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이 도시히로

덤프버전 :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와카야마 3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9대
니카이 도시히로


현직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일본국 제6·9-10대 경제산업대신
일본국 제37-49대 중의원 의원
니카이 도시히로
二階俊博 | Nikai Toshihiro


파일:nikai-toshihiro.png

출생
1939년 2월 17일 (85세)
일본 제국 와카야마현 고보시
현직
제49대 중의원 의원
자유민주당 와카야마현 연합회 회장
일중우호의원연합 회장
재임기간
제75·76대 운수대신
제69·70대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1999년 10월 5일 ~ 2000년 7월 4일
제6대 경제산업대신
2005년 10월 31일 ~ 2006년 9월 26일
제9·10대 경제산업대신
2008년 8월 2일 ~ 2009년 9월 16일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펼치기 · 접기 ]
학력
고보시립 고보 소학교 (졸업)
고보시립 고보 중학교 (졸업)
와카야마현립 히다카 고등학교 (졸업)
주오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사)
가족
아버지 니카이 슌타로[1]
배우자 니카이 레이코[2]
장남 니카이 도시키[3]
차남 니카이 나오야[4]
삼남 니카이 노부야스[5]
신체
165cm, 65kg, B형[6]
소속 정당

소속 파벌
경세회개혁포럼21오자와 그룹 → 새로운 물결 → 지수회 (회장)
지역구
와카야마 3구
의원 선수
13 (중)
의원 대수
37, 38,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약력
엔도 사부로 중의원 의원 비서
와카야마현의회 의원
현의회 건설문교상임위원장
중의원
운수 정무차관
자유민주당 환경대책위원장
자유민주당 교통부회장
신진당 와카야마현 연합회 회장
신진당 선거대책국장
중의원 건설상임위원장
자유당 국회대책위원장
자유당 농림수산부 회장
자유당 교통부회장
운수대신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보수당 국회대책위원장
보수당 선거대책위원장
보수당 와카야마현 총지부 연합회 회장
보수당 간사장
보수신당 간사장
보수신당 선거대책위원장
보수신당 와카야마현 총지부 연합회 회장
자유민주당 총무국장
중의원 우정민영화 특별위원장
경제산업대신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자유민주당 선거대책국장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대행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와카야마현 연합회 회장
중의원 예산위원장
중일우호연맹의원 회장


1. 개요
2. 생애
3. 정치적 성향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기타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前 자유민주당 간사장이며 운수대신, 경제산업대신을 역임했으며, 자유민주당의 주요 파벌 중 하나인 지수회, 일명 니카이파의 회장이다.[1] 지역구는 와카야마현 제3구. 전국여행업협회 회장이자 현재 일본에서 큰 논란을 부르고 있는 GoTo트래블 캠패인의 최종보스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939년 2월 17일, 와카야마현 고보시에서 와카야마현의회 의원인 니카이 슌타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주오대학 법학부 졸업 후 건설대신을 지낸 엔도 사부로 의원의 비서를 지냈으며, 1975년부터 고향인 와카야마현에서 현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83년, 중의원 선거에서 구 와카야마 2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하고 자민당을 탈당해 오자와 이치로신생당 결성에 참여했다. 하타 쓰토무 정권 이후에는 신진당에 참여했다. 신진당 분당 이후에는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운수대신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으로 입각했다.

2000년에는 오자와 계파와 이별을 고하면서 보수당을 결성하며 2대 간사장을 맡았으며, 2002년 보수신당으로 개편하며 간사장을 맡았으나 보수당의 당수였던 노다 다케시고이케 유리코 등이 탈주(...)하며 자민당에 복당하고,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지던 탈당 러시에다 쐐기를 박은 총선 참패 이후 10년만에 자민당에 보수신당을 흡수시키며 복당했다. 2004년 자민당 총무국장에 취임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을 역임했다. 고이즈미 내각 이후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 총무회장 등을 지내다가 후쿠다 야스오 내각, 아소 다로 내각에서 다시 경제산업대신을 역임했다.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자민당의 선거대책국장을 맡았으나 비서의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되면서 사임했다.

