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우/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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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경력
3.1.1. 2005 시즌
3.1.2. 2006 시즌
3.1.3. 2007 시즌
3.1.4. 2008 시즌
3.1.5. 2009 시즌
3.1.6. 2010 시즌
3.1.7. 2011 시즌
3.1.8. 2012 시즌
3.1.9. 2013 시즌
3.1.10. FA 1기
3.1.10.1. SK 입장
3.1.10.2. 한화 입장
5.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정근우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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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 시절[1]

1999년2000년 동기인 추신수, 김백만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고 조성옥 감독의 엄격한 지도가 어우러져 팀은 대통령배 2연패 달성에 성공했다.

2001년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어느 구단에도 프로 지명을 못 받고 고려대로 진학했다.[2] 고려대학교 야구부 정원이 다 차서 럭비부로 입학했다가 나중에 야구부로 간 일화가 있다. 대학 졸업 후 2005년 SK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동갑내기로는 한화의 1차지명 김태균, 롯데의 1차지명 추신수,[3] 2차 1R 이대호, 2R 이우민, SK 1차지명 정상호, 2차 2R 김강민, 4R 채병용, 9R 박재상. 나열한 선수들 전원 2001년 지명자들이다.[4] 또한, SK 입단 동기로는 최정[5]이 있다.

사실 부산고 시절에도 팀의 주장으로서, 팀의 에이스였던 추신수와 함께 부산고의 우승을 이끌었지만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항간에는 추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따른 보복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6] 고려대 졸업과 동시에 받은 지명도 당시 꽤 이른 순번이라는 평가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아무래도 키가 작은 것이 낮은 평가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프로 경력[편집]



3.1.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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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환
(2002)

정근우
(2005~2013)


김재현
(2014~2020)

No.8 정근우
2005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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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991경기 4057타석/3515타수 1057안타 59홈런
377타점 565득점 370BB/394K 269도루
.301/.374/.413 OPS .786 wRC+ 115.7 sWAR 32.16



3.1.1. 2005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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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에 입단한 2005년 데뷔 당시[7]

2005년 데뷔 시즌에 개막전 선발로 출전하기도 하는 등 기대를 받으며 1군에 얼굴을 보였지만 52경기에서 타율 .193를 기록하고 수비에서도 불안함을 보이는 등 기대에 밑도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이 시기엔 아마시절 봤던 3루수로 주로 출전했다.


3.1.2. 2006 시즌[편집]



작년의 부진을 딛고 2년 차인 2006년부터 실력을 발휘하며 팀의 톱타자와 주전으로 도약했다. 그해 2할8푼대의 타율과 45도루라는 호성적을 거두면서 시즌 후 골든글러브까지 수상에 성공했다. 하지만 팀 성적은 좋지 못해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출전하기도 했다.

2006시즌 초반까지는 전년도의 수비 불안으로 중견수와 좌익수로 주로 출전했다가 정경배가 이탈하자 주전 2루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3.1.3. 2007 시즌[편집]


2007년 김성근 감독 취임후 상승하는 팀 성적과 함께 정근우의 실력도 일취월장하기 시작한다. 도루수는 2006년보다 거의 반으로 줄었지만 타율을 끌어올리면서 3할2푼대의 타격을 과시하며 리그의 괜찮은 2루수 수준에서 공격형 유격수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다만 유격수로서의 수비는 불안하여 두산 베어스에서 유격수 나주환의 영입을 통해 2루수로 돌아오며 공수에서 더욱 안정감을 찾았다.

2007년 8월 11일 끝내기 홈스틸을 기록한적이 있다.

그러나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과 만난 SK는 몇 번의 위험한 장면으로 구설수에 오르는데, 특히 이때 도루시에 스파이크 날을 세우고 주루 플레이를 하는 모습과 수비시 도루하는 이종욱의 발을 잡는 위험한 행동으로 일명 발근우란 좋지못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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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우는 불타는 그라운드에 출연하여 이 당시 상황을 말했는데, 그 해 팀 사정상 유격수 자리에 피치못하게 들어가게 된 정근우가 '거리 감각이라든지 수비할 때의 위치 선정, 주자에 대한 대처방법 등의 경험 부족으로 본의 아니게 좋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됐다'고 말하면서 이종욱 선수에게 고의가 아니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 때는 감정적으로 서로 부딪혀서 굉장히 사이가 안 좋아보였는데, 그 이후로 국가대표팀에서 서로 같이 뛰어서 그런지 지금 보면 서로 못생겼다고 놀려대고 농담따먹기나 하는 친한 사이로 보인다.

