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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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식민본부
4. 기타


1. 개요[편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등장하는 프랑스 제2제국을 의미한다. 이 소설에서의 행적을 요약하면 주인공의 등장으로 인해 대한 제국을 제외하고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국가.

2. 상세[편집]


세계관에서의 프랑스는 극동에서 엄청난 이익을 가져가게 되었는데, 우선 조선을 도움으로 인해 아시아에 준문명국인 우호국을 두며 프랑스가 주도적으로 가톨릭을 선교함에 따라 프랑스의 종교적 영향력까지 조선에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승전으로 인해 뤼순을 조차, 요동지역에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더해 조선이 베이징을 점령함에 따라, 친열강 정권이며, 조선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짙게 덮혀진 공친왕 정권이 중원에 수립되었다. 강남지역 또한 이홍장을 위시한 중화제국의 성립에 열강의 일원으로서 기여하여, 영국의 영향력이 짙은 중국 강남지역에도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중화제국의 성립으로 열강에 이홍장이 할양한 타이완을 타 열강들과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일본에도 원 역사에서 미치지 못한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어 막부파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막부파가 승전한다면 동북아 3국에 강한 영향력을 투사하게 된다. 중국이 여러 개여서 3국은 아니다만... 여러모로 극동에서 이득을 상당히 건진 상황. 나폴레옹 3세의 위상과 국내 지지도 올라갔을 건 덤[1]

그러나 조러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고, 독일과의 전쟁이 다가오자 지원을 축소하며 조선과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성립도 러시아 제국과의 대립각 때문에 꺼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 프랑스 국가인 데다가 조선의 제국화는 프랑스의 극동 영향력을 선전하는 것이기에 성립 축하 및 인정을 한 상태.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극동에서 시선이 떨어진 사이에 이형은 영국과 관계를 맺고 프랑스의 의향을 묻지 않고 청국까지 포함한 대 러시아 전선 동맹을 맺고 있다. 독자들 사이에선 J.P. 모건처럼 보불전쟁으로 가치가 일시적으로 과소평가되는 프랑스 국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문제는 프랑스 국채를 살 돈이 있으면 근대화와 육군 육성에 전념을 다해야 하는 판이라… 다만, 영국이 흥선군에게 대놓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넘어 대만을 완전히 쥐어라 펴라 하고 있다 보니 흥선군이 털어놓은 이야기를 듣다가 금 모으기 운동으로 프랑스 국채를 사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를 하지만... 문제는 더 이상의 수성전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여 나폴레옹 3세가 고종을 따라한 건지 최후의 발악으로 스당에서 근위대인 흉갑 기병대와 함께 모르핀과 샴페인 같은 약물들을 모조리 털어서 빨아제끼고 기병 돌격을 감행했다가 전사한 바람에 이제 보불전쟁의 결말은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2]확실한 것은 황제의 비참한 전사에 분개한 프랑스가 순순히 항복할 리 없다는 것이었다. 이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프랑스는 로마 제국[3]이 멸망한 이래로 유럽 대륙 정세의 중심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탓[4]에 자국에 대한 국민들의 자부심이 매우 강한 나라다. 예전에 비하면 중견 선진국으로 기운 21세기에도 자국을 '라 그랑드 나시옹(la grande nation-위대한 조국)'이라 칭하는 프랑스인들이 있을 정도인데, 지구 방방곡곡에서 영국과 식민지 쟁탈 경쟁을 하던 그 시절이었으면 오죽했겠는가.

