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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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기
2. 의원 시절
3. 2008년 대통령 선거
4. 선거 운동의 혁명
5.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당선
7. 퇴임 후


1. 성장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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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경에 찍힌 어린 오바마와 그의 어머니.
1961년 8월 4일 오후 7시 24분[1] 카피올라니 병원에서 하와이 마노아 대학교로 유학 온 케냐 출신 유학생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1934~1982)와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1942~1995)[2] 사이에서 태어났다.[3] 부모는 오바마가 2살 때 이혼하여 조부모 밑에서 자랐고, 1966~1967년경에 친모가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 롤로 수토로(1936~1987)와 재혼하면서 자카르타로 옮겨 기독교 계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뒤 1971년 미국 하와이의 조부모 집으로 보내졌다. 그의 아버지는 4번이나 결혼해서 이복 형제들이 여럿이며 어머니 쪽으로도 이부 여동생이 있으며[4] 조부모 쪽으로도 재혼 관계가 있는 모양이라 윗대로 가면 약간 가족 관계가 복잡하다. 심지어 이복 형제 중 한 명은 중국에서 꼬치집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5] 인도네시아계 의붓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부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 응이 2008년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오빠에 대한 지지 연설을 하고, 미셸 오바마와 결혼할때는 케냐까지 건너가 친할머니와 친족들을 만나 소개한 것을 볼때 친가와 이부, 이복 형제자매들과의 관계는 좋은 것으로 보인다. 취임식 때에는 여동생 마야가 오바마의 딸 말리아, 사샤와 함께 찍힌 사진이 뉴스에 올라오기도 했다. 친구나 가족들에겐 주로 배리(Barr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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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오바마[6]

부모의 이혼과 자신의 인종 정체성에 대한 혼란 등으로 고등학생 시절 마약을 하기도 했었고 이것이 후의 정계 진출 이후에 발목을 잡았지만 오히려 이를 숨기지 않아 정직한 정치인으로 인정을 받는 요소가 되었다. 흑인에다가 무슬림 집안 출신이지만 성장 배경은 백인 및 아시아계와 함께 한 독특한 점은 후의 그에게 상당한 이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미국 흑인 중 다수를 차지하는 서아프리카 출신이거나 그 후손도 아니다. 어머니가 백인이라고 흑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백인문화권의 인종구별은 백인과 유색인으로 나뉘며 혼혈 역시 유색인으로 백인 혼혈이라고해서 유색인을 백인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오바마의 어머니 던햄 여사는 미국 본토인 캔자스 주 출신이었지만, 인류학을 전공하여 하와이에서 공부하였고 오바마의 아버지와 이혼한 뒤에는 재혼한 남편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그 곳에서 인류학자이지 사회운동가로서 일생을 보냈다. 어머니에 대한 오바마의 감정은 복잡하다(mixed)고 할 수 있는데,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간보다는 떨어져 있던 시간이 더 많았던 만큼[7] 오바마의 어머니에 대한 짧은 회고를 들여다보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모부터 시작해서[8] 인종과 국가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기질과 진보주의, 도전적인 사회운동가로서의 정신 등은 오바마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바마의 어머니는 1995년 53세의 이른 나이에 난소암으로 사망했는데, 자신의 병세보다는 병원비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은 뒷날 대통령 오바마가 Affordable Care Act, 즉 오바마케어를 추진하는 데 큰 영향을 주는 경험이 되었다.

1980년대엔 리사 잭이라는 사진작가의 포트폴리오에 참여하기도 했다.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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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나호우 고등학교 2학년 농구부 시절 2군팀과 함께 찍은 사진.(뒤에서 2번째줄, 왼쪽에서 3번째)
학생으로서는 공부와 운동을 대단히 잘했다. 푸나호우 고등학교 시절 운동을 아주 잘했으며 특히 농구는 거의 운동선수 급으로 잘해서 재학 중이던 푸나호우 고등학교 농구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풀타임 주전은 아니었으나 3학년 때는 1군 멤버였다.[9] 그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그의 농구실력에 대해 논하면서 "그가 주전이었어야 했다"고 한걸 보면 오바마는 고등학교 시절 주 챔피언에 오를 정도로 강한 팀의 식스맨 정도의 선수로, 프로진출을 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반인으로서는 굉장히 잘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나호우 고등학교 시절 그의 농구 등번호는 23번이었다.[10] 여담이지만 오바마 내각은 유독 스포츠인들이 많았는데 이 중 교육부 장관인 Arne Duncan은 비록 호주리그이긴 했지만 프로선수 출신이었다!

