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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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09년[1]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하얼빈(Харбин)[2] 의 하얼빈역(Харбинский вокзал)에서 대한제국 출신 안중근이 일본 제국의 제4, 6대 내무경, 초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 추밀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
2. 명칭[편집]
이 사건을 두고 대한민국에서는 의거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는 단순히 사살(射殺), 저격, 암살, 그리고(꼭 극우가 아니더라도 사전적 의미 그대로) 종종 테러[3] 라고도 한다.[4]
훙커우 공원 의거 등 무장 독립투쟁도 그렇듯 위키백과처럼 특정 국가의 이익을 대변치 않는 위키에서는 '테러'냐, '독립투쟁'이냐를 두고 유저들이 싸우는 일이 잦다.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지화가 적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당시엔 그게 세계적으로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일본 입장에선 "자기들의 수뇌부를 테러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항일 의병과 일본군이 이미 수 년 전부터 교전 상태였으므로 교전 중인 적국의 수뇌부 인물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적국의 요인을 암살하는 것은 특수부대의 전형적인 특수 작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안중근은 한때 '항일 의병장'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 암살 당시에는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교전을 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국의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 요인 암살 등을 주된 임무로 하는 특수부대는 현대에도 존재하며 교전 중인 적국에 대한 매우 유효한 전술이다. 이미 수 년 전부터 항일 의병과 일본군은 교전 상태였으므로 안중근의 암살은 항일 의병의 일원으로서 교전 중인 적국의 수괴를 사살한 특수 작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요인 암살을 위한 특수전 전문 의병부대를 창설한 뒤 거사에 임했다고 보면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서는 구한말 조선을 침략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 출동을 통한 농민군 학살 및 진압, 1895년 을미사변,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 7조약과 대한제국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 등을 주도하였던 침략의 원흉으로 평가받았지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봉건 막부 정치를 타파하는 계기인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서양과의 교류와 문호를 개방한 주역이자 일본 근대화의 조상이자 아버지로 오늘날의 일본 경제를 부강하게 이끌어 왔던 선구자로 불릴 정도로 칭송받아 왔고 동시에 근대 일본의 초대 수상이라는 점에서도 국가적인 의미를 가진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일 양국이 이 의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서로 상이할 정도로 각각 안중근과 이토가 가해자와 피해자로 뒤바뀌어서 엇갈린다.
2.1. 요약 및 분석[편집]
- 한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 일본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도한 봉건적 막부 시대를 타파하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하여 개혁개방에 앞장섬.
- 1592년 임진왜란 패전 이후 정한론을 주도하여 조선 침략을 주도함.
- 유신을 통해서 일본을 부강한 경제 국가로 이끌고 선진 문물을 들여오는데 큰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받음.
-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현대 일본 정치와 일본 경제의 선구자로 불리며 인정받음.
- 근현대 일본 헌법을 제정한 시조로 인정받음.
- 일본을 서구 열강과 동등한 국가로 만들어낸 선구자로 인정.
- 근대 일본 초대 수상에 취임.
- 현재의 일본 우익들이 우상으로 여기며 안중근을 테러범, 살인범, 흉악범 등으로 평가절하함.
3. 과정[편집]
1905년 초대 한국통감을 지냈다가 막후로 물러나 일본 제국에서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과의 철도 문제, 경제 현안, 러일전쟁 뒷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재상인 코코흐체프와 회담을 갖기로 했고 러시아가 청 제국에게 조차한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이토는 회담을 위해 러시아 측에서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은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해 각자 목표를 정하면서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써넣어 각자 암살에 대한 결의를 다졌으며 이후 10월 21일 안중근은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을 방문하여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 간 경제 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아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했다. 25일 안중근은 거사 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하였다. 1박을 머문 끝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재러시아 한국인 조도선을 만났다. 그는 거사에 동의하였다.