당장 스당 포위전도 프랑스 중앙군의 결사항전으로 프로이센 공세군의 절반에게 저승행 티켓이 제공 되면서[5] 역사와 정 반대로 끝났고 그 뒤로도 코뮌이건 왕당파 건 공화파 건 30년 만에 초정파적으로 단결하고는 '황제 폐하 만세'와 '프랑스 제국 만세' 같은 구호를 외치며 의용군을 조직해 파리 수비에 나서는 등 실제 보불전쟁보다도 더욱 단결하여 저항 중이다. 전투에서는 최종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상긴 것이다. 심지어 크림전쟁 당시 참전했던 다 늙은 근위병들조차 황제폐하가 몸소 나서다 죽었는데 우리가 침대에서 편히 죽을 수는 없다며 자발적으로 복귀할 정도. 여기에 더해 루이 베르그송이 돌아와서 참호전 체계를 도입, 기존에도 요새 도시였던 파리를 3중 참호선을 갖춘 괴물급 요새 도시로 만드는 등 신전술의 득도 보게 되어 원 역사와 달리 보불전쟁에서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형의 참호전은 대 기병전을 핵심으로 삼고 있는데, 루이 베르그송은 기병보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보병이라면 더 지옥이 벌어질 거라고 직감하여 수학, 지리학, 건축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계산에 계산을 거듭, 모든 참호가 서로를 엄호하며 한 참호가 뚫려도 다른 참호로 즉석에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이를 실제로 파리 외곽에 구축했다. 게다가, 지뢰철조망, 총검 함정은 말할 것도 없고, 개틀링보다는 후진 성능이지만 아쉬운 대로 화력지원에 써먹을 만한 자국산 볼리 건 '미트라예즈'까지 파리의 무기고 안에서 모두 꺼내다가 참호선 곳곳에 만든 토치카에 배치했다. 때문에 해당 회차의 연재 댓글란에는 파리그라드 드립이 흥했다. 즉, 이 세계관에서 이형이 참호전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면, 루이는 완성된 근현대 참호전을 탄생시킨 것. 몰트케가 "왜 이 미래의 전장(참호전)이 베를린에 세워진 게 아닌 거냐!"라며 절규할 정도였다.

여담으로 이형은 바뀌게 된 보불전쟁의 결과를 짐작하고 프랑스 국채 매입을 포기했고, 영국에 의한 중화제국의 쌀값 소요를 공친왕을 통해 알고는 구휼미를 풀어달라고 벨로네 공사에게 머리 숙여 부탁한다. 심지어 이 필요하다면 대한제국 재무부 내수사내탕금까지 털어서 주겠다는 말과 중화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한 난민 유입 때문에 피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설명까지 더한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벨로네 공사 덕분에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주한 프랑스 공사관의 전보를 받자마자 협력을 결정, 자국 영향권으로의 난민 확산 저지와 최우호국인 대한제국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6] 대량의 을 공출하여 자국 영향력이 강한 항구도시들을 중심으로 강남 해안 지대의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등 영국이 저지른 만행과는 전혀 다른, 인도적인 구호활동 덕분에 군자의 나라라 불리는 등 이미지적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

그리고 파리 공방전에서 프로이센&북독일 연방군 정규군 40만 명을 겨우 일주일 동안 말 그대로 갈아버리면서 전쟁의 추는 완전히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진다. 프랑스군의 핵심인 중앙군은 괴멸했지만 아직 동부군과 남부군, 북방군이라는 프랑스의 정규군이 건재한 상황에서 이제는 이들을 이용한 프로이센으로의 역진격은 불 보듯 뻔한 상황. 하지만 루이가 얻어낸 시간은 구시대적 낭만에 젖은 데다 자신들이 도태될 것을 우려한 귀족들과 군부 상층부에서 폄훼하며 그를 체포하기까지 하며 낭비된다. 밝혀지기로 루이가 패할 경우 벽지인 아프리카로 보내 그의 커리어를 완전히 끝장내려고 했고, 병력 지원까지 회피해 루이는 파리 방어전에서 오로지 예비역과 청년 징집병 위주로 구성된 파리 수비대 16만 명만으로 3중 참호선을 만들어서 40만 북독일 연방군을 막아야 했다.

이후, 파리 방어전이 시작되고 루이는 조선에서 고문으로 있을 때 옆에서 지켜본, 참호전에 필요한 교리들을 도입함과 동시에 파리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파리 방어전에서 참호전을 펼쳐 승리하지만, 이로 인해 막 시작했을 벨 에포크에 젖어 명예롭고 위대해야만 했을 전장을 군복을 일부러 더럽히고 땅을 파서 몸을 숨겨야 하는 진흙탕을 만들고 아무리 적군이라지만 단기간에 너무 많이, 잔인하게 죽여댄 것 때문에 악평을 받는다. 그 결과, 북독일 연방의 40만 대군을 말 그대로 갈아 버렸음에도 그를 끝장 내려선 상층부의 타산으로 인해 악선전을 당하는데, 파리 시민들 일부는 처음엔 이에 호응했으나 정말로 체포한 것에 놀라면서 역풍이 불기 시작한다. 압도적인 적군을 상대로 함락 직전의 수도를 지켜내고 전쟁의 승기를 프랑스 쪽으로 가져온 구국의 영웅을 체포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기 때문. 여기에 황제를 받들어 프로이센 멸망을 외친다는 점에서는 군부와 일치하지만 그들의 폭주를 견제해야 하는 섭정 의회에서도 군부의 독단적 행위를 우려했고, 결정적으로 나폴레옹 4세가 자신의 권력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자신이 임명한 사람을 군부가 멋대로 구금해버리면 자신은 누굴 믿어야 하냐며 격노하며 결국 루이 소장은 석방되고 전공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프로이센 침공군을 지휘할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이 사이, 프로이센은 마지막 국력을 쥐어짜 내서 라인란트 일대에 대규모의 참호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에 병사들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루이는 개틀링 포와 흉갑, 산탄총의 대량 구입을 건의하고 나폴레옹 4세가 이를 인가함에 따라 프랑스 제국은 사활을 걸고 전쟁에 임한다.

