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 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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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1977 도쿄 우준 우승마로 말년에 한국에 종마로 기증되어 자마로 당대제일을 배출했다.
2. 혈통[편집]
모마 토스트는 중상 4승에 1962년 오카상 2착, 1964년 천황상(가을)과 아리마 기념에서 2착을 기록하고 1964년 최우수 5세(현 4세)이상 암말상과 최우수 스프린터상을 수상하며 현역 39전 17승을 기록한 명암말이다. 토스트의 반형제 2살 여동생 플라워 우드(フラワーウツド)도 현역 36전 15승(중상 5승)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부마 스튜펜더스는 미국에서 1966년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 2착 등 현역 35전 11승을 기록하고 1968년부터 영국에서 종마 생활을 하다 1973년 일본에 수입되었다.
3. 생애[편집]
3.1. 데뷔 전[편집]
홋카이도 다테시의 타카하시 목장에서 명암말 토스트의 (이 후에도 교배했지만 수태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마지막이 된) 새끼 말은 성장이 빠르고 건강해 목장 내에서 평판이 좋았다. 토스트와 동생 플라워 우드의 조교사였던 오가타 토키치도 이 새끼 말을 일찍부터 눈여겨봤고 그의 권유를 받은 도쿄 철강 사장 요시하라 사다토시[1] 가 800만엔에 구입했다. 요시하라는 당시 관명으로 아이언을 썼는데 왠지 무거워 보인다는 느낌에 본인의 성에서 요시하라→요시→럭키 로 연상하고 조부마인 미국의 명마 볼드 룰러로부터 룰러를 따왔다. 거기에 럭키 7으로 7글자를 맞추기 위해 마지막의 장음을 빼고 럭키 룰러(ラッキールーラ)라고 이름지었다. 오가타 토키치의 마방에 들어간 후 조교에서도 좋은 기록을 내며 오가타의 1번 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3.2. 커리어[편집]
1976년 8월, 기수 이토 마사노리[2] 를 주전기수로 데뷔, 그는 럭키 룰러의 현역 중 오픈 전 2경기를 제외한 전 경기에 기승한다. 3경기째만에 첫승을 따냈고 이어진 경기에서는 카네 미노부에게 밀려 2착, 이어진 사잔카 상에서 2승째를 거두고 다음 경기에서는 프레스 토코에 패하며 2착을 기록하고 첫 해를 마쳤다.
클래식 시즌인 1977년의 첫 두경기는 모두 히시 스피드에 패했지만 3월의 야요이상에서 5번 인기로 나와 카네 미노부와 프레스 토코를 꺾고 레코드로 우승하며 첫 중상승리를 기록했다. 이어진 사츠키상에서 4번 인기를 받고 직선 주로에 선두로 진입했지만 안쪽으로 파고든 후쿠나가 요이치 기승의 하드 버지에게 추월을 허용해 2.5 마신차 2착을 기록했다. 더비 트라이얼 경주인 NHK배에서는 1번 인기를 받았지만 4착을 기록했다.
도쿄 우준에서는 앞선 경주 4착에 28마리 중 24번이라는 최외곽 그룹의 번호를 배정받아 9번 인기로 떨어졌다. 럭키 룰러의 기수 이토 마사노리는 도주 전략을 채택해 스타트 후 빠르게 나가 잠시 선두에 섰고, 이후 2번째 위치에서 레이스를 진행했다.[3] 최종 직선에서 선두 다툼을 펼치며 안쪽으로 올라 온 카네 미노부를 뿌리쳤지만, 바깥쪽에서 1번 인기 하드 버지가 쫓아와 나란히 결승점을 통과했다. 경주 직후 하드 버지의 조교사 이토 유지는 승리를 확신했지만, 사진 판정 결과 럭키 룰러의 머리 차 승리가 결정되었고 럭키 룰러는 첫 팔대경주 제패, 이토 마사노리는 아버지 이토 세이지로[4] 와 부자 더비 제패를 이루어냈다.[5]
여름 휴양 후 오픈 전에서 승리, 도쿄신문배에서 프레스 토코에 밀리며 2착을 기록하고 1번 인기로 나간 킷카상에서는 15착으로 대패했고 우승은 프레스 토코가 차지했다. 조교사 오가타 토키치는 이 후 럭키 룰러의 적성거리에 장거리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2000m 이하의 경주에만 나가게 된다.
