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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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치륭당송(治隆唐宋)
3.1. 숙청의 이유
4. 후계자 문제



1. 개요[편집]


홍무제의 평가를 다룬 문서.


2. 치륭당송(治隆唐宋)[편집]


파일:external/jiuyingzhi.com/suotouwugui-3.jpg
치륭당송(治隆唐宋), 강희제 어필, 난징 효릉
(명나라의 치적이 당나라와 송나라보다 더 융성했다)
어렸을 적 고생의 영향으로 탐관오리의 부정 부패를 끔찍히도 싫어했기에 재위기간 동안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그리고 오랜 혼란으로 황폐화된 토지 개간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훗날 청나라 강희제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 송나라 시절보다 융성했다는 의미의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황제다. 서민 신분의 사람이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된 것은 전한유방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1] 그는 가장 밑바닥 계층 출신으로 시작하여 천하의 대권을 잡은 황제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공신들을 쥐 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개국 3대 공신 중 유기, 이선장 등도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며 살아남은 공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족쳤다.[2] 게다가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아서[3] 더더욱 심했다.

백성들에겐 성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4]

특히 왕권강화를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이 숙청의 칼날에 희생되었다. 숙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명나라 건국 이후 죽어나간 공신과 그 가족들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를 정도. 주로 초창기에는 공신들 중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으며, 말기로 가면서 행정 체제가 점점 안정 궤도에 접어들자 권신들까지 싸그리 제거해버렸다.

또한 엄청난 일 중독자로 유명했다. 명군이나 명재상으로 이름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부지런했다는 것. 1380년 승상 호유용을 숙청하고 승상제도를 폐지했는데 이것은 황제가 승상의 일을 대신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승상제를 폐지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일일이 소화하는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그 아들이나 손자부터는 그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보조하는 신하를 두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승상제도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죽을 때까지 승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정무를 돌보았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얼마나 업무를 처리하는지 계산을 해봤는데 8일 동안 문서 3,391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어떤 일화에서는 어떤 상소문이 자신에게 올라왔는데 문제는 사건을 건의하고 해결책에 대해 청원하는 부분은 500여 글자 밖에 안되는 것 비해 자기를 찬양하는 구절만 1만 글자가 넘어간 상소문이었다. 그래서 안그래도 바빠죽겠는데 상소문을 읽던 신하가 자신을 찬양한 글을 6천 글자 쯤까지 읽자, 결국 찬양 구절을 읽느라고 시간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빡쳐서 그 신하를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두들겨 팼다고 한다.

덕분에 중화권에서 홍무제는 원조 천고일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한국에선 천고일제를 강희제의 별칭으로만 아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이는 명나라 시대의 이탁오가 언급한 개념으로 천고일제는 진시황, 한고제, 그리고 홍무제까지 3인이 원조다.[5] 실제로 바이두 같은 곳에서는 강희제도 천고일제에 들어가나요?라는 질문이 꽤 많다고 한다, 즉 중화권에서 천고일제라고 하면 진시황, 한고제, 홍무제가 원조이고 오히려 강희제가 후대에 말석으로 낀 형태로 언급되는 것이다.

진시황은 조부 진소양왕에게 물러받은 기반이 있었고, 한고제는 본인의 지분이 크긴 해도 장량, 소하, 한신이라도 있었으나, 주원장은 실질적으로 맨바닥에서 일어나 천하통일 과정에서 본인이 유방, 장량, 소하, 한신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서달, 이선장, 유기가 명나라 3공신으로 꼽히긴 하지만 막상 전공 따져보면 서달 말고 나머지 둘은 확실히 쳐진다. 저들이 공이 적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주원장 본인의 존재감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천하통일하고 제위에 오른 뒤에도 승상직을 폐지하고, 많은 신하들을 숙청하고, 온갖 입법, 행정 업무를 다 처리했다. 홍무제의 아들 영락제를 비롯한 후대 황제들은 주원장의 업무 처리 능력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내각대학사 등의 재상에게 일부 업무를 위임할 정도였다.