그렇지만 민치상이 미국에서 읽은 신문의 내용에 따르면 6개월이 걸려서야 라인란트 방어선을 돌파한 걸 보면 시간이 많이 지체된 탓에 베를린을 신속히 점령하지 못하여 확전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7] 프로이센 침공을 시작한 프랑스군은 라인란트 방어선에 기존에 배치한 숫자 외에도 추가 병력을 증원하는 북독일 연방군, 그리고 남독일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가 북독일 연방군에 가세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흉갑과 산탄총으로 무장한 장갑척탄병들을 앞세운 돌격 전술을 선보이며 참호선을 돌파한다. 그 결과 겨우 10만에 불과한 피해, 그것도 대부분이 경상자와 중상자에 그치는 피해만 입고 보-오 연합군을 패퇴시킨 뒤 하노버까지 점령하는 위업을 달성하고 라인 자유도시 연방의 마인츠에 사령부를 두고 있다.

물론, 참호선의 위력을 모르는 후방에선 늙은 장군들언론들이 10만 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낸 루이를 무능력자로 매도하지만, 자책감에 빠진 루이를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그를 존경하는 부관 조제프 조프르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선에서 싸우는 군사들은 이만큼의 성과를 거둔 루이를 크게 신뢰하는 듯하다. 이후, 이 부치는 걸 실감하며 후퇴한 오스트리아군, 그들의 요청에 따라 동프로이센에서 북독일 일대로 서진한 러시아군과 대치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지만, 자신들을 상대로 50만 이상의 병력을 오와 열을 맞춰 진군시키는 오-러 연합군에게 참호선 곳곳에 배치된 개틀링 토치카로 총탄 세례를 퍼부을 준비를 한다.

루이의 계획에 따라 거짓 퇴각으로 1차 방어선을 내주며 오-러 연합군을 유인한 프랑스군은 2차 방어선과 연결된 지하 땅굴을 통해 장갑 척탄병들을 투입하여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반격을 개시하여 12만 명을 하느님과 면담시켜 주고 9만 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다. 이에 본국의 언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프랑스군의 승전과 그 주역인 루이를 찬양하는 기사로 신문 지면을 도배한다. 이후 '베를린 점령 및 폴란드 해방'과 '오-러 연합군 축출'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지만, 프로이센 참모본부의 주도로 이미 베를린이 파리 못지않은 괴물급 요새 도시로 변한 데다 동맹국인 이탈리아군이 졸전 하면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의 진출[8]로 가닥을 잡는다.

다만 이 세계관의 프랑스가 현실보다 개악될 점이 하나 있다면, 현재까지의 전개로 추측했을 때 나폴레옹 3세가 전사 함으로서 모두가 황제 만세를 외치게 되고, 나폴레옹 4세가 즉위해서 그가 직접 임명한 장군 루이 베르그송의 업적을 업었단 점에서 제정 체제가 여전히 유지될 것이라는 점이다. 현실에서는 파리 코뮌에 대한 유혈진압 등이 있기는 했지만 보불전쟁의 패배 후 어찌되었든 민주 공화국 체제로 이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세계관에서는 황제의 죽음이 영웅시되면서 모든 이념에 상관없이 황제 만세를 외치며 전 국민이 복수심에 불타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인 제정 체제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고, 어쩌면 독일 제국나치 독일과 같은 팽창적이고 폭력적이면서, 일견 군국주의적인 민족주의가 프랑스에 들어설 수도 있다.

