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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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27대 법무부 장관.
2. 생애[편집]
1921년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1]#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7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며, 1945년 4월 일본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해 1946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근무하면서 검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4.19 혁명 이후 1960년 9월 서울지방검찰장에서 물러나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 1월 중앙정보부 국내담장 차장에 임명되면서 관료로 복귀하였다. 1973년 8월 이후락, 이철희, 김기완과 김대중 납치 사건을 지휘하였고, 1973년 10월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같은 고문을 통한 간첩조작 사건에 관여하였으며 1973년 12월 제13대 검찰총장으로 영전하였다. 1974년 검찰총장으로서 중앙정보부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 2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관여하였다.
1975년 12월 제37대 내무부 장관으로 영전하였다. 내무부 장관 재임 중이던 1976년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을 준공[2] 하였는데 특이하게도 명패에는 기관명이나 건축가의 이름이 적히는 반면 내무부 장관 김치열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1978년 12월 법무부 장관이 되어서 1979년 12월까지 재임하였다.
5.17 내란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로부터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중앙정보부에 연행당해 조사를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2003년 소송을 통해 1,000억 원대의 부동산을 되돌려 받기도 했다.
3. 여담[편집]
-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직후 직원들과 안면을 익힐 겸회식을 가졌는데, 이때 한 초임 직원이 "장관님의 조상이 일본 분이라는 게 사실입니까?"라는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도 남의 집안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데, 지금보다 더 분위기가 경직되고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반일감정까지 남아있던 당시로서는 거의 패드립으로 받아들여질 말이었다. 그러나 김치열은 "맞아. 근데 갔다가 돌아온 거지."라고 대답하며 회식자리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단다. 김치열 본인도 껄껄 웃었다고.
-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10.26 사건에 관해 보고받고는 "차지철 그 기고만장한 새끼가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라며 길길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럴 법도 한 게,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 말 즈음부터 여러 명의 2인자를 길러 서로를 견제한다는 원칙을 깨고 차지철을 집중적으로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 김충선은 후손들에게 8대까지 출세하지 말고, 자신이 죽은 뒤 350년이 지나면 넓은 세상으로 나가도록 후손들에게 당부했는데, 300여 년이 지난 뒤 김치열이 법무부장관이 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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