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젠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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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모 퀼은 1959년 현재 G1 대회인 에이콘 스테이크스 우승 등 미국에서 14승을 기록한 실적이 있다.
홋카이도 이부리 종합진흥국의 경종마 농협 청년부의 미국 연수 여행에서 결원이 생기자 소 중매(仲買) 여권을 가지고 있어서 곧바로 참가가 가능했던 하시모토 젠키치 부부에게 동행을 권유했다. 하시모토는 어릴 적 말 목장에서 10년 간 일한 적이 있고 마주로서는 반에이 경마의 명마인 마루젠 스트롱호스 (マルゼンストロングホース)를 구입해 경마계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7] 마침 경주마 생산에 돌입하고자 했던 하시모토 부부는 이 연수에 참가하고 일정 중 옵션이었던 킨랜드 세일에 참가해 그 곳에서 조교사 혼고 시게히코와 알게되어 같이 말들을 둘러보았다.
하시모토와 혼고는 암말 실을 보고 둘다 실의 피부가 좋고 큰 몸집에도 밸런스가 좋아 감탄했다. 통역을 겸하고 있던 경주마 전문 영업인은 하시모토에게 실은 모계 혈통이 좋고 니진스키의 아이를 배고 있어 고액에 낙찰될 거라 설명했는데 이 얘기에 하시모토는 왠지 자존심 상하고 구매 의욕이 올랐다고 한다. 실의 경매에는 샤다이 그룹의 총수 요시다 젠야도 참가했는데 경매가가 25만 달러가 되었을 때 포기했다.[8] 하시모토는 부인에게 "그만둘까?" 라고 말했는데 부인은 "가지고 싶죠? 그럼 사세요" 라 대답했다. 결국 경매를 계속해 30만 달러(당시 약 9천만엔)에 낙찰받았고 여기에 수수료, 보험, 수송료, 관세 등이 붙으며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는 1억 2천만엔이 들었다고 한다. 이 가격은 지금이나 당시에나 어마어마한 고액이었고, 당연히 거품으로 보였기에 경마계에서는 한때 초짜 마주가 엄청난 바가지를 썼다며 수군대는 분위기였다.
마루젠스키가 태어난 후에 말을 보러 온 조교사 혼고 시게히코는 다리가 외향이긴 하지만 마체가 뛰어나 고평가했다. 하시모토는 마루젠스키가 태어난 지 10일 후에 바로 신문과 잡지에 광고를 내 300만엔 × 40구 총액 1억 2천만엔의 종마 신디케이트 회원을 모집해 한달만에 모두 채웠다. 그런데 2달 후 니진스키 초년도 자마인 니진스키 스타(ニジンスキースター)가 데뷔 전에서 12착을 기록하면서(결국 8전 0승으로 은퇴) 부진해 회원들이 이탈하면서 8명만 남게 되었다.
데뷔 전에는 다리 외향이 심해져 강한 조교를 할 수 없고 경주마로서 활약할 수 있을까 걱정을 받기도 했지만 막상 데뷔 후에는 그 혈통에 걸맞는 능력으로 나서는 경주마다 다른 말들과 압도적인 차이를 내며 연승 행진을 기록, 8전 전승에 8경주에서 후속마와 낸 거리 차가 총합 61마신, 경기 평균 7마신 이상에 이르는 괴력을 보였다. 당시 수입차 붐에 편승, '슈퍼카'란 별명을 얻었다. 특히 오늘날의 G1급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중앙경마에서 마지막으로 대차로 우승[9][10] 한 후 다시 종마 신디케이트를 열어 지난 금액보다 오른 500만엔 × 50구 총액 2억 5000만에 모집했는데 이 때 기존 신디케이트에서 탈퇴했다가 다시 신청한 회원들은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거기다 한 경기는 마루젠스키랑 붙기 싫어 출주를 줄줄이 포기하면서[12] 경기가 성립되지않을 정도로 출전마가 줄자 어떻게든 경기를 할 수 있게 대타 말들을 투입해준 조교사가 좀 봐달라(즉 타임 오버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해서 2.5마신 정도의 차이로 끝낸 것. 해당 경기 자료를 보면 겨우 겨우 레이스를 충족한 조건의 수를 채운 말들이었다.[13]