흥미로운건 오직 이 해의 유격수 임팩트 때문에 정근우를 유격수 자원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정작 본인은 이 시즌 트라우마 때문인지 시즌 이후 KBO 리그에서는 단 한 차례도 유격수를 본 적이 없다. 예로 2014년의 유격수 출전논의 해프닝이라던가 2015년 전지훈련에서 유격수 훈련 중 부상 정도가 유격수 정근우에 관한 소식의 전부다. 덧붙이자면 실험은 실패했는지 멀티포지션 좋아하던 그분이 한화에 있는 동안에도 가끔 외야로나 돌았지 기어이 유격수 수비는 맡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인 커리어에는 상당한 도움이 됐는데 이후 국대에 선발 될 때마다 감독들이 한결같이 "2루는 기본이고 유격과 3루까지 맡길 수 있는 멀티 자원"으로 중용했기 때문. 실제로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예선전에서 박진만, 김민재의 컨디션 난조로 인해 정근우-고영민 키스톤 콤비라는 조합이 실행된 바 있으며 2009 WBC에서도 정근우 최정이 유격수 백업 가능한 점이 부각되며 승선했다. 2009년 커리어하이를 달성한 이후에는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에서 2루수에 단독으로 발탁[8]되는 등 주전으로 자리잡아 유격 수비 능력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어버렸다.


3.1.4. 2008 시즌[편집]


비난 속에서 맞이한 08시즌이지만 정근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결국 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예선 첫 경기인 미국전 9회말 7:6으로 뒤진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한 정근우는 미국 투수 스티븐스를 상대로 풀카운트까지가는 접전끝에 2루타를 때려내고, 뒤를 잇는 김현수의 땅볼로 진루하여 3루까지 안착. 1사 3루 상황에서 이택근의 2루수앞 땅볼을 재치있는 주루 플레이로 홈인. 사실 2루수의 송구가 너무 빗나가는 등 운이 좀 따랐다. 7:7 동점을 만들며 8:7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음 캐나다전에서도 경기의 유일한 득점이자 타점을 솔로 홈런으로 만들었다. 이 경기는 류현진의 완봉. 이후 한일전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기가막힌 슬라이딩을 보여주며 활약하였다. 첫 시합을 짜릿한 역전승으로 장식한 한국은 결국 전승우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니, 이러한 활약을 한 정근우는 금메달의 주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야갤에서 비매너 플레이에 대한 까방권을 주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발동되지는 않는 것 같다. 허나 베이징 올림픽 전에는 마구잡이로 까였지만 이러한 활약을 펼친 다음에는 확실히 전보다는 덜 까인다.

금메달과 함께 병역혜택이라는 기분 좋은 선물을 받게된 정근우는 리그에서도 좋은 모습을 계속 보여주며 또다시 두산과 맞붙은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2008년 시즌의 타율은 3할1푼대로 조금 떨어졌지만 40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며 역시 좋은 활약을 펼쳤다.


3.1.5. 2009 시즌[편집]



시즌 개막 전 열린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참가하여 고영민과 함께 번갈아가며 2루를 지키며 한국을 결승까지 이끌며 또다시 리그 정상급 2루수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켰다.

2009년 시즌에 3할5푼대의 타율과 46개의 도루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고있는 정근우는 상대팀에게도 부담이 되는지 프로 데뷔 이후 가장 많은 사구를 기록중이고,[9] 9월 8일 경기에서는 2개의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해 고의성이냐 아니냐를 두고 여러 게시판에서 병림픽을 펼치기도 했다. 속칭 컨트롤 아티스트 서재응이 던진 볼이기에 그랬고 또 사구를 맞은후 좋지 못한 분위기로 흐른 투수와 타자의 신경전 때문.

이 와중에 디씨솩갤에서는 멋진 짤이 하나 탄생되기도 했다. 보이그룹 2PM택연과 비교한 짤은 프로야구 카툰을 그리는 최불암에게도 영향을 미쳐 불암콩콩코믹스의 자료가 되기도 했다.

서재응과의 신경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9 한국시리즈 3차전. 서재응이 던진 볼을 정근우가 때렸지만 바로 투수 강습. 하지만 바운딩 처리되면서 서재응이 다시 1루에 던지면 상황 종료였으나, 서재응은 무슨 이유에선지 1루로 몇 발자국 걸어가면서 공을 슬슬 1루로 토스. 정근우는 뛰다 걷다를 반복하다가 서재응의 제스처에 서재응을 빤히 응시했다. 서재응은 정근우가 빤히 쳐다보자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으로는 '뭘봐 이 삼시세끼XXX야' 하며 응수, 쳐다보다 욕먹은 정근우는 지지않고 노려보며 응수. 일촉측발의 상황에서 최희섭이 1차로 만류하며 상황이 종료되는 듯 싶었으나, 양 팀 선수들이 뛰어 나오면서 벤치 클리어링. 그 와중에 기아의 고참급 선수인 이종범과 특히 김종국이 당사자들보다 더욱 더 화를 내면서 응수했다. 그 덕에 야갤에서 대량의 짤방이 만들어졌다.

