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호/선수 경력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강민호

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2.1. 포철공고 시절
3.1. ~2005 시즌
3.2. 2006~2008 시즌
3.3. 2009 시즌
3.4. 2010 시즌
3.7.1. 1차 FA
3.11.1. 2차 FA
6. 수상
7.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1985년생 야구선수 강민호의 선수 경력을 담은 문서다.


2. 아마추어 시절[편집]


제주 신광초에 다니고 있을 무렵, 세 곳의 제주도 초등학교 야구부가 경기가 있을 때마다 4, 5, 6학년 학생들이 시합을 찾아가 응원을 했다. 야구부가 아닌 일반 학생의 신분으로 응원을 하던 중 포수 장비를 착용하고 야수들을 진두지휘하는 포수의 모습을 보고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계기로 야구 선수의 길을 그것도 포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2.1. 포철공고 시절[편집]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으로 2004년 신인 드래프트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고교야구 시절 수비형 포수로 데려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당시 공수 둘다 가능성이 높게 평가 받은 포수였다. 당시 포항제철고등학교의 경우 유혜정권혁이 있던 시절 불꽃을 태운후 이 둘이 졸업하고 나서 최약체 팀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는데 이때 포항제철고등학교를 공수 양면으로 이끈 선수가 강민호였다. 당시 고교야구 포수중에서 강민호, 박노민[1]이 정상급 포수 투톱으로 평가 받고 있었는데 강민호는 2학년때 고교 정상급 포수로 인정 받았고 3학년때는 고교야구 포수 랭킹 1위로 평가를 받으며 박노민을 제치고 청소년 야구 대표팀의 주전 포수로 낙점되었다.[2]

3순위 강민호 (전체17번) 185-84 포철공고 포수 우/우

올 랭킹 1위의 포수. 지난해에는 팀 전력이 약해 빛을 보지 못했으나 올해는 청룡기, 무등기, 황금사자기에 출전해 기량을 선보였다. 어깨가 강해 앉아서도 2루 송구가 가능하고 팀의 리더로서 공수를 잘 조율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타격에서의 강미가 다소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04년 아마야구사랑 스카우팅 리포트 중.


전국대회 성적은 변변치 않았지만 재능 하나만으로 200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포수중 경성대 이정식에 이어 2순위로 지명된 선수라는 사실이 강민호의 공수 잠재성을 증명한다. 사실 이정식이 먼저 지명된 이유는 지명팀 삼성 라이온즈진갑용이라는 고정 붙박이가 있는 상황에서 백업용으로 써먹을만한 즉시 전력감을 원했기 때문이지, 잠재력 자체는 강민호가 더 높다고 평가받았다. 그 잠재력이 삼성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차이가 난 게 문제였을 뿐. 참고로 모의지명에서는 포수들 중에서 강민호-이정식-박노민 순으로 지명되었고, 빠따하나는 그해 고교야구 원탑 평가를 받던 최진행보다도 순번이 높았다.


3.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파일:160729-KT전-45-강민호 역전 홈런KCH12436.jpg

롯데 자이언츠 No.47
강민호(姜珉鎬 / Kang Min-ho)

▲ 강민호 롯데 시절 등장곡 & 응원가

2004년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 3라운드 전체 17번으로 롯데에 입단, 2017년 FA때 4년 총액 80억+10억원을 받고 삼성으로 이적할 때까지 롯데에서 뛰었으며 롯데 자이언츠 최다 경기 출장의 기록을 갖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에 있을 당시 최고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국가대표 포수 최다 차출인 8회로 국가대표 포수로 이름을 떨쳤다. 이대호의 해외진출 이후 강민호 본인이 삼성에 이적하기 전까지 어느 야구팬에게 강민호하면 롯데, 롯데하면 강민호라는 인식이 있을만큼 부산 출신이 아니지만 부산의 아이돌이자 롯데 자이언츠의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대구에서 이승엽이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 안내 방송에 나오듯, 부산 도시철도 3호선 사직역 안내 방송은 강민호의 몫이었다.

팬들에게 인기가 좋았으며 젊은 나이부터 Rivers of Babylon을 개사한 '롯데의 강민호~ 롯데의 강민호~ 오오오오~ 오오오오~' 라는 전용 응원가를 보유했다.[3]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한명이었다.[4]

[5]

데뷔 초에는 타격은 나름대로 쓸 만하다고 평가되었으나 수비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가끔씩 도루 잡는답시고 2루로 던지다 중견수까지 날아가는 등 희한한 광경을 자주 연출하곤 했으니... 시즌 초반에는 괜찮다가도 시즌이 진행되면서 체력적인 문제인지 블로킹에서 실책이 특히 심해져 공을 빠뜨리거나 놓치는 일이 눈에 띄기도 했고, 거기에 단순한 볼배합으로 맨날 까이기도 했다. 또한 어린 나이에 주전을 맡아서 그런지 분위기에 잘 휩쓸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각성된 이후엔, 젊고 공격력이 뛰어난 20대 포수라는 특징으로 강민호를 최고의 인기 선수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반대로 위와 언급된 것과 같은 정신줄 놓은 플레이들 또한 종종 보여주기에 까이는 정도도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갈매기 마당에서. 오죽하면 박세웅-장성우 트레이드가 터진 2015 시즌 당시 강민호가 커리어 하이 급으로 성적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감독 이종운 보고 장성우 쓰라는 사람이 있었을 지경이었다.

타격 부분에서 타율, 출루율, 장타율, 홈런, 타점 등 공격 전 부문에서 매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왔으며[6] 2008년부턴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차출되고 커리어 최초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게 되면서 리그 정상급의 포수가 되었다.

그러나 2013년, 2014년에는 공격력에서 상당한 슬럼프를 겪었다. 뇌진탕 부상 후유증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대신 그동안 약점으로 불리었던 수비 측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2014 시즌에 죽도록 욕을 먹고 타격폼을 수정하고 나서 2015시즌부터는 공격력이 살아나다 못해 역대급 공격형 포수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게 된다.

3.1. ~2005 시즌[편집]


프로입단 첫해인 2004년엔 겨우 3경기만 출전하였다. 이 때만 해도 지금처럼 성장할 줄 몰랐던 사람이 대다수였다.

파일:Mr9G9L6.jpg
강민호의 신인 시절. 등번호는 입단 첫해였던 2004년에 40번, 2005년부터 47번을 달았다.[7]
오른쪽 선수는 1년 선배인 김만윤.[8][9]

강민호가 주전으로 성장하기 까지는 운+노력이 뒷받침 되었다. 2004 시즌이 끝나고, 주전 포수였던 최기문이 병역 문제로 시즌을 날려먹었고, 재검후 면제를 받고 돌아왔지만 2005년 스프링캠프를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양상문이 눈을 돌린 것이 신인 포수 강민호였던것. 최기문은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풀타임을 소화할 능력이 되지 못하게 되었기에, 양상문 당시 롯데 감독은 신인급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며 경기 경험을 쌓게 했다. 롯데가 손민한 등 노련한 투수가 등판시에는 포수 강민호를, 장원준 같은 신인급 투수를 등판했을 때 최기문을 포수로 내보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 어쨌든 사실상의 데뷔 시즌을 100경기 넘게 출전하면서 경험치를 쌓았다.

