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엽/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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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수 경력
3. 역대 성적
4. 수상 목록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현주엽의 현역 시절 경력을 정리한 문서.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어요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포워드 이승현


농구 좀 잘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현역 은퇴 기자 회견 中



2. 선수 경력[편집]



2.1. 휘문중·고등학교[편집]



어머니는 전 국가대표 출신 농구선수인 홍성화. 정작 현주엽은 이 사실을 처음 농구에 입문한 중학교 1학년 때 알았다고 한다. 즉, 농구선수의 피를 타고는 났지만 시작은 늦은 편. 거기다 서울도성초 6학년때에는 씨름코치의 눈에 띄어 엉뚱하게도 모래판의 유혹을 받았을 정도로 살이 많이 오른 통통한 체격이였던지라 농구명문 휘문중에도 농구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으로 입학했다. 겨우 농구부에는 들어왔지만 1년 동안은 벤치에서만 보냈을 정도로 1, 2학년 때는 존재감 없이 팀내에서 연습만 하고 있었다. 이때 현주엽과 같이 구석에서 연습만 하던 1년 선배가 바로 위장 전학 야구를 하다가 농구로 갓 전향한 서장훈이었다. 이 둘은 농구선수로 기본기를 다지고 폭풍성장하면서 동시에 잠재력이 폭발했고 단숨에 에이스로 거듭났다.

현주엽은 중학교 3학년의 신분으로 1990 농구대잔치 올스타전에서 덩크슛을 선보일만큼 살이 확 빠지면서 몸이 날렵해졌고, 볼을 다루는 본능적인 감각과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났다. 이듬해인 올스타전 덩크슛 경연에선 3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휘문고 1, 2학년 시절에는 서장훈과 함께 전국대회를 모조리 휩쓰는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1992년 2학년때부터는 청소년 대표로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며 성장해 나갔다.

한국판 바클리라는 별명을 얻게 된것도 이때로 북경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현주엽이 일본과의 경기에서 파워있는 골밑플레이를 펼쳐 한국팀의 승리를 주도하자 일본기자들이 “한국판 꼬마 바클리 때문에 졌다” 고 보도했던 것. 1993년 3학년때는 22세이하 대표로 아시아와 세계대회에서 활약했다. 출처

서장훈이 졸업한 후에도 현주엽은 휘문고를 혼자 이끌며 전성기를 이어갔다.



2.2. 고려대학교[편집]





그땐 참 대단했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에 살았는데 소녀 팬들이 밤낮 없이 우리 집에 몰려들어 엘리베이터, 담벼락 등에 낙서까지 해댔다. 동네사람들에게 미안해 새로 페인트칠을 해준 적도 있다.

인터뷰 中


18세때인 1993년 국가대표로 발탁될 만큼 탁월한 기량을 갖춰 고려대의 대들보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서장훈과는 절친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선수로서 서로 간의 라이벌 의식은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휘문고 시절부터 초고교급으로 분류되던 현주엽은 고려대와 연세대 양교 관계자들의 치열한 경쟁속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오다 고3때인 1993년 3월 31일 기자회견을 열고 고려대 진학을 발표한다. 이후 현주엽이 밝힌 바에 따르면 1993년 3월 대학연맹전에서 고려대가 8강 진출에 실패하는 것을 목격하고 고려대 진학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현주엽의 아버지인 현진구가 고려대 출신이라 아버지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고대에서 현주엽을 영입하기 위해서 여러 조건들을 맞춰주겠다 했는데 현주엽의 아버지께서 “아들농구로 돈 챙겼다”는 소리는 절대 안듣겠다며 그런 조건들은 차치하자고 농구만 보고 어느 학교에 입학할지 결정하겠다고 하셨다는 풍문이 있다. 스타선수들이 대학 진학 협상과정에서 많은 조건과 혜택을 약속받던 당시 스포츠계 관행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현주엽 같은 고교농구 슈퍼스타가 어떤 조건도 미리 약속받거나 협상테이블에 올리거나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1]










이후 서장훈과 현주엽은 대학 시절 내내 치열하게 격돌했다. 그러나 승자는 간발의 차이로 항상 우승을 차지했던 서장훈이었다. 서장훈은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등과 호흡을 맞추어서[2] 2차례 농구대잔치 우승에 성공하지만, 현주엽과 전희철, 양희승, 신기성, 김병철이 포진한 고려대는 끝내 농구대잔치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3][4]