일찌감치 어머니의 영향으로 약자와 소수계층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오바마는 로스앤젤레스옥시덴탈 칼리지에 입학하고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대학 1학년 때도 마리화나를 피며 히피 문화에 심취한 나태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투자철회운동'을 접하고 정치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빡세게 1년 공부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 편입해 정치학을 전공으로 졸업한 후 지역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해 법무박사(JD) 학위를 취득한다. 하버드 로스쿨 역사상 최초로 하버드 로리뷰 (법률 학술지)의 편집장을 흑인이 맡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고 긴다는 학생들만 있다는 하버드 로스쿨에서도 상위 10%의 성적인 학생들만 받는다는 마그나쿰라우데(magna cum laude)를 받고 졸업했다. 그가 대통령 선거에 나간다고 선언했을 때 그의 하버드 로스쿨 동창 중 한명인 Hill Harper는 버락은 우리 하버드 로스쿨 동기 중에서 최소한 가장 뛰어났었던 학생 중 한명이거나 아니면 가장 뛰어났었던 친구였다고 회고 하였고 또한 그를 가르쳤던 교수 중 한 명인 Laurence Tribe 헌법학 교수는 버락은 내가 이제까지 가르쳤던 모든 학생 중 가장 뛰어난 학생 중 한명이었다고까지 회고하였다. 역시 오바마를 가르쳤던 하버드 로스쿨 교수였던 Charles Ogletree은 정말로 똘똘하고 또 겸손하였던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 # 하버드 로스쿨은 우선 세계 최고의 로스쿨 중 한 곳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선거기간만 되면 정치인들이 성지처럼 다녀가는 미국 법조계/정계에서는 핵심 중의 핵심. 미국 로스쿨 법률 학술지 중 가장 파워가 있는 게 하버드 로리뷰. 따라서 오바마가 편집장이 된 것 자체로도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첫번째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11]을 하버드 로스쿨 재학 중 썼는데 쓰게 된 이유도 로스쿨 입학 전 시민단체 활동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이 흑인 최초 하버드 로리뷰 편집장이 되어 엄청난 유명인이 되었기 때문. 이후 시카고의 흑인 빈민가들을 위한 사회운동가로서, 그리고 1997년부터는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으로서 활동하였고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의 인기 헌법학 교수로서 재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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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로스쿨 학생 시절 랑델 도서관(Langdell Library)에서
2008년 대선 전후를 통해 반토막이나마 학부를 보낸 콜럼비아 대학측에서는 오바마를 초빙하려고 애를 썼지만 출신 로스쿨인 하버드는 신나게 갔으면서 콜럼비아 쪽에는 별로 보이지도 않아 재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콜럼비아 재학시 인종차별에 대해 심도 있게 배웠다고 했는데 그게 본인이 안 좋은 꼴을 당해서 콜럼비아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루머도 돌았기도 하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마냥 인기가 좋았는지 선거 기간 내내 자발적인 오바마 지지 전단지가 콜럼비아 캠퍼스 내에 휘날렸으며 대선 당일 자정 즈음 오바마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당시 캠퍼스 내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학교 정문 앞 116번가 앞으로 뛰쳐나와 그 길로 할렘까지 행진했다.

2. 의원 시절[편집]


1992 대선 때 빌 클린턴 선거 운동에 참여하여 정치에 입문했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998년 재선에 성공했다. 2000년에는 일리노이 주 연방 하원의원 후보에 도전했지만 현직 연방 하원의원인 바비 러시의 흑인으로써의 정체성, 짧은 정치 경력을 거론하는 집요한 공격으로 인해 탈락했다.[12]

