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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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학제와 특성
3. 교복과 생활 규정
4. 문맹 퇴치 운동과 계몽 운동
5. 스탈린 시기의 소련 교육
6.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
7. 페레스트로이카



이 문서는 소련의 교육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1. 소개[편집]


[1]

소련 공산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미래에 자신들이 세울 나라에서 시행할 교육 원칙을 입안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16세 이하 아동을 위한 무상 보편 교육, 교육의 세속화, 러시아어 교육, 평등 교육이었다.

소련 교육학의 핵심은 마르크스주의 교육학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노동이 교육의 일부여야 하며 교육과 노동을 결합해야 한다는 학설을 제시했다. 이 학설은 실습과 이론 교육을 병행해서 가르침과 동시에 생산 기술의 기초를 종합적으로 익히게 하면, 이론과 실제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인간이 전면적인 발달을 이뤄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마르크스의 뒤를 이은 공산주의자들은 기존의 교육 제도와 교육학이 학생들을 체제에 순응하게 하고 사회적 특권과 계급의 세습을 저지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고, 학생들의 능력 향상과 인성 함양과는 무관한 형태로 학생들을 교육, 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상부 구조에 해당하는 교육은 아무리 자율성을 보장받더라도 하부 구조에 해당하는 경제에 좌우되기 때문에 경제 체제가 허용하는 한계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10월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상, 기존의 교육 방식과 차르 정부가 장려하던 종교 학교를 유지하는 것은 소련 수뇌부들 입장에서는 언어 도단이었다.

그래서 소련은 마르크스주의 교육학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제시한 ‘종합 기술 교육론’을 채택함과 동시에, 제정 러시아의 ‘계급적이고 불평등하며 종교적인 교육 제도’를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세속화된 교육 제도’로 변화시키고 사회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새로운 인간을 육성하려 했다.

이 종합 기술 교육론은 연방이 해체되는 그날까지 유지되었고 소련 교육학의 핵심 이론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소련 후기에는 인문계 선호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종합 기술 교육론의 한계점이 나타나고 서방 교육학계에서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상황에서도 소련은 이를 포기할 수가 없었는데, 국부라 할 수 있는 레닌이 종합 기술 교육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교육 과정 개편은 최고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이뤄지는 경향이 강했으며 가장 긴 집권 기간을 자랑하는 스탈린 시대에 가장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연방 공화국의 경우에는 교육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받아서 공화국 내부의 교육 과정에 변화를 줄 수 있었다. 또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국가들 같은 경우에도 자체적인 교육 과정을 입안하고 지속적으로 개편을 진행했기에 같은 공산권 국가라고 해도 교육 제도는 상이한 점이 많았다.

소수 민족의 경우, 연방 정부는 토착화 정책[2]을 실시해 소수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고 자치권을 부여했다. 교육 분야에서의 토착화 정책은 문맹 퇴치와 민족 언어와 문화, 역사 교육으로 이어졌다. 소 연방의 토착화 정책은 스탈린 시기에는 그 의미가 대단히 희석되지만, 스탈린 사후에 다시 강되어 소수 민족에 대한 혜택 부여, 민족 언어와 문화, 역사 교육의 재개와 개선이 이뤄진다.


2. 학제와 특성[편집]


소련의 학제는 초등, 중등, 고등 교육 과정으로 이어진다. 의무 교육 과정은 스탈린 정권 시기에 7년으로 시작해서 브레즈네프 시기에 10년으로 늘어나고, 마지막으로 체르넨코 시기에 총 11년으로, 초, 중등 교육 학제는 스탈린 정권 초기까지 초등(4년) - 기초 중등(3년) - 상급 중등 및 직업, 기술 교육(2년. 한국의 고등 학교)에서 체르넨코 시기에 최종적으로 초등(4년) - 중등(5년) 상급 중등 및 직업, 기술 교육(2 ~ 3년)으로 변화했다.

교과의 경우, 수학과학의 비중과 중요성이 높았다. 이것에는 마르크스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연방 정부의 수뇌부들이 산업화가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다고 생각해 수학과 과학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전체 교과에서 수학과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35%를 넘을 정도였다. 그.외에는 체육과 직업 교육이 약 20%, 언어역사, 미술, 음악, 윤리 등을 비롯한 나머지 교과들이 약 40%의 비중을 점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고학년들에 한정해서 선택 과목을 이수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영유아의 보육과 교육은 탁아소유치원에서 이뤄지며, 탁아소의 경우에는 생후 2개월인 신생아부터 3세 영아까지 보육을 맡아 주었다. 탁아소의 ‘학제’는 3개로 2개월 ~ 1세, 1 ~ 2세, 2 ~ 3세로 분류했다. 유치원에서는 하급반(3 ~ 4세), 중급반(5 ~ 6세), 상급반(6 ~ 7세)으로 나뉘었으며 아예 보육과 교육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탁아 유치원도 있었다.