주원장이 천하통일에 나설 때부터 모든 정책은 주원장이 큰 그림을 그리고 모사들이 세부 계획 채우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보통 고전 군담물 같은데서 보면 책사들이 대전략을 제시하고 주군이 그 헌책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묘사되는데 주원장은 혼자 초인 노릇하고 있던 것이다. 이선장이 헌책 올렸는데 '내가 볼땐 영 별론데?' 해버리고 자기 말대로 해서 성공한 적도 여러 번이다. 심지어 기반 세력도 곽자흥의 것을 날먹하긴커녕, 오히려 몇백 명 있던 병사까지 장인한테 줘버리고 25명의 최측근만 데리고 의병을 모아 새로 다진 것이다. 25명으로 시작한 병력이 3천명, 4천명으로 늘어나고, 목대형을 굴복시킨 덕분에 2만명까지 불어난 군대를 군율 강조하면서 재조직한 것을 보면 흔하디 흔한 덕망있는 창업군주 올려치기식 일화와 궤가 다르다. 게다가 남경 함락이나 파양호 대전이라는 차력쇼까지 가면 그야말로 괴수가 따로 없다. 이후 나머지 군벌들과 몽골 잔당을 처리하는 것 역시 장수들을 보내는데 주원장이 서류 하나하나 살피면서 보급을 하며 소하 역할을 다 했다.

그리고 홍무제는 당대의 군벌치고는 통수를 거의 안 맞은 편인데[6] 이건 주원장이 직접 양자를 여럿 들여서 장수들 감군 노릇하게 시키고, 장수들 일가친척 싹 긁어서 인질 잡고, 장수들은 철저히 자기가 짠 작계대로 움직이게 했기 때문이다. 조금만이라도 이상한 짓한다 싶으면 바로 가족 몰살 시그널 보내며 철저하게 명나라 군정 모두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 이런 수준이니 주원장은 서달 말곤 다른 애들은 눈에 차지도 않았을것이다. 즉, 극도로 유능한 천재이자 독재자인 주원장의 시선에서 신하란 존재들은 스마트폰 같은 도구에 불과하고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홍무제가 만든 제도는 홍무제 본인 같이 유능한 황제가 국가의 모든 사무를 직접 결정하는 것으로 황제의 측근에 업무를 보조할 인원이 방대하게 존재하여야 했다. 그런데 황궁은 야간에 일정시간이 지나면 남성들이 남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였으나, 황제의 업무는 밤낮이 따로 없어야 했기에 황제의 심부름꾼들인 환관들의 발호는 피할 수 없는 것이였다. 당장에 홍무제 시기에는 고위직을 독점한 공신들을 제거하고 홍무제 본인이 유능했으니 크게 문제가 없었지만, 뒷시대가 되면 군신공치를 기본원리로 깔고 있는 성리학을 배운 관료층과 황제 친위세력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당장 명청교체기 당시 명나라가 청나라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부분은 동림당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세력과 환관으로 대표되는 엄당 세력의 갈등이 영향을 미친게 적지 않다. 또한 역사적으로 황제권 강화는 환관이나 외척의 발호를 불러왔다는 것을 생각하고, 더하여서 홍무제도 공신 및 관료층들에 대한 견제로 금의위를 창설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황제의 독재체제가 붕괴하던, 환관 및 외척들이 발호하던, 후손들 가운데 홍무제 본인급의 황제가 나오지 않는 이상에야 추후 발생할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였다. 그리고 후대의 명나라 황제들 중에 유능한 황제들은 있었어도 능력이 홍무제급인 황제는 당연히 나온 바 없다.

어쨌거나 홍무제가 만든 이런 황제의 제도와 위상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명청시대 중화권 황제들에게 일종의 모범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21세기가 된 오늘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한자문화권 황제들이나 군주들의 모습은 사실상 주원장이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때문에 명청시대 이전 동아시아 황제, 군주들도 이 시기와 비슷하다 생각하고 사극을 보다가 혼란해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3. 숙청[편집]


