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r2019031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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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德齡
(1567년 ~ 15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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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의 초상.
1. 소개
2. 거병
3. 실제로 전공은 있었는가?
4. 옥사
5. 사후
6. 유물
7. 기타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조선의 의병장. 1567년 출생하여 1596년 30세 나이에 옥사하였다.

2. 거병


임진왜란 당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장수감이라는 높은 평판을 얻었다. 광주, 담양, 화순 일대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1]
형 김덕홍과 함께 고경명 의병대에 참여했다 모친상을 당하자 형은 남고 자신은 시묘살이를 했다. 김덕령을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가 전라감사 이정암에게 추천했고 이정암이 재차 조정에 상소를 올려 병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지역 내에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기에 모집된 병력이 많았다. 1593년 윤 11월 담양에서 거병할 당시 거느린 병사가 5천에 달했고 조정에선 그해 12월 충용군이란 군호를 내렸다.
실전 기록이 적기 때문에 부대 운영이나 지휘력에 대해선 상세히 알 방법이 없다. 함양 의병장 정경운이 영남으로 이동한 김덕령을 보고 지시가 알아듣기 쉽다는 호의적인 평을 <고대일록>에 남기긴 했지만 그 한마디 뿐, 보다 상세한 언급이 없어 그의 지휘력을 평가할 근거로 삼긴 불가능하다. 다만 군율을 굉장히 엄격하게 집행했다는 기록은 자주 나온다. 1596년 2월 19일 선조를 만난 권율은 김덕령에 대해 김덕령이 용력은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군율을 엄격히 적용해서 곤장을 치거나 귀를 잘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망쳤다고 언급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며 비판한다. 1596년 1월에는 2건의 옥사를 일으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한번은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명을 매를 쳐서 죽였고 한번은 도망병을 잡아들이기 위해 도망병의 아버지를 잡아들였다. 이 사람은 제찰사 윤근수의 노복이었기에 마침 남방에 내려와있던 윤근수는 김덕령을 직접 만나 석방을 요청했다. 김덕령은 이를 승낙했으나 윤근수가 돌아가자 즉시 매를 쳐서 그를 죽였다. 이로인해 사태가 커져 김덕령은 체포되고 대간은 김덕령을 추국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왜적이 물러가지 않은 상황에서 장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방면하고 전마까지 내려주었다. 인터넷상의 인식과는 달리 선조는 이몽학의 난 이전까지 전공 없이 말만 무성한 김덕령을 못미더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대간들로부터 보호하고 지원해줬다.

3. 실제로 전공은 있었는가?