2002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재선하여 경찰의 중범죄자 취조 과정 비디오 녹화 제도를 마련하는 등 활발한 의정 활동을 했고, 2004년에는 다시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해 52%라는 표차로 당선. 흑인으로서는 역대 세 번째로 연방상원 일리노이 주 대표 의원이 되었다. 선거 당시 <시카고 트리뷴>과 <시카고 선 타임스> 등 지역 언론의 열렬한 지원사격을 받았다. 오바마를 전 미국에 알리게 된 계기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로 이 때 오바마의 찬조 연설은 에이브러햄 링컨게티즈버그 연설, 마틴 루터 킹워싱턴 행진 연설 등과 함께 미국 역사상 최고의 연설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이 연설 하나로 그는 일약 전국적인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영상

상원의원 시절인 2005년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등을 찾고 2006년 쿠웨이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이라크 등을 거쳐 에티오피아와 케냐까지 찾아오며 친부의 생가까지 찾았다.

3. 2008년 대통령 선거[편집]


2006년 10월 22일에 그는 TV를 통해 대선 출마의사를 밝힌 뒤, 2007년 2월 4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고 본격적으로 민주당 경선레이스에 돌입한다.

사실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13] 힐러리의 당내 기반이 워낙 견고한 데다가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하면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바마는 겨우 초선 상원의원이었다. 그런 탓에 민주당 경선은 사상 유례 없는 치열한 혈전을 치렀지만 오히려 이것이 흥행요소가 되어서 오바마를 유력 후보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초기엔 힐러리가 경선이 뜨거워져야 본선 경쟁력도 더 높아지기에 오바마의 출마와 선전을 부추겼지만 오바마가 이겨버렸다. 힐러리 클린턴은 매우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버린 이라크 전쟁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큰 치명타였다. 또한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의 큰 세력이 된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들에게서 지지를 받은 것도 깜짝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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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와 오바마의 지지율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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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공화당 후보로 결정된 존 매케인과 사상최초 흑백대결로 관심을 끈 이번 대선에서 8월 전당대회 이후 세라 페일린을 지명하여 단숨에 관심을 자기 쪽으로 돌려버린 매케인에게 뒤지기도 했으나 9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미국 금융위기에서 차분하고 안정적인 대응과 대안제시로 결국 승부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했고 11월 4일 대선 투표일까지 별다른 이변 없이 대선은 오바마의 승리로 연결되었다.

파일:2212.png
존 매케인과의 여론조사 평균




그리고 미국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4. 선거 운동의 혁명[편집]


오바마의 2008년 선거 운동은 오바마에 대한 지지여부를 막론하고 미국의 많은 정치 분석가들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최고"라는 평을 들었는데 초기부터 선거 운동시 기본적인 메시지와 기본 전략을 확실히 정하고 인터넷[14]과 지역적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해 수많은 유권자들과 연락을 취해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을 모아 방대한 조직망에 짜넣어 미국 정치 역사상 전례 없는 엄청난 선거 자금을 대부분 일반 유권자들로부터 벌어들였다(기부자당 기부량 평균이 약 50불). 오바마 진영은 길고 험난한 선거 기간에도 큰 실수를 범하지 않았고 기본 전략에 큰 변화 없이 충실했으며 거대하고 효율적인 선거 조직을 통해 엄청난 양의 선거 자금을 벌어들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메시지를 유지해 전체적으로 매우 절제되고 안정적인 선거 운동을 벌였다. 이는 경선 기간 중 선거 자금을 서투르게 관리해 금전적으로 홍역을 치른 클린턴 진영이나 중심적인 메시지를 정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의 공격용 메시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페일린을 영입하는 도박을 했으면서도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한 매케인 진영과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두 진영은 이후 내부 분열로 심한 홍역을 앓았다.

미국 정치판이 돈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지만 오바마의 선거 운동은 차원이 다른 정도였다. 미국 연방 정부는 주요 정당 후보들을 위해 대선 선거 자금을 지원하는데, 이게 좀 복잡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미국 선거 운동 기간은 굉장히 길다. 몇 달간 이어지는 경선에서 피터지게 싸운 뒤에 각 당의 후보가 맞붙는데, 연방 선거 지원은 경선이 끝나고 본선 과정에 이르러서야 이뤄진다[15]. 사실 이 단계에 이르면 선거 캠프도 지치고 자금도 바닥난지라 웬만한 후보는 얼씨구나 하고 연방 정부 지원금을 받는데…오바마는 이걸 거절했다. 연방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 캠프로 직접 들어오는 기부금이 제한 되는데, 정부에서 주는 푼돈 받느니, 차라리 그냥 우리가 벌어서 쓰지라는 계산을 내린 것. 참고로 저 연방 정부 지원금을 거절한 본선 후보는 오바마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기부금 네트워킹이 탄탄하고 캠프의 능력에 자신감이 있었기에 저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바마는 매케인의 두 배를 기부금으로 벌어들였다. 무려 7억 8천만 달러[16]. 이쯤 되면 인간 ATM이다.