2009시즌에 최다안타 타이틀도, 타격왕 타이틀도 못 딴 아쉬움을 담아 둘째 아이의 태명을 '히트'라고 정했다고 한다. 3월 17일 출생으로 남자아이. 이로서 벌써 애가 둘이다.

최종성적은 타율 .350 9홈런 53도루 168안타[10] 59타점으로 명실공히 SK 와이번스의 중심 중의 중심 역할을 했다.

여담이지만 마구마구에서 이 시즌의 엘리트 카드가 나왔다. SK 와이번스 사상 최초의 엘리트 카드.

그리고, 고교 동기 투수 김백만을 1군 콜업 하루 만에 다시 2군으로 보내버리는데 일조했다."친구 (김)백만아, 미안하다"


3.1.6. 2010 시즌[편집]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에도 무난히 선발되었다. 첫 경기인 대만전에서 3타수 3안타 2볼넷 1타점 2득점 100% 출루로 맹활약했다. 광저우로 오기전에 치른 슝디 엘리펀츠와의 경기에서 지독하게 부진한 모습을 보인 것에 '일부러 안 친 것'이라는 변명성 개드립을 쳤는데, 결과적으로 사실이 되었다.(?)

만약 해외 진출을 한다면 미국에 가고싶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시즌 성적은 타율 0.305 33도루 75득점을 기록했고 팀은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통산 세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3.1.7. 2011 시즌[편집]


11시즌 4월 16일에 김영민에게 헤드샷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단 CT 검사 결과로는 탈은 없다고 한다.

4월 20일 투런 홈런을 쳐서 이대수와 함께 홈런 공동 1위가 되었다.

2011년 옆구리 부상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지는 못하였으나 3할 타율은 기록했다.

하지만 일부 팬들에게서 타자로서의 가치(상위타순, 특히 1번으로서의)에 대한 지적이 나왔는데, 타자로서의 주요 능력인 선구안이나 컨택 능력이 조금 부족한데다 대책없는 초구사랑(...)으로 인해 상대 투수 투구수를 줄여주면서 중요한 상황에서는 삽질한다는 것. (ex. 득점권에서 초구 병살) 시즌 전체로 보면 병살은 예전 시즌과 크게 늘어나지 않았고 볼넷도 출장경기 비율을 생각하면 평균적인 커리어 수준. 다만 선구안에서 톱클래스 1번 타자인 이용규, 이종욱에 비해, 그리고 커리어 하이 시절에 비해서 볼넷과 삼진 비율이 조금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시즌 성적은 0.307 60득점 40타점을 기록하여 5년 연속 3할을 달성했지만 장점이었던 도루는 20개를 성공하며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고있다.

KIA 타이거즈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17타수 9안타 1볼넷 1사구(死球) 3도루 6득점 타율 .529, 장타율 .529, 출루율 .579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하여 안치용을 1표 차로 제치고 준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하였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에도 22타수 7안타 1볼넷 1타점 1득점 타율 .318, 장타율 .364, 출루율 .348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 들어와서는 매우 부진하여 팀 공격 자체가 난맥에 빠져 한국 시리즈 우승을 삼성에게 넘겨주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한국시리즈에서 정근우가 기록한 성적은 20타수 5안타 2볼넷 0도루 1득점 타율 .250(...), 장타율 .300, 출루율 .318. 거기다 삼진도 무려 6개나 당했다. 말 그대로 정근우 답지 않은 최악의 부진. 특히 3차전까지 정근우의 부진은 절정에 달했다. 그나마 4차전부터는 볼넷도 2개 기록하고 안타도 3개 더 추가하였지만, 이미 시리즈 향방은 삼성에게 넘어간 뒤라서 한국시리즈에서의 정근우의 때늦은 활약은 더욱 아쉬움을 더하고 말았다.

결국 2011년 포스트시즌 성적은 59타수 21안타 4볼넷 1사구(死球) 3도루 1타점 8득점 타율 .356, 장타율 .390, 출루율 .406


3.1.8. 2012 시즌[편집]


기대에 못미치는 활약을 보이며 너무 부진해서인지 항목 갱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9월 기준으로 타율이 .266. 데뷔 시즌 제외하고 최악의 성적. 수비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타격에서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8월부터는 톱타자의 자리를 김강민에게 내주었다.

