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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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여말선초의 환관.
2. 생애 및 활동사항[편집]
3. 고려시대[편집]
3.1. 공민왕[편집]
환관 김사행은 어릴적 원나라에 환관으로 보내졌다.[6] 그는 고려 공민왕때 돌아왔다고 적혀있다. 공민왕은 김사행을 아껴 내시부사로 임명했다. 그 뒤,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공주를 추모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통해 대규모 사찰을 곳곳에 지었다. 불교와 토목공사 그리고 호화사치는 공민왕과 김사행을 연결해주는 키워드이다. 밖으로 공민왕의 혀가 되어준 이가 요승(妖僧) 신돈이었다면 궐 안에서 공민왕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인 인물이 바로 김사행이다. 김사행은 노국공주의 능 조성작업을 잘하였다고 해서 안장 갖춘 말을 상으로 받기도 했다.[7] 이런 점으로 보아 김사행은 북경에 있으면서 건축에 각별한 조예를 갈고닦았던 것으로 보인다.
3.2. 우왕[편집]
우왕이 즉위하자 김사행은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죄로 익주[8] 의 관노로 전락했다. 그나마 다른 환관처럼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아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왕은 김사행을 다시 불러들였고 창왕, 공양왕을 거치면서도 김사행은 위태로운 가운데 궁궐 생활을 이어갔다.
4. 조선시대[편집]
4.1. 태조[편집]
공양왕 시절 최고 실권자는 이성계였다. 공양왕의 내시부사였던 김사행은 두 사람의 다리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김사행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조선 개국과 함께 김사행은 고려의 배에서 조선의 배로 옮겨 탔다. 건국 1년을 맞은 태조는 창업에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교지[9] 를 내려 치하했다. 그 중에 김사행도 있었다. 고려 말 환관의 폐단을 몸소 겪은 개국공신들은 환관을 모두 궁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보았지만,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종이 있는데 궁궐에 왕이나 중전의 시중을 드는 환관이 없을 수 없었다. 태조의 이 같은 뜻을 받들어 조선 초 내시부[10] 의 제도를 정비한 장본인이 김사행이다. 한양 천도 및 경복궁 창건을 추진할 때 태조 이성계는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건국 초기에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반대의 선봉에 있었다. 반면 하륜을 비롯한 일부 신하들은 태조를 지지했다. 실은 보다 가까이에서 김사행이 태조로 하여금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부추겼다.
태종의 기록에서 김사행에 대해 적힌 글을 보면, "태조 때 모든 공역을 김사행이 맡았다. 온 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김사행이 태조를 권하여 공역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사행이 권한 것이 아니고 한양 도성을 창건하는 계획은 결국은 태상왕[11] 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한양 및 경복궁의 설계자가 사실상 김사행임을 증명해주는 글이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결국 중대사의 책임은 최고지도자에게 있음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겠지만, 당시 백성은 김사행 때문에 자신들이 죽을 고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공이 인정되어 김사행은 품계가 2품에 이르렀고 경흥부 판사, 도평의사사 동판사, 사복사 및 선공감 판사에 가락백(伯)이라는 귀족작호까지 받았다. 가락백이라는 것은 김사행이 김해 김씨였다는 뜻이다.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세자 방석과 그의 장인인 심효생과 정치노선을 함께 했던 김사행은 그러나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죄목은 ‘왕을 부추겨 사치를 조장하고 대규모 공역(工役)을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라는 것이었다.
5. 여담[편집]
경복궁을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경복궁과 관련해 정도전이 한 일은 태조 4년 12월 경복궁이 완성된 후에 전각(殿閣)들의 이름을 지은것뿐이다. 경복궁,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의 이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김사행은 독실한 불자여서 공양왕이 경연[12] 에 참석할려 하는데 한두 번 빠진다고 국정에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라며 불교를 믿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조선판 골프인 격구(擊毬) 혹은 타구(打毬)[13] 를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한 인물이 김사행이라는 기록이 정종 1년 5월 1일자 실록에 나온다.
6. 참고 자료[편집]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14]환관 김사행, 경복궁을 설계한 천재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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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산의 고려시대 명칭[2] 고려 시대에 둔, 내시부의 으뜸 벼슬. 공민왕 11년(1362)에 내상시를 고친 것으로 품계는 정2품이다.[3] 조선 태조 이성계가 1392년부터 1395년까지 조선 창건에 기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들에게 공신의 봉작을 내리며 하사한 녹권.[4] 귀족작호[5]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던 처형[6] 실록 곳곳에 그가 원나라의 환관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7] 당시로서는 최고의 상이다.[8]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9]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10] 고려와 조선의 내궁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조직[11] 제위를 선양하고 물러난 황제를 높여 가리키는 칭호. 한국에서는 왕 버전으로 태상왕(太上王) 혹은 상왕(上王)이라 불러온 관계로 상왕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다. 고려는 헌종 · 명종 · 신종 · 희종 · 원종 · 충렬왕 · 충숙왕 · 우왕 8명의 사례가 있다.조선에선 태조·정종·태종이 모두 죽지 않고 왕위를 물려줬다. (세조, 중종도 그랬지만 딱 하루 뒤 사망하여 예외)[12]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며 성리학을 익히는 자리[13] 옛날 운동의 한 가지. 두 패로 갈라서 각각 말을 타고 내달아 구장의 한복판에 놓인 자기편의 공을 자기편 구문에 먼저 넣는 것으로써 승부를 겨룸[14] 태종 12년 임진년 5월 후주 6번에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