파일:BEB0FE92-82EC-41C7-BDAC-36E29E82B069.jpg


또한 고려대 2학년때인 1995년 세계코치협회와 미국농구 명예의 전당에서 창설한 월드청소년팀 대 미국청소년선발팀과의 경기에 월드청소년팀 12명 중 한명으로 뽑혔다.[5] 이대회 참가자들의 명단과 신상명세가 ‘명예의 전당’에 비치되고 이들의 사인이 담긴 농구볼이 영구전시토록 돼있어 현주엽은 한국농구사상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남긴 선수가 되었다. 원문 기사


문제가 된 것은 1998년. 1997년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드래프트 원칙이 세워졌는데, 1993년 입학인 서장훈은 1년 유학이라는 공백기[6]가 있는 관계로 졸업 시기는 같았지만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계약할 수 있었고, 현주엽은 드래프트 제도에 묶여 자기 마음대로 팀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주엽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결국은 제도에 수긍하고 그를 지명한 청주 SK 나이츠에 입단하여 서장훈과 같은 팀이 되었다. 그러나 드래프트 현장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2.3. 프로 경력[편집]



2.3.1. 청주 SK 나이츠(1998~1999)[편집]



파일:SK나이츠 시절의 서장훈과 현주엽.jpg


어쨌든 대학 무대를 평정한 슈퍼루키 2명을 동시에 보유하게 된 SK 나이츠는 단숨에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지만, 정작 시즌이 시작되고 보니 두 사람의 시너지 효과는 제로였다. 개인 스탯만 놓고 보면 현주엽이나 서장훈 모두 평균득점 20점을 상회할 정도로 준수했지만, 둘의 호흡 자체는 생각만큼 맞지 않았고 팀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7] 휘문고 때 검증되었던 서-현 조합이 왜 실패했을까? 이는 현주엽이 휘문고 시절과 달리 대학 진학 후 빅맨으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현주엽은 휘문고 시절 정통 포워드로 포스트업, 돌파, 슛등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3번 과 4번을 넘나드는 포워드 였지만 고려대 진학 후 4-5번 위주로 뛰었다.[8]

이렇게 된 것은 현주엽 입학 전까지 고려대에는 연세대서장훈을 막을 빅맨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8cm의 전희철은 원래 현주엽과 비슷한 타입의 전천후 포워드에 몸싸움이 약해서 서장훈과의 매치업이 안됐고, 당시 고려대 최장신이었던 2m의 유학생 박재헌은 부상 등을 이유로 많이 출장을 못했다. 이 때문에 키는 (서장훈에 비해서) 작지만 힘과 투쟁심을 갖췄고, 골밑 플레이가 가능했던 현주엽이 서장훈과 매치업하는 빅맨으로 낙점된 것이다.[9] 때문에 현주엽은 대학 시절 4년 동안 센터가 되었고, 프로에서 재결합했을 땐 이미 둘의 포지션, 레인지가 완전히 겹쳐버렸다.[10]

덕분에 이 둘을 조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안준호 감독은 중간에 경질을 당했고, 새로 부임한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한국농구 다이너스티를 이끈 90년대 최고명장이었던 최인선 감독은 이 둘을 조화시키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팀을 위해 결국 포기를 하게 된다. 평균 20득점 가깝게 올리는 선수지만, 어차피 외국인 선수도 있는 상황에서 역할상 포지션 중복으로 판단을 하면서 현주엽을 트레이드 카드로 쓴 것이다. 영입을 추진했던 팀의 당시 단장은 이인표였고, 스타가 필요했던 광주 골드뱅크 클리커스에서 현주엽을 원했고, 그렇게 1999년 12월 24일, 일명 '크리스마스 이브의 빅딜'을 통해 조상현과 현금을 얹어 골드뱅크는 현주엽을 영입했다.[11]


2.3.2. 광주/여수 골드뱅크-여수/부산 코리아텐더-부산 KTF(1999~2005)[편집]