그러나 이 말은 지입마[14] 였으며, 71년부터 84년까지 국내 생산 보호의 명목으로 외산마와 동등한 취급을 받아 클래식 레이스를 비롯한 주요 레이스에 출전할 수 없었다. 이에 기수였던 나카노와타리 세이이치가[15]
출전 제한이 없었던 아리마 기념을 준비하던 중 굴건염이 발생해 은퇴했다. 당시 경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태어날 때부터 씨수말 생활이 예정된, 절대 무리해선 안 될 귀한 몸이었기에 바로 은퇴가 결정되었다. 이때 마루젠스키가 출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상상은 일본 경마 팬들의 단골 떡밥. 당대 최강의 국산마들이었던 TTG와 마루젠스키의 정상결전을 바라던 팬들에겐 아쉬움을 남겼다. 하필이면 이 77 아리마 기념에서 보여준 토쇼 보이, 텐 포인트의 일기토가 역대급 전설로 회자되는 만큼 더욱 그런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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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하시모토 젠키치가 경영하는 홋카이도 몬베츠초 토요사토 스탤리언 센터에서 종마로 전업, 첫 해에 킷카상 우승마를 배출하는 등[21] 그 실력을 피로 증명했다. 스페셜 위크[22] , 메지로 브라이트, 라이스 샤워, 위닝 티켓, 카렌짱[23] 등이 이 말의 외손자. 자마 경향은 본인이 뛰어보지 못한 장거리/더트 쪽 적성이 강했으며, 80~90년대에는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에는 일본 경마의 고속화 경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마루젠스키가 씨수말로 성공을 거두게 되자, 아비인 니진스키 2의 자마들이 씨수말로 나올 때마다 일본의 마주들이 모두 쓸어갔다.[24] 그런데 훗날 일본에 선데이 사일런스가 들어와 SS계가 일본 경마계를 지배하자 니진스키 2의 자마들이 밀려나 버렸고, 같은 시기에 중소 목장들이 같은 니진스케 2계인 람타라를 수입하여 무리하게 마루젠스키계 자마와 근친 교배를 시도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직계 혈통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비SS계의 수요를 킹 카메하메하가 성공해 버려서, 다시 한번 직격타를 맞았다.[25]
다만 세계적으로 보면 직계가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고, 일본이 가져가지 않은 칼리언, 니니스키-로미타스, 로열 아카데미-벨 에스프릿 혈통 등이 유럽, 호주 등지에서 살아남아 있다. 블랙 캐비어나 데인드림 등이 대표적인 니진스키의 직계 후손.
1979년산
1980년산
1985년산
1989년산
1992년산
1997년산
1998년산
2011년산
[각주]
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이자 JRA 현창마. 이름의 유래는 마주의 가호인 마루젠(丸善)+아버지인 니진스키 2. 터무니없는 스피드로 당대의 경마계를 제패했으나 지입마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6] 자신의 능력을 전부 보여주지 못한 채 은퇴할 수 밖에 없던 경주마다.
2. 혈통[편집]
조부가 20세기 최고의 종마 노던 댄서, 아버지가 잉글랜드 트리플 크라운의 니진스키 2, 외조부가 13연승 전설의 벅패서로 당시 경마 변방국이던 일본의 수준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귀족 혈통이었다. 하지만 앞다리가 무릎 아래쪽부터 바깥쪽으로 굽어 있어 경주마로서는 다리에 폭탄을 매달고 있는 셈이라 강도 높은 조교가 불가능했다. 혈통이 높이 평가되어 태어나자마자 씨수말(예정) 신디케이트가 결성될 정도였기 때문에, 절대 고장내서는 안 되는 귀한 몸이었기도 하다.
외조모 퀼은 1959년 현재 G1 대회인 에이콘 스테이크스 우승 등 미국에서 14승을 기록한 실적이 있다.