소련의 영유아 교육은 체육, 지식, 도덕, 위생, 생활, 노동 교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노동 교육이 의아할 수 있으나, 소련의 노동 교육은 걷지도 못하는 영유아들을 노동 현장에 집어 넣는 게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개념 인식, 각종 직업 소개, 노동자들에 대한 존경심 배양, 레닌의 업적에 대한 것들이었다.

초등학교는 원래 8세부터 입학했으나, 체르넨코 시기에 7세로 연령이 낮아졌으며, 학제는 4년이었다. 중등 교육 과정의 경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기초 중등 학교에 입학해 총 5년 동안 교육 받았으며, 이후 성적과 학생 희망에 따라 상급 학교로 진학하거나 취직했다.

기초 중등 학교의 상위 교육 기관으로는 한국의 일반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상급 쉬콜라(средняя школа)와 전문 기술 학교(우칠리셰)[3], 전문 기술 학교보다 더욱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종합 기술 학교(테흐니쿰)[4]로 나뉜다.

우칠리셰는 제정 시기에 존재하던 다양한 직업 학교들의 후신으로서 흐루쇼프 정권과 체르넨코 정권 시기에 개혁을 이루기 전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기술 학교, 직업 학교, 공장 부설 학교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직업 학교에서는 건설, 기계, 전기, 비서, 요리사, 웨이터, 예술가, 미용사, 운전사, 간호사, 배관공 등의 다양한 직업 교육 과정을 제공했다. 테흐니쿰은 공학 및 기술 교육 과정을 제공했으며 우칠리셰의 교육 과정보다 더욱 전문적이었다.

고등 교육은 단과 대학, 일반 대학, 아카데미야, 산업 아카데미, 사관학교 등을 일컬으며, 이러한 기관을 고등 교육 기관(VUZ)[5]으로 불렀다. 대학교는 기본적으로 5년제였으나, 분야에 따라 4년이나 6년인 경우도 있다. 소련이 해체된 뒤에는 공산권에 속한 여러 나라들에서 4년으로 개편하기도 했다.

레닌 시기에는 학교 자치제를 시행하여 교사와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학교 협의회와 교직원 회의, 학생 회의 등이 운영되었으나, 스탈린 시기부터 교사와 관리자들의 권한과 권위가 확대되고 교육부의 통제가 강화되어 학교의 자치권은 크게 축소되었고 교장이 학교 운영 전반을 책임졌다. 그래서 일부 학교의 교장들은 꽤나 제왕적이었다.

소련은 종합 기술 교육론으로 대표되는 전인 교육 못지 않게 재능이 있는 수재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영재 교육에도 크게 투자했다. 스포츠의 경우,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흐루쇼프 정권부터 스포츠 재능이 특출난 학생들을 어린 나이부터 전문 선수로 양성했다.

수학이나 과학같은 이공계 학문의 경우, 교사가 평가해 소질이 있다고 판단되면, 어린 나이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아 소련 학술원(Академия Наук СССР)으로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받기도 했다. 소련군 또한 재능이 확인된 사병들을 수보로프 학교 (육군) 및 나히모프 학교(해군) 등 유년 군사 학교에 추천 입학하여 장교로 양성했다.

학술 연구가 목적이라면 법적으로 광범위한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 또한 허용되었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는 상당한 제한이 작용했다. 그래서 소련 학생들은 정부의 간섭과 탄압을 받을 수 있는 인문학계보다는 간섭이 비교적 적고 국가적으로 지원해주는 이공계 분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6] 그럼에도 전반적인 학문에 걸쳐 이념적인 간섭이 심한 편이었다. 예를 들어 현대사의 경우 당국에 불편한 서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예: 탈스탈린화 이후 스탈린 시대에 대한 서술) 또한 학문에 있어서도 이념적으로 개입하여 정치과학의 경우 "부르주아 유사 과학"으로 간주하여 금지했으며, 트로핌 리센코의 사례와 같이 이념적으로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관련 학계에 큰 피해를 입혔던 경우도 있었다.