3.2. 2006~2008 시즌[편집]



그러다 전년도의 부진을 만회하려던 최기문이 2006년 스프링캠프때 의욕을 앞세워 훈련하던 도중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시즌 아웃이 되었고, 강병철 당시 감독은 강민호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이 시즌 포수로서는 역대 3번째로 전 경기 출전의 위업을 일궈냈다. 포수로서 아직 설익은 기량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플레이하는 모습과, 방망이에서도 .251의 타율과 9홈런 53타점으로 역대급 투고타저 시즌임을 감안하면 꽤나 쏠쏠한 모습을 보여줘 롯데팬들의 호감을 샀다. 사실상 강민호의 야구인생을 통틀어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해.

2007년에도 전해와 마찬가지로 한 경기도 빠지지않고 계속 선발 출전을 이어갔고 '이러다 2년 연속으로 전 경기에 출전하는 포수가 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결국 강병철 감독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끊기 위해 한 경기를 결장시켜 전 경기에서 딱 한 경기 모자란 125경기에 출전했다.이 시즌 이대호와 함께 두 자릿수 홈런(16개)를 쳤다. 2008년에는 거의 3할에 육박하는 타율과 20개 가까이 홈런을 쳐 더욱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포수로서의 재능보다, 타자로서의 재능이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팬들의 반응이 있었다.

파일:Oy0lZw4.jpg
누... 누구? 김현수,민병헌 닮은것 기분탓?

2006년엔 포수로서 전 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만들었고, 2007년 연속경기 출장 기록을 끊는 것을 즐기는 강병철 감독의 배려(?)로 기록은 중단되었지만 딱 한 경기가 모자란 125경기 출전. 하지만 포수로서의 연속경기 출장 기록은 체력을 무한정 잡아먹는 일이기에, 06시즌에 그만큼 롯데에 포수가 부족했다는 걸 말해준 사례. 최기문의 부상으로 대신 나올 포수가 없었을 정도니... 이러한 점은 2008년에도 4경기만 결장한 122경기를 소화하고 포수로 유일하게 수비 1000이닝을 넘겨 내외적으로 가장 체력을 요하는 포지션인 포수인만큼 혹사 논란이 있었다.

사실 08시즌부터는 공격면에서는 그해 최고의 포수였지만, 수비면에서 뭔가 좀 불안한 모습을 보여, 1루수지명타자 전향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수비 문제는 이원석이 홈런 치고도 두산 베어스 벤치에서는 당연한 거라고 칭찬도 안 해줬다 할 수준. 항상 똑같아 팬들조차 순서를 외우는 국민 볼배합으로 롯데 팬들의 속을 이리저리 긁은 적도 있었다.[10]

그리고 이걸 부채질한 것이 이성득 KNN 해설위원이었다. 이 때문에 이성득과 연이 깊은 갈매기 마당, 일명 갈마를 중심으로 장성우 주전 포수론이 크게 힘을 얻기 시작했다. 반면 갈마에 학을 뗀 다른 야구팬들이 강민호에 대한 쉴드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하기도 했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나 카림 가르시아의 경우와 완벽하게 같은 양상. 앞서 언급한 선수들이나 롯데의 성적이 괜찮게 나오면 갈마가 밀리고 아니면 반대 양상으로 흐른다. 사실 위기 순간에 직구를, 특히 몸쪽으로 빠른 직구를 자주 요구하기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 볼 때 문제가 좀 있다. 덕분에 커브볼 위주로 승부하는 롯데 팀 안의 최향남, 염종석 같은 노장투수들 하고는 궁합이 매우 나쁘다. 하지만 가끔 이런 장면도 나온다.# 어쨌든, 2008시즌은 타율 0.292, 홈런 19, 타점 82, OPS 0.850으로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여, KBO 포수 중에서는 가장 좋은 타격 성적을 올려 KBO 골든글러브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김경문호에 발탁, 2008 베이징 올림픽국가대표에 참가했다.


3.3. 2009 시즌[편집]


2009년 시즌 이후로는 포수 리드는 답이 없고 기본적인 포구나 블로킹, 미트질도 전혀 발전이 없으며 열심히 뛰지도 않는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열심히 까였다. 실제로 강민호가 나가고 최기문이 들어왔을 때에는 점수를 거의 내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롯데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하락세였기 때문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포수 방어율이라는 것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다. 본인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홈런을 맞고도 약한 리액션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뭔 일이 생기면 일단 강민호부터 깐다. 이렇게 까여도 꾸준히 나온 것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 및 프런트의 총애를 받기도 하고, 어린 포수를 키우는 건 구단 차원의 의지이기 때문. 노련하지만 체력적인 문제 때문에 30대 후반의 최기문 선수를 풀타임 주전으로 낼 수도 없고, 초고교급 포수 유망주인 장성우도 아직은 경험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 강민호가 정말로 장기적인 슬럼프에 빠지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강민호가 주전 마스크를 쓸 것이다. 타격이 포수 3명중 가장 뛰어나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시즌 중 계속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고, 미국 LA까지 가서 검진을 받은 결과 팔꿈치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어 재활 치료를 하고 다시 복귀했지만, 얼마 못 가 다시 통증이 생겨 시즌이 종결되기 전인 2009년 9월 8일부로 시즌 아웃되었다. 수술을 받을 경우 2010년 후반기 들어서야 돌아올 수 있다는 예상과 함께, 그를 대신해 마스크를 쓴 장성우가 뛰어난 활약을 펼쳐 팀은 잘 나가도 본인은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미묘한 입장이다. 이것은 백업요원 2명이 멀쩡히 버티고 있음에도 몸이 성치않은 강민호를 계속 기용한 로이스터 감독의 잘못이 매우 크다고 밖에 볼 수 없다. 09시즌은 부상때문에 83게임(301타석)에만 출장했지만, 타율 0.260, 홈런 9, 타점 30, OPS 0.758의 성적을 올렸다.

