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바조
덤프버전 :
분류
- 1967년 출생
- 1983년 데뷔
- 2004년 은퇴
- 베네토 주 출신 인물
- 이탈리아의 불교 신자
-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 공격수
- 세컨드 스트라이커
- 축구행정가
- 비첸차 칼초/은퇴, 이적
- ACF 피오렌티나/은퇴, 이적
- 유벤투스 FC/은퇴, 이적
- AC 밀란/은퇴, 이적
- 볼로냐 FC/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브레시아 칼초/은퇴, 이적
- 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발롱도르 수상자
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前 축구 선수. 1990년대를 풍미한 비운의 판타지스타로 유명하다. 뛰어난 기량으로 유벤투스 소속이던 1993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석권했으며, 1년 후 열린 1994년 월드컵에서는 녹아웃 토너먼트부터 엄청난 활약으로 이탈리아의 준우승을 이끈 공격수다.[2]
- 프로통산 488경기 218골. A매치 56경기 27골.[3]
- 1993년 발롱도르 수상.[4]
- 1993년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 1994년 월드컵에서 실버볼과 올스타팀 선정.
- 2002년 월드컵 드림팀 선정.[5]
- 2004년 세리에 A 통산 200골 돌파.[6]
- 2004년 FIFA 100 선정.
공격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과 특유의 말총머리 헤어스타일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선수다.
애칭은 '로비(Robi (or "Roby)'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고향 비첸차의 유소년 팀을 시작으로, 1983년 6월 5일[7] 세리에 C 비첸차 팀에 데뷔했다. 1984/85 시즌엔 12골을 넣으며 활약하면서 팀이 세리에 B로 승격하지만, 1985년 5월 오른무릎의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는다.[8][9]
그런데 그런 큰 부상중임에도 바조는 그 해 여름에 당시 세리에 A 리그 팀인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다. 재활을 마치고 1986년 1월 복귀한 바조는 컵 대회로 복귀를 알렸고, 가을에 리그에 정식으로 데뷔 했는데 곧장 무릎 부상 재발로 7개월 결장.
20살도 되지 않은 바조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벌써 치명적인 부상을 2번이나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채 끝나리라고 생각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의학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그런 우려들도 당연한것이었다. 그러나 바조는 '경기를 뛰고싶다'는 신념하나로 버티며 재활에 성공, 87/88 시즌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세리에 A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등장을 알리게 된다. 바죠의 첫골은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고 있던 나폴리를 상대로, 강등권 위기에 쳐해있던 피렌체를 구해내는 값진 골이었다.
이듬해인 88/89 시즌, 21살의 바조는 40경기에 출전하며 24골을 기록하며 기량이 폭발하기 시작하며 피오렌티나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되었고, 90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통해 슈퍼스타로서 착실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활약으로 인해 그는 1990년, 사상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하며 150억 리라[10] 의 금액에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바조는 사실 이적을 원치않았고 큰 부상에도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피오렌티나에 대해 큰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나[11] 당시 피오렌티나가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기때문에 결국 이적하게 된다. [12]
유벤투스에서 미셸 플라티니의 10번[13] 을 이어받은 바조는 매년 20골 이상을 넣는 준수한 활약을 보인다. 특히 1992/93시즌 리그와 대회를 통틀어 30골, 1993/94 시즌엔 22골을 기록했는데, 시즌이 아닌 연도 즉 1993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39골을 넣으며 절정기를 누렸다. 특히 1993년 UEFA컵[14] 결승전 당시 1,2차전을 통틀어[15] 2골을 넣어 유벤투스에게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안겨준 활약으로 해당시즌 FIFA 올해의 선수상과 발롱도르를 휩쓸어버린다.
그러나 바조는 하술된 1994 월드컵의 실축 이후 크나큰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마르첼로 리피가 신임 유벤투스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공개적으로 바조가 팀 전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주전 자리를 차츰 앗아갔다.
설상가상 그해 11월 무릎 부상 재발로 뛰지 못하는 동안, 하필이면 리피가 직접 데려온 델 피에로가 훌륭히 빈자리를 메꾼다. 1994/95 시즌 막바지에 복귀한 바조는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맛보지만, 팀에서 입지는 예전 같지 않았고 결국 전력외 판정을 받고 팀을 떠난다.
이때 인테르으로 이적한다는 루머가 파다했지만 결국 1995년 여름 AC 밀란으로 이적하는데, 파비오 카펠로 감독 역시 판타지스타 바조를 탐탁치 않게 여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95/96시즌 AC밀란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유벤투스 때와 같이 바조가 우승에 공헌한 바는 미미했다. 다음해 카펠로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를 맡으면서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결국 아리고 사키 감독이 들어온다. 사키 감독은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는데, 노르웨이전에서 골키퍼 잔루카 팔리우카가 퇴장당하자 후보 골키퍼 루카 마르케지아니를 투입하기 위해 바조를 벤치로 불러들이며 바조의 자존심에 흠집을 낸 인물이었다.
