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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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고종황제의 5남[6] 의친왕 이강의 친왕비이다.
2. 당호[편집]
당호 '덕인당(德仁堂)'으로도 알려져있지만, 정식으로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 왕실의 당호는 아이를 낳은 후궁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정실인 의친왕비는 당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면 '덕인당' 당호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비가 하루는 의친왕에게 "후궁들에게만 당호를 주지 말고 저 한테도 줘보세요"라고 농담식으로 얘기했고, 이에 의친왕이 웃으면서 지어준 당호가 '덕인당'이었다는 것이다.[7] 즉, 부부 사이에서 그냥 장난으로 가볍게 부른 것일 뿐, 정식 당호가 아니다. 그러므로 의친왕비를 덕인당으로 지칭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
3. 생애[편집]
1880년(고종 17년)에 아버지 김사준(金思濬)과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 黃氏) 황긍연(黃兢淵)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11대손이다.[8]
1893년(고종 30년) 12월 6일에 의화군 이강과 혼인했고# 연원군부인(延原郡夫人)으로 봉해졌다.#[9] 일설에 따르면, 광해군의 견제로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인목왕후가 친정에 다시는 왕실과 혼인을 하지 말라 일러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김사준이 처음에는 혼사를 거절했으나 왕실에서 신부를 마음에 들어하여 혼인을 밀어붙였다한다.
대한제국 수립 후인 1900년(광무 4년) 8월에 남편 의화군이 의친왕으로 승격했지만, 그는 여전히 군부인이었다. 1905년(광무 9년) 10월 5일에 서봉 대수훈장을 수여받았고#, 순종 즉위 후인 1907년(융희 원년) 10월 2일에야 비로소 의친왕비(義親王妃)로 정식 책봉받았다.#
1910년(융희 4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당해 의친왕이 '이강공(李堈公)'이 되면서 그 역시 '이강공비(李堈公妃)'로 불렸다. 1917년에는 아버지 김사준이 감옥에서 죽는 슬픔을 겪었다. 김사준은 고종 망명을 꾀하는 해외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하던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게 발각당해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고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이었다. 1924년 1월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훈이등 수보관장을 수여받았고# 1930년에 남편 의친왕이 공위를 아들 이건에게 물려주면서 '이강 비(李堈 妃)'가 되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1947년에 왕공족 직제가 사라지면서 평민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북한 치하 서울에서 고생했으며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전후 서울로 돌아왔다. 1955년 8월 9일에 남편 의친왕이 죽기 직전에 천주교에 귀의해 세례성사를 받았고, 같은 달 14일에 의친왕비도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마리아(Maria)#.
남편 사후 그동안 머물던 안동별궁을 떠나 성동구 화양동[10] 에 있던 의친왕 재실에서 머물다가 5.16이 일어난 후 청와대 옆에 있는 칠궁으로 옮겨 거주했다.# 생계는 구왕궁 사무실에게서 매달 3만 9천 원을 받아 해결했다. 그 중 1만 5천 원은 자녀들에게 나눠주었고 남은 돈으로 생활했다.#
1964년 1월 14일에 칠궁에서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하에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리 홍유릉 권역에 있다. 1996년에 후손들이 서삼릉 묘역에 있던 남편 의친왕의 유해를 의친왕비 묘로 이장해 합장했다.
4. 여담[편집]
- 남편 의친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대신 의친왕이 밖에서 낳은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아꼈다. 오히려 의친왕이 자식들을 돌보지 않아 그 생모가 하소연을 하거나, 또는 생모가 일찍 죽거나 키울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아이들을 사동궁으로 데려다 직접 기르기도 했다고. 그래서 의친왕의 자녀들도 의친왕비를 '지밀어머니'[11] 라 부르며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살아있는 보살이셨다.오죽하면 어릴 때 계동궁[12] 이기용[13] 의 양자로 입적했던 의친왕의 7남 이광은 인사동 경성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에 유치원 수업이 끝난 후 사동궁에 매일 들러 집(계동궁)에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 의붓자녀들에게는 엄하면서도 다정한 의붓어머니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경은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자식이 없으셨던 의친왕비는 제게 어머니 노릇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예법을 챙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어머니 앞에선 늘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니 매번 도망 다녔죠. 어머니가 하루는 “내가 싫어서 도망가는구나” 섭섭해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아니에요” 하면서 어머니 무릎에 팍 누워버리면서 “이런 것도 좀 하고 싶어요”라고 어리광을 부린 적이 있어요.”