3. 생애[편집]
홋카이도 이부리 종합진흥국의 경종마 농협 청년부의 미국 연수 여행에서 결원이 생기자 소 중매(仲買) 여권을 가지고 있어서 곧바로 참가가 가능했던 하시모토 젠키치 부부에게 동행을 권유했다. 하시모토는 어릴 적 말 목장에서 10년 간 일한 적이 있고 마주로서는 반에이 경마의 명마인 마루젠 스트롱호스 (マルゼンストロングホース)를 구입해 경마계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7] 마침 경주마 생산에 돌입하고자 했던 하시모토 부부는 이 연수에 참가하고 일정 중 옵션이었던 킨랜드 세일에 참가해 그 곳에서 조교사 혼고 시게히코와 알게되어 같이 말들을 둘러보았다.
하시모토와 혼고는 암말 실을 보고 둘다 실의 피부가 좋고 큰 몸집에도 밸런스가 좋아 감탄했다. 통역을 겸하고 있던 경주마 전문 영업인은 하시모토에게 실은 모계 혈통이 좋고 니진스키의 아이를 배고 있어 고액에 낙찰될 거라 설명했는데 이 얘기에 하시모토는 왠지 자존심 상하고 구매 의욕이 올랐다고 한다. 실의 경매에는 샤다이 그룹의 총수 요시다 젠야도 참가했는데 경매가가 25만 달러가 되었을 때 포기했다.[8] 하시모토는 부인에게 "그만둘까?" 라고 말했는데 부인은 "가지고 싶죠? 그럼 사세요" 라 대답했다. 결국 경매를 계속해 30만 달러(당시 약 9천만엔)에 낙찰받았고 여기에 수수료, 보험, 수송료, 관세 등이 붙으며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는 1억 2천만엔이 들었다고 한다. 이 가격은 지금이나 당시에나 어마어마한 고액이었고, 당연히 거품으로 보였기에 경마계에서는 한때 초짜 마주가 엄청난 바가지를 썼다며 수군대는 분위기였다.
마루젠스키가 태어난 후에 말을 보러 온 조교사 혼고 시게히코는 다리가 외향이긴 하지만 마체가 뛰어나 고평가했다. 하시모토는 마루젠스키가 태어난 지 10일 후에 바로 신문과 잡지에 광고를 내 300만엔 × 40구 총액 1억 2천만엔의 종마 신디케이트 회원을 모집해 한달만에 모두 채웠다. 그런데 2달 후 니진스키 초년도 자마인 니진스키 스타(ニジンスキースター)가 데뷔 전에서 12착을 기록하면서(결국 8전 0승으로 은퇴) 부진해 회원들이 이탈하면서 8명만 남게 되었다.
데뷔 전에는 다리 외향이 심해져 강한 조교를 할 수 없고 경주마로서 활약할 수 있을까 걱정을 받기도 했지만 막상 데뷔 후에는 그 혈통에 걸맞는 능력으로 나서는 경주마다 다른 말들과 압도적인 차이를 내며 연승 행진을 기록, 8전 전승에 8경주에서 후속마와 낸 거리 차가 총합 61마신, 경기 평균 7마신 이상에 이르는 괴력을 보였다. 당시 수입차 붐에 편승, '슈퍼카'란 별명을 얻었다. 특히 오늘날의 G1급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중앙경마에서 마지막으로 대차로 우승[9][10] 한 후 다시 종마 신디케이트를 열어 지난 금액보다 오른 500만엔 × 50구 총액 2억 5000만에 모집했는데 이 때 기존 신디케이트에서 탈퇴했다가 다시 신청한 회원들은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8경주중 단연 압권인 경주는 일본 단파상으로 경주 도중 갑자기 속도를 떨어뜨리더니 후속마가 쫓아오자마자 다시 가속, 7마신차로 승리했다. 반쯤 놀면서도 이기는 모습에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한 사건. 그날은 마장상태가 몹시 나빠서 경주전 연습에서 마루젠스키의 나카노와타리 기수가 4코너 근처에서 멈춰서 주로 상태를 확인하였는데, 머리가 좋은 마루젠스키는 오늘은 여기가 골인가보다 하고 거기까지만 달리고 속도를 떨어뜨렸다고도 한다. 이 때 마루젠스키는 1번 인기의 단승 1.0배[11] 의 압도적 인기로 지지받고 있었는데, 마루젠스키에게 배팅한 수많은 관중들은 일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전 세계에 퍼진 니진스키 2의 자마를 조사하던 관계자가 니진스키 2의 자마 중 마루젠스키가 가장 강해보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거기다 한 경기는 마루젠스키랑 붙기 싫어 출주를 줄줄이 포기하면서[12] 경기가 성립되지않을 정도로 출전마가 줄자 어떻게든 경기를 할 수 있게 대타 말들을 투입해준 조교사가 좀 봐달라(즉 타임 오버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해서 2.5마신 정도의 차이로 끝낸 것. 해당 경기 자료를 보면 겨우 겨우 레이스를 충족한 조건의 수를 채운 말들이었다.[13]