1996/97 시즌 AC 밀란은 리그 11위를 기록하는 부진을 보이며 사키 감독을 경질했는데 후임으로 카펠로 감독이 다시 왔다.
결국 카펠로 감독에게 전력외 통보를 받은 바조는 볼로냐로 이적, 리그 30경기 22골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한다. 하지만 여전히 볼로냐 감독과 불화를 일으켰다.
1998년 월드컵이 끝나고 바조의 건재함을 확인한 인테르이 오퍼를 넣어, 바조는 등번호 10번을 받고 이적한다. 그리고 이때 인터 밀란에 호나우두가 있었다. 축구팬들은 신구세대 최고 공격수 두 사람이 환상의 투톱을 이룬다고 기대와 설레발… 호나우두가 부상크리. 지못미.[16] 이 무렵 인터밀란은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애먼 감독 모가지만 연달아 날렸는데, 결국 작심하고 데려온 승부사가… 마르첼로 리피 감독.[17]
결국 바조는 2000년 들어 무소속이 된다. 사실 아직도 슈퍼스타였던 바조를 원하는 해외팀들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목표인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참가하려면 세리에 A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그는 결국 2000년 9월 브레시아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계속한다. 서른 세살의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 00시즌을 앞두고 막 1부리그로 승격한 작은팀으로의 이적을 바라보는 팬들의 반응은 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브레시아에서 바죠는 마지막 축구인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탁월한 감각은 변함없어 매 시즌 꾸준히 10골 이상을 넣는 페이스를 보이며 최약체 브레시아를 리그 8위로 올려놓기까지 한다.
하지만 월드컵을 코앞에 둔 2001년 10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개월 결장. 재활을 거쳐 다음해 1월 복귀했지만 통증 재발로 끝내 수술대에 오른다. 회복까지 최소한 넉달은 넘게 걸린다는 예상이었지만, 바조는 기자들에게 "나는 기적을 믿는다."고 담담히 밝힌다. 그리고 77일 만에 시합에 복귀했다. 복귀한 김에 두 골을 넣었다.
그러나 그의 불꽃투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트라파토니 감독은 바조의 몸 상태가 100%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대표팀에 뽑지 않았고 월드컵의 꿈은 좌절되었다.[18] 그리고 이탈리아는 대한민국에 일격을 맞고 16강 탈락.
월드컵이 끝난 뒤로 줄곧 리그에 전념, 세리에 A 400경기 출장과 통산 200골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시즌이던 03/04 시즌, 바조는 37살의 나이에 무릎 수술, 요통으로 장기간 결장하는 등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기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시즌 26경기 12골 11도움을 기록하며, 시즌 평점 1위라는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5월 시즌 마지막 경기 AC밀란 원정시합에서 8만 관중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브레시아에서는 그를 기리며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의 긴 여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88년 네덜란드를 상대로 등번호 11번을 달고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가 전국구로 이름을 날린 때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으로, 5경기 2골을 기록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한 살바토레 스킬라치를 앞세운 이탈리아는 자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 조별 리그를 3전 전승으로 가뿐히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는데 바조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첫 골을 기록한다. 이후 16강전 우루과이, 8강전 아일랜드마저 연파하며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당대 최고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는데, 1:1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선발이 아닌 교체로 출전했는데, 이를 두고 감독이 기용 실패로 비판을 받았다.[19]
3·4위전에서 71분에 잉글랜드의 피터 쉴튼 골키퍼를 상대로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가 2:1로 승리하며 결국 3위를 차지했다.
