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서(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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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 양나라를 다룬 사서(史書)로 타서로는 현재로써는 실전된 중서사인(中書舍人) 공소안(孔紹安)[1] 이 편찬한 양사(梁史)가 있다. 이외에서는 허형(許亨)의 양서(梁書)와 심약(沈約) 무제본기(武帝本紀)가 있다. 북제서나 진서 등과 함께 정관오사(貞觀五史)의 하나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함께 2대에 걸쳐 편찬된 사서라는 이름으로 평가받고 있다. 구양수(歐陽修)의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요찰(姚察)의 양서와 요사렴(姚思廉)의 양서를 아예 별개의 사서로 취급했으나 양서의 구성을 보면 별개의 사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수있다.
양서는 진나라 건국 후 편찬을 시작했으나 이것이 수십년을 거쳐 당나라 때 아들 요사렴에 의해 오늘날의 양서가 되었다.
2. 구성[편집]
기전체 구성으로 표(表)와 지(志)는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본기(本紀) 6권에 열전(列傳)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26권은 요찰이 지은 평이 실려있으며 경제기(敬帝紀)에는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이 지은 평가도 그와 함께 실려있다.
2.1. 본기(本紀)[편집]
2.1.1. 무제본기(武帝本紀)[편집]
남제(南齊) 명제(明帝)가 즉위한 494년부터 후경(侯景)이 건강(建康)을 점령한 549년까지를 다루며 무려 47년이라는 긴시간에 걸맞게 3권이나 차지한다.[2] 그 안에는 양무제 소연의 일대기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물들의 관직에 임명된 기록이나 사망한 기록, 조서를 내리거나 신하가 표를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양나라 초중반기의 기록을 흩어볼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요찰이 양서를 편찬하기 시작했을 시기가 진나라 시기였기 때문에 무제본기(武帝本紀)나 양태청기(梁太淸紀) 등 비교적 사료수집이 쉬웠고 다른 사서와는 다르게 양나라에 대해서 공정하게 서술되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는 더욱높다. 같은 시대에 편찬된 방현령(房玄齡)의 진서(晉書)가 학자들에게 좋지 않는 평가를 받은 것에 비해 양서는 학자들에게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았고 공정하다 평가를 받은 것은 당시 요찰이 양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인물이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본래 정사(正史)를 읽을 때는 먼저 본기를 읽어야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데 무제본기(武帝本紀)는 양나라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수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2.1.2. 간문제본기(簡文帝本紀)[편집]
후경이 건강을 함락하여 소강(蕭綱)을 옹립한 549년부터 예장왕 소동(豫章王 蕭棟)이 즉위한 551년까지를 다루며 옹립된지 2년만에 폐위되었기 때문에 아버지 무제에 비해서는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거기에다 후경의 난으로 한참 난리났던 상황에서 옹립되어 본인은 거의 한것이 없기 때문에 양서에 실린 본기(本紀) 중 기록이 가장 짧다. 본기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공정하고 후경의 악행을 잘 표현했다는 대부분이지만 이는 후경전(侯景傳)에서도 실린 기록인데다가[3] 내용도 짧아서 위의 무제본기(武帝本紀) 보다는 사료적 가치는 떨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체적으로는 공정하고 최대한 충실하게 기록했으나 다른 본기와는 다르게 사료적 가치는 떨어지며 차라리 소강을 옹립한 후경의 열전이 더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2.1.3. 원제본기(元帝本紀)[편집]
소동이 즉위한 551년부터 승성지변(承聖之變)이 일어난 554년까지를 다루며 무제본기(武帝本紀) 다음으로 분량이 많은 본기이다. 양서의 열전이 실리지 않은 소동의 전기 또한 일부 다루기 때문에 여러모로 중요한 사료이다. 거기에 소역이 저술한 《효덕전(孝德傳)》, 《충신전(忠臣傳)》, 《단양윤전(丹陽尹傳)》, 《주한서注漢書》 또한 서술되어 있으므로 양나라 사료 조사에 중요하다.
2.1.4. 경제본기(敬帝本紀)[편집]
2.2. 열전(列傳)[편집]
3. 관련 고사성어[편집]
- 강랑재진(江郞才盡)
- 물의(物議)
- 비아부화(飛蛾赴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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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 고조의 칙서를 받들어 양사(梁史)를 편찬했으나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2] 당장 이연수(李延壽)의 남사(南史)에서는 다른 군주들이 많게는 1권 분량을 차지할 때 혼자서 2권 분량을 차지하며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양기(梁紀) 22권 중에 17권을 차지한다.[3] 다만 이는 저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적신(賊臣)에게 옹립된 황제의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권신에게 옹립되었다가 얼마안가 폐위된 황제들의 본기(本紀)에서도 나타나는 단점이다.[4] 본래 이름은 소병(蕭昺)으로 소연의 사촌동생이다. 본래는 경이 아닌 병으로 표기되어야 하지만 편찬되는 시기가 당(唐) 시기이기 때문에 이연(李淵)의 부친 이병(李昺)의 휘를 피해야 했다. 때문에 남조(南朝)의 역사를 다룬 《남사(南史)》에도 경으로 표기 되었으며 양 시기에 편찬된 《남제서(南齊書)》와 북송 시기에 편찬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본래 이름인 소병으로 표기했다. 피휘로 인한 사례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