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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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헝가리의 복속
2.2. 헝가리의 독립 운동과 탄압
3. 대타협과 이중제국의 형성
4. 대외 정책
5. 대외 영토 및 식민지 확보
7. 해체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배경[편집]



2.1. 헝가리의 복속[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기나긴 역사를 알려면 중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 시대 오스트리아 공국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자치 국가였다. 반면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합스부르크 가문과도 상관이 없는 별개의 주권국으로 크로아티아 왕국동군연합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1526년, 헝가리 왕국이 모하치 전투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고 망하기 직전까지 가면서 상황이 바뀐다.

헝가리를 다스리던 야기에우워 왕조러요시 2세는 이 모하치 전투에서 적법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헝가리 왕국은 3조각 나서 영토 대부분을 오스만 제국오스만 헝가리에르데이 공국에게 빼앗겼다.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는 자신이 러요시 2세의 처남이자 매형[1]임을 내세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위 계승을 요구했다. 포조니에서 열린 회의에서 결국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의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며 크로아티아 귀족들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바야흐로 300년 넘게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에게 지배당하는 기나긴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들이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을 겸했지만 합스부르크 군주들이 헝가리를 마음대로 통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헝가리는 오래 전부터 독립 왕국이었으나 독자적인 정치 체제가 완전히 굳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헝가리는 1300년대 이래로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 권력이 강했던 나라였기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가문조차도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오스트리아가 일으킨 전쟁에서 헝가리의 휴전을 선언할 권한까지 있었다. 물론 합스부르크가 아예 헝가리 의회 개회를 막으면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에르데이 공국으로 3분할 되었던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은 현재 헝가리의 서부와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상 헝가리(Felvidék)만 점유하였고 이 지역의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상 헝가리를 기반으로 하는 반 합스부르크 귀족 퇴쾨이 임레의 봉기로 인하여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지고 이어진 대튀르크 전쟁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해 카를로비츠 조약파사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전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놓였다. 이에 과거 에르데이 공국에 속했던 동부 지역의 귀족들은 라코치 페렌츠 2세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일으켰지만 주력군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다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팔피 야노시(Pálffy János 1664~1751) 등을 중심으로 한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 귀족들이 이끌고 온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민병대에 격파당하며 한동안 독립 운동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에 복속된 지 300년이 가깝게 지난 1804년, 프란츠 2세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설립하였고 2년 뒤에는 아예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또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로서 그 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워낙 헝가리의 독자성이 강해서 융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란츠 2세가 새로 얻은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칭호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어떠한 법적 권위도 없었고 오직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권력만이 유효했다. 헝가리는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독자적으로 운영됐다. 포조니의 '헝가리 위원회'와 의 '헝가리 왕실궁정위원회'가 따로 존재했고 이 기관들은 오스트리아 제국 궁정과는 별개의 조직이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또 다른 하나의 나라였다. 헝가리는 1851년까지 자체적인 관세 국경을 유지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행정구역들과 관세 시스템마저 달랐으며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주요 업무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귀족들 상대였다. 메테르니히의 주요 보직이 '외무장관'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군주만 같지 아예 다른 나라였다는 말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다른 나라들은 전임자가 죽으면 바로 새 왕의 임기가 시작되는 반면, 헝가리 왕국의 경우 포조니[2]에서 대관식을 치른 이후에야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법률을 공포하거나 칙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원칙적으로 헝가리 내에서 법적 권한 행사가 불가능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300년 동안 한 가문 아래에서 공동 통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융화되지 못하고 하나의 가문 아래 2개의 나라가 있었던 것과 똑같았다.[3]


