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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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 운영위원장
제19대 전반기
최경환

제19대 후반기
이완구


제19대 후반기
유승민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청양군·홍성군)
제13-14대
조부영

제15-16대
이완구


선거구 개편
김학원[1]
홍문표[2]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부여군·청양군)
제19대
김근태
[3]

제19대
이완구


선거구 개편
정진석[4]






제35대 충청남도지사

대한민국 제43대 국무총리
이완구
李完九 | Lee Wan-koo


파일:20150123.990011025284933013.jpg

출생
1950년 7월 16일[1]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사망
2021년 10월 14일 (향년 71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묘소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양사리
본관
여주 이씨[2]
재임기간
제35대 충청남도지사
2006년 7월 1일 ~ 2009년 12월 3일[3]
제43대 국무총리
2015년 2월 17일 ~ 2015년 4월 27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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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이백연
자녀
장남 이병현, 차남 이병인
학력
덕명국민학교 (졸업)
대전중학교 (졸업)
양정고등학교 (졸업 / 53회)
성균관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 / 학사)
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 (형사정책학 / 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 박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일병 소집해제 (방위병)
종교
무종교천주교(세례명: 바오로)
최종 당적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6, 19
경력
제15회 행정고시 합격
충남 홍성경찰서장
LA 총영사관 내무영사
서울지방경찰청 제3부장
경찰청 감사관
충북지방경찰청
충남지방경찰청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제15대 국회의원 (충남 청양군·홍성군 / 신한국당)
신한국당 대표 비서실장
제16대 국회의원 (충남 청양군·홍성군 /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대변인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
제35대 충청남도지사 (민선 4기 / 한나라당)
충남도립대학교 이사장
제19대 국회의원 (충남 부여군·청양군 / 새누리당)
새누리당 원내대표
제19대 국회 후반기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제43대 국무총리 (박근혜 정부)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2.2. 정계 입문
2.5. 진짜 친박계의 거물일까?
2.6. 무죄 선고 이후
2.7. 사망
3. 여담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43대 국무총리.


2. 생애[편집]



2.1. 정계 입문 전[편집]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에서 태어났다.[5] 홍성의 덕명국민학교[6]대전중학교 졸업 후 서울특별시로 올라가 양정고등학교(53회)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에 진학했으며[7][8],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충청남도 홍성군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홍성군청에서 사무관으로 근무 중 국방대학원에서 군생활을 하고 일병으로 전역하였다.[9] 그 후 경제기획원에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경찰공무원으로 자리를 옮겨 홍성경찰서장 등으로 근무하며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내무분과위원회에서도 파견 근무했다. 1986년 ~ 1989년 약 3년간 로스앤젤레스 주재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근무했으며, 40대 초에 치안감까지 올랐으며 1991년에는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수사본부장을 역임하고 이후 충북지방경찰청장, 충남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충남경찰청장 시절 도내 모든 파출소를 순시한 영상자료를 2013년 완사모[10]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2.2. 정계 입문[편집]


1995년 경찰복을 벗고, 신한국당의 전신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정치권에 뛰어든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이 있는, 충남 청양군 - 홍성군 선거구로 출마했으며 자유민주연합 조부영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시 충청도 일대, 특히 충청남도지방에 자민련의 녹색돌풍이 무척 거셌는데, 충남 지방의 유일한 신한국당 당선자여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1998년 정권교체로 공동여당이 된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기고 대변인까지 맡게 된다. 2000년 재선에 성공했고 자민련 원내총무(現 원내대표)가 되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송광호, 이양희, 이재선 의원 등과 함께 자민련을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본래 지역구인 홍성ㆍ청양 선거구가 공중분해되면서[11] 2004년 17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2.3. 충청남도지사[편집]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충청남도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당초 유력했던 박태권 전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경선에서 꺾고 한나라당의 후보로 확정, 본선에서도 한나라당의 열풍에 힘입어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충남지사 시절 무난히 도정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 임기 중에 삼성 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가 발생했는데, 장모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현장을 먼저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령 해저터널을 착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임기가 다 끝나가던 2009년 12월 3일,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밀어붙이자 이에 반발하여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도지사직을 돌연 사퇴해버렸으며[12],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불출마했다. 한나라당은 우리은행장을 지낸 박해춘을 충남지사 후보로 공천했으나 3위를 기록하며 참패하고, 민주당 안희정 후보가 당선된다.[13][14]