그러나 이 말은 지입마[14] 였으며, 71년부터 84년까지 국내 생산 보호의 명목으로 외산마와 동등한 취급을 받아 클래식 레이스를 비롯한 주요 레이스에 출전할 수 없었다. 이에 기수였던 나카노와타리 세이이치가[15]
라고 애원한 일화는 유명하지만[16] 더비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7] 마주인 하시모토 젠키치도 처음엔 재판까지 고려하고 있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결국 포기하였다. 이후 소식을 들은 경마 팬들은 하시모토에게 마루젠스키가 출전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아 달라는 대량의 응원 편지들을 보낼 정도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JRA에선 '지입마가 출전 가능한 중상 레이스를 11경기에서 78경기로 확대'하는 완화 정책을 내놓으려고 했지만 일본 경종마 협회가 끝까지 반대한 탓에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18]"더비에 나가고 싶다. 맨 바깥에서 출발해도 좋다. 다른 말의 방해는 일절 하지 않는다. 상금도 필요 없다. 이 말의 능력을 확인만 하면 좋다."
출전 제한이 없었던 아리마 기념을 준비하던 중 굴건염이 발생해 은퇴했다. 당시 경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태어날 때부터 씨수말 생활이 예정된, 절대 무리해선 안 될 귀한 몸이었기에 바로 은퇴가 결정되었다. 이때 마루젠스키가 출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상상은 일본 경마 팬들의 단골 떡밥. 당대 최강의 국산마들이었던 TTG와 마루젠스키의 정상결전을 바라던 팬들에겐 아쉬움을 남겼다. 하필이면 이 77 아리마 기념에서 보여준 토쇼 보이, 텐 포인트의 일기토가 역대급 전설로 회자되는 만큼 더욱 그런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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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마 생활[편집]
[1] 당시 일본 JRA 나이 역산법에 따르면 24세.[2] 부상으로 인해 미국 클래식 3관에 전혀 출주하지 않고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1966년 미국 연도대표마가 된 말이다.[3] 그레이드제 도입 전에 활동한 말이라 레이스에 그레이드 구분이 없다.[4] 현 JRA상 최우수 2세 수말.[5] 이 문구는 카츠라노 하이세이코, 호요 보이, 키타노 카치도키의 히어로 열전 포스터에도 쓰였다.[6] 어미가 해외에서 교배를 한 상태로 일본에서 망아지를 낳았을 경우 그렇게 태어난 말을 부르는 명칭이다. 1971년 무역자유화로 해외 출신의 말을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게 되자 국산마와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국산마와 같은 취급을 하던 지입마를 외국산마로 취급하게 되었는데 일본경마는 외국산마가 아리마 기념을 제외한 국내 8대 경주 출전권을 금지했다.[7] 일본 마주협회 연합회에서 2016년 하시모토 젠키치씨의 막내딸로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1500m 동메달리스트 하시모토 세이코 참의원 의원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참고로 마루젠스키가 태어날 당시 세이코 의원의 나이는 10살 무렵이었고 암말 씰이 출산이 임박하자 일가족이 대기하면서 출산을 기다리기까지 했다고 한다.[8] 요시다 젠야는 미련이 남았는지 아들 요시다 카츠미를 데리고 정원을 구경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며 마루젠스키를 보러왔다고 한다.[9] 중상경기 전체로 따지면 사일런스 스즈카의 킨코상이 마지막 대차 승리로 기록된다.[10] 다만 마루젠스키가 대차로 승리한 아사히배는 당시 팔대경주가 아니어서 그런지 마루젠스키가 아닌 마루젠스키보다 1년전에 팔대경주인 오카상을 대차로 우승한 테스코 가비가 일본 중앙경마에서 마지막으로 G1급 경주를 대차로 우승한 경주마라고 불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11] 말 그대로 단승을 적중시켜도 걸었던 돈이 그대로 돌아올 뿐이다. 