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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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장에서 군수가 되다
2. 행정자치부장관
2.1. 해임건의안 가결
3. 3수 끝의 경상남도지사 당선
4. 무리수였던 대통령 도전
4.1. 다시 재야로
5. 20대 총선: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하다
6. 21대 총선: PK에서의 신승
7. 두번째 대통령 도전
8.1. 2022년
8.2. 2023년



1. 이장에서 군수가 되다[편집]


1959년 4월 10일,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가난한 어부의 5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형들[1]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해종합고등학교(현 남해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연 등록금 28만 5천원[2]을 감당할 수 없어 진학을 포기했고, 이후 경북전문대학교 행정과를 거쳐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해 졸업한다. 대학 시절 동생 김두수[3]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고향 남해로 낙향해 민중의당[4]후보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경남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5%도 채 되지 않는 득표율로 민주정의당 박희태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5]

이후 고향 이어리의 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기반을 쌓아나갔고, <남해신문>이라는 지역 신문사를 설립해 운영하며 신망을 쌓았다. 1995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남해군수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당시 만 36세로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선거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최연소 기록이 깨지지 않는 중이며 이후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승리21의 지원을 받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에 성공하여 재선 남해군수를 지냈다.[관련]

영화 이장과 군수가 실제로 이어리 이장을 거쳐 남해군수가 된 김두관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이 있다.

민선 2기 남해군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상태에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났고 결국 17%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김혁규넘사벽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김혁규는 무려 74% 이상의 득표율로 김두관을 개박살냈다.[6]


2. 행정자치부장관[편집]


이후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정권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만 45세로 민주화 이후 최연소 장관이었다. 문재인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당시 장관직 수행평가에서 1위를 여러차례 차지할 만큼 장관직 수행을 잘 했다고.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그의 장관직 수행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었으며, 한총련이 미군기지에 침투하여 불법시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고, 결국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그의 장관직을 지킬 것이라고 했으나, 계속 논란이 되자 그는 스스로 사의를 제출하면서 결국 장관직에서 퇴임하였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경우는 여야를 불문하고 스스로 사임해야되는 것이 관례며 승복하지 않으면 역풍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2.1. 해임건의안 가결[편집]


[162582] 국무위원(행정자치부장관 김두관) 해임건의안(홍사덕의원 등 149인)

국무위원(행정자치부장관 김두관) 해임건의안
(의안번호: 162582) (발의일: 2003년 8월 29일) (의결일: 2003년 9월 3일)
재적
재석


기권
무효
272
160
150
7
2
1
결과
재적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여
가결
후속 절차
대통령 : 해임건의안의결서 수령(헌법 제63조)




여담으로 김두관 해임안 통과에 대해 한나라당박진 대변인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승리'라고 평가했는데, 2022년 윤석열 정부의 외교부장관 박진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김두관은 '20년 만에 돌려드렸다'고 평가했다. [논&설] 2003년 김두관, 2022년 박진…공수 바뀐 해임건의안 더 자세한 내용은 박진 해임건의안 가결 참고.

이 해임건의안에 대해 홍사덕 한나라당 원내총무[7]는 기자간담회에서 "마음이 유쾌하지는 못하다"며 "현 제도상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을 직접 규탄할 방법이 없어서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아 김두관 장관이 선정된 것"이라고 밝히며 이 해임건의안이 정치적이었음을 시인했다.김두관 여유, 한나라당은 긴장 '강한 야당 콤플렉스'의 실패작 당시 한나라당은 김무성 의원이 "나는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 안해"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등 대놓고 16대 대선에 불복하는 분위기였고, 이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해임건의안이 가결된 것.

불명예스럽게 퇴임한 셈이 되었으나, 민주당계에서는 그는 한나라당의 딴지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라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차츰 민주당계에서는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올라섰고, 열린우리당이 생기자 바로 합류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남해군-하동군 지역구로 출마하였고, 당시 탄핵 논란으로 열린우리당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평이 있어 어느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선거운동 초반 여론조사에서도 20% 가까운 우위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보도된 이후 샤이보수 층이 결집하면서 끝내 한나라당 박희태[8] 후보에게 약 7,000표 차이로 석패했다. 2년 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에 다시 도전했으나, 한나라당의 김태호[9] 도지사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며 낙선했다.[10] 2년 뒤에는 지역주의를 의식했는지 무소속으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지역구로 출마했지만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여상규 후보에게 밀리며 40%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11]

