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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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외무부장
초대
제2대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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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박용만
정인과
이동휘
서리
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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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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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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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신익희
김규식
김구
조소앙


외무부장관 (1948~1998)


초대
장택상
2대
임병직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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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조정환
5대
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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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형
7대
김홍일
8대
송요찬
9대
최덕신
10대
김용식

11대
정일권
12대
이동원
13대
정일권
14대
최규하
15대
김용식






외교통상부장관 (1998~2013)

27대
박정수
28대
홍순영
29대
이정빈
30대
한승수
31대
최성홍


32대
윤영관
33대
반기문
34대
송민순
35대
유명환
36대
김성환
외교부장관 (2013~현재)


37대
윤병세
38대
강경화
39대
정의용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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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제8대
권중돈[1]
정일형[B]

제9대
장기영
정일형

제10대 민관식






대한민국 제6대 외무부 장관
정일형
鄭一亨 | Jeong Il-hyeong


파일:정일형 박사.png

창씨명
도쿠다 이치쿄(德田一亨)
본관
진주 정씨[1]
출생
1904년 2월 23일
황해도 안악군 행촌면 제도동[2]
(現 황해남도 은천군 제도리)
사망
1982년 4월 23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43-4번지[3] 자택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5호

금연(錦淵)
재임기간
제6대 외무부 장관
1960년 8월 23일 ~ 1961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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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정기찬, 어머니 하은총
배우자
이태영
자녀
슬하 1남 3녀
아들 정대철, 딸 정미숙
친인척
손자 정호준
종교
유교 -> 개신교(감리회)
학력
진남포 삼존학교 (수료)
용강 집성학교 (수료)
수안공립보통학교 (졸업)
삼숭학교 (수료)
광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문과 / 졸업)
뉴욕 대학교 (신학 / 학사)
오번 대학교 (종교교육학 / 학사)
드루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 박사)
의원 선수
8
의원 대수
2, 3, 4, 5(민), 6, 7, 8, 9
경력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
미군정청 물자행정처장
미군정청 조선인 위원회 위원장
제4대 미군정 충청남도지사
제2~5대 국회의원(중구 을)
제6~8대 국회의원(서울 중구)
제6대 외무부 장관
제9대 국회의원(종로구·중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정치활동
2.1.1. 해방 이전(독립운동)
2.1.2. 해방 이후
2.2. 말년
2.3. 사후
3. 선거 이력
4. 소속 정당
5. 여담
6. 가계도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관료이자 정치인.


2. 생애[편집]


1904년 2월 23일 황해도 안악군 행촌면 제도리(현 황해남도 은천군 제도리)에서 아버지 정기찬(鄭基贊)과 어머니 하은총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이후 평안남도 용강군 대대면[4](현 평안남도 남포시 와우도구역 대대동)으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경기도 경성부 송월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 141번지에 거주하면서 본적을 두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에는 1936년 평안남도 평양부 신리(현 평양시 동대원구역 신리동) 117-4번지에 거주했고, 1938년 3월 24일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냉천정(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5]주소지를 옮겼다. 그 뒤 1950년에는 종로구 청운동 89번지[6], 1956년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동 1-365번지[7], 1967년에는 종로구 내자동 167-1번지[8], 1977년에는 서대문구 봉원동 43-4번지[9]에 거주했다.

일찍이 진남포부 삼존학교에 입학해 이곳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성경찬송가를 처음 배웠다. 이후 고향의 집성학교(集成學校)와 수안공립보통학교, 삼숭학교 등을 거치며 신학문을 접했다.

이후 광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2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 1927년 3월 졸업한 뒤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에서 근무했으며, 2년 뒤인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1931년 뉴욕 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했고, 오번 대학교 종교교육과를 거쳐 1935년에는 미국 뉴저지에 있는 드루 대학교(Drew University)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1936년 드루 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그 밖에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936년 10살 연하의 이태영과 결혼하였고 그해 10월 23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소속 목회자등록했다. 이듬해인 1937년부터 감리교신학교, 연희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2.1. 정치활동[편집]



2.1.1. 해방 이전(독립운동)[편집]


사립 광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3.1 운동 계획이 알려지자, 학교 기숙사 지하실에서 김재호(金載浩) 등 10여 명의 상급생과 함께 크고 작은 태극기 5,000여 매를 제작했다. 그 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홍식(申洪植) 목사의 지도를 받고 3월 1일 당일 시위군중에게 손수 제작한 태극기를 나눠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16세로 미성년자였기에 7일 뒤에 석방되었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3년에는 수업 도중 미국인 핫취 교수가 "한국의 여건상 기술·자본·원료 및 시장 확보 등이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의 독립은 부당하다"는 친일적인 발언을 하자, 이에 격분한 그는 이창희(李昌熙) 등 5~6명의 학생들과 합세해 핫취 교수를 구타했다. 이 때문에 퇴학을 당할 뻔했으나 당시 경제학 전임강사로 있던 조병옥의 변호로 정상이 참작되어 1년간 정학에 그칠 수 있었다.