2.2. 헝가리의 독립 운동과 탄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848년 헝가리 혁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렇게 오스트리아에 섞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가던 헝가리인의 목소리는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크게 터져나왔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에 자유주의민족주의의 씨앗을 뿌려놨는데,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유럽 군주들이 빈 체제로 이 싹들을 짓밟고 옛 체제로 회귀하려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안그래도 불만이 많던 헝가리인들은 300년간 헝가리를 지배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격렬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바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공화주의와 민족주의, 계몽주의가 널리 퍼져나갔지만 정작 오스트리아 황제들은 전혀 이를 수용할 의지가 없었다. 민족주의는 오스트리아 아래에서 불만이 많던 헝가리인에게 잘 먹혀들어갔다. 그와중에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세금을 거둬들이려 할 때 빼고는 헝가리 의회조차 잘 열지 않으면서 헝가리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쌓여만갔다. 1811년 이후부터는 아예 의회도 열지 않았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강력한 전제주의적인 정책이 헝가리인들을 억압했다.

특히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빈 체제'에 항거한 3월 혁명이 일어나며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하자 헝가리인의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코슈트 러요시의 주도 아래 부다페스트데브레첸에서 반 오스트리아 혁명을 일으켰다. 이 때 헝가리 혁명군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독립에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 헝가리 내부의 소수민족과의 갈등[4]과 자국내 분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했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고 난 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보복으로 헝가리 왕국의 행정 구역을 오펜, 외덴부르크, 프레스부르크, 카샤우, 그로스바르다인의 5개 군구로 개편하고 헝가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지벤뷔어겐 대공국보이보디나 공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소수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분리한 후 헝가리어의 교육을 금지하고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을 이주시키는 등 헝가리 왕국의 독일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상당한 수준이었던 헝가리의 자치권은 아예 박탈당했다. 독립 관세권은 사라졌고 심지어 헝가리 의회를 이참에 폐지하려 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참에 헝가리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다른 행정구역과 똑같이 격하하려 했다.


3. 대타협과 이중제국의 형성[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타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헝가리 국왕 대관식을 치르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하지만 이러한 강압적인 헝가리 통치 방식도 얼마 가지 못하고 한계를 맞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기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제적, 군사적, 경제적 입지가 이후 크게 약화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면서 더이상 예전처럼 헝가리를 마냥 찍어누를 수 만은 없었다.

일단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연달아 패배를 거듭했다.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지원해줘야 프랑스가 나중에 이탈리아 내 오스트리아 영토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싸우던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프랑스가 뒤통수를 치고 되려 1859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 내 오스트리아 영토를 빼앗는 것을 지원해주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하고 북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권위는 수직낙하했다.[5]

그보다 더 심각한 건 프로이센 왕국과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었다. 독일 연방에서 북독일의 프로이센을 무시하다가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터졌는데, 여기서 완벽하게 패전해버린 것이 엄청난 타격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라하 조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고[6] 동시에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편에 가담한 신생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베네토까지 상실하며 이탈리아 반도와 독일 연방에서 완전히 배제당했다.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로이센에게 연패를 당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자[7] 합스부르크 황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으며 신 절대주의 체제 아래에서 억눌려 있던 소수민족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제국이 공중분해될 것을 우려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과 황실을 보전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종전의 신 절대주의 체제를 철회하고 이때까지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자 제국 안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헝가리인대타협(Ausgleich)을 맺고 이중 제국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황제의 제안을 받은 헝가리인 지도층 사이에서는 제안의 찬성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던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황제의 제안에 반발했고 헝가리인들 대다수 역시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정신에 대한 배신이라며 반대하는 모양새였다. 반대로 친 합스부르크 성향의 헝가리 자유주의자들은 제안에 찬성하였는데, 헝가리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이며 훗날 자유당을 창당하는 데아크 페렌츠는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는 헝가리의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던 민족주의자였으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극단주의자들과 결별하고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추구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다. 더 부유하고 산업화가 잘 된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것이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대타협을 통해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통해 헝가리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은 대타협 유지파 정당인 데아크당에게 표를 주지 않았고 중도좌파나 극좌파에만 표를 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데아크당은 트란스라이타니아의 비(非)헝가리인 소수민족들이 몰표를 던져줘서 간신히 절반 이상의 의석을 점할 수 있었다. 헝가리인들이 갈망했던 독립은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던 소수민족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외무부 장관이 된 반프로이센파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 백작[8]이 재상으로 재직중인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교착상태에 빠진 헝가리 문제를 빠르게 끝내야 했기에 협상에 적극적이었고, 이렇게 양측의 계산이 일치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자유주의자들 간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첫번째 조건이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사도왕으로써 즉위해야 한다고 통보를 하였다. 그리하여 1867년 6월 8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부다페스트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표하였다. 헝가리 대표 데아크 페렌츠가 서명하고 새로 구성된 헝가리 의회가 이를 비준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다.

