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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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비슷한 종실 출신 관료이자 친일파에 대한 내용은 이재극 문서 참고하십시오.
조선의 왕족,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관료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도세자의 서3남 은전군의 양증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손자로 아버지는 완평군이다.
1891년(고종 28년) 당시로서도 꽤 이른 나이였던 18세에 증광시[3] 에서 진사에 급제하고, 1년 뒤 문과별시[4]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좌비서랑[5] 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10월 명성황후의 장례를 책임질 종척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아관파천 당시 물밑에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을 도왔다.
다른 종친들보다 나이가 비교적 어려서 그런지 조선국 시절보다는 대한제국 시기에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898년(광무 2년)에는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전작례[6] 와 작헌례[7] 때 축문을 읽어 상을 받았고 1899년(광무 3년) 8월, 시강원 부첨사[8] 역임 중에는 일본의 황족이 한국을 방문할 때 맞이했다.
1899년(광무 3년) 9월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았다. 황제의 4대손은 황족의 지위를 받는다는 예에 따라 의양도정(義陽都正)에 봉해졌다가 2달 뒤 다시 의양군(義陽君)으로 승격했다. 11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해 이 후에도 여러 번 맡는다. 1901년(광무 5년)에는 3월 명헌태후[9] 궁 대부에 임용되어 칙임관에 4등에 서임한다. 이는 훗날 1등까지 올라간다.
이 때 영국 왕실의 배려로 한국인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했다. 다들 거대하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은 어찌나 놀랐던지 기념 시까지 남기기도 했다.[10] 1903년(광무 7년) 1월에는 전선사 제조[11] 를 겸임하였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는 훈 1등에 서훈되어 태극장을 하사받았으며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거쳐 최종적으로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까지 수여받는다. 같은 해 9월에는 군부에서 포를 다루는 부서의 국장을 지냈다.
1905년(광무 9년) 2월에는 종정원경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 특파 대사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5월에는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했고 7월에는 이 무렵 세워진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후임은 의친왕 이강이었고 1907년(광무 11년) 4월에 다시 의양군이 맡았다.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년(융희 3년) 7월에 일본이 대한적십자사를 강제로 폐지하면서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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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왕족,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관료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도세자의 서3남 은전군의 양증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손자로 아버지는 완평군이다.
2. 생애[편집]
1874년(고종 11년) 한성부 계동 은전궁에서 완평군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항렬로는 조선 헌종, 고종의 동생 뻘이나, 나이는 조카 뻘인 순종과 동갑이었다.
1891년(고종 28년) 당시로서도 꽤 이른 나이였던 18세에 증광시[3] 에서 진사에 급제하고, 1년 뒤 문과별시[4]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좌비서랑[5] 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10월 명성황후의 장례를 책임질 종척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아관파천 당시 물밑에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을 도왔다.
2.1. 대한제국기 활동[편집]
다른 종친들보다 나이가 비교적 어려서 그런지 조선국 시절보다는 대한제국 시기에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1898년(광무 2년)에는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전작례[6] 와 작헌례[7] 때 축문을 읽어 상을 받았고 1899년(광무 3년) 8월, 시강원 부첨사[8] 역임 중에는 일본의 황족이 한국을 방문할 때 맞이했다.
1899년(광무 3년) 9월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았다. 황제의 4대손은 황족의 지위를 받는다는 예에 따라 의양도정(義陽都正)에 봉해졌다가 2달 뒤 다시 의양군(義陽君)으로 승격했다. 11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해 이 후에도 여러 번 맡는다. 1901년(광무 5년)에는 3월 명헌태후[9] 궁 대부에 임용되어 칙임관에 4등에 서임한다. 이는 훗날 1등까지 올라간다.
또한 한국 황족 최초로 유럽에 간 기록을 세웠다.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특명 영국 대사에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영국 런던을 방문하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거쳤던 것이다.