멀게는 신잔부터 근래의 나리타 브라이언, 딥 임팩트 등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경주마들이 단승 1.0배가 된 경우가 있다. 최근 JRA에서는 최종 배당률이 1.0배가 된 경우 1.1배를 돌려주고 있다. 다만 한국마사회는 배당률이 1배 이하로 떨어져도 1배까지만 보장해준다.[12] 단순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규약상 지나치게 수준 이하인 말들이 출주 수당만 노리고 출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타임 오버 룰이 제정되어 있는데, 1착과의 기록이 4초 이상(대략 20마신 정도) 차이날 경우 제재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13] JRA 규정 상 참가 말이 5마리가 안되면 무효 처리해버린다. 단 경기 당일에 출주를 취소한 경우에는 5마리 미만이라도 강행한다.[14] 持込馬. 임신한 채로 수입된 암말이 낳은 새끼. 한국에서는 포입마라고 부른다.[15] 마루젠스키의 8번 경기를 전부 담당했으며, 이후 기수 은퇴 후 조교사로 전직, 2010년에 조교사에서도 은퇴했다.[16] 이 일화의 대상이 된 1977년 도쿄 우준은 28마리 출주였고, 역대 최다 출전 두수는 무려 32마리나 된다. 거기다 TV중계에 이름을 많이 불리기 위해 승리 가능성과 관계없이 무작정 도주를 하는 일명 '테레비우마'들까지 즐비한, 도주마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지옥 같은 환경. 인코스를 잡는데 시간이 걸리는 최외곽 게이트면 더더욱 불리한 위치이다. 즉 해당 일화는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최악의 환경이라도 좋고 어떤 보상도 필요 없으니 그저 마루젠스키의 능력 검증만 허락해 달라'고 애원한 셈이다.[17] 근데 또 무서운 건 당시 경마 팬들도 전문가들도 '마루젠스키가 29번에서 출발했어도 이겼을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했다는 것. 실제로 1977년 우승마인 럭키 룰러는 최외곽 그룹인 24번 게이트에서 출발해 도주 전략으로 머리 차이 1착이었으니, 만약 마루젠스키가 29번에서 출발했다면 기록 인정은 못 받을지언정 1착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제법 있었다.[18] 너무한 처사라고 할 수 있지만, 지입마는 그 태생부터가 외래종으로 지정되어 그 나라의 경마계를 교란할 수 있으며, 출전 허락 시 처음부터 해외에서 우수 혈통으로 교배시켜 임신한 암말을 들여오는 꼼수를 쓸 수 있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19] 중앙경마 기준[20] 이후 순위 - 1999년 72위, 2000년 90위, 2001년 116위, 2002년 143위, 2003년 247위, 2004년 329위, 2005년 420위, 2006년 485위
은퇴 후 하시모토 젠키치가 경영하는 홋카이도 몬베츠초 토요사토 스탤리언 센터에서 종마로 전업, 첫 해에 킷카상 우승마를 배출하는 등[21] 그 실력을 피로 증명했다. 스페셜 위크[22] , 메지로 브라이트, 라이스 샤워, 위닝 티켓, 카렌짱[23] 등이 이 말의 외손자. 자마 경향은 본인이 뛰어보지 못한 장거리/더트 쪽 적성이 강했으며, 80~90년대에는 위세를 떨쳤으나 이후에는 일본 경마의 고속화 경향에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마루젠스키가 씨수말로 성공을 거두게 되자, 아비인 니진스키 2의 자마들이 씨수말로 나올 때마다 일본의 마주들이 모두 쓸어갔다.[24] 그런데 훗날 일본에 선데이 사일런스가 들어와 SS계가 일본 경마계를 지배하자 니진스키 2의 자마들이 밀려나 버렸고, 같은 시기에 중소 목장들이 같은 니진스케 2계인 람타라를 수입하여 무리하게 마루젠스키계 자마와 근친 교배를 시도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직계 혈통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비SS계의 수요를 킹 카메하메하가 성공해 버려서, 다시 한번 직격타를 맞았다.[25]
다만 세계적으로 보면 직계가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고, 일본이 가져가지 않은 칼리언, 니니스키-로미타스, 로열 아카데미-벨 에스프릿 혈통 등이 유럽, 호주 등지에서 살아남아 있다. 블랙 캐비어나 데인드림 등이 대표적인 니진스키의 직계 후손.
