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치요노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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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주마. 사쿠라 커머스, 일명 사쿠라 군단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더비 호스. 이름은 스모의 요코즈나 치요노후지[2] 에서 따왔다.
전형제 사쿠라 토코(サクラトウコウ)는 하코다테 3세 스테이크스, 1986년 타나바타상 우승마다.
반형제로 사쿠라 호쿠토 오는 1988년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 우승마다.
오구리 캡과 같은 해 출생의 당시 클래식 유력 주자 중 하나였다. 아비는 마루젠스키.
사쿠라 군단에서 동갑내기 중에 주목받는 말이 받게되는 오(王)의 이름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한 말이었다. 오랜기간 사쿠라 군단의 전속 기수로 활동한 코지마 후토시 기수와 콤비를 이뤄 참가한 신마전에서는 배당률 1.0의 압도적 인기를 받고 마지막 직선에서만 후속마와 3마신 반이라는 차이를 벌리고 우승, 이름값이 허세가 아니라는걸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OP 후요 특별에서 1번 인기로 우승, OP 이초 특별에서도 1번 인기로 지지받았지만 불량 마장으로인해 마이네르 로직의 도주를 따라잡지 못하고 2착에 머무른다. 그리고 3세(현 2세) 시즌의 결정전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1번 인기를 받고 우승을 하기는 했는데, 그 해에는 폭설로 인해 두번이나 경기 일정이 바뀐 영향으로 출주마 6두라는 한산한 레이스로 2위인 츠지노 쇼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별 굴곡없이 나란히 달리다 마지막에 목차로 앞서며 우승. 그 해 언론에서는 '강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플러스 알파를 느낄수가 없었다. 더 성장할 것 같지 않다'는 악담에 가까운 평가를 받게 되는데, 같은 주니어 G1 우승마임에도 크게 호평을 받았던 한신 3세 스테이크스의 우승마 사커 보이와는 비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 해의 최우수 3세마는 사커 보이가 가져갔는데, 기자 투표의 득표수가 8배가 넘는 차이였다.
4세(현 3세) 시즌으로 넘어와 88년 클래식 전선으로 나선 첫 경주인 G3 교도통신배에서는 주니어 G1 우승의 실적으로 1번 인기를 받지만, 시작부터 주도권을 뺏기고 끌려가는 레이스를 보이다 4착에 그치게 된다. 조교사는 조교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아무튼 이때의 모습과 전년도 언론의 혹평이 떠오르면서 이후 사쿠라 치요노 오는 단 한번도 1번 인기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해의 두번째 경주인 G2 야요이상에서는 바로 그 경쟁마 사커 보이에게 1번 인기를 뺏기고, 2번 인기로 출주. 2마신차로 사커 보이를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 다음 경주는 클래식 삼관의 스타트 사츠키 상. 사커 보이가 부상으로 출주 회피를 한 상황에서 전 경기에서 사커 보이에게 복수도 끝낸 사쿠라 치요노 오가 어지간하면 1번 인기를 받을만 한 상황임에도, 그 전의 교도통신배에서 사쿠라 치요노 오를 추월하고 3착으로 들어왔던 모가미 나인이 1번 인기를 가져가고 사쿠라 치요노 오는 2번 인기에 그친다. 3번 위치에서 그림같은 선행 리드로 경주를 이끌었지만, 바로 뒤에 붙어서 마크하던 야에노 무테키가 마지막 직선에서 추월하며 1마신 차이로 1위를 내줌과 동시에 사커 보이 대신에 출주한 샤다이의 대타 딕터 랜드의 날카로운 추입에도 밀려버리며 3착.
그리고 바로 다음 경주인 운명의 일본 더비. 실적에서도 실력에서도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언론의 노골적인 홀대로 더비의 유력 우승마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3번 인기 단승 9.4배. 1번 인기인 사커 보이는 단승 5.8배. 2번 인기인 사츠키상 우승마 야에노 무테키가 6.4배. 사쿠라 치요노 오는 이번에도 교과서같은 선행 리드로 2번 위치에서 경기를 진행하고, 그 바로 뒤를 메지로 아르당이 마크하며 뒤따르는 사츠키상의 재현같은 레이스가 진행되었다. 야에노 무테키는 이번에는 중단의 선입 위치에서 진행, 사커 보이는 후미에서 추입을 노리고 있었지만 애초에 다리도 컨디션도 제 상태가 아니라 마군을 뛰쳐나올 힘조차 없었다. 마지막 직선에서 메지로 아르당이 사쿠라 치요노 오를 추월하며 사츠키상의 재현을 완성하려는 순간, 똑같은 패배를 두 번 당할 수는 없다는 듯이 골을 100m 앞둔 지점에서 사쿠라 치요노 오의 집념 어린 재추월이 발동. 메지로 아르당을 목차이로 누르고 더비 우승을 차지한다. 그것도 1982년 뱀부 아틀라스가 세운 2분 26초 5의 기록을 0.2초 단축하는 레코드 승리였다.[3]
더비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던 마루젠스키의 자식인 점, 그리고 더비 2주 전 전년도의 선배인 사쿠라 군단의 최초의 2관마 사쿠라 스타 오가 안락사 되었기에 관계자들에겐 감회가 남다른 승리였다. 마주는 치요노 오의 승리에 대해 스타 오가 뒤에서 밀어주었다는 감상을 남겼다.[4]
허나 사쿠라 군단 유력마들 특유의 사나운 부상운[5] 을 비켜가지 못했고, 이 일본 더비의 승리가 커리어의 정점이 되고 만다. 아비인 마루젠스키와 마찬가지로 굴건염이 발병한 것. 1년에 걸친 긴 휴양을 거치고 복귀했을땐 이미 전성기의 능력을 다 잃은 상태로, 야스다 기념에서 16착,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16착이라는 대패 2회의 기록을 남긴채 은퇴한다.