이후 혈액암 투병생활을 하며 잠시 정계와 거리를 두고 있었으나, 201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부여군·청양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 약 9년 만에 국회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2014년에 최경환 원내대표가 임기를 마치면서 새로 선거를 거쳐 새누리당 원내대표직(국회운영위원장 겸임)을 맡기도 했다.[15]


2.4. 국무총리[편집]


정홍원 총리의 사임 이후 성균관대학교 출신의 총리감을 찾던 청와대의 눈에 띄어 국무총리 후보로 나서게 되었다.[16] 당시 국무총리 청문회에선 일명 언론외압의혹이 불거져 곤욕을 치렀는데,[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역 정치인(국회의원[18])이란 배경과[19] 본인 관련 논란에 대해 대질 전 해명하는 등의 적극적 모습을 앞세워 끝내 청문회를 통과했다.[20]

국무총리가 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 강하게 정치인들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언론이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며 "저러다가 부메랑 되는 것 아냐?"라는 보도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 MB정부 자원외교 관련 수사를 하면서 경남기업회장 성완종을 상당히 압박했다. 평소 막역한 사이였던 성완종을 이렇게까지 압박한 이유로는 친이계의 자금줄인 성완종을 압박함으로써 친이계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 뿐 아니라, 이완구의 대선 전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충청권의 잠재적 맹주 반기문과 가까운 편이었던 성완종을 압박함으로써 반기문까지 견제할 수 있다는 것 등이 꼽혔다. 그런데...


2.4.1. 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편집]


검찰 수사의 압박을 못 이기고 성완종이 자살하고 만다. 게다가 성완종은 죽기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완구를 비롯한 몇 명에게 뇌물을 줬다는 증언과 쪽지를 남겼다. 당연히 정치계는 패닉 상태가 되었고, 이완구 총리에 대한 청문회도 이루어졌다. 결국 사건 이후 이완구는 식물총리로 전락해 버렸고, 취임 70일 만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직하며 정치생명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청문회 도중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 '충청도 말이 좀 그렇다'라는 발언을 해서 야권은 물론 여권에서도 안좋은 소리가 나왔다.조선일보ytn 중앙일보 또한 같은 충청권 인사인 성완종 前 회장을 '알지도 못한다'는 발언도 일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리스트 내 친박 인사들 중에서 기소된 사람은 이완구 뿐이다.[21] 정치평론가들은 정치권에서 최대한 실드를 쳐줄려고 했는데 본인의 발언이 문제가 돼서 못 구해준 듯하다고 추측했다.[22] 적극적이고 강인한 성격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총리가 됐는데 정작 그 때문에 총리를 관두게 됐으니 아이러니.

그런 충격이 상당한지 본인도 이 사건 이후 쭉 자택에서 칩거 중이다. 썰전 강용석의 발언에 따르면, '(총리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이 사건이 이완구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어 혈액암까지 재발하고 끝내 목숨까지 앗아간 셈이 되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에서는 성완종의 수행비서들과 경남기업 전 부사장이 출석해 돈을 쇼핑백에 담아 건넸다고 진술하였다. 2016년 1월 29일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23] 그러나 2016년 9월 27일 항소심 법원은 성완종 리스트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무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판결 후 “하나님께서 ‘너 정치 잘해라. 이 사건에선 결백했지만, 그렇게 이 나라 정치인들이 국민들한테 떳떳하냐’라고 묻는 의미도 있다”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고 나라가 잘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후 경향신문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다. 경향신문비타500 박스로 뇌물을 받았다고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 것이 허위사실이며 정치적 생명이 끝났기 때문에 소송을 걸었다고 밝혔다.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경향신문 보도 때문에 손자가 할아버지는 비타500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대목이 압권.

허나 1심에서 패소했다. 이유는 "허위사실로 명예가 훼손된 것은 맞으나, 공직자의 도덕성 등에 대한 의혹 제기로 악의적이거나 타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니다"는 것. 이에 이완구는 납득하기 어렵다며 항소했지만 2심 재판부도 1심의 판단이 옳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


2.5. 진짜 친박계의 거물일까?[편집]


국무총리 낙마 후 호사가들은 의문을 가진다. 이완구 전 총리가 진짜 친박계의 거물이었다면 국무총리가 '거물'의 상징으로 맞을까 하는 의문이다.