유로 1992 대회에서는 이탈리아가 예선에서 소련에 밀려 탈락하면서 출전하지 못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선 이탈리아가 조별 리그 탈락을 걱정할 만큼 초반에 극히 부진했다. 사실 E조 조편성이 노르웨이, 멕시코, 아일랜드, 이탈리아로 어느 팀이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은 죽음의 조였는데,[20] 정말로 네 팀이 똑같이 1승 1무 1패 골득실 0을 기록해 버렸다. 당시 조별 리그는 24강 제도였기 때문에, 조 2위까지 16강에 진출하고 3위를 차지한 여섯팀 가운데 네팀이 올라가는 와일드카드 방식이었다. 이런 복잡한 경우의 수 놀이 끝에 가까스로 본선에 올라갔으니, 축구에 대한 열성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이탈리아 팬들에게는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21] 팀은 물론이고 예선에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바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22]
그런데 토너먼트에서 바조가 해결사 본능을 발휘한다. 1994 미국 월드컵에 참가한 이탈리아의 전력은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등 아예 밀란을 통째로 뽑아온 수비진에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디노 바조의 공수 양면으로 뛰어난 미드필더진 등 매우 탄탄했다. 그러나 바조를 제외한 카시라기, 잔프랑코 졸라, 시뇨리, 마사로 등의 공격진은 개인기량이야 뛰어났지만 부상 후유증이나 경험 미숙 아니면 국대 징크스나 조직력 등 여러가지 이유로 별로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가 결승까지 7경기 동안 득점했던 8골 중에 바조는 5골을, 아주 결정적인 순간마다 작렬시켰다.[23]
16강 나이지리아전, 지안프랑코 졸라가 퇴장당한 이탈리아는 후반 40분이 넘도록 스코어마저 1:0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다음 대회를 기약해야 할 것처럼 보였으나 바조의 발에서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고,[24] 연장전에서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몰아쳐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경기를 끝낸다. 8강에서 전통의 강호 스페인과 1:1로 접전을 벌이던 후반 42분, 바조는 다시 한번 극적인 결승골을 작렬한다. 4강 상대는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와의 시합에서 바조는 이 대회 최고의 활약상을 선보인다. 전반 20분, 25분에 연달아 골을 터뜨리고, 뒤늦게 스토이치코프가 한 골 만회한 불가리아를 2:1로 누르며 결승에 오른다.이러한 활약으로 바조는 이탈리아에선 구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온갖 찬사와 칭송을 누리고 있었다.
운명의 결승전 이탈리아는 브라질과 맞서게 된다. 당시 차례로 득점왕을 차지하며 라리가를 호령하던 호마리우와 베베투 등 이탈리아 못잖은 스타플레어들이 포진한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격돌 끝에 스코어는 0:0, 결국 승부차기로 우승국을 가리게 된다. 브라질은 키커 네명 가운데 세명이 성공하고, 이탈리아는 두명이 성공해서 승부차기 스코어는 3:2.
그리고 유로 1996에는 아리고 사키 감독과의 불화로 제외되었으며, 이탈리아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멘탈 공황 상태에서 간신히 벗어난 후 리그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 뽑인 바조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짝을 이뤘다. 조별 리그 첫 경기 상대는 남미의 다크호스 칠레였고, 유럽에서 뛰는 살라스와 사모라노 등 걸출한 2명의 공격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경기 초반 바조의 감각적인 패스가 비에리의 발 앞에 정확히 배달되며 가볍게 선취 득점에 성공했다. 손쉽게 경기를 지배하나 했지만, 살라스에게 잇달아 두 골을 내주고 오히려 끌려다니는데...
16강 상대 노르웨이를 꺾고, 마침내 8강에서 홈팀 프랑스를 만난다. 이 경기에서 바조는 후반 교체 멤버로 뛰었으나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고, 양팀은 0:0으로 비긴채 승부차기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탈리아 첫번째 키커가 바조... 경악과 불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조는 침착하게 성공한다.
이때 킥을 성공시키고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세레모니를 했다. 이를 본 국내 해설진은 "자기 옛날 월드컵 이야기 하지 말라는 걸까요?"하며 웃음을 지었다.[28]
하지만 마지막 키커 루이지 디 비아조가 실축하면서 끝내 이탈리아는 4:3으로 패한다. 이 실축은 4년 전 월드컵 결승전에서의 바조의 킥과는 달리 골대 윗부분을 맞고 튀어나왔다. 망연자실해 그라운드에 누워버린 디 비아조에게 바조가 다가가 위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9]
유로 2000 때는 하향세로 제외되었다. 결국 바조는 유로에서 단 1경기도 뛰지 못했다.