골드뱅크에서 팀의 에이스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이 때 처음으로 어시스트에 눈을 떠서 평균 어시스트가 거의 포인트 가드에 맞먹는 7.6개, 5.0개를 기록할 정도. 만능 포워드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그도 신체 강건한 남자로 군대는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신체검사에서 196cm가 넘으면 군면제였지만, 공식 프로필과 달리 실제 신장은 이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12] 가면 가는 거라서 수긍하고 갔나 싶었는데, 문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가 금메달을 딴 것이다![13] 당시 상무 소속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던 현주엽은 4Q 막판 동점 슛을 성공시키면서 맹활약하며 한국 남자 농구가 20년만의 아시안 게임 우승을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군 복무중인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바로 병역특례를 적용하여 전역시키는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상무에 남아 군복무를 마쳐야 했다.[14]

2003년 8월 11일 전역, 곧바로 코리아텐더로 돌아가서 KTF에 인수된 뒤에도 역시 '포인트 포워드'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이미 현주엽의 무릎 상태는 좋지 않아 이미 연골이 닳아버린 상황이었고, 외국인 선수들과 부대껴야 하는 4번 자리에서 투쟁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포인트포워드는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함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정쩡함이었다. 그리고 현주엽은 불행히도 점차 어정쩡함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FA로 풀리기 직전인 2004-05 시즌 평균 14.2득점, 어시스트 7.8개를 기록하며 맹활약하고, PO에서도 평균 23점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어시스트와 PO 활약에 주목했지 점점 줄어드는 평균 득점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2.3.3. 창원 LG 세이커스(2005~2009)[편집]



어쨌든 이런 활약으로 현주엽의 FA 가치는 높아졌고, 이를 주목한 것은 포워드에 환장하던 현대-KCC의 명장인 신선우 감독이었다. 부임 이후 FA로 즉시 질러서 현주엽을 영입했는데, 결국 무릎이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젊은 때처럼 힘과 탄력으로 외국인 선수들과 맞짱을 뜰 수도 없었고, 패스에 주력하기에는 그의 무릎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냉정하게 말해 LG에서 먹튀로 전락했다. 보상 선수로 KTF로 간 송영진알에서 껍질을 깨면서 성장한 것에 비하면 LG의 손해.

그래도 LG의 전력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팀에 있던 첫 해를 빼고 나머지 3년 동안 모두 PO에 올랐다. 가장 전력이 좋았던 것은 2006-07 시즌. 그러나 이 해 KTF와의 4강 PO에서 폭행 사태로 외국인 선수 퍼비스 파스코가 영구제명되면서 졸지에 외국인 선수 한 명만으로 경기를 치른 LG는 결국 패하고 만다. 현주엽의 프로 선수 커리어 동안 가장 챔피언결정전에 가까웠던 순간이 이때였다. 이후 현주엽은 은퇴할 때까지 프로와 아마가 함께 뛰던 시절의 농구대잔치[15]와 KBL을 통틀어서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16]

사실 농구선수 현주엽에 있어서 KBL 프로농구 선수로 경력이 오래 뛰었던 팀도 현역 시절 막판의 LG 세이커스였다. SK 나이츠에서 1년반을 뛰었으나 서장훈과의 포지션 중복으로 인해 약팀인 골드뱅크 클리커스와 이후 모기업 부도로 인해 인수되었던 KTF 매직윙스에서도 모두 1년반만 뛰었다. 전형적인 약팀의 에이스였고 당시 팀은 포인트 가드도 취약했다. 결국 본인의 가치와 팀의 승리를 위해 스코어링은 물론이고 어시스트를 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판단을 했기에 은퇴 때 살아남기 위해 패스를 했음을 고백했다. 자신도 롤 모델이 LA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포인트 가드였던 매직 존슨이었다.

하지만, 모교 대선배로 대학최약체인 명지대에서 종별선수권대회 토너먼트로 38년만에 우승 및 2년 연속 우승 이후 KBL 프로 감독이 된 강을준 감독에 의해 원치 않은 은퇴를 하게 되었다. 실제로 강을준 감독과 현주엽 선수는 모교 출신이지만 농구관이 완전히 달랐다. 강을준은 전형적인 올드 스쿨 겸 정통농구 스타일로 인해 파워 포워드나 센터는 골밑 수비와 리바운드였는데 이미 고장날대로 고장난 무릎으로 인해 적극적인 수비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골밑을 피하기도 했으며 가드 라인이 포화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패스놀이를 했으나 이마저도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전 신선우 감독과도 패스와 디펜스 사이에서의 갈등은 강을준 시절보다 더했다. 어떻게 보면 역대 KBL 최고 올어라운드 포워드의 비극 아닌 비극이었다.