4.1. 주요 자마 목록[편집]
- 굵게 표시된 것은 GI/JpnI 경주.
1979년산
1980년산
- 니시노스키 -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1982)[G]
- 스즈카 코반 - 타카라즈카 기념(1985), 교토대상전(1984, 1986), 고베신문배(1983)
- 프로 메이드 - 카부토야마 기념(1984)
- 사쿠라 토코[26] - 하코다테 3세 스테이크스(1983), 타나바타상(1986)
1985년산
- 사쿠라 치요노 오 -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1987), 일본 더비(1988), 야요이상(1988)
- 그린 몰리 - 니가타 3세 스테이크스(1987)
- 인터 아니마토 - 주쿄 기념(1989)
- 카리브 송 - 메구로 기념(1991), 페브러리 핸디캡(1990), 금배(동)(1991), 브리더스 골드 컵(1994)
- 발리엔테 - 케이오배 어텀 핸디캡(1991)
- 다이이치 오이시 - 하코다테 3세 스테이크스(1989)
1989년산
- 유토 제인 - 니가타 3세 스테이크스(1991)
- 크라운 시티[28] - 케이오배 어텀 핸디캡(1996)
- 사쿠라 에이코 오 - 야요이상(1994), 타나바타상(1996)
- 리드스키 - 에델바이스상(1999)
- 타시로 스프링 - 판타지 스테이크스(2000)
4.2. 주요 Broodmare Sire (BMS) 산구[편집]
- 굵게 표시된 것은 GI/JpnI/J·GI 우승마.
- 오라토리오(아버지 케이준) - 케이오배 어텀 핸디캡(1990)
- 메이쇼 호무라(아버지 브레이비스트 로만) - 페브러리 핸디캡(1993)
- 라이스 샤워(아버지 리얼 샤다이) - 킷카상(1992), 천황상 (봄)(1993, 1995), 닛케이상(1993)
- 치어스 아톰(아버지 토쇼 보이) - 페브러리 스테이크스(1994)
- 스에히로 조오(아버지 토쇼 페가수스) - 한신 3세 암말 스테이크스(1992)
- 위닝 티켓(아버지 토니 빈) - 일본 더비(1993), 야요이상(1998), 교토신문배(1998)
- 와코 치카코(아버지 리블리아) - 교토 기념(1995), 엡섬 컵(1994), 하코다테 기념(1994), 금배(서)(1995)
- 마요 존(아버지 리블리아) - 니가타대상전(1996, 1997), 후쿠시마 기념(1996)
1992년산
- 유키 비바체(아버지 토니 빈) - 튤립상(1995)
- 로열 터치(아버지 선데이 사일런스) - 라디오탄파배 3세 스테이크스(1995), 키사라기상(1996)
- 사쿠라 스피드 오(아버지 사쿠라 호쿠토 오) - 케이세이배(1996), 교도통신배 4세 스테이크스 (1996)
- 메지로 브라이트(아버지 메지로 라이언) 천황상 (봄)(1998), 스테이어즈 스테이크스(1997), 아메리칸 자키 클럽 컵(1998), 한신대상전(1998), 닛케이 신춘배(1999), [라디오탄파배 3세 스테이크스(1996), 교도통신배 4세 스테이크스 (1997)
- 신푸 라이덴(아버지 와카오 라이덴) - 나고야 우준(1997)
- 토미켄 라이덴(아버지 와카오 라이덴) - 전일본 서러브레드 컵(1997)
- 오스미 제트(아버지 제이드 로버리) - 헤이안 스테이크스(1999, 2000), 나고야대상전(1999, 2000), 안타레스 스테이크스(1999), 머큐리 컵(1999, 2000)
- 티엠 톳큐(아버지 타마모 크로스) - 카부토야마 기념(1999), 후쿠시마 기념(2000)
