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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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남양 무후사
1. 개요[편집]
중국 중부 허난성 남부의 지급시. 서부의 위구르, 티벳을 제외한 '한족의 중국'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뤄양에서 남쪽으로 200km, 정저우에서 서남쪽으로 260km, 시안에서는 동남쪽으로 35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고대부터 교통, 전략의 요충지였다. 현재도 관할 인구는 1027만명이고 시내 인구만 해도 200만명인, 중국 전체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도시이다. 삼국지에는 완성(宛)으로 등장하는데, 후한 당대에는 전국에서 인구가 많은 군이었다. 완이라는 지명은 오늘날까지도 시내의 완청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시내에는 완청구 말고도 워룽(와룡)구가 있는데, 와룡 선생으로도 알려진 제갈량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시내 남쪽에는 그의 사당인 무후사가 있고 그곳에는 악비가 쓴 출사표가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시가지 동쪽에는 국내선 공항인 난양 공항이 있다. 여담으로 유비가 형주 자사 유표에게 의탁할 당시에 현령으로 지내던 신야가 바로 난양 지급시 관할하에 있다. 시내 중심부에서 서남쪽으로 70km 떨어진 신예현이 바로 그곳이다. 난양 이웃의 지급시인 신양시가 아니다.
2. 역사[편집]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었고 또한 신석기 문화 중 하나인 양사오 문화(仰韶文化)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이 거주한 지역이다보니 주나라 때 부터 이미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참고로 난양(南阳)이라는 이름은 주나라 때에 생겨나서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유지된 이름이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여러 번왕국들이 난양시를 통치하였으며, 초나라가 이들을 모두 통합한다.
그리고, 제갈공명의 출사표의 구절에서도 자신의 고향인 '남양' 을 언급하는데,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선비)로 남양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라고 언급한다.
한나라때는 중국의 주요 철 제련지로 번성하였으며, 당시 난양시는 뤄양시, 한단시, 쯔보시, 청두시와 함께 오도(五都)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광무제 유수 일가의 고향 및 본적지이기도 하다. 또한 상술한 삼국지로도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형주 북부(지금으로 따지면 후베이성)에 속해있다가 언젠가부터 허난성으로 소속이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신해혁명 때에는 허난성 자체가 청나라 조정의 손을 들어 준 지역이기 때문에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맹공을 받은 지역이었다.
1948년, 중국공산당이 점령하였으며 1994년 지급시로 승격된다.
3. 교통[편집]
정저우-샹양간 고속철이 지나고, 시안-신양간 일반철도가 지난다. 시가지 동쪽 끝에는 난양 장잉 공항(南阳姜营机场)이 있다. 중국의 주요 대도시를 연결하며, 국제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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