대중들에겐 왜란 시기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곽재우와 함께 늘 거론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만, 그가 기록 전공 부분은 민담과 정사의 일화들이 뒤섞인 형태로 민간에 전해지며, 이렇다고 할 만한 단독 전공이 별로 없다. 주요한 의병장이라면 무슨 전투, 무슨 전투에 참여했다고 거론되는데, 김덕령은 실록부터 호남창의록까지 살펴도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 실제로 김덕령의 전투 기록을 보면 권율의 휘하에서 치른 전투를 제외하면 기록이 제각각이라 신빙성이 높지 않으며 이렇다 할 대형 전투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과 협력해서 전개한 장문포 해전이 있으나 처음부터 무리한 작전이었기에 전과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전공 대신 병력은 많은데 군량이 부족하므로 500여 호남 지역 병사 외에 모두 해산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1594년 2월 1일자 기사를 보면 선조는 왜군의 전라도 침입에 대비해 김덕령에게 경상도로 넘어가 진해, 고성 방면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전라도와 경상도 접경 지역인 함양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정경운의 고대일록 2월 2일자에서 함양에 입성한 김덕령을 보았다고 적었다. 전란을 피해 전라도 남부에서 피난 생활을 했던 오희문의 쇄미록에선 이해 3월 22일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崔堈)이 고성에서 40여명을 이끌고 소규모 왜군과 교전을 벌여 90여명을 사살했다.(정탁의 임진기록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으로 여기서는 3월 5일로 기록되어 있다). 다시 창원에서 20여명을 참했다고 적었다. 오희문이 전해들은 이 기록이 현재로서 김덕령 군이 왜군을 공격해 전과를 올린 유일한 내용이다. 그러나 군을 지휘해 왜군을 사살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최강이다. 최강은 김덕령과 달리 실제 공적도 있고 난중잡록, 고대일록 등 왜란기 개인기록에서 그 능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어 유능한 장수임이 확인된다.
1594년 9월 2일 왜군 200여명이 고성 지방을 노략질을 하자, 권율이 김덕령에게 군사 200여 명을 이끌고 요격하게 했는데, 사로잡혔던 남녀 50여명은 모두 구출했지만 왜군을 베었다는 대목은 없다. 권율의 보고에 의하면 미리 험지에 매복까지 하고 싸웠는데 적을 사살한 기록이나 아군의 피해 정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치열한 교전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김덕령을 "왜적을 위엄으로 굴복시킨 비장군(飛將軍)"으로 호의적으로 서술한 신경의 <재조번방지>나 야사류를 폭넓게 수집, 정리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김덕령의 구체적인 전공은 나오지 않는다. 1694년 행장과 남은 시문을 엮어 편찬한 <김충장공유사>와 1799년 호남 출신 의사들의 행적을 모아 기록한 <호남절의록>에 비로소 김덕령의 전공이 나오는데, 의령에서 곽재우 군과 함께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는 적을 기습하여 적의 절반을 익사시켰다는 기록이다. 편찬 연대로 보아 호남절의록은 김충장공유사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게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에다 김덕령을 억지로 집어넣은 왜곡이란 점이다. 김충장공유사에서 해당 부분을 살펴보면 時公引兵到宜寧 郭公同陣鼎巖 巖下有大湫 深不可測라는 대목으로 시작하는데 정암(鼎巖)이란 두 글자가 보인다. 전투 내용도 왜군이 표목을 세워둔걸 보고 바꿔 꽂은 다음 야밤에 강을 지나는 기습했다고 적고 있어 망우당집을 통해 알려진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 묘사와 똑같다.(賊忽立標木 於上流淺灘 公問于郭公曰 賊欲何爲 郭公曰 賊必乘夜 越川而却我 故立標而避其深也 公曰 然則兩陣不可合處 遂引兵涉川而伏 又拔其標目 移挿深湫 賊果夜來及渡 公攝後訥喊 鼓操追之 賊望標而渡盡沒 大獲全勝) 이 전투는 1592년 5월 말 내지는 6월 초에 경상도 의령에서 일어났다. 1593년 호남에서 거병한 김덕령은 전투에 참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김덕령이 정암진 전투에 참전했다는 내용이 나왔을까? 서인계 학자 신경이 쓴 <재조번방지>가 그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여기서는 정담과 변응정의 웅치 전투 바로 다음 대목에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내용을 적고 있다. 계사년 말에 거병한 김덕령과 임진년 7월 초에 발생한 웅치 전투는 시기상 차이가 크다. 이 대목에서 신경은 비장군(飛將軍) 김덕령이 위엄으로 왜군을 굴복시켰으며 군사를 모아 영남에 들어가자 왜군이 부대를 모아 대군을 형성해 항거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김덕령이 영남으로 군사를 끌고 들어갔다는 대목 뒤에 곽재우가 김덕령의 온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켰다고 적었다. 곽재우는 임진년 4월 22일 의병을 일으켰으니 시기적으로 김덕령보다 훨씬 앞인데 재조번방지에는 이 부분 역시 앞뒤 순서가 바뀌었다.
김덕령이 특별히 당색을 드러낸 기록은 없지만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형 김덕홍이 서인계 의병장 고경명 휘하에서 종군했다. 김덕홍에 관한 임진왜란기 기록은 고대일록 인명록에 짤막하게 언급되는것 정도다. 김덕홍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일화는 정조 대에 가서 발굴된다. 또 김덕령이 이귀의 권유를 받고 거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인계에 든다. 이귀가 김덕령에 대해 지나친 과장을 일삼아 선조에게 핀잔을 듣는 실록 기사도 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선조실록보다 김덕령에 대한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인조반정 이후 집권당이 된 서인 내부에 김덕령에 대한 지속적인 동정 여론과 숭상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재조번방지>나 <김충장공유사>의 기록은 이러한 서인의 김덕령 숭상이 빚어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서인계의 김덕령 숭상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는데 서인 중에서도 노론의 중추였던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자대전>에도 김덕령이 국문을 받던 중 용력을 과시하며 결백을 주장하는 일화가 실려있다.
고려해야 할 점은 김덕령이 활동할 당시는 명나라심유경강화 협정을 맺고자 했던 휴전 국면이었기 때문에, 전투 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이다. 명성은 높은데 이렇다할 실적이 없으니 조정 논의에서 김덕령의 높은 명성에 대해 "구체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수 밖에 없었고, 본인 스스로도 생전에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에 부담스러워하는 듯한[2] 언급이 장문포 해전을 다룬 실록 기사에 등장한다. 왜군 수장의 목을 치겠다고 호언장담하다 선조에게 말이 너무 앞서는거 아니냐는 지적을 듣는 실록 기사를 보면 본인이 이런 명성을 경계하고 삼가는 자세가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선조가 "김덕령의 명성은 대부분 그 용력에 기반한 것"이라는 요지의 류성룡의 보고를 바탕으로 "비록 의논이 분분하나 그 용력 또한 얻기 어려운 것"이라 평하며 정식으로 8도 총섭으로 임명해 의병을 거느릴 권한을 부여한 것을 보아, 어려운 때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