이로서 2년 주기로 걸친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2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3. 3수 끝의 경상남도지사 당선[편집]


그러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상남도지사에 도전했고, 무소속 신분이었던 그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되어 대통합 야권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3%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에 이달곤[12] 후보를 꺾고 성공했다. 본인으로선 도지사 선거만 3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이달곤에 비해 오랫동안 PK에 몸담아온 김두관이었기에 지역밀착형 후보라는 태그가 승리의 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2006년을 기점으로 세를 보이기 시작한 PK의 진보층도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경남 전역을 누비며 김두관이 당선될 수 있도록 총력지원을 해준 것도 당선의 원동력이었다. 이로써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되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13]

문재인강기갑 등 여러 야권 명망가들의 격려를 받으며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 도지사로 취임한 김두관은 자신과 야권단일후보를 놓고 경쟁했던 민주노동당 소속의 강병기를 정무부지사로 임명하며 협치 행정을 실천하였다. 또한, 2012년에는 새누리당 허남식 부산시장과 일일 교환근무를 하기도 했다. 이어 4대강 사업을 선명하게 반대하며 이명박 정부와 각을 세웠고[14], 무상급식을 통과시켰다.


4. 무리수였던 대통령 도전[편집]


이후 다시 민주당에 입당하여 무난히 도정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재임 2년차인 2012년 경남지사직을 뜬금없이 돌연 사퇴하고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하였다. 이로 인해 경상남도 진보층 사이에서는 배신감이 쌓이게 되었다.

경선 결과, 손학규에게도 밀리며 14%의 득표율로 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야 했다. 자세한 경선 과정은 여기로. 같은 PK를 기반으로 하는 문재인 후보가 월등히 지지율이 높은 상태라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애초에 높지 않았는데, 도지사직을 뛰쳐나와 무리하게 경선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꼴이 되어버렸다는 비난을 받았고,[15][16] 결국 대선과 병행하여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홍준표가 당선되면서 어렵게 얻은 경남지사 자리를 다시 새누리당 쪽에 헌납한 꼴이 되어버려, 야권 지지자들에서까지 평생까임권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나열한 '관두김', 사퇴하고 도망쳤다고 '런두관'[17]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생긴 것은 덤이다.

경선에 참여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고 왜 경남지사직을 사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18] 사실 안철수의 국회의원 사퇴도 그렇고 대선후보 또는 경선후보 역할과 국회의원, 도지사직을 동시에 수행하면 한 쪽에 소홀하게 된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기는 하다.[19][20] 실제로 안희정, 남경필 등이 대권도전으로 인한 도정소홀 문제로 약간 논란이 있기도 했다.[21] 문제는 그러한 명분보다 도지사를 다시 뽑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자신을 뽑아준 도민들에 대한 신의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두관 이후로는 한동안 경선출마를 이유로 시/도지사, 넓게는 기초단체장직이나 지방의회 의원직을 사퇴하는 사례가 없었는데, 2020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서 정의당 소속 구의원이던 임한솔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구의원직을 사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키워준 정의당마저 탈당해 버렸다. 물론 임한솔의 경우는 경선출마가 아닌 국회의원 선거 출마가 목적이었지만, 정작 자신이 새롭게 둥지를 튼 민생당에서조차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받지 못해 임한솔의 무리수는 대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홍준표, 안희정, 이재명 등이 다 경선단계에서 단체장직을 유지했다. 이후 2021년 8월 2일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 참여를 위해 제주도지사직을 사퇴했는데 김두관에 비해서는 비판 여론이 크지는 않다. 임기가 1년 남짓 남은 시점이라 재보궐선거를 굳이 치루지 않아도 되기도 하고[22] 이미 도지사직을 7년 가량 수행한 이후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무리수를 뒀던 이유에 대해 당시 여러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정치환경적인 문제. 당시 경남의 각종 단체들의 심각한 알력, 도의회[23], 공무원 등의 비협조적 태도, 이명박 정부의 지나친 견제 등[24] 여러 이유로 인해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도정을 수행할 여건이 아니었다. 즉 이래저래 끌려다녀 성과 안 나올게 뻔한 도지사직을 계속 하는 건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때마침 대통령 후보경선이 있었고 이를 명분삼아 도지사직을 사퇴함으로써 추후를 도모하고자 했다는 것.

