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동/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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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계 입문 이전
3. 정치 활동
3.3.1. 제20대 총선 공천과 보수 몰락
3.3.2. 제20대 총선 패배 이후 비대위 사무총장 시절
3.3.3.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과 박근혜 탄핵 소추위원
3.3.5. 황교안-나경원 지도부 체제에서
3.4.1. 제21대 총선 공천 탈락과 무소속 당선
3.4.2. 국민의힘 복당 이후
3.4.3. 윤석열과의 만남
3.4.4. 국민의힘 원내대표 및 대표 직무대행
3.4.5. 원내대표직 사퇴 이후


1. 개요[편집]


권성동의 생애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2. 정계 입문 이전[편집]


1960년 강원도 명주군 성산면 관음리(현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에서 태어나 강릉중앙초등학교, 경포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음에도 지역 명문고인 강릉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 권승옥[1][2]이 교편을 잡고 있던 강릉명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80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고시공부를 할 당시 지금의 배우자 김진희를 만났다고 한다.[3] 비슷한 시기 같이 고시공부를 했던 중앙대 동문으로 이재명 (법학과 82학번)이 있다.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사법연수원 17기로 오세훈 서울시장과 동기이다.[4]

연수 후 대한민국 해군 법무 중위로 만기 전역병역의무를 마쳤다.

이후 검사가 되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광주지검, 대검찰청 등에서 근무하였고 광주지검 장흥지청장을 역임했다. 수사부서 외에도 문민정부 시절에는 법무부 인권과에 근무하며 ‘국가인권위원회법’제정에 실무자로 관여하였다.

2006년 인천지검 특수부장을 마지막으로 검사직을 사임하고 1년 남짓 짧은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2008년 이명박 정부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실 법무비서관에 임명되었다.

3. 정치 활동[편집]



3.1. 제18대 국회의원[편집]


최욱철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강원도 강릉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8대 국회 중간에 들어왔음에도 초선 2년 4개월 동안 4개의 상임위원회, 3개의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10개의 인사청문회, 4개의 대정부 질문을 하는 등 초선의원으로서는 이례적인 두드러지는 활약을 하였다.


3.2. 제19대 국회의원[편집]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초선의원 때 보인 남다른 전투력과 논리력을 인정받아 재선의원 임기 4년 내내 여야의 갈등이 가장 첨예한 법제사법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그 외 국무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 및 증거인멸 진상규명 국정조사, 국정원 댓글의혹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해외자원외교 국정조사의 간사를 맡아 활동하는 등 간사 전문 의원으로 당내외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19대 국회에서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김무성-유승민의 새누리당 사이의 갈등이 커지며, 청와대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찍어내기에 몰입하였고 2015년 7월 8일 유승민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5][6]#

직후 김무성 대표는 7월 15일 당대표가 임명하는 당직 가운데 서열 2위이자 20대 총선의 선거전략을 책임지는 전략기획본부장으로 권성동을 임명한다. 이 때가 권성동을 아직까지도 비박계 핵심, 친무 대표라 평가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2015년 하반기는 이른바 안심번호 여론조사 위주로‘상향식 공천’을 내세우는 김무성 대표와 ‘5대 불가론’을 내세워 20대 총선 공천을 위에서 찍어누르려는 박근혜 청와대 사이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시기였다. 결국 총선 공천룰을 정하기 위한 계파간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고, 권성동은 2015년 12월 새누리당 공천룰을 정하는 ‘공천특별기구’에 비박계 대표 중 하나로 참여하였다.[7]


3.3. 제20대 총선제20대 국회의원[편집]



3.3.1. 제20대 총선 공천과 보수 몰락[편집]


새누리당은 20대 총선 공천 시작 전부터 최경환, 홍문종, 이장우, 민경욱 등 소위 ‘진박 감별사’ 등이 등장하며 박근혜 청와대에 줄을 서는 여당 의원들의 행보가 언론에 다수 보도되며 민심에서 멀어져갔다. # 본격적인 공천 과정에서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청와대의 오더를 받아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필두로 한 비박계 인사들을 공천학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공관위 회의 전마다 이한구 위원장이 청와대 현기환 수석을 만난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 결국 이한구 공관위는 유승민을 비롯해 유승민과 가깝다고 평가되는 류성걸, 김희국, 이종훈, 민현주, 권은희 등을 단체로 공천학살하였고, 비박 정치인들인 이재오, 주호영, 장제원, 안상수등도 공천에 탈락하였다.#