2001년 10월 당한 부상에서 기어코 복귀해내며 의욕을 불태웠던 2002 한일 월드컵 참가는 트라파토니 당시 감독이 끝내 바조를 외면하며 이뤄지지 못했다. 비에리-토티-델 피에로 3각 편대를 너무 과신한 나머지 바조를 외면했으나, 큰 대회에서는 스스로 격이 달라지는 바조를 과소평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탈리아는 2002년 본선 내내 불만족스러운 경기력 끝에 크로아티아에 패하고 멕시코와도 극적인 동점골 끝에 겨우 비겼다. 에콰도르가 크로아티아를 잡아주는 이변으로 조 2위로 겨우 16강에 진출했고 무엇보다 한국과의 16강전에서 골가뭄 끝에 1:2 역전패까지 당하게 된다. 엔트리 제외에 실망하여 두문불출하던 바조가 2003년 은퇴를 표명하자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뜻으로 2004년 4월 28일 스페인과 친선 경기에 발탁했다. 이 시합이 바조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결과는 1:1 무승부. 시합 후 인터뷰에서 은퇴나 지금까지의 대표팀 생활을 거론하지 않고 당장 오늘 치른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게 아쉽다고 발언하며 골잡이로서의 자존심을 드러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바조는 몇 안되는 판타지스타라 불리우는 공격수다. 바조는 최전방에 못박혀 득점을 노리는 득점 기계 타입의 선수가 아니었다. 피치 위에서 포워드가 맡을 수 있는 대부분의 자리들, 그러니까 윙어/최전방/투 톱뿐만 아니라 메짤라까지, 다양한 위치를 소화해 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가 가장 선호한 위치는 공격수들 밑에서 어시스트와 득점을 모두 노릴 수 있는 프리롤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였다고 한다.[30] 미셸 플라티니는 그런 바조를 환상적인 9.5번으로 표현했다. 공격 조율, 침투, 공간 창출, 키 패스, 득점까지 공격수로서 해야하는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낼 수 있는 말 그대로 트레콰르티스타였던 것이다.
타고난 골잡이로써 박스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득점을 뽑아내었고 박스 바로 앞에서 침착하고 정확하게 감아차는 골에 아주 뛰어났다. 그 뿐만 아니라 발리 슈팅이나 칩슛도 자주 보여주었다. 프리킥 실력도 굉장히 뛰어나 당대에도 디에고 마라도나, 미셸 플라티니, 지쿠와 비교되었고 현재도 역대 최고의 프리키커를 뽑을 때 상위권에 선정된다. 페널티 킥도 잘 차는 편이나 그 한 번의 실수로 빛이 바랬다.
피지컬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양발 모두 기술적으로 상당히 뛰어나고 순간적인 가속력과 민첩성이 엄청났기 때문에 수비수을 손쉽게 벗겨낼 수 있는 환상적인 드리블 능력을 가졌다. 지쿠가 기술적으로 완벽하다고 칭찬했을 정도. 순간적인 가속과 감속으로 상대를 벗겨내는 드리블은 리오넬 메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역시 판타지스타로 불리우는 델피에로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판타지스타의 정의에 부합되는, 보는 이를 홀리는 플레이라는 관점에서 바조가 훨씬 판타지스타답다. 델피에로는 20대 초반에만 그런 모습을 보였다. 델피에로가 큰 경기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플레이로 팀을 살린 적이 얼마나 있나 생각해보면, 바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건 바조가 왜 그 이후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는가와도 관계가 있는데, 카테나치오같은 수비적 전술을 들고 나온다면 바조가 더 맞는 카드다. 토너먼트에서 어떻게든 막고 바조에게 연결하면 어떻게든 해결시켜 주니까. 하지만 전술의 이탈리아가 낳은 많은 이탈리아의 명장들은 판타지스타의 원더플레이와 골에 의존하기 보단 좀더 조직적으로 골을 만들어내고 감독의 계산 하에 안정적인 게임을 하길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체력이 약하고 공격 위치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좋아하는 바조보다는 델피에로가 훨씬 맞는 카드였던 것.[31] 바조가 정말 불운했던 것은 그 당시 바조를 외면했던 감독들이 사키 이후 연이어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소속팀마저 따라와서 감독을 하면서 바조를 외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82년 우승과 06년 우승 사이의 24년 동안 이탈리아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월드컵은 정작 바조가 멱살캐리 해서 결승까지 올린 94월드컵이었다.
히어로의 하드캐리보단 팀 전체의 기계같은 움직임과 조직력을 중시하는 현대 전술의 흐름에 외면 당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현재 이탈리아는 답답한 상황을 타개 시켜주는 바조 같은 히어로의 귀환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이다.[32]
보는 이를 감탄시키는 환상적인 플레이와 결정적인 순간에 팀을 구해내는 영웅본능으로 많은 팬을 만들고 뇌리에 박히는 판타지스타, 그것이 바로 로베르토 바조였다.
