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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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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은 중국 서남부에 위치한 성(省)으로, 면적은 176,110km²[1] 로 남한의 약 1.7배이고, 인구는 2015년 기준 3,529만 명[2] 으로 캐나다 인구와 비슷하다.
서쪽으로는 윈난성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쓰촨성, 충칭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광시 좡족 자치구와, 동쪽으로는 후난성과 접한다.
첸(黔)[3] , 구이(贵)로 줄여부른다. 성도는 구이양이다. 구이저우(貴州)라는 이름은 성의 성도이자 중심도시인 구이양의 옛 이름인 귀주(貴州)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이름은 구주(矩州) 원나라 대에 '矩(곱자 구)'를 발음은 유사하면서 뜻은 더 좋은 '貴(귀할 귀)'로 표기를 바꾸었고 이후 명나라 대에 정식 행정구역인 귀주승선포정사사(贵州承宣布政使司)를 설치하고 청나라 대에 구이저우성으로 개편하면서 구이저우성이 되었다.
남서쪽의 윈난성과 같이 소수민족이 많은 곳으로, 인구의 약 40%가 소수민족이다. 구체적으로 한족이 62%, 묘족이 12%, 포의족이 8%, 동족이 5%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의 한족들은 인접한 윈난성과 마찬가지로 관화를 사용한다.
대부분 지역이 고원 지대이나, 윈난 성보다는 해발고도가 약간 낮아 1,000m 정도이며 카르스트 지형이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협곡과 석회동굴 등도 많은 편이다. 그러나 카르스트 지형에서도 특히 옆동네 광시좡족자치구의 명성에 밀려 관광지로서 인지도는 훨씬 낮은 편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폭포인 황과수 폭포가 있다.
하위 행정구역은 보면 9개의 지급행정구, 88개의 현급행정구, 1,539개의 향급행정구로 이뤄져 있다.
중국에서 1인당 GRDP[4] 가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이다. 2016년 기준 1인당 GRDP는 $4,988[5] 로 31개 지역[6] 중 29위이다.
참고로 30위가 서쪽의 윈난 성($4,707)이고, 31위 꼴찌가 시베이(西北) 지역의 간쑤성($4,134)이다.
구이저우 성은 2000년부터 시작된 서부대개발 등으로 최근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데, 2015년 10.7%, 2016년 10.5%의 성장을 기록해 2016년 중국 GDP 성장률 6.7%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인당 GRDP가 17,000 달러가 넘는 톈진시, 베이징시, 상하이시는 물론이고, 6 ~ 7천 달러 정도의 중위권과도 여전히 격차가 크다. 2016년 GRDP는 약 1,767억 달러[7] 로 31개 지역 중 25위이며, 중국 GDP의 약 1.5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이라크 정도의 경제 규모이다.
그런데 잠재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경제 성장을 추구하다 결국 뒤탈이 났다. 중국 경제가 잘 나갈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2023년 들어 중국 성장세가 꺾이면서 성 자체의 능력으로는 빌린 부채를 못 갚는다 선언. #. 쉽게 말해 디폴트다
세계 최대 전파망원경 관톈쥐옌(觀天巨眼)이 이 곳에 있다.
마오타이 술로 유명한 마오타이진이 속해있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마오타이 진은 구이저우에서 성도인 구이양에 이어서 두번째로 잘사는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래서 술 수출 문제 때문에 윈난성과 같이 미세먼지가 없는 구역이다.
중국 축구의 열기가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한다. 정확하게는 룽장현에서 지역 자체 리그가 있다.덕분에 EPL과 훈련 실시 계획 등을 포함한 MOU에 함께 서명했다.#
구이저우 일대에서 발달한 요리를 구이저우 요리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당시에는 중원에서 거리가 멀고 오랑캐로 취급받는 야랑(夜郞)이라는 나라가 구이저우성에서 세를 떨쳤다. 야랑이 어느시기에 건국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전국시대 당시에는 확고한 국가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심지는 허장현 일대로 여겨진다.