2016년 8월, 자전거 사고로 입원한 다니가키 사다카즈의 후임으로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2018년 3월 3일, 자민당 역사상 처음으로 도쿄 도내에서 열린 제 75회 부라쿠민 해방동맹 전국대회에 참석했다. 니카이 간사장은 참석사에서 '국가와 지방 자치단체에서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자민당은 '부라쿠민 차별 해소 추진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역설하였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 국민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한 개헌을 앞두고 자민당 내 입단속을 통해 논란을 만들지 않게 하며, 자위대 명기 등의 사안을 담은 당 내 개헌 방침안을 만들고 있는데, 앞선 오사카 유신회와의 협력 뿐 아니라 일본 사회 내에서 차별과 소외를 받았던 부라쿠민과도 관계개선을 추구하여 개헌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성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9년 3월, 고이케 유리코 도지사에 대해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게 되면 전면적으로 협력하겠다"라고 지지를 표명했으나 반발이 거셌다.

2020년에는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이유 등을 들며 당 규정을 다시 바꿔 아베 총리가 임기 3년인 총재직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베의 지지율이 봐주기 힘들 정도로 떨어지자 6월 들어 이시바 시게루의 정치자금 모금회에 참여하여 찬조연설을 해주는 등 아베의 4선에 집착하지 않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 선출 이후 이시바파 모임에도 참석했다.#

2020년 9월 8일부로 간사장 임기 최장 기간 기록을 세웠다.# 스가 요시히데 총재에 의해 간사장 직이 유임되었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한일의원연맹 회장단을 상대로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의 방일을 강력하게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대통령을 겨냥한 주한 일본공사의 막말 물의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2021년 8월 3일, 한달 뒤 있을 총재 선거를 앞두고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연임을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스가 총리의 사퇴와 함께 치러질 자민당 총재선거를 앞두고 9월 초에 간사장직을 사임할 것이라 한다. #

표면적의 이유는 고령이고, 계속된 보궐선거 패배와 코로나19 확산 지속으로 자민당 지지율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당 쇄신 차원이라고 표명하긴 했지만, 사실상 니카이가 스가 총리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다른 계파들이 스가의 연임을 용인하는 대신 니카이를 제물로 달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 실제로 총재 선거 출마를 준비하던 시모무라 하쿠분 정조회장이 8월 30일 출마포기를 선언한 것으로 미뤄보면 아베를 위시로한 호소다파와 물밑 타협이 있지 않았을까란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9월로 넘어오면서 스가가 당직 개편 및 개각을 단행한 후 9월 중순에 중의원을 해산할거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베와의 타협 추측은 사실이 아닌 걸로 보여진다.

기시다 후미오 총재 당선 후 당내 인사에서 아마리 아키라에게 간사장직이 넘어갔다. 이후 선거 결과에 따라 모테기 도시미쓰 의원이 간사장 직을 승계했다.

이부키 분메이 의원이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지역구 출마를 하지 않고 정계 은퇴를 발표하면서 48회 중의회 최고령 의원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10월 총선에서 13선에 성공해 49회 총선 최고령 당선자[2]로 등극했다. 하지만 본인이 이끄는 지수회 소속 의원들이 10명이나 낙선하는 등 최장기 간사장을 역임하던 시절에 비해 당내 세력이 크게 줄었다.

선거구 조정 후 와카야마현 제2구 지부장으로 내정됐다. 현재 이 지역구 의원인 이시다 마사토시 前 총무대신은 비례대표 상위권으로 옮길 것으로 보인다.