4. 옥사


높은 평가에 부응하는 실적이 없는 상황에서, 1596년에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남원에 이르렀을때 반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회군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연루되어 김덕령은 역적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문 끝에 옥사했다.
김덕령을 죽인 것은 그 자신조차 부담스러워 했던 높은 명성이었다. 워낙 명성이 높다보니 반란 수괴들이 사람을 끌어모으는 수단으로 그의 이름을 도용했고 이게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흔히 이몽학의 난에 이름이 거론된 것만 알려져 있지만 선조실록 1596년 8월 8일 기사를 보면 이몽학의 난 2년 전에 발생한 송유진의 난 때도 반란 수괴 사이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게다가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 겨우 몇 달 전인 1596년 1월에 3명을 함부로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는 김덕령을 탄핵했으나 선조는 적이 물러가지 않은 상황에서 장수감을 벌할 수 없다며 처벌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몽학의 난이 발생한다.
반군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고언백 등이 장수로 합류하고 이덕형이 중앙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선전했고 사로잡힌 반군 수뇌 한현, 유규, 이업 등은 공초에서도 공통적으로 김덕령이 모의했다는 진술을 내놓았다. 선조는 곽재우, 홍계남, 고언백 등 다른 장수들은 모두 무혐의로 보고 불문에 붙였지만 김덕령은 관계자 증언이 많아 의심의 여지가 충분했기에 선전관을 보내 압송해오게 한다.
8월 4일 김덕령의 첫 국문이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류성룡은 죄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반란수괴들이 모두 한양에 압송된 다음 본격적으로 처리하자고 말한 반면 윤두수는 즉각 심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는 김덕령의 참모들인 최담령, 최강 등을 빨리 압송하도록 지시한다. 8월 8일 최담령의 국문이 열렸는데 박승립(朴承立)의 증언에서만 언급될 뿐 이었던 최담령은 선조와 대신들 모두 처음부터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내 방면된다.
김덕령의 죽음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내에서도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의 기술이 다른 대표적인 사항이다. 선조 실록만 본다면 선조나 대신들이나 김덕령에 대한 의심이 확고하지만 수정실록에서는 선조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상(선조)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아뢰기를,“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 선조수정실록 30권, 29년(1596년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8월 1일 "김덕령이 옥에서 고문 받다가 죽으니 남도의 군민들이 원통하게 여기다"

