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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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5대 정무원총리
김일[1]
金一 | Kim Il
본명박덕산
출생1910년 3월 20일
사망1984년 3월 9일 (향년 73세)
국적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직업관료, 정치가
주요경력제3~6대 부총리
(1954년 ~ 1962년)
내각 부수상 겸 농업상
(1954년 ~ 1957년)
제5대 정무원총리
(1972년 12월 28일 - 1976년 4월 29일)
제2~4대 부주석
(1976년 4월 29일 ~ 1984년 3월 9일)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의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소련의 군인, 북한의 군인,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함경북도 출신으로 김일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광복 후 귀국해서 1945년 11월에 북조선공산당 평북 당비서, 1946년 4월에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등을 지냈고, 1946년 9월에는 제1사단 문화부사단장이 되었다. 1948년 9월 정부가 수립되자 민족보위성 문화부상(☆)[2]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사망시까지 계속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 전태룡, 최용진, 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최현,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6.25 전쟁 당시 민족보위성 문화부상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으나, 1950년 12월 패배주의적 언동[3]을 했다는 이유로 좌천되었다.[4]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좌천 이후에는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평안남도 당위원장을 지냈으며 이후 김일성의 전폭적인 신임 덕분에 1953년 6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당 군사위원회 위원 등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다시 복귀했다.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파가 대거 숙청당하자 195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 겸 농업상에 선임되었고,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전후 복구 3개년 계획에서 공업생산을 대폭 늘리는 수정을 했다가 1955년 대기근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과 함께 일시적으로 숙청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57년 시점에서는 다시 복귀하여 내각 수상 후보에 오르는 등 다시 거물이 되었다. 1958년 9월 7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김광협,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9년 1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제1부수상이 되어 김일성, 최용건에 이은 서열 3위에 오르면서 각종 직책들을 역임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장,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장,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어 김일성이 주석, 최용건이 제1부주석이 되면서 김일은 정무원 총리에 선출되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74년에 병환이 생겨서 수술을 받게 생겼는데 이때 김정일이 치료대책을 지휘했으며 수술실까지 들어가서 독려했다고 한다. 의료 전문가도 아닌 김정일이 수술실에 입회한들 큰 도움은 안되었겠지만 김정일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혁명 1세대 원로들을 잘 챙긴다는 인상을 심어주는데는 성공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을,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고 1976년 4월 30일, 박성철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면서 제1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대남관계에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198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에 김일성, 김정일, 오진우, 리종옥과 함께 5인의 한 명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4년 3월 9일, 20시 2분에 만 73세를 일기로[5] 숙환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가장 충실한 혁명전사, 가장 친근하고 훌륭한 혁명전우, 혁명동지이며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이다. 김일동지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혁명투쟁에 한생을 바쳐싸워온 견결한 공산주의혁명투사이며 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과 당과 국가 건설, 새 사회 건설에서 불멸의 공적을 쌓은 우리 당과 국가의 저명한 활동가이다. (...) 김일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로 하여, 당과 혁명 앞에 쌓아올린 고귀한 업적으로 하여, 확고한 혁명적원칙성과 불굴의 투쟁정신, 고결하고 소박한 공산주의적품성으로 하여 언제나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김일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로동계급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투쟁한 견결한 공산주의혁명가의 빛나는 한생이였으며 그가 발휘한 당과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높은 혁명성, 당성, 로동계급성, 인민성은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모범으로 되여왔다. 지금 전체당원들과 인민들은 당과 국가의 탁월한 활동가를 잃은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다. 김일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가슴아픈 큰 손실로 된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아낌없이 퍼부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동생은 부주석, 정무원총리, 내각 부수상, 외무상, 인민봉사위원장을 지낸 박성철이라는 설이 있다.
  • 아들 박용석은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을 역임했고 2007년에 사망했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0년작 KBS-TV 100분 드라마 《붉은 왕조》에선 배우 이일웅이 연기했는데, 1982년작 《지금 평양에선》과 1984년작 6.25 연속기획 《함정》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90년작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배우 김해권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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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 직후 김일성이 '오직 나밖에 모른다'는 뜻으로 하사했다고 한다.[2] 민족보위성 부상은 대한민국으로 친다면 국방부 차관 정도 되는 직책이다[3] 그래도 전쟁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공군이 미합중국 공군에게 얻어 터지고 난 이후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체감한 상황에서 '현대전에서 비행기 없이는 싸우지 못한다' 라고 주장한, 나름 합리적인 발언이었다. [4] 6.25전쟁 당시에는 계파를 막론하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좌천당한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연안파의 김무정과 전우 등도 그렇고, 소련파의 리청송, 심지어 김일성의 최측근이라는 빨치산파 역시 이때만 해도 최광, 림춘추, 김광협 등이 좌천되었다. 김일의 경우에는 연안파인 김무정의 숙청에 공정성을 실어주기 위해 덤터기로 좌천된 경우였다. 물론 덤터기인 만큼 전쟁이 끝나고 승승장구한다.[5] 북한에서 아직 동양식 나이를 쓰던 시점이라서 부고에는 75세로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