주원장의 커리어 중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행적이라면 숙청을 단연 빼놓을 수 없다.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와 잔혹성에 있어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나마 주원장의 숙청에 그나마 비견될 수 있는 사례로는 '10족을 멸'한 것으로 유명한 자신의 아들 영락제의 대숙청이다. 주원장은 자신을 도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공신들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죽였는데, 숙청이 대상이 된 사람들과 학연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에 주원장의 숙청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9만 또는 1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숙청이 비록 구세력을 구축하며 들어선 신생 국가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변론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주원장의 숙청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대규모였던 데다가 너무나 잔혹했다. 참고로 송나라의 경우만 봐도 비교적 온건한 숙청이 이루어졌다.[7]

주원장의 숙청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방법 또한 너무나 잔인했다. 주원장은 어지러워진 치안과 사법 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굉장히 잔인한 고대의 형벌로 범죄를 다스렸다. 특히 반역죄로 처형했을 때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 사람의 살을 포 뜨듯 떠내서 죽이는 능지형은 물론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는 특별히 박피형을 내렸다.

여기서 박피형이란 말 그대로 그대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다.[8] 주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워놓게 했다.[10] 심지어 그는 직접 형벌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돼지 털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하여 소세()[11]라는 형벌을 만들었다, 빗으로 씻긴다는 뜻인데, 그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벌거벗은 죄수의 몸에 펄펄 끓는 물을 여러 번 뿌린 뒤, 철로 만든 빗으로 쓸어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다. 이는 피부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릎 연골을 빼내는 알슬개(揠膝蓋), 내장을 꺼내서 죽이는 추장(抽腸)을 비롯하여, 전갈을 풀어서 물려 죽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바로 장형(杖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끔찍한 형벌들을 즐겼는지, 아니면 죄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이러한 형벌들을 집행하는데 직접 나와서 자신이 이러한 형벌들을 주도했다.

특히 형벌을 가할 때에도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게 했다. 능지처참을 할 때에도 칼로 살살 피부를 그어가다가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죽게 하였으며, 박피형을 행할 때에도 살을 천천히 벗겨서 죽기 직전까지만 살을 벗긴 다음에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가 박피로 처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망나니 또한 죽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엄벌주의와 별개로 순수하게 정치적인 숙청에까지 이런 혹형들을 폭넓게 활용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신들과 신하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마 황후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이성적인 브레이크를 걸어가면서 숙청을 진행했던 거 같지만, 마 황후가 세상을 뜨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공포와 폭압,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이러한 온갖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을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고 신하들은 모두 황제를 무서워했다. 아침에 신하들이 등청하여 주원장을 배알할 때, 만약 옥대(玉帶)가 배꼽 위에 있으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이겠다는 뜻이어서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만약 그가 옥대를 배꼽 아래로 누르고 있으면 그날은 사람을 대량으로 참혹하게 죽이겠다는 신호였으므로, 문무백관들이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樂鄕)하거나 은거(隱居)하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주원장은 그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들 중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명령을 어긴 신하, 한마디로 일을 고의로 대충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관리가 나오게 되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관직을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특히, 호유용 옥사의 잔재를 핑계삼아 일어난 남옥의 옥사 때 남옥을 포함한 호서파가 1만 5천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손 주윤문(후대의 건문제)이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직접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른 버전으로 황태손에게 가시 막대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들지 못하자, "내가 그 가시들을 전부 없애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12][13] 또 명산장이라는 사료에서는 주표가 이에 대하여 "위에 요순같은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요순의 백성이 있는 법"이라고 반박하자 주원장은 화가 나서 주표에게 의자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서 주표를 쫓아가며 때리려고 할 때 마침 주표가 그림 한 장을 떨구었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옛날에 마황후가 전장에서 홍무제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이라 마황후 생각이 나서 멈췄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권신과 그 일가족 3만여 명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 체제를 구축하였다.

