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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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舊唐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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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e5b6 ||<-2><tablewidth=100%><tablebgcolor=#a48252><width=33%> 1권 「고조기(高祖紀)」 ||<-2><width=33%> 2권 「태종기(太宗紀)」 ||<-2><width=33%> 3권 「고종기(高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이연(李淵) ||<-2> 이세민 ||<-2> 이치 || ||<-2> 4권 「측천황후·중종기(則天皇后中宗紀)」 ||<-2> 5권 예종·현종기(睿宗玄宗紀)」 ||<-2> 6권 「숙종·대종기(肅宗代宗紀)」 || ||<-2><rowbgcolor=#fff,#191919> 이현(李顯) · 무조 ||<-2> 이단 · 이융기 ||<-2> 이형(李亨) · 이예(李豫) || ||<-3> 7권 「덕종·순종·헌종기(德宗順宗憲宗紀)」 ||<-3> 8권 「목종·경종·문종·무종·선종기(穆宗敬宗文宗武宗宣宗紀)」 || ||<-3><rowbgcolor=#fff,#191919> 이괄 · 이송 · 이순(李純) ||<-3> 이항 · 이심(李湛) · 이앙 · 이염(李瀍) · 이침(李忱) || ||<-3> 9권 「의종·희종기(懿宗僖宗紀)」 ||<-3> 10권 「소종·애종기(昭宗哀宗紀)」 || ||<-3><rowbgcolor=#fff,#191919> 이최 · 이현(李儇) ||<-3> 이엽 · 이축 || ||<-6><width=1000> 76·77권 「후비전(后妃傳)」 || ||<-6><bgcolor=#fff,#191919>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무조 · 왕폐후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원헌황후 · 양귀비 장황후 · 장경황후 · 정의황후 · 예진황후 · 소덕황후 · 위씨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선의황후 · 곽귀비 · 왕현비 · 원소황후 · 혜안황후 · 곽숙비 · 공헌황후 · 적선황후 || ※ 11권 ~ 60권은 志에 해당. 61권 ~ 75권은 表에 해당. 신당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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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장군 서평무민왕(西平武愍王) 哥舒翰 | 가서한 | |
작위 | 양국공(涼國公) → 서평군왕(西平郡王) |
시호 | 무민(武愍) |
성 | 가서(哥舒) |
이름 | 한(翰) |
부친 | 가서도원(哥舒道元) |
생몰년도 | ? ~ 757년 |
1. 개요[편집]
튀르기시(서돌궐의 별부) 가서부 사람이다. 가서도원의 아들이자, 가서요[1]
당 덕종 시기 활동한 장수
710년 당이 탕목읍으로 토번에 넘겨주었고 토번은 그 이후 당을 지속적으로 침공했다.
2. 생애[편집]
본래 가서한의 집안은 안서에서 대대로 살았다. 아버지 도원은 안서도호장군 적수군사를 역임했는데, 아버지처럼 용맹하여 장수의 길을 걸었다. 집안이 부유해 딱히 가난에 시름하지는 않았다. 40세 때 그는 장안으로 내려가 당시 하서절도사 왕충사의 휘하 무장으로 들어가 실력을 쌓았고, 왕충사의 아장으로써 토번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해 대두군부사에 임명되었다.
747년, 왕충사가 석보성 공략을 반대한 것으로 인해 재상 이림보의 모함을 받아 하옥되자[3]
왕충사는 처형당하기 직전이었으나, 가서한이 그를 살려줄 것을 간청하였다. 왕충사는 한동태수로 좌천되고, 이후 사망.
안록산의 사촌이었던 안사순은 하서절도사로 임명되었는데, 안사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전 신안왕 이의가 빼앗았으나, 이후 토번군에게 다시 빼앗김
6만 3천명의 병력이 겨우 400명에 막혔다는 것은 아니다. 이 400명의 잔존 병력은 정확히는 토번군의 후퇴를 돕기 위해 남은 최후의 병력이었다. 상식적이게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해도 서역, 돌궐, 당, 토번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인 석보성을 겨우 400명의 병력으로 지킬리가 없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왕충사가 옳았다고 했다.
술과 여색을 즐기다가 풍질에 앓아 군영에서의 생활을 그만두고 장안에서 쉬는 도중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자 태자 이형의 병마부원수에 임명되었다. 낙양에서의 방어 작전에 실패한 봉상청이 고선지와 함께 방어선을 섬서에서 동관(潼關)으로 이전시키다가 변령성의 모함을 받아 참수되자 가서한이 전권을 위임받았다. 가서한은 난공불락인 요새인 동관에서 안록산의 군을 막고자 하였고 양국충이 이를 경계해 안사순으로 하여금 가서한을 모함하게 하나 이를 눈치챈 가서한은 안사순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안사순은 처형당하였다.[8]
가서한은 안사순이 안녹산과 내통한다고 무고했고 안사순의 죄 7가지를 당 현종에게 말한 뒤 안사순을 주살할 것을 청하였고 안사순은 그 동생 안원정과 함께 처형당한다. 그 일족은 영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안사지란 평정 뒤 곽자의의 주청으로 누명을 벗는다.
