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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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
여흥 민씨가 주축이 된 수구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자 일제강점기 시기의 최고 갑부이다. 광주군에서 민두호의 아들로 태어나 명성황후의 친척, 민씨 가문의 인물로 권력을 누렸고 본래는 친청파였으나 친일파로 변절해 국권 피탈에 앞장서 매국노가 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852년 5월 15일 경기도 광주군 출신으로 명성황후와는 15촌이 된다. 1877년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한 뒤 검열을 지내고 주서(主書)·겸설서·정언(正言)·부수찬을 거쳐서 동지경연사·지돈령부사 등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화려한 관력을 쌓게 되었다. 민영휘는 명성황후와의 촌수는 상대적으로 먼 편이었지만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많이 집중되어 임오군란 때는 가옥이 부서지기도 했다.
청병차병에 대한 결정을 보지 못하자 고종은 비밀리에 성기운을 원세개에게 보내 상담하면서 청병차병을 암암리에 결정했다. 결국 청병차병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종과 정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민씨세력의 실권자 민영준(민영휘), 그리고 외압세력의 대표 원세개 사이에서 담합이 이루어져 결정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관료 시절에도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동학농민전쟁 때는 그와 친하던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면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다른 대신들은 대화로 풀자면서 원병 요청을 반대했는데 민영휘는 끝까지 원병을 요청하는데 앞장섰으며 위안스카이, 고종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청나라군 파병을 강행하였다.[1]
그 후 민씨 정권이 실각하며 지석영이 그를 탄핵하기도 했으나[2] 고종이 진령군은 제거하고 민영휘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했다고 답했는데 민영휘는 죽지 않았고 단지 위리안치로 끝났다. 그는 탐관오리로 단죄되어 전라도 신안군에 유배되었다가 청나라로 도주했는데 이듬해 귀국하여 대한제국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정치권에서 물러나 1906년 휘문중학교·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했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에 앞장선 공로로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자신이 모은 재물로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하나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다 1935년 12월 30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민영휘의 일생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고하도록 하자. "끝없는 탐욕" 나라도 팔아먹은 '조선 최대 갑부' 민영휘
3. 가족 관계[편집]
- 正妻 및 측실: 대방마마 평산신씨, 김기현(金箕賢), 중국인 나씨, 평양(平壤)마마, 연당(淵堂)마마, 해주(海州)마마 순흥안씨 안유풍(安遺豊)[3]
- 아들: 형식,[4] 대식, 천식, 규식
- 손자: 병주, 병수, 병유, 병도
- 증손자: 인기[5] , 욱기, 덕기[6] , 웅기[7] , 헌기[8] , 성기[9]
- 현손자: 경현[10] , 경집[11] , 경주[12]
4. 여담[편집]
-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8·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17∼73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 당대의 야사들을 모은 매천야록에 따르면 민영환이 자결한 직후, 민영휘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자 한 향병(鄕兵)이 "당신의 성도 민씨가 아니오? 그런데 어떤 민씨는 죽고 어떤 민씨는 살아있는가?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시오?"라며 격렬하게 항의하고, 이에 민영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났다고 한다. 현대로 비유하면 일개 병사가 고위층 인사에게 손가락질하며 독설을 퍼부었는데도 대응하지도 못하고 도망간 격이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나 이미 당시에 민영휘에 대한 대중들의 여론이 매우 나빴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 민영휘의 후손이 21세기에도 '주식회사남이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저 그런 강원도 관광지 중 하나였던 남이섬이 겨울연가 드라마 1편으로 그야말로 대박이 났었는데 2015년 인터넷발 루머가 남이섬의 이미지에 큰 악재가 되었다. 친일파가 친일 행각 및 수탈로 마련한 자금으로 남이섬을 구입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고 그 돈으로 후손은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주식회사남이섬은 한 언론사를 상대로 친일 문구를 빼라는 소송을 걸기에 이르렀는데 결과는 원고 승소하여 공식적으로 친일 행각과는 관련이 없음을 법적으로 확인했다. 이유인즉슨 민영휘가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었고 친일파로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손자인 민병도가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남이섬 자체는 1965년에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였던 민병도가 퇴직금 등을 모아 사적으로 구입한 섬을 개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지, 남이섬을 증여 혹은 상속받지 않았기에 친일 행적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판결이다. 구입 당시의 금액 자체도 2018년 기준 약 6억원으로 25년간 금융업에 종사한 민병도가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이었으므로 자금의 출처도 확인되었으며 민씨 후손들이 미국 LA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모두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민영휘의 후손들에 의해 운영되는 휘문고등학교인만큼, 휘문 중고교에서는 기울어가는 나라 속에서 국력을 양성하고자 학교를 세운 애국자마냥 포장되어 있으며 동상이 세워져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가히 조병갑 급으로 만악의 근원인 그의 실체를 안다면 마냥 웃어넘길 수 없는 일. 그러나 휘문중고교 내의 학생들도 민영휘의 악행을 모르지 않으며 교내 역사 선생님들 조차 민영휘의 친일 행각에 대한 언급을 딱히 꺼리지 않는다.
- 2022년 3월 31일 YTN #보도에 의하면 민영휘 가옥은 등록문화재가 되었는데, 시민단체가 "하다못해 친일파 사적이란 것만이라도 안내판에 적어라"고 요구한 것조차 관할 자치단체가 거부했다고 한다.
- 민영휘에 탄핵을 주장한 지석영의 종손이 초대 대통령 주치의인데, 그 후임이 민영휘의 증손이다.
5. 둘러보기[편집]
[1] 위안스카이가 당시 청나라에 보낸 보고서에 "민영준(민영휘)은 탐욕스럽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XX"라고 디스하며 비웃었다. 오죽했으면 조선에 내정 간섭을 일삼던 위안스카이조차 혀를 내둘렀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2] "민영준은 원병을 불러들이게 하고는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이었다."[3] 풍문여고 설립자라고 하며, 참고로 대식, 천식, 규식 모두 그녀의 소생이라고 한다.[4] 양자이면서 적자로, 사실 민영휘의 정실인 평산 신씨의 소생은 연안 이씨 이유익에게 시집가서 민영휘의 외손자 2명을 낳은 딸 민윤식(閔潤植) 하나밖에 없었다.[5] 1962~. 휘문의숙 이사장 역임[6] 1915~1980. 前 풍문학원 이사장.[7] 1943~. 남이섬 회장[8] 1928~2021.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 서울대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주임교수, 대한내과학회 회장,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원로회원, 아내는 이병도의 둘째딸.[9] 1918~1986. 강원도 춘천시 동면 장학리에 있는 건축물 春川閔聖基家屋의 존재가 민영휘의 묘소 관리를 위한 묘막이라는 것과 돌림자를 고려하면 증손자대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10] 1933~2015. 민덕기의 아들로 민덕기와 민경현은 풍문여자고등학교(풍문고등학교) 이사장직을 차례대로 역임하였다.[11] 1958~. 민헌기의 아들로 LG하우시스 대표를 역임하였다.[12] 1961~. 민헌기의 아들이자 민경집의 동생으로 3초의마법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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