물론 전후 문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치권의 변동이 생기면 입헌군주정으로 갈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애초에 프랑스 제국은 제정이었으면서도 민주 공화국 체제에 대한 외침이 드높았던 나라였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전후 입헌군주정으로 변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회의론적 입장에서는 그렇게 프랑스가 민주 공화정 체제로 이행한 뒤에도 악시옹 프랑세즈 같은 왕당파-반민주주의자 세력들이 강성하게 날뛰었으며, 이런 세력들을 주축으로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레퓌스를 적극적으로 날조하고 비방한 강한 여론의 주축이었다. 그런데 대놓고 황제가 영웅시되고 전 프랑스인들이 황제의 이름으로 단결했다는 점에서 현실 프랑스 공화국에도 존재한 반민주주의 세력들이 더더욱 위세를 날뛰고 프랑스 사회의 주류를 차지할 수도 있다. 작중 정세예측에 있어서 시기와 규모의 차이는 있어도 방향 자체는 100%의 적중률을 보인 이형의 예측은 나폴레옹의 환상에 젖은 군국주의 체제였다.

사실 개국 초기 시기에 프랑스는 조선에 대한 인식을 기특한 비문명국가로만 여겼다. 굳이 프랑스가 무기를 들고 찾아가기 전에 알아서 개항을 하고, 천주교 박해를 금지하며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이행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차례에 걸친 조청전쟁 때에도 조선을 프랑스에 우호적인 국가로 여기면서도 프랑스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나라 중에서 제일 문명화된 나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선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청이 극적으로 무너트리지만 그 껍데기만 남은 청을 프랑스에 거저 넘기자 그제서야 프랑스는 진심으로 조선에게 감동하며 프랑스란 나라의 최고의 학생으로 여기기 시작해 진심으로 조선만큼은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9]

하지만 조선이 조러전쟁에서 러시아를 보란 듯이 완파시키자 얘기는 조금 달라졌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걸출한 천재가 있었음에도 끝내 패배했던 프랑스 혁명전쟁 시기부터 크림전쟁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속시원하게 러시아를 이긴 적이 없었다. 허나 조선이 러시아에게 완승을 거두게 되었고, 이 때문에 보불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부담감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종처럼 음주+모르핀빨 닥돌러쉬를 감행하다 죽게 된다. 이후로 조선이 칭제건원을 하여 대한제국이 되자 약간은 거리를 두는 편. 물론 다른 열강들에 비하면 프랑스는 이 작품에서 가장 대한제국에게 우호적인 열강이다.

오러동맹의 총병력 2할 이상을 초반의 참호전에서 절단내고, 독일연방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뮌헨마저 포위하는 등 루이중장의 지휘로 승세를 점했으나 영국의 협상에 일단은 응할 의사를 보인다. 다만 황제는 물론이고 프랑스 국민들 대부분은 다른 건 몰라도 프로이센에게 부활할 여지를 주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을지라 협상은 난항을 겪을 예정. 더욱이 프로이센에게 수십만 병사들의 피값을 내주고 통일과 발칸진출을 진행하는 오-러 동맹은...

이러한 유럽의 상황과는 별개로 극동에서는 잔여 해군 전력을 동원하여 황하 일대에서 중화제국군의 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등 천명대전에 대한제국 측으로 참전하여 이형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황하로 진입한 연합함대가 강을 건너 북상한 중화제국군의 후방을 포격으로 두들겨 준 덕분에 이형이 직접 이홍장의 목을 베는 게 수월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굴욕에 분개한 국민들과 자유주의자들과 손잡은 카를 마르크스가 프로이센을 뒤집어버려 프로이센 공화국을 건국하고 빌헬름 1세 등이 오스트리아로 도피하자 주적을 프로이센에서 오스트리아로 변경[10]하게 된다. 물론 생색내기에 불과하며 이 전쟁이 더 이상 나폴레옹 3세의 복수전이 아닌 독일 통일 저지라는 정치전으로 변질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이다.

그리고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했는데 비록 원수인 프로이센 왕가는 놓쳤지만 최첨단의 전술로 단련된 강군을 손에 넣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적이 더욱 강력하게 부활했지만 일단 질적인 우위는 확실히 점하게 된 것. 앞으로의 관건은 이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파산 선언으로 인한 대공황, 검은 월요일이 파리 금융가를 덮치면서 결국은 전장에서 싸우지도 못한 채 철수하고 만다. 프랑스 본국은 국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권위가 막강한 황가의 대국민 호소를 통한 금모으기 운동과 국유화 조치, 군부의 시위 진압 등으로 겨우 혼란을 진정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국내 안정화와 식민지 사수를 위해 모든 병력을 철군시키는 바람에 폴란드를 재침공하는 러시아를 눈뜨고 바라보며 폴란드 독립군을 버려둔 채 후퇴해야 했고, 결국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야 말았다. 더군다나 고종이 예견한 대로 군부의 입김이 커지면서[11] 군국주의와 전체주의가 발호할 위험성이 커진 상태.

