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유/활동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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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수 데뷔 전
2. 가수 활동 및 예능 활동
4. 병역 기피 이후
4.1. 2003년 6월 일시 입국
4.2. 2004년 이후
4.3. 2014년 입국금지 해제 및 방한(訪韓) 시도
4.4. 2015년 5월 19일 아프리카TV 심경 고백 인터뷰
4.4.1. 소속사의 공소시효 드립과 병무청의 원천봉쇄
4.4.2. 인터뷰 내용
4.4.3. 인터뷰에 대한 병무청의 입장
4.4.4. 인터뷰 이후
4.5. 2015년 11월, 비자발급 거부 취소소송
4.5.1. 2016년 9월, 1심 패소
4.5.2. 2016년 10월, 항소
4.5.3. 2017년 4월, 대법원 심리 시작
4.6. 2018년
4.6.1. 1월 부친 방광암
4.6.2. 11월 복귀 무산
4.7. 2019년
4.7.1. 앨범 발매
4.7.2. 이후 행보
4.7.3. 2019년 7월 11일, 대법원 판결
4.7.4. 대법원 판결 이후
4.7.5. 파기환송심 선고(11월 15일 승소)
4.8. 2020년
5. 해외 활동



1. 가수 데뷔 전[편집]


한국인 시절 이름은 유승준. 1976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잠실동[1]에서 태어났다. 가족으로는 어머니아버지 유정대, 유승환(1974년생)이 있으며 조카는 유한나(女)가 있다. 본관은 강릉 유씨(한고제의 후손 劉씨 32세손 승(承)자 항렬[2])이다.

한국 출생 후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89년 겨울 가족 모두가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민을 가게 된다. 유승준과 만나던 여자친구는 유승준이 어린시절 방황을 하자 충격요법으로 헤어지자 했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유승준은 여자친구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유승준의 여자친구는 발이 넓어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았고, 어느 날 한국에서 촬영 온 연예인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며 유승준을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유승준은 가수가 되어야 겠다는 꿈을 가졌고, 유승준의 여자친구 역시 유승준에게 가수가 되라고 힘을 실어줬다.
미국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며 혼자 춤과 노래 ​연습을 하다 여자친구의 권유로 면접을 봤으나, 너무 미국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탈락을 하게 된다
그렇게 몇번의 오디션을 보던 중 가위를 만든 이윤상과 만나게 되어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데모테이프를 한국에 있는 기획사 50여 곳에 보냈다.
한 기획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1996년 겨울, 혼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이민 온 당시 미국 생활의 기틀을 잡느라 아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했고 가수가 되겠다는 아들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피아노 학원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피아노 연주를 배웠고 태권도 체육관에서 대리사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댄스를 하기 위한 몸을 만들어갔다. 가수가 되겠다며 혼자서 한국으로 갈 때도 부모는 고생 좀 하고 오라는 생각으로 아들에게 단돈 10달러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데뷔하기 전 소속사에 뿌렸던 데모테이프. 그의 댄스 실력을 엿볼 수 있다.
곡명은 Black Street의 Baby Be Mine


1997년 만 20세의 나이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이후 2002년 초반까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뒤 해외로 건너갔으며, 2004년 크리스틴 오와 결혼해 4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3]

2. 가수 활동 및 예능 활동[편집]


그의 인식이 매우 부정적으로 돌아선 현재까지도 대중들은 그가 많은 사랑을 받던 음악인이자 예능인이었다는 사실에만큼은 공감하는 편.

박남정 - 박진영 - 유승준 - 로 이어지는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남성 솔로 댄스가수로 조성모, 임창정과 더불어서 스티브 유[4]만이 거의 드물게 남성 솔로 가수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현재까지도 상기한 가수 이후 남성 솔로 댄스 가수로 데뷔해서 성공한 사례가 201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전무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커리어를 보유했던 남성 댄스 가수였다.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출연한 모습이다

1997년 4월 1일, 가위라는 곡을 통해 데뷔했으며 이후 후속곡인 사랑해 누나가 각종 방송사에서 1위를 여러 번이나 차지하는 등,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메이저급 반열에 올라섰다. 가위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따라췄고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당시 1990년대의 칼군무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굉장히 현란했다. 지금 봐도 굉장한 칼군무인데, 그 당시에는 그야말로 파장력이 엄청났다.

스티브 유의 안무.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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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음악캠프, 1999.05.15)

1998년 출시한 2집 타이틀곡인 나나나, 내가 기다린 사랑 1999년 3집 열정[5], 1999년 4집 비전, 연가 2000년 5집 찾길 바래 2001년 6집 WOW와 같은 곡들도 연속으로 히트시키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 중 한 명으로 군림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트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의 방송계를 섭렵하였다.



찾길 바래

스티브 유는 춤꾼 스타일의 옷을 입긴 했지만 안무 자체가 기본적으로 굉장히 격렬했고[6], 대중성을 꽤나 의식했기 때문에 원타임이나 지누션과 같은 당대의 동료 가수들과 비교해 보면 옷차림이 단정한 편이었다. 더불어 항상 미국식의 짧은 남자머리(Buzz Cut) 혹은 반삭을 고수했기 때문에 중장년층 이상의 어른들에게도 큰 호감을 샀다.

그 당시에는 음성적으로 유행하던 일본 비주얼계의 간접적 영향으로 머리를 길게 하는 게 유행이어서 지저분해보이고 그래서 당연히 두발에 대한 제한을 두었지만 스티브 유와 같은 경우에는 머리도 짧은 데다 깔끔하고 깨끗하고 얼굴은 물론 두상까지 멋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어울렸고 유행도 순식간에 뒤바뀌기도 했다. 당시 중고교 두발 규정이 엄격했던 터라 학교에서 두발단속 문제도 꽤 심각했지만 스티브 유의 반삭머리가 남학생들에게 유행을 타면서 알아서 단정한(...) 머리를 만드니 이 때만큼은 학생부가 두발 단속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또한, 보컬부분에서도 스티브 유는 댄스가수 치고도 상당히 좋았는데, 일단 당장 당시의 여느 발라드가수들과 비교해봐도 전문장르가 구분이 안될정도로 스티브 유는 타고난 미성에다 파워풀함을 겸비한 느낌으로써 흠잡을데도없이 가창력이 매우 좋았으며, 대부분의 곡들이 2옥타브 시 ~ 3옥타브 레의 높은 음역대였고 <Wow> 처럼 도입부부터 2옥타브 후반대의 음으로만 채워져있는 경우도 많았다. 스티브 유 본인도 가창력이 정말 좋은 가수로 평가받았으며 김종서, 김건모, 김경호 등 높은 음역대를 자랑하는 가수들의 노래 커버도 역시 잘 소화했다. 노래 퀄리티나 음반 구성은 지금 들어봐도 역대급이고 요즘 나오는 곡들과 비교해봐도 세련된 편이다. 오히려, 댄스가수가 비교적 저평가되었던 시절에 활동했기 때문에 평가가 낮게 되는 부분이 본인에게는 아쉬울 따름일것이다.

그리고, 스티브 유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만인의 슈퍼스타같이 같은 연예인들조차도 우러러보는 위치인듯하면서도, 나름대로 웃기고 재미있는 모습과 더불어 입담도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포지션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예능 오락프로그램에서는 오히려 무게 있는 이미지를 버리고 자주 망가지기까지 하면서 친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흔하던 드라마타이즈 계열의 예능에서 바보연기 같은 코믹연기도 종종 할만큼 오락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서슴지 않아서 성별과 세대를 가리지않고 사랑받았고[7], 종종 단기로 오락프로그램 진행도 했었다. 그야말로 친근한 웃음과 카리스마 있는 멋이라는, 남들은 하나도 얻기 힘든 두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은 역대급 스타 중의 스타였다. 실제로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의 초대 MC로 활동하기도 했다.[8] 옆집에 사는 절친한 동네 형같이 친근한 이미지도 있었고, 끼와 재주는 물론이고 탄탄한 춤실력과 격렬한 안무 속에서도 고음의 곡을 깔끔하게 소화해 내는 가창력까지 겸비했었다. 따라서 그는 그때 활동하던 댄스가수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었던 발군의 재능을 뽐냈던 가수였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에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도 역시 그의 인기 요인 중 하나였다. 요즘에야 워낙에 몸이 좋은 가수들이 많지만, 90년대 그 당시 그는 한때 의류모델이었던 듀스의 김성재와 더불어 가요계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뮤직비디오만 봐도 탄탄한 몸매를 과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각종 인터뷰를 통해서 데뷔 초기부터 성실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였던 터라 대외적인 그의 이미지 역시 상당히 좋았다. 더불어 출발 드림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건강한 스포츠맨 이미지를 잘 쌓았다. 스타 서바이벌 동거동락에서도 멋있으면서도 마이크웍이나 입담도 좋아서 코믹한 동네 형 같은 이미지도 잘 보여줬고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잘생긴 팀의 주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우승까지 하면서 최후의 생존자가 되었다.

