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쇼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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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천마(天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70년대 TTG 삼강 구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일본의 경주마. 1976년 아리마 기념부터 주전 기수는 레전드인 타케 유타카의 아버지인 타케 쿠니히코이다. 마주는 스윕 토쇼와 같은 토쇼 산업.
2. 혈통[편집]
아비는 당대의 중앙경마 리딩사이어 테스코 보이, 어미인 소셜 버터플라이도 모계 후손으로 중상마를 여럿 배출해 3대 이내 모계 중상승마가 10마리나 된다.
반형제 형으로 1971년 세키야 기념, 쿠모하타 기념, 1972년 나카야마 기념 우승마 토쇼 핏(トウショウピット, 父 : 파르홀론), 반형제 누나로 1975년 우준 빈마 2착을 기록한 소셜 토쇼(ソシアルトウショウ, 父 : 벤쳐)가 있다. 소셜 토쇼는 네마리의 중상마를 배출했다.
3. 생애[편집]
3.1. 1976년[편집]
어릴 때부터 체격이 너무 빠르게 커져서 다듬는데에 시간이 걸려 3세 때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훗날 TTG의 G가 되는 그린 그래스도 같이 신마전을 치뤘는데 4착으로 참패, 그리고 훗날 토쇼 보이와 교배해 미스터 시비를 낳는 시비 퀸도 이 신마전에서 같이 데뷔했다.
데뷔전부터 3전 3승으로 가볍게 도착한 클래식 첫관문 사츠키상, 관서에서 역시 5전 5승을 달리며 클래식 유력주자로 떠오른 텐 포인트와 첫 대결이 이뤄진다. 결과는 레코드 갱신+5마신차로 토쇼 보이의 쾌승, 최종직선에서 놀라울 정도의 스퍼트로 '천마'라는 별명도 생기게 된다. 사츠키상에서 보여준 엄청난 퍼포먼스로 더비에서도 압도적 1번 인기마로 출주한다. 실제로 최종코너까지 이전처럼 강력한 선행으로 선두를 지켰으나 스퍼트에 들어가기 전 부딪힐듯한 기세로 옆으로 달라붙어온 클라임 카이저의 접근에 놀란 토쇼 보이는 크게 속도를 늦추며 추월당하고 만다. 다시 속도를 올리며 필사적으로 뒤쫓았지만 결국 클라임 카이저에게 더비 1착을 넘기게 된다. 토쇼 보이는 상대가 옆으로 빠르게 달라 붙어오면 놀라서 속도를 줄이는 버릇이 있음을 파악해 그걸 노리고 길을 막지는 않으면서 옆에 바짝 붙기만한, 선에 걸친 아슬아슬한 플레이라 반칙이 아닌걸로 넘어갔지만 토쇼 보이의 팬들에겐 크라임 카이저(犯罪皇帝)[4] 라 부를 정도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5]
공교롭게도 삿포로 기념(더트/2000)에서 클라임 카이저와의 2차전이 이뤄지는데 무려 8마신의 차이를 냈지만 순위 결과는 2착과 3착. 1착마 그레이트 세이칸과는 머리 차이로 1착을 못했다는 찜찜한 결과에 기수가 후쿠나가 요이치로 변경된다. 그리고 고베신문배(잔디/2000)에서의 3차전, 이땐 사츠키상 때를 그대로 재현하는듯한 주행으로 또 레코드를 갱신하며, 5마신 차의 압승을 거둔다. 이때 거둔 기록이 일본 본 경마 사상 첫 2000M 1분 58초대 진입이다. 4차전 교토신문배에서도 또 승리하며 서열정리를 마친다. 이 연패의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지, 클라임 카이저는 더비 이후로는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그렇게 킷카상에 와선 눈에 띄는 경쟁자라곤 이미 3번이나 짓밟아서 끝장을 다 본 클라임 카이저, 더비 후 장기휴양하다가 복귀전 경기도 3착으로 애매한 컨디션을 보인 텐 포인트 뿐인 상황이라 거리적성 문제만 아니라면 모두가 낙승을 예상했는데...
늘하던 패턴대로 최종 직선에 뻗어나가지만 속도가 부족. 텐 포인트에게 제쳐지며 드디어 텐 포인트의 반격을 당하는가 했지만, 21두 출주의 킷카상에 25번 후보로 대기하다가 경주 이틀을 앞두고 21번째 꼴찌로 간신히 출주에 성공한 그린 그래스가 TT들이 달리던 외곽이 아닌 펜스에 바짝 붙은 인코스에서 맹렬히 뛰쳐나와 신마전의 복수를 달성한다. 후쿠나가 요이치는 당시 패전의 이유를 거리가 아니라 무거운 마장탓으로 돌렸다.
