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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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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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孫伏都
(? ~ 349)
후조의 인물. 자(字)나 출신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2. 생애[편집]
건무 12년(346년) 5월, 천왕 석호의 명령을 받고 양주(凉州)자사 마추(麻秋)와 함께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전량의 금성(金城)을 쳤다. 이때 금성태수 장충(張沖)이 항복하면서 전량을 진동시켰으나, 마추가 전량의 명장 사애(謝艾)에게 패하여 어쩔 수 없이 퇴각하였다. 이후 정서장군에 임명되었다.
건무 13년(347년) 7월, 전량을 정벌하던 마추를 돕기 위해 장수 유혼(劉渾)과 군사 20,000명을 거느리고 마추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마추와 손복도는 황하를 건넌 후 장최(長最)에 성을 쌓았으나, 전량의 위장군 사애에게 또 패하여 금성(金城)으로 후퇴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12월, 용양장군을 지내고 있던 손복도는 당시 대장군 석민과 대사마 이농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장수 유수(劉銖)와 함께 석민을 주살할 음모를 꾸몄다. 손복도는 갈족 병사 3,000명으로 호천(胡天)에 매복하여 석민과 이농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황제 석감의 신변을 미리 확보해두면 유리할 것이라 생각해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중대(中臺)에 올랐다.
손복도와 그의 부하들이 궁중의 각도(閣道)를 헐면서 석감을 찾아오자, 석감은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손복도가 답하였다.
그러자 석감이 답하길,"이농 등이 반란을 일으켜 동액문(東掖門)에 있으니, 신은 위사(衛士)를 엄히 인솔하여 이들을 토벌하기를 삼가 아뢰옵니다."
라 하였다. 손복도는 석감의 의사를 확인하고, 나아가 석민과 이농을 습격했지만, 이기지 못 하여 봉양문(鳳陽門)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손복도의 공격을 막아낸 석민이 금명문(金明門)을 부순 후 군사들을 이끌고 중대로 향하자, 이 과정을 대 위에서 지켜보던 석감은 석민과 이농에게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 바로 내려와 말을 타고 석민과 이농을 맞이한 뒤 말했다."경은 공신이므로 관(官)을 위해 힘을 써주도록 하라. 짐은 대 위에서 보고 있을 것이니, 행여 보답이 없을까 걱정 말라."
이에 석민과 이농은 다시 군사를 돌려 봉양문에서 손복도의 무리를 무찌르고 손복도를 참수하였다."손복도가 반란하였으니 경들은 의당 이를 토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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