3.4. 2010 시즌[편집]



파일:강민호/2010.jpg


부상 회복 후 지나치게 일찍 출장시켰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5월 들어서 타격 포텐셜 대폭발. 최근 몇년간 KBO 주전 포수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공격력을 소유하고 있고, 거의 웬만한 1루수나 지명타자 뺨치는 타격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수비 능력(블로킹 능력, 포구 능력)에 대해서는 09시즌과 비교해 좀 떨어진 듯하다. 더불어 도루 저지도 09시즌의 부상때문인지 꽤 악화된 편으로 경기를 보다보면 도루 저지를 한답시고 던지는 공이 베이스 커버 들어온 유격수나 2루수가 점프해야 잡을수 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덕분에 팀이 연패에 빠질때에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갈매기 마당등의 게시판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까이고 있는 중. 1루수, 지명타자 전향설은 여전하다.(문제는 수비 안되는 타자가 롯데에 너무 많다는 거지만.) 단, 볼 배합에 대해서는 09 시즌보다 좀 더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 팀별 타자들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듯. 하지만 감독이 좀 심할 정도로 몸쪽 승부를 주문하는데다 팀의 투수들이 선발을 제외하고는 거의 막장 상황인지라 별 효과가 없다는 것. 실제로 롯데와의 경기에서 결승타를 친 타자들은 몸쪽을 예상했다고 하는 기사들이 종종 나오는걸 보면 아직은 좀더 보완이 필요한 듯.

문제는 10시즌 롯데 투수진이 단체로 양상문 투수코치의 효과에 의해 전체적으로 배팅볼 투수급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효과를 못 보고 있는 중.

팀내에서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고있는지 코칭스태프나 선수들이 발벗고 나서 강민호를 지지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정훈장원준 모두 호투뒤 강민호를 칭찬했고 전혀 상관없는 포지션인 홍성흔도 인터뷰에서 강민호의 볼배합 문제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다. 세부적인 볼배합이나 포수 리드는 포수에게 맡기던 롯데 코칭 스태프도 이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양.

스토브리그 때, 장성우와 김태군이 함께 인터뷰를 한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장성우는 롯데는 사인을 100% 포수가 낸다면서, 투수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기본적인 데이터 수집은 구단에서 하지만 현장에서의 포수 리드는 포수가 맡는 모양. 또 강민호가 못할때마다 카메라가 장성우를 비춰준다.

4월말 SK전에서 김성근 감독이 "요즘 연구를 많이 하는 모양이다. 포수 리드가 계속 변경된다. 좋아졌다."라고 강민호를 칭찬했다.

5월 들어와서는 0.347의 타율과 더불어 6홈런, 15타점을 쳐내며 홈런을 좋아하는 로이스터 감독을 기쁘게 하고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작년에 수술한 부위에 이상이 생겨서 5월 21일 결장을 했지만 다시 출전중.# 생각해보면 예정된 결과인게 수술 할때만 해도 10시즌 후반에 나올 수 있다고 했던 선수가 정규시즌 개막과 동시에 계속 주전으로 출전을 했으니 당연한 것.

6월 1일 LG전에서 번트 타구를 3루수에게 송구한다는게 좌익수에게 송구해버리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러버려 폭풍같이 까이며 로이스터 감독과 더불어 역적이 돼버렸다.#

6월 5일 삼성전에서 만루홈런 1개 포함 4타수 2안타 4타점으로 활약였다. 10시즌에는 장원준 선발때 자신의 타점 중 거의 절반(33점중 16점)을 올렸다. 샤다라빠는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 '내만봐라'라는 만화를 남겼다. 5월 이후로 타격 페이스는 매우 좋아서 5~6월 동안 10홈런, 32타점을 기록했다.

그런데 작년의 팔꿈치 부상이 다시 도졌는지 6월 15일 삼성전에서 교체됐고 그 다음날인 16일 경기에도 결장했다.# 자칫 잘못하면 09시즌 처럼 또 시즌아웃이 될수도 있는 상황. 일단 미국에서 수술을 집도한 박사는 괜찮다고 한다.# 일단 6월 19일부터 다시 출장하고 있으나 부상이 완치가 된 것이 아닌지 27일 SK전에서 4회초에 교체 되었다.

8월 주초 경기에는 팔꿈치 통증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중간에 부상으로 휴식을 한 탓인지 8월 들어 출장한 경기에서는 실망스러운 모습들이 나오고 있다. 8월 7일 경기에서는 팀도루 꼴찌인 한화에게 6개의 도루를 폭풍같이 헌납하며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 대차게 까였다. 이 경기전까지 한화의 팀 도루는 75개로 성공율도 61%였다. 게다가 이날 도루의 3개는 2루에서 3루로 가는 도루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한화 타자들이 대놓고 뛰었다. 다음날인 8일에는 올시즌 도루가 하나도 없는 장성호마저 뛰었다. 물론 이때는 다행히도 잡았다.

8월 8일 경기에서는 투수 교체를 하러 올라온 로이스터 감독이 강민호를 향해 화를 내는 장면까지 잡혔다. 친목질 관련으로 아래에도 설명 되어 있지만 경기를 이긴 후 로이스터 감독과 친목질을 하는 유일한 선수가 강민호라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8월 15일 KIA전에서도 김선빈에게 1루에서 2루 도루를 허용하고 다시 2루에서 3루 도루를 막을려고 송구한 게 악송구가 되는 바람에 실점.

2010시즌 정규시즌 기록은 타율 0.305, 홈런 23, 타점 72, OPS 0.901로 롯데의 막강 클린업의 한 축을 도맡았다.

10월 5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팀이 3:9로 지던 6회말 2사 1, 3루 상황에서 1루주자 용덕한 도루를 저지하기 위해 2루로 송구를 했으나 2루에 야수가 없었다! 당연히 공은 중견수 쪽으로 데굴데굴 굴렀고 3루 주자는 여유 있게 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이는 포수 에러로 기록되었고 또 한 번 강민호는 폭풍같이 까였다. 이 실책을 본 하일성 해설위원의 이게 뭔가요!는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실수인지를 말해준다. 물론 베이스커버를 하지 않은 유격수 황재균이나 2루수 조성환도 까일 여지는 충분했지만, 야수를 향해 던졌거나, 최소한 던지지 않았다면 3루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일은 없었다.
이날 강민호는 선발 포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2안타 1홈런 1타점 1득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4:11로 대패하였다.

강민호는 2010년 준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포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18타수 5안타 1홈런 1볼넷 2사구(死球) 4타점 2득점, 타율 .278, 장타율 .444, 출루율 .381를 기록했고, 팀은 2연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3.5. 2011 시즌[편집]




파일:20210207_181243.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2012 시즌[편집]




파일:9a06129e2b286ed99d48c12c61e3cdb9.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2013 시즌[편집]




파일:13강민호.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년 연속으로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시즌이다.

3.7.1. 1차 FA[편집]


시즌이 끝난후 FA에서 롯데가 80억원+알파(α)를 제시한 것으로 들린다.. 80억원+알파(α)라는건 최저가 80억이고 여기서 더 올라갈 여지가 충분하다는 이야기.


