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섭

덤프버전 :

파일:external/www.jangheung.go.kr/805_body_1_80.gif

丁明燮
1910년 2월 12일[1] ~ 1997년 2월 25일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2], 호는 남극(南極)·불휘(不輝)이다.

2. 생애[편집]


1910년 2월 12일 전라남도 나주군(현 나주시)에서 아버지 정남호(丁南皓, 1885. 3. 29 ~ 1938. 1. 2)와 어머니 탐진 최씨(1883. 12. 3 ~ 1977. 7. 7)[3] 사이의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고등보통학교(7회)와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주오대학 대학원을 수료했다.

8.15 광복미군정기 때부터 전라남도 해남군, 장흥군수, 영광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전라남도 나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무소속 서상덕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6년 대한민국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7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국회에서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9년 자유당 전라남도당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경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시에는 전남도당 위원장으로 있었지만, 부정 선거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나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64년 원내교섭단체인 삼민회(민주당, 자유민주당, 국민의당) 원내총무로 선출되었다. 1965년 통합야당 민중당이 창당하자 민중당에서 교통체신위원장 및 당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호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호범의 국회의원직 상실(대법원 선거무효판결)로 치러진 1969년 재보궐선거에서도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이호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대흥산업 회장, 호남융림사 대표를 지냈다.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이듬해인 1981년 민주정의당 지도위원이 되었다.

1997년 2월 25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둘러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09:35:32에 나무위키 정명섭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음력 1월 3일.[2] 사간공파(司諫公派) 26세 ○섭(燮) 항렬.[3] 최도현(崔道鉉)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