이후 종마로 데뷔하여 더트와 터프에서 각각 중상마도 배출하였지만, 기대에는 좀 못미치는 느낌으로 끝났다. 특히 전형제인 형 사쿠라 토코가 1994년 천황상 가을 우승마인 네하이 시저를 배출하면서 더 비교되는 부분도 있다. 2001년에는 종마 생활도 끝내고, 거세 후 공로마로 여생을 보냈으며, 2012년에 노환으로 삶을 끝냈다.
[각주]
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사쿠라 커머스, 일명 사쿠라 군단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더비 호스. 이름은 스모의 요코즈나 치요노후지[2] 에서 따왔다.
2. 혈통[편집]
전형제 사쿠라 토코(サクラトウコウ)는 하코다테 3세 스테이크스, 1986년 타나바타상 우승마다.
반형제로 사쿠라 호쿠토 오는 1988년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 우승마다.
3. 생애[편집]
오구리 캡과 같은 해 출생의 당시 클래식 유력 주자 중 하나였다. 아비는 마루젠스키.
사쿠라 군단에서 동갑내기 중에 주목받는 말이 받게되는 오(王)의 이름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한 말이었다. 오랜기간 사쿠라 군단의 전속 기수로 활동한 코지마 후토시 기수와 콤비를 이뤄 참가한 신마전에서는 배당률 1.0의 압도적 인기를 받고 마지막 직선에서만 후속마와 3마신 반이라는 차이를 벌리고 우승, 이름값이 허세가 아니라는걸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OP 후요 특별에서 1번 인기로 우승, OP 이초 특별에서도 1번 인기로 지지받았지만 불량 마장으로인해 마이네르 로직의 도주를 따라잡지 못하고 2착에 머무른다. 그리고 3세(현 2세) 시즌의 결정전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1번 인기를 받고 우승을 하기는 했는데, 그 해에는 폭설로 인해 두번이나 경기 일정이 바뀐 영향으로 출주마 6두라는 한산한 레이스로 2위인 츠지노 쇼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별 굴곡없이 나란히 달리다 마지막에 목차로 앞서며 우승. 그 해 언론에서는 '강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플러스 알파를 느낄수가 없었다. 더 성장할 것 같지 않다'는 악담에 가까운 평가를 받게 되는데, 같은 주니어 G1 우승마임에도 크게 호평을 받았던 한신 3세 스테이크스의 우승마 사커 보이와는 비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 해의 최우수 3세마는 사커 보이가 가져갔는데, 기자 투표의 득표수가 8배가 넘는 차이였다.
3.1. 1988년[편집]
4세(현 3세) 시즌으로 넘어와 88년 클래식 전선으로 나선 첫 경주인 G3 교도통신배에서는 주니어 G1 우승의 실적으로 1번 인기를 받지만, 시작부터 주도권을 뺏기고 끌려가는 레이스를 보이다 4착에 그치게 된다. 조교사는 조교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아무튼 이때의 모습과 전년도 언론의 혹평이 떠오르면서 이후 사쿠라 치요노 오는 단 한번도 1번 인기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해의 두번째 경주인 G2 야요이상에서는 바로 그 경쟁마 사커 보이에게 1번 인기를 뺏기고, 2번 인기로 출주. 2마신차로 사커 보이를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한다. 그 다음 경주는 클래식 삼관의 스타트 사츠키 상. 사커 보이가 부상으로 출주 회피를 한 상황에서 전 경기에서 사커 보이에게 복수도 끝낸 사쿠라 치요노 오가 어지간하면 1번 인기를 받을만 한 상황임에도, 그 전의 교도통신배에서 사쿠라 치요노 오를 추월하고 3착으로 들어왔던 모가미 나인이 1번 인기를 가져가고 사쿠라 치요노 오는 2번 인기에 그친다. 3번 위치에서 그림같은 선행 리드로 경주를 이끌었지만, 바로 뒤에 붙어서 마크하던 야에노 무테키가 마지막 직선에서 추월하며 1마신 차이로 1위를 내줌과 동시에 사커 보이 대신에 출주한 샤다이의 대타 딕터 랜드의 날카로운 추입에도 밀려버리며 3착.