한국의 국무총리가 행정부에서는 대통령 다음이라지만, 실상은 정권에서 뭔가 안좋은 일이 생겼을 때 대통령을 대신해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그때문에 생긴 별명이 대독총리, 방탄총리, 사과총리[24]일 정도니 말 다했다. 물론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이해찬, 이낙연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25][26].

고로 이완구 입장에선 진짜 거물 행세를 하려고 했는지, 총리 내정자가 된 이후 책임총리가 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2인자에 대한 본인의 의견[27]을 생각하면 국무총리가 자기 밥 그릇 찾는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28] 그리고, 결과적으로 책임총리고 나발이고 할 시간도 없이 성완종 게이트가 터지며 불명예스럽게 사임하며 이완구는 자신의 정치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진짜로 친박계의 거물이라면 잘해야 본전인 국무총리 자리를 고사하고 원내대표로서 스탠스를 유지하는 쪽이 본인 입장에서도 나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친박계가 지독한 차기 대권주자 부재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감안하면[29] 자신이 예비 잠룡임을 생각해서 관리에 신경썼다면 지금 같이 되진 않았을 것이란 추측. 다만, 지금 와서 보면 성완종 게이트에 혐의가 없어서 무난하게 총리직을 수행했다고 치더라도, 그 뒤에 닥쳐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헬게이트를 생각하면 오히려 최단명 총리로 끝난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2.6. 무죄 선고 이후[편집]


202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 경쟁자이기도 했던 홍문표 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이후로는 본인이 도지사 시절 추진했던 내포신도시로 이사하여 여생을 보냈다.


2.7. 사망[편집]


지병인 혈액암이 재발하여 치료를 이어오던 중 의식을 잃을 정도로 상태가 위중해졌고 결국 2021년 10월 14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죄 판결 이후 정계 복귀를 저울질하다 철회했던 것도, 지병이 재발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파일:이완구빈소3.jpg

2021년 10월 15일 빈소

2021년 10월 16일 서울성모병원에서 발인이 엄수되었다.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박병석 국회의장을 비롯해 각계에서 보낸 조화가 놓였으며 여야 당대표와 당시 국민의힘 대선주자들, 충남지역 국민의힘 국회의원들, 그리고 양승조 충남지사를 비롯한 충남도청 관계자들은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했다. 시신은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어 충남 청양 비봉면 양사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3. 여담[편집]


  • 총리 재임기간이 70일밖에 안 된다. 서리와 같은 임시직을 제외하면 허정 총리(64일) 다음으로 짧은 기록이다. 그러나 허정은 원래 수석국무위원[30]이었다가 중간에 헌법개정이 있어서 이름표만 국무총리로 바꿔 단 케이스이기 때문에[31] 실질적인 최단 재임 총리는 이완구라고 봐야 한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사표 수리가 제때 이뤄졌다면[32] (4월 21일 제출, 27일 수리) 허정과 타이기록 내지 명실상부한 1등을 할 수 있었다.

  • 일반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높지 않아 역대 국무총리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어린 연령대의 학생들에게도 꽤 긴 기간 동안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전직 국무총리였다. 이는 상술된 비타 500과 패러디 등의 요인이 크다. 지금은 사건 이후 시간이 꽤 지나기도 했고, 대통령 대행을 지낼 당시 여론이 좋지 않았고 대표직까지 수행했던 황교안이 뜬 탓에 묻힌 편. 더 나아가 문재인 정부의 총리들인 이낙연정세균[33] 모두 20대 대선에 나서면서 더더욱 빛이 바랜 감이 있다.

  • 병역비리 의혹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현역 1급을 받았지만, 행정고시 응시를 이유로 입영을 계속 연기하다 재검을 받아 방위병으로 복무했는데, 하필 서울이 아니라 자기 홈그라운드인 충남에서 받아 "징병검사 과정에서 외압을 넣었냐" 하는 의심을 샀다. 다만 당시에는 본적지에서 징병검사를 받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충남에서 징병검사를 받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 케빈 스페이시와 닮았다는 말이 많다. 그런데 하필 케빈 스페이시의 출연작 중 하나인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각종 음모를 꾸미는 프랭크 언더우드의 모습과 이미지가 겹치는 바람에 더더욱..