그렇게나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으면서도 클래식 1관에 그치며 체면이 망가진 토쇼 보이, 하지만 심기일전 클라임 카이저와 텐 포인트 같은 클래식 라이벌과 천황상 우승마만 셋, 2관 암말 등 호화멤버가 출주한 그 해의 아리마 기념에서 기수를 타케 쿠니히코로 변경한다, 킷카상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지지는 여전했고 1번 인기로 출주, 텐 포인트를 1마신차로, 또 레코드를 갱신하고 우승하며 킷카상에서 구긴 체면을 회복하고 명실상부한 당대제일의 말로 등극, 최우수 3세마상, 연도대표마를 모두 휩쓸었다.
3.2. 1977년[편집]
고마 시즌에 들어간 77년, 원래 천황상 봄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조교 중 부상으로 전반기를 다 날려버리게 된다. 살짝 재밌는 사연이 있는데 토쇼 보이 진영은 복귀전인지 뭔지 삿포로 경기장의 7월의 단거리 스테이크스(더트/1200)에 출전 등록을 했다가 취소하는데 이 대회가 마루젠스키의 커리어 8전째 대회로, 마루젠스키를 피해서 다른 말들이 우르르 출전을 포기해 단 5마리만이 달린 대회였다. 토쇼 보이도 마루젠스키와의 대결이 두려워 회피했다는 설도 있지만, 애초에 단거리를 한번도 뛰어본 적이 없는 토쇼 보이라 저 경기를 복귀전으로 뛸 이유가 없는데다 이어질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토쇼 보이 진영이 강한 상대를 피해 도망을 갈 정도로 전적을 관리하는 경향이 전혀 없었던 점을 보면 흔히 있는 일정을 잡기 위한 임시 등록과 취소로 보인다.
어쨌든 복귀전은 6월의 타카라즈카 기념. 단 6두만이 출주했지만 전원이 8대 경주 우승경력을 가진 화려한 멤버였다.
작년의 패배에 이를 갈며 교토기념, 나루오기념, 봄 천황상 3연승을 올리며 전반기 일본 경마를 휩쓸고 있던 텐 포인트, 그리고 킷카상의 원수 그린 그래스, 그리고 그래도 아직까진 라이벌 취급을 받던 클라임 카이저도 있는 그랑프리 경기. 토쇼 보이는 오랜 휴식에 의한 불안과 컨디션 난조로 인해 조교 상태가 좋지 않아 텐 포인트에게 밀린 2번 인기로 경기에 나서지만 또 이겨버린다. 토쇼 보이는 도주를 택했는데 텐 포인트 측은 상태가 좋지 않은 토쇼보이라면 나중에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후방의 다른 말들을 경계했으나 끝내 제치지 못한 것이다. 차이는 3/4마신차. 한참 떨어진 3착은 그린 그래스, 거기다 후반 1000m는 일본 레코드를 갱신하는 기록이었다.[6] 덧붙여 클라임 카이저는 6두 중 6착이라는 꼴찌성적으로 결국 은퇴하게 된다.
이후 타카마츠노미야배에선 킷카상에서 탓했던 불량마장과 62킬로의 무거운 부담중량에도 불구하고 2.5마신차로 낙승, 그리고 뜬금없이 1600m 오픈클래스 경기에 나가서 레코드 갱신+7마신차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을 하고 돌아온다. 출전 이유가 황당한 것이 '견습기수가 타고 뛰면 얼마나 기록이 나올까 궁금해서'였다고 한다.
춘추 그랑프리(타카라즈카 기념, 아리마 기념) 제패까지 달성한 토쇼 보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는 천황상 타이틀이었다, 83년에 개편되기 전까진 천황상은 봄 가을 모두 동일한 3200m에 어느 쪽이던 타이틀을 달면 더 이상 천황상 대회에 나갈 수 없는 졸업식 제도로 운영되었다. 토쇼 보이에겐 가을 천황상 우승이 킷카상에서 보인 거리적성에 대한 의문부호를 지워버릴 기회였던 것. 그렇게 출주한 가을 천황상에서 킷카상에서 한방 먹은 상대인 그린 그래스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서로간에 너무 의식하고 견제를 하던 끝에 폭주, 나란히 최종 직선에서 체력이 방전되며 그린 그래스는 5착, 토쇼 보이는 커리어 최악의 성적인 7착으로 나자빠지는 추태를 보이고 만다. 기수의 변명이 또 마장탓이었다는 것이 소소한 웃음거리. 이래저래 면이 안서는 결과였지만 어쨌든 토쇼 보이 진영은 가을 천황상 경기 후에 아리마 기념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것을 선언한다.