오바마의 승리를 이야기할 때 보통 미국민의 변화를 위한 갈망이나 부시에 대한 반감을 들며 이것이 정해진 승리였다는 의견이 있지만 어떤 감정이나 사상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지 못하면 정치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17]오바마는 그것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해내는 조직을 창설하고 유지해냈고 드물게 닥쳐온 위기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해냈다. 이것은 그의 정치가와 조직의 장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다.[18]


5.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당선[편집]


파일:external/www1.pictures.gi.zimbio.com/Barack+Obama+Holds+Election+Night+Gathering+1KaC2agXfSBl.jpg
파일:attachment/2008-11-0820081106g2580.jpg
2008년 11월 4일, 당선 수락 연설을 하기 전
연단에서 가족과 기뻐하는 오바마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날, 영국 더 가디언[19]지의 표지
와우![20]

파일: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2008년 11월 4일 존 매케인을 상대로 69,456,897표(52.9%), 선거인단수 365명을 획득하며 압승을 거두었다.[21] 그리고 압도적으로 당선될수 있었던게,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 여러가지 악재가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에게 직격탄을 맞게 해준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에서 누가 나와도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말이 있었고, 어찌저찌 압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또 오바마의 부계가 아프리카 혈통이어서 흑인으로 볼 수 있지만 어쨌든 백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이 대통령이 되는데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초기에는 많았지만 개표 결과분석에 따르면 오히려 흑인인 것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힘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백인 중에서 43%가 오바마를 지지했지만 라티노의 66%, 흑인들의 95%[22]가 오바마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태어나서 흑인들의 굴곡과 수난 시대를 모두 거처온 어느 90대 흑인 할머니가 오바마의 취임식을 보고 We have overcome이라 말했는데, 격동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 킹 목사와 말콤X 등으로 대표되는 흑인민권운동의 상징 그 자체이자 모든 시위, 집회, 행진에서 부른 민중가요 "We Shall Overcome"에서 따온 것이다.

이로써, 링컨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다.


6. 대통령 집권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버락 오바마/대통령 집권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퇴임 후[편집]


최종 여론조사에서 59%의 마지막 지지율을 기록하며 안정적으로 퇴임 절차를 거쳐 퇴임하였다. 여론 조사에 따라 58 ~ 60% 지지율을 보여줬으며 이는 전 미국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71%), 빌 클린턴(65%), 로널드 레이건(64%) 다음으로 높은 퇴임 직전 지지율이다.

퇴임 후에는 워싱턴 D.C.에서 개인 사무실을 열 예정이다.# 또 캘러라마에 93억 원을 주고 새 집을 샀는데, 이 지역은 이방카 트럼프 부부와 렉스 틸러슨 등이 살고 있는 부유한 동네이며 또 집은 그 동네에서도 2번째로 비싼 집이라 한다.

같은 대통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모연설을 하였다.

프로덕션 컴퍼니 하이어 그라운드 프로덕션(Higher Ground Productions)을 설립한 뒤 스포티파이와 계약하다가 아마존으로 옮기게 된다.#

2018년 10월 24일, 2018년 미국 우편 폭탄 미수 사건으로 다른 미국 민주당 인물들처럼 그의 집으로 파이프 폭탄이 배달됐다.

2019년 캐나다 총선에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지지의사를 밝혔다.#

2020년 오바마 부부가 프로듀싱한 아메리칸 팩토리가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했다.

조 바이든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미셸 오바마와 함께 도널드 트럼프의 저격과 조 바이든의 지원 유세에 나섰다.

