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난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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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시 시청구(西城区)에 있는 옛 황실 원림으로 자금성의 서쪽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등의 집무실 소재지이다. 그러나 철저히 집무실로서의 역할만 수행해 백악관, 엘리제궁과는 달리 공직자들만 출입이 가능하다. 각종 행사나 외빈 접견 등은 여기서 하지 않고 대개 인민대회당에서 하기 때문에 내부가 공개된 적은 거의 없다. 현직 지도부는 물론 전직 지도부의 거주지 역할 또한 한다. 상당수의 전직 지도부와 그 가족들이 퇴임 이후에도 오랫동안 거주하기도 한다.
금·원·명·청대에는 황실 정원이었으며,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북양정부의 총통부 청사 역할을 하였고,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베이징이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였을 때 현재의 북해와 중해는 태액지(太液池)라는 호수였고 그 인근에는 황제의 여름 별궁인 대녕궁(大寧宮)이 있었다. 이곳의 경치는 이미 이때부터 절경으로 이름 높아 황제들이 자주 머물렀다. 이후 원나라가 금을 멸망시킨 뒤 쿠빌라이 칸이 금의 중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수도인 대도(大都)를 건설하면서 태액지를 황궁에 포함시켜 그 주변에 대내(大內)[2] ·융복궁(隆福宮)·흥성궁(興聖宮)의 세 궁전을 지었다.
그리고 명나라 때인 1406년(영락 4년) 영락제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자 이곳은 다시금 황궁의 후원으로 편입되었다. 영락제가 자금성의 위치를 원나라의 황궁보다 약간 남쪽으로 앞당기면서 태액지 남쪽에 난하이를 조성하였으며, 여기에서 나온 흙과 자금성 주위를 두르는 퉁즈허(筒子河)를 파면서 나온 흙을 모아 황성 북쪽에 만수산(萬壽山, 뒷날 징산(景山)으로 개칭)을 쌓았다. 1459년(천순 3)에는 이곳에 광대한 규모의 서원(西苑)을 건설했다. 가정제가 자금성 건청궁에서 벌어진 임인궁변(壬寅宮變)[3] 으로 죽을 뻔하자 서원으로 거처를 옮겨 20년간 지내다가 죽기 전날에야 환궁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에는 베이중난하이의 3해(三海) 주변에 붉은색 담을 둘러 원림의 면적이 호수 주변에 거의 맞닿을 만큼 축소되었다.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며 정무를 돌봤고, 사람 살기에는 갑갑한 자금성보다 이곳을 선호했다.
사실 대부분의 황제들이 국가적인 주요 의식이 몰려 있는 12월에서 1월까지의 연말연시에만 자금성에 머물고, 그 이외의 기간에는 중난하이나 원명원, 청더 피서산장 등의 별궁에서 기거하였다. 이는 동치제와 광서제 때 권력을 잡고 중국을 통치한 서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술정변 이후 광서제가 죽을 때까지 유폐된 영대(瀛台)가 바로 이곳의 난하이에 있었다. 1900년(광서 26) 의화단 운동 때는 8개국 연합군의 약탈을 당하기도 했고 선통제가 즉위하면서는 생부인 순친왕이 머무는 섭정왕부가 지어지기도 했다.
1911년(선통 4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멸망하면서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 대총통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중난하이를 신화궁(新華宮)으로 개칭하기도 했지만 한바탕 칭제 소동의 와중에도 계속해서 북양정부의 요인이 집무하는 관저 역할을 수행했다.[4] 1927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한 장쭤린이 집무실로 사용한 것을 마지막으로,[5] 1928년 6월에 베이징이 국민정부에 함락되고 국민정부가 그간 수도로 삼아온 난징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더 이상 관저로 쓰이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오랜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던 중난하이는 개방한지 20여년만인 1949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들어서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이곳에 관저를 두면서 다시금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다만 중난하이만 그렇고, 베이하이는 베이하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베이징 지하철 베이징 지하철 1호선 톈안먼시역이 이 곳 바로 옆에 있다. 그러나 당연히 겉모습만 볼 수 있고 내부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당·정·군의 전현직 최고위 지도자들의 집무실과 등이 있어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1. 개요[편집]
베이징시 시청구(西城区)에 있는 옛 황실 원림으로 자금성의 서쪽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등의 집무실 소재지이다. 그러나 철저히 집무실로서의 역할만 수행해 백악관, 엘리제궁과는 달리 공직자들만 출입이 가능하다. 각종 행사나 외빈 접견 등은 여기서 하지 않고 대개 인민대회당에서 하기 때문에 내부가 공개된 적은 거의 없다. 현직 지도부는 물론 전직 지도부의 거주지 역할 또한 한다. 상당수의 전직 지도부와 그 가족들이 퇴임 이후에도 오랫동안 거주하기도 한다.
금·원·명·청대에는 황실 정원이었으며,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북양정부의 총통부 청사 역할을 하였고,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2. 역사[편집]
2.1. 금나라·원나라[편집]
베이징이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였을 때 현재의 북해와 중해는 태액지(太液池)라는 호수였고 그 인근에는 황제의 여름 별궁인 대녕궁(大寧宮)이 있었다. 이곳의 경치는 이미 이때부터 절경으로 이름 높아 황제들이 자주 머물렀다. 이후 원나라가 금을 멸망시킨 뒤 쿠빌라이 칸이 금의 중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수도인 대도(大都)를 건설하면서 태액지를 황궁에 포함시켜 그 주변에 대내(大內)[2] ·융복궁(隆福宮)·흥성궁(興聖宮)의 세 궁전을 지었다.