77년 아리마 기념은 토쇼 보이의 라스트런, TT의 마지막 대결과 지입마로 외산마 취급을 받아 줄곧 중상전선의 말들과 승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마루젠스키의 참전으로 엄청난 기대를 모은다. 하지만 마루젠스키는 대회를 얼마 안 앞두고 굴건염이 발병하고, 증세는 가벼워 수의사의 출전 OK사인은 나왔으나 태어날 때부터 초고급 종마로 활동 할 것이 예정된 귀한 몸에 이 이상의 리스크를 질 수 없었는지 출주를 포기[7] , 8두의 조촐한 규모로 열리게 된다.
500킬로가 넘는 거대한 마체와 강력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래저래 잔부상을 달고 살았던 토쇼 보이는 은퇴전을 앞둔 시점에는 근육주사를 맞고 경기에 나서야 할 정도로 컨디션이 저하된 상태였지만 출주 취소같은 것 없이, 최고의 상태로 몸을 갈고 닦아온[8] 텐 포인트와의 정면승부를 받아들인다.
출주 수가 적어서 방해할 말도 없겠다 시작부터 둘은 맹렬히 선두를 교대하며 폭주, 나머지 말들은 멀리 버려지고 그린 그래스만이 따라오는 유사 매치레이스 끝에 2착, 마침내 텐 포인트에게 패배하며 왕좌를 넘겨주고 잔디를 떠난다.
레코드를 수시로 경신하며 라이벌들의 도전을 연거푸 꺾어나간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리딩사이어의 혈통의 이름값을 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명마였다. 비록 은퇴전에서 패배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진 못했으나 그 은퇴전에서 역사에 남을 정도의 매치레이스를 보여줬기에 이를 폄하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커리어 내내 끝내 3000m이상의 초장거리에선 그 이하 거리에서의 막강한 모습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을 냈는데, 그레이드제 도입 이전의 팔대경주가 주축이 되던 시대인 만큼 중거리를 많이 뛰긴 했지만 최고의 적성거리는 마일~2000m정도 였으리라는 말이 많다.
4. 종마 생활[편집]
은퇴 후엔 아비 테스코 보이처럼 히다카 경종마 조합 소속의 종마로 활동했다. 마주인 토쇼 산업의 오너브리드 목장인 토쇼 목장에서 테스코 보이의 종마 권리를 3년간 받아가는 대신 토쇼 보이를 조합에 매각하고, 3년간 토쇼 보이에 대한 연 3회의 우선교배권도 받아가는 거래가 이뤄졌는데, 그냥 보기엔 아직 종마로는 써보지도 않은 토쇼 보이를 산다고 거액+리딩사이어 아비 테스코 보이를 3년이나 넘기는 거래이니 당연히 조합측에서 엄청 손해보는 계약이었으나, 조합의 담당자들이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이 거래를 성사시켰고 토쇼 보이는 종마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토쇼 목장에서 낳은 토쇼 보이의 자식들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종마 시절엔 조합소속이라 저렴한 교배비에 중소목장의 급떨어지는 암말들과 교배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자식들을 낳으며 현역 시절 못지 않게 이름을 떨쳤다. '토쇼 보이 산구는 장애만 없으면 3천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소 목장 입장에선 구세주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오타스케 보이(구원 보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다만 미스터 시비 같은 직계 종마들이 크게 성공하지 못해 부계로는 혈통이 이어지지 못했고 모부쪽으로는 혈통이 이어지는 중. 스윕 토쇼, 보드카가 토쇼 보이의 대표적인 모부계 후손들이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1992년, 제엽염으로 인해 안락사되어 세상을 떠났다.
4.1. GI/JpnI 경주 우승마[편집]
- 굵게 표시된 것은 GI 경주.