또 다른 설로는 프레임에 말려 들었다는것. 2010년도 이후부터 일부 매체들을 통해 특정 정치평론가, 혹은 여권의 유력한 관계자라는 불분명한 출처를 통해 김두관이 야권의 차기 대권주자(일 지도 모른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흘러 나왔었는데, 이를 근거로 그의 뜬금없는 “대권도전” 선언이 여권 혹은 그 쪽과 가까운 정치평론가들의 지속적인 프레임 설계였으며 여기에 제대로 낚인 것이다는 추측이다. 참고로 당시 김두관을 지지했던 김병준, 고성국 등 민주당계열 인사들이 김두관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이 실패하자 보수로 전향했고 현재도 평론가 이외에 활동이 크게 보이지 않고 있다. 즉 김두관 본인은 정치적으로 거의 힘도 못내는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 도지사직을 날려버린 꼴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10년이 넘은 일이기도 하고 PK에서 화려하게 복귀한 마당에 굳이 도지사직 사퇴의 진짜 이유가 밝혀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김두관 본인이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지 않는이상 이 사안이 크게 불거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만약 이 사안이 다시 불거진다면 추후 정치적인 일정자체가 꼬일 수 있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고작 지역 수준에서의 알력[25] 여소야대 국면[26] 도 이겨내지 못하고 뛰쳐나간 사람이 되고, 후자가 사실이라면 고작 정치평론가들이 하는 평론정도에 휘둘려서[27] 사리분별도 못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덕목중에 하나가 사람 보는 눈임을 감안하면 이는 지도자로서의 역량 자체에 물음표가 달릴 상황이다.

4.1. 다시 재야로[편집]


졸지에 다시 재야가 되어버린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1년 간 연수를 받은 뒤, 2014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지역구는 당초 활동했던 PK가 아닌 경기도 김포시로 정해졌다.[28]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나서자 낙하산이나 뜨내기라는 비판이 생겨났지만, 본인으로선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수도권에 힘을 뻗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수였다.

거주지도 김포로 완전히 옮기고 본인은 분투를 했지만, 지역 토박이들은[29] PK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나마 지역 정체성이 덜한 신도시 지역에 승부수를 둬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승리 여부에 의문을 둬야 했다. 결국 경쟁상대인 새누리당홍철호[30] 후보에게 밀리며 4년만에 낙선의 쓴맛을 맛봐야 했다. 예상대로 농촌지역에선 홍철호에게 몰표가 쏟아졌고, 신도시에서도 패배하여[31] 40% 득표율로 선거를 마감했다. 경남지사 당선 배경에는 PK 지역밀착형 후보였던 점이 상당히 먹혔던 것에 비해 이번 선거에서는 오히려 그 점이 낙선의 큰 요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5. 20대 총선: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하다[편집]


이후로도 경남으로 주소를 옮기지 않고 계속 김포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점점 김포사람으로 되어가는 중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포에서 출마하기 위해 준비해오고 있는 듯 했다. 마침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포시 선거구가 갑/을로 분리되면서 자리가 하나 더 늘었고, 김포시 갑 선거구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32] 새누리당 측의 상대는 김동식 전 김포시장. 더불어민주당에서는 PK 출마를 기대했지만, 본인은 대권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김두관 본인 말로는 경남지사 자리에서 중도 하차해 다시 보수정당의 홍준표에게 헌납한 그 원죄 때문에 못 내려가고 있다고 [34]

현재까지 나온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새누리당의 김동식 후보보다 5~10% 안팎의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시(갑)이 도시 인구가 많아 야권세가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결과를 두고 볼 일이지만, 일단 2014년 재보궐 선거 때보다는 해볼만한 승부로 여겨진다. 김동식 후보는 김두관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데다[35] 김포시장 시절 권력형 비리(!)로 처벌받은 전과가 있다.

여담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지역 출마자 중 91년 이후 역대 공직선거 출마횟수가 8회로 가장 많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포함하면 9회이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면 10회가 된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선거운동기간에 경남에 내려가서 똑같은 내용으로 고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충의 내용은 '죄송하다 내 잘못이다'로 시작해서 '중도사퇴는 잘못됐다' → '내가 관둬서 홍이 됐다' → '나는 준비가 미흡했다' 라는 순서로 갔다. 그 다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여기에 홍준표를 벌해달라는 말은 덤. 전형적인 사과문의 한 사례이다.