게다가 담배를 끊고 금연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금연 캠페인 이러한 좋은 이미지가 최고조에 달한 전성기 시절에는 아름다운 청년[9][10] 이라 불렸고, 흔한 안티조차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광범위하였다. 심지어 댄스에 큰 관심이 없는 중장년층~노년층도 그의 대표곡과 얼굴 정도는 대부분 기억하며 호감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더하여, 나이도 어린 인기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연애 스캔들도 없이 사생활도 무척 깨끗한 편[11]이었고, 무대 뒤에서도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던 터라 선후배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매우 좋았다. 또한 크리스찬이였던 점을 여러모로 어필한 점도 이에 한 몫 했는데, 당시 개신교 신자라면 "술, 담배를 안 하거나 적게 하고 검소하게 사는 등 자기 절제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지금보다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의 앨범 마지막 곡은 항상 직접 부른 찬송가였는데, 이는 테이프CD 재킷에는 써 있지 않았기에 이에 게재되어 있는 마지막 곡을 들은 뒤 테이프나 CD가 꺼질 걸 생각하던 감상자들이 뜬금없이 찬송가가 나왔으니 크게 당황하기도 했다. MBC에서 그의 데뷔 스토리와 데뷔 이후의 삶을 취재한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전성기 시절엔 대중적인 호감과 건전, 건강한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12]

또한, 2001년이 어찌보면 그에겐 인기 최전성기이자 가장 이익이 많았던 해인데, 2000년대 당시의 쟁쟁한 라이벌이었던 H.O.T.젝스키스가 해체된 이후였다. 또한, CF도 10편 이상 찍었고 당시 잘 나가던 음반회사와 무려 3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를 가진 돈을 받고 계약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스티브 유에겐 엄청난 최고의 전성기를 보여줬던 한 해였다 보면 된다. 그 인기 덕택에 2002년 한일 월드컵 조추첨식 축하공연 무대에도 서게 되었다.

그러나 스티브 유의 가요계 커리어가 생각만큼 아주 압도적이지는 않다. 분명히 1인 댄스 가수로 가지는 흥행력과 음반 판매량 기록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고 가요 프로그램 1위 횟수와 1위 곡수는 당시 활동하던 솔로 가수를 통틀어 압도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동시기 더블 밀리언/밀리언 셀러를 수차례 기록했던 조성모, H.O.T 에게 음반 판매량 수치에서 크게 밀렸으며 가요 대상 기록이 있는 위 가수들에 비해 스티브 유는 신인상과 가요 대상 기록이 없다.

이견으로는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 그룹이나 대중적 장르의 발라드 가수에 비해 음반에서 불리한 1인 댄스 가수의 태생적 한계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90년대 가요계 대세로 떠오르던 톱 가수들에게 밀리언 셀러 음반은 그리 어려운 성적은 아니었다. 댄스 가수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최대 커리어였던 3집 83만 장은 이름값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후로 발매한 앨범들도 판매량 측면에서 조금씩 하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전성기를 H.O.T 와 함께 보낸 것이 그에겐 악재 요소로 분석될 수 있다. H.O.T 는 당시 영세 기획사였던 SM엔터테인먼트를 한국 최고의 기획사로 키워낸 그룹으로 엄청난 규모의 팬덤을 거느리고 있었다. 스티브 유의 등장 이전부터 이미 대중가요계는 아이돌이 주도하는 시장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고 이후 발라드 가수들이 음반 시장을 장악하는 등 당시 경쟁자 수준과 가요계가 흘러가는 판도를 생각해 볼 때 1인 댄스 가수가 가진 불리한 입지로 돌파하기에는 어느 정도 시점에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스티브 유의 수상 경력이 저조한 다른 이유로는 그의 영주권 문제가 있다. 당시 미국 이민법상 미국에 6개월 이상 거주를 해야 영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상반기에는 국내 활동을 하고 하반기에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실제로 1997년~1998년 연말 시상식에는 단 한번도 참석을 하지 못했다. 특히 1998년에 발매한 2집 타이틀곡 나나나 는 그의 최전성기의 시작을 알리는 곡이었고 그해 대중 지표 순위에서 1위~2위를 다툴 정도로 큰 인기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결국 그해 연말 시상식에 불참하게 되면서 어떠한 상도 받지 못하게 된다.

스티브 유는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런 측면에서는 조성모도 비슷하다. 10대 가수 가요제에서의 30대 이상이 뽑은 가수 명단에 들어간 횟수도 조성모가 앞서고, 위의 리스피아르 설문조사도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였다.

하지만, 이는 스티브 유가 고평가 받는 이유를 잘 파악하지 못한 분석이다. 애초부터 스티브 유가 대외적으로 높게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원탑이었기 때문에 고평가를 받았던 것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보적으로 원탑을 찍은 분야는 없었더라도, 연예계 전반에서 두루두루 인정을 받고 톱스타의 이미지를 쌓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를 받는 것이다.

실제로 음반관련 지표들은 그 당시 대세였던 가수들에게 밀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가수들 뒤에는 항상 2위 포지션으로 자리잡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즉, "독보적인 원탑이었다는 것이 과장되었다는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톱스타 반열의 가수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표현도 잘못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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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이 아니라 인기도 측면에서 봐도 1998년 한국갤럽 선호도 조사에서 가수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리스피아르 조사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설문조사 자료의 순위에서도 조성모, H.O.T., 스티브 유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스티브 유는 헬게이트급으로 경쟁이 치열했던 1세대 아이돌 전성시대에서도 솔로 댄스 가수라는 약한 입지로 당당하게 혼자 경쟁을 하면서도 엎치락뒤치락하던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 정말 대단했기 때문에 절대로 저평가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다.

선호도 조사 뿐 아니라 그의 인기가 최절정에 올랐던 1999년에 연예인 중 단발 광고 역대 최고 개런티 신기록을 세우며 화제를 모았는데 이 당시 광고계에선 스티브 유 만이 1세대 아이돌계의 레전드 H.O.T 와 함께 최고 출연료 대우를 받았었다. 특히 H.O.T 의 광고 출연료는 당대 배우,코미디언,가수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톱스타들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와 대등한 수준의 개런티를 받게 된 스티브 유 로서는 1999년이 그의 최고 리즈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스티브 유는 가수라는 측면보다는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편이며 싫어하는 사람도 거의 없이 누구나 다 어느 정도 호감은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당신은 스티브 유를 좋아합니까?"라고 물어보면 "내가 스티브 유 팬은 아니지만 싫어하지는 않는다, 좋다, 잘 생겼다, 멋지다."라면서 긍정적인 답이 오는 분위기였다. 누구나 좋아하지만, 최애캐 정도는 아니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보유한 것처럼 보였지만 개인의 음반 판매량 화력은 당대 인기 가수들에 비해 다소 약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음악방송에서의 성적은 1990년대 뮤지션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다. 1집부터 5집까지 활동할 때 1위 후보에 꾸준히 올랐고,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던 1999년 3집 당시에는 뮤직뱅크, 인기가요, 쇼 뮤직탱크 등 당시 순위제를 시행하던 음악방송에서[13] 전부 최고 타이틀에 해당하는 업적을 남겼다.

유승준의 부재 이후 솔로 가수로 슈퍼스타가 된 후발주자는 였고, 비는 지금도 스티븐 유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물론, 최정상급 스타가 된 이후 각종 논란들 때문에 깨끗한 이미지에는 흠이 많이 갔기 때문에 대체로 둘을 비교할 때는 유승준이의 손을 들어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다. 심지어 안티들도 이건 인정하는 편이며, 유승준과 관련된 게시물에 "미국시민권 취득만 안 했어도 지금의 비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리플은 거의 필수요소급으로 달리는 리플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흔히 말하는 가요계의 엄친아로 인정받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그는 미국시민권 취득을 저지른 탓에 한 때 "전 국민에게 호감을 받고 사랑받던 가수"에서 지금은 "전 국민이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가수"로 변모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유승준이 남긴 명곡들도 워낙 많았고 퍼포먼스도 뛰어난 인재가 쉽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4급 받았으니 공익으로 병역의무 수행할 것이지, 왜 공익조차도 안 갔느냐?"라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지금은 연예인이 공익 간다면 병역비리 아니냔 소리가 대놓고 나올 정도지만, 당시엔 연예인들이 군대를 어떻게든 빼는 일이 워낙 자연스럽게 여겨졌기에 그가 공익을 갔다 해도 "춤을 저리 격하고 많이 추는데 허리 좀 나가서 공익 갈 수도 있지."[14]라고 자연스럽게 대중들이 받아들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티브 유 병역비리 사태 이후 대부분의 남자 연예인들이 공익 판정을 받았거나 외국인 영주권이 있어도 포기하고 자신있게 현역으로 자원 입대하는 경우들도 많이 보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스티브 유가 지금처럼 병역기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사건은 오히려 병역기피를 막는 것에 순기능을 제공한 셈이다.