8월 22일, 한화 이글스와의 11회 말 연장접전을 끝내는 벼락같은 만루 기습 스퀴즈 번트를 성공시켜 경기를 종결시켰다. 이는 31년 프로야구 사상 통산 23번밖에 없던 대기록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스퀴즈 번트는 기록에서 안타 처리되었다.[11]

9월 1일, 두산 베어스와의 3~4위권을 다투는 중요한 일전때 1번 타자로 선발 출장하였다. 그리고 김선우에게 벼락같은 1회 말 선두 타자 초구 홈런을 작렬했다. 재미있게도 정근우는 작년 시즌 1회초 선두 타자 초구 홈런를 날린 적도 있다는 것이다. (2011년 10월 3일 삼성전 차우찬 상대) 정근우는 이날 6타수 4안타 1홈런 1타점 2득점의 좋은 활약을 보였다.

2012 포스트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팀의 승리를 이끌어 플레이오프 MVP가 되었다. 안정된 수비와 함께 18타수 8안타 타율 0.444, 3도루로 맹타를 기록했다. 팀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4타수 4안타 1볼넷으로 100% 출루로 팀의 공격을 주도한 것이 활약의 백미.

한국 시리즈에서도 유감없이 활약했다. 1, 2차전은 다른 타자들은 침묵한 가운데도, 근우 와이번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혼자 치고 뛰고 야구했다. 두 경기에서 7타수 4안타 1홈런 1타점 3득점 1도루로 팀의 4득점 중 3득점이 정근우의 발에서 나왔다. 3차전 역시 침묵하던 SK 타선을 폭발시킨 것은 정근우였다. 이날 5타수 3안타 1타점 2득점 1도루를 기록. 3차전까지 타율이 무려 0.583(12타수 7안타).

하지만 4차전부터 무안타를 기록하는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더니, 잠실에서 벌어진 5, 6차전에서마저 8타수 무안타라는 최악의 부진으로 일관하여 팀 공격 자체가 난맥에 빠져들고 말았다. 결국 팀은 5, 6차전 도합 1득점(9실점)으로 삼성에게 스윕당하고 말았다. 한국 시리즈에서의 정근우의 기록을 잘보면 1~3차전에서의 기록과 4~6차전에서의 기록이 과연 같은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극명하게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12]

2012 한국 시리즈에서 정근우가 거둔 기록은 24타수 7안타 타율 0.292 2타점 5득점 2도루였다. 단순한 지표를 보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한 것 같지만, 앞서 언급하다시피 3할에 육박한 타율과 타점, 득점, 도루 등 모든 공격지표가 1~3차전에만 쏠려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상대팀 톱타자 배영섭이 전체적으로 기복없는 활약으로 0.409의 타율을 기록한 것과 마지막 6차전에서 5타수 3안타로 맹활약을 한 사실을 감안하면, 톱타자 싸움에서 SK가 패한 점이 시리즈 패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3.1.9. 201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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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권의 뒤를 이어 SK 와이번스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를 고사했으나 "정권이를 도와주라"는 이만수 감독의 말에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팬들의 반응은 이번 시즌을 마치면 FA를 맞는 정근우에게 주장 자리에까지 앉히는 것은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과 환영한다는 의견으로 갈린 듯.

정말 부담때문인지, 시즌 초반에는 2할 6푼대의 타격과 어깨 부상으로 FA를 망치는가 싶더니 6월 6일에 부상 복귀한 이후 살아나며 팬들이 바라는 정근우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6월 20일 삼성 라이온즈 진짜 홈런을 터뜨린 데 이어, 21일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는 9회 끝내기 결승타를 치며 5-4 역전승을 견인했다. 6월 25일 기준으로 부상 복귀 후 타율 0.301 23타수 7안타 1볼넷 2타점 4득점 4도루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6월 30일 LG 트윈스 전에서는 KBO 역대 66번째로 통산 10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다.

7월 4일 기준 동군 2루수 올스타 1위를 달리는 중. 0.283의 타격으로 타격 전체 24위에 랭크되어 있지만 2루수 중에서는 2위(...). 1위인 허경민과도 그렇게 차이는 안난다. 7월 11일 삼성 라이온즈 전에서는 윤성환을 상대로 선두타자 홈런을 터뜨렸다. 7월 17일 넥센 히어로즈 전에서는 좌중월 홈런을 터뜨렸다. 7월 27일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 김사율 상대로 시즌 8호 홈런을 기록한 데 이어, 8월 1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는 노성호 상대로 9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뜬금없이 등장한 오재원에게 2루수 타율 1위를 뺐기나 싶었는데 부진하며 결국 2루수 타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8월 31일 기준 0.280로 30위에 위치해 있지만 2루수 중에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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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는 명백한 헛스윙을 하고도 파울 타구라고 우겼지만 느린 비디오로 누가 봐도 헛스윙 삼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근우는 끝까지 파울이라 주장하였으나, 삼진으로 물러났다. 여기까지만이라면 그저 착각해서 그런 것이라 넘어갈 수 있었지만[13] 괜히 밴 헤켄에게 도발하는 모습을 보여 넥센팬들에게 까였다. SK팬들조차 정근우를 감싸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창피해하는 동시에 밴 헤켄의 묵묵한 반응을 칭찬했다. 참고로 당시 포수는 허도환. 여담이지만 정근우와 허도환은 후에 한화 이글스에서 동료가 된다. 그리고 은퇴 후 출연한 스톡킹에서도 여전히 밴 헤켄 탓을 하고 있다.

