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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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고대 ~ 고려시대
2.2. 조선
2.3. 폐군
3. 구한말 행정구역



1. 개요[편집]


낙안군은 1908년까지 있었던 조선대한제국의 행정구역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과 외서면, 보성군 벌교읍 일대이다. 그리고 이곳이 해체됨으로써 보성과 벌교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벌교읍 문서 참조.


2. 역사[편집]



2.1. 고대 ~ 고려시대[편집]


낙안군은 백제 때는 분차군(分嵯郡)이라고 불렸다. 757년, 신라 경덕왕에 의해 분령군(分嶺郡)으로 개칭하고 충렬현(忠烈縣, 현 고흥군 남양면 일대.), 조양현(兆陽縣, 현 보성군 조성면 일대.), 강원현(薑原縣, 현 고흥군 두원면 일대.), 백주현(栢舟縣, 현 고흥군 동강면 일대.) 4개의 속현을 관할했다. 940년에 낙안으로 개칭되었고 나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이전에 관할하던 4개의 속현은 보성군으로 이관되었다. 동시에 충렬현, 강원현, 백주현은 남양현(南陽縣), 두원현(荳原縣), 태강현(泰江縣)으로 개칭되었다. 후에 다시 낙안군으로 승격하였다. 원래는 현 벌교읍 고읍리에 관아가 있었으나, 고려 말 ~ 조선 초에 왜구가 들끓자 더 내륙인 낙안읍성 자리로 이전했다.


2.2. 조선[편집]


파일:external/librewiki.net/Boseong_historical_1.png
▲조선시대 이래 보성군(1914년까지 장흥도호부, 장흥군의 돌출지였던 웅치면, 회천면 포함)과 낙안군의 영역을 현재의 읍면 경계를 참고하여 그린 지도. 큰 변동은 없었으며 이 영역이 1908년 낙안 폐군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원래 현재의 벌교읍 일대는 낙안읍성으로 잘 알려진 낙안군(樂安郡)이라는 독립된 고을에 속해 있었으며, 조선시대 이래로 낙안군의 최대 중심지는 낙안읍성 일대였고 벌교는 고을의 남쪽 변두리의 작은 포구 겸 장터 마을이었다.

고을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죽이는 등 범죄를 저질러 현으로 강등된 적도 몇 번 있지만 그때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으로 복구되었다.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나주부 낙안군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라남도 낙안군이 되었다. 장도(獐島; 노루섬), 여자도(汝自島) 등 낙안군이 관할하던 섬들은 신설된 돌산군으로 전부 이관되었다.


2.3. 폐군[편집]


1907년에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통감부가 모든 것을 장악했으며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이후로, 을사조약 이후 의병과 강제해산을 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합류로 정미의병의 성격이 바뀌어 항일 교전으로 확대된 시점이였다. 이 정미의병전쟁이 시작되어 지속된 1년 뒤인 1908년은 의병의 기세가 전국을 통틀어 7만 명을 넘겼을 정도로 매우 활성화된 시기였다. 이는 벌교와 낙안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상황이다.

당시 낙안군 상황을 보면, 옆 고을 보성군에서 일어난 안규홍의 항일 의병 세력이 전남동부 쪽으로 뻗어나갔고 이곳 벌교에서도 항일 세력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안규홍의 의병은 실제로 일본군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강성했는데,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안규홍이 벌교 장터에서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 1명을 때려죽였다고 하고 이 때부터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1] 또한 좀 더 과거로 가보면 동학 농민 혁명이 있었던 때도 동학군이 낙안으로 집결하여 읍성과 그 인근을 초토화시킨 전력이 있었으며, 더 과거로 가면 임진왜란 중에 당시 낙안군수가 전라좌수영 소속으로 관군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하여튼 그 해 양력으로 10월 15일, 전남지역 행정구역 조정을 골자로 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72호가 발령되어 낙안군이 폐군되었다. 이 해에 낙안군 뿐만 아니라 다른 고을들 중에도 통폐합된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 목록은 행정구역 개편/대한민국/역사 문서에 있다. 당시 전후상황을 보자면 낙안군을 해체시킨 일은 일제가 정미의병 활동에 대해 벌인 복수극이자, 부군면 통폐합프로토타입이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승정원일기 순종2년 9월 21일(계묘, 양력 10월 15일 목요일) 기록에서 "군의 폐합에 관한 건을 반포하였다"에 남아있다.

○ 짐이 군(郡)의 폐합(廢合)에 관한 건을 재가하여 이에 반포하게 하노라.

전라남도 옥과군(全羅南道玉果郡)을 폐하고 또 담양군(潭陽郡)의 일부인 덕면(德面)·대면(大面)·가면(加面)을 분리하여 모두 이를 창평군(昌平郡)에 합한다. 동도(同道) 화순군(和順郡)을 폐하여 능주군(綾州郡)에 합한다.

동도 낙안군(樂安郡)을 폐하여 그 일부인 내서면(內西面)·외서면(外西面)·동상면(東上面)·동하면(東下面)·초상면(草上面)·초하면(草下面)·읍내면(邑內面)은 순천군(順天郡)으로, 그 밖의 일부인 남상면(南上面)·남하면(南下面)·고상면(古上面)·고하면(古下面)은 보성군(寶城郡)으로 합한다.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한다.


이를 통해 낙안군이 1908년 음력 9월 21일(양력 10월 15일)에 폐지되고 이때 낙안군 남부의 고상면, 고하면, 남상면, 남하면이 보성군으로, 나머지는 순천군(현 순천시)로 분할편입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시행의 주체는 대한제국이지만 이 당시 일제의 강제로 인해 고종의 강제 퇴위가 벌어지고 정미의병전쟁까지 일어났던 1907년 이후라는 점, 그리고 이 정미의병전쟁에서 낙안군 지역이 매우 거센 의병활동이 있었다는 점을 통해서 일제의 개입을 추정할 수 있다.


3. 구한말 행정구역[편집]


낙안군은 읍내면, 내서면, 외서면, 동상면, 동하면, 초상면, 초하면, 고상면, 고하면, 남상면, 남하면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지금의 벌교읍 지역은 옛 낙안군 고상면, 고하면, 남상면, 남하면(일부), 동하면, 초하면(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벌교읍에 해당되는 이 낙안군 시절의 5개 면 이름 중 일부는 지금도 '남상조경', '남상향우회', '남하로', '남하향우회', '고상 백이동우회', '고상 이장협의회' 등 관습적 지명으로 남아 상호명, 도로명, 주민 단체명 등에 쓰이고 있다. 고상, 남상, 남하가 특히 잘 쓰이는 편. 현재 법정리와 옛 낙안군 면을 대응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 고상면 - 고읍리, 낙성리, 지동리, 추동리, 징광리
  • 고하면 - 전동리
  • 남상면 - 척령리, 칠동리, 옥전리, 마동리
  • 남하면 - 장좌리, 영등리, 장암리, 대포리
  • 동하면 - 연산리, 봉림리, 회정리, 장양리
  • 초하면 - 호동리
  • 불명 : 벌교리, 장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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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박 2일 초창기 독서퀴즈 때도 나왔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표현인데, 21세기에는 조직폭력배와 연계되어 '지역 비하 표현'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표현이라 '지역 우대 표현'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