3. 병역 기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스티브 유 병역기피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병역 기피 이후[편집]


그는 어떻게든 한국으로 복귀하고 싶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여전히 복귀는 힘든 상태다. 애초에 입국이라도 해야 활동을 하든지 말든지를 결정한텐데 입국조차 되지 않으니 복귀는 그 다음 문제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유야무야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때는 이러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던 국내 팬들도 대략 10명 중 1명만 팬을 유지할 정도로 이젠 그 흔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어졌다. 사실상 지지자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

그리고 병역 기피 사건 이후에 그의 곡들은 TV, 라디오에서 들을 수가 없다.[15]

그야말로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성어의 산 증인이 된 셈이다. 사실 이건 우리나라에만 해당하고 그가 미국에서 전혀 못 사는 것도 아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저 약간의 리스크와 하이리턴인 셈이다.

결국 한때 (2010년 이후 인터넷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유느님'으로까지 불릴 수 있었던 신성한 존재에서 이제는 그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서 소모되는 안주거리로나 대중에서 회자되고 있다.


4.1. 2003년 6월 일시 입국[편집]


2003년 6월, 예비 장인의 상을 치르기 위해 딱 3일 동안만 문상만 하고 연예활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입국이 허가된 적이 있다.[16] 이때 그가 입국하는 현장에선 취재진과 스티브 유의 팬, 그리고 그의 입국을 반대하는 안티들 사이에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한편에선 그의 한국 방문 명칭을 놓고 논란도 벌어졌다. 일부에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쭉 한국인이었으니 귀국한 것이 맞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쪽에서는 그는 이미 확고히 본인의 의사로 미국인이 되었으므로 방한(訪韓) 또는 내한(來韓)이란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여하튼 상을 다 치르고 난 후 당연히 하루만에 출국. 현재로서는 이것이 스티브 유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머무른 시기가 되었다.


4.2. 2004년 이후[편집]


2004년, 14년 간의 연애 끝에 미국에서 살고 있던 여자친구 오유선(미국명 크리스티나 오)과 결혼했다. 주례는 하용조 목사가 맡았고, 하객은 3000명 정도가 참석했다. 연예계 하객은 김종국이 유일했는데, 원래는 용띠클럽 멤버들과 연예인들이 많이 참석할 예정이었다고 하는데 스티브 유 본인이 만류해서 결국 김종국만 오게 되었다고... 이때 연예인들은 스티브 유의 결혼식에 못 가는 대신 그에게 축의금을 모두 맡겼고, 축하영상에서는 유재석, 박경림, 조성모, 장혁 등 그와 친했던 연예인들이 축하를 해주었다.[17]

2005년, Mnet에서 그를 주제로 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유승준 99.8'을 제작한 바 있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급격히 악화, 결국 방송 1시간을 앞두고 기존의 프로그램을 재방송하는 식으로 대체편성되었다.

또한 중국 포털싸이트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독특한 국민정서"를 언급했다고 알려져서 어그로를 끌었다. 국민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만든 과정은 다 생략하고, 한국에서 활동 못 하는 이유가 독특한 국민정서 때문이라고 갖다 붙인 것. 그런 직접적인 표현이 들어간 기사는 전부 삭제되었고, 누가 말했는지 불분명한 내용의 기사만 하나 남아있다. 기사 링크

2006년, 득남하였다.

2007년, 6년만에 7집 앨범과 타이틀곡 'My World'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뮤직비디오 내용이 다소 묘한데 자신이 떠난 사이 다른 스타가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그 상황을 보며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복귀하여 다시 박수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앨범 판매 수익은 모두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사회로 환원된다고 스티브 유 본인이 밝혔다.

한데 하필이면 당시 현역병으로 입대하여 군복무를 막 마친 문희준의 자세가 언론을 통해 한창 화제가 될 시기였던 터라 조금은 잠잠해졌던 스티브 유의 반대 여론이 도리어 더 높아지는 기현상을 낳았다. 상황이 상황인 터라 한편에선 그의 입국을 거절하는 건 '외국인인 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9년 다시 한 번 입국을 타진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가기 싫어 안 간 것이 아니라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못 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한국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성룡의 후광을 얻기 위해 그의 신작 영화에 출연한다고 했으나 되레 성룡의 인기만 깎아먹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는데 성룡과 스티브 유가 주연으로 나온 대병소장이 한국에서도 흥행대참패를 기록하였다.

2009년 이후 특별한 대외활동을 하지 않던 스티브 유는 때마침 불어온 중국한류 열풍을 타고 중국에서 연예인 활동을 재개했으며 그곳에서 자신을 한류 가수로 소개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 내에 큰 논란을 낳았고 결국 이후부터는 자신을 그냥 가수라고만 소개하게 됐다. 또한 이 시기부터는 아예 중국 연예인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카더라. 관련 자료.

같은 해 중국에서 공연하는 동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올라왔으나 얼마 안 되어 저작권 문제로 삭제됐다. 심지어 무대시설과 음향시설 자체가 심히 안습했던 터라...

2009년, 2PM의 前 멤버 박재범마이스페이스 한국 비하 사건이 터진 이후 2010년 한 영화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어필하며 가슴이 아프고, 한 젊은이의 실수를 안아줘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며 박재범을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었다. 그러고 무진장 까였다.

2011년 8월 29일에 스티브 유가 중국의 트위터라고 할 수 있는 웨이보에 자신의 계정을 개설하면서 자기 국적이 한국이라고 표기한 것이 알려지면서 한국 네티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한편에선 이를 보고 스티브 유가 자신을 한류 가수로 포장하여 광고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2012년 11월 30일 홍콩에서 열린 MAMA에서 '성룡과 그 친구들'로 출연자 명단을 제출하고 시상자로 기습 등장하는 꼼수를 부린 스티브 유. 오랜만에 국내 취재진에게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었지만, 그때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10년간 말할 수 없는 역경을 겪었다는 식의 발언을 통해 그동안 중국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인정해주길 바랐고 실제로 당시의 취재진들은 그런 그의 행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만난 한국 후배 가수들은 그를 선배로서 존경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기도 했으며 똑같이 군 문제로 홍역을 겪었지만 이후 대응 방식의 차이[18]로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싸이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한 언론과 일부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으며 도리어 싸이와 비교되어 까이기까지 했다.

2013년 3월 4일 갑작스레 국내에 오고 싶다고 밝힌 기사가 떠서 어그로를 끌어모으고 있다.#

2013년에 중국 사극정충악비악비의 맞수인 금나라 장수 완안종필 역으로 출연했다. 이건 꽤 흥행했다.

2014년 1월에는 2014년 복귀 무산이 알려지자 한국이 그립지만 복귀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기사

2015년 5월 또 다시 복귀 의사를 밝히며 아프리카TV를 통해 심경을 밝혔다. 하지만 병무청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하다. 아래 참조. 그리고 메르스 사태 이후 잠잠해졌다.

이로 인해 스티브 유가 한국의 조기경보기라는 설득력있는 비아냥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어느 날 복귀하고 싶다고 하다가 국가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사건이 터지면 언플이 잠잠해지기 때문.

이후 스티브 유의 소송 4차 변론이 2016년 8월 12일 오후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에서 열렸다. 이날 변론에서 스티브 유의 대리인은 평등 원칙을 주장하며 과거 선택에 대한 송구와 후회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LA 총영사 측과 여전한 대립각을 세웠는데 스티브 유의 입국 가능 여부에 대해 법원은 9월 30일 선고를 내리겠다고 밝혔다. 스티브 유 9월 30일 입국가능여부 결론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스티브 유의 패소. 좀 더 덧붙이자면 원고(스티브 유)의 청구를 기각했다.스티브 유 1심 패소


4.3. 2014년 입국금지 해제 및 방한(訪韓) 시도[편집]


2014년에 한국으로 입국한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해당 기사에서 병무청이 스티브 유는 이미 35세를 넘겼기 때문에, 입국금지 해제는 법무부가 판단할 사항이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같이 언급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국내 여론은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과거 스티브 유의 팬이라 불리우는 팬층들은 "이제 10년도 지난 일이고 오빠 나이도 중노년에 가까워졌다. 청춘을 타국 땅에서 바쳐온 만큼 남은 인생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도록 정부의 배려를 요청한다"는 말을 했지만 그다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초 보도 기사에 나온 거랑 달리 병무청 관계자라는 이가 곧바로 검토된 사항이 아니며 해당 보도를 부정했다.(# 병무청 공식 입장) 병역의무기간도 35세가 아니라 40세까지라고 밝혔다. 다른 쪽에서는 스티브 유를 가짜 사나이라고 비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스티브 유와 같은 방식으로 병역을 회피한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그런 사람들은 멀쩡히 한국에 들락거리는데, 왜 스티브 유만 입국을 불허하며 희생양으로 삼느냐는 주장도 있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주장이지만 전형적인 피장파장의 오류라 할 수 있겠다. 우선 스티브 유는 그 인지도가 여타 병역 회피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컸으며, 때문에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 또한 압도적으로 컸다. 거기에 입대를 앞두고 일본 공연을 핑계로 지인의 보증까지 받으며 출국한 것은 자신이 가진 당시의 큰 공신력으로 국가를 기만한 행위이며, 그 만이 가능했던 일이다.