루이 중장은 부관 조제프 대위의 분노와 슬픔을 진정시키면서도 자신 또한 누구보다 분한 마음과 복수의 맹세를 가슴 깊이 삭힌 채 초라한 몰골로 귀국하고, 이런 그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호출하여 그를 접견한 나폴레옹 4세 또한 국력 낭비밖에 안 된 이번 전쟁의 결과에 분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과 그에 기반하는 황실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이틀 뒤에 열릴, 귀국한 원정군의 개선식을 위한 외견 정비를 그에게 명하는 등 절치부심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에 루이 중장 또한 폴란드에서 철군할 당시에 이를 갈며 다짐한 복수의 맹세를 되새기는데, 황제는 이런 그에게 대한제국 황제의 야망이 어느 정도인지, 향후 그의 제국이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손을 뻗치는 데 얼마나 걸릴지, 그간의 인도차이나 경영실적은 어땠는지 물어본다.

극동총독부 주재무관과 대한제국군 고문 경력이 있는 그의 입에서 나온 답변들[12]을 모두 듣고는 돈 안 되고 지키기 어려울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대한제국에 팔아치우는 대신, 그 자금으로 본국과 가까우면서도 이미 식민지가 있는, 지중해 건너의 아프리카 방면에서 식민지를 확장하여 국력을 재확대할 계획을 밝힌다. 지대섬 놈들이 내부수습에 정신없는 이 때를 틈타 아프리카에 먼저 깃발을 꽂아서 동쪽에서는 대한제국, 서쪽에서는 프랑스 제국이 대독일 신성로마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동토에 가둬버리자는 것.[13][14] 그리고 그 개선식을 루이 중장의 원수 진급식 자리로 겸하고, 그를 아프리카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 과정에서 루이는 혹시 황제가 대한제국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인가 당황했지만 황제의 목표는 신뢰하는 우방과 함께 신성로마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가둘 대전략을 짠 것.

그렇지만, 나폴레옹 4세는 처음 즉위했을 당시 14세, 4년 후엔 18세의 나이가 되었으나 연이은 전쟁 탓에 본인의 권위, 지지도와는 별개로 군부를 거의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욕심 없고 충성스러운 루이 베르그송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군국주의, 민족주의에 빠져가는 나라를 제어하는 중. 사실 루이 중장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경력, 공적, 신분, 연줄, 작위 모두 변변찮았음에도 초고속 진급을 거듭한 바람에 군부 내의 질시를 받고 있어서 더 이상의 진급이 목숨에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여 원수 진급 명령을 고사했으나, 나폴레옹 4세가 파리 내에서의 권력투쟁, 특히, 국가에 가장 암적인 존재가 된 군 상층부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이해하고는 마음을 바꿔서 원수 진급 명령을 받아들이며 안팎의 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며 충성을 맹세한다.

한편으로는 서유럽 금융공황의 여파로 굶주린 백성들에 의해 왕정 자체가 붕괴되어 벨기에가 멸망한 뒤, 지역별 주류 인종 구성에 따라 프랑스계의 왈롱 주, 네덜란드계의 플랑드르 주, 독일계의 룩셈부르크 주로 나뉘어 인종적 연고가 있는 주변국에 편입되길 희망함에 따라 나폴레옹 4세는 지난 전쟁에서의 치욕을 만회하고자 왈롱 주를 흡수하려 하고, 루이 베르그송에게 이를 맡겨서 목표를 달성하하면 그에게 귀족 작위와 영지를 수여하는 등 지위를 굳혀주면서 자신의 위신까지 세운 뒤, 프랑스 내의 기존 권력집단들을 교체하려고 벼르고 있다.

허나 대한제국에게서 11톤에 달하는 금괴를 차관과 국채 매입 대금으로 제공 받은 영국이 이를 바탕으로 전시예산을 조달해 해군육전대를 벨기에에 파병하는 바람에 무력충돌 위기에 직면하는데, 사람 본성 어디 안 간다고 프랑스군 지휘관인 루이 원수는 여전히 인명을 중시하여 차선책도 각오한다. 때문에 그의 부관으로서 상관의 진급 덕에 소령으로 진급한 조제프는 이번 일만 성사되면 자신의 상관이 영지를 거느린, 확실한 귀족이 되는데도 자신의 명예나 이익보다 '최악의 경우에는 왈롱 주를 합병시키지 말고 보호국화하라.'라는 황제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하려는 것에 답답해하는 중.