이 때 영국 왕실의 배려로 한국인 최초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했다. 다들 거대하고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은 어찌나 놀랐던지 기념 시까지 남기기도 했다.[10] 1903년(광무 7년) 1월에는 전선사 제조[11] 를 겸임하였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는 훈 1등에 서훈되어 태극장을 하사받았으며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거쳐 최종적으로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까지 수여받는다. 같은 해 9월에는 군부에서 포를 다루는 부서의 국장을 지냈다.
1905년(광무 9년) 2월에는 종정원경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 16일 특파 대사로 임명되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축하 사절단으로 다녀왔다. 5월에는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 참석했고 7월에는 이 무렵 세워진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총재가 되었다. 후임은 의친왕 이강이었고 1907년(광무 11년) 4월에 다시 의양군이 맡았다. 한일병합 1년 전인 1909년(융희 3년) 7월에 일본이 대한적십자사를 강제로 폐지하면서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육군 참장(陸軍參將)과 민간 단체인 상공근무사(商工勤務社)의 회장을 맡았으며 1908년(융희 2년)에는 계산학교 교장 직을 역임했다. 1909년(융희 3년) 1월에 순종이 대구, 부산, 마산 등을 시찰할 때 옆에서 모셨다. 1910년(융희 4년) 8월에 종1품에 가자되었으나 얼마 뒤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그도 황족의 지위를 잃는다.
2.2. 일제강점기의 행적[편집]
이후 이재각은 다른 왕족들처럼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는다.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후작(侯爵) 작위와 은사 공채 16만 8천원을 받았으며 일본은 이재각에게 특별히 일본군 육군 소장 대우를 하여 제복과 호위 무관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후에 다른 왕족들처럼 이왕가(李王家) 내의 많은 행사들[12] 에 참여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는데 말년에는 도박으로 재산을 거의 다 잃고 가난하게 보냈다. 그러다 1935년 5월 11일 경성부 자택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펴낸 《친일 반민족 행위 관계 사료집 4 - 조선귀족과 중추원》에서 인용한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조선총독부 비밀문서 《조선귀족약력》에 따르면, 아내 유씨가 콜레라에 걸린 걸 관내 경찰관이 발견하였고 경기도 위생과에서는 그래도 명색이 귀족인 부인의 체면을 중시해서 따로 치료하려 했는데, 이재각은 자신은 알지 못하고 병은 자신이 처방할 수 있다며 마음대로 약을 먹였다고 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처방을더군다나 환자인 아내를 완전히 남처럼 대하면서 자신은 병을 피해 첩의 집에 머물렀다고.(...) 이에 보다 못한 경찰관은 귀족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 일반 환자들과 함께 수용했다고 한다.
- 경상남도 진주시 뒤벼리 암벽[13] 에 의양군 이재각, 이재현[14] , 성기운의 이름이 80cm 가량 크기의 한자로 깊이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 암벽에 이들의 이름이 쓰여 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독립운동사료연구가 추경화씨가 이들의 친일 행적을 찾아내면서 알려졌는데, 발견 당시 광복회 등 애국보훈단체에서는 새겨진 이름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민들은 그것 또한
흑역사이기에 그대로 두고[15] , 대신에 그 앞에 이 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1999년 12월에 세워놓았다. 하지만 2018년 10월 낙서로 골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경찰에 수사의뢰를 했다.
- 이재각이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의 별장 정원에서 사고가 터진 적이 있었다. 1923년 5월 20일 종로 삼청동 이재각 후작 별장 정원에서 조선 미술 공장에 다니던 20살 최수만과 그의 친구 22살 박도환을 포함[16] , 서너 명의 청년들이 장난치다 최수만이 박도환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 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고 박도환이 공기총을 든 최수만을 보고 총을 좀 빌려달라고 해 가져갔는데 그 총을 함께 놀던 김갑덕이란 사람에게 주고 최수만에게는 너한테 다시 줄 필요 없다며 도발하자 서로 툭툭치며 장난치다 몸싸움으로 번졌고(...) 한참 싸우던 중에 박도환이 갑자기 숨을 가쁘게 쉬다 죽은 것. 최수만은 즉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약 20일 만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