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아르헨티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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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계 아르헨티나인(日系アルゼンチン人)은 일본에 기원을 둔 아르헨티나인이다.
2. 역사[편집]
현재 아르헨티나의 땅에 발을 디딘 일본인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597년 노예임을 불복으로 소송을 일으켜 해방을 이겨낸 프란시스코 하폰이다.
19세기가 되면 본격적인 일본인의 해외이민이 시작되어, 1886년에는 마키노 긴조가 일본인으로서 최초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일본계 아르헨티나인의 제1호가 되었다. 그 후, 이토 기요조가 약 8000ha의 「후지 목장」을 경영했다. 20세기에 브라질 이민이 해금되어 1908년 일본에서 브라질을 향해 이민선인 가사토마루가 출항했을 때에는 780명의 일본인 중 160명이 브라질 산토스에 도착하기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하선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브라질, 페루, 파라과이 등 다른 남미 국가들로부터 적지 않은 수의 일본인들이 더 나은 생활을 요구해 아르헨티나로 재이주했다. 이 나라에서의 일본계인은 부에노스아이레스나 그 근교에서 공장 노동자나 항만 노동자로서 일한 것 외에, 화후 재배나 세탁업에 종사해, 지방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전의 일본계 주민의 대부분은 오키나와현이나 가고시마현의 출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1943년 정권을 잡은 통일장교단(GOU)의 군사정권은 친추축 정치와 절대 중립을 표방하고 있으며 연합국과의 협조를 중시한 다른 라틴 미국 국가보다 탄압이 적었던 것에 더하여, 당시 노동 대신이 되어 노동자 계급에 큰 지지 기반을 구축한 후안 페론 장군이 친추축 지향과 친일적인 경향으로부터 일본계인을 중용한 적도 있다, 일본어 교육이나 일본인의 집회 금지 등의 조치는 채택되었지만, 아르헨티나는 1000을 넘는 일본인 인구를 옹호하는 나라로서는 거의 유일한 재산 몰수나 미국의 강제 수용소에의 추방(일계인 강제수용) 등 대규모 탄압을 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정부와 아르헨티나 정부의 협정으로 100명 규모의 이민이 이어졌다. 1959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미시오네스 주에, 1962년에는 쿠조 지방에 위치한 멘도사 주에 이주지가 설치되었다. 전전, 전후를 통해 이민의 출신지로서는 오키나와현이 많이 전체의 약 7~8할에 이른다.
1950년대가 되면 아르헨티나가 정치 불안에 의해 일찌기 선진국의 일각으로서의 입장을 잃고, 한편으로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이나 버블 경기에 의한 노동력 부족의 영향도 합쳐, 1990년의 일본의 입국 관리법 의 개정 이후, 일본계 아르헨티나인이 적지 않고 일본에 「데카세기」(es:Dekasegi)나 역이주를 실시해, 일본계 커뮤니티의 공동화 현상이 위기·지적되고 있다.
3. 언어와 종교[편집]
3세 이후의 일본계 주민의 대부분은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페인어가 주요 언어가 되고 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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