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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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사건·사고
오길남 사건
吳吉男 事件

Oh Kil-nam's Defection to North Korea


파일:오길남.jpg

▲ 오길남의 사진
(2012년)

파일:신숙자-오혜원-오규원.jpg

▲ 신숙자와 두 딸 오혜원, 오규원의 사진
(1991년 1월 / 요덕 제15호 관리소)
다른 이름
오길남 가족 사건,
신숙자 사건
발생일자
1985년 12월 13일 (오길남 일가 월북)
1986년 11월 13일 (오길남 탈북)
1991년 1월 20일 (억류 가족 생존 확인)
2012년 5월 8일 (신숙자 사망 확인)
발생장소


[[요덕 제15호 관리소|

요덕 제15호 관리소
]] (함경남도 요덕군 대숙리)
유형
월북·탈북·강제억류
피해자
오길남 (본인 / 1942년 ~ )
신숙자 (배우자 / 1942년 ~ 2008년? / 사인: 간경변)
오혜원 (장녀 / 1976년 ~ 생존 여부 미상)
오규원 (차녀 / 1978년 ~ 생존 여부 미상)
피해 내용
납북자 문제자유권 침해 문제
(거주·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침해)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윤이상, 송두율의 개입 논란
4.1. 양측의 입장
4.2. 시간순
4.3. 그 밖의 논란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1985년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오길남 박사가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월북했다가 가족을 버리고 혼자 탈북한 사건. 북한은 남은 가족을 억류하는 것도 모자라 정치범수용소에까지 보냈다. 특이하게도 월북, 탈북, 북한에 의한 억류라는 요소가 모두 섞여있는 사건이다.

오길남은 1년 뒤 혼자서만 탈북하여 북한 정권에 가족의 송환을 거듭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20여 년이 흐른 2011년대한민국에서 아내 신숙자와 두 딸 혜원, 규원의 송환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은 후, 국제사회 단위로 송환 요구 목소리가 나오자 대외 이미지 악화를 우려한 북한 정권이 이례적으로 아내의 사망 사실과 두 딸의 아버지와의 만남 거절 의사를 통보하기도 했다. 기사(국민일보) 기사(연합뉴스)


2. 배경[편집]


파일:이제 만나러 갑니다 로고.png




북한에 갇힌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 유학파 엘리트 오길남 박사의 사랑 이야기♥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정치보다는 학업에 집중한 오길남 박사! 가족들과 함께 '독일 망명'을 선택한 이유는?!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오길남은 1970년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1970년 10월부터 서독튀빙겐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한다. 기사(월간조선) 1972년 여름에 오길남은 한국인 유학생끼리 개최한 파티에서 신숙자와 첫 만남을 가졌고, 이 일을 계기로 둘은 부부가 된다. 두 딸 오혜원, 오규원을 낳으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던 지식인이었던 오길남은 정치범으로서 탄압받을 것을 우려한 나머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서독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며 눌러 앉았으며, 유학 생활 10여 년만인 1985년에 43세의 나이로 브레멘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 대한민국서울의 봄이 허망하게 끝나고 신군부가 강력하게 통치하고 있었으며, 독일에서조차 나이가 찰 대로 찬 그가 일할 곳이 없었다.


3. 경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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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에서 일할 생각 없소?" 궁핍한 오길남에게 다가온 北 공작원의 검은 손길!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北의 속삭임'에 넘어가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꿈꿨던 경제학 박사의 사연은?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오길남은 경제학 박사로서 재능을 살릴 만한 곳에 취직하지도 못한 채 생계 곤란을 겪으며 아내 신숙자의 지병(간염)이 악화되어 갔는데, 그때 북한의 레이더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 '아내의 지병도 고쳐주겠다'던 북한 측의 꼬드김에 넘어갔으며, 결국 1985년 8월부터 회유를 시작하여 3개월 만인 1985년 11월 29일에 가족과 함께 월북에 나섰다. 기사(월간조선) 그리고 소련모스크바를 경유하여 1985년 12월 13일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한다.

당신의 결정이 훗날 큰 불행이 될 겁니다.