6. 21대 총선: PK에서의 신승[편집]


머니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도부에서 PK 지지율이 안 좋아지니까 21대 총선에서 다시 PK로 차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양산 갑/을 중에 차출될 구상이었는데, 김두관 본인은 김포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고사했다. # 하지만 계속된 당 지도부 및 친문 그룹의 설득과 권유로 양산 갑/을 중 하나로 다시 PK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36]

2020년 1월 23일, 양산시 을 출마를 결심하였다. # 현역 서형수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곳이다.

2월 17일, 양산시 을 전략공천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20일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부산·울산·경남 지역 선거를 지휘할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21일에는 양산시 을 선거구에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했던 임재춘, 박대조 예비후보가 김두관 지지를 선언했다.

한편,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PK 수비대장을 자처하며 양산 을에 출마하겠다고 나서면서 전직 경남도지사 간의 빅매치가 성사될 것으로 보였으나, 홍준표가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컷오프당한 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 홍준표 대신 김두관의 선거 상대로 나온 적수는 나동연 前 양산시장이었다.[37]

한 마디로 체급이 센 홍준표가 아닌 나동연이 나온 덕분에 선거가 조금 수월해졌다. 실제로도 나동연은 웅상지역에서 민심이반을 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는 과정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웅상지역에서 반쯤 이기고 양주동에서 적은 표차로 이기면서 겨우 당선되었다. 만약 홍준표와 맞붙었더라면 낙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홍준표 예비후보가 과거 경남지사 시절의 마이웨이 행보로 인해 지역에서 안티가 꽤나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완전히 불리한 싸움은 아니었다. 홍준표 후보가 고향 출마가 아닌 대구 출마를 선택한 이유도 경남에서는 썩 유리하다고는 볼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38]

결국 치열한 접전끝에 경남 양산시 을에서 미래통합당 나동연 전 시장을 꺾고 당선되며 8년 만에 돌아온 격전지 경상남도에서 재선 국회의원이 되는 데 성공했다.# 본인이 민주당 선거를 지휘했던 PK 지역에서 민주당 의석이 10석에서 7석으로 줄었지만, 2019년을 기점으로 민주당에 싸늘해졌던 지역 민심을 생각하면 낙동강 벨트를 접전 끝에 수성하면서 선방했다는 평가.# 아울러 그의 정치 커리어 최초로 민주당 당적을 갖고 경남에서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총선 직후 오거돈 부산시장이 성추문으로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자, 민주당 내에서 내년 있을 보궐 선거에서 후보를 낼 것이냐, 내지 않을 것이냐를 가지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심판을 받더라도 잘못했으면 잘못한 대로, 잘했으면 잘한 대로, 선거로 심판받는 것이 민주주의라면서 후보를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인께 따뜻한 연대를 보낸다.

위안부의 역사적 진실을 찾는 기나긴 여정에 인생을 바친 윤미향 당선자마저 공금횡렴범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핑계로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다수가 숨죽여 침묵할 때 일본 제국주의의 성노예 범죄를 세계에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한 사람의 인생과 역사적 성과를 누더기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공격이 친일 반인권 반평화 세력의 최후 공세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2015년 박근혜 정권이 맺은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파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기부금의 진실'이 아니라 '위안부의 소멸'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했던 미래통합당, 일제와 군국주의에 빌붙었던 친일언론, '위안부는 매춘'이라는 친일학자들이 총동원된 것 같다.

페이스북 지지 선언


재선 성공 이후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에 의해 촉발된 윤미향 당선인 및 정의연에 대한 의혹공세,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논란, 부산시장 재보궐선거 무공천 여부, 북한에 대한 전단살포, 윤석열 검찰총장의 거취와 관련해 강경한 입장을 내고 있다. 특히 윤미향 당선인 및 정의연 관련 의혹 제기에 대해 "친일, 반인권, 반평화 세력이 최후의 공세를 하고 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 한 시민단체가 나서서 고발하고, 검찰이 수사하고, 언론은 검찰의 입을 빌려 밝혀지지 않은 의혹을 단독이라 연일 보도할 것이다.", "윤미향 향한 비판은 보수 망나니의 칼춤이다."와 같은 반응을 내놓으며 윤 당선인을 강력히 옹호하고 이런 의혹은 모두 토착왜구의 저열한 공격이라고 일축했다. 이러한 논란 전체를 '윤 당선자 길들이기'로 정의하기도 했다. 윤미향과 김두관은 같은 남해군 출신 동향인이기도 하다.