그리고 바로 다음 경주인 운명의 일본 더비. 실적에서도 실력에서도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언론의 노골적인 홀대로 더비의 유력 우승마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굴욕을 당하면서도 3번 인기 단승 9.4배. 1번 인기인 사커 보이는 단승 5.8배. 2번 인기인 사츠키상 우승마 야에노 무테키가 6.4배. 사쿠라 치요노 오는 이번에도 교과서같은 선행 리드로 2번 위치에서 경기를 진행하고, 그 바로 뒤를 메지로 아르당이 마크하며 뒤따르는 사츠키상의 재현같은 레이스가 진행되었다. 야에노 무테키는 이번에는 중단의 선입 위치에서 진행, 사커 보이는 후미에서 추입을 노리고 있었지만 애초에 다리도 컨디션도 제 상태가 아니라 마군을 뛰쳐나올 힘조차 없었다. 마지막 직선에서 메지로 아르당이 사쿠라 치요노 오를 추월하며 사츠키상의 재현을 완성하려는 순간, 똑같은 패배를 두 번 당할 수는 없다는 듯이 골을 100m 앞둔 지점에서 사쿠라 치요노 오의 집념 어린 재추월이 발동. 메지로 아르당을 목차이로 누르고 더비 우승을 차지한다. 그것도 1982년 뱀부 아틀라스가 세운 2분 26초 5의 기록을 0.2초 단축하는 레코드 승리였다.[3]
더비에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던 마루젠스키의 자식인 점, 그리고 더비 2주 전 전년도의 선배인 사쿠라 군단의 최초의 2관마 사쿠라 스타 오가 안락사 되었기에 관계자들에겐 감회가 남다른 승리였다. 마주는 치요노 오의 승리에 대해 스타 오가 뒤에서 밀어주었다는 감상을 남겼다.[4]
3.2. 더비 승리 이후[편집]
허나 사쿠라 군단 유력마들 특유의 사나운 부상운[5] 을 비켜가지 못했고, 이 일본 더비의 승리가 커리어의 정점이 되고 만다. 아비인 마루젠스키와 마찬가지로 굴건염이 발병한 것. 1년에 걸친 긴 휴양을 거치고 복귀했을땐 이미 전성기의 능력을 다 잃은 상태로, 야스다 기념에서 16착, 타카라즈카 기념에서 16착이라는 대패 2회의 기록을 남긴채 은퇴한다.
이후 종마로 데뷔하여 더트와 터프에서 각각 중상마도 배출하였지만, 기대에는 좀 못미치는 느낌으로 끝났다. 특히 전형제인 형 사쿠라 토코가 1994년 천황상 가을 우승마인 네하이 시저를 배출하면서 더 비교되는 부분도 있다. 2001년에는 종마 생활도 끝내고, 거세 후 공로마로 여생을 보냈으며, 2012년에 노환으로 삶을 끝냈다.
4. 경주 성적[편집]
[1] 은퇴 이후 2001년에 거세되었다.[2] 198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 시절 최고의 선수였다. 참고로 치요노후지가 키운 제자 가운데 치요노오(千代ノ皇)라는 이름의 리키시가 있다. 2010년 3월에 데뷔하여 세키토리(関取)로 43대회를 보냈고 마쿠노우치(幕内)에 4대회 들어갔었으며 2022년 현재도 활동 중.[A] A B 중상마만 서술, 볼드 표시는 G1/Jpn1 우승마.[3] 이게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었는가 하면, 1980년 오펙 호스 2분 27초 8(이후 분은 제외), 81년 카츠 탑 에이스 28초 5, 83년 미스터 시비 29초 5, 84년 심볼리 루돌프 29초 3, 85년 시리우스 심볼리 31초, 86년 다이나 걸리버 28초 9, 87년 메리 나이스 27초 8, 89년 위너즈 서클 28초 8이다. 즉 이후 아이네스 후진이 25초대로 다시 갱신할 때 까지 삼관마 두마리 포함해서 어지간한 말보다 더 빨랐다는 뜻이며 80년대 한정하면 2번째로 빠르게 더비를 주파한 말이 된다.[4] 그런데 사쿠라 스타 오도 더비에는 부상으로 못나갔다. 대신 적성거리 내였고 더비 상위마들이 전부 다른 경기에서 스타 오에게 압살당한 말들인지라 "나가기만 했다면 당연히 우승"소릴 들었기 때문에 치요노 오는 나가고 싶어도 못나갔던 아버지와 부상으로 안타깝게 못나간 선배의 염원을 달성한 말이 되는 셈이다.[5] 사쿠라 바쿠신 오가 예외적으로 부상과 거리가 먼 커리어를 보냈고 그외엔 대부분이 부상으로 몇개월을 날리는건 기본이다. 당장 위에 언급된 사쿠라 스타 오는 계인대염-무리한 출주로 인한 골절로 안락사, 사쿠라 로렐은 골절로 1년 이상 휴양, 사쿠라 바쿠신 오의 아비인 사쿠라 유타카 오도 골절로 시즌을 날려먹었다.[6] 현 교도통신배.[레코드]
[각주]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2 10:27:58에 나무위키 사쿠라 치요노 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