2.2. 명나라[편집]
그리고 명나라 때인 1406년(영락 4년) 영락제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자 이곳은 다시금 황궁의 후원으로 편입되었다. 영락제가 자금성의 위치를 원나라의 황궁보다 약간 남쪽으로 앞당기면서 태액지 남쪽에 난하이를 조성하였으며, 여기에서 나온 흙과 자금성 주위를 두르는 퉁즈허(筒子河)를 파면서 나온 흙을 모아 황성 북쪽에 만수산(萬壽山, 뒷날 징산(景山)으로 개칭)을 쌓았다. 1459년(천순 3)에는 이곳에 광대한 규모의 서원(西苑)을 건설했다. 가정제가 자금성 건청궁에서 벌어진 임인궁변(壬寅宮變)[3] 으로 죽을 뻔하자 서원으로 거처를 옮겨 20년간 지내다가 죽기 전날에야 환궁하기도 했다.
2.3. 청나라[편집]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천도한 후에는 베이중난하이의 3해(三海) 주변에 붉은색 담을 둘러 원림의 면적이 호수 주변에 거의 맞닿을 만큼 축소되었다.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며 정무를 돌봤고, 사람 살기에는 갑갑한 자금성보다 이곳을 선호했다.
사실 대부분의 황제들이 국가적인 주요 의식이 몰려 있는 12월에서 1월까지의 연말연시에만 자금성에 머물고, 그 이외의 기간에는 중난하이나 원명원, 청더 피서산장 등의 별궁에서 기거하였다. 이는 동치제와 광서제 때 권력을 잡고 중국을 통치한 서태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무술정변 이후 광서제가 죽을 때까지 유폐된 영대(瀛台)가 바로 이곳의 난하이에 있었다. 1900년(광서 26) 의화단 운동 때는 8개국 연합군의 약탈을 당하기도 했고 선통제가 즉위하면서는 생부인 순친왕이 머무는 섭정왕부가 지어지기도 했다.
2.4. 중화민국[편집]
1911년(선통 4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멸망하면서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 대총통부가 이곳에 설치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중난하이를 신화궁(新華宮)으로 개칭하기도 했지만 한바탕 칭제 소동의 와중에도 계속해서 북양정부의 요인이 집무하는 관저 역할을 수행했다.[4] 1927년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한 장쭤린이 집무실로 사용한 것을 마지막으로,[5] 1928년 6월에 베이징이 국민정부에 함락되고 국민정부가 그간 수도로 삼아온 난징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더 이상 관저로 쓰이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2.5. 중화인민공화국[편집]
오랜만에 일반에 개방되었던 중난하이는 개방한지 20여년만인 1949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들어서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이곳에 관저를 두면서 다시금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다만 중난하이만 그렇고, 베이하이는 베이하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3. 주요 건축[편집]
3.1. 중하이(中海)[편집]
3.2. 난하이(南海)[편집]
4. 가는 법[편집]
베이징 지하철 베이징 지하철 1호선 톈안먼시역이 이 곳 바로 옆에 있다. 그러나 당연히 겉모습만 볼 수 있고 내부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당·정·군의 전현직 최고위 지도자들의 집무실과 등이 있어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5. 기타[편집]
- 옛날에는 중난하이에 특히 느릅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1883년(광서 9년) 하루는 서태후가 느릅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벌레가 옷에 떨어지자 대노하여 정원의 느릅나무를 모두 베도록 했다.
- 베이하이 지역은 일반에 개방되었다. 그 밖의 지역도 부분 개방 가능성이 좀 보인다. 일단 바이두 지도에서도 딱히 보안같은거 없이 잘 보여주는 등, 그렇게 비밀스럽게 닫고 있으려는 모양새는 보이지 않는다.
- 현대 중국 정치의 중심지라서 근처 부동산이 매우 비싸다. 이곳이 속한 시청구가 중국에서 제일 비싼 구이기도 하다. 시청구 주택 평당 평균가격은 무려 8천4백만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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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중요시설이기 때문에 비공개이며, 당연히 명승지 등급도 없다.[2] 특정한 궁궐의 명칭이 아니라 황제의 정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3] 가정제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다 못한 궁녀들이, 가정제를 암살하려고 모의했던 사건. 그러나 궁녀들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일을 벌였던 궁녀 16명은 전원 처형당했다. 이 불쌍한 궁녀들의 이름은 양금영(楊金英), 형취련(刑翠蓮), 양옥향(楊玉香), 소천약(蘇川藥), 요숙고(姚淑皐), 왕괴향(王槐香), 관매수(關梅秀), 유묘련(劉妙蓮), 진국화(陳國花), 장금련(張金蓮), 왕수란(王秀蘭), 서추화(徐秋花), 정금향(鄭金香), 황옥련(黃玉蓮), 양취영(楊翠英), 장춘경(張春景)이다.[4] 다만 위안스카이는 1913년 10월 10일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기 전까지 외교부 거리의 호텔과 청나라 육해군부 건물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며 리위안훙은 1912년에 위안스카이가 사 준 건물에 거주하기 시작해 부총통 및 총통 재임기간을 포함해서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또한 임시집정 돤치루이는 청나라 육해군부 건물을 집무실로 사용했다.[5] 장쭤린은 중난하이에 거주하지 않고 1921년에 청나라 황족으로부터 매입한 순승군왕부(順承郡王府)를 관저로 사용했다. 순승군왕부는 이후 장쉐량의 소유하에 있다가 1949년 이후 중국공산당정부로 소유가 넘어가서 현재는 중국 정부 관련 시설이 들어서 있다.[6] 중화민국이 성립하면서 수도를 남경으로 정해 북경을 북평으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