거기에 미국에서 한국을 자국민이 군복무 해서는 안 될 적국으로 본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제정신 있는 나라라면 마땅히 엄벌을 때리는 것이 가능한 형국이다. 따라서 다른 병역 회피자들과 스티브 유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차라리 다른 병역 면제자들도 스티브 유와 같이 엄중하게 대처하자는 주장하는 것이 옳다.

민방위를 포함한 모든 병역 의무가 해제되는 만 41세[19]부터는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법무부 장관의 허가가 있으면 입국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걸 허가해 주는 법무부 장관이 있다면 역풍은 단단히 각오해야 할 듯. 따라서 법무부가 어지간히 막장이 아닌 이상 입국 금지가 해제될 일은 없다.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스티브 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병역기피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시끌시끌한데 스티브 유에게 입국허가를 내려버리면 공식적으로 병역면탈 사례를 만들어버리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해 스티브 유의 입국금지 해제시 국가적으로 병역회피 방법을 그대로 선전하는 셈이 되어버리므로 결과적으로는 입국금지를 해제할 리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설령 대한민국이 모병제로 전환한다고 가정해도 그 동안 스티브 유에 대해 대중들이 느꼈던 배신감과 분노가 사라지긴 어렵기 때문에[20] 여러 이유로 입국 금지 해제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2016년 9월 30일, 서울행정법원은 비자발급에 대한 소송마저 패소(정확히는 위에서 말했듯이 원고(스티브 유)의 청구 기각) 판결을 내렸는데 그 이유가 똑같다. 국방의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게 된다는, 즉 병역기피 풍조의 만연함을 우려한다는 것이 골자다. 기사참고 이로써 삼권분립 기관인 입법, 행정, 사법부 모두가 하나되어 "스티브 유의 입국은 불가능하다"라고 확정해 버렸다.


4.4. 2015년 5월 19일 아프리카TV 심경 고백 인터뷰[편집]


2015년 5월 19일 22시 30분에 스티브 유가 홍콩에서 인터넷 방송으로 심경고백 방송을 진행하였다. 제작된 영상이나 기사는 편집을 하면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본 방송은 무편집 상태 그대로 생중계하기로 하였고 05월 19일 저녁 22시가 넘은 시각 스티브 유와 병역 기피 사건에 대한 설명이 담긴 짧은 동영상으로 방송을 시작하였다. 방송이 시작되고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스티브 유를 보며 일부의 사람들은 안타깝다는 의견을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이 켜져있는 줄 모르고 다 하고 나서 "시팍 이렇게까지 해야 해?", "개새끼들 시팔" 등등 욕하다가 방송이 아직 안 꺼진 거 보고 급하게 닫았다. 다음날 스탭간에 욕설로서 "대중들에게 한 이야기 아닙니다" 하고 사과 해명을 했지만 여론은 더욱 험악해졌다. 다음날인 20일 한 디시갤러리에서 '리허설'이라는 제목으로 방송 전에 카메라의 동선부터 생방송 중 나왔던 시청자들의 질문을 보여주며 답을 맞추는 사진이 올라와서 의혹이 일었다.


4.4.1. 소속사의 공소시효 드립과 병무청의 원천봉쇄[편집]


공식 소속사의 언급은 아니지만 디스패치의 기사를 따르면, 2015년 5월 아프리카 티비로의 복귀 예고에서 홍콩 현지 중계를 담당한 신현원프로덕션의 신현원 대표는 "공소시효 관련 영화를 준비하면서 스티브 유의 사례를 알게 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고 관계를 소개했다. 이어 "살인 공소시효는 25년인데, 이 기간 동안 범인이 도망다니면서 느낄 압박감, 죄책감을 감안해 죄값을 치렀다고 보는 것"이라며 "그런데 스티브 유에게는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용서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단어의 오용으로 논점을 일탈시키려는 행위로 공소시효 문서에서 보듯이 공소시효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용의자의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를 판단할 수 없어서 소추 및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스티브 유는 공소시효가 소멸된 게 아니라 해외 도피로 인한 공소시효 정지 상태다. 쉽게 말해 영구한 지명수배자. 즉, 공소시효 운운하는 순간 스티브 유의 자폭이 된다는 것. 윗 문단에는 입국금지라서 처벌이 안 된다고 적혀있으나 병무기피에 대한 처벌을 받는 조건으로 입국금지를 해제해 달라면 굳이 막지는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망 후 유해를 국내로 이송하는 것까진 막을 방법도 없다. 사망시에는 그 어떤 범죄라도 공소권 없음이 되기 때문에 기소가 불가능해진다.

이에 대해 2015년 5월 13일 한 연예 관련지의 병무청 인터뷰에서 병무청은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병무청 인터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본인 스스로 국적을 버린 외국인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도 없다. 법에 따라 영원히 국적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입국 금지 해제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또한, 그에 대한 처분이 일부 가혹하다고 보는 이들이 착각하는 부분 중 하나는 그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점이며, 본인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군대를 가지 않으려 스스로 국적을 포기한 사람이기에 13년이 지났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직도 스티브 유는 (본인을) 한국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스티브 유는 자신이 버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밝힐 자격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 따라서 스스로 결정해 외국인이 되었으면 처음 결정했던 그 마음 그대로 외국인으로 평생 살아가야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티브 유는 13년 전 자신이 했던 행위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시고 (…)" - 당시 병무청 관계자


5월 19일 법무부에서 '스티브 유의 입국금지를 요청한 것은 병무청이므로, 병무청장이 해제를 요청하면 입국금지가 해제될 수 있으며 또한 한국 국적 회복에 대해서도 본인 요청이 있다면 검토할 수 있으며, 만약 회복한 경우, 원래부터 한국인인 것처럼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는 기사가 떴으나 병무청에서는 즉각 '법무부에 확인한 결과 명백한 오보이며 통상적인 경우를 물어 대답했는데 스티브 유는 결부돼 나갔다. 중대한 사안이라 법무부에서 관련해서 직접 해명을 할 것이다. 스티브 유의 입국금지 해제와 국적회복은 불가능하다는 병무청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법무부에서도 입국금지 해제 및 국적회복을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실 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국적법상으로 병역기피 목적의 국적 이탈 및 상실자는 국적회복을 불가능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

국적법 제9조(국적회복에 의한 국적 취득) ② 법무부장관은 국적회복허가 신청을 받으면 심사한 후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에게는 국적회복을 허가하지 아니한다.

1. 국가나 사회에 위해(危害)를 끼친 사실이 있는 자

2.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자

3. 병역을 기피할 목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하였거나 이탈하였던 자

4.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법무부장관이 국적회복을 허가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하는 자


무엇보다도 싸이는 적어도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실복무 혐의가 드러나는 바람에 이등병부터 다시 복무해서 꽤 오랫동안 군대에 묶여 있었는데 스티브 유에 대해 공소시효를 논하는 것은 싸이에 대해서도 형평성이 맞지 않다.


4.4.2. 인터뷰 내용[편집]


파일:UBTO82L.png

아프리카TV를 통해 스티브 유의 인터뷰 내용이 공개되었다. 이하는 스티브 유의 인터뷰 내용 중에 개인사와 감정에 호소하는 내용을 제외하고, 위키에 상기 서술된 내용에 대한 반박을 위주로 요약한 것이다. 참고로 이 방송은 아프리카TV 역대급 시청자수인 15만명을 기록했다. 각종 중계BJ의 방 인원수를 다 합치면 20만도 넘는 시청자수이다. (이 기록은 감스트2018년 러시아 월드컵 중계로 35만명을 기록하며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1. 허리에 문제가 있었고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기에 소속사와 가족들은 수술을 하길 권했으나, 정작 본인은 약간의 불편감 정도만을 느꼈을 뿐이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방송 활동에 최선을 다해서 아픈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소속사에서는 허리 관리를 하지 않고 방송을 너무 열심히 한다며 차라리 아픈 모습이라도 좀 보이라고 했다고. 방송에서 군대에 꼭 가겠다고 누차 말한 것은 언론에서 자신이 허리 문제를 근거로 병역을 기피하려 한다는 주장을 했기에 이를 반박하고자 해온 것이다.

