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석(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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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광주일고 시절 145km/h를 웃도는 직구와 각이 큰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하여 고교 동기 김대우와 원투펀치로 맹활약했다. 이러한 활약에 따라 연고 팀 KIA 타이거즈는 둘 중 누구에게 1차 지명권을 쓸까 고민하다가 고우석을 뽑기로 결정했고, 계약금 2억 5000만원에 KIA 타이거즈와 계약하며 입단했다.[1]
김대우와 고우석이 고3이던 2002년 고교야구 판도는 광주일고와 천안북일고가 천하를 양분했다. 광주일고는 첫 번째 대회와 두 번째 대회인 대통령배와 청룡기를 제패했고, 천안북일고는 뒤이어 열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화랑대기, 전국체전의 정상에 올랐다.[2][3]
2.2.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데뷔 시즌인 2003년에는 37경기에 나와서 58이닝 동안 3승 1패 2홀드 평균자책점 3.88, 스탯티즈 기준 WAR 1.21을 찍으며 신인 흉년 속에 나름 괜찮은 기록을 보여줬다. 비록 신인왕은 현대 이동학에게 내줬지만[4] 이듬해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이던 2004년에는 평균자책점이 무려 9점대로 상승해버리는 등 첫 해에 비해 부진했다.
한편 군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2004년 시즌 종료 후 상무 야구단에 입대해 군 복무를 마쳤다. 한편 상무 복무 중이던 2005년 5월 8일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퓨처스리그 역대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 2007년 시즌을 앞두고 전역하면서 KIA로 복귀했으나, 데뷔 초~군 복무 시절 혹사를 당한 후유증으로 어깨에 이상이 생기는 바람에 전역 후에도 거의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한때 신고선수로 전환되기까지 했다. KIA 타이거즈의 대표적인 사이버 투수 중 한 명.
2012년 4월 13일 경기에서 동점상황 10회말에 등판, 2사까지 잘 잡아놓고 안타-볼넷-볼넷으로 만루를 채웠다가 다음 타자 심광호를 루킹삼진으로 잡으면서 KIA 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날 1⅔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지난 신인 시절이던 2003년 9월 10일 이후 무려 3,138일만의 승리를 챙겼다. 이로 통산 4승째.
그러나 4월 한 달 이후로는 별 활약이 없었고, 얼마 못 가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2군으로 내려간 뒤에는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2012년 시즌 종료 후 KIA에서 방출되었다.
3. 은퇴 후[편집]
방출된 뒤 곧바로 은퇴했고 이후 별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8년 2월 18일 폭력혐의로 구속되었다. 은퇴 후 광주 지역 조직폭력배 집단에 가입해 활동해 온 걸로 알려졌다. 조폭집단 내 행동대장으로 있었고 광주 상무지구의 한 술집에서 부하들과 술을 마시다가 예전에 조직을 탈퇴한 두 명을 만났으며, 우발적으로 두 명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한다.기사 어찌보면 한때 기대받는 유망주였다가 은퇴 후 조직폭력배에 가입해 활동한 위대한과 비슷한 케이스인 셈.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5. 여담[편집]
컴투스프로야구에서는 라이선스 문제로 고석운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원래는 LG 고우석과의 구분을 위해 고우석B라는 이름(LG는 고우석C)으로 등록되어있었다.
6. 관련 문서[편집]
[1] 한편 연고 팀 KIA의 1차 지명을 받지 못한 김대우는 롯데 자이언츠에 2차 1라운드로 지명되었으나 입단 협상을 거부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해버린다. 참고로 이 당시 롯데가 김대우에게 제시한 계약금은 무려 4억 5000만원으로 고우석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2] 여담으로 이 당시 김대우, 고우석보다 원래 1년 선배였으나 유급하여 동기가 된 광주일고 중견수는 이대형, 3루수는 2학년 모창민.[3] 천안북일고는 에이스 안영명을 필두로 유격수 나주환이 주장을 맡아 중심을 잡고, 2학년 김창훈이 투수진을 뒷받침했다.[4] 참고로 2003년은 유독 신인 흉년의 해였다. 자세한 건 이동학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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