대타협은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위를 분리해서 헝가리 왕국과 의회를 독립시키되, 헝가리의 왕위만은 계속 합스부르크 황제가 차지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는 공동의 중앙 정부 조직이 있었으므로 단순히 칭호만 공유하는 인적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 아닌 물적 동군연합(real union)으로 간주된다.

이 타협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헝가리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제국의 중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는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사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하였고 재정 분담금과 관세 등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불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9]

하지만 헝가리 왕국 내에서조차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등 다수의 민족 집단이 있었고 심지어 독일계 역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이 소수민족으로 있었으며, 양국 공통의 소수민족은 유대인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이었다.

4. 대외 정책[편집]


이런 상황에도 제국은 발칸 지역으로의 팽창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주요 국가가 1884~1885년의 베를린 회담 뒤에 아프리카로 급속히 팽창했던 반면에 해군력이 뒤떨어졌던[10] 오스트리아는 가까운 발칸 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런 발칸 식민화를 오스트리아의 동진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과 충돌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많은 국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지했고, 프랑스를 패배시킬 정도로 강력한 독일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해줬기 때문에 정복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는 서쪽과 남쪽으로는 판로를 확장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 정부 입장에서는 동쪽의 발칸 반도로 확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난 발칸 국가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쉽게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또한 1890년대를 전후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주도해 온 독일계가 독일 민족 국가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에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리 세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방침도 변경되어서 원래는 제국 소속의 소수 민족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발칸 반도의 현상 유지 정책을 펼쳤지만, 이 시기부터는 제국을 이득으로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고 영토 확장을 계획했다. 이런 팽창 정책으로 발칸 반도를 노리던 다른 주요 국가였던 러시아와 협력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아졌을 때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며, 이후에는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연달아 일어난 두 전쟁을 빠르게 승기를 잡아서 큰 손실을 얻지 않았고, 원래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받던 루마니아마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자 오스트리아의 지배력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 영토에 대한 영향권을 합의했으나, 러시아가 이러한 조약 변경을 다른 주요 국가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전에 1908년 오스만 제국이 '통일 진보 위원회(청년 튀르크당)'가 일으킨 혁명으로 혼란에 빠지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세르비아 왕국러시아 제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11] 이러한 조치는 남슬라브 민족들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러시아와도 적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2] 이 당시 제국을 도와준 국가는 오스만에 영향력을 얻으려는 독일뿐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동맹은 독일만 남게 되었다.