2. 병무청에서 '공익요원 6개월 및 업무가 끝난 뒤에는 연예 활동을 하는 것을 인정'해주는 특혜를 제공해준다고 한 적이 없다. 또한 병무청 직원이 보증을 선 것은 사실이나 이는 소속사에서 처리한 것으로 본인은 출국하기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직원이 자신과 동행하지도 않았다.[21]

3. 시민권 획득 절차는 가족이 진행하고 있었으며 2001년 10월 경에 1차 인터뷰 요청이 있었으나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 공연 일정은 시민권 획득을 위해 계획적으로 잡은 것이 아니며 2차 인터뷰 요청이 1월 경에 온 것을 아버지로부터 갑작스럽게 받았다.

4. 미국으로 간 것은 시민권 취득을 위해 간 것이 아니고 군대를 가기 전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기 위해 간 것이다. 미국에서 가족의 간곡한 설득 및 가족[22]과 소속사 직원들을[23] 위해서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다.

5. 기준상 만 38세까지 입대가 가능한 걸 안 스티브 유가 작년에 한국측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하였으나 관계자가 확인해본 결과 해당 기준은 80년생부터 적용되는 내용으로 76년생인 스티브 유의 병역 의무는 만 36세까지였기에 이미 의무기간이 지나버렸다고 한다.

스티브 유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세간에 알려진 '계획적인 병역 기피'는 사실이 아니며 본인은 군대를 가고자 하였으나 가족의 간곡한 설득과 소속사의 사정을 고려하여 시민권을 취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병무청에서 병역을 할 수 있게끔 선처해준다면 병역을 이행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인터넷과 현실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여론은 싸늘한 편. 애초에 스티브 유의 주장은 거의 다 '난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다' 수준의 변명 밖에 되지 못하며, 무엇보다 한 나라의 법을 위반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치고 국민 분열/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는 외국인[24]이 된 스티브 유가 '병역 의무 이행할 테니까 국적 회복 허락해주세요' 같은 거래 제안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위에 언급된 법무부 오보 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티브 유의 입국 금지는 이미 병무청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의 주장이 어느정도 맞다고 치더라도, 무려 13년 동안 나몰라라 하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병무청에 연락을 취했다는 것은 애초에 문제 해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인터뷰 말미에 그간 한국군 입대를 설득하는 아내의 얘기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얘기를 하고 말았다. 정작 본인은 그동안 스스로를 피해자라 여기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인터뷰 도중에 스티브 유가 2002년 이전에 한국에서 활동할 당시도 미국 영주권을 박탈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한국에는 6개월 씩만 체류하며 활동했다면서 '미국 영주권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 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는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발언으로 스티브 유와 비슷한 시기에 1년에 1개월 정도만 미국에 체류하면서도 미국 영주권을 유지했던 이들도 있다. 스티브 유가 한국에 6개월 미만 체류한 이유는 한국의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1990년대부터 이미 한국에서는 이미 미국 등 해외 영주권자들이 병역을 연기 받는다는 점을 악용하여 해외 영주권을 취득한 후 한국에서 병역을 회피하며 영리활동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해서 6개월 이상 체류하면서 영리활동을 하는 경우 군에 입대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스티브 유는 이 때문에 한국에 6개월 미만 체류했을 뿐이지 미국 영주권 유지와는 큰 연관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모두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4.4.3. 인터뷰에 대한 병무청의 입장[편집]


2015년 5월 22일, 병무청은 다시 입장을 발표한다. 2014년까지는 입영대상자였는데 작년에 입대 문의는 없었다는 것. 국민일보 기사

기사에 따르면 국적회복 허가를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면 38세부터 면제이기 때문에 작년에 문의했다면 충분히 기회가 있었다는 것으로 병무청은 “지난해부터 군대에 그렇게 가고 싶었다면 한국 법을 잘 아는 변호사를 만나 상의를 하는 것이 우선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2002년 이후 스티브 유가 병무청에 입대문의를 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또 스티브 유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정식 인터뷰를 요청해 한국 국적 회복이 가능한지 절차에 대해 문의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자, 법무부 측은 현재로서는 입국 인터뷰 대상이 아니며, 스티브 유가 출입국관리사무소나 법무부 대변인과 접촉한 사실도 없고 입국 금지 해제나 국적 회복도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병무청 역시 국내 입국 가능성은 없다고 못박았다. 스포츠조선 기사

게다가 스티브 유의 사건이 아직 병무청 관할이라면 병무청의 성격상 어떻게든 군복무를 시키고야 말아서 스티브 유가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 난 뒤 서로 깔끔하게 끝내는 쪽으로 모색하겠지만 문제는 이 사건은 이미 병무청을 떠난 지 오래이며, 현재 법무부가 쥐고 있다는 거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거짓말 논란이 계속 이어지자 27일 오전 10시 2차 방송을 감행하였다. 주요 내용은 법무부와 병무청에 생방송으로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것으로, 지난 방송에서 스티브 유가 발언한 '작년에 한국쪽 관계자에 문의를 했으나 무산됐다.'에서 '한국측 관계자'가 병무청이나 법무부인지를 확인하고 사실 여부를 밝히는 것이다. 다만, 스티브 유가 직접 출연하진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는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 중이다. 스포츠동아 기사


4.4.4. 인터뷰 이후[편집]


인터뷰가 끝나고 일주일도 안 돼서 출입국사무소에 접촉 및 정치인 건드리는 발언을 하는 중. 2015년 5월 22일 출입국사무소에 접촉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간스포츠 기사

이 인터뷰가 방송되기 이전에 이재명 성남시장이 스티브 유에 대하여 비판적인 발언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런데 방송 이후 스티브 유는 이재명도 군생활을 하지 않았다면서 자신과 이재명을 동급으로 취급함과 동시에 마치 국가가 자신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있다는 듯한 발언을 했다. 신문고 기사

그러나 이재명이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은 그가 경증이지만 엄연한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어릴적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프레스에 왼팔을 찍혀 왼팔에 6급 장애를 얻었다. 복지카드[25]까지 증명했고, 평생을 왼팔이 비틀어진 채 살고 있다. 해럴드경제 기사 그는 신체검사에서 장애가 있는 몸이라는 사유로 정당하게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오히려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한때 이재명 시장은 진보층에서 대단한 추앙을 받던 인물인데, 그 인사가 친히 대한민국을 버린 자, 대한민국 땅 밟지 말라고 일갈했다는 점도 중요 포인트.

애초에 군대를 쌩까고 안 간 것과, 갈 수 없어서 못 간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지라 사실상의 물타기 논리나 다름없다. 아니, 물타기만도 못한, 뭣도 모르고 필요한 사실 하나만 찝어 공격하는 것이다. 게다가 병역의 의무는 없어도 국방의 의무는 장애인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국민이 갖고 있다. 징병대상이 아닌 여성이나 장애인이라도 간첩 의심에 대해 신고하는 등 병역 외에도 국방에 기여할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에 병역기피 풍조를 만연하게 해 국방력을 약화할 소지가 있는 위험외국인에 대해서는 국방의 의무자이자 국방의 수혜자인 대한민국 국민이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스티브 유는 아니지만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신현원프로덕션의 현장 스태프들이 방송 종료 이후 마이크가 안 꺼진 상황에서 욕설한 게 여과없이 방송되어버렸다.[26] 신현원PD는 사과문에서 스태프들의 욕설이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라고 했다. 스포츠경향 기사

JTBC 관련기사를 보면 소송을 통해 승소할 경우 입국금지가 해제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승소가 힘들다는 의견이 대다수며, 한국 활동을 위해서는 소송을 걸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스티브 유, 다시 일상으로..중국 예능 '전능극한왕' 출연




4.5. 2015년 11월, 비자발급 거부 취소소송[편집]


  • 1심 사건번호: 서울행정법원 2015구합77189
스티브 유는 2015년 9월 주로스엔젤레스 대한민국총영사관에 한국 비자(F-4, 재외동포)[27] 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하였고, 동년 11월 18일, 이를 거부한 주로스엔젤레스 대한민국총영사를[28] 상대로 비자 발급 거부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스티브 유의 논지는 '자신은 재외동포이므로 F-4 비자 발급 거부가 부당하다'는 것. 이 때문에 여론은 당연히 더욱 악화되었고 법조계 종사자들의 의견으로 미루어 볼 때 승소 가능성도 매우 희박한 상황.

JTBC의 보도에서는 승소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병무청은 여전히 단호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판결은 법원이 내리는 것이고, 확정 판결이 내려진다면 병무청도 별 수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입국만 허용할 뿐 경제활동이 가능한 취업 비자까지는 안 내줄 가능성이 크며, 설령 취업비자까지 나오더라도 징집 연령을 넘기고야 소송을 제기한 점 때문에 더욱 냉랭해진 대중의 따가운 시선 속에 국내에서 연예활동을 재개하긴 힘들 것이다. 그리고 법원이 승소 판결을 내릴 경우 만만치 않은 후폭풍을 감당해야 하니.