2.4. 국가대표 경력[편집]



2.4.1. 1990년대[편집]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청소년 남자 농구대표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94년과 1998년 윌리엄 존스컵 국제 농구대회에 출전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발탁되어 2연속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5년 6월, 한국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한국 대표팀의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 티켓 획득에 기여했다.[17]

1995년 8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와 2년 뒤인 1997년 시칠리아 유니버시아드 대회 남자대표팀에 발탁되었다.

대학 3학년 때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국가대표 주전센터로 활약하였으나, 동년 11월 1일부터 11월 9일까지 중국 상해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22세이하 남자 농구 선수권대회에 발목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됐다.[18]




다음해인 1997년 FIBA 아시아 올스타전 당시 덩크 콘테스트에서 백덩크를 한 순간 백보드가 깨져버렸다. 이 위력적인 덩크 덕분에 우승을 차지했고, 심사위원인 조지 거빈이 벌떡 일어나서 환호할 정도였다. 여담으론 상금 500달러를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당시 기준으로 1,500만원 가량이었던 백보드 가격을 물어내야 하는 것인지 염려되어 기쁘지 않았다고 한다.[19] 다행히 대한농구협회에서 백보드 수리 비용을 내 주었다고. 이 장면은 아직까지도 농구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진귀한 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동년 8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제2회 세계 남자 청소년 농구 선수권대회(22세 이하) 대표팀과, 9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열리는 제19회 아시아 남자 농구 선수권대회에 선발되었다. 하지만 대회를 앞두고 출국만을 남겨놓았던 현주엽은 출국 당일 연습 경기를 가졌는데,[20] 국내 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잘못 부딪혀 코뼈가 완전히 주저앉는 중상을 입고 말았고 곧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결국 대표팀에서 빠지는 불운을 겪었다.[21]

1998년 6월 제13회 세계 남자 농구 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2.4.2. 2000년대[편집]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 발탁되어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부산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에서는 4쿼터 종료 직전, 극적인 골밑 득점으로 한국의 금메달 사냥에 디딤돌 역할을 했다.[22]

2003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을 겸한 제22회 아시아 남자 농구 선수권대회에서는 무릎수술 이후 재활치료 중인 서장훈과 함께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다.

2005년 7월엔 9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FIBA 아시아 남자 농구 선수권대회와 10월 마카오에서 열리는 동아시아 경기대회에 출전하는 대표님 명단에 올랐다. 8년 전에 겪었던 불운의 사고 때문인지 같이 대표 선수 생활을 했던 이상민에게 “형, 나 오늘도 출국 못하는 것 아니야? 라고 걱정하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그러나 그날 연습 경기에서는 결국 아무 일도 없었고 현주엽은 무사히 카타르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언제나 똑같지만 대표팀에 뽑히는 것은 선수로서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 몸 상태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팔팔한 대학생들이 뽑혀야 하는 자리에 공연히 내가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떤 역할이든 감독님의 지시에 따르면서 내년에 있을 세계선수권대회 진출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

FIBA 아시아 남자 농구 선수권대회 대표팀 출사표 中 기사


2007년 6월, 지난 5월 초에 무릎 수술을 받은 현주엽은 일본 도쿠시마에서 열리는 제24회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후 국가대표에서도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현주엽은 한 매체 인터뷰에서 농구인생의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로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중국과의 결승전을 꼽기도 했다.[23]


2.5. 은퇴 발표[편집]


2009년 초에 다친 무릎을 수술을 받기로 되있던 중에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농구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3월 시즌이 끝날 즈음에 구단으로부터 사실상의 은퇴 종용을 받았다. 그러다 4월에 아버지가 사망하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유일하게 의지하고 존경했던 분이 돌아가시자 세상 모든 일들이 하찮게 느껴졌다고. 아버지의 유언만을 꼭 지키고 싶었지만, 구단의 압박이 만만치 않자, 결국엔 은퇴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재활 도중 결국 선수 생활을 포기하면서 2009년 6월 24일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현주엽은 2009년 6월 25일 LG스포츠단 본사인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기자회견과 함께 은퇴를 선언했다. 이미 현주엽의 무릎은 2009-2010 시즌이 개막해도 12월에나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미 강을준 감독은 엔트리 문제로 인해 냉정해졌으며 귀화혼혈 드래프트 3순위로 문태영을 선발하면서 사실상 이별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현주엽은 강을준 감독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강을준 감독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을준 감독과 현주엽 선수는 대학 동문 스승이자 제자였지만 결국 한 팀에서 물과 기름처럼 비극으로 끝난 것이다.