- 980년산
* 미스터 시비 - 1983 클래식 삼관(사츠키상, 일본 더비, 킷카상)[9] , 천황상(가을)(1984), 야요이상(1983)
* 다이젠 킹 - 한신 3세 스테이크스(1982)[8] , 코쿠라 3세 스테이크스(1982)
1985년산
* 아라 호토쿠 - 오카상(1988), 산케이스포츠 4세 암말 특별(1988)
* 패싱 샷 - 마일 챔피언십(1990), CBC상(1990)
1986년
* 사쿠라 호쿠토 오 -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1988), 세인트 라이트 기념(1989), 아메리칸 자키 클럽 컵(1990)
1987년
* 다이이치 루비 - 야스다 기념(1991), 스프린터즈 스테이크스(1991), 케이오배 스프링 컵(1991), 교토 암말 특별(1991)
1988년
* 시스터 토쇼 - 오카상(1991)
== 여담 ==
* 마굿간에 있다가도 인기척이 있으면 꼭 얼굴을 내밀고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려서 기자들에겐 천마는커녕 커다란 강아지 같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대외적인 강력한 이미지와 달리 애교가 많았다.
*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에선 아들인 시비나 모부계 후손들이 실장되어있지만, 토쇼 보이는 드러나있지 않다. 대신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먼저 이벤트 스토리에서 '사츠키상에서 압승으로 하늘을 달리는 우마무스메라는 별명을 얻으나 더비에서 팬들의 중압감에[10] 2착, 킷카상에서도 불량마장 문제로 부진했으나 여전한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에 부응해 아리마 기념을 우승한 우마무스메'라는 과거의 기록이 언급되고 있다. 링크
거기다 2023년에 미스터 시비가 공식으로 실장되어 드러난 그녀의 개인 스토리에서 '어머니는 명 우마무스메고 아버지는 그녀의 트레이너였다.'라는
괴문서다운가정사가 밝혀지면서 현실 토쇼 보이의 존재를 새롭게 각색한 게 아닌가라는 해석이 기정사실화되었다. == 경주 성적 == {{{#!wiki style="word-break:keep-all;" ||경주일 || 경마장 || {{{#!wiki style="min-width: 130px" 경기명}}} || 등급 || {{{#!wiki style="min-width: 80px" 트랙}}} || 확률 || 인기 || 착순 || 기수 || 1착마
(2착마) || ||<-10>1976년 (4세, 현 3세) || || 1.31 || 도쿄 || 4세 신마 || || 잔디 1400m || 2.6 || 1 || 1착 ||<|6> 이케가미 마사히로 || (로얄 세이칸) || || 2.22 || 도쿄 || 츠쿠시(つくし) 상 || 300만 || 더트 1400m || 2.0 || 1 || 1착 || (호요 실버) || || 3.20 || 나카야마 || 렌게(れんげ) 상 || 600만 || 잔디 1800m || 1.2 || 1 || 1착 || (케이슈 포드) || || 4.25 || 도쿄 || 사츠키상 || 팔대경주 || 잔디 2000m || 3.6 || 2 || 1착 || (텐 포인트) || || 5.30 || 도쿄 || 도쿄 유슌 (일본 더비) || 팔대경주 || 잔디 2400m || 2.2 || 1 || 2착 || 클라임 카이저 || || 7.11 || 삿포로 || 삿포로 기념 || 중상 || 더트 2000m || 2.4 || 1 || 2착 || 그레이트 세이칸 || || 10.3 || 한신 || 고베신문배 || 중상 || 잔디 2000m || 1.5 || 1 || 1착[레코드] ||<|3> 후쿠나가 요이치 || (클라임 카이저) || || 10.24 || 한신 || 교토신문배 || 중상 || 잔디 2000m || 1.5 || 1 || 1착 || (클라임 카이저) || || 11.14 || 교토 || 킷카상 || 팔대경주 || 잔디 3000m || 2.3 || 1 || 3착 || 그린 그래스 || || 12.19 || 나카야마 || 아리마 기념 || 팔대경주 || 잔디 2500m || 4.2 || 1 || 1착[레코드] || 타케 쿠니히코 || (텐 포인트) || ||<-10> 1977년 (5세, 현 4세) || || 6.5 || 한신 || 타카라즈카 기념 || 중상 || 잔디 2200m || 5.6 || 2 || 1착 ||<|2> 타케 쿠니히코 || (텐 포인트) || || 6.26 || 주쿄 || 타카마츠노미야배 || 중상 || 잔디 2000m || 1.2 || 1 || 1착 || (센터 굿) || || 10.23 || 나카야마 || 5세 이상 || 오픈 || 잔디 1600m || 1.5 || 1 || 1착[레코드] || 마유즈미 유키히로 || (카네 코후지) || || 11.27 || 도쿄 || 천황상(가을) || 팔대경주 || 잔디 3200m || 2.3 || 1 || 7착 ||<|2> 타케 쿠니히코 || 호쿠토 보이 || || 12.18 || 나카야마 || 아리마 기념 || 팔대경주 || 잔디 2500m || 3.0 || 2 || 2착 || 텐 포인트 ||}}}