3. 교복과 생활 규정[편집]


교복의 경우, 차르 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어 10월 혁명 이후에 철폐되었다. 그래서 소련에서 학생들이 입는 교복이라 할만한 것은 피오네르 제복 뿐이었으며, 당연히 사복차림으로 등교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저학생들은 부모가 입히는 대로 다녔고, 고학생들은 유행에 맞추어서 입고 다녔던 편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 중반기 이후로는 교복이 재도입되기 시작한다. 1935년에 소련 정부에서 교복 제도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고, 1940년에 공장 부설 학교와 직업 학교를 시작으로 교복이 학교 현장에 다시 나타났다. 다만 2차대전 승전 직후까지도 교복은 일반계 학교가 아닌 직업 학교나 기술 학교에서만 착용하는 것이었다.

1947년부터 교복이 전면 도입되었다. 남학생 교복은 군복과 유사한 형태였고 여학생 교복은 제정 시기의 여학생 교복을 모방한 형태였다. 서방 세계에서는 소련의 여학생 교복이 서방의 하녀복과 유사한 형태여서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지만, 소련에서는 하녀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의 여학생 교복은 귀족 여성들의 일상복과 간호사들의 복장을 혼합한 제정 러시아의 여학생 교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남학생 교복은 1962년부터 군복 대신에 정장을 기초로 한 디자인으로 교체했다. 흐루쇼프 해빙기를 맞이하면서 학생들의 두발규정을 완화하는 김에 교복도 군복스타일에서 민간인들이 입던 제복에 맞추어서 개정한것이다. 여학생 교복은 당장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서 이러한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서 여학생 교복도 정장차림 교복이 추가되었고, 이에 따라 고학년들은 정장차림 교복을 입었다. 소련 내 공화국 교육부들은 교복 디자인을 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어서 소련은 지역 별로 교복의 다자인이 조금씩 달랐다. 사복 착용은 금지되어도 다른 소련 내 공화국의 교복을 공수해서 입는 것은 허용되어 있어서 당대 소련의 청소년들은 타 지역 교복을 공수해서 개성을 뽐내었으며 동구권 국가들의 교복도 세련된 것으로 취급받았다.

다만 교복의 실용성에 대해서는 소련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여학생 교복의 경우에는 모직물로 만들어진 데다가, 치마가 짧게 다자인되어 있어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문제가 심해 여학생들이 불만을 많이 제기했었고, 교복의 디자인도 학생들이 불만을 품는 경우가 상당수라서 유행에 뒤따라가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학생들이 교복을 죄수복이나 작업복이라면서 자조하기도 했다. 1962년형 교복도 디자인은 그리 좋은 평을 얻지 못해서 1973년, 1980년대 후반에 차례차례 개편을 거쳤다.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한 소련답게 나라가 너무 커서 교복 보급은 단번에 이뤄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자 공급이 느린 내륙과 오지, 농촌 지역에서는 교복 착용이 한동안 선택 사항이었고, 전국적으로 동일한 교복을 입게된 것은 1954년의 일이었다. 소련 말기에는 중학교 교복과 고등학교 교복의 스타일을 달리하는 방식의 개량이 이루어졌다.

1991년 9월자로 모스크바발트 3국 등 상당수 지역의 학교에서 교복 의무 착용 규정이 없어지고 사복 착용이 허용되었다. 또한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연방에서는 교육 예산이 부족한데다가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교복 업체들이 파산하는 일이 터졌고 이 때문에 교복 자체가 희소품이 되었다. 또한 대다수 가정에서는 교복값을 댈수 없을정도로 경제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에[7] 1992년 9월 신학기부터는 교복착용이 의무화된 지역의 학교에서도 사복착용을 허용하였다. 이렇게 사복착용이 대세가 되자, 1994년부터 교복 착용 여부는 학교장의 재량에 따르도록 명문화 되었고, 공립 학교의 교복 의무 착용 규정은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2000년대부터 사립 학교를 중심으로 교복을 재도입하기 시작하다가 2014년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교복 제도의 부활을 지시함에 따라 2015년부터는 상당수의 공립 학교에서 교복이 재도입되었다. 다만 교복 제도의 도입이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교복을 도입한 학교와 사복을 입는 학교가 공존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저학생들이 사복을 입고 고학생들이 교복을 입는 경우가 대다수인 반면에 러시아는 저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고학생들이 자율인 경우가 많다. 옛 연방 구성국들 같은 경우에는 제각기 사정이 다르다.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교복을 입는 것이 일반적인 나라들도 있으며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조지아처럼 사복차림이 일반적인 나라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이후에 잠깐 사복차림으로 다닌 이후 1996년에 교복을 제정했다가 교복의무화가 2019년에 폐지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사복차림이 일반적이었다가 2017년에 부활하였으며, 벨라루스도 1992년에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복이 폐지되었지만 2023년을 기점으로 교복이 부활했다.