3. 정치적 성향[편집]


아사히 신문 · 도쿄대 다니구치 연구실 공동 조사
2017년 중의원 선거 후보자 정보 - 니카이 토시히로

이슈
질문
답변
개헌
헌법 개정에
<colcolor#000> 찬성[3]

소비세
장기적으로 볼 때 소비세율은 10%보다 높아야 한다.
조금 찬성
무상교육
유치원·탁아소부터 대학까지의 교육을 무상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재정 지출
당장은 재정 재건을 위한 세출의 억제보다는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투입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조금 찬성
격차 해소
A: 사회적 격차가 다소 있더라도 경제 경쟁력 향상을 우선해야 한다.
B: 경제 경쟁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격차 시정을 우선해야 한다.
조금 A
제정 적자
A: 국채는 안정적으로 소화되고 있어 재정 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B: 재정적자는 위기 수준이기 때문에, 국채 발행을 억제해야 한다.
조금 A
부자 증세
소득이나 자산이 많은 사람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치안·인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 정보 보호 및 개인의 권리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
조금 찬성
동성혼
동성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중립
피선거 연령
피선거권을 얻을 수 있는 연령을 인하해야 한다.
조금 찬성
외국인 노동
외국인 노동자의 수용을 추진해야 한다.
찬성
야스쿠니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
조금 찬성
원전 재가동
원자력 규제위원회의 심사를 통과 한 원자력 발전소는 운전을 재개해야 한다.
조금 찬성
탈원전
A: 지금 바로 원자력 발전을 폐지해야 한다.
B: 앞으로도 원자력 발전을 에너지 원의 하나로 유지해야 한다.
중립
부부별성
부부가 원하는 경우, 결혼 후에도 부부가 각각 혼전 성을 유지하는 것을 법률로서 인정해야 한다.
조금 찬성
가족관
A: 부부와 여러 아이들이 갖추어져 있는 형태가 가족의 기본이다.
B: 한부모 가정이나 사실혼 등 가족의 형태는 다양한 것이 좋다.
A

핵개발
비핵 3원칙[4]을 견지해야 한다.
조금 찬성
국방
일본의 방위력은 더 강화해야 한다.
찬성
선제 공격
타국으로부터의 공격이 예상되는 경우 선제 공격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조금 찬성
대북관계
북한에 대해 대화보다 압력을 우선해야 한다.
찬성
'조금'의 답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どちらかと(えば)'이며 '중립'은 '어느 쪽도 아니다(どちらとも(えない)'이다.
당내에서 가장 왼쪽에 속하는 파벌의 수장답게 전형적인 중도 ~ 중도우파 성향을 갖고 있다. 대외 성향은 친중과 친한쪽에 가깝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75 - 1983
정계 입문


1983 - 1993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93
신생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3 - 1994
창당


1994 - 1997
합당

[[무소속|
무소속
]]

1997 - 1998
정당 해산


1998 - 2000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0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0 - 2002
창당


2002 - 2003
신설 창당


2003 -
합당으로 복당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5
제8회 통일지방선거
와카야마현의회

[[무소속|
무소속
]]

? (?%)
당선 (?위)
초선
1979
제9회 통일지방선거
? (?%)
당선 (?위)
재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와카야마 2구


53,611 (20.9%)
당선 (2위)
초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8,722 (21.2%)
재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7,663 (20.4%)
당선 (3위)
3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4,600 (38.6%)
당선 (1위)
4선[5]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와카야마 3구


115,681 (49.24%)
5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8,527 (63.08%)
6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8,274 (78.37%)
7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5,735 (66.42%)
8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7,237 (52.06%)
9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2,916 (60.43%)
10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8,257 (76.50%)
11선
2017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9,488 (72.95%)
12선
2021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2,834 (69.34%)
13선


6. 기타[편집]


  •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는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매우 각별한 사이다. 1999년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장관회의에서 박지원은 문화관광부장관, 니카이는 경제산업대신으로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친분을 쌓게 됐다고. # 서로의 경조사를 일일이 챙길 정도이며, 한일관계의 온도차와 상관 없이 공공연히 우애를 과시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각에서는 2020년 한국 정부의 박지원 국정원장 임명이 얼어붙은 한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카드가 아니겠느냐는 분석이 나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새로 취임하자 박지원이 사실상의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카운터파트인 다키자와 히로아키 내각정보관과 니카이 간사장, 스가 총리를 차례로 예방했다. #

  • 김충선에 대한 추모비를 세울 정도로 대표적인 자민당내 친한파로 분류된다. # 사야가(沙也可, 1571~1642)라는 이름의 왜군장수였던 김충선은 임진왜란의 부당함을 깨닫고 조선에 귀화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한일관계에 대한 니카이 도시히로의 매우 전향적(前向的)인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베와 스가를 떠받드냐는 것이 의문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당장 이시바 시게루와 친한파 시절 아베 역시 이러한 행동을 보인 적 있고 한국의 전 국회의원과 친한 스가 역시나 사례로서 있으므로 다테마에일 수도 있다. 개인 성향과 전혀 별개로 당 중책인 이상 스스로 다른 스탠스를 고수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적이 있다.