7. 두번째 대통령 도전[편집]


그러던 중 2021년 초 갑작스럽게 대권후보로 청와대가 낙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민주당의 부울경 지역 의원들의 의견은 그냥 가담항설. 쉽게 말해, 그냥 썰이 아니냐는 추측 또는 경우의 수를 넓혀보자는 의미라고 하는 듯. 무엇보다 또다시 대선 출마를 준비하려면 어렵게 당선된 국회의원직을 내려놔야 하는데 이미 과거 도지사직을 사퇴해 꽤 오랜 기간 고생했던 것을 감안해보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아보인다. 만약 이번에도 도중 사퇴를 선택했다가 경선에서 패한다면 정치적인 생명이 사실상 끝장 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4월 26일, 정말로 대선 도전을 공식화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가을부터 대선 출마의 생각을 굳히고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오는 6월에 출마 선언을 하겠다고 밝혔다# 과거의 경험으로인해 사퇴는 하지 않고 출마했다.

6월 12일에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큰형님#이라고 호칭하면서 2012년 대선 경선과정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를 공격했던 일을 사과한다고 발언했다. 이번 대선에서 친문세력을 자기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로 보인다.

7월 11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 예비경선 결과가 발표되었다. 6명으로 컷오프되어 남은 사람만 본경선에 진출하는데, 지지율이 극히 낮은 양승조최문순이 컷오프되며 이재명, 정세균, 이낙연, 박용진, 추미애와 함께 본경선에 진출하였다.

7월 19일에 국립 5·18 민주묘지를 방문해서 전날 윤석열이 참배하며 만지고 간 묘비를 더럽혔다며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을 보였다.#

9월 4일부터 더불어민주당의 본경선이 시작되었는데, 모두의 예상과 같이 여권의 강력 대권 주자로 꼽히는 이재명의 1위 독주, 이를 추격하는 이낙연의 존재로 인해 인지도가 낮은 박용진과 함께 득표율 하위권을 달리고 있다. 심지어 박용진에게도 밀리며 꾸준히 최하위였는데, 박용진이 민주당에서의 커리어가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꽤나 자존심 구기는 결과다. 대통령 도전은 이번에도 무리수였던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부울경의 지지를 바랐겠지만 부울경 역시 이재명 후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결국, 2021년 9월 26일에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며 경선에서 하차하였다.

8.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후[편집]



8.1. 2022년[편집]


이재명 후보 지지선언 이후에는 이재명 후보의 대선 캠프에 합류한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현재는 국회의원 3선을 노리는 것인지 지역 현안에 좀 더 치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선이 이재명 후보의 패배로 끝난 뒤, 3월 11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재명 후보를 비대위원장에 올려야한다고 주장하며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민주당 권리당원들을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윤호중 비대위가 예정대로 출범하자 한발 더 나가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공개 저격하면서 이재명 비대위 구성을 위한 서명 운동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재명 전 지사의 측근들까지 이재명 조기 등판론에 부정적인 의사를 나타내고 있는데, 한 측근 의원은 "이재명 전 후보의 체력이 완전히 방전됐다"며 "가까운 인사들과의 만남도 이번 주 들어 재개할 듯하다"고 했다고 하며 민주당 의원들의 채팅방에선 '이재명 비대위 체제'를 주장하는 김 의원에게 "지나치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개진한 의원도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당내 일부 반발에 본인 페이스북을 통해 의견을 굽히는 가 했더니, 오히려 3월 19일에는 주장을 강화해 이재명 전 후보를 1971년 대선에 나섰던 당시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 비교하면서 조기 등판을 촉구하고 사퇴 요구를 거부한 윤호중 비대위원장을 거세게 비난했다.#

이후, 7월 27일에는 경남도당 위원장에 출마하였다#

같은 해 8월 13일에는 경남도당위원장에 당선되었다.#



8.2. 2023년[편집]