파일:강민호FA1차.jpg

2013년 11월 13일, 계약금 35억에 연봉 10억 4년 무옵션으로 총액 75억에 계약하면서, 이전 최고 금액인 심정수의 4년 60억을 경신하게 되었다.[11][12] 협상 초반 80억 이상의 이야기도 나왔다는 이야기를 감안하면 의외로 적정가에 잡았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배재후 롯데 단장에 따르면, 계약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11일 오후 2시와 6시에 두 번 만나면서 "역대 최고금액에 인지도와 인기에 대한 부분을 고려해 20%를 얹어주겠다"라고 제안하자 강민호가 "정말입니까, 그러면 단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했다고. 이 때 사실상 결론은 났지만 13일에 최하진 사장이 내려오기로 되어있어 그 날 계약을 하기로 했고, 13일 당일에는 원래 72~73억원을 생각했는데 75억으로 올려줬다고 한다. 롯데 역사에 길이 남을 화기애애한 FA가 된듯하다.

일단 옵션없이 75억이라지만, 언론에선 80억원+알파(α)얘기 때문에 발표된 금액에서 5억+@가 더 있지 않겠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13] 짠돌이 이미지를 벗고 시장과열을 부추긴다는 뒷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한 롯데 프런트의 절묘한 금액 맞추기라는 설. 물론 언론쪽에서 지들이 예측한 금액이랑 다르니까 다시 뒤에 옵션이 더 있었다고 카더라설을 푼다는 얘기도 있다.

롯데 프런트는 FA 계약을 앞두고 명언을 하나 만들어냈다. "다른 팀은 강민호 구경도 못할 것", 줄여서 강구못. # 롯데 프런트가 이번 계약에 얼마나 자신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이를 두고 "2013 한국프로야구는 번저강으로 시작해서 강구못으로 끝났다는 드립도 나왔다."

강민호가 FA 계약에 도장을 찍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이언츠샵에서는 강민호 관련 용품의 대대적인 할인 이벤트를 열었다. 그 이름하여 "롯데의 강민호 FA 계약기념 특가전". 강민호 아디다스 유니폼/모자를 최대 35%까지 할인해줬는데 아디다스 유니폼은 온라인몰에서 이벤트 시작 2시간도 안되어 모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나마 2시간도 105 사이즈 3장이 오래 남아있어서 걸린 시간이고, 그 외의 사이즈들은 1시간만에 매진됐다.

가장 처음 FA를 체결한 선수이고, 역대 최고가 금액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거품론이 마구마구 일어났다. 특히 박한이와 비교해서. 그러나 뒤를 따른 FA들의 금액이 무시무시하게 치솟아올라가면서 재평가 여론이 일고 있는 중. 한숨돌린 롯빠들은 진정한 꼴빠라며 강민호를 찬양하고 있다. 이게 농담이 아닌 것이, 강민호가 시장에 나왔다면 삼성 라이온즈마저 FA시장으로 불러들였을테고, 이에 따라 100억을 찍을수도 있었다는 추측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대형KIA 타이거즈와 4년 24억에 도장을 찍으며 대주자 따위가 24억이면 차라리 국대급 포수에게 75억 주는 것이 낫다는 여론이 점점 더 강하게 퍼지는 중이다. 특히 강민호가 롯데에 남기 위해 지인들과 싸워가면서 계약했다는 기사까지 떠서 롯데 팬들에게 강민호는 거의 삼성의 박한이급 성자로 떠받들여지는 중. #

FA 체결 이후 인터뷰마다 팬들을 언급하였는데 하나 같이 감동적이다. # 롯데라는 팀과 그 팬들을 사랑하고 또 위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데, 특히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린 진솔한 글이 많은 팬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화제였는데, 정확한 맞춤법으로 다른 사람이 대리로 써준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본인은 나중에 두 문장 정도 네이버 검색을 참조하였다고 해명(?)하였다. # 거인사생 특집 강민호 인터뷰도 매우 감동적이다. 참고로 이때 모 사이트에서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최훈카툰에서는 거인이 외양간을 고친 뒤 두번 다시 소를 잃지않겠다고 한다.

여담으로 2014년 2월 6일 애리조나 스프링 캠프 훈련 중 류현진이 방문하여 그의 FA 계약을 축하해주자 강민호는 너스레를 떨며 '내 FA는 네 세금으로 나가는 돈과 비슷하다.' 라는 식으로 말했다.


3.8. 2014 시즌[편집]



파일:강민호2014.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강먹튀, 강극혐 등으로 불린 최악의 커리어로우 시즌이다.

3.9. 2015 시즌[편집]



파일:Minho_2015.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작년 부진을 딛고 화려한 부활에 성공한, 말 할 필요가 없는 강민호의 커리어하이 시즌으로 평가받는다. 오랜만에 시즌 타율 3할을 넘기기도 했다.

3.10. 2016 시즌[편집]



파일:강민호/2016.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작년의 호성적과 더불어 덕아웃의 신뢰로 주장을 맡게 되었다. 또한 작년에 이은 호성적을 보이며 리그 최고의 포수다운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한 경기 차이로 골든글러브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 시즌이다.


3.11. 2017 시즌[편집]




파일:강민호/2017.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7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통산 200홈런을 기록한 롯데에서의 마지막 시즌. 지난해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모자람 없는 활약을 과시했으나,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은 아쉬움을 남겼다.

3.11.1. 2차 FA[편집]


1차 FA 때와는 달리 2차 FA 때는 조찬희를 에이전트로 고용하여 협상을 진행했다. 첫 FA때와는 다르게 협상이 늦어지긴 했지만 롯데 팬뿐만 아니라 모든 팀의 팬들이 언제 협상이 종료되느냐 하는 궁금증만 갖고 있는 상태였는데......


파일:삼민호입단1.jpg


파일:삼민호입단.jpg



2017년 11월 21일, 롯데와의 협상 결렬 기사가 뜨자마자 4년 80억원(계약금 40억, 연봉 총액 40억)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하며 고향팀[14]으로 이적했다.# 협상이 너무나도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던데다 롯데 선수들 중에서도 특히 팀에 대한 애정이 넘쳤던 강민호였기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적[15]이었으며, 게다가 그 행선지가 10년 넘게 삼민호를 부르짖던 삼성이라는 점에서 특히 더 충격적이었던 이적이었다. 역대 KBO 리그 FA 사상 최고의 충격적인 이적이라 할만하다. 2018년 다른 선수들의 FA는 강민호의 이적에 묻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삼성 라이온즈로서는 2017년에 방출된 최경철과 주로 2군에서 있던 나원탁을 제외하더라도 기존의 주전포수 이지영에 백업으로 권정웅, 김민수 3명의 포수를 1군에서 기용했었는데, 군에서 제대하는 김응민과 FA로 이적해온 강민호의 합류로 강민호-이지영 체제에 백업만 네명이 넘어가는 포수 뎁스를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롯데와 삼성이 같은 금액인 80억원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으로 이적하자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의혹이 불거졌다. '이면 계약설', '계약 축소 발표설', '추가 옵션설' 등이 난무했다. 또한 추가 금액 없이 같은 금액으로 이적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전제로 롯데 프런트의 협상태도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강민호는 이면계약설, 추가옵션설 등을 부인하면서 삼성으로의 이적은 전적으로 감정적인 문제였다고 밝혔다.