당시 권성동비박계의 주요 인물이었음에도 상대적으로 큰 고생을 하지 않고 공천을 받았고[8], 강릉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초재선 시절 새누리당강릉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해온 것과 달리, 20대 국회에서는 보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권성동의 정치인생도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3.3.2. 제20대 총선 패배 이후 비대위 사무총장 시절[편집]


총선 패배 이후 새누리당은 김희옥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었고, 권성동은 6월 2일 새누리당 신임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권성동은 사무총장에 취임한 후 당 기획조정국과 함께 총선 패배의 충격에 빠져있던 당을 개혁하는 작업에 나선다.

첫째, 20대 총선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는 ‘총선 백서’ 발간을 추진하였다. 대국민 표적집단면접(FGI) 등을 활용해 총선 패배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고 앞으로의 당 운영에 반영하려 하였으나, 일각에서는 백서를 발간할 경우 ‘진박(진실한 친박계) 후보’ 논란에 따른 청와대의 개입과 책임론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에 친박계가 이를 저지하려 한 정황이 있다. #

당시 친박계 김태흠 제1사무부총장은 “총선에서 진 것은 누가 누구를 탓하는 방식으로 어느 한 쪽의 책임론으로 귀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라며 총선 패배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을 하였다. 권성동의 사무총장 사퇴 이후 발간된 총선백서는 많은 부분에서 민감한 부분이 수정되었고, ‘맹탕 반성문’이라는 비판을 듣게 되었다. #

파일:새누리당 국민백서.jpg

둘째, 전당대회에서 모바일투표 도입을 추진하였다. 지금은 정당에서 모바일투표가 일반화되어 있지만 이 때만 하더라도 특히 보수정당 계열에서 모바일투표는 도입되지 않았고, 체육관 투표라 불리는 현장투표로 당 지도부 선거를 하였다. 권성동은 “모바일 투표 도입 시 30%대 투표율이 50·60%대로 상승할 것”이라며 당원의 참여율 향상을 위해 이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친박 진영에서는 조직력과 동원력이 친박계보다 약한 비박계에 유리한 방식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

지금은 태극기 세력의 거두인 조원진은 “지난 총선에서도 생소한 상향식 공천을 한다고 당이 아주 혼란스러웠는데 모바일 투표를 도입했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느냐”는 발언을 하였다.

셋째, 총선 공천에 탈락하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유승민, 주호영, 윤상현, 장제원, 안상수, 이철규, 강길부 등 7명의 일괄 복당을 관철시켰다. 이 때 청와대와 친박은 유승민이 포함된 일괄 복당은 절대 안된다며 청와대의 뜻으로 앉힌 김희옥 위원장을 통해 무소속 당선자들의 복당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비대위에 안건을 올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던 사무총장 권성동이 총대를 메고 이를 상정하였고, 당시 원내대표인 정진석과 함께 일괄복당을 의결하였다. 이에 격앙된 친박계는 유승민 복당의 취소를 운운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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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권성동 새누리당 사무총장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이러한 세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권성동은 친박계의 거센 사퇴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임명된지 3주 만인 6월 23일 자진사퇴의 형식으로 경질되었다.# 권성동이 비대위 사무총장 시절 추진한 안건들이 제대로 실현되고 당내 불협화음 없이 마무리되었다면, 이후 보수몰락이 없었거나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총선 패배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한 총선백서가 나왔다면 당원과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고, 모바일투표를 도입했다면 당장 그 해 전당대회에서 당대표 선거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2016년 8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친박계 이정현이 4만4421표를 얻어 당대표로 당선되었고, 정병국·김용태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비박계 단일후보로 출마한 주호영은 3만 1946표를 얻어 2위에 그쳤다. # 또한 강성 친박인 조원진·이장우가 최고위원에 당선되어,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친박계가 당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모바일투표는 수년 뒤 도입이 되었고, 2021년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모바일투표 100%로 치러져 45.36%라는 역대급 투표율을 기록하며 이준석 당대표 탄생이라는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한 요인이 되었다. #