주원장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철저히 황권에 필요한 소모품 정도로 봤다. 말 안 듣는 물건은 부셔버리고 새 거 사서 쓰면 되니, 아끼고 소중히 한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그래서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원장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그래야 일을 하니까. 숙청의 목적은 언제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황권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거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 자체가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서,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14]

홍무제의 황실 공식 어진은 위에 나온 것처럼 상당히 선하고 어진 임금의 인상이다. 사대부 쪽에서 그린 어진은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흉악한 폭군이나 다름없지만 명 초기에 부정 부패나 계급 고착화가 사라진 데에는 주원장의 역할이 상당했다.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목영, 탕화[15], 경병문, 곽영,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다.[16]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17]이다. 여기에 너무 만연하게 늘어지던 문장을 일소하고 실용적이며 간소한 문장을 지향한다면서 관리들을 후려쳤는데, 이 과정에서 관리들을 처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자의 옥마냥 여러 꼬투리를 잡아 죽이거나 탄압하고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희생시킨 점은 비난받는다. 문자의 옥만이 아니라 유학 경전을 탄압해서 절대 왕권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진심편 등을 대거 덜어낸 맹자절문.

지나친 숙청으로 명대부터 강대한 황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위력이 송대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이는 암군과 환관들의 발호 등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었고, 홍무제는 환관들을 확실히 찍어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다. 또한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하였다. 명 초기의 고문과 형벌은 전대의 왕조들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홍무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왕조 초기에는 법이 엄해야 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기존 공신 집단 숙청 등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국가 반역자나 연쇄 살인범과 같은 중범죄자가 아닌 이상 혹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며 초기를 제외하면 명대의 형벌이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근거는 없다.

명 왕조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형벌태장도유사의 5형이었지만, 홍무제는 자주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가 있다. 이러한 정식 형벌(5형)과 임의처벌(능지처사)이 공존하는 형태는 명대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한 - 당 - 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5형과 요 - 금 - 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왕조의 유산이 결합된 결과다.


3.1. 숙청의 이유[편집]


위의 내용만 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 미치광이 살인마로 보이나, 당시 시대적 상황상 숙청은 다음의 이유로 인해 필요악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한족 왕조나 한화된 이민족 왕조를 전조로 두지 않은 유일한 통일 한족 왕조였다. 이는 다른 신생 왕조들과 달리 오랑캐의 침탈과 방만한 통치로 인해 흩어진 한족 중앙 정부와 황실의 권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할 필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가뜩이나 송나라가 오랑캐 원나라에게 망해서 한족 중앙 정부와 황실의 권위가 바닥을 쳤던 데다 원나라의 행정력이 워낙 엉망이었던 탓에 명나라 건국 직전의 남중국에서는 신사-향리층이라 불리는 토착 세력가들이 중앙이고 뭐고 상관없이 알아서 멋대로 놀고 있었다. 중앙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를 없애려면 어느 정도의 숙청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숙청을 통해 공신을 비롯한 신하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았고(ex. 남옥의 옥사 등), 외척 세력이나 환관들이 정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으며, 각종 부정부패를 근절하는데에도 기여할 수 있었다(ex. 부마 구양륜 사사와 딸 안경공주의 처형 등)
  • 명 태조의 출신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기아에 시달리던 최하층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적떼에 가담하여 출세한 사람이었다. 이런 한미한 출신 배경으로 인해 설사 그가 탁월한 능력으로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 왕조를 개창하여 강력한 정치권력을 틀어쥐었다 하더라도 기존 지배계층이 진정으로 새 왕조를 존중하고 이에 충성한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명 태조는 이들을 숙청함으로써 견제하고 취약할 수 있는 새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위와 관련해서 명 태조는 과거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이것이 숙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18] 예를 들어, 탁발승 시절과 도적 시절은 주원장의 대표적인 역린이어서 주원장은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했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19],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도적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명 태조가 문자의 옥을 일으킨 배경의 하나로서 이러한 자격지심을 꼽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항주의 유생 서일기(徐一夔)가 올린 하표에 '광천지하(天之下), 천성인(天聖人) 위세작(爲世作)'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것은 '빛나는 하늘 아래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다스리는 법칙으로 삼았다'라는 뜻으로 주원장을 성인으로 추켜세운 극찬의 글이었다. 그러나 정작 주원장은 이 문구를 읽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생(生) 자는 승(僧)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중 노릇을 했다고 비난했고

광(光) 자는 독(禿) 자와 의미가 통하므로 그가 대머리라고 비난했고,

칙(則) 자는 적(賊)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도적 노릇을 했다고 비난한 것.