2023년 3월 22일에 차기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밝혔다.# 보통 거대 정당의 원내대표는 관례상 3-4선 의원들이 주로 출마하기 때문에 재선 의원인 김두관 의원의 출마가 이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김두관 의원의 경우 행자부 장관과 경남도지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의 중량감이 중진급 의원들 못지 않으므로[39]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민주당 원내대표 적합도 20% 안팎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후보군들은 모두 10%에 못 미치고 있다. 여러 원내대표 후보군 중에서 거의 유일한 (범)친명계로 분류되는 후보이다 보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월 17일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4월 28일에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결과 낙선했다. 여론조사에서는 높게 나온편이었지만 의원들끼리만 하는 선거이다보니 이재명계에 대한 견제심리와 돈봉투 사건의 여파, 후보 통합을 하지 못한 이재명계의 안일함, 여기에 경선날 오전에 있었던 합동토론회에서 사실상 사상검증에 가까웠던 발언#등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다만 지역 정치권에서는 이번 낙선이 김두관의원에게 딱히 손해가 아니라는 평이 우세하다. 일단 여론조사에서는 상위권을 달려 대중적인 인지도도 어느정도 확보했고, 지역의 위원장, 당원등이 김두관을 보다 확고히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 이번을 계기로 도지사 중도 사퇴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가 어느정도 희석될 것으로 보인다.

5월경 지역구의 숙원사업이었던 부산-양산-울산 광역전철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확정시켰다@. 아직 본 타당성 조사가 남아있고 실제공사까지는 많은 절차가 있지만[40] 국토부에서도 규격변경까지 제안할 정도로[41] 관심을 보이는 사업인 만큼 상당한 사업동력을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이로인해 지역내 인지도도 다소 올라갔다.