  • 10월부터 시작한 Go To 트래블 캠패인과 겨울이 맞물려 12월 12일에는 3,041명으로 일일 역대 최다 감염자수를 갱신했다. 오죽하면 내각 직속 신형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대책분과회에서조차 "최소한 일시적인 정지를 해야 한다"고 제언했으나 내각은 요지부동. 일본 여론은 정책 유지의 배후에 일본 여행업협회장인 니카이의 GoTo캠패인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 일본 파벌 정치의 최종보스로 군림하고 있는 니카이는 실질적으로 아베에서 스가로 이어지는 수상 교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굇수이며 스가 내각의 정책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12월 연말 회식 참석하여 논란을 일으켰으며, 자신은 회식이 아니라는 말만 하고 있다.#


7. 둘러보기[편집]



파일:자유민주당(일본) 흰색 로고.svg
자유민주당
제48대 중의원 의원

[ 펼치기 · 접기 ]
※ 소속 정당과 국회 내 소속 회파(会派)는 다를 수 있음
가네다 가쓰토시
가네코 마스오
가네코 슌페이
가네코 야스시
가도 히로후미
가도야마 히로아키
가메오카 요시타미
가모시타 이치로
가미야마 사이치
가미카와 요코
가미타니 노보루
가쓰마타 다카아키
가와무라 다케오
가와사키 지로
가지야마 히로시
가토 가쓰노부
가토 간지
간다 겐지
간다 유타카
간케 이치로
고가 아쓰시
고노 다로
고무라 마사히로
고바야시 다카유키
고바야시 후미아키
고이즈미 류지
고이즈미 신지로
고지마 도시후미
고쿠바 고노스케
고테라 히로오
고토 시게유키
고토다 마사즈미
구니미쓰 아야노
구도 쇼조
구마다 히로미치
기무라 데쓰야
기무라 야요이
기무라 지로
기시 노부오
기시다 후미오
기우치 미노루
기카와다 히토시
기타무라 세이고
기하라 미노루
기하라 세이지
나카사카 야스마사
나가시마 아키히사
나가오 다카시
나가오카 게이코
나카네 가즈유키
나카무라 히로유키
나카소네 야스타카
나카야마 노리히로
나카야마 야스히데
나카타니 겐
나카타니 신이치
네모토 다쿠미
네모토 유키노리
노나카 아쓰시
노다 다케시
노다 세이코
누카가 후쿠시로
니시다 쇼지
니시메 고사부로
니시무라 아키히로
니시무라 야스토시
니와 히데키
니카이 도시히로
다나카 가즈노리
다나카 류세이
다나카 히데유키
다나하시 야스후미
다니 고이치
다니가와 도무
다니가와 야이치
다도코로 요시노리
다무라 노리히사
다바타 히로아키
다이라 마사아키
다치바나 게이치로
다카기 게이
다카기 쓰요시
다카이치 사나에
다카토리 슈이치
다카하시 히나코
다케다 료타
다케모토 나오카즈
다케무라 노부히데
다케베 아라타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이 슌스케
데바타 미노루
도가시 히로유키
도미오카 쓰토무
도이 도루
도카사키 나오미
도카이 키사부로
마쓰노 히로카즈
마쓰모토 다케아키
마쓰모토 요헤이
마쓰모토 후미아키
마쓰시마 미도리
마키시마 카렌
마키하라 히데키
모리 에이스케
모리야마 마사히토
모리야마 히로시
모테기 도시미쓰
무네키요 고이치
무라이 히데키
무라카미 세이이치로
무타이 슌스케
무토 요지
미노리카와 노부히데
미쓰바야시 히로미
미쓰야 노리오
미야시타 이치로
미야우치 히데키
미야자와 히로유키