5. 대외 영토 및 식민지 확보[편집]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해운 및 대외 식민지의 운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엄연히 열강이면서도 다른 열강이나 식민제국들과는 달리 대규모 대외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인 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의 비중이 높은 다문화 제국의 특성상 본국과 식민지의 구분과 경계가 모호한 사례로 보기도 한다. 간혹 제국 내 타 영토들에 비해 이질적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식민지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사학자들에게 보스니아는 식민지로 간주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중제국이 대외 확장에 아예 무관심한 건 또 아니었다. 1858년[13]부터 니코바르 제도에 원정을 보내면서 식민지화 가능성을 검토했다. 하지만 1886년 원정에서 영국의 점유를 확인 후 포기했다.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하며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어버린 스페인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매각하려고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해군력 증강의 명분이 될 대외 식민지 확보의 일환으로 여기에 관심을 보였으나 식민지 확보에 미온적인 헝가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의화단 운동 당시 다른 열강들과 함께 진압에 참여하여[14] 톈진 조계의 일부를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톈진) 획득했다. 톈진 조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6. 제1차 세계 대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세계 대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 사라예보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사라예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대사건이 터졌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사라예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보스니아 내에 존재하던 기존의 종교적, 민족적 갈등은 본격적으로 폭발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 갈등을 봉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했다. 황태자의 죽음에 격노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장려했고, 사라예보에서 자체적으로 보슈냐크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이 반세르비아 폭동을 일으켰다.[15] 5,500여 명에 달하는 세르비아 저명인사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갔고 46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보슈냐크인들은 민병대를 꾸려 세르비아인들을 사냥하고 다니기까지 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외무부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백작, 육군 사령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 등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해 예방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정작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이스티반 티자 헝가리 총리는 반대했다. 하지만 대세르비아 유화파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죽어 없어진 상태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결국 전쟁론자들의 입장이 더 힘을 얻는건 당연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으로 단순히 황태자의 복수 뿐만 아니라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 제국빌헬름 2세마저도 오스트리아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고 나서면서 오스트리아 입장에선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만한 10가지 요구를 '7월 최후통첩'이라고 만들어서 날렸다. 세르비아는 이 중에 9가지를 수락하고 1개는 부분적으로 수락했는데, 어차피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이 1개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1914년 7월 28일 결국 세르비아 침공이 일어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오른다.

역시 발칸 반도 진출을 노리며 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우던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선포하며 세르비아 편에 서서 참전하자 독일 제국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을 들어 맞섰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의 발칸 지배를 경계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참전했고, 결국 이는 전 유럽이 참전하는 '세계 대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7. 해체[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여했다가 패전한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들은 한데 묶여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새로 독립한 폴란드에 영토를 할양하고 소국으로 전락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1918년 11월 12일에 오스트리아의 제위에서, 11월 16일에 헝가리의 왕위에서 밀려나 제국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해체 수준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휘청거리자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되었으며 비슷한 이유들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바나트, 서우크라이나, 크라쿠프[16] 등이 독립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가 10월 31일에 혁명으로 독립하였다. 이후 생제르맹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처음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시킬 생각은 없었다. 1917년까지만 해도 전황이 별로 좋지 않았던데다 지금은 같은 편으로 싸우고 있지만 언제 다시 적대관계로 돌변할 지 모르는 러시아 제국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를 견제할 국가로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었다.[17]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무너지고 그 후에 들어선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보다 세력이 예전보다 훨씬 위축된 나라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살려둬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만다. 이후 해체된 제국 내의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수립,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제국 내 모든 독일어권 지역들을 영토로 선포했으나 이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들과 협상국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영토만을 가지게 된다.

다만 설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거나 승전했어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민족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19세기 후반부터 계속 해체 위기를 넘기면서 아슬아슬하게 버텨 왔었기 때문이다. 이 의견은 옛날 학계가 고수했던 정설이었으나, 최근 학자들은 이런 결정론적 시각에 반대하며, 제국의 해체가 필연이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다.

한편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제국을 해체하고 새로이 생겨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역시 다민족 국가였고, 제국 시절보다 더한 민족갈등[18]과 종교갈등[19]을 내포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냉전 등으로 간신히 눌려 있던 민족갈등은 결국 20세기 말까지 가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탄을 맞고 나서야 봉합되게 된다.[20]