[1] 큰 형은 서독 광부였고, 셋째 형은 사우디 건설 노동자였다고 한다.[2] 이 당시 사립대학 자연계열 등록금이 연 37만원이었다.(현재는 약 850만 원) 이를 바탕으로 당시 28만 5천원은 현재의 660만 원 정도임을 알 수 있다.[3]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제 16대 총선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제 17대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고양시 일산구 을(현 일산서구 일대)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현재는 평론가로서 주로 활동중. [4] 김두관 외에 민중의당 당원 중 대표적인 사람은 훗날 친이계의 좌장이자 보수정당인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 소속으로 5선 국회의원 역임한 이재오 이다.[5] 그래도 꼴찌는 아니었다. 당시 꼴찌는 신민주공화당의 한춘기 후보.[관련] 내용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6/05/1998060570436.html[6] 그런데 한나라당 소속의 김혁규는 그 다음해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도지사를 사퇴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7] 당시에는 원내총무라 불렀으며, 당대표 내지는 당 총재의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17대 국회에 가서야 열린우리당이 ‘원내지도부의 권한 강화’를 내세우며 원내총무를 원내대표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대로 정착되었다.[8] 2014년 핫이슈가 된 그 인물 맞다. 현재까지 남해군에서 배출된 정치인 중 김두관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검사 출신의 의원으로 남해-하동 지역구를 김두관이 처음 출마한 13대부터 20년간이나 꿰차고 있던 인물이었다. 당은 다르지만 같은 고향 출신이라 그런지 김두관과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고 하며 장관 해임건의안 제출 때는 한나라당 소속으로는 드물게 반대를 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박희태 문서로.[9] 김두관이 최연소 민선 자치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면, 이분은 최연소 민선 광역 자치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10] 당시는 지역주의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현저히 낮아서 압도적으로 패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더불어 압도적인 학살로 회자되던 선거가 바로 이 선거. 수확이 있었다면 자신이 군수를 지낸 남해군에서는 58.9%를 득표해 당선자인 김태호를 더블스코어 차이로 눌렀다는 것 정도가 위안거리다.[11] 참고로 남해-하동군은 보수텃밭이다. 하지만, 이분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유력인사인 여상규 후보와 겨뤄서 40%를 얻었다. 즉, 김두관 또한 경쟁력있는 유력인사였던 것이다.[12] 창원 출신의 이름있는 행정학자며 이명박 정부한나라당 18대 총선 비례대표 국회의원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로써 이 선거는 전직 행정안전부 장관(김두관 시절에는 행정자치부) 끼리의 대결이 되는 셈이기도 했다. 하지만, 출마할 당시 중앙에서 내려온 낙하산 후보라는 비판을 들었고 나름대로 상당히 분투했으나, 낙선. 통합창원시 아이디어를 낸것도 이분이었다. 2012년에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발탁되어 근무했다.[13] 실제로 김두관은 서부 경남권인 밀양, 창녕, 합천, 거창, 산청, 통영, 진해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리했다. 특히 고향인 남해에서는 무려 66%로 낙동강 벨트인 김해보다 더 높게 나왔다.[14] 이 때문에 영남권 시도지사 모임 때 마다 다른 시도지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한나라당 소속 시도지사들은 모두 4대강 사업에 찬성한 반면 본인만 홀로 반대했기 때문이다.[15] 이때 차라리 도지사직을 유지하고 같은 PK출신인 문재인을 지지하면서 PK의 진보층을 결집시켰더라면 문재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었다. 다만, 도지사직을 유지했을 경우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이대로 했더라도 그가 진보층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었고, 그런 이유로 정치활동에 제한이 많은 도지사직을 내놓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16] 다만, 자신의 측근이나 가족을 선거유세에 보내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지를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지지를 위해서라도 사퇴한다는건 설득력이 정말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19대 대선 당시 이재명 성남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는 지자체장 신분으로 인해 지지유세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가족들이 문재인 후보의 지지유세에 참여하면서 당선을 돕고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17] 참고로 관두김, 런두관 둘 다 이 문단으로 리다이렉트된다.[18]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경선출마는 지사직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다음 대선에서 김두관의 후임 도지사인 홍준표는 대선후보로 공식 선출되고 지사직 사퇴 시한 직전까지도 지사직을 유지했으며 민주당의 안희정, 이재명, 최성 등 지자체장들도 현직을 유지하고 경선 출마하였다. 문재인의 경우도 본선에 진출하고 대선에서 낙선하고도 의원직은 유지했다. (다만, 국회의원은 그 직을 유지하고도 대선에 출마할 수 있으므로 경우가 다르기는 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박근혜가 대선 출마 때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승부수를 던진 것처럼 그저 일종의 승부수가 아니었나 추측할 뿐이지만 박근혜는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된 후 의원직을 사퇴했고, 당시에는 비례대표였기 때문에 의석은 같은 당에 확실하게 승계되어 의원직으로 당에 피해가 가는 것도 없어서 경우가 역시 다르다.[19] 안철수의 국회의원 사퇴도 논란은 되었지만, 적어도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였다.[20] 이낙연은 김두관과 마찬가지로 경선후보시절 의원사퇴 초강수를 두었지만 실패하고 정치의 1번지 종로마저 국민의 힘에 내어주면서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평을 받고 있다.[21] 같은 지자체장 출신 경선 후보였던 이재명, 최성의 경우 시정 논란은 적었다. 최성의 경우 후반에 나오기도 했고 이재명의 경우 경선과 시정을 동시에 챙겨가며 되려 지지도를 쌓았기 때문이다.[22] 다만 이 경우에는 홍준표를 보면 알 수 있듯 남은 임기 전부가 도정공백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23] 당연하지만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이 절대우위였다.[24] 이는 본인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이미 예산안 통과까지 다 된 4대강 정비사업을 반대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를 보다 못 한 중앙정부에서 경남에게 위임했던 4대강 사업권을 회수해 국가 사업으로 전환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지역 건설사들이 배제되면서 많은 비판에 직면했었다.