3.3.3.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과 박근혜 탄핵 소추위원[편집]


2016년 6월 13일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통상적으로 법사위원장은 야당이 가져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민주당이 가져갔어야 하나, 이 때는 민주당이 제1당으로 국회의장을 가져갔기 때문에 법사위원장은 새누리당이 가져가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2016년 가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12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고,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권성동이 소추위원이 되었다.[9]

헌법재판소에서 진행했던 변론에서 청구인 좌석에 항상 앉아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탄핵 심판에서 박근혜의 파면선고를 이끌어내기까지 여야 법사위원들과 잘 협조한 모습을 보여주며 소추위원장직을 책임 있게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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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관영 전 의원(국민의당), 권성동 법사위원장(새누리당), 이춘석 전 의원(더불어민주당)

이후 태극기 부대 등으로부터 '탄핵5적'[10]으로 불리며, 소위 집토끼로부터 비토를 당하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3.3.4. 바른정당 탈당과 자유한국당 복당[편집]


2016년 12월 27일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가칭)개혁보수신당에 합류했다. 개혁보수신당은 창당작업을 거쳐 2017년 1월 바른정당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창당 과정에서 권성동김세연과 함께 정강정책·당헌당규팀장을 맡아 신당의 기틀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017년 5월 2일 다른 비유승민계 국회의원들[11]과 함께 홍준표 후보 지지와 자유한국당 복귀를 선언했다. 5월 6일 홍준표 대통령 후보가 당헌당규상 당무우선권을 근거로 이들의 복당을 지시한 것을 두고 당내 작은 내홍을 겪다가, 정우택 당대표 권한대행이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하였다. 5월 12일, 마침내 동반 탈당한 11명의 바른정당 탈당파 의원들과 함께 복당 절차가 완료되었다.

한편 그 동안 지역구 강릉에서는 3선에 성공한 최명희 시장이 자유한국당의 당협위원장이 되어 있었으나, 2017년 12월 홍준표 전 대표가 ‘현역의원 우선’ 원칙을 천명하며 강릉시 당협위원장에 권성동을 복귀시켰고, 최명희는 이에 반발하여 당원 1004명을 데리고 집단탈당을 단행하였다.#


3.3.5. 황교안-나경원 지도부 체제에서[편집]


2018년 12월 12일 나경원김학용을 꺾고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이 때 권성동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후술하는 강원랜드 채용비리 의혹 사건에 얽혀 출마를 포기하였다. #

2019년 2월 27일 황교안오세훈을 꺾고 자유한국당의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이 전당대회의 여론조사는 오세훈 50.2%, 황교안 37.7% 였으나, 당원투표를 합산한 전체 결과는 황교안 50.0%, 오세훈 31.1%, 김진태 18.9%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 당심과 민심의 괴리가 역대급으로 벌어진 전당대회로서 이후 자유한국당은 황교안-나경원 지도부 체제하에서 급격히 오른쪽으로 치우친 노선을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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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자유한국당은 수시로 광화문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는데, 때로는 전광훈을 비롯한 극우 인사들이 개최한 집회와 참석자들이 겹치면서 국민들에게 극우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되었다. 국회에서는 4+1 협의체[12]가 밀어붙인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아무런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내용으로 하는 선거법, 공수처법, 검경수사권조정법 등을 여당이 원하는대로 모두 내주게 된다.

이 때 권성동은 협상주의자로서 공수처법이나 검경수사권조정법은 바른미래당과 조율하여 독소조항을 뺀 절충안을 낼 것을 제안하였고, 공수처법과 검경수사권조정법은 내어주더라도 게임의 룰인 선거법의 일방적인 통과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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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패스트트랙의 첨예한 대립 속에 교섭단체 3곳의 실무협상 책임자로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자유한국당 권성동, 바른미래당 권은희가 마주 앉았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권성동과 권은희가 공수처법, 검경수사권조정법의 절충안을 같이 발의하였으나, 자유한국당 지도부의 승인을 받지 못해 당론으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한국당은 장외투쟁만 하다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21대 총선을 맞이하게 된다.