시즌 최종성적은 112경기 407타수 114안타 9홈런 35타점 64득점 28도루 50볼넷(7사구) 48삼진. 타출장 0.280/0.368/0.408으로 한창때의 모습보다는 낮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안치홍과 서건창이 타격에서 완전히 망했고 허경민은 부상으로 규정타석도 못 채운 덕에 2루수 골든글러브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있다. 수비도 시즌 초반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것(34경기 4실책)에 비하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2013 시즌 2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되었지, SK에서의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3.1.10. FA 1기[편집]


2013년 시즌 종료 후 예상대로 FA 신청을 했다. SK팬들은 이만수가 살아남은 이상 100퍼센트 나간다고 체념했고 아니냐 다를까 정근우 역시 이런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다며 시장에 나가보기를 원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뜬금없이 런닝맨에 나온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류현진 특집에 초능력 야구를 찍기 위해 나왔다고 하며, 이병규, 김현수, 신경현 등 전&현직 다른 야구선수들도 나온다. SK팬들은 정근우의 런닝맨 출연에 '뭥미?'하는 반응이 대다수다. 한참 구단과 FA 협상하는 중요한 시기에 예능 출연이라 그런 듯. 그런데 소문과는 달리 런닝맨에는 나오지 않았다. 단순 루머였는지 나오려다가 일정이 맞지 않아 취소된 것인지는 불명.

마지막 내부 협상일인 16일까지 구단과 만남을 가졌지만 결국 정근우와 구단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며 정근우는 이용규와 함께 FA 시장에 나오는 선수가 됐다. 구단은 정근우에 4년 70억을 제시했으나 정근우는 최소 80억원을 요구하여 양측의 마지막 협상도 그렇게 결렬.[14]


3.1.10.1. SK 입장[편집]

이런 협상의 결과에 상당수의 SK팬들은 아무리 거품이 많이 낀 FA 시장이라지만 70억도 많은데, 어떻게 '최소' 80억을 요구하냐며 황당하고 실망했다는 반응이 대다수. 여기서 요점은 악명높은 SK 프런트가 70억을 제시했다는 것[15]과, 정근우가 '최소' 80억을 요구했다는 것.[16] 당초 협상이 결렬되면 프런트가 돈을 적게 제시했겠거니 하고 생각하던 SK팬들 대다수는 높은 금액을 제시한 SK 프런트에 놀라고, '최소' 80억을 요구한 정근우에 실망했다. SK팬들 사이에서는 이만수가 있기 때문에 만약 떠난다 해도 미련없이 보내겠다, 할 말없다는 말들이 오갔으나, 막상 정근우의 터무니없는 80억 요구에 전의 '믓근신', '두두기' 등의 별명으로 불렀던 SK 와이번스 갤러리를 중심으로 야구 커뮤니티들에서는 멘붕한 팬들의 분노와 분열이 이어졌다. 특히 댓글북까지 만들어주며 잔류를 희망했던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는 '구더기', '씹근우', '좆근딱' 등의 욕설로 까는 중. '칰지어'로도 불린다.

결국 우선협상이 끝난 다음날인 11월 17일 한화와 4년간 계약금 35억원, 연봉 7억원, 옵션 7억원 총 70억에 계약했다. 옵션 등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지만 SK 프런트는 옵션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밝혔다.[17] SK 팬들은 정근우가 되지도 않는 변명[18]을 한다고 정근우를 깠다. 아내까지 끌어들이면서 한화로 가는 이유를 둘러댄 정근우를 보며 SK팬들은 작년 홍성흔이 생각난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 적어도 정근우가 SK란 팀 자체에 마음이 떠났다는 점은 확실한 듯하다.

이적 이후 이용규와 함께 한 첫 인터뷰에서 "SK에서 나태해졌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고 한화가 적당한 팀이었다"는 발언으로 SK 팬들을 뒷목 잡게 하는 말을 했다.

한편 SK는 한화에서 정근우의 FA 보상선수를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보상선수 지명을 포기하고 연봉 300%에 달하는 보상금액만 받기로 결정했다. 한승택 말고는 건질 선수가 없었는데 KIA가 먼저 가져가버렸다.

