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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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弘宰
?~1135년
1. 개요[편집]
고려의 재상. 직산현(稷山縣) 출신으로 자는 영여(令如), 시호는 양숙(襄肅). 직산 최씨의 시조다.
2. 생애[편집]
훗날 재상이 된 최홍재는 장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개를 숭상한 최홍재는 기꺼이 초빙에 응해 윤관의 여진 정벌에 종군했고 김인존과 함께 포주(抱州)를 수복하고 의주성(義州城)을 쌓는 등의 공을 세웠다. 예종 8년(1113) 전중감으로서 요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고, 예종 11년(1116)에는 우산기상시로서 서북며병마사로 임명됐다. 이후 형부상서(1120)를 거쳐 1122년에는 추밀원사 판삼사사, 참지정사, 권판추밀원사 등 재추직에 돌아가며 임명됐다.
최홍재는 권신 이자겸의 당여로 이자겸의 정적 한안인을 모함해 죽음에 이르는데 기여했다. 인종 원년(1123) 임유문과 함께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됐고, 궁술과 기마술로 전장에서도 활약했다. 이에 최홍재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정적에게 당해 실각할 것을 두려워하던 이자겸은 어제의 동지였던 최홍재마저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 한 무인이 최홍재를 모함하고 척준경도 최홍재가 '사람됨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부추기니 결국 이자겸은 은밀하게 인종에게 최홍재를 탄핵했다.
최홍재는 승주(昇州) 욕지도(縟地島)로 유배됐고 그 아들 최상(崔翔), 최온(崔溫), 최단(崔端)과 출가한 승려 도휴(道休)도 각자 다른 곳으로 유배됐다.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뒤 이자겸에게 배척됐던 인물들이 다시 개경으로 소환됐는데, 최홍재의 경우는 한안인을 죽인 책임을 묻는 간관의 논박이 있어 가장 늦게서야 개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인종 6년(1128)에 다시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됐다.[1]
인종 9년(1131) 4월 남송에서 사신이 와서 소흥(紹興) 원년으로 개원했음을 알렸다. 인종은 송나라의 명을 두 번[2] 이나 무시했던 고려가 외교적으로 신의 없는 나라로 비칠 것을 걱정했는데, 최홍재 등 대신은 입을 모아 남송에 사신을 따로 보내 이를 아뢰자고 말했다.
5월에는 중서문하성에서 궁궐의 중수[3] 를 감독하는 관원이 너무 많으니 그 수를 줄일 것을 아뢨다. 기존에 양부의 재추 모두가 감독하던 것이 평장사 최홍재와 참지정사 문공인, 지추밀원사 임경청 세 사람으로 줄었다. 공사는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했는데, 묘청이 궁궐 터를 닦는 자리에서 사방에서 노끈을 잡아당기는 의식을 벌이기도 했다. 인종 9년 9월 판이부사 관직이 더해졌고, 12월에는 좌리공신호와 검교태부가 더해졌다.
재상직을 수행하며 궁궐 중수를 감독하던 최홍재는 인종 11년(1133) 젊은 간관 최유청 등의 탄핵을 받았다. 최홍재는 전날의 귀양 때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는 핑계를 대며 매관매직을 하다가 이를 간관에게 들켰던 것이다. 최유청은 최홍재가 탐욕스럽고 포악한 인물이며, 나라에 일어나던 가뭄과 충해는 최홍재가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라며 비난했다. 최홍재는 수사공 우복야로 좌천됐고, 좌복야 이준양이 최홍재의 자리를 대신했다. 얼마 뒤 다시 문하시랑평장사로 복직했다가 은퇴한 최홍재는 인종 13년(1135) 2월에 죽었다.
3. 평가[편집]
중서시랑평장사 최홍재는 탐학(貪虐)하고 법을 어지럽혔으므로, 나라에 큰 해가 됐습니다. [4]
『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1년 6월. 간관 최유청 등이 상소한 말.
4. 가족관계[편집]
5.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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