정학 처분을 받고 고향인 용강군 대대면으로 돌아가 모교인 집성학교에서 교사로 잠시 근무했었는데, 1924년 "조선 토지가 남의 손에 거의 다 들어갔다"며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이 경제적인 파멸을 맞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이유로 1월 18일 진남포경찰서에 체포되어 잠시 구금되기도 했다.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재미유학생회(在美留學生會) 조직에 참여했고, 외교부장에 선출되어 독립정신 고취에 힘쓰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했다.

귀국 후 1937년 10월 평안남도 평양부 지역 감리교 기독청년연합회(基督靑年聯合會)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안창호의 특별강연회를 개최한 것을 빌미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소위 유언비어 유포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3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다시 흥사단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 투옥되었으며 연이어 수양동우회 사건에도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1940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 강제에 저항하다가 수차례에 걸쳐 구금당했다.

1942년 1월 경성부 냉천정 자택에서 이동욱(李東旭)·안흥국(安興國)[10]·한익수(韓益洙) 등에게 "일본 정부가 선박 제작을 원조하는 것은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막대한 선박을 잃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번 남태평양 해전에서 미 함대가 달아났다고 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호주 방면에 있는 미국 함대와 합세하기 위한 것이다."라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이야기했고, 또한 9월 21일 평양부 서문통(현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 서문거리) 협성면옥 객실에서 풍천태진(豊川泰鎭) 등 4~5명에게 "일미전쟁은 오래가지 않는다. 머지 않아 끝나게 될 것이니 미국으로 건너가서 신학이라도 마음껏 배우고 오는 것이 어떠냐."라며 태평양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국제정세를 논의하다가 얼마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1943년 11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검사 측의 상고로 상고심이 열렸으나, 1944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결 기간 중 2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2.1.2.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후인 1945년 9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미군정기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중도파의 좌우합작론이 나올 때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역시 1947년 12월부터 나온 남북협상론에 대해서도 이승만의 지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이 무렵 강남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승만 집권 후인 1949년 11월 한국민주당이 대한국민당 탈당파와 연합,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도 참여하였다. 1950년 5월 서울 중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제2대 ~ 제9대 국회까지 8선의 의정생활을 하였다. 다만 그 중 2번은 강제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1번은 중간에 의원직 상실

이승만의 독재가 노골화될 무렵인 1954년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었을 때는 관망하다가 1955년부터 그는 조병옥, 곽상훈, 장면 등과 민주당 창당 준비 회의를 하였다. 1955년 9월 민주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60년 4.19 혁명장면 내각에서는 외무부장관으로 기용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민주당, 민중당, 신한당, 신민당 등 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76년 3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공민권까지 박탈당하였다. 1977년 열린 중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아들 정대철이 대신 입후보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1976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총재 경선에 출마했지만, 1차투표를 마친 뒤에 이철승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하였다. 정일형의 지지로 김영삼 대신에 이철승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1978년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자격정지로 입후보하지 못하고, 아들 정대철을 지원하였다. 이후 계속 재야에 머물렀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복권조치 되었다.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과 신군부가 조작한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의 구명을 호소하기도 했다.


2.2. 말년[편집]


1982년 3월 1일 숙환고혈압이 악화되어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져 줄곧 입원 치료를 받아오던 중 4월 23일 퇴원했고, 그날 밤 11시 10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43-4번지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그의 유해는 1982년 4월 27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고, 같은 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2.3. 사후[편집]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비서들 중 조홍규는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2[A]

[[무소속|
무소속
]]

11,982 (51.53%)
당선 (1위)
초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4,090 (20.55%)
재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4[A]


18,344 (65.92%)
3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11]
17,222 (58.09%)
4선[12]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2[B]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19,278 (33.37%)
5선[13]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27,361 (50.8%)
6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28,685 (58.65%)
7선[14]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
33,183 (24.94%)
당선 (2위)
8선[15]