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학생들의 두발을 엄격히 단속하여 남학생들은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고 여학생들도 머리 모양을 통제받았다. 그래도 스탈린 사후에는 통제가 완화되어서 남학생은 옷깃 위까지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게 하고, 여학생들도 보다 다채로운 머리 모양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고르바초프 초기 시절까지 두발 단속이 없어지지는 않았다.[8] 보통은 앞머리 염색과 남학생의 장발, 여학생의 긴 생머리는 계속 금지했고, 특히 장발을 끝까지 고수하면 퇴학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구권에서 유행한 음악과 히피 문화가 소련으로 전파되어 남자도 장발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유행 초기에 소련 당국에서 남성의 장발을 단속했음에도 남성의 장발은 계속 확산되었다.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서방 세계 가수들의 장발을 따라한 것은 이런 풍조에 기름을 부어 청년과 청소년 사이에서 장발을 더 크게 유행하게 만들었다.[9]

이 당시 소련의 청소년들은 3달 간의 기나긴 여름방학 기간 동안에 머리카락을 옷깃 아래까지 길게 기르고 다니다가 개학식 전날에 자르거나, 개학 이후에도 장발을 안 자르겠다고 버티다가 교사에게 징계를 받았다. 이러한 규정은 소련 말기에 폐지되었고, 러시아와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등에서 두발 규정은 과거의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국가 별로 사정이 달라서 규제가 있는 나라들도 존재한다.

체벌의 경우, 제정 러시아의 교육자들은 학생들이 가정에서 어떤 일을 겪는지를 잘 알고 있어서 체벌을 극도로 비판했고 젬스트보 초등 학교에서는 체벌 금지가 아예 권고 사항이었다. 그래서 젬스트보 학교의 교사가 학생을 처벌하는 것은 신문에 실릴 정도의 사건이었다. 이런 선구자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소련의 교육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체벌을 원천 금지했다. 다만, 몇몇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하거나 폭행하는 사건이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도 발생했기에 연방 정부에서는 계속해서 체벌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체벌 금지는 소련 해체이후로도 법제화되어있다.

교칙과 징계 규정은 혁명 이후에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학생에 대한 징계 수준은 대단히 낮았다. 그러다 스탈린 정권 시기가 되면, 교칙과 징계 규정이 대단히 엄격해지고 교권 침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처벌했다. 이후 해빙기가 되면 교칙과 징계 규정도 점차 완화된다.

학교 급식은 러시아 제국 시대때도 있엇지만, 학교에 따라 일률적이지 않았고, 귀족학교가 아닌 농민이나 소시민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에서는 죽이나 스튜같은 간단한 식사들 위주로 제공하는 등 질이 천차만별이었으며 급식이 제공되지 않은 경우도 다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영양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급식제도를 소련 전 지역으로 확대하였고, 표준화를 단행하였다. 다만 이 당시의 급식은 제국 시절에 비해서 괜찮아졌다고는 해도 당대 상황에 맞게 까샤, 수프, 보르시같은 일상식이나 단순한 음식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급식의 영양뿐만 아니라 질에도 신경쓰기 시작함에 따라 신선한 채소메뉴들이 대거 도입되는 변화가 일었다. 다만 급식메뉴가 다양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맛보다는 영양섭취에 맞춘 경우가 흔했기는 했고, 학생들이 생선요리는 비리다면서 싫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소련 해체 이후로는 경제문제로 인해 급식 시스템을 외부입찰에 맡기거나, 돈없는 학생들이 급식을 제때 먹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는 등 엉망이 되었고, 또한 아이들이 급식보다 간식을 선호해서 비만율이 높아지는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4. 문맹 퇴치 운동과 계몽 운동[편집]



5. 스탈린 시기의 소련 교육[편집]



6. 흐루쇼프에서 체르넨코까지[편집]


1956년, 흐루쇼프 정권은 여전히 상급 중등 학교 학생들에게 부과하던 수업료를 폐지하여 초, 중등 교육 과정에서의 완전한 무상 교육을 실현하고, 1958년에 7세부터 시작하는 7년 의무 교육 과정을 8년으로 상향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서 교육받는 학생들의 노동 교육 시간을 확장하고 여러 종류로 나뉘어져 있던 직업 학교와 기술 학교들도 통폐합했다.

