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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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46년,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사목리[5] 에서 황희 정승의 20대손인 아버지 황인적(黃仁積)과 어머니 윤한영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파주 문산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25기)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포병 장교로 복무하였다.
하나회 출신으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의 부관을 맡고 있었다. 이후 1982년 미국 지휘참모대학을 수료하고 보병 제1사단 58포병대대장(중령), 한미연합군사령부 지상작전장교를 거쳐 수도방위사령부 정보처장(대령)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20사단 포병연대장(대령), 제5포병여단장(준장),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소장)[6] , 유엔 평화유지군 키프로스 사령관(중장)[7] 등을 역임하고 2004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8]
2.1. 정치 활동[편집]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재창과의 공천 경합에서 승리하여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 파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8대 국회에서는 외교통상위원회 간사, 정보 위원회 간사,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안보 외교 정보 문제 등을 총괄하는 의원 활동을 하였으며 18대 임기 초인 2008년 5월 쇠고기 파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 한나라당 쇠고기 대책 단장으로 전문 분야 국회의원 3명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상/하원, 행정부와 만나 쟁점 사항을 해결하는 물꼬를 틈으로써 쇠고기 파동을 종식 시키는데 기여하였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 직후 연평도 피해 현장을 방문했다가, 같이 간 안상수 의원이 타다 남은 보온병을 들고 "이게 포탄입니다, 포탄."이라고 떠들 때 옆에서 "152mm 같은데...."라는 소릴 하며 거들다 망신을 당했다. 안상수는 군 미필이라는 핑계거리라도 있지, 이 인간은 육군 3성 장군, 그것도 포병 출신이라 더욱 똥별이라고 욕을 먹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경기도 파주시 을 선거구[9] 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하였다.
2013년 파주 발전의 꿈을 좌절시킬 뻔한 운정3지구 개발 사업을 폐기될 위기에서 부활시켰다.
2014년 6월 국회, 국방위원장직을 맡아 국방개혁과 북핵 문제, 전시작전권 전환 문제 등 난제 해결에 진력하다가, 2015년 7월부터 새누리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사무총장 재임 간인 2016년 2월부터 제20대 국회의원 공천관리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임하면서 극심한 공천 파동을 겪었고 그 결과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정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016년 5월 통일 준비의 3대 핵심사업으로 구상했던 파주의 ‘통일경제특구’ 지정, 건설, ‘접경지역 지원 특별법’ 제정과 서울-문산고속도로 건설에 진력하여 접경지역 지원법 통과(11.4.29)와 서울–문산간고속도로 건설(14.9. 착공)은 성사를 시켰으나 통일경제특구법은 여야합의에 이르지 못해 미완의 계획으로 남겼다. 이후 국회의원 낙선 이후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총선 결과 참패 수습과 대선 준비를 위해 노력을 하다가 총선참패 수습 노력과 대선후보 영입 문제가 수포로 돌아가자 2016년 6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정치계를 잠시 떠났다.
이후 새누리당에 다시 복당했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탈당하고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하였다.[10] 이후 다시 2017년 6월 30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11]
2017년 8월 한미우호협회에 가입 후 이사를 거쳐 2019년 1월 한미우호협회장에 취임하여 한미우호증진과 동맹강화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장수 황씨 집성촌이다. 방촌 황희가 낙향해서 노년을 지낸 반구정이 있다.[2] 이라크의 자이툰 부대에서 군복무를 수행했다.[3] 쿠웨이트의 다이만 부대에서 군복무를 수행했다.[4] 25세 하(夏) 항렬.[5] 2015년 행정구역 기준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이다.[6] 준장에서 임기 중 소장으로 진급하는 보직으로 보통 이 보직이 마지막 보직이 된다. 황진하 장군이 준장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회 숙청이 본격화되면서 이미 진급과는 멀어졌다는게 정설이었다. 의외로 임기제 진급은 아니었고 1998년에 진급하여 3년간 해당 보직을 수행한다.[7] 2001년 11월 진급, 다만 이 보직 역시 대장 진출은 불가능했다. 정식 편제에 없는 임시 보직이기 때문.[8] 소장, 중장 계급이던 육사 25기 동기들은 전부 2002년 10월 인사에서 전역했으며, 동기인 남재준은 무려 참모총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진하 중장은 혼자 2004년까지 군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9] 이 때 파주시가 분구되었는데 갑구는 SBS 앵커였던 정성근을 공천했다.[10] #[11] #[12] 4번의 선거 중 첫 낙선[13] 총선 참패 책임으로 인한 탈당[1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탈당[15] 국민의당과 신설 합당[1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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