이 이후로 옆나라에서 이런 비슷한 상황이 펼쳐젔는데 정근우에 비하면 엄청 매운맛이다.


3.1.10.2. 한화 입장[편집]

구단이 소위 류현진 머니로 이미 많은 실탄을 보유한 상태라, FA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어진 정근우의 영입 소식에 많은 한화팬들이 쾌재를 불렀다. 특히 고질적인 내야 수비 불안이 문제이던 한화로서는 정근우가 내야 수비의 사령관적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입장. 이로써 한화는 이용규-정근우로 이어지는 소위 국가대표급 테이블 세터를 보유하게 되었다.

더불어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던 정근우-김태균의 친구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팬심도 있었다. 실제로 정근우의 한화 입단식에서 김태균이 환하게 웃으며 꽃을 건네주기도 했다.


3.2.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fff [[한화 이글스|한화 이글스]] 등번호 8번}}}
오재필
(2013)

정근우
(2014~2019)


노시환
(2020~)


파일:정근우 한화 160720.jpg

한화 이글스 시절 정근우


3.2.1. 201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2. 2015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2015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즌 시작 전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빠지는 등 시작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홈런, 타점, 득점 커리어 하이 기록을 세우는 등 맹활약했다.[19]


3.2.3. 2016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201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2016 정근우.jpg


20-20까지 홈런 단 2개가 부족했지만 지난해 경신한 홈런, 안타, 타점, 득점 커리어 하이를 재경신하고 7년 만의 득점왕[20]까지 수상하였다. 하지만 2루수 골든글러브는 서건창이 수상하면서 3년 만의 골든글러브 수상은 실패했다.

KBO 최초의 11년 연속 20도루 기록도 달성하였다.


3.2.4. 2017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2017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부상 회복이 덜 되었는지 전에 없던 실책을 자주 기록하고 있었지만, 공격 면에서는 2017년 5월 5일 kt전에서 정성곤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쳐내는 등 상당히 활약했다. 12년 연속 20도루는 실패했지만 사실상 정근우의 마지막 전성기 시즌이었다.

2017년 6월 14일 SK 전에서 문승원을 상대로 통산 100호 홈런을 쳐냈다.


3.2.5. FA 2기[편집]


2013년 첫 FA로부터 4년 뒤 두번째 FA를 신청한다. 4년간 모범 FA로 불릴만한 성적을 냈으나 한화 측에서는 자체적인 분석 시스템과 구단 기조 등을 들어 2년 이상의 장기계약은 절대 불가함을 공언한다. 해를 넘기면서 이적 가능성이 밤톨만큼이라도 남은 다른 구단들은 전부 전력구상을 마쳐버렸으며, 현실적인 이적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협상의 키는 구단측이 쥐게 되었다. 박종훈 단장은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해를 넘긴 협상은 1월 중순이 끝나도록 일말의 진전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이전트 없이 직접 협상하겠다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던 정근우도 구단측의 입장에 진전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에이전트를 선임, 본인은 하와이에서 몸을 만들기로 한다. 기사와 같이 한화는 여전히 2년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총액을 제시했고, 정근우 측에선 계약 규모는 다음의 얘기고 일단 계약기간에 대한 협상을 원하고 있다. 이때까지 양측은 3~4회 의견을 교환했으나 2년을 두고 각자의 강경한 입장만 재확인하고 물러난 셈이라 정근우의 말을 빌리면 협상다운 협상은 열리지 않았다고.

이 와중에 1월 16일, 비슷한 처지이면서 선배인 기아의 김주찬이 2+1년 총액 27억원의 FA계약서에 사인하면서 노장으로서 큰 금액을 거머쥐고 ‘미계약자 단톡방’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우승 프리미엄이 더해진 계약조건이긴 하지만 더 어리고 건강하며 역대 최고의 커리어를 가진 2루수인 정근우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날 수 있는 뉴스였다. 한화 팬들은 정근우의 계약 가이드라인이 못해도 김주찬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구단측에서는 나름의 기준과 운영 플랜을 갖고 제시한 안이라는 이유로 반응하지 않았다.

스프링캠프가 다가오면서 어떤 식으로든 계약이 결판이 날 것이라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적 가능성은 없고 양측은 물러서지 않고 있지만 계약이 이정도로 늘어져 ‘필요한 전력’이라고 묶어둔 주축 고참이 캠프에 가지 못하는 것은 구단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라는 듯. 하지만 어디까지나 급한 쪽은 선수이므로 다수의 언론사가 2년 계약 성사를 점치고 있다.

[오피셜] 한화, FA 정근우와 2+1년 총액 35억원 계약 완료

2018년 1월 24일,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재계약에 성공했다.