은퇴 기자회견 당시 현주엽은 평소에도 자존심이 강했는데 구단 관계자들마저 자존심이 매우 상한 상태로 충격을 받았다. 이미 무릎 수술을 받아 목발을 짚으면서 가까스로 은퇴식을 할 정도였으며 팬들에게 이별하기 전 농구를 잘 했던 한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을 거라며 비극적인 은퇴를 하게 되었다.

화려했던 현주엽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끝맺음이 너무도 허망했다. 그래도 아시안게임에서 국가 대표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얻은 게 현주엽에게는 선수로서 누린 최고의 영광이자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2.5.1.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내외에도 어수선했던 고려대 농구부 감독 취임설이 돌기도 했으나 일선 지도자에는 딱히 마음을 두지 않은 듯.[24] 2010년 7월 스포츠의학, 재활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아마도 자신의 부상과 재활 실패가 정말로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문제는 은퇴하고 모아둔 돈을 펀드 매니저에게 모두 맡겼다가 이걸 다 날려먹는 피해를 본 것. 그리고 이 때 날아간 돈이 무려 17억이다. 결국 주변과 연락도 모두 끊어지고, 대외 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두문불출 그 사이 열린 OB 연고전이나, KBL 15주년 기념 올스타에 모두 선정되었지만 전부 다 불참했다. 이 일 관련해서 소송이 진행된 바 있는데, 이는 사건사고 항목 참조.


3. 역대 성적[편집]


역대 기록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1998-99
SK
34
230/413
(55.69%)
71/192
(36.98%)
141/206
(68.45%)
814
216
158
27
11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1999-00
골드뱅크
42
311/545
(57.06%)
42/159
(26.42%)
185/247
(74.90%)
933
234
299
51
10
2000-01
27
180/316
(56.96%)
3/17
(17.65%)
82/141
(58.16%)
451
153
134
30
1
2001-02
군복무(상무 농구단)
2002-03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03-04
KTF
44
194/421
(46.08%)
25/69
(36.23%)
106/165
(64.24%)
569
151
259
59
2
2004-05
53
218/426
(51.17%)
66/205
(32.20%)
120/167
(71.86%)
754
189
415
65
19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05-06
LG
54
200/376
(53.19%)
36/104
(34.62%)
96/151
(63.58%)
604
232
287
54
6
2006-07
46
133/268
(49.63%)
25/70
(35.71%)
85/135
(62.96%)
426
171
158
40
5
2007-08
53
144/282
(51.06%)
19/50
(38.00%)
76/109
(69.72%)
421
195
212
48
6
2008-09
44
98/203
(48.28%)
15/50
(30.00%)
55/82
(67.07%)
296
98
145
34
4
KBL 통산
(9시즌)
397
1708/3250
(52.55%)
302/916
(32.97%)
946/1403
(67.43%)
5,268
1,639
2,067
408
64


