼 知中軍兵馬事)에 임명된다. 또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오른다.
박경인은 젊어서 다친 다리에 풍비(風痺, 류마티스 관절염)가 와서 예종에게 조금 빨리 은퇴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번 표현한다. 예종은 명의와 약을 제공하며 박경인을 여러 번 붙잡았으나, 결국 예종 15년인 1120년 60대 중반의 나이로 '광록대부 검교태자태보 수사공 좌복야 참지정사 판예부사 태자소사 수국사(光祿大夫 檢校太子太保 守司空 左僕射 叅知政事 判禮部事 太子少師 修國史)'에 임명된 뒤 은퇴한다. 결국 이듬해 관절염이 악화되어 예종 16년인 1121년 6월 29일(음력) 소신사(燒身寺)에서 사망한다. 사후 예종에게서 장간(章簡)이라는 시호를 받고, 해당 관청의 주관에 따라 개경 동쪽 대덕산(大德山)의 서쪽 기슭에 장사지낸다.[2]
3. 가족관계[편집]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郎) 조윤간(趙倫簡)의 딸과 혼인해 슬하에 아들 둘을 둔다. 장남 박효렴은 이자겸의 사위로 이자겸 축출 후 지방 수령으로 좌천된다. 차남 박효선은 우승제(右承制) 김숙평(金叔平)의 사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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