그 중 기차들이 중간에 정차하게 되어서 쉬어간다는 '차이자거우(蔡家具/채가구)역'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거사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문 기사에 이토의 특별 열차도 차이자거우 역에 정차한다는 예상이 나오자 세 사람은 차이자거우로 향하여 기차역 객사(客舍)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철도들의 분기점[5] 인 차이자거우역은 경비가 삼엄해 객사에서 나가 의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데다 러시아 육군 병력이 보안을 이유로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숙소 문을 잠가 버려 탈출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당초에 차이자거우에 왔던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를 위해 우덕순, 조도선에게 차이자거우 거사를 분담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던 상태였다. 만약 이때 안중근마저 객사에 갇혔다면 하얼빈 거사도 실패하였고 이토도 무사히 경제 회담을 마치고 일본으로 살아서 귀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떻게 보면 이들이 객사에 갇힌 게 다행인 게 이들이 기차에 억지로 난입해 의거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면 이토는 회담 장소를 옮기거나 연기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차이자거우에서 거사에 실패한 우덕순, 조도선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성공 이후 차이자거우역 객사에서 러시아 육군 헌병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차이자거우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건너가 드디어 이토와의 운명을 결정할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기차역에 입장했다. 서양인들은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도 서로를 외모로 구별하는 게 힘들다. 인종적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과 러시아인, 중국인들[6] 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육군 헌병 및 청 육군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하러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 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흔들면서 양국 수뇌를 환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 있는 이토를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그르치는가 했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백발에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이토임을 인식했다. 이에 품 속에 있는 권총[7] 을 준비하여 이토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가 러시아 육군 병력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그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바로 이토의 몸을 관통하였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2~3발을 추가로 발포했다.[8] 이토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중근은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들 중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성 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고 총알 한 발을 남겼다.[9][10] #
안중근은 즉시 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다.[11][12]
한편 이토는 총탄을 맞은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져 자신을 수행하던 의사 고야마 젠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20여 분 만에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지는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국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이를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지만 청나라에 있었던 일본 제국 경찰 영사는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겨 버렸다.
4. 결과[편집]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덤덤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등 관련자 3명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된 후 러시아 검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10월 28일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관동주 뤼순감옥으로 이송, 수감되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말했다.
또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라고도 항변하였다.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13]
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罪惡)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죄.[15]둘. 일천팔백구십오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죄.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勒奪)한 죄.
여섯.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16]
일곱.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17]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義士)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죄.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열둘. 일천구백영구년 또 다시 거짓으로 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열셋.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열넷.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통감부 문서 7권[18]
/ 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이후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19] 1910년 3월 26일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20]
거사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얼빈역 개보수로 저격지점에 화단 등이 배치돼 실제 저격 지점을 알 수 없었으나 2006년에야 하얼빈시 철도국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곳에 화살표 모양의 타일을 설치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점에는 마름모 모양의 타일이 배치돼 그때의 일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비 설치 제안에 일본이 반발하자 중국은 아예 안중근 기념관을 건설하였다.
5. 의의[편집]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에 조선 보호론 실현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보호국화의 국제법적 불법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또한 일부 한국인들의 강력한 항일 투지와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기에 일본은 예정대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21]
한편 일본에서는 의거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갔음에도 안중근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특히 놀라운 건 뤼순 감옥의 간수들 중 그의 전담 간수이던 지바 도시치 등 여럿이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일본인임이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22]
6. 여담[편집]
- 일부 일본인 음모론자들은 안중근은 사실 '진범'이 아니며 러시아 측에서 배치한 저격수가 이토를 쏘았다고 주장하는데 이토가 맞은 총탄이 러시아군에서도 사용하는 탄약이고 총탄이 맞은 각도가 수평으로 날아온 것이 아니고 위쪽에서 내려쏘았다는 게 근거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이다.
- 항일 언론 활동을 하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 하얼빈 의거 소식이 알려지자 사옥에 태극기를 내걸고 축배를 들면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