4. 평가[편집]
1990년대를 대표하는 공격수로서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수 반열에 들어가는 선수 중 한 명이다. 오렌지 삼총사가 휩쓸고 지나갔던 1990년대 초반은 축구계를 지배하는 선수가 없었을 정도로 혼돈의 시대였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서 있었던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조를 한문장으로 표현할수 있는 말은 한시대를 풍미한 비운의 판타지스타이다. 애초에 판타지스타 라는 단어자체가 바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인만큼, 그의 전성기 시절의 플레이는 화려하고 보는 이들이 감탄을 내뱉게 만들만큼 뛰어난 선수였다. 그러나 그를 비운의 판타지스타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월드컵 결승에서의 승부차기 실축만이 아니라, 그의 선수생활은 점차 압박축구와 같은 선수 개인의 힘이 아닌, 조직적인 팀단위의 현대적인 시스템축구가 들어서던 시기였고, 그로인해 너무 자유분방한 플레이를 펼쳤던 그는 커리어내내 이탈리아의 최고 명장들과 꾸준히 불화를 일으켰고, 이곳저곳을 옮겨가는 저니맨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조의 명성에 비하면 그가 이뤄낸 결과물들이 어쩌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선수생활내내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던 1990년대의 판타지스타였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의 바조는 3번의 월드컵에서 준우승 1회, 3위 1회, 8강 1회[33] 를 기록했고, 특히 1994 월드컵은 그를 비운의 스타로 만들어준 대회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공격을 홀로 전두지휘하면서 뛰어난 활약으로 월드컵 결승까지 올려보냈으나, 결승전에서의 승부차기 실축으로[34] 아쉽게 준우승을 하며 실버볼을 수상하였다. 반면 그가 아리고 사키와의 불화로 제외된 유로 1996에서는 조별 예선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단 유로 2000에서 프란체스코 토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맹활약으로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바조를 배제하기에 이르고, 1승 1무 2패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16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특히 비에리를 제외한 공격진의 부진이 심각했는데,[35] 팬들이 바조의 부재를 아쉬워했음은 당연하다. 이처럼 그의 존재감은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그의 평가는 토티, 델 피에로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니 사실 우승 커리어를 제외한 선수 개인에 대한 평가는 바조가 토티, 델 피에로를 뛰어 넘는다. 무엇보다도 바조는 1993년에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 위너로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한적이 있는 선수다.[36]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뽑는 설문조사에서 바조는 꾸준히 TOP3 안에 들만큼 평가가 높으며,[37] 세계적으로는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로 자주 여겨지고 있다.
오히려 후대에 평가가 더욱 올라가고 있는데, 비록 팀 커리어는 다른 역대 레벨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부상 이전의 호나우두처럼 그가 보여준 개인 기량과 수상 이력이 고평가 요소가 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 바조의 위상은 칼 하인츠 루메니게, 지쿠, 바비 찰튼, 마르코 반 바스텐, 게르트 뮐러와 비슷한 수준으로, 역대 10위권[38] 다음가는 위대한 선수로 여겨진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준우승: 1994; 3위: 1990
5.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93
- FIFA 올해의 선수: 1993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93
- FIFA 월드컵 실버볼: 1994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득점왕: 1990-91
- 세리에 A 도움왕: 1995-96
- 세리에 A 올타임 XI: 2015
- 구에린도로: 2000-01
- 옹즈도르: 1993
- 옹즈 드 옹즈: 1993, 1994, 1995
- FIFA XI: 2000, 2002
- FIFA 100: 2004
- 골든풋: 2003
- 브라보 상: 1990
- AC 밀란 명예의 전당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1
-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2011
- 유벤투스 올타임 XI: 2017
-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거리: 2015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이탈리아 드림팀: 2021
- 노벨 평화 최고상: 2010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AM 8위)
5.3. 수훈[편집]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5등급: 1991
5.4. 클럽 기록[편집]
6. 어록[편집]
나는 축구와 20년이 넘도록 사랑을 했다. 축구를 할 수만 있다면 수명이 줄어들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어쩌면 나는 축구를 더욱 잘하기 위해 도핑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내가 사용한 유일한 도핑은 바로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플레이중에서 언제나 가장 어려운 것을 고르고 있다.평범한 3골보다는 화려한 1골을 넣는 것이 좋다. 그것이 판타지스타다.
페널티 킥을 득점했다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축했던 것은 모든이에게 영원히 기억 된다.
선수 생활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 페널티 킥은 다시 차고 싶다. 나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난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무덤까지 같이 갈 것이다.
7. 바조에 대한 언사[편집]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탈리아만 그를 넘버원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ㅡ 지네딘 지단
현재 전세계의 모든 현역 선수들은 전성기의 디에고 마라도나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세계 최고의 선수는 로베르토 바조라고 생각한다.
감독이나 평론가, 해설자는 축구를 분석하고 해석해 법칙을 찾아낸다. 그들은 축구를 좁게 만든다. 하지만 바조의 플레이는 감독이나 평론가, 해설자들에게 이렇게 고한다. '축구는 이런 것이다'라고. 바조는 축구를 넓게 만든다.
로베르토 바조는 최고의 이탈리안 판타지스타다. 그는 메아차와 보니페르티보다 더 낫고, 역대 최고 중에 포함된다. 펠레, 마라도나, 그리고 아마도 크루이프 바로 뒤에는 위치하겠지. 무릎 부상 문제가 없었다면 아마도 바조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ㅡ 카를로 마초네
그를 나와 비교하지 마라. 그는 유일무이한 선수다.