- 오길남의 월북 결정에 반발한 신숙자의 발언 (1985년 11월 /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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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탈북이냐 VS 가족과 남느냐" 하늘이 내린 뜻밖의 기회, 오길남 박사의 선택은?!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극적으로 北에서 탈출한 오길남 박사! 하지만, 아내와 딸을 볼모로 잡은 北의 잔인한 협박♨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그러나 당초 북한 정권의 약속과 달리 마르크스 경제학 강의에 나서기는커녕 구국의 소리에서 '민영훈'이라는 가명으로 대남방송을 하는 등 힘겹게 공작원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이에 북한 체제와 내부 실정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서독에 있는 유학생 2명을 덴마크로 유인해서 데리고 오라'라는 공작 명령을 하달 받아 북한을 떠나 1986년 11월 13일덴마크 코펜하겐카스트루프 국제공항에서 도착했고, 입국심사대에서 공항 직원에게 글귀가 적힌 작은 쪽지를 건네서 탈북에 성공한다. 이후 서독으로 건너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며 북한 정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사(연합뉴스)

Help me[영어]

Hilfe[독일어]

(도와주세요)

- 카스트루프 국제공항 입국심사대에서 오길남이 건넨 쪽지 내용


이후 북한에 억류된 그의 아내 신숙자와 두 딸 오혜원, 오규원을 돌려받고자 수차례 북한 정권에 송환을 요구했으나, 북한 측은 오길남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채 '돌아오라'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1991년 1월 20일에는 북한 측으로부터 가족들의 사진과 딸들의 육성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를 받았다. 이는 '일종의 회유 겸 협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진 속 배경이 평양시가 아님을 눈치 챈 오길남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엔 자신과 가족들을 맞교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북한 정권은 요지부동이었다. 대한민국에 돌아가지만 않으면 억류 가족들의 안전이 보장될 거란 믿음에 서독에 머물렀지만, 몇 해를 지나며 그런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자 1992년 5월 22일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오길남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사처벌을 받은 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동안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근무했으며, 이 시기 북한 외교관 출신 북한이탈주민고영환과도 함께 근무했다고 한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594회에 출연한 고영환은 '처음에는 가족을 내버리고 홀로 탈북한 오길남을 마주 대하는 걸 꺼렸으나, 나중에 혼자서만 도망친 것에 큰 죄책감을 가져 눈물을 흘리는 오길남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풀렸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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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 수용소에서 찍은 가족 사진을 오길남에게 보낸 北?!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오길남 박사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다?! 25년 만에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통영의 딸' 구출 운동♨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오길남의 탈북으로 인해 신숙자 모녀는 요덕 제15호 관리소에 수용되었고, 신숙자는 2008년간경변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데일리NK) 2011년경 이 사건이 부각되자 경상남도 통영시 출신 신숙자를 송환하라는 운동이 대한민국 사회 각지에서 벌어졌으며, 국제사회 단위로 대응이 들어가자 부담감을 느낀 북한 정권은 2012년 5월 8일에 이례적으로 '그녀가 간염으로 사망했다'고 유엔에 통보해 왔다. 기사(뉴시스) 기사(동아일보) 기사(연합뉴스) 북한은 여태껏 단 한 차례도 납북자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특별하게도 공개했으니, 이 사건이 북한 정권에게는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 입장문 중 "They ...(중략)... asked not to bother themselves anymore.(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기를 요구한다.)"라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는데, 얼핏 보면 '오길남의 딸들이 진짜로 오길남과의 만남을 거부하나'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이건 북한 정권의 요구사항이다. 즉,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대외 이미지가 나빠지니 더 이상 이 건을 가지고 문제 삼지 말라'는 뜻이 담긴 극도로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워딩이다. 더 나아가 이 입장문 중에 몇 가지 사실들을 제외하고 의견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전부 북한 정권의 입장이자 의견이며, 씁쓸하지만 북한 체제 특성상 '오길남 딸들의 의견 같은 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First, Ms. Sin Suk Ja, the ex-wife of Oh, died of the hepatitis that she suffered since 1980s.