기자: 같은 금액이면 왜 삼성을 택했나.

강민호: 돈 문제라면 롯데에 남을 수 있었다. 자세한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삼성으로 마음이 흔들린 계기가 분명히 있었다. 보상금까지 내주며 나를 데려갈 팀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가운데 적극적인 삼성에 마음이 흔들렸다.

기자: 팬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강민호: 제가 롯데를 떠나는 것을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삼성에서 나라는 선수를 진심으로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 있었다. 롯데팬들은 내게 정말 서운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역시 제2의 야구 인생을 펼칠 수 있게 힘겨운 결정을 했다.

[직격 인터뷰] 강민호 "80억원, 절대 축소 발표 아닙니다"


강민호: 돈보다 더 중요한 걸 찾고 싶었는데, 그 부분에서 아니었던 거죠. 삼성에서 저를 필요로 한다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요.

SBS 뉴스 링크 #요약본


이와 같은 강민호 측의 잇다른 발언이 나오자 일부팬들은 '롯데의 협상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액수에도 불구하고 강민호가 이적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롯데 사정에 능통한 야구인은 롯데의 협상태도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민호가 보상금액(20~30억)을 빼더라도 다른 팀에 가겠다고 답답해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참 쓰라린 삼성 강민호, 방심한 롯데가 당했다

하루 뒤인 11월 22일에도 SBS에서 강민호의 삼성 이적은 어디까지나 롯데의 냉랭한 무관심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논조의 기사가 나왔다.

계약 발표 직후 연락이 닿은 강민호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먼저 “계약 조건은 80억 원이 맞다”고 밝힌 그는 “15년 동안 뛰었던 팀에서 변화를 준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삼성에서 저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줬다. 다가오는 그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삼성에서 저를 필요로 한다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협상을 대하는 진정성'에서 차이가 좀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드릴 수 없지만, 돈 때문에 결정한 건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FA 계약을 마친 선수는 소감에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습니다. 강민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자는 강민호가 느낀 진정성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지난달 기자와 나눈 이야기를 시작으로 FA 계약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중략

기자는 지난달 강민호를 만나 FA 계약과 관련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강민호는 “롯데에 남을 거다. 갈 곳도 없다”며 웃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4년 전과 분위기가 좀 다른 것 같다. 내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중략

삼성의 제안을 받은 강민호는 다시 롯데 구단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삼성에서 4년 80억 원을 제시했다. 마음 흔들리고 싶지 않다”며 롯데의 입장을 밝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롯데는 강민호에게 확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취재파일] FA 계약, '진정성'은 돈이 아닌 매너와 타이밍


그러나 언론의 취재 결과 롯데 구단과 강민호 사이에 감정적인 문제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보도가 나왔다.

취재 결과, 감정적 문제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첨예할 수밖에 없었던 협상의 본질 상, 마냥 매끄러울 순 없었다. 그러나 판을 깰 만큼의 갈등은 없었다. 롯데가 협상 과정에서 돈으로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삼성행’ 강민호는 왜 롯데 프랜차이즈를 포기했나?

이 기사에 따르면 강민호의 이적은 감정 문제 때문이 아니라 추가 옵션이 주원인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강민호는 삼성과 롯데가 같은 금액을 제시했지만 삼성이 적극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이적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수의 야구팬들과 야구 관계자들은 강민호가 같은 금액으로 이적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야구계에는 "계약 축소 발표설", "추가 옵션설"이 나돌았다. 강민호, 같은 몸값인데 왜? 충격받은 팬들 “계약규모 축소 발표 또는 옵션 규모 차이 날 것” - 서울 경제. 이러한 축소 발표설, 추가 옵션설은 단지 야구팬들 사이에서만 나돈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업 야구계 관계자들의 상당수도 이면 계약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야구계 복수의 관계자들도 “강민호의 삼성 입단 조건을 누가 곧이곧대로 믿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삼성행’ 강민호는 왜 롯데 프랜차이즈를 포기했나?


그러나 강민호는 축소 발표설, 추가 옵션설을 극구 부인하고 나섰다.

기자: 롯데가 제시했다고 밝힌 액수(4년 80억원)와 삼성의 발표액이 같다.

강민호: 이건 하늘에 맹세할 수 있다. 80억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80억원 계약이어도 보상금액 등을 생각하면 삼성은 나에게만 100억원 이상을 투자한 것이다. 80억 이상은 절대 받을 수 없다. 과분하다. 축소 발표가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16]

같은 80억원 강민호의 선택은 삼성 "축소 발표 아니다"


삼성 구단 역시 공식 입장을 통해 '축소계약'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발표했다. 축소 발표는 절대 아니다. 세금 대납 조건도 없다." - 삼성 라이온즈 구단

강민호 80억원 미스터리… 삼성 "축소 발표 아냐"


그러나 삼성 구단 측의 공식 입장과는 달리 삼성의 한 관계자는 80억원 이외의 추가 옵션이 있다고 실토했다.

“보장액수는 80억원이 맞다. 다만 추가 옵션이 있다.” - 삼성 구단 관계자

‘삼성행’ 강민호는 왜 롯데 프랜차이즈를 포기했나?


2018년 5월 KBS는 단독 보도로 강민호의 삼성 이적 당시 제기되었던 검은 뒷돈 거래 의혹이 사실이었다고 보도했다. KBS는 익명의 한 야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강민호의 실제 계약 액수는 90억원 ~ 92억원이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삼성 라이온즈 구단 관계자는 강민호의 실제 계약 액수는 총액 90억원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삼성 구단 관계자는 "강민호의 FA 계약 금액은 계약금 40억원, 4년 간 연봉 10억 원씩, 여기에 옵션을 포함해 최대 90억 원"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선수와의 합의에 따라 옵션 계약은 당시 비공개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단독] 프로야구 FA-외국인 계약도 ‘검은 돈’ 폭탄 증언


강민호 사건 등의 여파로 KBO는 구단과 선수 간의 FA 계약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계약과 연봉에 해당하지 않은 옵션 내용도 의무적으로 보고토록 하고, 계약과 관련된 증빙 서류 제출도 요구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하였다. 개정된 내용은 2019시즌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한편 삼성 구단은 2019년 강민호 연봉을 12억 5천만원으로 공시했다. FA 계약 발표에 따르면 강민호의 연봉은 10억원이지만, 2018시즌 강민호가 옵션(총액 10억원/4시즌) 조건을 모두 충족하였기에 2019년 연봉이 12억 5천만원으로 공시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강민호는 공수 양면에서 모두 당초 기대에 못미치는 다소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옵션 조건을 모두 달성한 것으로 볼 때, 성적과는 크게 관련 없이 부상없이 경기에 출전한다면 무난히 달성할 수 있는 옵션 조건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안일하게 주전포수를 삼성에게 헌납한 롯데는 2022년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과거 포수왕국이란 말이 무색하게 최약의 포수진을 가진 팀으로 전락해버렸다.[17]

4.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파일:미노미노.jpg

삼성 라이온즈 No.47
강민호
姜珉鎬 / Kang Min-ho


▲ 강민호 삼성 응원가
▲ 삼성 이적 후 첫 사직구장 방문한 강민호… 롯데팬들의 반응은?