왕권이 크게 실추된 정황과 전근대 왕조 국가 특성을 고려하면 선조의 의심이 아무 근거 없다고 보긴 힘들다. 2번의 반란에 모두 이름이 거론되고 그 사이에 조정에서 탄핵까지 받았으니(조정에 불만을 품었다고 생각할만한 건수도 있었으니) 오히려 의심할 여지가 너무 많았다. 선조가 의병장들을 시기해 죽였다는 설이 인터넷에 떠돌지만 역시 반란군이 이름 팔아먹은 고언백, 곽재우, 홍계남은 아예 불문에 붙이고 김덕령과 휘하에 있다 함께 압송된 최담령과 최강은 심문 후 무죄 방면 되었다는 점에서(최담령은 선조의 명으로 김덕령이 이끌던 병사들을 이어받는다.) 이 주장은 받아들여 질 수 없다. 선조가 죽인 두 의병장 이산겸과 김덕령에겐 공통점이 있는데 제대로 된 전공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의병 통제를 위해 전쟁 기간 내내 고심했던 선조는 곽재우, 홍계남처럼 공 있고 유능한 의병장은 역모에 이름이 거론되어도 불문에 붙였지만 공 없으면서 이름만 높은 이산겸과 김덕령은 용서하지 않았다. 특히 이산겸은 선조 본인 스스로 무고를 받았지만 살려줄 순 없다며 죽여버렸다.
선조와 달리 신료들의 태도는 실록에도 수정실록에도 한결같아서 김덕령을 구명해주려 한 신료는 거의 없다. 뒷날 신구차를 올려 이순신을 보호한 정탁만이 김덕령 옥사 이후 상소를 올려 의문을 표하고 김덕령은 단지 명성이 높아 오르내림이 심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당색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학맥상으론 서인 계열 의병장인데 윤두수 형제 같은 서인 인사들도 극형을 주장하고 남인 정탁이 억울한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당쟁과 관련 있는 사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 사후


현종 대인 1661년 복권되었고 숙종 시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정조 시대에는 그의 사적이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는데 1785년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88년 고향에 김덕홍과 김덕령 형제의 행적을 새긴 비가 세워졌다.

6. 유물


김덕령의 묘는 역적 죄가 있었기에 문중의 무덤이 있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1965년이 되어서야 광산 김씨 문중에서 이장을 하게 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때 마땅히 썩어 있어야할 시신과 의복이 썩지 않고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1596년에 사망했으니 무려 369년동안 시체가 썩지 않고 보존된 사례인데, 아마도 매장 당시 관안이 멸균 및 진공상태가 되어 미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3]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그 모습을 남기려고 했으나, 사진기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사진기를 가져왔을 때는 이미 시신이 산소와 접촉한 지 오래되어 검게 변하는 등 부패가 진행되어 버렸다고 한다. 결국 광산 김씨 문중에서 화장처리해 이장하고 김덕령이 입고 있던 의복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충장사에 전시 중이다.