흐루쇼프 정권 시기에는 노동 교육이 강화되고 노동자들을 위한 혜택과 교육 과정이 확대되었다. 흐루쇼프는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한 신분 이동이나 승진을 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1955년에 고등 교육 기관의 입학 규정을 현장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변경하고, 2년 이상 생산직에 근무한 노동자들을 위한 별도의 입학 정원을 배당했다. 또한 청년 학교를 증설해 노동자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확대하고 야간, 통신 교육 과정도 확대했다.

또한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하려는 이들에게 최소 2년 간 생산직에 종사해야 하는 의무를 도입했다. 그 덕분에 노동력 부족 문제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었지만, 이는 간부의 숫자 증가와 젊은 노동자들의 낮은 기술력, 경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또한 흐루쇼프가 강조한 노동과 학업의 결합은 일반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학부모들의 격렬한 불만을 샀다. 특히 노멘클라투라의 불만이 극심했고,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는 그가 물러난 뒤에 곧바로 수정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소련에서는 연간 8 ~ 10%의 초등학생들이 유급을 하는 일이 벌어져 큰 문제가 되었다. 교사의 교수법과 수업 방식이 원인으로 지목되었지만, 핵심적인 원인은 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들과 학습 부진을 겪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제대로 선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 교육부는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수 학교를 증설하여 장애 학생들을 수용하는 한편, 학생이 유급하면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를 실시했다. 이러한 조치로 학생들이 유급하는 일은 급감하여 60년대 중반이 되면, 초등 학교에서의 유급은 전체 학생 수의 2% 이하로, 70년대 후반에는 1% 미만으로 감소했다.

다른 의미로의 특수 교육도 확대되었다. 음악과 예술, 체육 분야에서의 전문가 양성 과정과 영재 교육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유아기부터 수학과 과학, 음악과 미술 교과에 대한 재능을 드러낸 아동을 위한 특수 학교도 설립했다. 특히 과학 분야 영재로 선정된 학생들은 8년 의무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에 특별 시험에 응시해 특수 교육 기관에 입학할 기회를 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소련의 학문 수준을 향상시키고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데 일조했으나, 국가의 근본인 평등 교육 사상에 위배된다는 반대 여론도 상당했다.

1964년에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불만을 산 흐루쇼프의 노동 교육 강화 조치를 조정하고, 의무 교육 과정을 10년으로 상향했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 노동 시간과 실습 시간이 단축되고 흐루쇼프 시기에 노동자들이 누렸던 혜택들도 축소되었다. 예컨대, 공장 경영진들의 직원 추천 입학 제도가 제한되었다.

고등 교육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신입생 전용 예비 교육 과정(8 ~ 10개월)를 시행했다. 1970년을 기준으로 하면, 8년제 학교를 마친 학생의 80%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7백만 명의 전문가 양성 계획이 준비되어 있었다. 센서스에 따르면, 도시 노동자의 75%, 농촌의 50%가 중등 교육 과정 이상을 이수했으며, 1970년 ~ 1985년까지 중등 교육 이수자의 숫자는 3배로 증가했다. 80년대 초까지 고등 교육 기관에서는 매년 100만 이상의 전문가들을 배출했고, 교육 기관의 숫자도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부터 소련의 교육은 점점 문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상급 학교나 고등 교육 기관으로 진학할 때, 화이트 칼라지식인, 중산층 출신 자녀들이 생산직 노동자, 농민 가정의 자녀들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당대 소련을 지배하던 이들은 농민, 노동자 출신으로 크렘린에 입성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이었지만[10], 그들의 통치를 받던 농민, 노동자들의 신분 이동과 사회적 지위 향상은 점점 어려워져 갔다. 계층 구조가 경직되어 갔고, 관료주의 같은 병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영토와 2억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대국인 만큼, 소련은 교육의 '질' 보다는 '양'에 신경 쓰는 게 타당했지만, 경쟁자인 미국이 질적인 면에도 관심을 기울일 때, 소련은 계속 양에만 집착해 질적인 개선이 잘 이뤄지지 않아 교육의 질적 수준이 지속적으로 떨어졌고, 교육 과정과 교수법의 개선도 지지부진했다. 학업 성적 불량으로 인한 퇴학 조치도 중단되었다.