이라 주장하며 참수하라고 명했다. 물론 신하들은 황제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황제의 명령이고 반발을 잘못했다가는 공신 숙청 대상자 명단에 같이 올라갈 판이니 그대로 집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날 수(殊)자를 쓴 사람도 죽였다. 이유가 뭐냐면 저 글자를 파자(破字)해보면, 살바른 뼈 알(歹)자와 주원장의 성씨 주(朱)로 나뉘니, 이것은 주씨 일족의 살을 발라 죽이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물론 주원장이 아무 이유 없이 죽인 건 아니고, 과거 유생들이 이런 파자와 비유로 사람을 놀리는 것은 현대의 세로드립처럼 고의적인 경우가 꽤 많았고, 주원장은 말 그대로 진짜 흙수저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은 황제니까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경멸하고 있었고 저런 걸로 처형당하는 것조차 수두룩하게 나올 정도면 뒷담으로 까는 건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서일기가 돌려까기로 주원장을 비난한 게 걸린 것인지 정말로 황제를 극찬했는데 억울하게 오해를 받고 죽은 것인지 글의 의도는 서일기 본인만 알겠지만 주원장이 바보가 아닌 이상 사대부 사회 분위기를 몰랐을 리 없고, 황제의 입장에서는 사실이든 아니든 그냥 넘어가면 무식한 티를 낸다는 말을 듣게 된다. 현대라면 우연히 세로 드립이 욕이 되었는데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망신이지만, 저 시대에는 더 심각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초기의 숙청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숙청은 잦아지고 그 정도 역시 가혹해져 갔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숙청당했다. 이는 분명한 비판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하를 잔혹하게 다루는 풍조는 영락제도 마찬가지, 아니 더 심했다. 그나마 이후에는 정치적 필요성이 있다고 쳐도 연좌는 자제하고 적당한 범위 내에서 숙청을 하는 식으로 좀 완화되긴 했으나 그래도 숭정제원숭환의 무고 건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능지처사하는 등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 숙청과 관련해서는 경태제, 태창제처럼 뭔가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거나 천계제처럼 정말 어딘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황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면 명 황제들이 명군과 암군, 성군과 폭군 할 것 없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4. 후계자 문제[편집]


원래 장남인 주표황태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나,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원장은 "공신들은 닥치고 숙청!"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태자가 일찍 사망한 뒤에도 주체가 아닌 적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봉하여서 계승 원칙을 계속 지키려 노력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황실의 정통성 문제는 매우 중요했으므로,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려 한 홍무제의 의도 자체는 옳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정말로 장자 계승을 확립하려는 사람 치고는 다시 없는 뻘짓을 했는데, 바로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낸 것이었다.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고 국경 수비만 맡았지만 그래도 군사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장수들을 보내면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 대신 아들들에게 맡긴 것인데, 국경 수비 지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망 있고 유능한 황실 적자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과연 무슨 짓을 할까? 역사적으로 번왕 제도는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했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이를 거두어주도록 요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하였다. 결국 주체에 의해 이 문제가 현실화되면서, 나중에는 가까운 황족들에게는 봉토를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친왕 제도로 바뀐다.

물론 주원장은 아들들을 모아놓고 '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까, 마음 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하였다. 그리고 딴에 대비를 안 한 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둘째 진왕(秦王) 주상, 셋째 진왕(晉王) 주강, 넷째 연왕(燕王) 주체까지의 봉지는 시안 - 타이위안 - 베이징 순으로 붙어 있게 하여 한쪽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주상과 주강이 먼저 죽어버렸다.

이러니 당장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서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그중 건문제의 숙부 가운데 가장 항렬도 높고 실력도 있는 연왕 주체는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었다. 결국 번왕 숙청 프로젝트가 가동되자, 연왕 주체에게는 가만히 있다가 죽기 vs 어차피 죽을 거 반란 한번 일으켜보기 외의 선택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락제 입장에서 무고한 조카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억울한 것이다.[20] 애초에 장자 계승을 확립하고 싶었으면 번왕제를 쓰지 말든지, 죽기 전에 자기 손으로 아들들을 숙청하든지 했어야 했다. 조선 태종도 그렇게까지 아들 바보였지만 자기 손으로 양녕대군을 폐세자해서 내치고, 마지막엔 불가피하다면 죽이라고 세종대왕에게 지시까지 내려놓았다.

