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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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 총무대신
- 일본 국가공안위원장
- 일본 국토교통대신
- 일본 경제산업대신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신진당 국회의원
- 자유당(1998년) 국회의원
- 1941년 출생
- 스기나미구 출신 인물
- 도쿄대학 출신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2021년까지 자유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들 중 최다선 의원이었고, 1972년부터 현재까지 50년간 16선을 지냈다. 참고로 전체 중의원 중 현직 최다선은 17선인 오자와 이치로이다. 2021년 총선거에서 오자와가 비례부활로 18선에 성공한 반면 노다는 비례 중복입후보를 못 해[2] 낙선 후 은퇴했다.
2. 생애 및 정치 활동[편집]
도쿄부 도쿄시 스기나미구 출신으로, 니혼대학 교수를 지낸 고다치 미노루(小立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와는 전쟁 때 오사카의 피난소에서 사별하였다.
1960년 오사카부립 네야가와 고등학교, 1964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입성한다. 주세국 총무과에 배속된 이래, 호도가야세무서장, 이재국 과장보좌 등으로 근무하였다.
1968년 자치대신을 지내던 노다 다케오(野田武夫) 의원의 딸 미도리와 결혼하며 성을 노다(野田)로 바꾸며 데릴사위이자 정치적 후계자가 된다. 1972년 노다 다케오의 급서로, 그해 말 치러진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그의 지반을 이어 출마하여 당선된다. 지역구는 소선거제 이후 구마모토현 제2구로 바뀌는 舊 구마모토현 제1구.
1978년 경제기획 정무차관, 1980년 통상산업 정무차관, 1986년 중의원 상공위원장 등을 지낸다. 1989년 6월 우노 내각에서 건설대신에 임명되어 첫 입각. 1991년 11월, 미야자와 내각에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2번째 입각.
1994년 자민당 · 일본사회당 · 신당 사키가케 3당이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하고 수반 지명 선거에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옹립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노다의 정치적 스승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와타나베 미치오[3] 등이 무라야마 수반에 반발하고 노다는 수반 지명 선거에 패한 당시 본인 파벌의 대표 가이후 도시키 전 총리 등과 함께 탈당, 가이후를 당수로 한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지만 곧 신진당에 합류한다.
1996년 소선거구제 도입 후 최초로 치러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구마모토 2구에서 출마한 자민당 공인의 하야시다 다케시를 물리치고 이후의 신진당 분당에서 오자와 이치로와 행동을 같이하여 자유당을 결성한다.
1999년, 오부치 제1차 개조내각에선 자유당이 연립 여당이 되어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해 3번째로 입각한다.
2000년 자유당이 분열했을 때는 오자와와 갈라서고 가이후, 가토 무쓰키[4] , 니카이 도시히로 들과 보수당을 새롭게 결성, 여당 잔류의 길을 선택했다. 창당 보수당의 간사장으로 취임한다.
2001년 , 오기 치카게의 후임 보수당 당수로 취임한다. 이후 보수당은 구마가이 히로시등이 합류, 보수신당으로 당명을 수정하지만 노다는 보수신당에 참여하지 않고 고이케 유리코 등과 정치 단체 "보수 클럽"을 결성 한 후, 자민당에 복당했다. 자민당에서는 나카소네 파에서 갈라진 야마자키파에 가입. 자민당 복당 후에는 코스타리카 방식[5] 에 따라 노다와 하야시다 다케시가 교대로 구마모토 2구 · 비례 규슈 블록에서 출마했다.
2009년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노다는 비례 단독으로 당선된 한편, 하야시다는 민주당의 후쿠시마 겐이치로에게 패해 낙선.[6]
2013년 , 유용미생물활용추진의원연맹(EM련)의 회장으로 취임.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구마모토 2구에서 출마해 15선, 2017년의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구마모토 2구에서 출마해 16선을 달성한다.
2017년 '재정·금융·사회보장제도에 관한 스터디 그룹' 대표 발기인으로서 "재정 재건을 위해서는 소비 증세가 불가피하다"고 호소했다.
2018년 3월 5일 자민당 담배의원연맹 임시총회에서 "내가 싫으니 남에게도 금지를 강요하자는 발상이 어떠냐"고 주장했다.
2018년 정치자금수지 보고서에 따르면 노다가 대표로 있는 자민당 지부가 국가 보조금을 받은 기업으로부터 위법이 의심되는 헌금을 받았다.
2019년 노다 사무소의 비서 사카나시 쓰요아키가 현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비례 중복을 받지 못해 17선을 앞두고 낙선하게 되었다. 혁신계 후보가 아닌 보수계 무소속인 젊은 전직 재무관료 니시노 다이스케에게 패배했다. 지역구에서 패배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90% 석패율을 기록하며 비례부활 당선을 따낸 오자와 이치로와는 달리 신인에게 더블스코어로 지며 순살당했다. 세대교체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는 구태라서 패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시노는 1978년생으로 노다와는 거의 40년의 세대차이가 난다.
낙선 이후 인터뷰에서 정계 은퇴는 하지 않지만, 차기 총선에는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흡연자다. 자민당 담배의원연맹의 회장을 맡았다.
3. 성향[편집]
- 사단법인 일중협회 회장을 오랜 기간 맡는 등 친중파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주변국과의 외교적 분쟁을 싫어하는 선린외교파이다. 그로 인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참배 찬성 강경파인 아베 신조와 대립하여, 반대 모임을 주도한 적도 있다.[7]
- 한편 하얼빈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안중근을 용서할 수 없는 암살자로 부르며 하얼빈의 안중근 기념관 설립에 대해 항의했다. 참조 사실 본인 국가의 수반이 암살당했는데 이는 일본인 입장에서 봤을때 나올 수 있는 당연한 반응 중 하나다.
- 원로 의원이다보니 자민당 총재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자주 맡는다. 202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도 선관위원장을 맡아 선거 개요 발표를 맡았다.
-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오랜 기간 당 세제조사회의 간부와 회장(2009~2015)을 맡아온 자민당의 세금 정책 전문가이다. 현재도 세제조사회 및 사회보장제도조사회 최고고문을 맡고 있다. 세금 정책 관련 책까지 썼을 정도.[8]
4. 소속 정당[편집]
5. 선거 이력[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장인 대부터 일-중의 협력관계에 매진해 왔다고 한다.[2] 자민당 당헌당규에는 73세 이후의 총선 지역구 출마자 중 비례대표 중복입후보를 할 수 없게 규정되어 있다.[3] 와타나베 요시미의 아버지.[4] 가토 가쓰노부 현 내각관방장관의 장인.[5] 두 명의 의원을 한 지역구에서 교대로 출마시키고 나머지 한 명은 지역 비례대표로 보내는 방식.[6] 45회 선거와 같이 민주당세가 아주 강했던 선거에서 코스타리카 방식 덕에 이득을 본 사람이 더 있다. 가와이 가쓰유키라던가.[7] 당시 함께한 멤버가 고무라 마사히코, 가토 고이치 전 간사장 등이다.[8] 제목은 소비세가 일본을 구한다ー연금, 경제, 재정문제 이것으로 단번에 해결.참조[9]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0] 자민당 명부 1순위.[11] 자민당 명부 1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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