4.1. 2018 시즌[편집]



파일:20201107_172918.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8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여전히 포수 치고는 준수한 성적이지만, 강민호의 이름값+몸값 및 이 해가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4.2. 2019 시즌[편집]



파일:강민호/2019.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1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삼성 라이온즈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2014년과 더불어 최악의 커리어로우 시즌. 심지어 잡담사 사건을 일으키며 큰 비판을 받았다.

4.3. 2020 시즌[편집]



파일:강민호/2020.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20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즌 초반에는 부진했지만 부상 복귀 이후 롯데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17시즌을 넘어서는 성적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2년간 극악의 먹튀였다가 예토전생+35세에 회춘이라는 대단한 면모를 보인 시즌.

또한 기록에는 나타나지는 않지만, 외국인 투수 잔혹사를 끝낸 숨은 공을 보여줬다. 외국인 투수 두명을 잘 다독이며, 한명은 삼성의 명실상부한 에이스 투수로 만들었고, 부상복귀 이후 계속해서 페이스를 찾아가지 못하던 다른 한명의 부활에 큰 역할을 했다.

4.4. 2021 시즌[편집]




파일:2021강민호.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2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FA로이드가 제대로 터진 명실상부한 삼성 이적 후 커리어 하이 시즌.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성공하며 통산 여섯 번째이자 4년 만에 골든글러브를 탈환했다. 2017년 골든글러브는 롯데 시절 성적으로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실질적인 이적 후 첫 골든글러브이기도 하다.

4.4.1. 3차 FA[편집]


4년간 기록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볼넷
삼진
병살타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483
1534
416
70
0
72
183
244
138
279
55
0
.271
.340
.458
.798
삼성에서의 4년 계약을 요약하면 첫 2년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먹튀, 그러나 뒤 2년은 느닷없는 회춘으로 몸값을 어느정도 충족시켜 줬다. 2018/19년도 성적만 따로 떼놓고 성적을 계산하면 .253/.324/.433 OPS .757로 처참하며, 2020/21년 성적을 따로 떼놓고 계산하면 .289/.356/.482 OPS .838로 준수한 모습이다. 따라서 4년간 .271/.340/.458 OPS .798이라는 강민호치고는 아쉬워보이는 저 성적은 첫 2년 동안 실망스러운 성적을 내며 왕창 까먹었기 때문이다.

OPS 차이가 체감보다 크지 않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첫 시즌이던 2018년은 리그가 전체적으로 타고 성향이 강했던 데 비해 이후로는 비교적 투수들이 힘을 쓰는 리그 환경이라 보여지는 OPS차이 이상으로 타격 성적의 괴리가 크다. 리그 타격환경이 반영된 wRC+로 비교하면 앞의 2시즌은 90.2로 리그 평균 이하의 타자였다면 20년은 112.6, 21년은 123.6으로 통산성적인 115.1보다도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4년간 총 가성비(?)를 계산하면 1WAR*당 7.49억으로, 먹튀까진 아니지만 썩 만족스럽진 않았던 수준으로 정리.[18]

구단 입장에서는 영 골치 아픈 상황인데, 보통 FA 계약은 달리는 상황일때 4년 계약 기준 1~3년에 최대한 효율을 내기 위해 영입하지만, 강민호는 반대로 계약 초기에 부진하고 말기에 부활하는 삼성 구단 입장에선 여러모로 씁쓸해지는 계약이 되었다. 초기에 잘하고 말년에 뒤쳐지는 경우엔 다음 계약때 어느정도 조정하면서 금액을 낮출 수 있지만, 이 같은 경우엔 영입때 거액을 베팅했더니 다음 계약에서도 당장 내년에 에이징 커브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건만 또 베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19] 현실의 2021→2020→2018→2019 순서로 성적을 찍었으면 구단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평범한 에이징 커브였겠지만 반대가 됐으니. 그래도 긍정적으로 봐주자면 팀이 본격적인 윈나우에 들어간 시점에서 좋은 성적을 찍었으니 팀에 도움은 이쪽이 더 됐을지도...?

다만 현재 삼성 전력에서 강민호의 이탈은 큰 전력 손실로 이어지기에 삼성 입장에서도 눈물을 머금고 대우해줘야 하는 상황이다. 그나마 타격 툴은 있지만 수비가 불안한 김민수를 제1포수로 쓰는 건 위험부담이 있고, 루키 김도환은 생각보다 성장이 더딘 상황. 게다가 팀 내 1군 투수들이 모두 강민호와 배터리 짜기를 원하고 있고 외인 에이스 데이비드 뷰캐넌은 백업 포수들과 전혀 호흡이 안 맞고 있다. 당장 밑 집이 강민호를 보내고 나종덕이 내셔널리그 투수급의 타격 성적을 기록한 끝에 나균안으로 이름을 바꾼 뒤 진짜 내셔널리그급 투수가 되었고, 김준태 역시 금지어로 전락한 끝에 트레이드, 나원탁은 포수를 포기하고 이도류로 전향했고, 그나마 괜찮은 지시완안중열도 타 팀 주전에 비하면 기량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나이는 많지만 아직 포수로써 기량은 남아 있는데다 C등급이라서 강민호를 영입하려는 구단은 보상선수 없이 전년도 연봉 150%(7억 5000만원)만 부담하면 되기 때문에[20] 당장 포수가 필요한 팀이 한번은 계약을 시도해 볼수 있다는 의견도 종종 나와 이적 가능성 역시 꾸준히 제기된다. 가장 자주 거론되는 건 아직도 강민호의 공백을 제대로 메우지 못하고 있는 친정팀 롯데. 물론 이듬해에도 박동원, 유강남 등 좋은 포수 자원이 많이 풀리기 때문에 롯데 역시 여러 선택지를 열어두고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최재훈이 생각보다 빠르게 한화와 계약을 맺으면서 강민호에게는 호재로 작용할 거라는 분석이 많다. 현 시점에서의 최대 변수는 역시 친정팀 롯데가 입질할 생각이 있는지일 것이다.

그런데 12월 13일 김태군이 트레이드로 삼성에 합류하면서 삼성과 강민호의 협상에 이상기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삼성 팬들의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일단 삼성은 김태군 트레이드는 강민호 재계약과 무관하게 이전부터 추진해왔으며, 백업포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우규민 영입 때도 비슷한 언플을 해놓고 차우찬을 놓친 전적 때문에 당분간 미묘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을 전망.