3.2.6. 2018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2018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2018 정근우.jpg


2루수 자리를 정은원에게 내주고 첫 1루수 시즌을 보냈다.


3.2.7. 2019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2019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화에서의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3.3. LG 트윈스 시절[편집]


{{{#fff [[LG 트윈스|LG 트윈스]] 등번호 8번}}}
김용의
(2019)

정근우
(2020)


이주형
(2021)


파일:20201108501547.jpg

2019년 11월 20일 있던 2차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LG 지명을 받고 팀을 옮겼다. 상당히 충격이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지만 본인은 그동안 신경써준 한화 이글스와 자신을 선택한 LG 트윈스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편 과거 빈볼시비를 일으켰던 정찬헌이 LG에 여전히 뛰고 있으니 조인성심수창처럼 참된 약속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중이다.[21] LG에서는 내야가 약한 팀 사정상 2루수로 출전할 것으로 보인다.[22] 아니면 페게로와 재계약하지 않고 정근우를 1루수로 쓸 수도 있기는 한데, 그러려면 2루수가 가능한 홈런 타자 용병을 영입하는 매우 어려운 미션이 주어진다.[23][24]

본인은 2루수에 대해 여전히 자부심이 있고 미련이 많이 남았던듯. 류중일 감독이 정근우와 상견례를 한후 "세칸(2루) 되제?" 라고 묻자 힘차게 된다고 답한후 다시 2루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고 한다. 나이가 많으니만큼 풀타임은 확실히 무리이고 정주현[25]과 적절히 번갈아서 2루를 본다면[26] 체력적으로 무리가 없고 기용 효과가 클 것이다. 아니면 최재원이나 구본혁 등을 2루수로 선발 출장시킨뒤 중요한 순간 대타로 내는 방법도 있다.


3.3.1. 2020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2020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2020정근우.jpg


LG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즌이자,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면서 현역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4.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국가대표 정근우.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근우/선수 경력/국가대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장타율
출루율
wRC+
2005
SK
52
88
.193
17
2
0
0
5
11
4
8
.341
.304
16.2
2006
120
430
.284
122
19
4
(4위)
8
42
69
45
(2위)
40
.402
.342
113.0
2007
111
341
.323
(4위)
110
24
2
9
44
62
24
41
.484
.395
149.1
2008
124
491
.314
154
(2위)
20
4
8
58
73
40
(3위)
49
.420
.373
122.6
2009
127
480
.350
(5위)
168
(2위)
29
4
9
59
98
(1위)
53
(2위)
78
.483
.437
(5위)
145.9
2010
128
485
.305
148
(4위)
25
2
2
48
75
33
(5위)
55
.377
.375
97.6
2011
90
326
.307
100
19
0
6
40
60
20
42
.420
.384
118.4
2012
127
467
.266
124
13
4
(4위)
8
46
53
22
53
.362
.339
100.5
2013
112
407
.280
114
19
3
9
35
64
28
57
.408
.368
107.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장타율
출루율
wRC+
2014
한화
125
464
.295
137
28
5
6
44
91
32
75
.416
.391
101.7
2015
126
468
.316
148
30
2
12
66
99
21
69
.466
.403
119.2
2016
138
575
.310
178
31
2
18
88
121
(1위)
22
69
.464
.381
112.5
2017
105
391
.330
129
22
0
11
46
73
6
42
.471
.392
120.4
2018
102
375
.304
114
24
1
11
57
63
6
46
.461
.377
111.8
2019
88
277
.278
77
10
1
3
30
37
8
24
.354
.334
94.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장타율
출루율
wRC+
2020
LG
72
154
.240
37
4
0
1
14
23
7
19
.286
.322
64.5
KBO 통산
(16시즌)
1747
6219
.302
1877
319
34
121
722
1072
371
767
.422
.376
112.0