[25] 대통령에게 들어오는 알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야당 도지사 시절 정부에서 하는 견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정도. 그나마 정부견제는 외부탄압이라는 명분이 있어 동정여론이라도 있지만 대통령에게 들어오는 알력을 외부로 알렸다가는 갈등도 조정 못하는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찍히기 딱 좋다.[26] 한국의 정치지형상 여소야대가 오히려 정상적인 모습이다. 혹 여대야소가 되어도 모든걸 대통령 마음대로 하는건 거의 불가능 하다. 당장 소속 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이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얻으면서 여러 쟁점법안을 통과시킨탓에 국정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이자 이제는 지지자들 한테서 180석이나 몰아줬는데 하는게 뭐가 있냐는 식의 비판을 받으면서 양 측으로 부터 모두 공격을 받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2021년 재보궐선거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다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에게 정권을 내주는 요인이 되었다. 즉 어떤식으로 국회가 구성되어도 갈등은 피할 길이 없는것이다. 무엇보다 대통령이야 5년만 하고 집에가면 그만이지만 국회의원들은 앞으로의 정치일정도 있기 때문에 마냥 대통령의 의지대로만 움직일 수 없다.[27] 대통령이 되면 고작 평론수준이 아닌, 한국의 최고의 사정기관인 국정원, 경찰등지에서 아예 보고서가 올라간다. 만약 이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사정기관들이 해 놓은 보고서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가 될 수도 있다.[28] 경남에는 자리가 없긴 했지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울산광역시 남구에서는 재보선을 치르는 지역구가 있었다. 이 중 부산의 경우는 아무 연고도 없는 김포와 달리 출신 대학과 민주화 운동, 막노동을 했던 연고가 있고, 게다가 지역주의 타파, 결자해지의 의미도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부산에 출마했다면 근소한 차로 이겼을 지도 모를 일이고, 졌더라도 도지사 사퇴라는 병크를 만회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리 국회의원이 좋아도 그렇지, 당선이 되어야 본전일 김포 출마를 왜 선택했는지 참으로 의아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원래 이수봉이 출마를 준비했던 자리를 뺏어버렸다. #[29] 김포는 한강신도시가 개발된 지금도 다른 지역에 비해 타 지역과의 왕래가 적고 북한과 가까워서 서울에 붙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토박이 비율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생전 김포에 발조차 들이지 않은 사람이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들어갔던 것에다가 상대인 홍철호 후보는 김포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토박이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유정복 인천시장의 측근이라서 애초에 김두관이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했다.[30] 굽네치킨 창업주라고 알려졌지만, 정확히는 계육 가공 중소기업인 (주)크레치코 창업주라고 한다. 기업뿐만 아니라 김포 지방의 자잘한 단체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선된 후에는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로 활동하다가 바른정당으로 옮겼으나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31] 전부 패배한건 아니고 김포2동, 구래동에선 400~500표 정도 앞섰다. 하지만 해당 지역들은 아파트 밀집 지역에 비해선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고, 나머지 신도시 지역에선 많게는 2000표 이상 뒤지는 등 참패했다.[32] 2014년 재보선에서 대결했던 새누리당의 홍철호는 김포시(을)에 공천받았다.[33] 부산이 바닷가에 위치하면서 동쪽에 치우져 있는데다 대구의 위치가 경북의 남쪽에 위치하여 현재까지의 영향으로 봐서 부산보다 대구의 영향을 받을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34] 실제로 더불어민주당이 PK출마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지역주의 타파이다. 왜냐하면 경남 창원, 양산, 김해같이 동부경남인 경우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지만, 김두관의 연고지이기도 한 서부경남은 아직도 해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좀 묘한 부분이, 동부경남은 YS의 통일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던 곳이라 야권 입장에서는 '빼앗긴 곳' 정도의 위치라면, 서부경남은 80년대에도 TK와 별 다르지 않은 민주정의당 우세지역이었다.[33] 단, 진주, 통영, 고성의 경우 통일민주당의 우세지역이였다.[35] 그럼 홍철호는 뭐냐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홍철호는 김포 토박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유정복의 정치적 후계자였다.[36] 물론 양산 을이 김포 갑보다 험지고 갈 명분이야 충분하지만, 본인이 김포시에 당선되면 뼈를 묻겠다고 선언했다 변경한 건, 당 요청보다는 본인의 정치적인 입지를 높이려고 하는거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37] 참고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당이 다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선거에 나와서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인 안철수를 깨버리고 2위를 찍어서 당을 회생시킨 게 홍준표였다. 문재인은 너무 엄청난 강적이라 그렇다 쳐도 안철수를 이긴 건 대단한 선방인 것이다. 그 걸 해낸 홍준표인만큼 적어도 경상도에서만큼은 엄청난 강적이다. 물론 대선 때는 지지세가 결집한다는 건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경남 서부, 내륙지역은 원래 보수세가 상당하다. 무엇보다 당시 안철수 후보는 여러 구설에 많이 오르내리면서 지지세를 스스로 갉아먹었던 측면도 있었다.[38] 도지사 시절엔 정말 심심하면 의회와 교육감과 반목했다. 심지어는 자당 소속의 도의원들하고도 싸웠다. 특히 무상급식과 관련된 갈등이 상당했다. 당연히 주민들은 "대선에 나간다는 사람이 애들 밥 가지고 싸우냐."는 식의 의견이 많았다.[39] 18대 국회에서 재선 의원으로서 원내대표를 역임한 김진표 의원과 박지원 의원의 사례가 있는데 김진표 의원은 부총리와 국무조정실장 등을 역임, 박지원 의원은 대통령비서실장과 문체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의 중량감이 웬만한 중진급 의원들 못지 않았으므로 예외를 인정받았다.[40] 이 때문에 지역언론에서는 통상적으로 큰 고비들을 넘겼을때 쓰는 9부능선이라는 표현 대신 7부능선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41] 당초 수소트램으로 건설을 시도했으나 국토부에서 경쟁력등의 이유로 경전철로의 규격변경을 먼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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