화발귀인은 나중에 안록산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이후 안록산의 명령을 받고 다른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고 낙양에 유폐되었다.
757년, 당군이 낙양을 수복하자 안경서(安慶緖)가 업으로 후퇴하면서 포로로 잡아놓았던 당의 장수 30여 명을 살해했는데 가서한 자신도 그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10]
정천리도 이 과정에서 가서한과 함께 살해당했다.
3. 주요 참전[편집]
3.1. 수차례의 토번 격파[편집]
천보 오재(746년), 토번이 국경을 침범하자, 가서한이 이에 맞서 토번군을 격파한다. 천보 육재(747년), 적석군에 매복하여 토번의 5천 기병을 소멸시켰다. 천보칠재(748년) 청해호 근처에 신위군성을 쌓았으나 토번에 빼앗긴 뒤였다. 그는 그럼에도 칭하이 호의 용구도에 응룡성을 쌓았고, 토번은 칭하이 호 근처에 가지 못했다. 천보 팔재(749년) 불과 열흘 만에 석보성을 함락시켰다.[11]
비록 석보성을 열흘 만에 함락시켰으나, 당군의 사상자는 수만 명이었고 토번군은 수백 명이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왕충사가 옳았다고 하였다.
710년 당이 토번에 넘겨준 지역으로, 토번은 이 지역을 통해 당을 손쉽게 침공할 수 있었다.
3.2. 안경서 군 격파[편집]
756년 동관에서 동관을 공격하던 안경서의 군대를 격파한다.
4. 기타[편집]
두보, 이백이 가서한을 시로 찬양했다고 한다. 또한, 서북 지역의 백성들에게도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간쑤성 린타오 현에 가서한 기공비가 있다고 한다.[14]북두칠성 하늘 높이 떠 있는 밤 가서 장군 칼 차고 출전하였다. 그 후로 적은 말을 몰고서 임조 요새 넘보려 하지 못하였다.[13]
서비인이 지은 가서가에 나와 있다.
내용은 749년 가서한이 석보성을 열흘 만에 탈환하였다는 내용이다.
5. 일화[편집]
가서한은 안록산과 그 사촌인 안사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752년[15]
천보 11재
가서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우리 아버지는 호인[16]
이고 어머니는 돌궐인인 반면, 당신 아버지는 돌궐이고 어머니는 호인이다. 족류가 똑같은데 어찌 서로 친할 수 없겠는가?소그드인을 의미
안록산은 이를 자신을 헐뜯는 거라고 여겨 가서한에게 욕하였다.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우가 굴을 향해 짖으면 상서롭지 않다고 했는데, 이는 본고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형께서 진실로 친함을 보이신다면 저 가서한이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가서한도 이에 맞서 욕하려고 하자 고력사가 가서한을 눈짓으로 말려 가서한은 멈추었고 거짓으로 취한 척 하며 물러났다. 그 후로부터 더욱 가서한과 안록산은 사이가 더 안 좋아졌다.돌궐놈이 감히 이렇게 하다니!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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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 덕종 시기 활동한 장수[2] 710년 당이 탕목읍으로 토번에 넘겨주었고 토번은 그 이후 당을 지속적으로 침공했다.[3] 왕충사는 처형당하기 직전이었으나, 가서한이 그를 살려줄 것을 간청하였다. 왕충사는 한동태수로 좌천되고, 이후 사망.[4] 안록산의 사촌이었던 안사순은 하서절도사로 임명되었는데, 안사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5] 이전 신안왕 이의가 빼앗았으나, 이후 토번군에게 다시 빼앗김[6] 6만 3천명의 병력이 겨우 400명에 막혔다는 것은 아니다. 이 400명의 잔존 병력은 정확히는 토번군의 후퇴를 돕기 위해 남은 최후의 병력이었다. 상식적이게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해도 서역, 돌궐, 당, 토번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인 석보성을 겨우 400명의 병력으로 지킬리가 없다.[7]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왕충사가 옳았다고 했다.[8] 가서한은 안사순이 안녹산과 내통한다고 무고했고 안사순의 죄 7가지를 당 현종에게 말한 뒤 안사순을 주살할 것을 청하였고 안사순은 그 동생 안원정과 함께 처형당한다. 그 일족은 영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안사지란 평정 뒤 곽자의의 주청으로 누명을 벗는다.[9] 화발귀인은 나중에 안록산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10] 정천리도 이 과정에서 가서한과 함께 살해당했다.[11] 비록 석보성을 열흘 만에 함락시켰으나, 당군의 사상자는 수만 명이었고 토번군은 수백 명이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왕충사가 옳았다고 하였다.[12] 710년 당이 토번에 넘겨준 지역으로, 토번은 이 지역을 통해 당을 손쉽게 침공할 수 있었다.[13] 서비인이 지은 가서가에 나와 있다.[14] 내용은 749년 가서한이 석보성을 열흘 만에 탈환하였다는 내용이다.[15] 천보 11재[16] 소그드인을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