2020년 11월에 회고록을 출간하는데, 도널드 트럼프와의 일화를 공개했다.#

2021년 8월 그의 환갑잔치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마서스비니어드섬 노마스크 상태에서 열렸는데 직후 그 섬에서 수십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한다. 아직 연관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2021년 11월 2일에 있을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 관련으로 민주당의 테리 매컬리프 후보 유세에 나섰다.#

제74회 에미상 우수 내레이터 부문을 수상했다.#
[1] 한국 시간 1961년 8월 5일 오후 2시 24분.[2] 캔자스 주 위치타 출신.[3] 대다수의 남부 주에서는 1967년 Loving vs. Virginia 판결로 뒤집어지기 전까지 인종간 결혼 혹은 성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주지사가 대학앞에서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대학 못 다닌다고 대놓고 말하던 시절이다.[4] 이부 여동생에게도 그녀의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이복 동생들이 있다.[5] 木屋烧烤(무우샤오카오), http://www.muwubbq.com/ 꼬치집이라기보단 바베큐집에 가깝다. 간판에 오바마 사진도 있다.[6] 이 사진들은 그의 대학 시절을 그린 영화 '배리'에서 차용되었다.[7] 어린 오바마가 호놀룰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를 길러낸 것은 던햄 여사의 친정, 즉 오바마의 외가였다. 특히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 여사는 오바마의 실질적인 양육자였다.[8] 오바마의 눈, 코, 입은 그의 어머니를 빼닮았다. 오바마가 자신의 이복형제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피부색 못지않게 얼굴 생김새도 상당히 다르다.[9] 천하의 마이클 조던 역시 2학년까지 JV에서 뛰다가 3학년때 Varsity에 합류했다.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농구부 탈락 사건이 이때 일어난 것이다. 대부분의 1, 2학년들은 JV에서 뛰지만 소수의 뛰어난 저학년들은 Varsity에서 뛰는데, 조던은 자기가 뽑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키가 더 큰 동급생이 뽑힌 것.[10]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번호와 같은 것은 당연히 완전히 우연이다. 오바마는 조던보다 2살 연상으로 2학년 위였기 때문에 그가 4학년일 당시 조던은 1군 농구부 팀에서 탈락한 2학년에 불과했기 때문.[11] 하버드 로스쿨 입학까지 자신의 인생에 관해 쓴 책이다. 로스쿨 재학 중에 썼으나 1995년 정치 활동 준비하면서 출간했다.[12] 바비 러시는 흑인 급진 단체인 일리노이 흑표당의 공동 창당자이다. 당연히 그의 눈에 출신 배경이 일반 흑인들과 다르고 엘리트 교육을 받은 오바마가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다만 그 이후,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경선 출마를 선언하자 그를 지지했다.[13] 제16대 대통령 선거(2002)에서의 노무현과 비슷한 케이스이다.[14] 특히 Twitter가 여기에서 큰 역할을 하여 오바마를 트위터 대통령이라고도 하기도 한다. 진짜 트위터 대통령은 따로 있지만 넘어가자[15] 경선 과정에서도 지원금을 받을 수 있지만, 그 액수가 기부금에 비하면 너무 적어서 양당의 주요 후보들은 거절하는 게 대세다.[16] 2019년 현재 한화로 약 9021억 원[17]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군부독재에 대한 반감으로 군부 정권의 종막으로 예상되었던 13대 대선은 단일화 실패로 야권 거물들이 총등장했음에도 그들끼리 서로 표를 갈라먹으며 노태우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18] 물론 이것이 대통령으로서의 자질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지 W. 부시도 매우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선거 운동을 해냈다.[19] 타블로이드판인 G2이다.[20] 전임 조지 W. 부시의 재선 성공 때의 문구는 "Oh, God", 신이시여.[21] 존 매케인은 59,934,814표(45.7%), 선거인단 수 173명을 얻으며 참패했다. 선거인단 수가 20명이 넘는 주는 텍사스 주를 빼고 전부 패했고, 인디애나, 노스캐롤라이나, 버지니아, 플로리다 등의 지역에서도 접전 끝에 1~3%의 격차로 패했으며, 그나마 이긴 22개 주 중에서도 미시시피, 조지아 주, 네브래스카, 캔자스,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아칸소,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에서도 오바마에게 40% 이상의 득표율을 허용하며 10% 안팎의 격차로 이기는데 그쳤다.[22] 이 정도면 공화당 성향 흑인들 절대다수도 오바마를 밀어줬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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