게다가 12월 22일 박해민의 보상선수로 포수 김재성이 지명되면서 강민호가 삼성을 떠날 것이라는 의견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삼성은 이번에도 김재성 보상선수 지목은 강민호의 재계약 협상과는 별개라고 주장했다.

12월 23일 야구부장에 따르면 삼성이 최종오퍼를 제시한지는 꽤 되었지만 강민호가 삼성의 제시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관심을 보인 다른 구단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고 하며 그 구단은 롯데라고 한다. 하지만 보름이 넘게 취재한 결과 아직까지는 강민호에 크게 관심을 보이는 구단은 없다고 한다. 현재로선 삼성도 잔류를 자신하지는 못하지만 경쟁력있는 몸값을 제시한 만큼 삼성 잔류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파일:삼민호재계약.jpg

12월 24일 삼성과 4년 최대 36억[21]에 계약하면서 잔류를 확정지었다.# 한편 이번에도 4년 계약에 성공하면서 역대 최초로 3연속 4년짜리 FA 계약을 맺은 선수가 됐고, 아울러 3차 FA 계약 중 역대 최고액이라는 기록을 세웠다.[22]

이후 라이온즈 TV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바로 어제[23] 계약을 마무리 하였고, 옵션 위주로 조정을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친정팀 롯데와 관련된 썰들[24]과 타 팀 관련 썰들[25]은 사실상 썰 뿐인 것으로 보인다. 롯데의 경우 야구부장의 언급과는 다르게 공식적인 루트로는 제의 자체도 없었다는 후문.#따라서 원 소속팀인 삼성만 강민호에게 오퍼를 했다.

한편 새로 맺은 4년 계약이 끝났을 시점에는 이미 나이가 만 40세에 달해 4차 FA 신청 가능성은 희박하고,[26] 계약 도중 부진한다 해도 한국에서는 먹튀 처리용 연봉보조 트레이드[27]가 아직 흔하지 않음을 감안하면 삼성에서 은퇴하는 것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4차 FA가 성사된다면 최초의 4차 FA로써 상징성을 갖고 단년 계약정도가 될 듯 하다.

여담으로 잔류 계약을 성사시킨 대리인이 2차 FA 때 삼성 이적을 성사시킨 조찬희인걸로 밝혀졌다.

4.5. 2022 시즌[편집]


파일:강민호300홈런.jpg
2022년 9월 6일 대구 키움전에서 통산 300호 홈런을 달성한 후 강민호의 모습.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2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반기에는 2019 시즌보다도 더한 부진을 겪으면서[28] FA로이드가 끝나자마자 귀신같이 먹튀로 회귀하나 싶다가, 그나마 후반기의 맹활약으로 시즌 초의 험악했던 여론을 어느 정도 호의적으로 돌렸다. sWAR이 2.11로 2차 FA의 1년차와 2년차 시즌보다 높으며, 1WAR당 금액이 4.27억 원으로 충분히 돈값을 해낸 시즌이 되었다. 그리고 시즌 후 포수난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29]이 발생하며 혜자 FA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4.6. 2023 시즌[편집]


파일:2023 강민호.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202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즌 초반, 후배 포수들이 모두 부상과 트레이드로 인해 빠진 와중에도 굳건히 사자 군단의 안방을 책임지며 공격에서도 회춘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의 찬사를 받고 있고, 심지어 주루도 나아진 모습이다.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사실상 커리어하이로 나아가고 있으며, 85년생의 노장이 본인의 10년전 전성기 시절과 얼추 비슷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30] 또한, 어린 선수들이 1군에 많은 구단 특성상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로 형님 리더십을 발휘하며 팬들 사이에서의 여론 또한 이적 후 최고라고 볼 수 있다.

5.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아겜 강민호.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선수 경력/국가대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무릎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한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18시즌 부진 이후의 대회들인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 2019 WBSC 프리미어 12 등을 제외하면 굵직한 대회는 거의 다 참가했다.

6. 수상[편집]


수상 기록
2008년, 2011년~2013년, 2017년, 2021년 한국프로야구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
2015년 한국프로야구 사랑의 골든글러브
2015년 KBO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7.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sWAR은 소수 둘째 자리까지 표시한다.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sWAR
2004
롯데
3
5
.000
0
0
0
0
0
0
0
0
.000
.000
.000
-0.13
2005
104
214
.243
52
11
2
2
18
20
1
7
.341
.267
.608
0.21
2006
126
410
.251
103
20
0
9
53
40
4
34
.366
.307
.673
2.63
2007
125
413
.271
112
20
0
14
68
48
1
41
.421
.335
.756
3.32
2008
122
435
.292
127
25
1
19
(5위)
82
51
2
56
.485
.365
.850
5.37
2009
83
262
.260
68
13
0
9
30
36
0
36
.412
.346
.758
1.80
2010
117
410
.305
125
19
1
23
72
66
2
50
.524
.376
.901
5.04
2011
124
450
.289
130
25
(5위)
2
19
(5위)
66
63
4
55
.480
.366
.846
5.39
2012
119
400
.273
109
21
0
19
66
41
0
52
.468
.355
.822
5.00
2013
105
327
.235
77
13
0
11
57
48
4
71
.376
.366
.743
3.10
2014
98
310
.229
71
14
2
16
40
37
1
46
.442
.325
.767
1.68
2015
123
380
.311
118
18
1
35
(4위)
86
63
0
74
.639
(3위)
.421
1.061
5.15
2016
116
381
.323
123
26
0
20
72
65
4
76
.549
.433
(5위)
.981
5.02
2017
130
456
.285
130
22
1
22
68
62
0
56
.482
.361
.844
3.38
2018
삼성
129
427
.269
115
14
0
22
71
46
0
43
.457
.331
.788
1.99
2019
112
346
.234
81
20
0
13
45
36
0
42
.405
.315
.719
1.88
2020
119
355
.287
102
14
0
19
61
46
0
35
.487
.349
.836
3.17
2021
123
406
.291
118
22
0
18
67
55
0
49
.478
.362
.839
3.88
2022
130
396
.258
102
19
1
13
66
38
0
44
.409
.330
.739
2.32
KBO 통산
(19시즌)
2108
6783
.275
1863
336
11
303
1088
861
23
867
.461
.354
.815
60.19