3.4. 제21대 총선제21대 국회의원[편집]



3.4.1. 제21대 총선 공천 탈락과 무소속 당선[편집]


황교안 전 대표와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 체제로 21대 총선 공천이 시작되었고, 전폭적인 물갈이가 단행되었다. 3선 이상의 네임드급 의원 상당수가 공관위의 압박에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공천에 탈락했다.

권성동도 탄핵의 책임을 물어 “시대의 강을 건너려고 하면 밟고 지나가야할 다리가 필요하다”는 김형오의 논리에 의해 공천에 탈락하였고, 강릉 선거구에는 박근혜정부 마지막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홍윤식이 공천되었다.[13] 권성동은 이에 불복하여 무소속 출마를 단행한다. # 한편 최명희 전 3선 강릉시장도 홍윤식 공천에 반발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보수후보 3명(권성동,최명희,홍윤식) 대 민주당 김경수(1969) 후보의 싸움으로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선거 초반 보수 표 분열로 인해 민주당 김경수 후보의 우세가 지속되면서 강릉이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선거구 중 하나로 꼽혔는데, 개표 결과 권성동이 40.84%를 득표해 38.76%를 득표한 김경수 후보를 2500여 표차로 누르고 신승하였다. 미래통합당 공천을 받은 홍윤식 후보는 11.28%, 최명희 후보는 7.7%에 그쳤다. 특히 홍윤식 후보는 호남을 제외한 미래통합당 후보 중 전국에서 가장 낮은 득표율을 기록해, 김형오 공관위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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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10번을 달고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생명이 끝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홍·태·상·동’[14] 이라는 보수야권의 무소속 중진 4인방으로 정치적 위상을 급격히 높이게 되었다. 김형오 또한 총선 이후 본인이 쓴 저서에서 실수를 인정하고 권성동을 역경을 뛰어넘은 정치인이라 평가하였다. [15]


3.4.2. 국민의힘 복당 이후[편집]


4선 의원이 되었지만 무소속 신분으로 21대 국회를 시작하였다. 총선 참패로 들어선 김종인 비대위에서 특히 홍준표 전 의원의 복당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강했기 때문. 하지만 9월 17일 무소속 4인방 중 권성동이 가장 먼저 복당에 성공하였다.# 4인방 중 유일하게 당선과 동시에 복당원서를 제출했고 당내 반대 의견이 없으며 특유의 전투력이 필요했기 때문.

이후 김태호가 2021년 1월 7일 복당했고, 이준석 대표 체제가 들어선 직후 6월 24일 홍준표가, 8월 5일에 윤상현이 복당하여 무소속 4인방이 모두 복당을 완료하였다.

한편 2021년 상반기, 주호영의 뒤를 이을 새 원내대표로 김기현, 김태흠, 유의동과 경쟁했다. 당초 김기현-권성동 양강구도가 예상되었으나 1차 투표 결과 김기현이 34표, 김태흠이 30표, 권성동이 20표, 유의동이 17표를 득표해 좌중을 술렁이게 했다.

4월 30일 김태흠은 이날 투표에 앞선 주도권 토론에서도 강경 투쟁을 주장하고 과거 탄핵에 대한 입장을 문제삼으며 전통적 우파 정서를 대변했다. 반대로 권성동·유의동은 과거와의 단절과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개혁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권성동은 특히 20대 국회에서 당이 강경투쟁 일변의 노선으로 민심과 멀어져 간 점을 지적하며 “강경한 목소리에 휘둘리지 말고 민심을 바라볼 것”을 주창했다. 또한 “조국의 위선은 싫지만 광화문 집회에 모인 일부 강경 지지층의 발언이나 방식을 보고 '이건 아닌데' 했던 소위 중도층의 존재를 우린 애써 외면했다”는 말을 하며 중도확장을 강조했다. #