- 스페셜 위크(아버지 선데이 사일런스) - 일본 더비(1998), 천황상 (봄)(1999), 천황상 (가을)(1999), 재팬 컵(1999), 야요이상(1998), 교토신문배(1998), 아메리카 자키 클럽 컵(1999), 한신대상전(1999), 키사라기상(1998)
1997년산
1998년산
- 메지로 베일리(아버지 선데이 사일런스) -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2000)
- 무가무추(아버지 팀버 컨트리) - 더비 그랑프리(2001), 홋카이도 3세 유슌(2000)
- 윈 라디우스(아버지 선데이 사일런스) - 케이오배 스프링 컵(2004), 도쿄신문배(2005), 후지 스테이크스(2005)
- 메르시 타카 오(아버지 사쿠라 유타카 오) - 나카야마 대장해(2004)
- 메가 스타덤(아버지 니혼 필로 위너) - 라디오탄파배 2세 스테이크스(2001), 주쿄 기념(2005)
- 디에스 썬더(아버지 타야스 츠요시) - 머큐리 컵(2003)
- 사쿠라 프레지던트(아버지 선데이 사일런스) - 삿포로 기념(2003), 나카야마 기념(2004), 삿포로 2세 스테이크스(2002)
- 후지 사일런스(아버지 후지 키세키) - 도쿄신문배(2006)
- 모에레 에스푸아르(아버지 맥스 마일스) - 삿포로 2세 스테이크스(2003)
- 디어 찬스(아버지 타이키 셔틀) - 머메이드 스테이크스(2007)
- 티엠 드래곤(아버지 어드마이어 베가) - 나카야마 대장해(2005), 한신 하이 점프(2005, 2007), 한신 스프링 점프(2006)
- 보너빌 레코드(아버지 아사티스) - 제왕상(2007), 카시와 기념(2008), 니혼테레비배(2008)
- 덴샤미치(아버지 사쿠라 바쿠신 오) - 케이오배 2세 스테이크스(2005)
- 킹 탑건(아버지 마야노 탑건) - 메구로 기념(2011), 하코다테 기념(2011)
- 타케 미카즈치(아버지 골드 알뤼르) - 더비 경 챌린지 트로피(2009)
2011년산
5. 기타[편집]
- 단거리와 마일 전적밖에 없는 이유는 지입마였던 탓에 규정 상 뛸 수 있는 중장거리 대회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아리마 기념에서 스태미나를 증명하려 했으나 부상으로 은퇴했고, 훗날 킷카상을 우승하는 자마를 배출하면서 스태미나 적성에 대한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했다.
- 일부 산구들이 한국에 수입되었으며, 그 중 1990년에 종마로 수입된 야마노스키(ヤマノスキー)가 뚝섬배와 문화일보배 우승마를 배출했다.
- 마루젠스키의 또다른 대표적인 별명인 밤색의 괴물은 훗날 마루젠스키가 죽은 해(1997년)의 아사히배에서 코스 레코드로 우승하며 마루젠스키의 재래라고 불린 그래스 원더가 물려받게 된다.
- 다른 유명한 명마들과 마찬가지로 마루젠스키 역시 머리가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일화로 평소 마루젠스키는 자신의 다리를 진단받는 걸 매우 싫어했는데, 진단받은 이후 다리의 상태가 좋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나선 진단받을 때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다리를 내밀어줬다고 한다.