  • 前 서울시 만리동 소재의 (현 서울 양천구 목동 소재)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올해의 양정인상을 받는 등 총리 이전까지는 학교에서도 높게 띄워주었다. 그러나 비타500사태 이후 학교에서는 "양송합니다."를 외쳤고, 이완구 플래카드 철거와 동시에 학생들은 이완구를 띄워주었던 학교를 비판했다.

  • 총리가 되었을 당시에는 집안에서도 크게 환호했지만 불과 70일 만에 낙마 + 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을 맞으면서 사실상 집안 망신 수준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집안에서 초상을 치르게 되자 근조화환을 보낼 정도.

  • 혈액암이 발병했었는데, 정확하게는 다발성골수종을 앓았으며, 이 때문에 2009년 12월 충청남도지사 사퇴 후 약 2년 넘게 투병생활을 보냈다. 한 때 위독하다고 했으나 본인의 의지와 지속적인 치료로 인하여 2013년 4월에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후 규칙적인 운동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했다고 하는데 2016년 4월 언론에 의하면 혈액암이 재발하였던 모양이다. 항암치료 때문에 검찰 출석과 공판도 연기되었었다. 그간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재발하였다고 하며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2021년 10월 14일에 사망했다.

  • 총리 내정자로 확정된 후, 현 지역구(부여군, 청양군)와 전 지역구(홍성군)서는 총리 내정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도배하다시피 걸려있었다. 다만, 부여, 청양 당협위원회나 새누리당 충남도당에서 조직적으로 현수막을 제작해서 배포했다는 얘기도 있고 축하 현수막을 걸은 단체중에는 왜 했는지 이해가 안되는 곳도 있었다고. 인사 청문회의 무서움을 알았다면 총리 내정된 걸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을텐데. 결과적으로 현수막은 쓰레기 되고 당사자는 잠룡 꿈꾸다가 깼으니....

  • 강일원 헌법재판관김황식국무총리와 인연이 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때 충남지사에 당선됐지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당선 무효형이 선고됐던 이 후보자를 2심과 3심에서 강일원 당시 부장판사와 김황식 당시 대법관이 각각 구제해줬기 때문이다. 2006년 11월 대전고법 형사1부 부장판사이던 강 재판관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구민과 한나라당 당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사전선거운동을 벌인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이 후보자에게 벌금 70만원형을 선고했다. 3심에서는 이 사건 주심 대법관이던 김황식 대법관이 검찰 상고를 기각해 이 후보자의 지사직 유지가 확정됐다. 이는 “조직적 선거범죄”라며 벌금 150만원형을 선고한 1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당선이 무효된다. 이 후보자는 2005년 12월 충남 서천군에 있는 한 식당에서 당원들을 상대로 “여기서 이완구 하고 확실하게 밀면 되는 거지,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완구 도지사 됐다, 아 그럼 여기 있는 양반들 도지사 관사로 초대하면 되죠. 서로 그렇게 신의 지키고 살아가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1심을 맡은 대전지법 형사 4부 박관근 부장판사는 당선 무효형 선고 배경에 대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선거범죄로 보이고, 금권선거라는 점에서 죄질을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2심을 맡은 강 재판관은 “피고인은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된 상황으로 뒤늦게 선거를 준비하면서 그 준비행위가 지나쳐 공직선거법을 어긴 것으로 보인다”며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정반대 판결을 내렸다. 3심에서 김황식 전 총리 역시 당선 무효형을 구형한 검찰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완구의 ‘구사일생’을 거들었다. 한 신년 모임에 원내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이완구는 강 재판관을 보고 “내 목숨을 살려준 분”이라면서 먼저 다가가 인사했다고 한다.


  •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전, 세종, 충남 세 지역에 광역단체장으로 당선된 이장우, 최민호, 김태흠은 모두 이완구 사단이라는 평이 있다. # # 이장우는 동향 후배이자 최측근이었으며, 최민호와 김태흠은 이완구가 충남도지사를 지내던 시절 부지사를 지냈던 적이 있다. 더불어 최민호는 국무총리비서실장 출신이기도 하다.