그러나 투표결과에서는 구 친박의 표가 결집하고 특유의 스킨십으로 과거 강성 이미지 세탁에 성공한 김태흠이 30표를 얻는 파란을 일으키며, 같은 바른정당 계열로 지지표가 겹치는 권성동·유의동을 탈락시켰다. 2차 투표에서는 예상대로 이 둘의 표가 계파색이 엷은 김기현에게 몰리며 66표를 얻은 김기현이 34표에 그친 김태흠을 꺾고 새 원내대표로 당선되었다. 결국 1년뒤 열린 8회지선때 김태흠을 충남지사후보로 차출시켜버렸다. 김태흠은 스트롱 이미지와 윤심을 등에 업고 양승조에게 첫패배의 쓴맛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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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전 비대위원장 사퇴 이후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 레이스에서 중반부터 "대선 관리에 나이는 상관없어" # 등의 발언으로 이준석 후보를 지지하였고, 주호영 후보를 밀던 바른정당계 의원들이 이준석 후보를 집단적으로 지원하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이준석은 여론조사 1위를 바탕으로 당원투표에서도 나경원 후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결과로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3.4.3. 윤석열과의 만남[편집]




2021년 5월 29일에는 유력 대통령 선거 후보인 윤석열검찰총장강릉시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도 해서 윤석열 대망론에 관심이 큰 야당 지지자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이 만남은 윤석열 총장이 국민의힘 정치인을 처음 만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6] 둘은 동갑내기 절친으로, 윤석열의 외가가 강릉시라고 한다.

6월 29일 윤석열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 때에도 윤석열의 오른쪽에 서 있었으며, 이후 윤석열의 대선행보를 도왔다. 윤석열 캠프 출범 당시에는 직책을 맡지 않았으나 경선 중반 장제원 의원이 아들의 음주운전 논란으로 인해 종합상황실장직에서 사임하면서 종합지원본부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윤석열 전 총장이 국민의힘 경선에 승리하면서 2021년 11월 8일 후보 비서실장으로 이동하였다. 2021년 11월 15일, 윤석열 대선후보와 이준석 대표 간 합의로 신임 사무총장에 내정되었다. 사무총장 등 인선을 두고 두 사람 간 갈등설이 있었는데, 합의가 나온 이후 갈등설은 일단락되었다. # 그리고 11월 18일 정식으로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021년 12월 중순부터 신지예 영입으로 인한 2030 지지율 폭망,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후보의 갈등 국면 등 총제적인 위기상황을 맞았고, 2022년 1월 2일 권성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본인을 포함하여 6명의 선대위 총괄본부장의 일괄사퇴를 윤석열 후보에게 건의한다.# 그 다음날인 2022년 1월 3일 김종인이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후보는 연기만 해달라"는 발언을 계기로 윤석열 후보는 선대위 해체를 결심하고 실무진 위주의 슬림한 선대본부로 방향을 완전히 틀게 된다.#

선대위 해체와 함께 권성동은 사무총장 직까지 사퇴하였다. 이 당시 지지율 하락에 대한 책임을 후보의 측근으로서 온전히 지며 여론의 비난 또한 크게 받았는데, 이른바 폰석열 사건으로 불리는 1월 5일 청년간담회 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된 탓이 크다. 하지만 이 청년간담회는 당시 선대위 국민소통본부장이던 박성중 의원의 주도로 열린 행사로, 윤석열 후보는 참석 미정이었고 권성동은 박성중 의원의 요청으로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가게 된 것이라 한다.

김한길 새시대준비위원장의 신지예 영입 이후 극도로 나빠진 청년 민심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었는데, 권성동은 사건이 터지자 본인이 구성한 2030 메시지팀의 건의로 후보가 직접 사과문을 쓸 것을 제안했고, 윤석열 후보는 페이스북으로 "박성중 의원의 부적절한 사과문에 대해 대신 사과한다. 청년들의 의견을 듣는데 우리편 청년과 다른편 청년을 편가르면 되겠나. 지금껏 저의 행보에 있어 그런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도 철저하게 반성하겠다"며 굉장히 낮은 자세의 메시지를 내게 되었다.