- 마주 하시모토 젠키치는 마루젠스키가 죽을 때까지 친자식처럼 아꼈다고 하며, 마루젠스키가 심장마비로 죽자 자신의 둘째 아들인 것처럼 성대하게 장례식도 치뤘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마루젠스키의 묘비는 다른 유명 경주마들의 묘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모습이라 오히려 마루젠스키를 홀대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은적도 있는데, 정확히는 일부러 묘를 단촐하게 조성하여 경마꾼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쉬라는 마주의 배려가 담겨있다.[29]
- 마루젠스키가 탄생한 해인 1974년은 전설적인 슈퍼카가 출시된 해이기도 하다.
- 마주인 하시모토 젠키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루젠스키가 서말로 태어난다면 하시모토 젠키치의 가옥 이름에서 따온 관명인 마루젠(丸善)과 아비 니진스키 2의 이름에서 따온 마루젠스키, 딸로 태어난다면 미스 마루젠(ミスマルゼン)이란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는 일화가 있다.[C]
- 2023년 더비 개최 전에 흥미기획으로 "경마 기자들이 꼽은 꿈의 더비"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역대 더비 우승마 중에서도 강하다고 인지되는 18두 외에 어째선지 마지막 19두 째로 마루젠스키가 뽑혔다. 이는 지입마라 더비에 못 나가게 되자 "승부나 위치 관계 없이 그저 이 말의 능력 만이라도 보고 싶다"라며 기수가 사정한 일화를 들어 if 적 망상으로 넣은 것이라는데 딥 임팩트나 심볼리 루돌프, 나리타 브라이언 같은 역대 삼관마나 더비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던 오르페브르나 키즈나 같은 말들을 제치고 가장 기대를 받는 말이 되었다. 게다가 마루젠스키가 기대받는 이유는 마루젠스키를 선택한 기자들이나 마루젠스키가 우승할 거라 생각한 팬들이 모두 같았는데, 이 멤버라면 마루젠스키도 전력을 다 할 테니까 였다. 놀면서도 이겼다는 마루젠스키가 얼마나 고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는 부분.
6. 경주 성적[편집]
[21] 이후 자마인 사쿠라 치요노 오가 88년 일본 더비에서 우승하여 아비의 못 이룬 꿈을 쟁취했다.[22] 스페셜 위크의 어머니였던 캠페인 걸은 출산 직후 죽었다.[23] 정확히는 외증손.[24] 일본 버블 경제의 최전성기여서 돈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가 없었다.[25] 2024-04-23 14:50:17 기준으로 일본에서 직계 후손 중 종마로 활동하는 게 쿠라 구오(クラグオー) 단 1마리. 쿠라 구오의 전체 산구 중 숫말은 2마리뿐인데, 둘 다 지방을 전전하며 영 좋지 않은 성적을 보여 주고 있어 종마 선정 확률이 사실상 0%다.[G] A B 1984년 이전에는 그레이드제가 도입되지 않았다.[26] 사쿠라 치요노 오의 전형제, 네하이 시저의 아비[27] 아비의 장거리 적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한 말 중 하나이다. 다만 생애는 그리 순탄치 못했는데, 마주가 탈세를 해서 마련한 돈으로 레오 더반을 구입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마주가 탈세로 구속당하는 소란통에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28] 골드 시티의 반형제[29] 과거 일본 경마꾼들 사이에는 명마의 묘비 가루를 타서 먹으면 잘 딴다는 속설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석재 묘비를 만들면 야음을 틈타 경마꾼들이 와서 묘비를 쪼는 등의 행위를 하기 때문에 해당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나무 묘비를 쓰거나 아니면 신잔, 라이스 샤워처럼 사후에도 참배객이 많은 말들은 원 묘비를 조촐하게 만들고 아예 두 번째 묘비를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다른 위치에 더 크게 조성해 팬들을 두 번째 묘비로 가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있으나 요즘에는 이런 경우는 보기 드물어졌다고 한다.실제로 최근에 죽은 타이키셔틀 같은 현창마는 지역 내 명마들이 모셔진 전용 묘지에다가 묻어두고 조그만 석재 비석을 세우는 정도로 끝낸다고 한다.[C] 출처: 일본중앙경마회 월간지 『優駿(유슌)』1997년 11월호, p.111-114[레코드] A B [30] 1977년 킷카상 우승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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