7. 기타


앞서 나왔듯이 공적 대비 일화가 굉장히 화려한 인물. 정사와 행장의 차이가 심하기로 유명한 정기룡도 김덕령에게는 못미친다 할 정도였다. 이와 비견될 정도로 민담에서 크게 다뤄진 무장은 조선 초기의 남이나 병자호란 시기의 임경업 정도인데, 이들은 모두 소설이 나와서 야사처럼 취급 받았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평을 받았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관련 민담은 주로 전라 남도, 북도에 전해오지만 일부는 강원도 횡성, 경기도 남양주와 강화도, 경북 달성과 월성 같은 타 지역에서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민담 속에선 능력은 출중하지만 상당히 오만하고 성급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도 특징이며, 김덕령 이상의 신력을 지닌 누나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다.
  • 김덕령은 날 때부터 눈을 뜨고 울지도 않았다고 한다. 힘이 엄청 세어서 다리가 묶인 채 무릎만으로 담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 화가 나면 눈에서 불이 날 것 같은 안광을 내뿜었는데, 이 눈을 보면 아무리 기운이 센 사람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화가 나면 눈에서 불이 나와 십리까지 비추었다고 한다.
  • 어느날 김덕령을 임신 중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동료 아낙들과 빨래를 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몸종을 물려고 하자 김덕령의 어머니가 호랑이를 막았는데 호랑이가 김덕령의 어머니에게 감히 덤비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 고승에게 물어보니 '뱃속에 있는 아이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 호랑이가 덤벼들지 못했다.' 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 14살 때 마을에 나타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잡았는데, 이후 총 3마리의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다고 한다.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는데, 피난 중이던 광해군을 구해 익호 장군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워낙 무력이 출중하여 왜군은 김덕령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유정(惟政)스님에게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일본에서 요괴를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요마사의 진영에 단신으로 침투하여 철추로 왜적을 쓰러뜨리고 별량고에 불을 붙여 적진을 혼란스럽게 한 다음, 조선인 하녀의 도움으로 야만바(山婆)라는 요괴를 잡았다고 한다.
  • 이성계, 견훤이 가지고 있는 화살보다 빠른 말 일화도 가지고 있다.
  • 간신배의 모함으로 죽게 되자 포박을 끊고 달아났다가 돌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하길 반복했으나 결국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광역시 번화가의 도로인 충장로의 명칭은 김덕령의 시호에서 따왔으며 한국군 제31보병사단의 이름도 이를 따와 충장 부대다.(그래서 31사단의 공식적인 경례 구호는 "충장"이지만 아무도(심지어 사단장도) 안 쓴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고전소설 임진록에서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나오며, 키가 9척이라고 한다.[4] 하지만 소설이 아니라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덩치는 작지만 용력이 뛰어나서 운운이다. 실제로 아래 나온 1965년 광산 김씨 문중이 이장하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 김덕령의 신장은 160-170 cm 사이였다고 한다. 고향도 당연히 전라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묘지를 지키고 있는 차에 가토 기요마사가 쳐들어와서, "너는 상을 당한 몸이니 기간이 다할 때까지 묘소를 지키라"는 어머니의 명령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현재 자신의 처지로 인해 나라를 위해 싸울 수 없는 자신의 상황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나라를 선택하고 집을 나서 왜군 진영으로 가 종이와 관련된 도술을 부려 가토의 직속 부대장 한 명을 살해하여 가토를 놀라게 하여 군대를 철수시킨다. 그러나 후에 '능력이 있으면서도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는 조정 신료들의 규탄이 발생해 결국 압송당해 참수당하게 된다. 그러나 칼로 목을 내리치자 목은 멀쩡하고 칼이 부러지니 덕령이 "소인의 겨드랑이에 있는 비늘을 걷어내고 치소서."라고 하여 겨드랑이를 살피니 정말 용의 비늘이 있었고, 그 비늘을 떼어내고 목을 치자 덕령은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 직후 "김덕령이 가등청정을 놀라게 하여 전하의 뒤를 쫓지 못하게 하였다 하옵니다."라는 소식이 뒤늦게 도착하였고, 임금은 그를 죽인 것을 크게 후회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고 시호를 내려 사죄했다고 한다. 또한 애초에 김덕령전이라는 별도의 전기소설을 가지고 있으며, 김덕령에 대한 민담과 설화들은 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퇴마록에서는 최철기가 강신술로 김덕령의 혼을 불러 마하 칼리를 강령한 스기노방과 대적했다....만 장면의 비중은 적다.
왜란종결자에서는 왜란을 끝낼 신씨, 이씨, 김씨 중 김씨로 추정.
징비록에서도 등장했다. 배우는 광개토태왕에서 모용희, 대조영에서 손만영을 맡은 조인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임진록 2에서는 확장팩인 조선의 반격에서 추가된, 조선의 병기 창고에서 생산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같은 의병장인 곽재우사명대사, 도원수인 권율과는 달리 시나리오 상에서도 등장하며, 호전적인 성격으로 묘사된다. 테크트리 상 같은 검 영웅인 권율이나 곽재우는 물론, 허준을 제외한 다른 영웅들보다도 빨리 뽑을 수 있다는게 특징으로, 체력과 연사력이 높다. 주위 병력들의 공격력을 올려준다.

[1] 훗날 가사 문학으로 알려지는 송강 정철도 이 무렵 외가가 있는 담양에 내려와 김윤제(김덕령의 작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공부하고 혼인으로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2] 다만 한참 치켜세워 올려질 때는 "나가서 적장의 목을 그냥 따오겠다"는 둥 본인도 허세끼를 부리기도 했다.[3] 조선시대 무덤에서 미라가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대량의 석회로 관주변을 봉인하는 풍습이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 석회가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면서 굳어질 때 열을 방출, 관 내부를 섭씨 200도 가량으로 고온 살균해버린 뒤 진공상태로 밀봉하게 되어 자연적으로 미라가 만들어지는 원리.[4] 조선시대에는 척이 여러 가지 있었는데, 특히 주척과 영조척이 자주 쓰였다. 주척은 약 20 cm, 영조척은 약 30 cm 정도이다. 어느 척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값이 많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