  • 별명은 토이 리. 민상토론에서 이완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두고 우스겟소리로 토이 스토리라 말한 적이 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5
정계 입문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97 - 1998
합당[34]

[[무소속|
무소속
]]

1998
탈당[35]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998 - 2002
입당

[[무소속|
무소속
]]

2002
탈당[36]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2 - 2012
복당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 2020
당명 변경

[[미래통합당|
파일: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합당[37]
정계 은퇴

파일: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svg

2020 - 2021
당명 변경
사망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청양·홍성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35,638 (47.45%)
당선 (1위)
초선[38]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46,633 (69.35%)
재선[39]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379,420 (46.31%)
초선[40]
2013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충남 부여·청양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30,342 (77.40%)
3선[41]



6. 둘러보기[편집]



대한민국 민선 4기>
광역자치단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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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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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김관용
김태호
제주
김태환
[1] 권한대행, 전임자 이완구 사퇴 (2009.12.3)















[1] 음력 6월 2일 [2] 교위공파(校尉公派) 11대손,# 26세손 ○구(○九) 항렬.[3]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발로 사퇴하였다.[4] 재임기간이 70일로 두 번째로 짧다. 1위인 허정 총리는 64일. 그러나 허정 총리는 국무총리 직전에 국무총리의 대체 직책인 수석국무위원을 하다가 헌법 부칙에 따라 시한부로 국무총리에 자동 유임된 케이스라 두 임기를 합치면 100일이 넘어간다. 그래서 실질 임기로는 이완구 총리가 최단임이다.[5] 비봉면과 홍성군 장곡면 일대는 여주 이씨 홍주파가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교위공파 26세손.[6] 후에 덕명초등학교로 바뀌었으며, 2019년 광천초등학교와 통폐합.[7] 여담으로, 경기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고입에 2번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여 대신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서울대학교를 가기 위해 대입에 2번 도전하였으나 서울대도 탈락하는 바람에 삼수 나이인 71학번으로 입학하였다.[8] 당시 성균관대는 후기대학 중 1위였고, 전기대학 1위인 서울대 불합격자들이 많이 합격했다. 후임 총리인 황교안도 똑같은 케이스. [9] 사실 행정고시를 합격하면 장교로 임관하여 의무 복무 후 중위 전역(현재는 중위 임관, 과거 이야기)이지만, 이완구는 병역판정검사에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10] 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약칭인 정치인 팬클럽[11] 각각 예산군부여군에 합구되었다.[12]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은 참여정부의 원안에서 한참 후퇴한 수준이었고 여당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13] 무엇보다도 자유선진당 박상돈 후보의 출마로 인해 보수표가 분산된 것도 영향이 컸다.[14] 이후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김태흠이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면서 12년만에 보수정당이 충남지사직을 탈환하게 된다.[15] 임기를 마친 최경환 원내대표는 경제부총리로 입각, 황우여 당 대표는 교육부총리로 입각했다.[16] 이완구는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재학 중이던 1974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17] 기자들과 식사하던 도중 "(자신의) 전화 한 통화로 기사를 넣거나 뺄 수 있고, 마음에 드는 기자는 키워주거나 아니면 죽일 수도 있다"는 식의 말을 하며 논란을 스스로 자초했다. 이를 녹취한 한국일보 기자가 녹음파일을 까면서 논란이 불거진 것.