미야자키 마사히사
미야지 다쿠마
미야코시 미쓰히로
미타니 히데히로
미하라 아키히코
사사가와 히로요시
사사키 하지메
사이토 겐
사이토 히로아키
사카모토 데쓰시
사카이 마나부
사쿠라다 요시타카
사토 쓰토무
사토 아키라
사토 아키오
사토 유카리
세키 요시히로
소노우라 겐타로
소바야시 다카유키
스가 요시히데
스기타 미오
스즈키 게이스케
스즈키 노리카즈
스즈키 다카코
스즈키 슌이치
스즈키 준지
스즈키 하야토
시게모토 모토루
시모무라 하쿠분
시바야마 마사히코
시오노야 류
시오자키 야스히사
신도 요시타카
신타니 마사요시
쓰시마 준
쓰지 기요토
쓰치야 시나코
아나미 요이치
아마리 아키라
아베 도시코
아베 신조
아소 다로
아오야마 슈헤이
아이사와 이치로
아제모토 쇼고
아카마 지로
아카자와 료세이
아키모토 마사토시
아키바 겐야
안도 다카오
안도 히로시
야기 데쓰야
야나 가즈오
야마구치 다이메이
야마구치 쓰요시
야마기와 다이시로
야마다 겐지
야마다 미키
야마모토 고이치
야마모토 고조
야마모토 다쿠
야마모토 도모히로
야마모토 유지
야마시타 다카시
야마구치 슌이치
에사키 데쓰마
에토 다쿠
에토 세이시로
에토 아키노리
엔도 도시아키
오구라 마사노부
오구시 마사키
오노 겐타로
오노데라 이쓰노리
오니시 히데오
오니시 히로유키
오니키 마코토
오다와라 기요시
오미 아사코
오부치 유코
오시마 다다모리
오시카와 다케루
오쓰카 다쿠
오오카 도시타카
오자토 야스히로
오치 다카오
오카시타 쇼헤이
오코노기 하치로
오쿠노 신스케
오쿠마 가즈히데
와다 요시아키
와시오 에이이치로
와카미야 겐지
와타나베 고이치
와타나베 히로미치
요시노 마사요시
요시이에 히로유키
우에노 겐이치로
우에노 히로시
우에스기 겐타로
이나다 도모미
이노 도시로
이노우에 다카히로
이노우에 신지
이데 요세이
이마무라 마사히로
이마에다 소이치로
이바야시 다쓰노리
이부키 분메이
이시다 마사토시
이시바 시게루
이시카와 아키마사
이시하라 노부테루
이시하라 히로타카
이와야 다케시
이와타 가즈치카
이즈미다 히로히코
이케다 미치타카
이케다 요시타카
이토 다다히코
이토 다쓰야
이토 신타로
이토 요시타카
가토 아유코
테라다 미노루
하기우다 고이치
하나시 야스히로
하라다 겐지
하라다 요시아키
하마다 야스카즈
하세 히로시
하시모토 가쿠
하야시 모토오
하토야마 지로
햐쿠타케 기미치카
호리이 마나부
호리우치 노리코
호소카 야스시
호소노 고시
호소다 겐이치
호소다 히로유키
호시노 쓰요시
혼다 다로
후나다 하지메
후나하시 도시미쓰
후루야 게이지
후루카와 야스시
후루카와 요시히사
후루타 게이지
후지마루 사토시
후지와라 다카시
후지이 히사유키
후쿠다 다쓰오
후쿠야마 마모루
후쿠이 데루
후쿠자와 요이치
히라구치 히로시
히라사와 가쓰에이
히라이 다쿠야








[1] 2014년 자민당 총무회장으로 취임하며 사퇴했으나 2021년 간사장직에서 강판되고 회장으로 복귀하였다.[2] 최연소는 입헌민주당의 바바 유우키(1992년생)이다.[3] 전쟁포기 및 자위대, 국민의 권리 및 의무, 긴급사태조항에 대한 개정이 필요하다고 응답하였다.[4]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 아베 신조의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가 내세운 원칙이다.[5]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