[1] 사진에서 알 수 있듯 고등학교 시절에는 등번호를 8번이 아닌 16번으로 사용했다.[2] 고려대 입학을 앞두고 부산고가 고려대와 연습경기를 했는데 조성옥이 '너 꼭 고대에 가야한다'면서 1번타자로 이름을 올렸고 그날 정근우는 3안타를 쳤다고 한다. 동아대, 동의대, 경성대 등 부산지역 대학들의 오퍼를 받았으나 서울에서 뛰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고 밝혔다.[3] 알다시피 입단을 거부하고 미국에 갔다.[4] 특히, 1982년생 부산 출신 선수들이 많다. 같은 부산고 동료인 추신수와 김백만, 라이벌 경남고이대호장기영, 부산상고채태인, 이승화, 차정민, 경남상고김경언, 백승룡, 송산, 김덕윤, 부산공고이명우 등. 이명우는 1982년생이나 수술로 1년을 유급하여 이들보다 늦게 졸업했다.[5] 빠른년생 고졸이자 1차지명[6] 같은 부산고의 김백만은 2차 1라운더로 한화 이글스에서 계약금만 2억원을 받았던 걸 볼 때 신빙성은 낮다.[7] 사진 촬영지는 현재는 없어진 SK 드림파크이다.[8] 2루 백업, 정확히는 내야 전천후 조커로 조동찬강정호가 역할을 맡았다. 막상 강정호는 부진한 최정을 대신해 3루수 주전으로 나와 13타수 8안타 3홈런이라는 공격의 핵심으로 활약했다.[9] 그래봤자 최정에 비해서는 그냥 버로우지만.[10] 이 기록은 역대 2루수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으로 2014년 서건창이 역대 최다 안타인 201안타를 기록하며 넘어선다.[11] 다만 아쉬운 것이 한화 내야수들은 전진 수비를 하고 있었고, 한화도 11회 초에서 스퀴즈 번트를 시도했기 때문에(실패했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2루 주자 최정이 끝내기임을 직감하고 거의 뛰지 않았기 때문에 한화 입장에서 침착하게 1루->3루 병살을 노려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안승민은 무기력하게 공을 포수에게 토스해버렸고, 경기는 끝나버렸다. SK 와이번스와 한화 이글스의 여실한 기본기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 장면으로 꼽을만하다.[12] 주지하다시피 3차전까지 정근우의 타율은 0.583였다. 하지만 4차전부터 6차전까지 의 타율은 0이다(...).[13] 실제로 이런 상황이 가끔씩 있긴 해서 막상 보면 차이가 심한데도 스쳤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14] 이 둘 외에 손시헌, 이종욱, 최준석도 두산과 협상이 결렬되며 FA 시장에 나왔다.[15] 당초 SK팬들은 협상이 오래가자 50억~60억 정도만 가지고 협상하려 했을 것으로 짐작했다.[16] 협상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팬들도 대다수.[17] 세밀하게 분석해보자면 한화측에서는 세금을 뗀 기준으로 70억, SK측은 그냥 70억을 얘기했을 가능성이 높다.[18] 80억은 감정이 상해서 그냥 불러본 것이라든가, 고려대 선배가 직접 찾아와서 감명받았다고 하는데, SK 단장인 민경삼도 고려대 출신이다.[19] 특히 홈런의 경우 생애 첫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20] 121득점, 개인 첫 100득점 이상 기록.[21] 일단 정찬헌 측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 '곧 뵙겠다'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본인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경기 중에 있었던 일이며, 모두 잊었다. 착한 후배일 것'이라는 인터뷰를 남겼기도 했고. 얼마 후 "반갑다. 잘 지냈냐?"는 인사를 정근우가 했다는 걸 보면 화해한 듯..[22] 류중일 감독이 정근우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이 "쎄컨(2루수) 되제?" 라고 한다(...)[23] 사실 안치홍은 시즌 중반 손바닥 부상 이후로 좀처럼 보기 힘들어졌고, 벌크업 이후 수비 면에서 불안한 면이 많아진 데다 공인구 변경 후 홈런 수가 급감했기 때문에 차라리 정근우를 2루수로 쓰자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정근우도 한화 시절부터 노쇠화가 찾아왔고 최근 2년 정도 2루수 수비를 거의 본 적이 없는 점을 미루어보아, 외부 FA로 오재원이나 김재호를 데려와서 2루에 앉혀놓고 정근우를 1루수로 기용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두 선수도 1985년생(오재원은 빠른 1985년생이다.)이고 서서히 노쇠화가 오는게 보이긴 하는지라 이 대안으로만은 해결책이 확실히 나오진 못하고, 보상선수 문제 때문에 구단에서 만 34세의 두 선수 중 한 명 이상을 영입할 가능성은 낮다.[24] 이 과정에서 정근우가 한화에서 정은원을 기용하게 위해 2루수 자리에서 밀려 포기하게 되었다는 식의 말이 퍼졌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정근우로 인해 정은원이 기용되었던 것이다. 17시즌 부터 정근우는 서서히 노쇠화가 오고 있었고, 18시즌엔 나오기만 하면 실책을 하다보니 부상이 아닌 수비 부진을 이유로 2군행을 지시받을 정도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아무리 부진해도 같은 지타 요원인 이성열이나 김태균보다 발도 훨씬 빠르고 3할 가까이 치는 타격 능력도 있던 덕에 외야나 1루 수비를 시키면서라도 어떻게든 써보려고 했을뿐. 본인도 20년 초 인터뷰에서 기회를 받았을 때 본인이 못했던 탓이라고 밝혔다.[25] 혹은 최재원이나 구본혁 등[26] 144경기 기준으로 절반을 나눈다면 72경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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