2022년 3월 23일 라디오에 출연해 "안철수 국무총리까지 가진 않을 것, 총리 생각했다면 인수위원장 맡지 않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여 일부에게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 이후 안철수 인수위원장이 당으로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권성동이 예측(견제?)한대로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직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3.4.4. 국민의힘 원내대표 및 대표 직무대행[편집]



파일:성동환호.jpg

{{{#ffffff 환호하는 권성동 신임 원내대표}}}

2022년 4월 8일, 국회에서 권성동 의원과 조해진 의원이 후보로 출마한 국민의힘 원내대표 선출 의원총회가 열렸다. 투표 결과, 참석 102표 중 권 의원이 81표를 얻어 21표에 그친 조 의원을 크게 앞서며 제3대 국민의힘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5년만에 집권여당이 된 국민의힘의 첫 원내대표이며 극단적 여소야대 정국에서 맡게 된 여당 원내대표인 만큼 여야 협상과 중재, 정부와의 협력 과정에서 역할이 굉장히 중요할 전망이다. 때문에 4선 의원으로서 국회에서 협상 능력이 강한 점과, 당 내에서 윤석열과의 관계가 가장 돈독한 인물인만큼 당정관계에서도 강점이 존재 한다는 점에서 권성동 의원이 원내대표로서 적합하단 평가가 많았다.

특히나 국민의힘이 출범한 직후 초대, 2대 원내대표 모두 호평과 함께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쳤던 만큼[17] 본인 또한 "윤석열 정부 집권 1년차 원내대표로서 막중한 책무에 걸맞은 책임감으로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순항하도록 야당과의 협치에 더욱 더 정력을 쏟고 어려운 정치 환경을 헤쳐나가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원내대표가 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4월 말 국회의장 박병석이 제시한 검수완박 중재안에 합의 서명을 했다. 이후 국민의힘 지지층 내에서 거센 비판의 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서명 후 문제적 인터뷰가 나오자 그 수위는 한층 더 거세지고 있다. 결국 당원게시판과 유튜브 채팅창을 가리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욕을 얻어먹는 중이다.#

이후 국민의힘도 의원총회를 통해 해당 중재안을 추인했다. 당시에는 윤석열 인수위측도 여야 합의를 존중한다는 의견을 밝혔고 이준석 대표 또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평가했으나 이후 지지층의 비난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자 이준석 대표가 말을 바꾸어 25일 최고위원회 표결 안건으로 등재시켜 제동을 거는 시도를 하였고, 최고위에서 중재안 거부 및 재논의가 결정되었다.[18]

이후 거센 당내비판에 민주당이 주장한 검수완박 초안과는 완전히 다른거라며 주장하며 3번 사과 했으나 당연히 이로 잠잠해질리는 없었다. 이에 민주당은 제1야당 국힘이 중재안을 합의를 취소하면 자신들은 즉시 초안을 강행하겠다며 나서면서 진퇴양난이 되었다.

결국 중재안 거부로 최종결정이 나 합의가 파토나자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중재안 합의를 해놓고 무산시켰다는 명분으로 야심한 밤 국힘 의원들이 없는 사이 법사위를 열어 15분만에 승인시키는 날치기 통과를 당하였다. 검수완박 저지에 너무 무능한 모습을 보이다보니 당내에서도 사퇴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다만 권 원내대표 옹호 측에서는 중재안 수용 결정은 권성동의 독단이 아닌 국민의힘 의원총회의 추인을 받았던 사안인데 당내 반발이 극에 달하자 합의 파기를 위한 희생양격으로 당내외적인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모양새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편 제21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 협상 과정에서 기존 합의안을 포기하고 법제사법위원회더불어민주당에게 넘겨주려고 시도했었다. 여당 대표로서 윤석열 정부 국정 지원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진 상황에다가 과거 검수완박 합의안 일방 파기의 여파로 원구성 협상 주도권을 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에게 내주면서 극단적 처방을 쓰려고 한것이지만, 당내 반발이 심해 무산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민주당이 과거 합의안을 존중하겠다고 밝혀 법사위는 지키게 됐지만, 대신 과거 검수완박 합의안에 있었던 사개특위안을 지키라는 요구를 재차 받았다.#