[include(틀:포크됨2, title=토쇼 보이, d=2023-12-22 19:22:58
- 미스터 시비 - 1983 클래식 삼관(사츠키상, 일본 더비, 킷카상)[11] , 천황상(가을)(1984), 야요이상(1983)
- 다이젠 킹 - 한신 3세 스테이크스(1982)[8] , 코쿠라 3세 스테이크스(1982)
- 아라 호토쿠 - 오카상(1988), 산케이스포츠 4세 암말 특별(1988)
- 패싱 샷 - 마일 챔피언십(1990), CBC상(1990)
- 사쿠라 호쿠토 오 -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1988), 세인트 라이트 기념(1989), 아메리칸 자키 클럽 컵(1990)
- 다이이치 루비 - 야스다 기념(1991), 스프린터즈 스테이크스(1991), 케이오배 스프링 컵(1991), 교토 암말 특별(1991)
- 시스터 토쇼 - 오카상(1991)
5. 여담[편집]
- 마굿간에 있다가도 인기척이 있으면 꼭 얼굴을 내밀고 만져달라고 애교를 부려서 기자들에겐 천마는커녕 커다란 강아지 같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대외적인 강력한 이미지와 달리 애교가 많았다.
-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에선 아들인 시비나 모부계 후손들이 실장되어있지만, 토쇼 보이는 드러나있지 않다. 대신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먼저 이벤트 스토리에서 '사츠키상에서 압승으로 하늘을 달리는 우마무스메라는 별명을 얻으나 더비에서 팬들의 중압감에[12] 2착, 킷카상에서도 불량마장 문제로 부진했으나 여전한 팬들의 지지를 받으며 그에 부응해 아리마 기념을 우승한 우마무스메'라는 과거의 기록이 언급되고 있다. 링크
거기다 2023년에 미스터 시비가 공식으로 실장되어 드러난 그녀의 개인 스토리에서 '어머니는 명 우마무스메고 아버지는 그녀의 트레이너였다.'라는 괴문서다운 가정사가 밝혀지면서 현실 토쇼 보이의 존재를 새롭게 각색한 게 아닌가라는 해석이 기정사실화되었다.
6. 경주 성적[편집]
[1] 당시 기준으로 20세.[2] 현 JRA상 최우수 3세 수말.[3] 중상마만 서술[4] 클라임(Climb)과 크라임(Crime)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붙여졌다.[5] 클라임 카이저의 기수는 원래 이런 약점을 찌르는 거친 플레이가 장기인 카가 타케미 기수였다. 신잔 문서 참조.[6] 한신 코스의 도주를 조건으로 삼으면 해당 기록은 2022년 교토 기념의 아프리칸 골드까지 가서야 깨지게 된다.[7] 타고난 다리의 기형으로 인해 언젠가는 터질 폭탄이었고, 짧은 거리만을 뛰게하며 이를 컨트롤 해왔던 마루젠스키 진영은, 클래식 더비라면 최외곽에서 혼자 뛸거고 상금도 필요없으니 제발 뛰게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자신감을 보였지만 1살 위의 고마, 그것도 TT를 상대로 증상이 가볍다고 해도 굴건염이 터진 상태로 미지의 2500m를 뛴다는건 부담이 너무 컸을 것이다.[8] A B C 텐 포인트의 기수는 '이번에 진다면 텐 포인트는 영원히 토쇼 보이의 아래가 되버린다, 그런 결과는 절대 인정못한다, 죽어도 이긴다'는 각오를 보였다.[9] 1984년 이전에는 그레이드제가 도입되지 않았다.[10] 실제로 클라임 카이저의 접근이 원인이 아니라, 팬들의 환성에 놀라서 발을 늦춘 거라는 경마 평론가의 설도 있었다. 이를 채용한 설정[레코드] A B C D E F [11] 1984년 이전에는 그레이드제가 도입되지 않았다.[12] 실제로 클라임 카이저의 접근이 원인이 아니라, 팬들의 환성에 놀라서 발을 늦춘 거라는 경마 평론가의 설도 있었다. 이를 채용한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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