결국 의문태자 주표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적장손인 주윤문황태손으로 지명하였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주원장이 시골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훈훈한 인정미가 넘치는, 이른바 시골인심을 보여주지만 외부인들에 대하여는 어떠한 짓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골 사회의 특성이 황족 우대/공신 박대라는 주원장의 모습에 상당히 맞물린다는 것이다.

다만 이 후계 구도 관리 문제를 굳이 옹호하자면 황자들(즉 차기 황제나 차차기 황제의 형제, 숙부나 백부들)에게 어느 정도의 세력을 허용해야 하는지는 원래 답이 없는 문제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제위 계승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생각하면 황자들에게 세력(특히 군사력)을 가질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좋지만 대신 이 경우 황족의 세력이 미약해져서 그만큼 황가가 취약해지는 것. 세력을 가진 황족들은 황가 내부적으로는 황제에 대한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황가 외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진의 경우 황족사마씨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여 세력을 구축하게 한 탓에 황족 사이의 권력 분쟁인 팔왕의 난으로 멸망하였지만 반면 그 전 왕조인 위(삼국시대)의 경우 조비 이후 황족인 조씨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성장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억제한 탓에 조방의 즉위 이후 사마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위를 빼앗기고 만 것. 만약 조조의 후손들이 군사력과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마의가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시도했다 하더라도 제압 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물론 황통과 거리가 있는 황족의 경우 친황 세력으로써 조조 시절부터 쭉 푸쉬를 받았지만, 사마씨의 정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으며 빼박으로 그 친황 세력 중에서도 하후화처럼 사마씨에 붙은 족속들도 있었다. 즉, 황가의 세력이 미약해질 경우 권신의 발호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생기는 것이다. 애초에 서진 자체가 이를 거울삼아 황가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키워주다가 그 부작용으로 망한 것이기는 하지만. 요컨데, 중요한 것은 한쪽 노선에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괜히 한국 역사 커뮤니티에서 전근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논하며 홍대용위나라와 진나라간의 비교 평가가 주목받는게 아닌것이다.[21]