[18] 국무위원뿐만 아니라 국무총리도 국회의원의 겸직이 허가된다. 이완구 총리는 2006년 한명숙 전 총리 이후 무려 9년여 만에 현역 국회의원으로서 총리를 겸직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다.[19] 국민에게 한 번 검증된 인사로 여겨 그런 건지, 이러나저러나 자기들과 동류라는 의식이 있는 건지, 야당 의원들도 현역 의원이 국무총리나 장관 후보자로 나오면 아무래도 압박 강도가 낮은 편이다. 실제 역대 정부에서 현직 국회의원이 총리나 장관 후보로 나왔을 때 낙마하는 일은 없었다.[20] 애초 야당인 민주당 입장에서도 이완구 전에 내정된 후보자(안대희, 문창극)들을 검증 과정에서 줄줄이 낙마시키는 성과(?)를 냈기 때문에, 청와대가 여당 원내대표인 이완구까지 차출했다는건 거의 마지막 카드나 다름없는 것이라 여겨 이완구는 다소 무디게 압박한 것 아니냔 분석 역시 많았다. "뭔 허물이 나오더라도 머릿수로 밀어붙이겠구나" 하고. 당시 새누리당의 의석은 과반수를 넘기는 수준으로, 다른 당이 아무리 결집한들. 단독으로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가 가능했다. 게다가 현역 의원을 떨어뜨리면 나중에 민주당이 집권했을시 의원 입각이 힘들어지기도 하고.[21] 유일하게 같이 기소된 새누리당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경우 친박이 아닌 비박계열이다. 그리고 결국 2심에서 뒤집히면서 당시 구 여권의 수권후보까지 되었다.[22] 다른 관점에서는 총리 인준된 인사들이 하나 같이 부적격 판정 받고 낙마하다보니, 민주당 내에서도 현 정부에 너무 발목잡는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그래서 이완구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봐준 측면이 있다고 한다.[23] 그리고 이와 함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도 불출마를 선언하였다.[24] 평소에는 존재감 없다가 정권에 안좋은 일 터지면 대통령 대신해서 사과성명이나 낸다고 해서...[25] 김종필김대중을 돕는 대신 상당수의 권력행사가 가능하도록 한 연립정부의 성격이 강하고(실제로 국민의 정부는 1998년부터 연정이 해체된 2001년까지 연립정권이었다.), 나머지는 대통령의 재량에 따른 책임총리다.[26] 장면은 예외가 아니라 애초에 정치 체제 자체가 다른 케이스였다. 장면 내각은 의원내각제국무총리정부수반이고, 윤보선 대통령천황,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국왕, 영국을 제외한 영연방 왕국들의 총독, 독일 대통령과 같은 상징적 국가원수였다. 3차 개헌을 이끌어낸 허정 총리도 의원내각제 하 정부수반으로서의 총리였지만, 본인이 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었다. 물론 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장 총리 취임 직전까지 잠시간 총리로서만 있었던 시기도 있긴 하다.[27] 한때 친박계 좌장소리 들었던 김무성이 나중에 박근혜와 각을 지는 과정을 보면 답이 나온다.[28] 박근혜의 권력을 뛰어넘지 않는 선 내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대통령 모두 2인자가 본인의 자리를 넘보면 가차없이 숙청하는 성격이었으므로.. 즉 김대중 시기의 김종필이 아닌 박정희 시기의 김종필처럼 되었을 거라는 얘기다.[29] 이는 자기에게 쓴 소리 할 줄도 아는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박근혜의 성격도 한 몫했다.[30] 사사오입 개헌으로 폐지된 국무총리직의 대체 직책이다. 사실 국무총리라는 개념 자체가 국무위원들의 수장이기 때문에 의미상으로도 큰 변화는 없었다. 수석국무위원은 외무부장관 - 내무부장관 - 재무부장관 순으로 우선 임명되었기에 허정도 외무부장관 임명과 동시에 수석국무위원이 되어 수석국무위원으로서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했다. 원래는 장면 부통령이 해야 하지만 그가 이미 사임해버린 마당이라 3순위인 수석국무위원으로서 승계한 것이다.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 권한대행과 부통령 권한대행까지 싹 다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편 허정은 헌법 부칙에 의거해 국무총리로 자동 유임되고서도 외무부장관은 계속 겸직했으며, 국무총리 유임 후 곽상훈 민의원의장에게 권한대행을 넘겼으나 곽상훈 의장이 8일 만에 권한대행을 내려놓아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으로서 다시 권한대행을 맡았다.[31] 허정의 수석국무위원 + 국무총리 임기를 합하면 110일이 넘어간다.[32] 당시 해외순방을 하고 있었다.[33] 특히 정세균 총리는 코로나19 대응에 주력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바 있다. 정작 본인은 '코로나 총리' 이미지를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34]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35] 자유민주연합 입당을 위한 탈당[36] 한나라당 복당을 위한 탈당[37]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38] 1998년 자유민주연합 입당[39] 2002.10.14 탈당, 한나라당 복당[40] 2009.12.3 사퇴[41] 전임자 김근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