역대 선거 벽보[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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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역사상 단 4명 뿐인 8선 국회의원들 중 한명으로[17][18] 자그마치 지역구 8선 국회의원이라는 대기록을 가지고 있다.[19] 뿐만 아니라 지역구 선거에서 그것도 중구에서만 무려 8연속 당선이라는 또 다른 대기록을 가지고 있다. 선거의 제왕이라 불리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백재현 전 의원은 7연속 당선은 아니었고[20] 또한 지역구 7연속 당선기록을 가진 정몽준 전의원도 2번의 선거에선 다른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는 점과 각각 다른 직위로[21] 출마해 8연속 당선을 한 이시종충청북도지사하고 유재중 전 의원을 생각하면 원조 선거의 제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5대 총선을 제외하면 모두 야당 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에 성공하였다. 3대 총선7대 총선에서 부정선거가 횡횡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역시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48 - 1955
정계 입문


1955 - 1961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61 - 1963
정당 강제해산 (5.16 쿠데타)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1963 - 1965
창당

[[민중당(1965년)|
파일:민중당(1965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5 - 1966
합당[22]

[[무소속|
무소속
]]

1966
당내 의견 차이로 탈당

[[신한당|
]]

1966 - 1967
창당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1967 - 1980
합당[23]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2
정당 강제해산
정계 은퇴


5. 여담[편집]


해방직후 1946년, 32살의 부인 이태영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는데, 본인 능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 상 남편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던 것이 굉장히 파격적이었으며, 이태영은 1952년 국내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된다.

김대중의 최대 후원자이자 정치적 선배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다. 김대중에게 이희호 여사를 소개시켜준 것도 이태영 변호사였다.


6. 가계도[편집]


  • 정일형 ─ 이태영
    • 장남 정대철 ─ 김덕신
      • 장남 정호준
      • 차남 정세준
      • 장녀 정혜준
    • 장녀 정진숙 ─ 김흥한 변호사[24]
      • 장남 김유동 청석개발 대표
      • 차남 김윤동 일진자동차 대표
      • 장녀 김미경
      • 차녀 김미동
    • 차녀 정선석 ─ 김의재 법무법인 양헌 대표
      • 장남 김영석 건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 차남 김영훈 푸드네트워크 대표
    • 3녀 정미숙 ─ 심철 동부산업 대표
      • 장남 심종현 한국가구박물관 부관장
      • 차남 심주현 푸드어소시에이션 대표


7. 둘러보기[편집]



















[1] #[2]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감리교 인물 DB에 따르면, 진남포 앞바다 제도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3] 현재 이 지번에는 어린양교회라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4] #[5] 냉천동 31번지에는 그가 한때 교수로 재직하던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위치해 있다.[6] 1950년 작성된 대한민국인사록. 청운동 89번지는 면적이 매우 넓어 현재 여러 지번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청운중학교경복고등학교, 경기상업고등학교가 부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7] 1956년 작성된 대한민국건국10년지[8] 1967년 작성된 대한민국인물연감[9] 1977년 작성된 역대국회의원총람에 기재된 주소는 63-4번지이나, 1971년 기사에 따르면 43-3번지이고#, 마지막까지 살던 43-4번지 주택이 현재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므로#, 63-4는 43-4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10] 창씨명은 마쓰다 코코쿠(松田興國).[A] A B 중구 을[11] 민의원[12] 61.05.16: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 해산[B] 중구[13] 65.08.07:의원직 사퇴[14] 1972.10.17 자격박탈(10월 유신)[15] 민주공화당 장기영 후보와 동반 당선
1977.3.22 의원직 사퇴
[16] 제2~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17] 나머지 3명은 서청원 전 의원, 김재광 전 국회부의장,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다.[18] 참고로 대한민국 정치역사상 최다선 의원들은 9선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 박준규 전 국회의장, 김종필 전 총리 등 3명이다.[19] 다른 8선 의원들인 서청원 전 의원, 김재광 전 국회부의장,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은 전부 1회 이상 전국구 및 비례대표 국회의원 경험이 있다. 이는 9선 의원들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총리등도 마찬가지다도 마찬가지다.(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역구 8선으로 정일형 전 의원과 동률이다.) 다만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무려 지역구 9선이다.[20] 이해찬 전 총리는 18대 총선에 불출마했기 때문이다. 단 선거 전승 기록은 유효.[21] 시장 → 국회의원 → 도지사[22] 민정당과 신설합당[23] 민중당과 신설합당[24] 대법관 및 검찰총장을 지낸 김익진의 차남, 서울대 법대 김증한 교수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