(첫째, 오길남의 전 배우자 신숙자는 1980년대부터 앓은 간염으로 인해 사망했다.)

Second, two daughters of Ms. Sin do not regard Oh as their father since he abandoned his family and drove their mother to death. They strongly refused to deal with Oh and asked not to bother themselves anymore.

(둘째, 신숙자의 두 딸은 오길남이 가족을 버리고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 때문에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오길남과 만나는 걸[2]

강하게 거절했으며 더 이상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기를 요구한다.)

- 북한 정권의 답변 (Shin Sook Ja et al. v.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Working Group on Arbitrary Detention, Opinion No. 4/2012, U.N. Doc. A/HRC/WGAD/2012/4 (2012).)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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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송환을 위해 '37년'간 노력했던 오길남 박사!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이유?
(2023년 5월 8일 방송분 / 594회)

이후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오길남은 건강이 나빠져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594회 방송분에 나온 그의 모습은 예전보다 더 나빠보였으며, '자기 두 딸이 북한에서 벗어나서 잘 살고 있다'는 현실과 다른 얘기를 꺼낼 정도여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4. 윤이상, 송두율의 개입 논란[편집]


세부 내용을 논하기에 앞서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길남의 월북과 재월북 회유를 윤이상과 송두율이 주도했다고 단정짓기에는 오길남의 주장만 있을 뿐 그걸 입증할 만한 객관적 근거가 미비'하고, 다만 '윤이상 일가의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친북적 행보 때문에 이들의 반박이 효과적으로 먹히지 않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기사(국민일보) 기사(매일경제)

참고로 송두율도 이름이 거론됐으나, 송두율은 이 사건에 대해서 별다르게 대응한 기록이 발견되질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후술할 내용에서는 오길남과 윤이상의 논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4.1. 양측의 입장[편집]


  • 오길남의 주장
    • 오길남(1993), 《김일성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 자유문학사 파일:교보문고 로고.svg
    • 오길남(2011),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 세이지 파일:YES24 아이콘.svg


오길남은 귀국 후 쓴 수필에서 '윤이상과 송두율이 독일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공작을 수행했으며 자신을 포섭하고 자기 가족을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는 데 앞장 선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2011년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탈북 후 윤이상에게 5년동안 매달리며 가족을 구출하려고 노력했으나 '북한으로 돌아가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당신은 미제 고용간첩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경솔한 짓을 하면 가족이 어떻게 된다는 걸 명심하라'라는 비난도 들었다고 주장했다. 기사#1(조선일보) #2

반면 윤이상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반박문을 통해서 '자신은 오길남에게 생활비조로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과의 협상을 통해서 그의 가족들을 빼내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서 '자신을 둘러싼 논란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했다. 윤이상의 가족도 윤이상의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주장을 펼쳤다. 2011년에 오길남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윤이상의 아내 이수자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윤이상과 오길남은 그렇게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으나 북한 측에 북에 남은 가족들의 사진을 얻어다 주거나 북한을 방문하는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에게 힘을 써달라 부탁하기도 하는 등 오길남의 가족들의 송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정작 오길남이 '가족 찾는 걸 단념했다'는 말을 하자 화내서 내쫓았다'라고 주장했다. 기사(한겨레)


4.2. 시간순[편집]



  • 1992년 6월 전후로 윤이상은 서독의 한인회보와 시사저널에 보낸 해명서 등을 통해서 '오길남의 주장과 다르게 자신은 오길남에 대한 월북 회유를 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둘러싼 논란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굿데이뉴스 시사저널




  • 2016년에 오길남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윤 선생님은 당시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분이었고, 그 명망이 나의 허황한 믿음[3]을 더 굳게 만든 것 같다"라는 정도로 답했다. 기사(연합뉴스)

  • 2017년에 윤이상의 딸 윤정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씨 때문에 아버지 이름이 너무 많이 나빠졌다. ... (중략) ... 오씨가 주장한 게 사실인 것처럼 여겨져 너무 안타깝다. 아버지와 관련된 진실은 시간이 가면 꼭 밝혀질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답했다. 기사(서울신문)