야랑이라는 나라 자체는 전한 말까지 존속해 있었다. 그러나 중원에서 보기에는 그저 힘 좀 쓰는 오랑캐의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으로 야랑 국왕은 야랑국이 큰지 중국이 큰지도 모르고 뻐긴다고 해서 야랑자대(夜郞自大)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이다.
이후 초나라가 검중(黔中)군을 설치하고[8] 중국의 지배에 들어갔지만 이 동네는 산이 많고 또한 소수민족이 많은 지역이었으며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았다.
이 야랑국은 한 무제때 광둥성/광시좡족자치구와 북부 베트남에 걸친 남월 원정을 위한 첫 상대로 멸망당했고 멸망한 야랑국에는 장가군, 월수군, 익주군이 설치되었다. 당나라 대에는 검중도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역 토착세력에 관직을 주는 토사(土司)제도라는 간접적 통치가 시행되었고, 중국에 동화됐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옆 윈난성과 마찬가지로 원나라 및 명나라 시기부터다. 원나라 때 이 지역에 있던 대리국을 원세조 쿠빌라이 칸이 멸망시키며 중국의 완전한 직접지배 영역으로 편입해 몽골만호부를 설치하고 군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유학 교육을 받아야만 토사를 세습할 수 있도록 바꾼 것은 명나라 때부터였다.
중화민국시기 중국공산당 홍군[9] 이 징강산에서 중국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시안까지 탈출한 대장정 때 홍군의 경유해 간 곳이기도 하다. 1935년 이 성의 도시인 쭌이(遵义)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을 다루는 역사에서는 이 지역을 내부적으로 중요 모먼트로 여긴다.
이후 1949년 11월 쯤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이 지역까지 점령해 중화인민공화국 구이저우성으로 편입해 오늘날에 이른다.
||1. 개요[편집]
구이저우성은 중국 서남부에 위치한 성(省)으로, 면적은 176,110km²[1] 로 남한의 약 1.7배이고, 인구는 2015년 기준 3,529만 명[2] 으로 캐나다 인구와 비슷하다.
서쪽으로는 윈난성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쓰촨성, 충칭시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광시 좡족 자치구와, 동쪽으로는 후난성과 접한다.
2. 특징[편집]
첸(黔)[3] , 구이(贵)로 줄여부른다. 성도는 구이양이다. 구이저우(貴州)라는 이름은 성의 성도이자 중심도시인 구이양의 옛 이름인 귀주(貴州)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이름은 구주(矩州) 원나라 대에 '矩(곱자 구)'를 발음은 유사하면서 뜻은 더 좋은 '貴(귀할 귀)'로 표기를 바꾸었고 이후 명나라 대에 정식 행정구역인 귀주승선포정사사(贵州承宣布政使司)를 설치하고 청나라 대에 구이저우성으로 개편하면서 구이저우성이 되었다.
남서쪽의 윈난성과 같이 소수민족이 많은 곳으로, 인구의 약 40%가 소수민족이다. 구체적으로 한족이 62%, 묘족이 12%, 포의족이 8%, 동족이 5%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의 한족들은 인접한 윈난성과 마찬가지로 관화를 사용한다.
대부분 지역이 고원 지대이나, 윈난 성보다는 해발고도가 약간 낮아 1,000m 정도이며 카르스트 지형이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협곡과 석회동굴 등도 많은 편이다. 그러나 카르스트 지형에서도 특히 옆동네 광시좡족자치구의 명성에 밀려 관광지로서 인지도는 훨씬 낮은 편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폭포인 황과수 폭포가 있다.
하위 행정구역은 보면 9개의 지급행정구, 88개의 현급행정구, 1,539개의 향급행정구로 이뤄져 있다.
중국에서 1인당 GRDP[4] 가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이다. 2016년 기준 1인당 GRDP는 $4,988[5] 로 31개 지역[6] 중 29위이다.