1984년에 집권한 체르넨코는 소련 교육의 현대화를 도모하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명목상의 개혁 목적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학교를 창조하고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를 계획적이고 전면적으로 완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체르넨코 정권은 여러 종류의 직업 기술 학교를 전문 기술 학교로 단일화하고 노동 교육을 강화하여 상급 중등 학교의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 교육을 실시했다. 기존의 직업 교육이 진로 · 진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학생들의 의욕이 낮았기에 자격증 취득을 보장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높이려 했다.

의무 교육을 10년에서 11년으로 연장하고 취학 연령도 7세로 낮추었다. 이 시기부터 소련의 학생들은 초등 교육 4년, 기초 중등 교육 5년, 상급 중등 교육을 2 ~ 3년받고 18 ~ 19세부터 대학 교육을 받게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학급 당 학생 수도 조정했다. 1 ~ 9학년은 40명에서 30명 이하, 10 ~ 11학년은 35명에서 25명 이하로 조정하고 언어 교육은 20 ~ 25명을 초과하면 분반했다. 주당 수업 시수도 학생들의 연령에 맞게 재조정하고, 교과 과정도 개정하여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현대화를 꾀했다. 상급 중등 학교에 컴퓨터 교육이나 분야별 전문 과정을 개설했으며,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체육, 음악, 미술, 환경 수업의 시수를 늘렸다.

이러한 조치는 인민의 교육 수준 격차를 줄이고 교육의 질적 개선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재원이 부족했고 종합 기술 교육에 계속 집착하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체르넨코가 급사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개인의 능력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제도적 평등에 집중했기 때문에 정부 조치와 현실과의 괴리가 더 커졌다는 비판도 나왔다. 소련은 이미 고도로 경제와 산업이 발전한 국가가 되었지만, 다수의 교사들은 여전히 산업화 시기에나 쓰던 교수법으로 현재가 아닌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7. 페레스트로이카[편집]


체르넨코 개혁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연방 교육의 문제는 계속 심화되어 갔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의 전체 예산에서 교육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7%였다.[11] 신경제정책 시기와 스탈린 정권 시기에 연간 10% 이상의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던 연방의 열정은 사라져 버렸다. 연방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미국보다 12배, 영국보다 8배 적었다. 학교 시설의 노후화도 심각했다.

학생의 개성과 진로, 학생과 교사들의 창의성은 계속 무시받았다. 교육 현장에서 크렘린으로 보낸 보고서들은 당대 소련의 교육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학교 재정은 부족했고 교원과 학교에 지급하는 지원은 열악했으며 교사에게 주는 임금도 낮았다. 학생들의 지적 수준도 문제가 심각했으며 결석률도 아주 높았다.

그래서 소련 정부에서는 84년 개혁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개혁을 준비했다. 1986년, 28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고등 교육 과정에 대한 재편성을 결의하고 개혁안을 수립했다. 교육 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담은 이 개혁안은 국민적 토의를 거친 뒤에 87년 3월에 공포되었다.

위에서의 개혁이 이뤄지자, 아래에서의 개혁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교사와 교육 전문가, 교직원들 사이에서 교육의 민주화와 교육 수준의 향상, 학교 자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게다가 글라스노스트가 촉발시킨 언론과 대중매체의 활성화와 교육 제도 개선에 대한 여론의 형성은 이들의 활동을 크게 고양했다. 1986년 10월, 진보적인 교사들이 단체를 설립하여 교사의 창조적 교육 활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교사의 교육 역량 증대를 위해 교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6년 12월, 소련 정부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스크바에서 연방 교직원 대회를 개최했다. 각 연방 내 공화국의 대표들이 자신이 소속된 공화국의 개혁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1988년, 교육의 다양화와 질적 향상을 목표로 하는 리가초프 보고서가 크렘린에 제출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교육계에서 논의된 주요 쟁점은 학교 수업의 인센티브 문제, 교육 과정의 조정, 관료주의와 교조주의, 설비 노후화, 교육의 질적 수준 하락, 학교 민주화와 자치제, 부족한 예산 문제 등이었으며 체르넨코 개혁에서 개선되지 못한 교과 과정, 구시대적인 수업 방식과 교수법, 강의식 교육에 대한 비판도 이뤄졌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직업 교육이나 기술 교육에 대한 인식이 계속 나빠지고 있었기에 학생이나 학부모나 직업 학교와 기술 학교를 기피했고, 직업 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박탈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직업 학교의 학생들이 일반계 학교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학습 의욕이 낮은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래서 상급 중등 학교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 과정들을 개설해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교육 기관이 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다. 직업 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교육 과정을 신설해 학생들이 진로 적성에 맞는 학교에서 효과적인 학습을 하자는 것이었다.