4.3. 그 밖의 논란[편집]



파일:external/www.newtimes.co.kr/29402_3284_719.jpg

유신체제 규탄 집회에서의 윤이상과 신숙자의 모습
(1974년 / 독일)


1974년독일에서 열린 '유신체제 규탄 집회' 도중 찍힌 사진. 윤이상 뒤에 서있는 사람은 오길남의 아내 신숙자이다. 보수 단체를 중심으로 이 사진을 근거로 '윤이상이 오길남을 1977년에 만났다는 발언은 거짓'이라는 주장이 있다. 다만 1970년대의 재독 한국인 공동체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고도 볼 수 있어서,[4] 이 사진 하나만 가지고 윤이상과 오길남의 친분 존부를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반대 측에서는 '친밀하게 인사라도 나눴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박을 하지만, 이러한 반박도 무리가 있는 게 '규탄대회를 한참 진행 중인데' 무슨 웃으며 인사를 나누거나 속닥거리는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다.

윤이상과 그의 가족들의 친북적 행보 때문에 의심스럽다는 주장도 나온다. 사실 이 부분은 우선 '이들 가족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는데', 윤이상은 독일에 귀화한 이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면담하고 조국통일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북한 정권과의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드러냈으며 그의 아내 이수자와 딸 윤정 역시도 2011년김정일 사망 시 방북하여 조문을 하여 친북적인 면모를 가감없이 내보였다. 기사(데일리NK) 기사(헤럴드경제)[5] 북한 문학예술출판사가 발행한 '금수산기념궁전방문록실화집(2)-영원한 추억'에는 윤이상 부부가 남긴 조전문(弔電文)이 수록되어 있는데, 1994년 김일성 사망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 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썼고, 1999년 금수산기념궁전 방문록에는 이수자가 "아, 수령님 수령님 위대하신 수령님. 수령님께서 떠나신 지 벌써 어언 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를 이으신 장군님께서 한치의 빈틈없이 나라 다스리심을 수령님께선 보고 계실 것입니다.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전에 큰절을 올립니다."라고 글귀를 남기기도 했다. 기사(조선일보) 윤이상 일가가 어떤 식으로 반박해도 한국 사회에서 썩 달갑지 않은 반응이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는 셈.


5. 대중매체에서[편집]


    • 오길남(1993), 《김일성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 자유문학사 파일:교보문고 로고.svg
      • 오길남이 겪은 일화를 담은 수필.
    • 오길남(2011),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 세이지 파일:YES24 아이콘.svg
      • 1993년에 출간한 《김일성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의 재출판본이다.

  • 영화
    • 출국
      • 2018년에는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출국〉[6]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오길남이 쓴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지만, 연출을 맡은 노규엽 감독은 전술한 '윤이상 일가와의 진실공방은 다루지 않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기사(아시아경제) 기사(뉴스1) 윤이상이 연상되는 '강문환'(전무송 분)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기는 하나, "오 박사와 윤이상의 진실 공방은 두 사람만이 아는 거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윤이상을 다룰 수는 없었다"라고 밝혔다.
      • 한편 이 영화는 박근혜 정부의 비리 중 하나인 화이트리스트 의혹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출국(2018) 문서와 관련 기사 참조. 기사(엑스포츠뉴스)

[1] 연구기관에서 활동한 것은 1992년 귀국 이후이다.[영어] [독일어] [2] deal with의 의미 중에는 '만나다'라는 뜻도 있다.[3] 여기서 '나의 허황된 믿음'이란 '북한에 대한 환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4]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이민자, 유학생은 소수이지만 '파독 노동자'가 많아서 재독 한국인 공동체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집회 현장에서 마주쳤다고 해서 꼭 아는 사이라거나 모르는 사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힘들다.[5] 보수 단체에서 김정일 사망 당시 조문을 하러 방북한 윤이상의 아내 이수자와 딸 윤정에 대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고소 했지만, 이들은 독일 국적자이라서 '동법 제6조의 잠입·탈출'일 경우 처벌 대상이 아니다.[6] 처음 제목은 '사선에서'였지만 나중에 '출국'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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