ㅡ 디에고 마라도나
그는 마라도나보다 더 생산적이었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리그 내 최고의 넘버 10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보여줄 것이 많으며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ㅡ 미구엘 몬튜오리, 1988/89 시즌의 바조를 두고
그는 이탈리아 축구의 기념비이다.
ㅡ 마르첼로 리피
바조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시대에 흔적을 남겼다.
난 메아차와 리베라가 뛰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역대 최고의 선수는 바로 바조다.
난 메아차를 볼 수 있던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바조의 플레이를 보며 그를 떠올렸다. 바조는 판타지를 지니고 있다.
ㅡ 지아니 브레라(이태리의 원로 저널리스트)
바조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것은 하나의 불행이었다. 그는 브라질에서 태어났어야 했다.
ㅡ 펠레
그는 기술적으로 완전무결하다.
그는 필드안에서 불가능한 일이 없다.
ㅡ 지쿠
그는 완벽한 9.5번이다. 그는 진정한 9번은 아니지만 고전적 10번보다는 더 많이 득점하는 선수다.
ㅡ 미셸 플라티니
1994년 월드컵은 바조와 나의 대회였다.
ㅡ 호마리우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공을 발에 두고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축구계의 몇 안되는 희귀종 중 하나이다.
ㅡ 장피에르 파팽
로베르토 바조는 진정한 축구의 천재였다. 그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어려운 것을 마치 쉬워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플라티니가 말했던 것처럼 9번과 10번 사이의 선수였다. 미드필더도 아니었지만 스트라이커도 아니었다.
바조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를 데리고 있던 코치들이 문제였죠. 그들은 바조와 같은 재능을 다룰 재간이 없었던 겁니다.
바조는 지금까지 함께 뛰어본 선수들 중에서 최고였다.
나는 운이 좋게도 여러 위대한 선수들과 함께 플레이했다. 그 중에서 로베르트 바조는 가장 스페셜했다. 나는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쿠만, 호나우두, 스토이치코프와 함께 플레이했다. 그러나 바조와 같은 선수는 보지 못했다.
ㅡ 펩 과르디올라
내가 겨뤄본 상대 중 최고의 선수는 바로 바조다. 그는 마치 축구가 쉬운 것처럼 보이게 했다.
ㅡ 맷 르티시에
이탈리안들은 그들의 조직력에 엄청난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그들의 영감은 바조로부터 나온다.
ㅡ 데이비드 플랫(유벤투스 시절 팀메이트)
그는 1994 월드컵에서 우리 아일랜드를 상대로 최고의 경기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결국 이내 환상적인 토너먼트를 가졌지. 천재적인 선수야.
ㅡ 데니스 어윈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로베르토 바조로 태어나고 싶다.
ㅡ 파올로 말디니
난 바조를 세컨드 스트라이커가 지금처럼 각광받지 못하던 시절에 태어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히 그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였어요. 지금 우리는 믿을 수 없는 클래스의 선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선수다. 그는 우리 대표팀의 보물이다.
ㅡ 지안프랑코 졸라
정말 천부적인 재능. 또한 선수들을 제치고 수비진을 침투하는데 거대한 능력을 지녔다. 그의 움직임과 기술 때문에 그는 마크하기가 까다롭다. 팀이 언제나 도움을 구하는 선수이다.
ㅡ 알베르트 페레르
당신은 로베르토 바조를 본다. 그리고 이내 좋은 선수란 어떤 선수인지 깨닫게 된다.
ㅡ 라이언 긱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난 축구선수를 보며 운 적이 두 번 있다. 첫번째는 로베르토 바조이고 두번째는 라이언 긱스다.
그는 1994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골을 넣어 탈락시켰지만 그래도 그는 내가 언제나 매우 동경해온 선수임에는 변함이 없다.
ㅡ 라울 곤살레스
바르셀로나에서 인터 밀란으로 이적해 왔던 호나우두도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내가 인터 밀란에서 20년 동안 함께 뛰었던 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단 하나의 이름을 말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로베르토 바조가 되어야 한다. 그는 퀼리티와 열정 사이에서 이상적인 밸런스를 가졌다.
ㅡ 하비에르 사네티
난 말총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계속 이렇게만 플레이해준다면 레게머리를 한다해도 개의치 않겠다.
로베르토 바조는 마치 라파엘로와 같다. 델피에로는 그의 제자이므로 핀투리키오가 된다.
ㅡ 지오반니 아그넬리
천사들은 그의 다리 사이에서 노래한다.