개인의 희망에 비해 평가 결과가 못 미치는 경우에도 고등 교육 기관으로의 진학을 원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을 설득할 수 있을만한 동기를 부여할 필요도 있었다. 직업 학교의 학생들에게 일반계 학교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장학금과 지원을 해준다거나, 일반계 학생들보다 더 쉽게,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

소련 정부는 교육 현장과 학생, 학부모, 여론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교육 행정의 개선을 추진하고 시설 노후화와 예산 문제, 학교 자치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교육 기관의 부분적인 독립 채산제도 도입하려 했다. 독립 채산제가 도입되면, 각 학교는 교부된 예산을 자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학교 회의의 재량에 따라 독자적으로 학교 기금을 조성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학교 기금은 관련 부처의 지원, 학부모나 시민의 기부, 학교에서 독자적으로 추진한 경제 활동으로 확보한 재정 등을 수입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연방 정부 차원에서는 교육 예산의 증대와 지방 소비에트의 재정권 확대, 기업으로부터의 교육 예산 지원 등의 방안을 구상했다.

교육 행정 조직의 관료주의, 교조주의, 비효율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간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던 교육 부처들을 통폐합하고 주, 시 단위로 교육 행정 기관에 속하는 인민 교육 회의를 설치했다. 인민 교육 회의는 교직원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대표나 사회 단체 대표가 학교 관리와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학교 민주화를 위해서 학교 운영의 책임 주체를 교장에서 교사, 관리자, 학생, 학부모 대표로 이뤄진 학교 회의로 전환하고 대학의 자치권도 확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들 중에서 일부는 구상만 되었고, 일부는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일부는 시행되기 전에 소련이 해체되고 말았다. 소련 해체의 충격 속에서 연방 구성 국가들의 교육 환경은 지옥 밑바닥에 쳐박혀 버렸고, 러시아를 비롯한 다수 국가들의 교육은 오랜 시간 동안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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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 디즈니에서 제작한 소련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소련 교육의 모습을 볼 수 있다.[2] коренизация, 코레니자치야[3] ПТУ, Профессионально-Техническое Училище. 영문 : PTU. 통칭 : Училище)[4] техникум[5] ВУЗ, Высшее учебное заведение[6] 출처: 러시아의 역사 4판(1977) /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 저[7] 사실 소련 시대에도 교복이나 학용품은 학교에서 무상으로 지급하는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따로 알아서 의류점, 문방구 가게에서 돈 들여 사야되는것이기는 했다. 다만 소련의 저축액이 막대했다보니 부모가 막장이 아니라면 다들 잘만 냈었는데, 소련이 해체되고나서 물가폭등으로 교복과 문방구 가격도 같이 폭등하는데 예금이 죄다 휴지조각이 되니 낼수없는 가정이 급속히 늘어난것이다. [8] 보통은 두발 단속보다는 서방의 문화를 모방하거나 사치스러운 물품을 학교에 반입하는 것을 주요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9] 물론 소련의 주류 가수들은 여전히 머리카락을 옷깃 위로만 기르는 머리 모양을 해야 했다. 당시 소련 라디오 텔레비전 위원회 의장(한국식으로 번역하면 국영 방송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세르게이 라핀이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을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노골적으로 반영하여 장발 스타일의 남자 가수들이 방송에 나올 수 없도록 규제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자 가수들이 TV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머리카락 길이를 규정에 맞춰야 했다.[10]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셀레스트, 체르넨코, 그로미코, 수슬로프, 그레치코, 로마노프는 농민. 우스티노프, 코시긴, 안드로포프, 그리신, 키릴렌코, 셰바르드나제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대 크렘린의 최고위급 정치인들 대다수가 농민, 노동자 출신이었던 것이다.[11] 동 시기 국가와의 비교 : 프랑스 7.1%. 일본 6.3%. 미국 6.1%. 서독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