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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41대
국무총리.
현재는 변호사김황식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와 이승만 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 호암재단 이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48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 원황룡마을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주제일고등학교(4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제1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4기. 이후
판사를 역임하였다. 서울형사지법에 근무하며
사노맹 사건으로 기소된
조국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대법관을 역임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후 대법관직을 중도 사직하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감사원장을,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현직 대법관이 감사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큰 논란이 되었다. 이에 관해 인사청문회에서
"총리 자리라면 저는 안 갑니다. 감사원장이기 때문에 제가 받아들였다 하는 취지입니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국무총리 재직 시절이던 2012년
민주통합당 설훈 국회의원에게 1977년
긴급조치 9호에 따라 실형을 선고한 것에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그 외에 2007년 대법관 시절에
상지대학교 구재단의 손을 들어준 편파 판결로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그 판례의 영향으로 다른 비리사학들도 비리 구재단이 복귀하는 단초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상지대학교의 대법원 판례의 주된 쟁점은 임시이사 파견 이전 정이사들에게 소의 이익을 긍정할 수 있는가와 임시이사가 여타 정이사들과 마찬가지로 정이사를 새로이 선임할 수 있는가였다. 다수의견은 전자에 대해 민법 제691조의 긴급처리권을 근거로 소의 이익이 있다고 본 하급심의 견해를 부인하면서, 헌법 상 사학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정이사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여 소의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후자의 경우 정이사를 새로이 선임할 수 없다고 보았는데, 임시이사의 경우 사립학교법이 정이사와 다른 법적지위를 부여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통상적 업무 외의 정이사 선임과 같이 사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고 재산권의 국가권력에 의한 침해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양승태 보충의견) 사안을 허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대의견
[4] 이용훈 코트의 진보 5인방 김영란, 이홍훈, 전수안, 김지형, 박시환 대법관이 피력한 견해이다.
은 법문언에서 임시이사의 권한을 정이사에 비해 제약하는 조항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임시이사는 정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비판하는 측의 주된 요지는 학교법인의 정이사와 임시이사의 지위가 동일한가 상이한가에 대해 합헌적 법률해석 등의 법리에 치우쳐 임시이사를 통한 고등교육 정상화를 방해한, 다소 작위적 결론이라는 것이 주된 비판이다. 결론적으로 임시이사의 정이사 재선임은 무효가 되었고, 당시 선임되었던 새로운 정이사들의 지위를 말소하고 다시금 임시이사 체제로 이사회가 유지된다.
해당 판례(케이스노트)이명박 정부 당시 국무총리로 내정되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되어 총리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공세가 일어나기도 했다.
# #하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김태영 국방부장관과 함께
인사청문회를 무사 통과한 둘뿐인 인물이며
[5] 인사청문회에서 국무위원 위촉자들이 낙마를 거듭했던 관계로 청문회를 통과할만한 중량급(重量級) 인물을 찾는 과정에서 발탁됐다는 말이 있었다.
, 재임 중 별다른 구설없이 원만하게 국정을 수행했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 후 언론에 "김황식 총리같은 사람이 또 없느냐?"는 박 당선자 측의 주문이 공공연하게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중 총리 잔혹사 때문에 국정에 큰 차질을 빚으면서 여러차례 재조명되기도 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러브콜을 보낸 새누리당 소속으로
서울특별시장 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혜훈, 정몽준과
새누리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정몽준에게 밀렸다.
같은 해부터 2015년까지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역임, 이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예산 절감으로 언론의 찬사를 받으면서 위원장을 맡은 김 씨의 명망도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새누리당에서 혁신위원장직을 제안하였으나,
고사하였다. 2017년부터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2018년 자유한국당이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참패당하자, 혁신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이 역시 본인이 고사하였다. 결국 이 자리에는
김병준 전 교육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앉았다.
2018년
삼성재단 중
호암재단 이사장직에 취임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자신의 후배 판사인
나경원 후보의 지지유세에 나섰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후보에게 크게 패해 낙선하며 빛이 바랐다.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겸직하던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직에 취임했다.
# 이로써
호암재단 이사장과 겸임하게 됐다.
이승만 기념관 사업에 나서기 시작하여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목표 대비 성금은 높지 않았다.
- 880일 동안 총리직을 수행해, 제6공화국 총리 중 역대 최장수 총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으나, 2019년 10월 28일부로 이낙연 총리가 958일을 기록하며 이 기록을 경신했다. 두 사람 모두 관가에서 일 잘하는 총리라는 평가를 받아서 이낙연의 퇴임 때 김황식 이후 7년만에 박수 속에 떠난 이낙연이라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호남 출신인데다가[6] 정치색이 옅고, 실무에 밝은 총리라 여야 모두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정적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 사형제 폐지를 자신의 소신이라고 밝혔지만 그래도 본인이 판사 시절에 사형 선고를 내린 적이 있다. 박한상 존속살해 사건인데, 본인도 부모를 수없이 난자하고 시체까지 불 태운 사건이라 형사법상 사형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 김황식은 서울형사지법 합의23부 부장판사로 1심 재판을 맡았다. 그가 사형 판결을 내린 또다른 사건은 성낙주 사건이다. # 물론 둘 다 실제로 집행은 아직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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