2015년 12월 15일 방송된 TV조선 '솔깃한 연예토크 호박씨'에서는 스티브 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이상민이 "최근에 스티브 유를 만난 측근을 통해서 얘기를 들었다. 그 분 말로는 스티브 유가 지금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는 것은 맞다고 하더라. 그런데 굳이 한국을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 하나라고 하더라. 한국에서 연예 활동하지 않겠다. 단, 아이들한테..."라고 전했다.[29]

4.5.1. 2016년 9월, 1심 패소[편집]


당연하게도 서울행정법원은 스티브 유의 이 소송에 대해 패소 판결을 내렸다.

지금 65만명의 사람들이 국가를 방위하기 위해 군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데 만에 하나, 군 복무를 하지 않기 위해서 대한민국 국적을 버린 스티브 유가 국내에 들어올 경우 병역 기피 풍조가 만연하는 등 군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한민국 국군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티브 유의 입국은 허락하기 힘들다. 양해 바란다.


이 내용을 골자로 2016년 9월 30일 서울행정법원은 스티브 유의 비자발급 거부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리상 병역법 제94조를 위반하였으며 출입국관리법 제11조 제3항에 의거 입국 불허를 한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병역회피 목적으로 외국 국적 취득 하여 국내 입국한 남성이 병역법으로 기소되어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강제추방된 사례가 있다.

게다가 소송 진행 당시 스티브 측이 제시한 법리상의 오류가 뚜렷하고 재판 진행 당시패착들이 보였다. 참고1, 참고2.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는지 또 입을 열었지만 이제까지 알려진 내용의 재탕 & 자기 변명에 불과했다.


4.5.2. 2016년 10월, 항소[편집]


그리고 10월 17일,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했다. 스티브 유는 "무슨 괘씸죄의 형벌이 15년씩이나 가는지 이해를 못하겠으며, 다른 국적포기 병역대상자 1만 7천명과 비교해서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다" 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스티브 유가 간과한 게 있다면 단순 괘씸죄가 아니라 병역법을 건드린 게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스티브 유가 대한민국 영토에 입국하게 되면 그동안 받지 않았던 병역법 위반에 대한 처벌도 받아야 하는데 이 문제 역시 스티브 유가 귀화한 미국과의 외교적 문제 때문에 상당히 많이 꼬여 있다. 또한 다른 국적포기 병역대상자들은 편법이었을지는 몰라도, 모두 적법한 절차로 국적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만약 스티브 유에게 한국 입국을 허용하는 대신 그동안 처벌하지 않았던 병역법 위반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되면 스티브 유는 자신이 미국인임을 강조하며 또 처벌을 회피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패소 직후부터 항소겠다는 뜻을 보였던 터라 그의 이미지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30].

결과를 논하자면 병역의 의무와 너무 얽혀있어서 스티브 유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매우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만약 내가 대한민국의 국방장관이라면? 이것 하나만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게다가 동아시아 상황이 무슨 2번이나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되고 평화가 유지되는 유럽연합 국가들처럼 군축까지 가능한 여유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당장에 북한이라는 주적이 바로 머리 위에 도사리고 있는 형국이며, 설령 통일이 된다 해도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국제사회에서 내로라 하는 국가들[31]을 이웃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인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곳이다.

이런 판국에 상기한대로 군 기강에 큰 악영향을 미칠 인사를 순순히 들여보낸다면... 당사자의 정치적 생명이 끝난다. 즉, 괘씸죄가 아니라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스티브 유를 용서해주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티브 유는 그런 국방부의 현실을 모른 채 자신의 행보를 괘씸죄라 착각하고 있다.

결국 2017년 2월 23일 항소가 기각되었고 이후 2017년 3월 10일,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4.5.3. 2017년 4월, 대법원 심리 시작[편집]


스티브 유가 상고장을 제출함에 따라, 4월 13일부터 대법원의 심리가 시작된다. 관련기사 대법원의 판결은 2년이 지난 2019년 7월 11일에 있을 예정이다.

4.6. 2018년[편집]



4.6.1. 1월 부친 방광암[편집]


부친이 자기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서 방광암[32]에 걸린 것 같다며, 자신의 일과 상관없는 가족한테 생긴 일로 불쌍한 이미지를 만들어 가족까지 팔아 동정심을 구하는 등 뻔뻔한 행태가 여전하다.

4.6.2. 11월 복귀 무산[편집]


유승준, 11년 만의 韓 복귀 어렵다..국내 음원 발매 '올스톱' [단독].

스티브 유는 11월 22일 11년 만에 새 음반을 발표하고 복귀할 계획이었으며 이에 따라 11월 21일에 티저를 공개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그냥 냉담한 정도가 아니다. "지겹다", "스티브 유에 대한 기사를 언제까지 봐야 하냐" 정도는 기본이고, 심한 경우 스티브 유 저 XX 잡히기만 해 봐라, 내가 교도소에 수감될 거 각오하고 쳐 죽여버리겠다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라서 음원을 발매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 이렇게 되자 신보의 국내 발매는 불가능해졌으며 복귀는 무산되는줄 알았는데...


4.7. 2019년[편집]



4.7.1. 앨범 발매[편집]


결국 새로운 신곡발표했지만 음원사이트나 언론들은 논란을 의식했는지 딱히 알리지 않아 결국 금방 묻히면서 차트 하위권에만 머물렀다.
논란이 되는 부분과는 별개로 음원사이트, 유튜브 뮤직비디오 등의 댓글에선 음악 자체의 평가는 호평이 많다.


4.7.2. 이후 행보[편집]


2019년 3월 18일 자신의 SNS에 영어로 "내가 쓰러졌을 때 나를 걷어찬 당신, 내가 일어나지 않기를 빌어야 할 거야"라는 글을 올렸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격성 글로 보이며 당연히 이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다.


4.7.3. 2019년 7월 11일, 대법원 판결[편집]


대법원에서 비자거부가 위법하다는 취지로 다시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파기 환송한 이유는 비자발급 거부 처분에 행정절차를 위반한 잘못[33]이 있다며 항소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결정했다.[34] 물론 이 판결만으로 비자 발급이 가능하게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소송 전 돈벌이를 위해 F-4 비자를 신청했다는 게 명백한 이상 섣불리 입국을 받아줄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된다.


4.7.4. 대법원 판결 이후[편집]


CBS서연미 아나운서가 스티브 유의 병역기피를 비판하는 발언했다가, 스티브 유가 오히려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서연미 아나운서에게 괘씸죄를 물을 거라고 적반하장식으로 나가고 있다.노컷뉴스 기사

한편, 파기환송심 첫 재판 기일은 9월 20일로 예정되어 있다.#

스티브 유의 입국금지청원에 대해 청와대가 "병역을 기피한 한 연예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병역 의무를 다해 온 대다수 대한민국 남성들의 헌신·자긍심에 대한 존중의 문제”라며 “반칙·특권이 없는 병역문화 조성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2019년 9월 경, 그는 '군대에 가겠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기 감성팔이를 시전했다.#

스티브 유는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방송 일이 끝나고 집 앞에서 아는 기자와 만났는데 ‘승준아, 너 이제 나이도 찼는데 군대 가야지’ 해서 ‘네, 가게 되면 가야죠’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고 주장했고, "그러자 기자가 ‘해병대 가면 넌 몸도 체격도 좋으니 좋겠다’고 해서 ‘아무거나 괜찮습니다’고 답했더니 다음 날 스포츠 신문 1면에 ‘유승준 자원입대하겠다’는 기사가 났다"고 주장하며, 기자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물론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스티브 유가 군대 가겠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저 한두번이 아니다. 당장 스티브 유 병역기피 사건 문서를 봐도 방송 등에서 스스로 '남성이라면 군대에 가야한다', '(병역을) 따르려고 하고 있다' 등의 발언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유명세를 얻기 위해 스스로 군대에 가겠다는 거짓말을 수도 없이 해오다가, 스스로 병역을 걷어찬 후, 결과가 돌아오자 거짓말로 애먼 기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파렴치한 행동을 벌이는 것.

0:19~0:29 : 드디어 제가~ 유튜브 채널을? 오픈했습니다! 왜 시작했지...?ㅠ... 아 장난이고요ㅋ

0:36~0:55 : 아 주위에서 말리는 분들도 아주 많이 계시고요. 주위에서... 아주... 짜... 기대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제가 여러분과 함께 소통하기 위해서 아 이렇게 Humble Beginning 아... 겸손하게... 여러분 앞에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나왔습니다.