따라서 차기 황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황자들이 세력을 가지는 것은 곧 자신의 황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요소가 되지만 왕조 전체, 또는 왕조 창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황족들끼리 권력분쟁을 벌여 황제가 갈린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새 황제 역시 황족, 즉 왕조 창시자의 후손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물론 주원장의 입장에서도 자기 자식이나 후손들이 서로 싸우고 죽여대는 것이 달가운 일일 리는 없고,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국력의 약화나 정통성의 실추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도 발생하겠지만. 어쨌건 왕조 자체의 존속이 목적이라면 황자들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 어쨌거나 정난의 변 이후 등극한 영락제 역시 주원장의 아들이므로 왕조 자체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 왕조의 권위가 불안정한 개국 직후, 게다가 빈민 출신으로 가문의 세력과 명망 역시 변변찮은 상황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식들에게 군권을 맡김으로써 주씨 왕조의 기반 자체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주원장의 최초 복안이었던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이 실패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왕조 자체의 유지'는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 보다 더 상위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원장이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을 위해 정말 황자들을 숙청하거나 정치적으로 무력화했다면 정작 건문제가 즉위한 이후 숙부가 아닌 다른 권신들에 의해 황위를 위협받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왕조 창시자의 입장(즉 자기 왕조가 혈통적 정통성이 아니라 힘과 실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자기 스스로 잘 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주원장의 입장이라면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 통일 왕조와 상관 없이 단순히 서민 출신 '황제'만을 따지자면 너무 많아진다. 촉한유비, 후량주전충, 후조석륵 등.[2] 그나마 3대 공신 중 다른 한 명인 서달은 일찍 죽은 덕분에 숙청의 화를 면했으며 그의 가문은 명 왕조 내내 명문가로서 잘 살았다.[3] 이러한 태형을 정장(廷杖)이라고 부른다. 이전 왕조에도 있었지만 홍무제 대에 이르러 유례 없이 자주, 혹독하게 시행되었다.[4] 고려최승로성종에게 시무 28조를 바치면서 선왕들을 두고 자기 중심적인 평가를 내린 것을 보자. 실제로 서양 역사를 봐도 귀족층을 때려잡은 루이 14세 시대에 상공업과 중산층이 발전했고 반대로 귀족들의 힘이 강했던 러시아 제국에서 서민들의 삶은 시궁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기업을 키울 것인가 아니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일 것인가를 두고 모든 나라들의 고민거리다.[5] 셋 다 유학과는 영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이 때문에 이탁오 특유의 반유교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평가라는 얘기도 있다.[6] 한림아, 곽천서, 서수휘, 예문준, 장사성 싹 다 배신당해서 골로갔다.[7] 다만 송나라의 숙청은 역대 중국사에서 가장 온건한 숙청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8] 다만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이 명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명나라와 같은 시기 오스만 제국에서도 반역자 같은 중죄인들한테는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을 내렸다.#[9] 관료제로 인해 관료는 많은데 이들을 다 만족시킬만한 봉급을 줄 재정이 되질 않았다.[10] 다만 이렇게 했음에도 정작 부정부패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옛날의 형벌 제도 대부분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데 반해, 범죄율 감소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특히 관리는 봉급만으로 먹고 살기에는 벅찼기에[9] 관료들의 부패는 반쯤 생계형 비리이기도 했다.[11] 이 단어는 원래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는 것을 의미한다.[1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가지가 모두 실려 있다. 그리고는 '(악업은 다 이 할아비가 짊어질 테니) 너는 이 다음에 착한 정치를 하거라.'라며 황태손을 격려한다.[13]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심온을 살려줄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세종에게 태종이 이 가시나무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14] 숙청한답시고 인재풀을 싸그리 날려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 인재가 없으면 나라를 굴릴 수가 없다.[15] 탕화는 주원장의 성격을 어렸을 적부터 잘 알던 사이였고, 또한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기 때문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숙청 대상자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기에 미리 알아서 물러나거나 해서 위협이 되지 않으면 해치지 않았다.[16] 서달의 경우에는 숙청의 대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갑론을박이 많다. 서달의 경우에는 주원장과는 친하고, 근면성실한 태도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했기에 주원장의 눈에는 그저 친한 신하 내지 친우에 가까웠다. 게다가 등창에 걸려 중증을 앓고 있단 당시에 주원장이 서달에게 많은 약을 보내줬는데, 우연찮게도 그 것이 등창의 증세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숙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주원장이 작정하고 서달이 숙청의 대상이었으면 적어도 3족은 멸했을 터인데 그의 인척, 후손들은 남명때까지 가문이 유지되었다. 그래서 대개 서달은 주원장에게 있어서 다소 긴장하면서 주시하였지 숙청 대상까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7] 이들 중에 경병문은 정난의 변으로 처형되고, 곽영은 쫓겨나서 귀향했으며, 고성은 도중 붙잡힌 이후에 영락제를 도왔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쫓겨나지 않았다.[18] 이는 명 태조의 숙청을 옹호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숙청의 배경 중 하나로서 본 문단에 기술한다.[19] 지금도 중국어에서 대머리를 뜻하는 단어가 바로 광터우(光头)다.[20] 여기에 건문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번왕 숙청의 최종타깃은 연왕 주체였다. 문제는 그럴 거면 처음부터 주체를 잡아죽일 것이지 다른 번왕들부터 치는 바람에 주체에게 명분을 주었다. 정난의 변을 일으킨 영락제의 경우엔 장자 상속 원칙을 무시하고 억지로 막내아들을 세자로 세운 태조 이성계에 맞서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과 비슷하게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오히려 명분이 아예 없던 쿠데타는 수양대군이 벌인 계유정난.[21] 중국 외의 사례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경우 메흐메트 2세 이후 황권에 도전할 수 있는 술탄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다가 아흐메트 1세의 법 개정 이후 죽이지는 않지만 하렘 내의 밀실에 감금하도록 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황가가 단절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후자의 경우에도 수년에서 수십 년간 갇혀있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이 술탄으로 즉위하여 국가를 막장화시킨다는 문제가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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