[1] 공교롭게도 두 선수의 생년월일이 동일하다.[2] 당시 백업포수가 이성호(당시 광주일고, 고려대 진학 → 한화에 신고선수로 입단.)로 박노민은 포함되지 못했다.[3]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로 코믹하게 개사해 널리 알려진 노래. 근데 사실 이 노래는 성경 관련, 바빌론 강가에서 슬피 울었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2014년부터 SBI저축은행에서 바로 아래 나올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와 같이 광고 BGM으로 쓰기도 한다. '모텔에 간민호~ 모텔에 간민호~ 505호~ 505호'라고 들리기도 한다. 올림픽,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등 국가 대항전에선 전용 응원가 가사가 한국의 강민호로 바뀌기도 한다.[4] 유니폼도 강민호 유니폼이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한다.[5] 그의 인기를 보여주는 영상. 2011년 부산락페스티벌에서 강민호의 등장곡인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가 등장하자 "강민호"를 외치는 사람들.[6] 박경완과 같은 노장 포수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한다는 전제 하에 강민호가 엄청나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예를 들자면 옆 나라의 죠지마 켄지처럼.[7] 등번호 47번의 의미는 임수혁이 선수시절 날린 개인 통산 홈런 갯수에 맞춘 것이라고 한다.영상 40초부터.[8] 2004년 초 윤재국을 두산으로 보내고 현금 7000만원과 함께 영입했다. 2004년 10타수 3안타를 기록한 것 외의 1군 기록은 없으며, 최형우, 최진행 등과 함께 경찰청 야구단 창단 멤버이기도 하다. 군 제대 후인 2008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KIA 스카우트와 롯데 전력분석원으로 일하다가 2016년 현재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아시아 지역스카우트를 맡고 있다.[9] 김주찬을 닮아서 김주찬이 아니냐는 글도 있었다.[10] 이런 반응은 08년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또 다른 초고교급 포수 유망주 장성우 때문이었는데 포수를 1차 지명할 정도라면 구단에서 얼마나 장성우를 기대하고 있는지 보여주어서 팬들도 장성우가 개쩌는 유망주 인가보다!하고 생각했다.[11] 심정수의 60억은 옵션 포함으로 52억에 플러스옵션8억, 마이너스옵션8억의 형태.심정수의 실수령액이 50억원 가량이었음을 감안하면 무옵션 75억은 사실상 20~30억원정도 차이가 난다.[12] 그리고 바로 다음 해 최정이 4년 86억에 FA 계약을 하면서 이 기록은 깨졌다.[13] 장원준 fa계약 기사를 통해 어느정도 사실로 밝혀졌다. 강민호 급 대우라 했는데 88억과 75억은 분명 괴리가 있기 때문, 실제로 대다수의 언론은 실제 계약금액이 최소 90억은 넘는다고 기정사실화 하고있다.[14] 양친고향이 원래 경북이고 강민호는 출생만 제주도지 본적은 경북이다.[15] 오죽하면 네이버 스포츠 라디오뿐 아니라 각종 팟캐스트에서 기자들이 푸는 썰에도 "강민호가 이적하는 일이 있겠어요?"라는 식으로 넘겼다.[16] 하지만 정작 후술하듯이 이후에 추가 옵션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이 발언도 거짓으로 들통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롯데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주기도 하였다.[17] 야만없이지만 만약 강민호가 잔류했더라면 롯데 입장에선 현재까지 주전포수 문제는 격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나균안 역시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 억지 주전 출장을 가지지 않고 투수 전향을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나균안은 투수 전향 이후 오히려 대성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모두 결과론이며 운명이다.[18] 일반적으로 먹튀로 분류되는 우규민의 1차 FA가 1WAR*당 18억, 혜자로 분류되는 이원석의 1차 FA가 1WAR*당 3억이다.[19] 당장 지난해 많은 나이에도 타격왕을 차지하며 2차 FA도 대박을 터뜨린 최형우가 그 다음해 바로 성적이 수직낙하한 것만 봐도 구단 입장에서는 위험부담이 크다.[20] FA 계약 첫 시즌인 2018년 연봉으로 10억, 2019년~2020년 연봉으로 12억 5000만원을 받다가 계약 마지막 해인 2021년에는 그보다 적은 5억을 받았는데, 이는 3번째 FA 때 유리한 협상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일부러 마지막 해 연봉을 낮춰 계약한 걸로 보인다. 역시 조찬희를 에이전시로 기용했던 손아섭도 동일한 방식으로 계약했다.[21] 계약금 12억, 연봉 총액 20억, 옵션 4억[22] 보통 3차 FA는 선수생활의 황혼기 즈음에 이르러 자격을 얻다 보니 은퇴하기 전 몇 년 더 선수 생활을 보장해주거나 예우해주는 차원으로 계약을 맺는데, 이러다 보니 1~2년 정도의 짧은 계약기간에다 기존 신규나 재자격 FA에 비해 적은 계약금 및 연봉 조건으로 계약한다.[23] 12월 23일[24] 롯데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잔류를 희망하는데 홍준학3억 차이로 협상이 안된다는 썰, 최종오퍼 제시 후 관심을 보인 다른 구단이 롯데였다는 썰 등[25] 두산으로의 이적썰, 두산의 주전포수 박세혁이 2021년 최악의 부진을 겪었기에 영입만 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썰은 썰일 뿐이라던가, 난데없는 기아이적 썰로 인해 기아 프런트 측에서 먼저 영입대상이 아니었다는 등[26] 물론 만 40세 이후에 FA 계약을 맺은 조인성, 박정진의 사례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다.[27] MLB에서는 사치세를 피하기 위해서 페이롤이 낮은 리빌딩 팀들에 연봉을 보조해주는 조건으로 먹튀를 갖다버리는(...) 트레이드가 흔하다. 한국에서도 샐러리캡이 도입됨에 따라 비슷한 트레이드가 일어날 수도 있긴 하지만, 한국 정서상 그렇게 대놓고 투자 실패를 인정하고 선수를 내다 버리는 트레이드는 쉽지 않을 것이란 게 중론.[28] 후반기 시점에서는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한 영향이라는 추측이 많다. 사실 22년 삼성은 부상자가 많음에도 이들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무리하게 굴려먹다가 더 깊은 부진에 빠지거나 장기 부상을 끊으며 이탈하는 일이 많았는데, 발목부상을 안고 던지다 엄청난 블론쇼를 선보이며 방화범으로 전락할 뻔 했던 오승환과 함께 허삼영의 무식한 선수기용에 손해를 봤다는 평가가 많다.[29] 양의지가 6년 152억, 유강남이 4년 80억, 박동원이 4년 65억, 박세혁이 4년 46억을 받아갔다. 강민호는 비록 나이가 많긴 하지만 4년 36억이라는 네임밸류 대비 비교적 싼 값에 계약한 것이 두드러진다.[30] 전반기가 종료될 때까지만 해도 최전성기인 2008년, 2010~2012년, 2015~2016년과 비슷한 WAR 페이스를 보이며 또 한번의 몬스터 시즌을 만드는 듯 했으나 후반기에 타격감이 서서히 식으며 2021년과 비슷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래도 나이와 포지션을 감안하면 대단한 행보.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20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20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1721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1922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4;"
, 4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0 03:25:17에 나무위키 강민호/선수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