0:55~1:17 : 여러분 그 이전 것은 모두 다 잊어버리시고요! 아 이 채널을 통해서 이제는 웃고, 감사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아 제가 이 채널들을 통해서 운동하는 모습들이나, 아니면 제가 살아가는 모습들, 아 그리고 여러분께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어떤 어.. 어.. 기.. 기회..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스티브 유 공식 채널 첫 소개 영상


2019년 10월 19일에는 유튜브 계정을 만들어 과거는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의 구독자를 모으고 있으며, 10월 29일에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악플러라고 도발하는 동시에 헬스로 근육질이 된 몸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기획고소를 유도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

파기환송심에 대한 선고기일은 오는 11월 15일에 있을 예정인데, 이는 2차 변론기일을 잡지 않고 바로 선고가 내려진다.#



4.7.5. 파기환송심 선고(11월 15일 승소)[편집]


파기환송심이 11월 15일에 진행되었으며 결국 승소했다지만, 이것은 '비자 거부 과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영사관에서 '다른 이유'를 근거로 다시 비자 거부를 할 수는 있다. 문서 참고.


4.8. 2020년[편집]


1월 30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묻히긴 했지만, "인생 살면서 실수 할 수 있다"면서 또 다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등에 변명 동영상을 다시 올렸다. 스티브 유의 조기경보기 드립을 아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언플하는 거 보니 한국은 안전한가보다"라는 드립이 나오고 있다.

5. 해외 활동[편집]


성룡이 제작·각본·주연을 맡은 영화 '대병소장(大兵小將: Little Big Soldier)'에 출연했을 때에도 그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는 여전했고 결국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채 영화는 스크린 뒤편으로 사라졌다. 영화 개봉에 앞서 국내 영화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스티브 유는 "이전에 갖고 있던 경험과 스스로에 거는 기대까지 다 내려놨다. 이전의 나를 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벽하게 신인의 자세로 시작해야 한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된 2PM박재범에 대한 말도 했는데 "일단 참 마음이 아팠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한 젊은이의 실수를 안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면 실수도 할 수 있다. 기회를 주면 훨씬 더 크게 성장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병역 사태와 관련, 8년 전 자신을 비난했던 여론에 대해 "그 정도로 크게 사회적 파장이 일어날 지 몰랐다. 시민권을 따고 나서 바로 한국에 들어와 7집 앨범을 내려고 했다. 왜 내 마음이 변했는지 충분히 설명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입국 금지를 당하게 됐다"며 당시의 상황을 해명했다.
또 "한국에서 다시 활동하고 싶다. 방송을 보기만 해도 내가 예전에 거기 있었기 때문에 가슴이 참 많이 뜨거워진다. 아직도 한국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가서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다. 다만 국민 여러분께 용서 받고 싶다"고 용서를 구했다.

대병소장의 경우 중국 현지에선 1억 위안을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했는양 기사가 나오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사실 1억 위안이 수치는 개봉 2주차에 1억 위안 돌파라는 이야기고...한국돈으로 170억 원 정도 된다. 그 정도면 최종으로 약 2억 위안 정도는 될것으로 보이며, 한국돈으로 350억 정도란 이야긴데...성룡이라는 이름으로 따지면 흥행이 그럭저럭인 셈이다. 게다가 해외가 실패라서 전반적으로 보면 상업적으로는 실패에 가깝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의 흥행은 성룡 영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참패를 기록했다. 이는 그야말로 성룡의 굴욕이라고 할 만한 결과였다. 관련 기사

이는 역대 한국 성룡 영화 관객 동원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는데 성룡이 주연을 맡은 극장 개봉작 중 전국 관객 10만도 모으지 못한 영화는 이 대병소장이 처음이었다. 차이니즈 조디악이 다시 10만명 이상 넘었으나 예전만 못한다. 게다가 성룡과 제이든 스미스[35]가 주연으로 등장한 베스트 키드는 30만도 못 채웠다. 그렇다고 단순히 스티브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대병소장의 해외 흥행을 보면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망했으며 가라테 키드의 해외 흥행 또한 한국에서만 흥행을 못한게 아니라 스웨덴, 우크라이나, 폴란드, 터키등에서도 흥행 실패를 하였으며 중국은 평가가 좋지 않았고 박스오피스 집계 기록도 없다. 해외 국가들 중에서도 2천만달러 이상을 기록한 나라가 한곳도 없기 때문에 한국만 망하게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해외 흥행이 전부 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베스트 키드는 저예산 영화(제작비 4천만달러)라서 해외 흥행을 제외 하더라도 미국 흥행(1억 7천 8백만달러)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 속편 제작을 하고 있다. 요악하자면 스티브 유가 한국에서의 흥행에 영향에 미쳤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 뿐만 아니라 스티브 유를 모르는 해외 국가에서도 흥행이 기대 이하였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스티브 유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 취권(1979): 서울 90만(국도극장 1개관)
이 흥행은 당시 역대 흥행 1위 격인 초대박 흥행이었다.
지금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당시 기준으로 20만은 말 그대로 대박 수준이다.
  • 홍번구(1995): 서울 30만
성룡의 할리우드 성공적 진출작. 이전 글에서는 그냥 진출작이라고 나왔으나 이미 성룡은 80년대에 프로텍터를 비롯한 영화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흥행이나 평은 참혹했다. 버라이어티 지로부터 아시아에서 온 D급 배우라고 비아냥을 받았으나 11년 뒤 홍번구가 미국에서 3239만 달러 대박을 거둬들이며 버라이어티 지는 그 D급 배우가 이젠 A급으로 돌아왔다라고 호평했다.
  • 폴리스 스토리3(1996): 서울 35만
1996년 구정 연휴에 개봉했다. 은행나무 침대와 함께 설 연휴 최강자로 군림할 거라는 예측이 대세였다.
  • 턱시도(1998): 서울 33만
  • 러시아워 2(2001): 전국 76만
  • 턱시도(2002): 전국 170만
  •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2005): 전국 47만
  • 러시아워 3(2007): 전국 80만
  • 포비든 킹덤(2008): 전국 100만
  • 대병소장(2010): 전국 9만
  • 베스트 키드(2010): 전국 29만
  • 차이니즈 조디악(2013): 전국 31만

파일:external/www.imaeil.com/20130218_144936000.jpg

차이니스 조디악에 출연한 스티브 유.

이후 경한 2(硬漢2奉陪到底)에 악역으로 출연, 개봉 10일만에 6천만 관객을 기록했다고 기사가 떴으나 결국 오보로 판명났고 <중국영화보>에 의하면 약 40만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고 한다.#[36]

2012년에는 성룡의 용형호제 3편 격인 12생초(차이니즈 조디악 Chinese Zodiac Heads)에 권상우를 비롯한 다른 한국 배우들과 같이 나올 예정이라고 했으나... 출연자 명단에는 보이지 않는다.

맨 오브 타이치(2013)라는 키아누 리브스가 첫 감독을 맡은 영화에 출연했다. 성룡에 이은 키아누 리브스의 실수가 될 듯싶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중국 흥행망했어요 수준이라고 한다. 키아누 리브스가 실제로 이 영화로 커리어에 타격을 입었다. 2014년에 존 윅이란 영화가 호평받고 있으니 다시 부활할지 관심 집중인 상태다.

스티브 유의 성룡 영화 두편의 정확한 흥행 수치는 찾기 어려우나 차이니즈 조디악 같은 경우 최근 성룡 영화 중에서 가장 대박난 영화이지만, 대병소장은 외국 흥행은 망했고 중국 흥행에서도 그럭저럭이다. 차이니즈 조디악은 중국에서 8억 위안, 한국 돈으로 약 1400억원 내외의 극장매출을 올렸고, 역대 랭킹에서도 10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대박이지만, 대병소장은 최종 약 2억 위안 내외의 흥행으로 나쁘지는 않으나 성룡을 생각한다면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그가 성룡 영화 흥행의 큰 변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국내 흥행만으로 따지자면 성룡 영화가 나오면 의리로라도 극장에 들어가던 골수 남성팬들의 이탈을 가속화시킨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개봉한 성룡 영화 드래곤 블레이드는 아예 홍보물 전반에서 스티브 유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꽁꽁 감추었다. 그는 비중있는 단역 정도로 짧게만 출연했으며, 이와 상관 없이 이 영화는 한국에서 흥행에 실패했다.