“어머니께서 학교에 특별 대우를 하지 말라고 청을 넣었어요. 저도 친구들과 똑같이 놀려고 애썼어요. 그래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도시락 찬밥을 못 먹었어요. 그래서 유모가 목판에 따뜻한 밥을 국과 함께 가져오면 숙직실에서 혼자 앉아서 먹었지요. 잠깐 그렇게 하다 다시 도시락을 싸 갖고 다녔는데, 찬밥이 안 넘어가서 매일 그냥 가지고 갔죠. 들키면 어머니한테 혼나니까, 유모가 몰래 궁 안으로 자장면을 시켜줘서 먹곤 했어요.(웃음)”
“하루는 하교 후 유모가 오기 전에 몰래 친구네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저녁에 궁에서 사람이 와 저를 데려갔는데[14]
, 어머님이 모른 척하고 ‘어디 갔다 왔니?’ 하시더라고요. 당시 중일전쟁 때문에 상이군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상이군 위문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죠. ‘그래? 뭐했어’ 물으시기에 ‘노래했어요’라고 했더니 ‘해봐’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했죠. ‘그리고 또 뭐했어?’ ‘춤 췄어요.’ ‘그래? 춰봐.’ 이렇게 몇 번을 거짓말했더니 어머니 눈꼬리가 올라가시면서 “이년!”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얼마나 꼬집으시던지··· 그래도 전 잘못했다고 안 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못하느냐는 반항심 때문이었죠.”
- 의친왕의 서자녀들 뿐 아니라, 다른 황실 가족들도 잘 챙겼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갔던 덕혜옹주가 광복 이후 귀국했을 때엔 그가 좋아하던 섭산적, 떡볶이 등 맛있는 음식을 여러 번 만들어주었고 그 뒤로도 음식이 생기는대로 덕혜옹주에게 먼저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각 궁에서 나온 반기[15] 중 사동궁이 제일 후했다는 평판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서열 상으로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순헌황귀비 사후에는 나이로 봤을 때 황실 여성 중에서 2번째로 연장자였기에 그에 따른 책임감도 있었던 듯 하다.[16]
- 의친왕의 5녀이자 의친왕비와 가장 오랫동안 같이 생활했던 이해경 여사가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회고한 내용이다. 의친왕은 대부분 사동궁 밖 후실들 집에서 지내다 질병이 나면 후실과 그 소생들을 모두 데리고 사동궁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친왕이 밥상을 받을 때 의친왕비와 이해경 여사가 자리를 지켰는데[17] 부부 다른 상 하나가 뒷방(후실과 그 소생들이 머물던 방)으로 들어가더란다. 그래서 이해경 여사가 "어머니도 안 드셨는데 밥상이 저기로 들어가요?"라고 묻자 의친왕비가 "네 아버지가 귀여운 아이들이 밥도 안 먹었는데 밥이 들어가시겠니?"라고 했다한다. 그러자 이해경 여사가 화가 나서 "어머니는 목석이세요?"라고 하자, 의친왕비는 "내가 인간하고 결혼했니, 법하고 결혼했지" 라면서도, "그래도 죽으면 네 아버지랑 함께 묻힐 사람은 나여"란 말을 했다고 한다.#
- 위에 언급한 인터뷰 때 이해경 여사가 남긴 다른 증언에 따르면, 의친왕비가 가끔 어릴 때 먹던 시래깃국이 그립다며 상궁들에게 부탁해 먹었다고 한다. 이해경 여사도 일부러 식사 시간에 늦게 가서 시래깃국을 같이 먹었다고.해당기사
- 의친왕비가 의친왕의 장남 이건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쓴 한글 편지 일부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소장품명은 〈의친왕비 김씨의 서간(義親王妃 金氏 書簡)〉. 총 3점이며 편지 2매와 봉투 1매가 1조를 이룬다. 10월 6일에 썼다는 것만 적혀있고 연도는 쓰여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이 곳을 참조.
- 1964년 1월 20일 자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 내용이다. 하루는 의친왕비의 친정에서 고종에게 산삼 한 뿌리를 진상했었다. 왕이 먹는 것은 모시는 사람들이 먼저 먹어보는데, 미리 산삼 뿌리를 씹던 내시가 "독이 든 삼"이라고 말하며 뱉었다. 그 얘기를 들은 고종은 "당장 (의친왕비의) 부모와 삼족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한 대신이 이 광경을 보고 그 산삼을 씹어삼킨 후 고종에게 "이 산삼은 진품이니 버리시려거든 신에게 내려주십시오"라고 말해 의친왕비의 가족들은 화를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