그렇지만, 영-란 측 협상대표로 나온 솔즈베리 후작 등의 문관들이 프랑스 측 대표로 나온 그가 프랑스가 자랑하는 전쟁영웅이자 이제 겨우 40대 밖에 안 된 육군 원수이기에 협상이 틀어지면 프랑스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되면 신성로마제국과 러시아 좋은 짓만 하는 꼴이 될 거라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프랑스의 요구대로 왈롱은 프랑스, 나머지는 네덜란드가 분할 합병하는 데 합의, 군을 움직이는 데 들어간 비용 외에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목표를 달성한다.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체면을 구겼던 두 명의 '루이'인 나폴레옹 4세와 베르그송 원수 모두 각자의 위신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파리 내부의 권력투쟁을 정리할 듯하다.

그런데, 대영제국이 자신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오-헝(신성 로마) 제국과 단독으로 스톡홀름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못 미더웠다고 해도 지난 전쟁에서 같이 싸운 동맹국이 이렇게 빨리 뒤통수를 친 것에 분개한다. 이에 나폴레옹 4세의 명에 따라 프랑스 인도차이나 총독부와 한성 간 직통 전신 설치, 벨로네 공사의 특명전권대사 승격 및 주한 프랑스 공사관의 대사관 확대, 대한제국에 대한 인도차이나 매각 의사 타진 등 그가 구상한 대전략 추진에 박차를 가한다.[15]

루이 베르그송이 신속하게 아프리카를 정복하는 동안 본국의 나폴레옹 4세는 다른 열강[16]과 여론전을 벌이고 스페인-이탈리아관세동맹을 맺어 영국을 제외한 경제침체 타파를 계획한다. 또한 이것으로 아프리카 진출에도 도움을 받기 위한 생각도 있었다. 영국과 오스만은 더 이상 동맹이라고 여기지도 않는지 오스만의 지원요청을 무시하고 적당히 물자를 지원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그러나 그리스를 침공한 오스만이 반격을 당하고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상태에서 영국까지 개입하자 오스만 지지를 표명하면서 영국함대가 무력시위를 하는 크레타에 함대를 파견한다. 이후 런던에서 열린 종전협정에서 지원을 한 대가로 오스만에게서 리비아의 위임통치권을 받는다.

대한제국의 황제 이형의 파나마 운하 건설 제안을 나폴레옹 4세가 받아들이면서 미합중국과 대한제국과 함께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로 한다. 이는 대사로 있는 앙리 벨로네가 이형을 통해 말라리아의 해법의 힌트를 얻은 상황에서 파나마 운하를 통해 영국이 장악한 대서양-태평양의 주도권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후 조제프 조프르를 파견하는 등 동맹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정복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확정으로 인해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식민지 확보를 촉발시키게 되며, 페르시아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영국의 갈등을 계기로 인도양 방어를 위해 영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신형함 건조 및 아프리카 정복군의 인도양 차출 등 아프리카 정복을 잠정 중단한다. 더불어 대한제국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인지 친프랑스파 양성을 위한 대한제국 유학생들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기술지원에는 난색을 보인다.

프로이센이 아시아로 진출하려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네덜란드와 영국과 관세동맹을 추친 및 파리 금융자본 유치등을 시도하는데다가 신성 로마 제국을 견제에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관계를 개선을 하는 중이다.

파나마 운하건설 동안 오스트리아인 오트마 자이들러에게서 100만 프랑을 주고 DDT 사용 권리를 구입한 뒤 생산하여 노동자들에게 투입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성능의 원인에 의심이 가서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에 투여하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DDT 유행이 불면서 수출까지 이어지자 민간 시장에 판매를 시작한다. 당연히 유럽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였다. 물론 미국과 달리 DDT가 곤충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학계에서 경고의 목소리를 낸다.[17]