[1] 현재의 서울 송파구 잠실동, 그 당시 잠실은 서울 강남구에 속했다가 이후 강동구로 편입되었고 1988년 송파구 분구와 함께 송파구에 편입되었다.[2] 참고로 제19대 대통령 선거바른정당 후보로 나섰다가 4위로 낙선한 정치인 유승민과 같은 항렬이다. 유재석의 손자 항렬.[3] 2006년과 2010년에 득남, 2018년 10월에 쌍둥이를 득녀했는데, 장남과 쌍둥이 자매의 나이 차이가 상당하다.[4] 공교롭게도 셋다 당대 최고 인기예능프로그램인 출발드림팀의 에이스활동을 했다. 셋 다 운동을 특출나게 잘했기 때문. (단, 임창정은 배우라 영화활동과 가수활동을 병행했기에 꾸준히 나오지는 못했고, 가수활동 시기에만 나왔다.) 여기에 전진과 김종국을 포함해 드림팀에서 무술인 이미지의 배우 이상인 시대를 지나 가수 에이스 전성기 시대를 만든 인물들. 중간에 배우 박용하의 에이스시기도 잠깐은 있었지만.[5] 40초 부근에 스타크래프트 마린의 'gogogo' 효과음이 샘플링되는 등, 시류를 상당히 잘 타고났다.[6] 실제로 그 당시의 스티브 유는 동북아시아 최고로 손꼽히는 춤꾼이라 평가받기도 했었다.[7] 당시 현재 20대 후반에서 30대에 해당하는 남자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인기원탑이었던건 자명하나, 여자어린이들과 청소년들도 학교장기자랑에서 SES 핑클 같은 인기여자가수들만 따라하는 것이 아닌, 유승준의 가위 춤을 추는 경우가 엄청 흔했으니 말 다했다.당시의 스티브유는 여자어린이들한테도 인기가 역대급으로 좋았다 HOT팬들과 유승준팬들이 학교에서 대놓고 싸울 정도. 유승준 노래와 흉내를 개인기로 삼는 연예인들도 많았다. 당시 예능 단골 유승준 흉내 드립은, 유승준의 노래 '열정' 도입부에 나오는 영어가사를, 한국말처럼 바꾼 '김밥에 김이 없대'.[8] 이후 후술할 사건으로 인한 부득이한 하차 이후 그의 공석은 이효리가 꿰차게 된다.[9] 당시 방송가에서 주로 사용하곤 했덩 전성기의 스티브 유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를 한 줄로 표현한 캐치프레이즈였다.[10]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호칭자체의 원조는 노동운동가인 전태일 열사, 그 시기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홍경인 주연의 영화가 개봉했었다.[11] 현재 아내인 크리스티나 오(한국명 오유선)와 무려 그가 데뷔하기 7년 전인 1990년도부터 교제 중에 있었고 그가 국내 활동 공백기 동안에는 영주권 유지를 위해 미국에 머무르곤 했기 때문이다.[12] 다만, 당대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와 관련된 잡음이나 루머가 존재하긴 했는데 그가 로스앤젤레스한인 갱단 출신이라는 루머였다. '코리안 프라이드'라는 갱 조직으로서 1992년 초반에 결성되었고 1990년대 중반 전성기였으나 이후 더 거대한 세력의 아시안 프라이드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그가 갱단 소속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13] 당시 음악캠프는 순위제를 시행하지 않았다.[14] 저 시절은 출산율 100만을 넘기던 시절에 태어난 세대들이 군대에 갔을 90년대 초반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출산율이 (현재에 비하면) 비교적 높았을 때 태어난 세대들이 군대에 갔을 때였기 때문에 공익을 가는 것이 2010년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시절이기도 했었다.[15] 실제로 2015년 GMTV라는 케이블 채널에서 가요톱10을 재방영했을 당시 그가 출연한 일부 회차가 건너뛰어진 채로 방송되었다. 물론 또 다른 개객끼로 인해 건너뛰어진 회차도 있지만 영턱스클럽, 코나 등 다른 가수들에게도 민폐다! 다만 도전천곡 등 일부 프로그램에서는 다른 출연자가 그의 곡을 부르는 장면이 가끔 나왔다.[16] 이때 법무부는 그에게 C-3(단기종합) 비자를 발급해주었다.[17] 이때 일화가 있는데, 유승준의 결혼식을 다녀온 후 공격적으로 몰아붙인 네티즌과 기자들을 향해 김종국이 "약속했습니다. 친구 결혼식에도 못 갑니까?"라고 단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18] 싸이도 병역으로 인한 홍역을 치르긴 했지만, 산업기능요원 복무 후 적발되었고 법의 판결에 군말없이 받아들이며 다시 현역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욕을 크게 먹진 않았다.[19] 병역법에서의 OO세는 생일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태어난 해만을 기준으로 하므로 스티브 유 기준으로는 2017년 1월 1일 이후이다.[20] 상술했지만 그의 사회적인 영향력도 당시엔 매우 컸으며, 입대를 앞둠에도 지인의 보증까지 받아가며 출국을 할 수 있었던건 그였기 때문에 이런 특례가 가능했던 것이다. [21] 재밌는 것은 병무청 직원이 보증을 섰고 결국 병무청 직원이 징계를 받았다는 루머가 사실처럼 퍼져 있었는데, 위 인터뷰에서 보여지듯이 스티브 유 본인조차 이 루머가 사실인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본인이 보증을 요구한 사실이 없고 소속사에서 처리한 것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후술하는 병무청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애초에 병무청 직원이 보증을 서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고, 실제로 보증을 선것은 병무청 직원이 아닌 스티브 유 측 지인이었다. #관련기사 [22] 20살때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23] 소속사의 수입원이 본인밖에 없었다고 하며 이미 6집과 7집의 출범이 계약 상에 잡혀있었다고 한다.[24] 스티브 유의 병역기피는 대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을 넘어 한 나라의 군법을 뒤흔들 정도의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런 이를 다시 들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어 국가의 이익을 해칠 수 밖에 없다.[25] 장애인등록증. 지하철 무임승차권을 받을 수 있는 그 카드다.[26] 잘 들어보면 스티브 유의 목소리와 다르며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신현원PD프로덕션의 스태프 목소리였다. 어찌됐든 이로 인해 진정성 문제로 결국 여론이 돌아섰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방송 직후 신현원PD의 사과.[27] 선거권을 제외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노동 및 몇몇 금지된 직종 이외에서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28] 기본적으로 모든 대한민국 비자의 발급권자는 법무부 장관이지만, 해외공관에서 발급하는 비자의 심사 권한은 법무부 장관으로 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외교공관의 장(대사, 영사 등)이 가지고 있다. 행여 법정 공방 끝에 비자가 발급받더라도 국내 각 공항에 있는 대한민국 법무부의 입국심사대에서는 입국이 거부될 수 있다. 비자 발급과 입국허가는 별개의 절차다.[29] 물론 이 부분은 개인에 따라 다른거니 납득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차피 그렇게 한국에 들어와봐야 대놓고 거리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을테고 대체 어떤 부분에서 떳떳하다는 것인지 납득이 안 간다는 사람도 있다. 굳이 해석해 보자면 아이들이 자기 가족의 원래 고향인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궁금해 하고 가보고 싶을 수 있는데, 아버지와는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 이유를 사실대로 말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떳떳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것도 아이들이 어릴 때 얘기지 나이가 들면 다 알게 될 사실이고, 첫째가 벌써 중학생이다. 인터넷만 찾아봐도 얼마든지 사실대로 알게 될 것인데, 진작에 처벌 받고 입영해서 용서받은 게 아닌 이상 이제 와서 어떻게 하든 떳떳할 수 있을리가 없다.(사실 그렇게 해도 저지른 게 없어지진 않으므로 떳떳하긴 어렵다) 어차피 자식들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믿을 테니 적절히 말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해서 될거면 애초에 한국 방문만 가능해진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다. 뭐 입국 금지라는 게 보통 사람은 당할 일이 없으므로 그것만 없으면 사실을 잘 모르는 아이들이 그나마 아버지가 범죄자라는 직접적인 인식은 덜 할 수 있다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아이들이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만 살았으므로 정확한 정보를 알기 힘들기도 하고 입국 금지만 없으면 그냥 오해에서 비롯된 거라고 얘기하면 믿을 수 밖에 없긴 하다. 다 추측이지만.[30] 설사 그럴 가능성은 진짜 나노급이지만, 어찌되어 연예계에 복귀하더라도 엄청난 악플이 그를 기다릴 것이다. 조금만 이상하다는 행보만 보여도 엄청 까내리는게 대한민국 연예계인데 스티브 유 같이 의도적으로 대한민국 병역법을 위반한 인물은 그보다 더 최악으로 까내릴 가능성이 무척이나 크다. 신정환 참조.[31] 여기에 나열된 국가들 중 두 곳이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강해진 상임이사국이고 일본은 전 추축국에 주변국 반대가 심해서 떨어지고 있을뿐 계속 상임이사국에 들어가려는 국가다.[32] 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방광암은 스트레스랑 전혀 관련이 없다.[33] 단순하게 거부가 아닌 명백한 사유를 적용하라는 뜻이다.[34] 서울고등법원에서의 재판을 다시 진행하라는 것이다.[35] 윌 스미스의 친아들이다.[36] 또한 경한 2에서는 스티브 유보다 칠협오의의 주인공인 초은준(焦恩俊), 유엽(劉燁), 장쯔린(張梓琳) 등이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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