4. 수상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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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84 시즌
1984-85 시즌
1985-86 시즌
1986-87 시즌
1987-88 시즌
이충희
현대전자 / 가드, 포워드
임정명
삼성전자 / 센터
이충희
현대전자 / 가드, 포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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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에는 박한 감독의 정성도 한 몫을 했는데, 현주엽의 집에 찾아가서 자고 가기까지 하면서 부모님을 설득했다고 한다.[2] 이 시절 식스맨으로 뛰었던 게 김훈석주일이다.[3] 그나마 아쉬웠던 게 1995-96 농구대잔치에서 리그 전승우승을 달성하고 준결승에서 기아자동차에게 패해서 4강으로 만족해야 했다. 연세대도 4강이었지만 8승 5패에 우승 후보들 중에선 가장 약한 전력이었다. 일각에선 연세대최희암고려대박한 감독, 둘의 작전 능력 차이가 이런 결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4] 고려대 재학 시절에는 농구대잔치 우승을 못했지만 이후 상무에 가서 우승을 한 번 한다. 그리고 이게 농구대잔치와 프로농구를 통틀어 현주엽 선수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5] 동양인은 단 두 명 뽑았다고 한다. 상대팀인 미국청소년선발팀에는 무려 케빈 가넷(!!!), 스테판 마버리, 샤리프 압둘라힘, 로버트 트레일러같은 훗날의 NBA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6] 엄밀히 말해서는 실업팀 삼성전자와의 경기에서 당한 테러에 가까운 수비 때문에 다친 부상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휴식기에 더 가깝다.[7] 물론 여기에는 외국인 선수였던 토니 러틀랜드와 숀 재미슨(당초 선발했던 마이크 무어가 시즌 전 부상을 당해 교체로 온 선수)의 부진도 크게 작용했다.[8] 하지만 프로 초창기 때만 이랬을뿐 현주엽은 전형적인 3.5번 선수로 스윙맨과는 거리가 멀다.[9] 그 때문에 휘문고 시절보다 체중이 불어나면서 커리어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10] 더구나 한국 프로농구에서 빅맨의 역할은 주로 용병이 맡는다. 당시 SK에도 숀 재미슨이라는 빅맨이 있었다. 한 팀에 주전급 빅맨이 3명이나 되었던 것.[11] 이 트레이드로 청주 SK 나이츠는 2000년 KBL 챔피언결정전에서 팀의 첫 우승에 성공했다. 다만 이후에 서장훈과 조상현은 2002년을 끝으로 결국 헤어지게 된다.[12] 현주엽의 실제 키는 192~193cm 사이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농구선수의 공식 프로필 신장은 대부분 농구화를 신고 측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프로필로는 196cm가 넘던 상당수 농구선수들이 줄줄이 국군체육부대로 입대했다. 가장 압권인 것은 공식 프로필로는 198cm인데 신체검사에서 195.8cm가 나와서 입대하게 된 전희철이다.[13] 홈콜의 이점을 크게 누렸고 서장훈의 천적인 왕즈즈가 NBA 시즌 준비에만 집중하겠다고 국가대표 차출을 거부하고 불참했었다. 만약 홈콜이 아니었다면 4강전에서 탈락했어야 했다.[14] 다만 부대로부터 전환복무 제안을 받은 적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당시의 현주엽은 이미 말년병장이었다보니 전환복무를 해서 얻는 메리트가 별로 없다고 판단해서 이 제안을 거부하고 그대로 부대에서 남은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전역했다고 한다. 전환복무를 선택했을 경우 예술체육요원 봉사시간을 그대로 채워야했기 때문에 이미 말년병장인 상태에서는 전환복무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현명한 선택을 한 셈.[15] 엄밀한 의미의 농구대잔치 대회로는 2001-02 대회에서 상무의 우승으로 정상을 밟기는 했다.[16] LG 감독 시절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출연할 때 강병현 집에 방문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집 정가운데에 떡하니 놓여있는 우승반지 세 개를 보고 솔직히 부러웠다고 말한다. #[17] 당시 아시아에 배정된 올림픽 티켓은 2장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에 이어) 아시아선수권 2위를 기록하면서, 티켓 획득에 성공한다.[18] 대체선수로 같은 학교의 신기성으로 교체되었다.[19] 당시엔 운동경기 중 파손된 기구는 해당 선수나 국가에게 책임전가 시켰다. 지금은 주최측에서 보험을 들어놔 모두 책임져주고, 백보드 또한 부서지지 않게 설계되어 그럴일은 없게 되었지만.[20]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로 가는 비행기가 밤에 있었기 때문에 오전에 연습경기를 갖고 밤에 출국하는 일정이었다고.[21] 이때문에 한국이 우승을 차지했던 1997년 대회는 대표팀 엔트리가 12명이 아닌 11명으로 구성되는 해프닝이 있었다.[22] 홈콜의 이점을 크게 누렸고 서장훈의 천적인 왕즈즈가 NBA 커리어에 집중하겠다면서 차출을 거부해서 불참하였었다. 만약 홈콜이 아니었다면 4강전에서 탈락했어야 했다.[23] 후반에 교체 투입돼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으며 강국 중국을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했다.[24] 2014년 10월 이영미 기자와 회견에서 밝힌 바로는 고려대 농구부 관계자가 집으로 찾아왔으나 아직은 지도자로 나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