한편, 페르시아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 확장을 계기로 코펜하겐에서 열린 열강들의 교섭에서 남위 5도를 기준으로 아프리카 북쪽을 확실히 확보하게 된다. 더불어 라오스캄보디아 그리고 코친차이나외의 베트남 전부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영국과 함께 연합을 하여 미국의 지원하에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1890년대 접어들면서 나폴레옹 4세가 독재자로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나폴레옹 4세의 오른팔이던 루이 베르그송 대원수가 아시아에 파견간 사이 아프리카에서 병사들을 징발하는 등, 150만의 대군을 편제하고 귀국한 베르그송 원수를 총사령관 삼아 진격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홀란트 공화국을 수립하며, 결국 영국에 상륙전을 시도한다. 영국은 해군육전대를 비롯한 정예 육군을 대부분 네덜란드 방위에 투입했기에 어떻게든 프랑스 함대의 총력전을 막아야 했지만 충각전술을 비롯한 너죽고 나죽자로 나오는 프랑스 해군의 물귀신 작전에 밀려 3만 상당의 프랑스 육군이 상륙에 성공해 런던을 점령한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은 궤멸했고 상륙한 프랑스군이 이성을 되찾고 네덜란드에 있던 영국의 해군육전대가 해상권을 되찾은 영국 해군에 의해 귀환하자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위해 항복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쟁탈전은 계속 진행중이고, 네덜란드는 끝내 프랑스의 손에 떨어진 모양.

프로이센과 전쟁와중에 헝가리마저 독립해버린 오스트리아 제국, 국력이 완전히 고갈되었으며 군부가 적색 쿠데타로 인해 통제에서 벗어난 프로이센, 캐나다를 지키지 못하고 런던을 잠깐이나마 잃으면서 완전히 위신이 추락한 영국[18], 내전과 대한의 개입으로 폴란드가 봉기하면서 극도로 혼란스러워진 러시아를 제치고 유럽 제일의 열강위에 오른다. 아시아의 대한, 아메리카의 미국과 함께 세계를 좌지우지할수 있는 세력이 된 것. 그러나 대타격을 입은 해군과 저지대 유지에 너무 많은 병력과 예산이 들어가자 군부의 수장 루이가 확장을 중지하고 안정과 회복에 주력할 것을 요구한다. 황제 나폴레옹 4세는 내심 루이의 안을 지지했으나 그동안 패권적 이미지를 구축하며 권위를 쌓아온지라 표면적으로는 패권적으로 나서면서 이면에서는 적당히 양보하기로 협의한다.

황화론자들이 날뛰는 가운데 4세의 장자가 왕재는커녕 프로이센의 빌헬름 뺨치는 황화론자 겸 이상론자란 사실이 황제와 루이의 입에서 드러나면서 차대에는 황권이 축소될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황제가 아들에게 지금의 절대황권을 넘겨주었다가는 나라도 가문도 붕괴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

황화론에 반발해 일어난 아시아의 반 유럽 운동으로 각국의 경제/정치상의 혼란이 격화되었으나 루이와 협상한 황제가 직접 한국까지 와 친한적 모습을 보여주면서 유일하게 반유럽 운동에서 제외되었고 덕분에 각국 경제공동체의 수장위에 앉게 된다.

3. 식민본부[편집]


원역사처럼 베트남에 인도차이나 식민본부를 두고 있었으나, 그 대우는 현실보다 비교가 안될만큼 좋다.

본래 인도차이나 식민지는 1900년대까지 큰 수익이 나지 않고 아시아로 가기 위한 조차지의 역할이 컸는데, 프랑스와 손 잡은 조선이 아시아 패권을 손에 넣으면서 자동적으로 프랑스에게 보답삼아서 지분을 일부 양보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아시아 시장이 열리면서 타 열강보다 우세를 점한 프랑스의 관심은 인도차이나에서 멀어지게 된다.

4. 기타[편집]


당장 유럽쪽 화자 대표로 선정된 오리지널 캐릭터 루이 베르그송부터가 프랑스인인 등, 은근히 이런저런 보정을 받았는데, 실은 연재 직전에 작가가 쓴 AA물에서[19] 프랑스가 너무 개X끼로 나오는 바람에 좀 미안해져서 선역보정을 쥐어준 것이라 한다. 사실 묘하게도 유카리의 AA물에서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혐성이 치솟는 국가로 나오는 비중이 높아서[20] 그럴 때마다 엘랑이 또 엘랑한다라는 반응이 있을 정도.