2차세계대전 후 소련이 동유럽을 공산화시키자, 이에 놀란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부활시켜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소련의 스탈린은 이미 공산화된 헝가리 및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유고슬라비아는 티토를 중심으로 공산화되었기에 이를 포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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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디난트 1세는 러요시 2세의 누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와 결혼했고, 러요시 2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2] 전통적으로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치러졌으나 모하치 전투 패전 이후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 왕국의 1/3을 점유하면서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지 않고 빈과 가까웠던 포조니의 성 마르틴 성당에서 대관식이 열렸다.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대부분이 수복된 이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 전까지는 포조니에서 헝가리 국왕 대관식이 열렸으며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카를 1세부더페슈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3] 같은 구성원인 보헤미아 왕국도 이와 유사했다. 다만 보헤미아 왕국은 오래 전 보헤미아 공국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원이었던데다가 동방식민운동의 영향으로 독일화보헤미아인 귀족들이 많았으며, 30년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독립 운동이 실패한 후 오스트로슬라브주의에 입각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자치를 얻자는 방식으로 선회하여 헝가리만큼 반항적이지는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경우 1526년부터 친 합스부르크 성향이 강해 헝가리와는 반대로 대 오스만 전쟁의 선봉을 자처하는 한편, 헝가리의 독립 시도 탄압에 제국 내 어느 민족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서 동군연합임에도 오히려 사이가 매우 좋지 못했다.[4] 자그레브의 중심지 옐라치치 광장의 모델이 된 요시프 옐라치치, 슬로바키아어의 아버지 루도비트 슈투르, 에르데이 태생의 법률가 아브람 이안쿠 등은 합스부르크 왕가 편으로 참전하여 헝가리 혁명 진압에 앞장섰다.[5] 이것도 프랑스군의 상실이 큰 것에 놀란 나폴레옹 3세카밀로 카보우르 몰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강화를 맺어 베네토는 겨우 지켜낸 것이었다.[6]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모두 있어야 진정한 독일 국가를 이룬다"고 말했을 정도로 웬만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을 원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주권 국가로서의 평등한 협상을 거부하자 끝내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쫓아냈다.[7] 게다가 자신들을 패배시킨 그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로이센이 마침내 자신들의 영향권이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을 통일하고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자 더욱 속이 쓰렸다.[8] (Friedrich Ferdinand Graf von Beust, 1809 ~ 1886)[9]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치세 후반기에 헝가리 의회가 군대 내의 독일어 사용에 대해 불만을 품고 헝가리어를 동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자, 황제는 헝가리 국민의 투표권을 개정해 빈민과 농민이 대거 참정권을 가지도록 해서 언어 운동을 주도한 헝가리 귀족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자 언어 운동 지지자들은 재빨리 황제에게 지지를 보내며 꼬리를 내렸다. 내가 잘나지는 것보단 나보다 못난 게 나만큼 잘나지는 걸 막으려는 모양새였다.[10] 사실 크로아티아인에 의존하던 빈약한 해군력 이전에 오스트리아가 손을 뻗을 만한 공백지가 거의 남지 않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열심히 싸우는 사이에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싹 쓸어가버렸기 때문이다.[11] 이때 세르비아는 군대를 동원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원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12] 그리고 이로 인해 사라예보 사건이 발발했다.[13] 대타협 이전이긴 하나[14] 이 때 오헝 제국은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 못지않은 잔인한 보복전을 벌였다.[15] 보슈냐크인들은 이슬람교, 크로아티아인들은 가톨릭을 믿었고 종교적으로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과 달랐기에 동질성이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보장해주는 합스부르크에 우호적인 쪽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이 기존에 존재하던 민족 갈등에다가 불을 붙였던 것이다.[16] 폴란드에 흡수됨[17] 또한 러시아 역시 오스트리아처럼 제정이었기에 합스부르크 황실을 쫓아낼 생각 역시 없었다.[18] 폴란드는 폴란드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들이 섞여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들이 섞여 있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말할 것도 없다.[19]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계, 헝가리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등 가톨릭을 믿는 민족들이 다수였지만 폴란드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심지어 가톨릭-정교회-이슬람이 대립하고 있었다.[20] 사실 봉합도 말이 좋아 봉합이지 양차 대전쟁 직후 여러 요인에 의한 강제 이주로 갈등 요인이 제거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정도나 다행인 수준이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세르비아 우월주의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등등 모든 요인이 합쳐져 내전 끝에 연방 해체라는 폭발 엔딩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