7월 4일, 원구성 협상이 좀처럼 타결되지 않자 민주당이 후반기 국회의장단 단독 선출에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사개특위 인원을 5대5로 맞추고 위원장 자리를 국민의힘이 가져가는 대신 국회의장단 선출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결국 여야 합의로 김진표 국회의장을 비롯한 의장단을 선출했다. 다만 민주당 측에서 권 원내대표의 사개특위 조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후반기 원구성 협상까지는 아직 지난한 길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2022년 7월 8일 당 윤리위원회가 이준석 대표에게 당원권 정지 6개월의 중징계를 내리자, 당일 아침에 열린 원내 대책회의를 통해 징계는 의결과 동시에 즉각 효력이 발생 하였으며 그에 따라 본인이 당대표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권 의원의 요청으로 7월 31일부터 서울(청량리)~강릉 간 KTX-이음 열차를 '무정차' 운행하기로 결정되었다.#

7월 21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였다. 전문

7월 31일, 국민의힘 대표 직무대행을 사퇴하였다. # 하지만 선출직 최고위원들이 이준석계인 김용태 청년최고위원만을 두고 8월 8일까지 전부 사퇴하면서 전국위 전까지 사실상 다시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다.

8월 16일에 비대위가 공식 출범하면서 권성동 직무대행 체제가 종료되었다. 당내에서는 권성동에게 비상사태의 책임을 묻는 의견도 있었으나, 소수의견에 그치면서 원내대표에 재신임되었고 비대위원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비대위 출범 열흘만인 8월 26일에 이준석 전 대표가 비대위를 상대로 건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서 주호영 비대위원장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이렇게 되자 당에서는 원내대표인 권성동에게 비대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기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데, 의원들 사이에서 다시 권성동 책임론이 일면서 반발에 부딪혔다. 일단 결론은 새 비대위를 수립한 후에 권성동 재신임을 결정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막상 의총 회의에서는 권성동도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강릉에서 열리는 2022 서머시즌 롤챔스 결승 때문에 롤판에서도 뜬금없이 까이고 계신다. 가뜩이나 강릉이라는 접근성 떨어지는 곳에서 결승전이 잡혀서 볼멘소리가 있었는데, 결승전을 강릉에 유치한 장본인이 다름아닌 권성동이다.

다만, 대선 때도 윤석열 후보가 LCK 개막전이 열리는 롤파크에 방문한 일정을 기획한 것도 권성동과 그의 청년 참모진이었던만큼, 게임이라는 매체와 2030에 대한 영향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4.5. 원내대표직 사퇴 이후[편집]


2022년 9월 8일, 정진석 국회부의장이 비대위원장이 되자 본인 말대로 원내대표직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했고 9월 19일 주호영이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자 물러났다.

2022.12.10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 협의회가 출범하려고 하자 세월호 때처럼 시민단체가 악용하면 안 된다고 발언했다. 기사.

차기 전당대회에서 100% 당원투표로 변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밝혔다. 유승민을 견제하기 위해 룰을 변경하는 것이라는 논란이 강한데다 강력한 당대표 예상후보인 나경원이 있다지만 본인이 윤핵관 중 한명이기 때문에 수혜를 볼 가능성이 높은데 이례적으로 반대를 하는 것.

2023년 11월 1일, "불법 공매도와 관련한 전수조사와 제도적 개선이 완비될 때까지 공매도 자체를 한시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면서 "아울러 불법 공매도는 주가조작에 준해 처벌해야 한다"며 "회복 불가능한 재산상 불이익이 있어야 불법을 막을 수 있다"라고도 주장했다. #

2023년 11월 10일, 불법 공매도로 거액의 이익을 취할 경우 가중처벌하도록 하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공매도 위반행위로 얻은 이익이나 회피한 손실액이 50억 원 이상이면 해당 금액의 3배, 금액이 5억 원 이상 50억 원 미만이면 2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 권 의원은 이와 함께 주식양도소득세 개편도 주장했다. #