[1] 취소선이 그어졌지만 실제로도 내치는 훌륭했다고 평가 받고 거기에 원역사에는 없던 외치 업적까지 추가되었으니 나폴레옹 3세의 위상이나 지지도가 안 올라가는게 이상하다.[2] 이때 나오는 묘사가 가히 압권인데, 안그래도 마지막이었기에 치솟는 사기+황제가 함께 돌격한다는 것에서 나오는 믿음+술,마약,진통제 등의 약물을 빨아제낀 데서 나오는 정신력으로 그야말로 모든것을 갈아버릴 기세로 돌격했고 실제로 프로이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3] 정확히는 서로마 제국.[4] 유럽 정치의 중심에서 가장 밀려났던 시절이 발루아 왕조 말기였지만, 이때조차도 객관적 국력은 유럽 내에서 손가락 안에 꼽혔던 시기였고 프랑수아 1세 때까지만 해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전성기를 맘껏 누리던 카를 5세와 경쟁했을 정도였다.[5] 실제 군사학적으로 보면 절반의 피해는 전멸 판정은 물론이고 아예 기존의 작전 체계를 전부 뜯어고쳐야 하는 막대한 피해다.[6] 식민지인 베트남의 인구 감산 의도도 있었다. 식민지 인구가 늘어나 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까.[7] 이형의 판단에 의하면 이번 전쟁 결과에 따라 나폴레옹 제국의 체제가 부활하게 될지도 모를 거라고 한다.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작중 시점에서 200여 년 전에 형성된, 비스마르크가 두려워하는 히슐리외 체제의 부활.[8] 오스트리아로 침공하면 이탈리아 전선의 오스트리아군은 자국 수호를 위해 많든 적든 병력을 빼서 투입해야 한다. 이러면 자연히 이탈리아군의 숨통이 트이게 된다.[9] 설령 프랑스에게 가장 중요한 이권 지역인 인도차이나를 잠깐 잃어버린다고 해도 말이다![10] 정확히는 오스트리아로 도피한 구 프로이센 정부와 왕가. 루이는 시니컬하게 "프로이센 왕국이 망했으니 목적은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군." 하고 말했다.[11] 국내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강경진압을 망설였던 섭정의회를 보다 못한 군부가 직접 나섰기 때문.[12] 대한제국은 향후 10여 년 내에 인도차이나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고,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경영실적은 쭉 적자였다.[13] 정확히는 중대서양과 태평양 진출 저지가 되겠다.[14] 나쁘지 않은 판단인 것이 1873년아프리카 대륙은 프랑스령인 알제리세네갈 기니를 빼면 영국보어인들이 다스리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포르투갈이 지배 중인 기니비사우앙골라, 모잠비크, 오스만 제국이 쥐고 있는 리비아이집트 정도를 제외하면 열강 입장에선 빈 땅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거기다 리비아를 쥔 오스만 제국은 쇠락을 거듭하고 있고, 이집트 또한 그러한 오스만 제국에 주기적인 세금만 바칠 뿐인 준독립국 상태인데다 수에즈 운하 주식의 반절을 프랑스가 쥐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가 모질게 맘 먹고 총구를 돌리면 아프리카를 거의 다 프랑스의 발 아래에 둘 수 있다. 물론, 강남 대기근 사태 때 이형과 벨로네 공사가 만나서 이에 대한 양국의 공조 조치를 의논하던 자리에서 이형이 '이 사태를 방관한다면 국경을 넘어 10만의 난민이 인도차이나 식민지로 넘어갈 수 있다.'라고 한 걸 보아 이미 베트남 북부까지 영향권에 넣은 것으로 보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포기하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정도나 물리적 거리, 그에 따른 유지비용, 그간 쭉 적자였던 실적 등을 따지면 원자재와 노동력이 풍부하고 본국과의 거리도 가까워 영향력 투사가 용이한 아프리카가 보다 더 전망이 밝다.[15] 구미 열강의 주일공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된 것이 1905년 이후의 일이다. 1874년에 유럽 열강인 프랑스가 주한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킨다는 것은 무려 30년을 앞당긴 대업적이다.[16] 영국은 네덜란드와 포르투갈과 함께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복전쟁을 비판하는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17] 이렇게 된 계기는 다름아니라 고종이 DDT로 된 악세서리를 보더니 된통 암 걸리고 싶지 않으면 쓰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 때문.[18] 후에 쿠데타로 정부가 해군을 데리고 탈출하면서, 아일랜드조차 잃었고 이로서 완전히 주요 열강자리에서 내려온다.[19] 동년 연재된 그대가 아는 조선은 죽었다. JOY를 표하도록 하지, 통칭 '대진어장'으로 작중 프랑스는 인도에서 인종청소를 실시하여 무려 2억명의 인도인들을 학살한다.[20] 특이하게도 혐성 관련 다이스만큼은 매우 높은 보정을 받는다. 오죽하면 유카리(리첼렌)가 너무 교묘하게 몰리는 다이스에 콘솔유저 드립을 치는 경우가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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