참고로 30위가 서쪽의 윈난 성($4,707)이고, 31위 꼴찌가 시베이(西北) 지역의 간쑤성($4,134)이다.
구이저우 성은 2000년부터 시작된 서부대개발 등으로 최근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데, 2015년 10.7%, 2016년 10.5%의 성장을 기록해 2016년 중국 GDP 성장률 6.7%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인당 GRDP가 17,000 달러가 넘는 톈진시, 베이징시, 상하이시는 물론이고, 6 ~ 7천 달러 정도의 중위권과도 여전히 격차가 크다. 2016년 GRDP는 약 1,767억 달러[7] 로 31개 지역 중 25위이며, 중국 GDP의 약 1.58%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이라크 정도의 경제 규모이다.
그런데 잠재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경제 성장을 추구하다 결국 뒤탈이 났다. 중국 경제가 잘 나갈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2023년 들어 중국 성장세가 꺾이면서 성 자체의 능력으로는 빌린 부채를 못 갚는다 선언. #. 쉽게 말해 디폴트다
세계 최대 전파망원경 관톈쥐옌(觀天巨眼)이 이 곳에 있다.
마오타이 술로 유명한 마오타이진이 속해있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마오타이 진은 구이저우에서 성도인 구이양에 이어서 두번째로 잘사는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래서 술 수출 문제 때문에 윈난성과 같이 미세먼지가 없는 구역이다.
중국 축구의 열기가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한다. 정확하게는 룽장현에서 지역 자체 리그가 있다.덕분에 EPL과 훈련 실시 계획 등을 포함한 MOU에 함께 서명했다.#
구이저우 일대에서 발달한 요리를 구이저우 요리라고 한다.
3. 역사[편집]
춘추전국시대 당시에는 중원에서 거리가 멀고 오랑캐로 취급받는 야랑(夜郞)이라는 나라가 구이저우성에서 세를 떨쳤다. 야랑이 어느시기에 건국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전국시대 당시에는 확고한 국가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심지는 허장현 일대로 여겨진다.
야랑이라는 나라 자체는 전한 말까지 존속해 있었다. 그러나 중원에서 보기에는 그저 힘 좀 쓰는 오랑캐의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으로 야랑 국왕은 야랑국이 큰지 중국이 큰지도 모르고 뻐긴다고 해서 야랑자대(夜郞自大)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이다.
이후 초나라가 검중(黔中)군을 설치하고[8] 중국의 지배에 들어갔지만 이 동네는 산이 많고 또한 소수민족이 많은 지역이었으며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았다.
이 야랑국은 한 무제때 광둥성/광시좡족자치구와 북부 베트남에 걸친 남월 원정을 위한 첫 상대로 멸망당했고 멸망한 야랑국에는 장가군, 월수군, 익주군이 설치되었다. 당나라 대에는 검중도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역 토착세력에 관직을 주는 토사(土司)제도라는 간접적 통치가 시행되었고, 중국에 동화됐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옆 윈난성과 마찬가지로 원나라 및 명나라 시기부터다. 원나라 때 이 지역에 있던 대리국을 원세조 쿠빌라이 칸이 멸망시키며 중국의 완전한 직접지배 영역으로 편입해 몽골만호부를 설치하고 군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유학 교육을 받아야만 토사를 세습할 수 있도록 바꾼 것은 명나라 때부터였다.
중화민국시기 중국공산당 홍군[9] 이 징강산에서 중국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시안까지 탈출한 대장정 때 홍군의 경유해 간 곳이기도 하다. 1935년 이 성의 도시인 쭌이(遵义)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을 다루는 역사에서는 이 지역을 내부적으로 중요 모먼트로 여긴다.
이후 1949년 11월 쯤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이 지역까지 점령해 중화인민공화국 구이저우성으로 편입해 오늘날에 이른다.
4. 행정구역[편집]
5. 역대 영도인[편집]
6. 출신인물[편집]
6.1. 실존 인물[편집]
6.2. 가상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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