ㅡ 알도 아그로피(당시 ACF 피오렌티나 감독)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우리 팀 최고의 선수다.
ㅡ 아리고 사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바조는 위대한 선수이며 난 그에게 엄청난 관심이 있다.
ㅡ 알렉스 퍼거슨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나는 자원봉사 볼보이로서 체코전에 참가했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미드필더에서 공을 잡아 30미터를 폭풍같이 질주하며 골을 성공시킨 한 선수를 보았다. 나는 그를 보며 커서 꼭 저런 선수가 되리라 다짐했고, 그 꿈을 이룰 기회가 이제 오고 있다.
ㅡ 프란체스코 토티, 2002년 한일 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경기에서 넣은 결승골이 가장 아름다웠고 환상적인 골이였다. 이전에는 바조를 몰랐으나 이 한골과 그의 크고 푸른 눈이 나를 사로 잡았다. 지금도 마음속에 바조가 남아 있다.
ㅡ 마돈나
바조와 같은 축구선수를 만나려면 적어도 앞으로 20년이 걸릴것이다.
바조를 이태리에 그냥 남겨두겠다니, 한마디로 이건 불공평하다. 다른 선수들에겐 주어진 기본적인 기회마저 봉쇄[39] 해 놓았기 때문이다. 바조는 혼자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선수이다.나는 트라파토니의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ㅡ 파올로 디 카니오,바조의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발탁을 촉구하며
축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독자들에게 나는 로베르토 바조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장거리 육상 선수들의 무한한 지구력, 단거리 선수들의 스피드, 러닝백의 밸런스와 포인트 가드의 시야를 모두 지닌 선수이다.
ㅡ 마크 우즈(USA TODAY 스포츠 기자)
로베르토 바조를 볼 때마다 한가지 생각나는 말이 있다.품격과 격조는 시간이 지나도 쇠락하지 않는다.그는 몸소 이 것을 증명하고 있다.
ㅡ 이탈리아 데이터 스포트
그와 처음 그라운드에 선 날 나는 흥분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치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ㅡ 잔루카 잠브로타
바조가 브레시아에서 활약할 당시 그는 다른 선수들이 절대 따라할 수 없는 프리킥을 보였다. 나는 그것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ㅡ 안드레아 피를로
로베르토 바지오와 시합을 하고 난 뒤 너무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ㅡ 안정환
8. 여담[편집]
8.1. 델 피에로와의 비교[편집]
일부 호사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바조와 델 피에로를 저울질하기를 정말 좋아하는 듯 하다. 당장 구글에서 "Baggio vs" 라고 검색해 보면 가장 먼저 뜨는게 "Del Piero"이다. 앞서 적었듯 바조가 한창 멘탈공황 상태일 때 혜성처럼 등장해, 바조와 거의 흡사한 플레이스타일로 소속팀에서든 국가대표에서든 바조를 대체했으며, 자의가 아니겠지만 바조가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모조리 빼앗아갔으니... 심지어 소속팀과 국가대표에서 둘 다 바조의 전유물이자 상징적 번호였던 10번까지 빼앗았으니.
그러나 이탈리아 국가대표에서의 바조의 영향력은 당시 최고의 신성이었던 델 피에로조차도 대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바조 본인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고 델피에로 역시 바조를 정말 존경하고 좋은 사이라며 여러 번 언급했지만... 요즘에도 가끔씩 둘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8.2. 외모[편집]
"아니! 저 미남은 누구야?"
마돈나, 바조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득점한 장면을 보며
"그에게는 여성팬들을 기절하게 하고 동시에 남성팬들을 울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가브리엘 마코티(CNN 스포츠 칼럼리스트)
"바조의 눈빛은 정말 매혹적이다. 많은 여성팬이 그의 눈빛에 감전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기념주화를 한 제조회사 초청으로 흥보대사로 위촉되어 중국 투어 방문을 한 바조를 보고 말한 어느 중국 여성팬
젊은 시절부터 잘생긴 외모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미국의 어느 기자는 바조의 외모를 보고 "여성들에게 인기폭발하게 생겼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마돈나도 바조에게 프로포즈를 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이가 든 현재도 여전히 잘생긴 미중년이다.
8.3. WAGs[편집]
하지만 그런 수많은 여성팬들의 관심과는 다르게 바조는 이미 결혼을 했다. 중학교 동창인 아내 안드레이나 파비랑 1989년에 결혼했으며, 자녀 3명을 두었다. 그리고 지금도 함께 잘 살고있다.
8.4. 기타[편집]
- 참고로 '바지오'는 표기법상 잘못된 표기이고, '바조'가 맞는 표기다.[40] 최근에는 표기법에 맞춰 '바조'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바죠'나 '바지오'로 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표기법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 말총머리 한마디면 다 알아듣는다. 동시기 국가대표 동료 미드필더 디노 바조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말총머리가 주목받았다.
