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충(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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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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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忠
(1290년 ~ 1337년)
1. 개요
1. 개요[편집]
고려 후기의 문신.
불과 8세에 음서로 벼슬을 시작했고 18세가 되던 해에 원나라 수도 대도[1]
현 중국 북경.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은 원충을 남색으로 총애하여 그가 채 20세가 되기도 전에 왕씨 성을 내려주고 벼슬도 높여주었는데, 성격이 강직했던 원충은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기분이 크게 상해 그에게 내려주었던 왕씨 성씨를 거두어가고 벼슬도 강등시켜 버렸다.
그러나 후에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에 압록강까지 자신을 마중나온 원충을 보고는 화가 풀렸는지 그를 다시 특별히 우대하고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2]
충선왕도 변함없는 충심을 보여주는 원충을 대단히 신뢰했는지 아들 충숙왕에게 원충은 대를 이어온 오랜 신하로 충성을 다해 도왔고 외척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다른 신하와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참고로 원충에게도 영원히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보좌하라 말했다.
원충은 이후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과 충혜왕까지 섬기다가 죽었다.[3]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적에도 충숙왕에게 충성해서 기록에서도 다른 신하들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오직 원충만은 시종 절개를 지켰다고 되어있다. 충숙왕도 원충이 고마웠던지 복위 후에 승진과 함께 공신으로 삼았다.
18세에 호군으로 벼슬을 시작했으며 아버지와는 달리 거만하고 방종했다고 전해지며 무인이라 그런지 장사성의 난 진압때 보내졌으며 돌아와서는 원나라가 예전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평소에 공민왕의 미움을 샀고 거기다가 남을 모함하다가 그게 걸렸는지 기철 일당을 고의적으로 놓아주었다는 혐의로 1356년에 처형되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기록이 많으며 또한 자신의 열전이 있다.
형제들 중에 가장 존재감이 없다. 이름도 그나마 아버지의 열전에서 딱 한번 언급될 정도. 형이나 동생과는 달리 그다지 출세하거나 이렇다할 행적을 보여주지 못한 모양.
감찰부사, 전리판서, 판추밀원사 등을 역임했다가 1358년에 사망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비교적 원칙적이지 못했다.
보통 왕의 개인적인 총애를 입는 신하는 그 뒷백만 믿고 안하무인하게 행동하가 망하는 사례가 넘쳐흐르지만 원충은 특이하게도 정도를 걸었으며 제신열전에서 원충에 대한 평가도 성품이 단정하고 성실하였으며 배움이 없지만 일처리를 잘 하였다고 좋게 되어있다.
[1] 현 중국 북경.[2] 충선왕도 변함없는 충심을 보여주는 원충을 대단히 신뢰했는지 아들 충숙왕에게 원충은 대를 이어온 오랜 신하로 충성을 다해 도왔고 외척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다른 신하와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참고로 원충에게도 영원히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보좌하라 말했다.[3]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적에도 충숙왕에게 충성해서 기록에서도 다른 신하들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오직 원충만은 시종 절개를 지켰다고 되어있다. 충숙왕도 원충이 고마웠던지 복위 후에 승진과 함께 공신으로 삼았다.[4] 18세에 호군으로 벼슬을 시작했으며 아버지와는 달리 거만하고 방종했다고 전해지며 무인이라 그런지 장사성의 난 진압때 보내졌으며 돌아와서는 원나라가 예전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평소에 공민왕의 미움을 샀고 거기다가 남을 모함하다가 그게 걸렸는지 기철 일당을 고의적으로 놓아주었다는 혐의로 1356년에 처형되었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기록이 많으며 또한 자신의 열전이 있다.[5] 형제들 중에 가장 존재감이 없다. 이름도 그나마 아버지의 열전에서 딱 한번 언급될 정도. 형이나 동생과는 달리 그다지 출세하거나 이렇다할 행적을 보여주지 못한 모양.[6] 감찰부사, 전리판서, 판추밀원사 등을 역임했다가 1358년에 사망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비교적 원칙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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