[1] 강릉농업고등학교(24기)와 춘천농과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강릉명륜중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뒤 명륜고등학교 교감을 거쳐 1995년 명륜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했다가, 2005년, 사단법인 강릉명륜학원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2] 2022년 2월 11일, 낙상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3] "주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었어요. 고시공부를 할 당시 지금 아내와 만나고 있었는데 선배들이 사법고시 2차 시험에 합격하기 전에 연애하면 실패한다고 경고하곤 했어요.(웃음) 그런데 전 그런 징크스 때문에 아내와 헤어지는 건 못 하겠더라고요. 그 대신 따뜻한 미소와 격려를 보내는 아내에게 꼭 합격으로 보답하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죠.”# [4] 오세훈 서울시장은 사법시험 26회 합격생으로 사시 기수는 하나가 빠르나 연수원은 17기를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17기는 대법관 2명을 배출하고 오세훈, 권성동 등 유력 정치인과 이석연법제처장 등을 배출한 스타플레이어가 많은 기수로 꼽힌다. 황금 세대 #[5] #이 사건이 박근혜 정부의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며 유승민 찍어내기에 몰입한 박근혜 청와대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견해와 집권여당 원내대표로서 청와대의 국정운영을 그대로 따르지 않은 유승민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견해로 나눠지게 되고, 이는 이후 친박-비박 갈등 격화와 2016년 20대 총선 ‘진박’공천으로 새누리당 대패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에 민주당이 제1당이 되어 향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보수야당 분열(자유한국당-바른정당)의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6]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 때 박근혜 정부의 유승민 찍어내기를 “공화국 최고존엄을 모욕한 공화국 반동분자 숙청”으로 묘사하며 강하게 비판하였다.#[7] # 당시 사무총장이던 황진하가 위원장을 맡고, 친박계 6명(박종희·김재원·강석훈·김도읍·김태흠·박윤옥)에 비박계 6명(홍문표·권성동·이진복·홍일표·정미경·김상훈)으로 구성하였다.[8] 당시 이한구 공관위원장이 이상하리만큼 권성동에게는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초재선 시절 수없이 간사를 하며 최전선에서 민주당과 싸워온 점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9] 헌법재판소법 제22조 제1항에 의하면 “탄핵심판에서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위원장이 소추위원이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언론에서는 ‘탄핵소추위원장’이라는 용어를 자주 쓰는데, 법에는 근거가 없는 표현이다.[10] 분류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김무성·유승민·김성태·권성동·홍준표가 항상 포함된다. 여기에 정병국, 오신환 등도 포함된다.[11] 장제원, 홍문표, 박성중, 여상규, 박순자, 이진복, 이군현, 김성태, 김재경, 김학용, 홍일표[12] 더불어민주당 + 바른미래당 당권파(바른정당계 제외)·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13] 황교안이 국무총리이던 시절 홍윤식이 장관을 했던 경력도 있고, 권성동을 잘라낸 자리에 강릉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홍윤식을 꽂아넣겠다는 황교안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홍준표(5선), 김태호(3선), 윤상현(4선), 권성동(4선).[15] 김형오 著 「공천고백기 총선 참패와 생각나는 사람들」 p124[16] 나중에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강릉에 가기 전 서울에서 윤희숙, 정진석을 만났다고 한다. 다만 윤석열의 강릉 방문은 사실상 시민들에게 노출된 첫 공개행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17] 당시 주호영 초대 원내대표는 2020년 총선 결과 180석 국회가 출범한 직후 그야말로 당에서 뼈를 깎는 쇄신을 거듭할 동안 국회에서 대여투쟁을 이끌며 다음해 열린 4.7 재보궐선거를 압승으로 이끌어 서울시청과 부산시청에 다시 붉은 깃발을 꽂는 성과를 냈다. 또한 김기현 2대 원내대표는 주호영 원내대표와 마찬가지로 국회에서의 대여투쟁은 물론 법사위를 가져오는 등 상임위 협상까지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극단적 여대야소 상황에서 원내 운영을 성공적으로 하면서 임기를 마쳤다.[18] 그러나 원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의원총회 소관이며 의원총회의 결정 그것도 다른 당과의 합의사항을 최고위원회에서 뒤집은 일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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