킷카상 후 12월, 왼쪽 앞다리에 심관골류가 발증해 장기간 휴양에 들어가 무려 2년 뒤인 1979년 12월에야 겨우 복귀전을 치러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에도 현역을 이어가 6월 삿포로 닛케이상에서 32개월만의 승리를 맛보았지만 이 후 3경기에서 부진하며 결국 은퇴를 결정하고 11월 30일에 나카야마 경마장에서 은퇴식이 열렸다.
3.3. 종마 생활[편집]
은퇴 후 JRA가 4500만엔으로 매입해 일본 경종마협회 에 기증되어 1981년부터 이부리 종마장 에서 종마로 공용되었다. 당시 말 체중이 700kg을 넘어서 몸집이 작은 암말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1986년에 종자두수가 5마리까지 떨어졌지만 1987년에 토치노 룰러가 키사라기상에서 우승하면서 종자두수는 39마리까지 회복하고 종부료도 15만엔에서 20만엔으로 인상했다.
1990년에는 프레스 토코, 카츠 탑 에이스, 야마노스키(ヤマノスキー, 1981)[6] 와 함께 소유자의 호의로 한국에 수출되어 고양시의 원당목장에서 종마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1년 사고로 골절을 일으켜 서울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5월 12일에 안락사되었다. 이미 많은 나이였던 탓에 한국에서의 자마는 4마리에 불과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97년 뚝섬배 우승 등 현역 60전 25승(2착 13회)를 기록한 암말 당대제일[7] 이다.
4. 여담[편집]
5. 경주 성적[편집]
[1] 관명으로 모어, 럭키, 에어 등을 썼으며 소유마 중 팔대경주 우승마는 1969년 사츠키상 우승마 와일드 모어(ワイルドモア)와 럭키 룰러가 있다. 장남 요시하라 츠네부미가 마주를 이어받아 그의 소유마로 에어 그루브, 에어 지하드, 에어 샤커, 에어 메사이어등이 있다.[2] 아버지 이토 세이지로도 기수, 유명 조교사였는데 마사노리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결핵으로 쓰러져 마사노리에게 기수가 되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 후 이토 마사노리는 후쿠나가 요이치, 오카베 유키오, 시바타 마사토등 명기수들을 배출한 이른바 마사공원 꽃의 15기생으로 입소해 기수가 되었다. 이토 세이지로의 마방은 소속 기수이면서 그의 사위, 즉 마사노리의 매형인 이토 유지가 이어받았다. 이토 유지는 이토 마사노리가 주전 기수였던 럭키 룰러의 동기인 하드 버지를 비롯해 맥스 뷰티, 샤다이 카구라, 다이이치 루비, 위닝 티켓, 에어 그루브, 파인 모션, 에어 메사이어등의 조교사로 2014년 조교사 현창자에 올랐다.[3] 당시의 도쿄 우준은 28마리 출주였고, 거기다 TV중계에 이름을 많이 불리기 위해 승리 가능성과 관계없이 무작정 도주를 하는 일명 '테레비우마'들까지 즐비한, 도주마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지옥 같은 환경. 인코스를 잡는데 시간이 걸리는 최외곽 게이트면 더더욱 불리한 위치이다. 그런데도 시작 시점에서 1등을 잡고 중간에 살짝 페이스 관리를 하며 최선두 그룹에서 리드 포지션을 유지한 것이다.[4] 1936년 토쿠마사에 기승해 도쿄우준대경주 우승.[5] 1977년 도쿄 우준이 바로 마루젠스키가 나가려고 했다가 불발된 경기이기 때문에, 럭키 룰러가 우승한 사실을 두고 '마루젠스키가 29번 게이트에서 출발했다면 1착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장 주요한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6] 현역 45전 7승, 마루젠스키의 자마. 야마노스키의 한국 대표자마로 1996년 뚝섬배 우승마 이화령, 1997년 문화일보배 우승마 연승환호가 있다.[7] 번식암말 은퇴 후 육용 전환, 즉 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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