- 월드컵 결승전에서 놓친 페널티 킥으로 인해 바조=PK 삽질이란 이미지가 박힌 듯 한데, 바조는 현역 은퇴할 순간까지 통산 122시도 106골, 약 86%라는 놀라운 PK 성공률을 자랑하는 선수였다. 이탈리아 역대 최고성공률이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그를 능가하는 강심장은 없었다는 소리다. 그저 “하필”이라는 단어밖에는 떠오르지 않던 상황이고 누군가가 손가락질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뼈도 심장도 아팠을 순간이다. 본인이야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바조는 은퇴 후 어느 인터뷰를 통해 이런 토로를 남겼다.
"선수 생활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다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 페널티 킥은 다시 차고 싶다. 그때부터 4년동안 나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었다."
- 은퇴 후 이탈리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으로 일하다가 지난 2010년 노벨 평화최고상을 받았다.[41] 그동안 바조가 미얀마 민주화의 영웅 아웅산 수치 여사의 석방과 아이티 지진 피해자 돕기 등 많은 자선활동을 한 공로를 인정하는 의미인 듯.
- 여담으로 팝의 여왕 마돈나에게 공개 프로포즈를 받은 적이 있다. 마돈나가 자신과 만나달라고 하자 바조는 "나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무덤까지 같이 갈 것이다." 라고 단칼에 거절을 했다. 사실은 1989년에 바조는 안드레이나 파비랑 결혼을 했기 때문에, 마돈나가 결혼한 유부남에게 프로포즈를 한 것이라서, 바조의 입장에서는 마돈나의 무례한 행동에 제대로 대처를 한 것에 가깝다. 현재까지도, 부인과 이혼을 하지 않고 잘 살고 있으니 정말 로맨틱한 남자다.
- 2017년 10월에 유소년 지도자가 되어 중국 북경체육대학교에서 축구학과 대학생 및 석·박사들을 대상으로 유소년 지도 방법 강의를 진행했다. 특히 바조는 ‘운동대뇌(Brain Kenetic)’란 주제로 자신의 경험을 전수했다. 동시에 자체 개발한 연령별 프로그램으로 10세 이하와 14세 이하 선수들을 직접 지도했다. 바조는 마지막 날인 18일 대학교 포럼에서 “현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능”이라며 “앞으로 중국도 이를 간과하지 않는다면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축구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 불교도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정확하게 말하면 SGI(창가학회) 신도. 이것 때문에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에서 그의 개종 루머는 수시로 떠돌았고 "이탈리아인들이 바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설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연을 즐기는데는 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며 자신의 농장에서 사냥을 즐긴다.
-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 귀도 미스타가 모니카 벨루치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 딸 발렌티나 바조가 자신과 제일 많이 닮았다.
- 최근 바조의 근황은 아내 안드레이나 파비와 딸 발렌티나 바조의 인스타그램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 바조의 선수 시절을 다룬 《IL DIVIN CODINO》[42] 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 바조의 프로 데뷔부터 은퇴까지의 여정을 아주 담담하게 그려나갔는데, 로베르토 바조의 팬이라면 판타지스타라는 화려함 뒤에 숨겨진 소탈하면서 인간적인 바조의 또 다른 면을 보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
- 안정환이 루드 굴리트와 더불어서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수가 로베르토 바조였다고 밝혔다.[43] 실제로 페루자에서 뛰던 시절에 같이 바조를 상대했던 경기에서는 너무 감동을 해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뛰었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뽑은 이상형 월드컵 미드필더 부문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모조리 관광보내고, 지네딘 지단을 아슬아슬하게 꺾고 우승했다. 실제로는 지단을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바조와 굴리트를 더 좋아하는 듯 하다. 바조와 함께 식사를 함께 한 적도 있었는데 너무 멋있더라면서 감탄했다고. 솔직히 외모도 자신보다 바조가 낫다고 할 정도이다. 여담으로 안정환의 플레이스타일이 바조와 자주 비교되는 델 피에로와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데 사실은 바조를 동경하는 만큼 그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결승전을 앞두고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승부차기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당연히 현역 시절 자신의 결승전 승부차기 실축 때문이고, 다른 선수들이 그 아픔를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외에 자신의 실축과는 별개로 승부차기에서 3번이나 패배했었기 좋은 기억이 없다고.[44] 하지만 바조의 바람과 정 반대로 결승전은 연장전 끝에 승부차기까지 이어졌고, 킹슬리 코망과 오렐리앵 추아메니가 바조처럼 실축 해버리며 아르헨티나가 우승하게 된다.[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